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082121015&code=960202
올 7월 초 근 100년간 미제였던 경주 금관총 주인공의 신분을 밝힐 단서가 나타났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921년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環頭大刀·둥근 고리가 있는 큰 칼)의 보존처리 중 ‘이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손잡이 부분 명문(銘文)을 밝혀낸 것이다.
그간 금관 출토사실 때문에 금관총이나 천마총 등은 당시 왕을 지칭하는 마립간의 무덤으로 추정되어 왔다. 하지만 내물마립간(356∼502)이나 지증마립간(500∼514) 시기에는 해당 인물이 없는 ‘이사지왕’이 피장자로 확인됨으로써 왕이 아니라 고위 귀족의 무덤일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실제 영일 ‘냉수리비’(503)에 새겨진 ‘此七王等(차칠왕등)’처럼 일곱 명의 고위 귀족들을 왕으로 불렀다는 증거가 있다. 이미 같은 무덤에서 나온 귀걸이·팔찌 때문에 임자가 여성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고대 서예사 서술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각각 따로 다루고 있다. 지리적으로 대륙에 접한 고구려가 가장 먼저 북위계통의 글씨를 도입하였고, 백제는 남조와 직접 교역한 반면, 가장 멀리 있는 신라는 가장 후진적인 글씨문화를 가진 것으로 본 것이다.
삼국시대 서법을 개관하면서 “연대적으로 고구려가 가장 앞섰고 신라가 가장 후진이었으며 고구려는 웅건, 백제는 우아, 신라는 전중하여 각기 나라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서법 하나만으로도 문화의 발달 과정과 각자의 특이성을 알 수 있으니 이는 서법이 가지는 중요한 가치라고 하겠다”(임창순)고 한 것이 그 일례다. 당연히 탁견이지만 충분히 있음직한 삼국 간 영향관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다른 견해가 없다.
사실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는 칼의 손잡이 부분에 직접 예리한 칼로 새긴 것이기 때문에 서품(書品)이 거칠다면 거칠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나라현의 이소노카미신궁에 소장된 백제의 ‘칠지도’(369 또는 408, 480)나 경남 창녕에서 출토된 ‘上部先人○貴○刀’가 새겨진 가야의 환두대도와 같이 정밀한 금은 입사(入絲)로 제작된 게 아니다.
그래서 일반인은 물론 고고학자들조차 글자가 가진 내용 정보에만 주목한다. 서체가 주는 미학 정보에는 애초부터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심지어 왕명이 새겨진 칼임에도 글자만큼은 대충 표시해놓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단숨에 직획(直劃)으로 죽죽 푹푹 그어재낀 필획이나 균일한 간가결구(間架結構·글자의 짜임새)는 물론 고예(古隸)에서 해서로 이행되는 과도기 서체에 이르기까지 어떤 연결고리나 맥락 없이 이런 서풍이 단독으로는 나올 수 없다. 영일 ‘냉수리비’나 울진 ‘봉평비’(524) 글씨의 전조나 실마리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그 뿌리는 어디일까.
1946년 경주의 어느 고분에서 단지도, 사발도 아닌 뚜껑 있는 청동그릇이 출토되었다.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이라는 명문이 그릇 바닥에 주조된 제기(祭器)다. ‘을묘년(415) 국강상의, 땅을 넓게 개척하신 호태왕의 그릇’이라는 뜻의 명문 때문에 무덤 이름을 ‘호우총’이라 부르고 있지만, 바로 이 그릇 밑바닥의 글씨 16자에서 ‘이사지왕’의 글씨 족보의 실마리도 포착된다. 이미 해서 단계에 접어든 ‘이사지왕’의 필획 기울기가 ‘호우명’의 수직 수평보다 심한 것을 접어둔다면 시종일관 같은 굵기의 필획에다 균일한 글자의 짜임새는 두 유물글씨가 같은 맥락에서 선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사군 설치에서 보듯 전쟁은 교류보다 더 강력한 문화 전파자다. 신라는 392년(내물왕 37년)부터 고구려에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낸다(<삼국사기>). 400년(내물왕 45년)에는 왜와 가야의 연합군이 금성(경주)을 함락시키자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는 물론 가야까지 휩쓸게 된다(광토대왕릉비).
하지만 415년(을묘년, 장수왕 3년) 무렵에도 신라는 여전한 왜구의 출몰로 어려운 처지였다. 당시 외교관계는 고구려와 신라가 같은 편이고, 백제·가야·왜가 손을 잡고 있는 십자형국이라 왜나 가야의 신라 공격에 맞서 고구려의 출병은 당연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신라 땅에서 왜구를 몰아냈고, 가야도 세력이 위축되어 전기 가야연맹 주도권이 금관가야에서 대가야로 넘어가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좌우지간 ‘호우명’ 그릇 하나가 4세기 말, 5세기 초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 것이다. 명문의 글씨는 같은 사람이 썼다고 할 정도로 ‘광개토대왕비’를 빼다박았다.
이런 맥락에서 ‘이사지왕’ ‘냉수리비’ ‘봉평비’ 등 고신라의 글씨는 고구려 글씨의 수용과 재해석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요즘 한류와 마찬가지로 글씨도 ‘고구려류’가 5세기 전후의 삼국이나 가야, 왜에 깊숙하게 침투했던 것이다.
퍼즐 맞추기라고나 할까. 사료가 빈곤한 고대일수록 기존 서예사가 좀 더 유기적 관점에서 서술되고 교정되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백제 왕세자가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나 창녕의 가야 환두대도는 물론 순수비 4종 가운데 유독 고티가 두드러지는 ‘창녕진흥왕순수비’(561)의 둥글둥글한 필획도 다시 보인다. 자국 문화의 자생성이나 독자성마저 타 지역과의 교류관계를 제대로 봐야만 해명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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