2018년, 이 책 찜했어/ 김지훈 한겨레 기자
올해는 좀 마음 놓고 책에 빠져들 수 있을까? 지난 박근혜 정부 때는 세월호 참사와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슬픔과 분노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조차 힘겨운 때가 많았다. 지난해까지도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 대선, 적폐청산 같은 큰 사건들로 시민들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느라 바빴다. 무술년, ‘황금 개의 해’인 올해는 평창올림픽과 지방선거, 개헌이 예정되어 있다지만, 지난 2년간의 고생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젠 좀 마음 놓고 책읽기의 즐거움에 푹 잠길 수 있는 시간이 온 걸까. 올해도 <한겨레>는 독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책 출간 소식을 모았다. 지난해 32개에서 올해 40개로 출간 계획을 조사한 출판사 수도 대폭 늘렸다. ‘다 똑같이 사랑스러운 자식 같은 책들 중에 어떻게 한권만 뽑겠나’라는 마음으로 여러권을 보내온 출판사도 꽤 있었지만, 강권해 한권씩만 추천받았다. 대다수 제목은 가제다.
스케일로 압도한다, 역사책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유발 하라리가 과거(<사피엔스>), 미래(<호모 데우스>)에 이어 현재를 다룬다. ‘민주주의는 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는가? 또 다른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인가? 서구의 패권은 지고 중국 혹은 이슬람 문명이 세계를 접수할 것인가?’와 같은 의문에 하라리 식의 냉철하고 명쾌한 답변이 기대된다. 한국의 파워라이터 유시민은 동서양의 역사 명저를 훑으며 역사를 읽고 쓰는 방법을 묻는 <역사의 역사>(돌베개)로 독자들을 찾는다.
면화란 작물로 자본주의의 기원을 지구사적으로 조명하는 스벤 베커트의 <면화의 제국>(휴머니스트), 유대 민족이란 개념이 100년 전에 날조된 것이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펴는 슐로모 샌드 텔아비브대 교수(역사학)의 <만들어진 유대인>(사월의책)은 스케일 큰 역사서다. 무솔리니의 몰락과 좌우파 대립 등 현대 이탈리아를 건설한 민중의 역사를 담은 폴 긴스버그의 <이탈리아 현대사-반파시즘 저항운동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의 몰락까지>(후마니타스)도 묵직하다.
국내 역사서 중에선 ‘한국역사연구회 시대사총서’가 <한국현대사>(푸른역사)를 끝으로 고대-고려-조선-근대로 이어져온 10권 분량의 시리즈를 완결한다. 한국 근현대 회화를 대표하는 거장 박수근 화백의 딸인 화가 박인숙은 아버지를 회고하는 <내 아버지 박수근>(삼인)을 낸다.
뭔가가 잘못됐다, 경제서
경제 분야의 출간 예정작들은 부동산이나 삐걱대는 자본주의, 문명을 위협하는 기후변화 등 지금 여기의 문제들을 직시한다.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부동산공화국 경제사>(여문책)에서 지주제를 해체하고 평등한 토지권리를 나눠줘 고도성장을 달성했던 한국이 부동산공화국으로 전락해버린 역사를 짚는다. 미국 클린턴 정부 노동부 장관이자 대중들에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알리는 데 앞장서온 로버트 라이시가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까치)으로 트럼프노믹스 등 최근의 미국 정치경제 문제들을 다룬다. 한국 경제학자로는 최초로 <사이언스>에 논문을 게재한 최정규 경북대 교수의 경제학 에세이 <우울하지 않은 과학>(사회평론)은 ‘우울한 과학’이라 불리는 경제학의 한계를 넘어 사람과 공동체를 복원한 새로운 경제학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생태철학자 신승철의 <탄소자본주의>(알렙)는 기후변화라는 대위기를 맞이했으면서도 여전히 탄소 소비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에 머물러 있는 현존 문명의 문제점을 점검한다. <침묵의 봄>으로 잘 알려진 ‘환경운동의 어머니’ 레이철 카슨의 전집도 에코리브르 출판사에서 오는 3월까지 완간될 예정이다. 도현명 임팩트스퀘어 대표와 이새롬 경영학 박사는 <젊은 소셜벤처에게 묻다>(남해의봄날)에서 사회적 기업가들에게 요긴할 소셜벤처 창업 과정과 노하우를 담는다.
논쟁 한가운데로, 정치사회서
정치사회서 작가들은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고 논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똘레랑스’를 외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는 ‘나 아니면 적’이란 양극단이 지배해온 우리 사회가 품어야 할 새로운 가치로 ‘섬세함’을 제안하는 사회비평 에세이 <결, 그리고 섬세함에 관하여>(한겨레출판)를 낼 예정이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인 박구용 전남대 교수는 ‘문빠’ 현상을 새로운 민주주의와 담론의 형성 과정이란 시각에서 바라보는 <교차로에 선 문빠>(메디치)라는 논쟁적 저서를 들고 온다. 인종·종교·성과 관련된 편견을 분석하는 사회심리학의 고전, 고든 올포트의 <편견의 본성>(교양인)도 올해 출간을 기다린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 임승수 작가는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자본주의 생존기>(서해문집)에서 전업작가라는 불안한 삶 속에서도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체득한 유쾌하고 행복한 삶의 비결을 들려준다. 김진호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적폐의 성역 한국교회를 강남순, 박노자, 한홍구, 김응교와 함께 파헤친 <권력과 교회>(창비)의 출간을 예고했다.
사회학자 노명우가 일제강점기부터 개발독재 시대까지 당대의 흥행 영화로 한국적 정서의 형성 과정을 복원하는 <인생 극장>(사계절)도 기대되는 출간 예정작이다. 영화학자 이호걸의 <눈물과 정치>(따비)는 대중문화를 통해 눈물과 정치의 관계를 분석하는 비평서다.
심오하거나 가볍거나, 고전·사상서
고전·사상 분야에선 아시아·중국이 압도적이다. 장현근 용인대 교수가 17년간 번역한 류쩌화의 대작 <중국정치사상사>(글항아리)가 드디어 빛을 본다. 고전·사상 출판의 명가 길출판사는 올해 이정우 경희사이버대 철학과 교수의 세계철학사 3부작 중 두번째 저서인 <아시아세계의 철학>을 선보일 예정이다. 유유출판사는 중국철학의 계통을 잡아주는 카린 라이의 <케임브리지 중국철학사>를, 새물결출판사는 디지털 시대의 철학을 묻는 허욱의 <중국에서의 기술에 대한 물음>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대중 눈높이에 맞춰 고전·사상을 쉽게 풀어내는 시리즈도 연달아 독자들을 찾는다. 아르테출판사는 100권 이상 출간이란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전문가들이 사상·문학·예술 거장들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며 고전이 탄생한 순간을 조명하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올 상반기부터 내놓는다. 한길사는 대중 교양서 시리즈인 ‘마이 리틀 라이브러리’의 1차분 <한나 아렌트의 생각>과 <중세의 아름다움>을 이달에 선보인다.
요즘 핫한 거 아시죠, 과학·여성
과학과 여성은 최근 몇년간 출간 붐을 일으킨 영역으로 책의 질과 양에서 모두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의학계의 계관시인’ 올리버 색스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구상한 에세이집 <의식의 강>(알마)은 생명과 생각의 진화, 기억의 작동방식, 창의력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시간여행의 과학적 원리부터 문화 전반에서 다루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담은 제임스 글릭의 <시간여행의 역사>(동아시아)도 기대되는 과학서다.
페미니스트 과학사학자인 도나 해러웨이의 남/여, 인간/동물의 경계를 허무는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은 지난해에도 주목할 책으로 꼽혔지만, 출간이 늦어져 오는 5월에야 오래 기다려온 한국 독자들을 만날 것 같다. ‘센 언니’ 노혜경 시인은 <20대 여성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개마고원)를 통해 여성들에게 현실 정치에 참여할 것을 강추한다. 결혼 23년 차에 시부모에게 ‘며느리 사표’를 쓰면서 시작하는 영주의 <며느리 사표>(사이행성)는 가부장제 사회에 사는 여성의 치열한 독립투쟁을 그린다.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는 인간 성별에 관한 이해를 주제로 삼아 쉽게 풀어쓰는 페미니즘 입문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이매진)를 낸다.
오랜만에 돌아온 작가들, 문학
올해 국내 문학에선 오랜만에 작품을 내놓는 작가들이 반갑다. 등단 50년을 맞은 윤흥길 작가가 20년 만에 5권짜리 대하 장편소설 <문신>으로 돌아온다. 일제 말기 열강의 이권 다툼으로 격랑에 휩싸인 한반도를 배경으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하성란 작가가 8년 만에 내놓는 장편소설 <정오의 그림자>(은행나무)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인간의 비밀과 진실의 민낯을 그린다. <드래곤 라자>로 한국, 일본, 대만, 중국 등에서 200만 독자를 거느린 한국의 대표 판타지 소설가 이영도는 신작 장편소설 <오버 더 초이스>를 내놓는다.
은희경 소설가는 1970년대 여대 기숙사를 배경으로 지방에서 올라온 청년들의 열망과 낭만, 복잡미묘한 애정과 갈등을 다채롭게 담은 장편소설 <빛의 과거>(문학과지성사)를 발표할 예정이다. 작가 공지영은 불의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부정의 카르텔과 맞서는 <해리>(해냄)의 출간을 예고했다.
국외 문학으론 영국 문학의 제왕 줄리언 반스가 사랑의 시작과 끝을 서늘한 통찰력과 지적인 위트로 그려낸 적나라한 연애소설 <단 하나의 이야기>(다산책방)로 국내 팬들을 만난다. 악명 높은 소설 <무한한 재미>로 유명한 미국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문학적 정체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에세이만을 선별하여 한권으로 엮은 책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바다출판사)도 내용이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책은 2016년 작고한 움베르토 에코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작 장편소설 <제0호>(열린책들)다. 이탈리아의 전 총리이자 언론 재벌인 베를루스코니를 연상케 하는 언론사 사주와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실제론 죽지 않고 도주해서 이탈리아를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음모론이 등장하는 등 현대 정치를 주요 소재로 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26388.html#csidx04a42f0dd5247689b0eba71f71dfe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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