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slownslow@naver.com
입력 : 2014-01-01 20:47:32ㅣ수정 : 2014-01-01 20:47:32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거나 동해안 정동진으로 달려간 이들이 많을 것이다. 산정에 오른 이들은 연에다 소원을 적어 하늘 높이 띄워 보냈을 것이고, 바닷가에서 새해 첫 일출을 맞이한 이들은 새로운 각오를 다졌을 것이다. 나의 이번 연말연시는 예년과 달랐다. 높은 곳으로 가지도 않았고 동쪽으로 향하지도 않았다. 마을에서 한 해를 보냈고, 또 다른 마을에서 한 해를 맞는다. 앞은 충남 서천군 생태전원마을 산너울이고, 뒤는 제주도 서귀포시 동홍동 작은 아파트에 둥지를 튼 ‘돋을양지’ 도서관이다.
땅거미가 밀려오자 막이 올랐다. 서천 출신 시인의 시낭송과 판소리 공연에 이어 서울에서 달려온 인디밴드들의 연주가 산골에 울려퍼졌다. 하이라이트는 마을 극단의 대본 공연이었다. 무대는 장항선 열차 안. 토끼 사냥을 주제로 한 걸걸한 사투리가 오갔다. 100명에 가까운 주민과 외지 손님들이 서로 막걸리잔을 나누었다. 원주민 어르신들은 마이크를 잡고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아이부터 팔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흥겨운 마을잔치였다.
극단 산너울패는 2012년 5월 첫 모임을 가졌다. 서울에서 30년 넘게 배우 겸 연출가로 활약하다가 이곳으로 귀촌한 고금석씨가 산파역을 맡았다. 30~40대 남녀 주민은 물론 초등학교 학생들도 참가했다. 극단 단장은 서천군에 사는 김재철씨가 맡았다.
이후 문호를 개방하자 서천군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창단 공연은 <비밀 모자>였다. 지난해에는 귀농·귀촌인과 지역 주민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역지사지 해봐유>를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을 들고 서울 나들이를 하기도 했다.
2009년 조성된 산너울마을에는 극단 외에도 서예, 독서토론, 자전거, 걷기, 된장 담그기 등 다양한 동아리가 살아 있다. 이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 이것이 마을 자치의 핵심이자 생활 정치의 기반일 것이다. 마을극단과 함께한 해넘이는 따뜻했다. 문화예술을 매개로 한 산너울 공동체가 도시 사람들의 가까운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014년 새해는 제주 서귀포에서 맞이한다. 1월3일 저녁, 동홍동 마을 도서관에서 주민들을 만난다. 이 사설 도서관 역시 자연발생적으로 뿌리를 내렸다. 문학을 전공하고 시민운동에 몸담고 있는 최연미씨가 동네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아줌마’를 자청한 것이다. 2001년 도서관 이름을 ‘돋을양지’라고 정하고 북스타트운동도 전개했다. 현재 회원은 60여명. 회원은 무료로 무한정 도서를 대출할 수 있다. 최씨는 얼마 전부터 매주 목요일 강정마을 평화책방을 찾아 동네 아이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지도한다.
마을을 주목하는 것은 결국 더 나은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것이다. 얼마 전 한국을 다녀간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민주주의가 ‘완전히 타락한 대의제적, 선거적 형태로 달성됐다’면서 대중의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한다. 직접민주주의는 시민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에서 출발한다. 최근 대학가를 달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이 좋은 예일 것이다. 마을이 직접민주주의의 산실이다. 마을에서 연극을 하고,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생각하는 능력을 회복한다.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내 삶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이 같은 질문을 부여잡고 삶과 사회, 정치와 국가를 돌아본다. 문제는 이야기다. 이웃과 더불어 자기(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창의성이다. 이 같은 창의성이 공포와 분노, 무기력을 건강한 에너지로 승화시킨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기 정치, 즉 삶의 정치의 출발점이다. 도시 곳곳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자. 연극, 노래, 춤, 책읽기, 글쓰기, 걷기 등 어느 것이든 좋다.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좋은 이야기를 빚어내자. 좋은 이야기가 좋은 미래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01204732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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