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1일 토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3) 추사의 ‘진흥북수고경’



ㆍ‘유배의 한’을 학예일치로 승화한 기상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272030415&code=960100

세계 질서가 미국·중국의 G2로 재편되면서 다시 동아시아가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도 더욱 중요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최근 중화패권주의의 문화적 완성을 서예에 두는 중국을 보면서 한국서예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한다. 추사 김정희(1786~1856)만 해도 그렇다. 서예를 넘어 우리 문예역사의 좌장 격인 인물인데 그 예술적인 성취와 그 성격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2006년 추사 150주기 때 일이다. ‘걸출한 절충론자로서… 사대주의 혐의를 지울 수 없다’거나 ‘사실 추사는 모화적이고… 중국서예 지상주의적 관점으로 조선의 서예를 비판했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다분히 있다’는 등의 평가가 일각에서 제기됐다. 하기야 추사가 24세(1810) 때 연행 이후부터 절해고도의 제주 유배지까지 가서도 중국과의 교류를 지속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평가는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연경 학예계를 좌지우지하던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을 스승으로 모시고 최신 학문인 경학과 금석고증학을 시차 없이 소화한 일이나 한 달이 멀다하고 사신과 역관을 통해 청나라 문사들과 문물, 필묵을 나눈 사례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추사가 쓴 ‘진흥북수고경’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뜬 탁본이다. 고신라의 고졸한 글씨미학이 비첩(碑帖)이 혼융된 추사의 붓끝에서 동아시아의 독자적 미학으로 웅장하게 재탄생했다.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실 소장

하지만 추사학예 성과를 사대나 모화라는 언사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된다. 수용보다 소화나 재해석에 방점을 찍고 보면 추사야말로 조선은 물론 중국·일본을 넘어 동아시아 서예의 패러다임을 평정한 주인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요즘 고고학에 해당하는 ‘금석고증’이라는 학문을 비첩(碑帖) 혼융의 예술을 통해 학예일치의 경지로 완성해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추사의 금석고증학 여정은 3개 시기로 구분된다. 30대와 40대 중후반, 그리고 60대 말이다. 30대에는 31세(1816) 때 북한산비 조사를 시작으로 32세(1817) 때 경주 무장사비 단편고증과 문무왕비 발굴을 하고, 39세(1824) 때 창림사 출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고증했다. 44세(1829) 때 평양 고구려의 성벽 석각 발견, 47세(1832) 때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 저술은 40대 중후반의 대표 사례다. 그리고 67세(1852) 때 북청 유배지에서 신라의 옛 강토를 답사하고 쓴 ‘석노시’나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은 그 종결에 해당한다. 특히 ‘진흥북수고경’은 학예일치의 결정으로 추사체의 경지가 어디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일생에 걸친 진흥왕순수비 고증을 놓고 추사의 학예궤적을 살펴보자. 24세 때 연행 이후 추사가 중국에서 본격 수입한 금석고증학을 처음 우리 역사현장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30대 초반의 북한산비 고증부터다. 추사는 31세 때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비 조사에 나섰다. 당시 무학대사비나 도선국사비로 알려진 이 비석에 추사는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순수비이다(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라고 직접 새겨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32세 때는 조인영과 함께 재차 진흥왕순수비를 찾아가 “자세하게 남아 있는 글자 68자를 확정한다(審定殘字六十八字)”고 명기하고, 이 비석의 글자를 또 다른 진흥왕순수비인 황초령비 탁본과 일일이 고증했다. 추사는 이 기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조인영에게 논문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완당전집> 권2에 나오는 ‘조인영에게’라는 기사를 보자. 

“그런데 재차 비봉의 고비(古碑)를 가져다 반복하여 자세히 훑어보니 제1행 ‘진흥태왕(眞興太王)’ 아래 두 글자를 처음에는 ‘구년(九年)’으로 보았는데 ‘구년’이 아니고 바로 ‘순수(巡狩)’였습니다. 또 그 아래 ‘신(臣)’자같이 생긴 것은 ‘신’자가 아니고 바로 ‘관(管)’자였습니다. 그리고 ‘관’자 밑에 희미하게 보인 것은 바로 ‘경(境)’자이니, 이것을 전부 통합해 보면 ‘진흥태왕순수관경(眞興太王巡狩管境)’ 여덟 자가 됩니다. 이 예는 이미 함흥 초방원(草芳院)의 북순비(北巡碑)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30대 초반부터 실사구시적 태도로, 옛것으로 지금을 증거해내고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일일이 엄밀하게 대조해낸 결과 이 비가 다시 북한산 ‘진흥태왕순수관경비’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추사는 이 결과를 토대로 다시 <삼국사기> <문헌비고> 등의 기록과 비교·대조하여 7000여 글자에 걸친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란 논문을 저술한다. 이것은 47세 때의 일인데 우리나라 금석학 연구에서 최초의 논설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가 추사를 금석고증학자로 자리매김하는 <예당금석과안록>은 <진흥이비고>의 별칭이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추사는 진종 조례론의 배후 발설자로 지목돼 다시 북청으로 1년간 유배를 가게 된다. 추사의 나이 66·67세(1851~1852) 때로 작고하기 5년 전이다. 55세부터 63세까지 8년간의 제주 유배 이후라서 다시 가는 유배길은 심신의 고통이 몇 곱절 더 했음이 분명하다. 추사는 귀양 도중 함흥의 만세교를 지나면서 시를 한 수 읊는다. “진흥왕 북수(北狩)하던 때를 추억하니/ 누대 앞에 화려하던 모습이 드날리네./ 긴 다리 지는 해에 고개 돌려 바라보니/ 두어 가닥 구름 연기 변방인 듯하구나.” 귀양객이 읊조린 시라고 보기 어렵게 자못 당당한 기상까지 엿보인다. 

결과론이지만 당사자의 고통은 어찌 되었건 지금 우리에게는 추사의 귀양이 불행만은 아니었다. 그도 그런 것이 이미 40여년 전 추사 금석고증학의 첫 텍스트가 진흥왕순수비 아닌가. 그러고보면 이 비는 평생 화두가 된 셈인데 추사의 유배길이 어차피 거역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현장을 둘러볼 절호의 기회로 마음을 고쳐먹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추사는 제2 유배지 북청에서 ‘진흥북수고경’이라는 걸작을 남긴다. 
이것이 바로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비각 현판이다. 이 현판이 걸작인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강상 북청 과천 시절의 추사체 완성기 작품이라서만이 아니다. 바로 고증학자로서 일생에 걸친 금석학의 연구 텍스트인 진흥왕순수비가 예술로 녹아들어 학예일치로 승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은 중국문예를 수입하여 조선의 역사현장을 금석고증학으로 누비고 실천한 이후에나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추사가 40년의 화두를 풀어헤친 문자반야(文字般若)가 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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