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292043325&code=960202
새벽 신문을 펼쳐드니 큼직한 붓글씨로 쓴 ‘友’(우)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것도 동양의 어린이들에게 둘러싸여 서양의 아름다운 여성이 자랑스럽게 보란 듯이 들고 있다. 주일 미국대사 캐럴라인 케네디가 큼직하게 쓴 글자다. 최근 동일본 대지진 피해지역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과 함께 서예수업을 하면서 쓴 작품이다. 11월15일 부임 후 첫 일본 내 출장으로, 일본인들의 마음에 다가가려는 ‘감성외교’의 행보로 읽혔다.
우리의 경우라면 한글로 ‘벗’이나 ‘친구’ 정도로 쓰지 않았을까 싶지만 한자다. ‘friend’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니다. 굳이 한자가 옳으냐, 일본어가 옳으냐 묻는 것이 바보스럽지만 동아시아는 한자 하나로 다 통한다. 그것도 형(形)·음(音)·의(意) 3중으로, 붓으로 말하니 더 큰 무게로 뇌리에 박힌다. ‘미국과 일본은 친구다’라는 외교적인 메시지 이상으로 부드러우면서도 단아한 필획과 글자 짜임새에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친구이기를 바란다’는 뜻이 읽힌다. 그래서 케네디의 ‘友’자 한 글자는 무언으로 한국이나 중국에 더 큰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 원류는 ‘대통’이란 글자 자체에서 찾아진다. 우선 기와 파편의 글자를 다시 보자. 새겼다기보다 진흙에 도장을 찍듯 찍혀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대통은 중국 남조 양 무제(502~549)의 연호다. 527년에서 529년까지 3년의 짧은 기간에 해당된다. 이 기와는 요즘 말로 하면 ‘메이드 인 차이나’ 정도로 읽힐 수도 있지만 백제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었고, 더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은 ‘대통’ 기와가 부여의 부소산성에서도 발굴됐다는 사실이다. 대통 원년(527)이 백제 성왕 5년이고 보면 이것은 성왕이 538년 사비(부여) 천도 이전부터 사비 경영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실증한다.
백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남조 양나라와 교역이 활발했다. 벽돌만 하더라도 공주 송산리 6호분 출토 전돌에는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라고 노골적으로 적고 있다. 행초로 쓴 필체 자체부터 실제 송곳으로 모래에 푹푹 파서 구사하듯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넘친다. 최근에는 명문 중 ‘와(瓦)’를 ‘품(品)’이나 ‘의(宜)’로 읽어내기도 하지만 양나라 관용 기와를 모델로 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사비 시기(538~560)는 물론 그 이전의 웅진 시기 백제 기와의 계통이나 기원을 알려준다. 예컨대 건물이 지어진 시기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乙丑’ ‘丁巳’ ‘巳刀’ ‘未斯’와 같은 간지와 연관된 기와가 그 예가 된다.
양나라 서풍의 수용과 재해석은 이미 무령왕릉 지석의 세련된 글씨에서 보았지만 <남사> ‘소자운전’은 그 열성이 얼마였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소자운이 남양 태수로 있을 때다. 백제국 사신이 막 배를 타려 하는 그의 글씨를 구하기 위해 일보일배 30보를 한 후에 “그대 글씨의 아름다움은 멀리 해외에도 잘 알려져 있다. 오늘 꼭 명적(名跡)을 구하고자 한다(侍中尺牘之美,遠流海外,今日所求,唯在名跡)”고 간청했다. 그러자 소자운이 3일간 배를 정박시켜놓고 39장의 작품을 써주고 금화 수백만을 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소자운(蕭子雲·487~549)은 동시대 왕법(王法)의 대가인 도홍경(陶弘景·452~536)과 비견되는 인물이다. 도홍경의 ‘예학명’은 후대 사람이 왕희지 글씨로 오인할 정도로 뛰어난 필법을 자랑하고 있다. 조선말기 김정희마저도 “예학명은 절각을 드러낸 곳이 있고 또 봉악(鋒鍔)을 거둬들인 곳이 있어 천변만화하여 무엇에도 견줄 수 없다”(<완당전집>)고 했을 정도다.
요컨대 ‘무령왕릉지석’이 도홍경의 ‘예학명’과 같은 남조의 글씨를 화려하고 운치 있게 해석해냈다면 앞서 본 ‘대통’은 그 안과 밖에 흐르는 미끈하고 둥글둥글한 필획의 맛을 유감없이 담아내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마치 웅진 시기 연꽃무늬 수막새(목조건축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에 백제 특유의 미감이 뚜렷해지고 제작기법에서도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중국의 선진기술을 수용하되 꽃잎이 둥글고 부드러우며 그 끝단이 가볍게 반전된 형태의 조형미감으로 소화해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발끝에 차이고 산성에 나뒹구는 기와 조각에서 확인하는 백제 문화의 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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