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5일 아침 이호철 수석은 자신의 출마를 요구하는 지지자들에게 긴급히 연락해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불출마 발언을 했습니다. 그 발언을 참석자가 녹취·정리한 글입니다. 이호철의 생각의 깊이를 알게 해주는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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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출마를 안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사람들이 슬렁임) 사람들이 갑자기 얼굴이 확 변해버렸는데요.(웃음) 원래부터 정치를 안 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지난 대선 때 사람들을 설득을 하긴 했지만,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노 대통령 돌아가시고 나서 사람을 설득하는 게 무섭고, 겁납니다. 사람을 설득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노 대통령도 나보고 정치를 해보지 않겠냐고 하셨는데, 그게 안 맞는거 같아요, 제가 호불호가 쎄거든요. 정치를 하려면 모르는 상갓집도 가야되고, 결혼식도 가야되는데 모르는 집은 못가겠더라고요. 노무현 의원 보좌관할 때, 30년 전인데, 제가 대신 가야 할 때 너무 하기 싫었습니다.
제가 낯가림이 심합니다. 혼자있는 걸 좋아합니다.
계속해서 제 입장을 안 밝히는 것은 여기 있는 분들에게 죄송하고 부산시민을 속이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안한다고 했는데, 이호철도 문재인 대통령처럼 결국 하지 않겠는냐 하시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책임의식이 강하고 나는 자유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징역을 두 번 살았습니다. 독방에 있었습니다. 살인, 강도, 히로뽕 등 중죄인들이 내 옆방에 있었고, 감옥 창문으로 해가지면 하루가 가고, 그래서 밖에서 해지는 것이 보고 싶었습니다. 독방이라 사람을 못 만나서 사람이 보고 싶었습니다. 나가면 여행을 해야지 생각했습니다.
나는 79년 10월 부마사태 주동자로 구속돼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받았고, 영화 ‘변호인’의 모티브인 82년 부림사건 때는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물고문·전기고문용 도구인 ‘칠성판’을 탔습니다. 지금도 미장원에서 뒤로 고개를 젖혀 수건을 얼굴에 덮고, 머리를 감겨주면 숨을 잘 못 쉽니다. 박종철 열사, 김근태 선배보다 내가 몇 년 먼저 칠성판을 탔는데, 그때 내가 죽었더라면 두 분은 그런 고문을 안 받았을 겁니다.
크리스마스 특사로 출소하게 되었습니다. 12월 24일 저녁 출소 하자마자 사람이 보고 싶어서 남포동 부영극장 계단에서 사람들을 한참 보고 앉아있었습니다. 그게 너무 재밌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회색만 보다가 너무 많은 색을 봐서 그런지 집으로 갔는데 두통이 너무 심하고 잠을 잘 수 없어서 한참 고생했습니다. 그 이후 합천 이모집에서 6개월 농사를 도왔습니다.
여행 많이 다녔고, 이제는 여행사도 차리고 지분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아내도 가이드가 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그런 나를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치를 하라고 많이 권유했지만, 나에게는 퇴임한 후에도 그런 권유하지 않고, 봉하에 와서 같이 농사를 짓자고 권유 하셨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저의 이런 성향을 잘 압니다. 정치하라고 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대통령께서 사상에 출마하실 때는 제가 겁이 났지만, 설득을 했습니다. 혁신과 통합이라는 시민단체의 대표로써 민주당과 통합이후 빠져버리면 안 될 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떠났습니다. 지난 대선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출마 안하실 것이다.” 생각했고, 같이 설득하자고 했지만 난 하지 않았습니다. 마루(풍산개)랑 산책하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대통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난 설득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께서 행복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출마시킬 때처럼 하면 이호철도 나가지 않겠느냐 하시는데, 작전도 알고 있습니다. 옛날에 그 작전 썼기 때문에 잘 압니다.
5월 9일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외국으로 바로 떠났잖아요? 비행기표는 기차표와 달라서 몇 달 전에 예약을 해야합니다. 5월에 나가려고 하면 2월 달 쯤 예약을 해야 하기에 예약했습니다. 하지만 이기면 나간다. 지면 못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기면 자유로워 질 수 있는데, 진다면 비행기표 날린다고 했습니다.
출국소식을 몇몇 사람들에게 문자로 보냈는데, 그게 페이스북에 올라가 기사화됐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을 인천공항에서 봤습니다.
노무현대통령기념관 짓는 일을 4년째 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이창동 감독이 하셨습니다. 이 감독 이야기로는 “먼저 만든 대통령 기념관은 재미가 없다. 그렇게 만들면 60점짜리다. 그런데 당신들이 직접 만들면 80점짜리가 될 수도 있고, 40점짜리가 될 수도 있다.” 80점짜리라는 말에 혹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전시, 건축, 조명 등 어려운 일이 많고 영화감독은 정말 천재인거 같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4년째 해왔고 앞으로 2년간 더 해야 합니다.
나는 6월 항쟁의 성과가 촛불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87년 세대가 아이들을 데리고 촛불집회에 나왔습니다. 이 촛불세대의 아이들이 20년 후에는 부모세대가 됩니다. 엄청난 민주주의의 에너지가 탄생한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촛불을 들어봤던 사람들은 20년 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또 다시 촛불을 들 것입니다.
88년도 내가 30살에 노무현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획실장이었습니다. 당시 건방졌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후보의 명함을 흑백으로 만들고, 산복도로에서 구호를 외치고 다녔습니다. 운동권들이 선거를 망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열정만 있었습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선거를 했는데, 할 때마다 선거 참 어렵습니다.
박근혜가 탄핵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 결코 쉽지 않습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87년에서 이까지 오는데 30년 걸렸습니다. 한 세대가 바뀌면서 세상이 바뀝니다. 부산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시장 바꾸고, 구청장, 시의원 30% 정도는 당선되면 좋겠습니다. 더욱 겸손하고, 단합해야 합니다. 나는 부산을 바꾸고 싶습니다.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해야지 누가 해야 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1인 시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 이미 불출마를 결심했습니다. 설 이전에 입장을 밝히려고 했으나, 지금 지지자들이 있는 자리에 와서 말씀을 드리는 게 도리인거 같아 이 자리에서 말씀드립니다. 나는 출마를 안 합니다. 부산을 바꾸는데 있어서 여러분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저를 지지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습니다. (웃음) 고맙습니다. 대신에 어떤 자리에서도 다른 후보들이 싸우면 중재 하고, 새로운 분들을 영입해서 한 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와 일 해보면 알겠지만 참 재밌게 일합니다. 여러분들이 해산하지 않고 깨시민 같은 조직으로 나와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정체성이 다르더라도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고 응원한다면 함께 해야 합니다. 지난 대선 때 나는 우리당 사람들과 만나지 않았습니다. 새누리당의 시의원, 보수적인 목사, 스님들을 만나며 설득하고 함께하자고 했습니다. 그 중 다는 아니지만 60%정도는 성공했습니다. 지지율이 높으면 이렇게 되는데, 지지율이 낮으면 안 옵니다. 그러니 지금 지지율이 높을 때 당에서 이런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데, 안하니 저라도 하겠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저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 뭐인지 아십니까? 어떤 자리를 준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자유를 준 것입니다.
당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저포함해서 1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이어갑시다. 운동권 방식으로 하지 맙시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진보세력은 신기술을 사용해야 승리합니다. 종교개혁도 칼이나 총이 아닌 금속활자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터넷이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SNS였습니다. 이번 선거에 신기술을 어떻게 장착할 지를 연구해 주십시오.
출처 http://busangonggam.tistory.com/m/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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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이 간다] 이호철, “문 대통령은 날 풀어주실 것” … 부산 정치판 요동
[출처: 중앙일보] "대통령은 날 풀어주실 것" 이호철 불출마에 부산 요동
[출처: 중앙일보] "대통령은 날 풀어주실 것" 이호철 불출마에 부산 요동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사실상 은둔 중이었다. 부산시장 출마설이 지난해 불거진 뒤 언론, 정계인사들과의 접촉을 끊었다. 이 전 수석의 입장을 듣기 위해 수소문에 나섰으나 “지금 한국에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체류 중이라는 곳도 ‘중남미’ ‘칠레’ 등 제각각이었고, 귀국 날짜도 “곧”이라고만 했다.
그러던 중 이 전 수석이 노무현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책임을 맡고 있고, 일요일인 14일에 관련 회의가 있다는 얘기를 노무현재단 사람에게서 들었다. 무작정 서울 마포구 신수동 노무현재단으로 찾아갔다. 세 시간을 기다리자 푸른색 모자를 눌러 쓰고, 수염이 덥수룩한 여행객 차림의 이 전 수석이 나타났다. 20일간 쿠바에 있다가 14일 새벽 한국에 도착해 재단으로 오는 길이라고 했다.
기자가 대화를 청하자 “담배나 한 대 얻어 피우자”고 했다. 한 달간 끊었다는 담배를 피우면서 오히려 이 전 수석이 먼저 물었다. “제가 출마할 거 같으세요, 안 할 거 같으세요?” 답을 내놓지 못하자 이 전 수석이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하려구요.”
생각을 굳힌 거냐고 묻자 바로 “예”라고 답했다.
그러던 중 이 전 수석이 노무현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책임을 맡고 있고, 일요일인 14일에 관련 회의가 있다는 얘기를 노무현재단 사람에게서 들었다. 무작정 서울 마포구 신수동 노무현재단으로 찾아갔다. 세 시간을 기다리자 푸른색 모자를 눌러 쓰고, 수염이 덥수룩한 여행객 차림의 이 전 수석이 나타났다. 20일간 쿠바에 있다가 14일 새벽 한국에 도착해 재단으로 오는 길이라고 했다.
기자가 대화를 청하자 “담배나 한 대 얻어 피우자”고 했다. 한 달간 끊었다는 담배를 피우면서 오히려 이 전 수석이 먼저 물었다. “제가 출마할 거 같으세요, 안 할 거 같으세요?” 답을 내놓지 못하자 이 전 수석이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하려구요.”
생각을 굳힌 거냐고 묻자 바로 “예”라고 답했다.
- 왜 불출마를 선택했나.
-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신 뒤로는 정치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다. 우리의 아픔이죠. 둘째는 울리히 벡이 쓴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란 책에 답이 있다.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난 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책이다. 나는 ‘깨어있는 시민’으로 남으려 한다. 셋째는 노 대통령 기념관 때문이다. 기념관 건립을 4년째 맡고 있다. 제게는 소중한 일이다. 역사를 공간에 새긴다는 책임감이 있다. 이 일을 나는 해야 한다.”
- 출마할 수 있다는 말은 왜 나왔나.
- “작년 추석 무렵 나서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내게 출마를 권하러 왔다가 불출마 선언만 하지 말아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문 대통령께도 그런 방식을 써서 정치를 하게 했다. ‘불출마 선언만 하지 말아달라’, 그다음엔 ‘책 쓰자’, ‘북 콘서트 딱 한 군데에서만 하자’, 결국 전국을 다 돌았다.(웃음) 부산을 바꿔 보자는 그 간절한 마음들 때문에 잠시 불출마 발표를 미뤘지만 한 번도 출마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문재인 정부가 성공한 정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영역에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 대의로 보고, 넓고 깊게 봐야 한다. 그럴 때 제 카드는 유용한 방식이 아니다. 저를 지지하는 분들은 젊거나 친노, 친문 아니겠나. 나중에 (친노·친문인) 전해철·박남춘·김경수 의원이 다 경선에 나올텐데 선거 과정에서 오히려 문재인 정부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 문 대통령이 ‘나를 정치하게 만들었으니 이번엔 당신 차례야’라고 한다면.
- “문 대통령은 그리 안 하실 거다. 본인도 스스로 정치를 피하시다가 하게 됐는데, 저를 풀어주려고 배려하시지 않을까. 노무현 대통령도 한때 많은 사람에게 정치를 권유했지만 ‘아, 이 친구는 정치를 안 할 거야’라고 하시고, 제게 정치얘기는 안 했다. 제가 워낙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고, 문 대통령도 잘 알고 계신다.”
이 전 수석이 ‘자유’를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79년 10월 부마사태 주동자로 구속돼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받았고, 영화 ‘변호인’의 모티브인 82년 부림사건 때는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물고문·전기고문용 도구인 ‘칠성판’을 탔다. 지금도 미장원에서 뒤로 고개를 젖혀 수건을 얼굴에 덮고, 머리를 감겨주면 숨을 잘 못 쉰다고 한다. 그는 “박종철 열사, 김근태 선배보다 내가 몇년 먼저 칠성판을 탔는데, 그때 내가 죽었더라면 두 분은 그런 고문을 안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감옥의 독방에서 쇠창살 너머로 지는 해를 보면서 나가면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이 전 수석은 지금 모 여행사의 지분을 갖고 있고, 부인도 고교교사를 그만두고 여행기획을 하고 있다.
- 문 대통령을 당선 후 만난 적이 있나.
- “작년 대통령 여름 휴가 때 경남 진해에서 딱 한 번 뵀다. ‘(요즘은 또) 어디 갔다 왔노’라고 하시길래 (동유럽의) 코카서스(3국) 다녀온 얘길 해드렸다. 북핵 문제 등으로 고생하실 때라 살이 빠져 있으셔서 마음이 안됐더라.”
- 대통령 최측근이라고 무조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게 바람직한 건지 잘 모르겠다.
-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새로운 시도다. 2012년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때 ‘3철(이호철·전해철·양정철) 배제’가 조건이었다. 우리 진영 내부에도 ‘3철 프레임’이 셌다. 2016년 4월 총선 때 민주당 지도부가 출마할 생각도 없는 나한테 불출마 선언을 해 달라고 하더라. ‘나는 할 수 있는데, 다른 두 사람한테 이름 끝 글자가 같다고 불출마하라고 하면 되느냐’고 했다. 대선 때도 공직 포기선언을 해 달라고 (문재인 캠프의) 중진 의원이 요청했다. 그때도 ‘저는 약속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은 아니다’고 했다.”
- 결국 양정철 비서관도 떠났다.
- “양비(양정철 전 청와대 비서관)하고는 대선 전인 작년 1~2월에 이미 ‘우리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나는 문 대통령 취임식(5월10일)을 인천공항에서 봤다. 비행기표는 3~4개월 전에 사야 싸다.(떠나려고 미리 구입했다는 뜻) 하지만 양비는 나중에는 들어가 릴리프 투수로 뛰어야 한다. 나는 구시대의 막차를 타기로 했다. 새시대의 첫차는 새로운 사람이 타고….”
그는 노무현-문재인 두 전·현직 대통령을 ‘노변’ ‘문변’이라 부른다. 두 전·현직 대통령과 가장 오랜 인연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지난해 대선 때는 ‘~위원장’ ‘~본부장’ 같은 고위직함을 달지 않았다. 부산지역 특보단 부단장도 고사하고 ‘특보’ 명함 하나 갖고 주로 물밑에서 움직였다. 오거돈 전 해수부장관, 정경진 전 부산 부시장을 영입해 ‘부산빅텐트’를 성사시켰고, 새누리당 출신 전직 시의회 인사들을 접촉하는 등 취약지를 공략했다.
- 여권의 부산시장 후보 중 김영춘 해수부 장관도 출마에 부정적이란 보도가 있었다.
- “현직 장관한테 지금 출마할 거냐고 물으면, 한다고 하겠는가. 이번이 부산에서 승리할 기회라고 생각은 하지만 만만치 않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떨어지는 선거는 다 봤다. 항상 여론조사에서 이기다가 졌다. 지형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해도 출마자들이 한 팀으로 가야 겨우 이길 수 있을 거다. 나도 출마는 안 하지만 팀이 만들어지면 돕겠다.”
이 전 수석이 불출마를 결심하면서 부산선거의 가장 큰 변수 하나가 사라졌다.
이 전 수석과 만나기 이틀 전 김 장관과 통화했다.
- 지역언론에 나온 보도를 불출마 선언이라고 봐도 되나.
- “허, 허. 이번 선거에 대한 제 입장은, 안 나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지금은’ 선거를 생각하지 않고 장관직에 전념하겠다”
- 아직 결론을 낸 건 아니란 뜻인가.
-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 저보고 선택하라면 출마 안한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세상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15일 부산을 방문해 “우리는 이길만한 후보를 괴롭히는 의미 없는 경선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상 야권후보군 중에는 지지율이 가장 높은 서 시장을 전략공천하겠다는 뜻이다.
부산은 여권으로선 영남에 ‘교두보’를 확보하느냐, 마느냐의 의미를 갖고 있다. 상대진영 내에 만든 세력확장의 발판말이다. 한국당에겐 뚫려선 안 되는 ‘마지노선’이다. 낙동강 전선의 두 얼굴이다.
강민석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대통령은 날 풀어주실 것" 이호철 불출마에 부산 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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