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152130275&code=960202
역사는 사실 기록과 해석의 줄다리기이다. 한·일 고대사를 보면 이 생각은 더 확실해진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辛卯年條)’를 두고 일본에서는 왜가 신라와 백제를 복속시켰다고 해석하고 한국에서는 조작이라고 맞받아친다. ‘칠지도’를 두고도 한쪽에서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납’하였다고 해석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하사’하였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일본과 한국 학자들은 이렇게 100여 년 동안 전쟁 아닌 전쟁을 하고 있다. ‘제 논에 물 대기’라는 말처럼 명약관화한 사실마저 일본이 이렇게 억지주장을 하는 배경에는 36년에 걸친 일제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술수가 깔려 있다.
[앞면] 태화사년(근초고왕24, 369) □월 십육일 병오일 정오, 무쇠를 백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어 마땅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줄 만하다. □□□□만들었다. (泰□四年 □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銅]七支刀 生피白兵 宜供供侯王□□□□作).
[뒷면] 선세 이래로 아무도 이런 칼을 가진 적이 없는데 백제왕은 세세로 기생성음(奇生聖音·복을 비는 말)하여 왜왕 지(旨)를 위해서 이 칼을 만들었다. 후세에 길이 전할지어다.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하행(下行) 문서 형식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투다. 명문 가운데 ‘供侯王’의 ‘供’은 바치는 것보다 하사의 의미로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대세다. 하지만 일본은 통상 ‘泰□’를동진의 ‘太和’ 연호를 끌어들여 “후왕의 공용(供用)에 마땅하고 왜왕의 상지(上旨)에 의해서 만드니”(후쿠야마)로 해석한다. 이미 허구로 판명된 <일본서기> 신공기 52년(369)조의 “백제의 구저(久泗)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와서 칠지도 하나와 칠자경(七子鏡) 하나 그리고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는 기사를 갖고 헌상설을 기정사실화한다. 나아가서는 한반도의 임나일본부 설치까지 정당화한다.
하지만 369년은 백제와 동진의 통교 이전이라 연호 사용은 무리라는 점에서 우리 학계는 ‘태화(泰和)’를 고구려 광개토왕(374~412)과 신라 법흥왕(?~540)과 같이 백제의 독자 연호로 보고, 칠지도를 만든 왕을 근초고왕(346∼375)으로 간주하고 있다. 독자연호를 사용한 무령왕릉의 지석도 같은 사례다. 논리적으로도 독자 연호를 사용한 백제왕이 중국 연호를 사용하는 제후와 같은 존재였다면 왜왕을 후왕(侯王)이라고 할 수도 없다. 고대사회에서 도끼나 칼의 하사는 힘이 약한 집단이나 아랫사람에게 힘이 강한 집단이나 윗사람이 내리는 신표다. 이런 맥락에서 칠지도는 마치 왜왕에 대해 백제가 책봉을 주고 조공을 받는 것과 같은 종주관계를 설정하는 증표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문자기록의 사실 여부는 글자가 지닌 서체 조형 분석을 통해 더 명확하게 증명된다. 왜가 백제나 신라를 지배했다거나 칠지도를 조공처럼 받았다는 일본의 주장은 서예언어 측면에서 보면 마치 왜가 한반도에 문자를 전해 주었다고 하는 것처럼 어불성설이다.
칠지도 앞뒤 61자의 서체는 전형적인 고예(古隸) 계통이다. 당연히 광토비체와 같은 계열이지만 시종일관 수직·수평의 묵직한 필획에다 국왕의 위엄과 세련미를 두루 갖추고 있다. 균제미가 뛰어난 짜임새를 가졌음은 물론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칼의 글씨가 금으로 상감되어 있다는 점이다. 명문 외곽으로 금선이 상감기법으로 가늘게 둘러쳐져 있다. 한 두 자도 아니고 칼의 앞뒤 전부에 새기고 박아 넣었다. 상감기법은 백련강 과정을 거쳐 만든 강철 표면에 정으로 글씨를 파고, 여기에 다시 가는 금실·은실을 넣고 두드려 단단하게 밀착시킨 뒤 숫돌로 갈고 다듬어 완성한다. 이것을 보더라도 칠지도는 무기가 아니라 신표임이 증명되는데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와 맞먹는 첨단기술이다.
아직기나 왕인 박사가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준 것이 4세기 말 근초고왕 때임을 보면, 왜는 이즈음 문자문맹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칠지도에 박혀 있는 글씨미학으로 보면 ‘하사’했다거나 ‘바쳤다’는 논의 자체가 무색해진다. 4~5세기 무렵 백제는 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정의 문화수준을 구가하고 있었음은 문장을 읽기도 전에 칠지도가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고대사회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글씨야말로 민족과 지역의 문화적 색채를 가장 뚜렷하게 특징짓는 유전자다. 글자를 조작하여 왜곡되게 내용을 해석할 수는 있어도 글자의 씨인 ‘글씨’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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