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이 2018년 새해 대한민국의 화두로 떠올랐다. 6월 항쟁의 불씨와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과 이한열 열사의 죽음 그리고 엄혹했던 시절에 군사 정권과 맞섰던 민중. 어쩌면 촛불혁명이 그냥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되는 그 지점. 같은 시절, 한 시인은 가려진 역사를 들춰내 세상에 고발했다. 그리고 처절한 기억 안에서 고요히 한 생을 살아내고 있다. 제주 4.3항쟁 70주년이기도 한 새해 그가 쓴 ‘한라산’을 다시 읽는다.
(제주 4.3항쟁을 담은 장편 서사시 <한라산>과 이산하시인)
기자와 시집 <한라산>의 인연은 87년 가을쯤으로 거슬러올라 간다. 당시 시 낭송을 하고 있던 기자에게 노래패 ‘산하’의 선배 한 명이 마스터로 인쇄된 종이 뭉치를 건네면서 다음 공연에서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노래 중간에 시를 낭송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던터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싯귀들은 단순한 시가 아니었다. 펼치자마자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부터 기자가 알던 환상의 섬 ‘제주도’는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에 의해 난자당한 참혹한 4.3의 현장으로 각인됐다. 그때서야 수배령이 내려진 한 시인의 얘기를 들으며 그가 홍길동처럼 무사하게 바다 건너 율도국을 건설하러 떠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87년 11월 11일 오랜 수배생활 끝에 붙잡혀 구속됐다.
20대 초반의 이산하(본명 이상백)는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재학 당시 이륭이라는 필명으로 시동인지 <시운동>에 ‘존재의 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그는 부산 혜광고 시절부터 대구의 안도현과 함께 필명을 날리던 청년문사였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민청련에서 ‘민중신문’, ‘민주화의 길’ 등 유인물을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그는 6월 항쟁의 불씨가 됐던 박종철열사의 부산 혜광고 선배이기도 했다. 그의 피는 조국의 현실로 인해 늘 뜨거웠으니 ‘한라산’은 그의 운명과도 같았을지도 모른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 장편 서사시 ‘한라산’ 서문
가슴에 손을 얹은 한 사내가 남도의 하늘을 바라보며 비장하게 각오를 다지는 풍경이 그려지는 ‘한라산’의 서문.
‘한 손엔 ’빵‘과 / 또 다른 한 손엔 ’해방군‘의 탈을 쓰고 / 발톱까지 무장한 채 당당하게 상륙한 미제국주의자들은 / 마침내 / 순결한 조선의 하늘과 푸른 산하를 두 토막으로 / 분질러 놓았다’는 ‘서시 1’은 분단의 역사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이어지는 ‘서시 2’의 첫 문장,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와 ‘1948년 4월 3일 / 제2의 모스크바’, ‘뼈를 깎는 모진 고문과 추위에 / 여성전사들의 생리마저 얼어붙는 밤 / 그들은 기어이 갔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 제주도 혁명전사들은 그렇게 갔다 ~중략~ 끝내 다 지르지 못한 채 / 한 줌 피 묻은 뼛가루로 날아갔다’ 는 이 시는 4.3항쟁의 전말을 장막을 걷듯이 당시의 상황과 배경을 장엄하면서도 가슴 시리게 천천히 풀어낸다.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 그들은 보지도 않고 쏘았다 / 학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로 이어지는 ‘서시 3’에서는 빨갱이 마을이라며 80여명이 넘는 중학생들을 집단몰살하고 수장했던 금악벌판과 빨치산 아내와 딸들을 발가벗긴 채 나무에 묶어 두고 표창 연습하다가 젖가슴까지 도려내고 정방폭포에 던지는 끔찍한 장면이며 여중생을 윤간하고 생매장해버린 서북청년단들의 만행들이 충혈된 눈이 되어 부릅뜨고 있었다.
‘서시 4’에서는 ‘그 누구도 잠들 수 없는 이 혁명의 산하에 / 싹뚝 잘려나간 손가락들이 아직도 펄펄 살아 뛰는/ 붉은 피가 있어’, ‘천 년의 세월이 흐를지라도 / 결코, / 용서하지도 말고 / 결단코 / 잊지도 말자’고 분노를 가다듬고 전위를 다지며 4.3의 역사를 기승전결로 풀어낸다.
전설 같은 제주도의 더 깊숙한 숲으로 안내하듯 ‘제1장 정복자’부터 ‘2장 폭풍전야’, ‘3장 포문을 열다’, ‘4장 불타는 섬‘에 걸쳐 제주도민들의 뜨거운 항쟁의 역사가 서사적으로 그려진다.
‘본관 휘하의 전승군은 일본 천황정부 및 대본영의 명에 따라 서명된 항복문서상의 지역을 점령한다.’ ‘맥아더 포고문 제1호’로 시작되는 제1장은 전쟁을 종식시킨 해방군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전쟁의 배턴을 물려받은 새로운 점령군이었던 미국의 민낯을 보여준다.
세계가 제국주의의 땅따먹기 각축장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의 실체와 탐욕의 정치, 전국에서 불었던 저항의 바람 그리고 제주도에서 자행된 살육, 해방 후 평화의 시대가 아닌 폭력의 시대를 다시 맞이해야 했고 그에 거침없이 저항했던 우리나라 근대사와 민중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그 민중의 역사 안에는 도저히 눈으로 볼 수 없고 입으로 담을 수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참혹한 죽음과 쓰라린 상처들이 하나하나 꽂혀 있다. 이산하시인은 피로 얼룩진 1948년 4월 3일에 자신의 젊음을 고스란히 세워두었다. 두려움보다는 역사의 진실과 민중들의 장엄함이 그의 용기이자 힘이었다.
(87년 8월15일 이산하 시인이 연루된 좌경 민중혁명 기도 사건 경향신문 기사)
이산하는 ‘한라산’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를 받은데 이어 그해 8월에 좌경 민중기도 사건에 연루된 혐의가 추가된다. “남한을 미제국주의 식민지사회로 규정하고 무장폭동을 민족해방을 위한 도민항쟁으로 미화하며, 인공기를 찬양하는 등 북한 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혐의다. 이로인해 이산하 체포팀까지 구성되기에 이른다.
작지만 옹골차고 당당했던 그는 법정에서도 또 한 번 강단을 보여줬다. 박근혜 정권에서 총리를 했던 황교안씨가 담당 공안검사였는데 그가 쓴 항소 이유서를 보고 평생 콩밥을 먹이겠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안에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종북주의자로 몰릴 만한데 서슬 퍼런 반공시대이니 그 여파는 대단했을 것이다. 차후에 그는 그때의 심정을 밝혔다. 처음 법정에 섰을 때 어느 누구도 나서서 그를 변호해주지 않았고 법정에 서서 증언할 사람도 나서지 않았다.다만 고은, 신경림, 황광수 선생만이 호의적인 작품평가서 제출형식으로 서면 증언을 해줬다. 그러다 대선을 치른 한 달 후에 갑작스레 재야변호사들이 그의 변호를 맡겠다고 나선 것인데 ‘겨울 감방에서 단식투쟁까지 벌였던’ 그로서는 진보 지식인들의 기회주의적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간 써두었던 ‘전국의 애국청년 문학도들에게 보내는 한 시인의 편지’라는 편지지 200장 분량의 항소이유서를 찢어버리고 뜨겁게 달궈진 심장 같은 문제의 ‘항소이유서’를 쓰게 된 것이다.
그가 썼던 ‘항소이유서’는 이렇다.
<항소이유서>“척박한 이 땅의 역사는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진실을 감추려는 자들 사이에서 언제나 끊임없이 피를 흘려왔습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얼마나 더 이 땅을 붉은 피로 물들여야 새로운 세상이 올 수 있을지 아직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따뜻하고도 새로운 세상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 우리는 강철같이 믿고 있습니다.
본인의 ‘한라산‘도 다만 그런 믿음과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그런 역사의 부름에 정직하게 대답하기 위하여 쓰여졌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그 역사가 다시 나를 부른다면, 그래서 내가 다시 대답해야 한다면 본인은 기꺼이 다시 큰소리로 대답할 것입니다. 한 번 잠든 자 다시 깨어나지 않을 피투성이 이 땅 이 산하에 꽃잎처럼 뿌려진 수많은 이름 없는 전사들의 피를 결코 헛되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필코 그 피의 댓가를 받아내야 합니다.
새벽은 어둠 속에 앉아 기다리는 자에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신새벽은 그 어둠에 맞서 밤새도록 싸운 자에게만 백만 원군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똑같은 이슬을 먹고도 벌은 꿀을 만들지만 뱀은 독을 만듭니다. 그 독을 먹고 자라는 파쇼하의 법정이란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판결이 내려지기를 바랍니다.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우에
력력희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만주벌 눈바람아 이야기 하라
밀림의 긴긴밤아 이야기 하라
만고의 빨치산이 누구인가를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1988년 6월 11일
안양교도소 피고인 이상백(이산하의 본명)
(당시 이산하시인이 제출한 항소이유서 원본)
88올림픽을 기념해 서울에서 열린 세계펜클럽에 왔던 미국펜클럽 회장 수전 손탁여사의 국제구명운동으로 그는 가석방됐다. 1988년 10월 3일 개천절 특사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제주도를 찾았다. 1978년 일본에서 출판된 재일동포 사학자 김봉현의 <제주도, 피의 역사-4.3 무장투쟁의 기록(濟州島 血の歷史-4·3武裝鬪爭の記錄> 번역본을 본 1986년 그날 이후,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격동의 4년을 지내고 발을 디딘 제주도였다.
거기에서 그는 수배생활과 감옥에서보다 더 큰 돌덩이를 가슴에 달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가슴은 자꾸 산처럼 무너져가고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산 자는 죽은 자보다 더 말이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그는 미완성된 시를 이어갈 수 없었다고 했다. 같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는 2년 만에 제주도에서 나왔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같은 인간에게 했던 참혹한 현장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마저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녹두서평>에 ‘한라산’이 게재된 지 16년 만인 2003년 <한라산>(도서출판 시학사)은 시집으로 간행돼 나왔다. 초기의 시를 다시 보완해서 한 권의 시집으로 엮었다.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과 함께 제주 4.3항쟁의 진실을 알렸던 ‘한라산’은 올해 제주4.3항쟁 70주년을 맞아 ‘이산하의 친구들’이 다시 복간한다. 올 3월이면 촛불혁명으로 부는 봄바람과 함께 출간될 것이다.
그의 시 ‘나무’가 혹독하고 엄혹했던 시절, 청춘을 바쳤던 젊은 시인의 심정을 말해주는 듯 하다.
‘나를 찍어라그럼 난네 도끼날에향기를 묻혀주마.’– 이산하 ‘나무’ 전문
(이산하시인은 제주도를 다녀온 후 10년간의 절필을 끝내고 시집 <천둥같은 그리움으로>, 산사기행문 <피었으므로 진다>를 펴내는 등 다양한 집필작업을 하고 있다)
출처 http://munhaknews.com/?p=13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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