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182112375&code=960202&s_code=ac176
‘전생에서 맺은 업으로(宿世結業)/ 이 세상에 함께 사니(同生一處)/ 시비를 가릴 양이면(是非相問)/ 부처님께 큰 절을 올리시게(上拜白來).’ 사언사구의 ‘숙세가’로 불리는 사랑노래다. 10여년 전 부여 땅에서 1500년의 잠을 깨고 실체를 드러내자 세상이 뒤집혔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당시 붓글씨가 그대로 현전하는 유일한 시가라는 이유로 국문학사를 다시 쓰게 했기 때문이다.
백제 노래로 ‘정읍사’가 있지만 조선의 <악학궤범>에서나 볼 수 있고, 가야의 ‘구지가’와 고구려의 ‘황조가’는 <삼국사기>에나 전한다. 그래서 삼국시대 사람들의 붓끝 온기는 애초 느낄 수도 없다. 서예문맹이 된 오늘 우리도 ‘숙세가’를 앞에 놓고 말이 아니라 글씨가 전하는 백제인들의 사랑 메시지를 제대로 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당대의 미감을 녹여낸 문자의 조형성도 해석할 길이 없으니 답답하다. 종이가 아닌 목판이라 더욱 생소하다. 그렇다면 필묵의 조형언어가 증거하는 절반의 ‘숙세가’는 어떻게 해독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서예가 무엇이고 이 땅에서 서예는 언제부터 실현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볼 필요가 있다.
서예는 글씨예술이자 붓글씨다. 전자는 문자의 관점이고 후자는 도구의 관점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서(書)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독자적 예술이 되는 지점은 붓과 만나면서부터다. 서예의 독자성으로 한자의 상형성을 꼽지만,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나 수메르의 쐐기문자도 갑골문, 종정문에 못지않다. 하지만 도구의 관점에서 아랍의 각필, 서구의 펜, 동양의 붓을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펜은 금속이라 딱딱한 반면 붓은 털이라 유연하다. 펜은 시종일관 같은 굵기인 데 비해 붓은 필압에 따라 자유자재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인간의 희로애락이 머리카락부터 팔뚝까지 굵기로 지속(遲速·빠르고 느림) 장단의 필획에 담겨 순식간에 구사된다. 서구의 선(線)과 동양의 획(劃)의 차이다. 여기에다 먹물의 농담까지 더하면 그냥 검정이 아니라 무한대의 색깔을 가진다.
이렇게 보면 결국 도구가 인간은 물론 문명권의 성격까지 결정짓는다. 붓으로 말미암아 서구와 다른 동아시아 미학의 토대이자 궁극인 서예가 성립되는 것이다. ‘서는 마음의 그림이다’(書, 心畵也)라고 설파한 한나라 양웅(기원전 53년~서기 18년)의 말은 글씨를 예술로 자각한 최초의 선언이라 말한다. 이미 서는 이때부터 실용을 넘어 글씨와 사람을 하나로 보는 심미의 경지까지 간 것이다. 서체의 역사도 비례미와 대칭미의 화신인 소전에서 붓맛을 문제삼는 쪽으로 바뀌었다. 파책(波책·필획의 삐침과 파임)이 극도로 강조된 예서나 이것을 빨리 쓴 장초(章草)가 탄생한 것이다.
■ 우리 손으로 만든 다호리 붓
한반도에 붓글씨의 시작을 알린 것은 다호리 붓이다. 1988년 경남 창원시 동읍 다호리 유적 1호분에서는 붓 5점과 삭도(削刀·나무판에 쓴 글씨를 긁어 지우는 손칼)가 출토되었다. 붓이라는 것이 뭔가. 지금의 스마트폰 같은 존재 아닌가. 칼에서 붓으로, 전서에서 예서로 문자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뀐 진·한 교체기를 전후해 한반도 남반부 변한 땅에서도 대륙과의 시차 없이 글자가 실천되었던 것이다. 공책 대신 나무판에 글씨를 적었고 쓰다가 틀리면 삭도로 파내고 다시 썼다. 당시 목간에 쓴 글자체는 필기 속도나 대륙의 문자 사정을 고려해보면 전서보다 예서와 장초가 구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호리 붓으로 인해 기원전 100년쯤 삼한시대에 이미 문자문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목간의 문자기록 역사는 그로부터 600여년이 지난 삼국시대까지도 이어졌음을 최근 발굴되는 함안 성산산성, 경주 월성해자·안압지, 부여 능산리 등지의 수많은 목간이 증거한다. 전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간결해진 행·초서의 글자 구조와 변화가 심한 필획은 쓴 사람마다 다른 성정기질을 그대로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러니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여기에 서가 정보를 넘어 예술이 되는 이유가 있다. 내용도 행정문서나 교역물목, 지명은 물론 일상생활과 시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 대륙과 같으면서도 다른 서사문화 전개
삼국시대 함안 성산산성 목간에서는 ‘勿思伐’‘及伐’‘鄒文’‘甘文’‘陽村’ 등의 지명이 보인다. 바로 낙동강 상류의 신라 상주 땅이다. 태세 변화가 심하고 펄펄 뛰는 필획이 인상적이다. 그간 우리나라 고대 서예역사는 금석문에 박힌 좀처럼 말 없는 글씨에 국한되어 왔다. 하지만 이런 목간의 활달하기 그지없는 생활글씨가 발굴됨으로써 절반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그 시작이 바로 다호리 붓이다.
다호리 붓은 붓대의 양단에 붓털을 부착한 일간이필(一杆二筆)이고, 필간의 재질도 대가 아니라 옻칠한 나무라는 점에서 대륙과 같으면서도 다른 서사(書寫)문화의 전개를 확인할 수 있다. 전국시대에서 한대에 이르는 필간은 우리와 달리 대나무이고 붓털도 대롱의 한쪽에만 끼워져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다호리 출토 붓은 중국에서 들어온 게 아니라 변한지역에서 직접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호리 붓이 한반도 서예문명을 증거한 이래 20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붓의 ‘쓰기’가 아니라 키보드의 ‘치기’ 가운데 살고 있다. ‘쓰기’가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글씨를 만들어 가는 조형언어의 창작행위라면, ‘치기’는 이미 만들어진 기계글씨를 가져다 사용하는 소비행위일 뿐이다. 내 생각을 여하히 붓으로 화선지라는 우주공간에 점획의 지속, 장단, 태세를 고민하여 글자언어로 형상화하는 일이란 여간 수고롭지 않다. 이에 비하면 모든 고뇌의 과정을 생략한 채 완성된 자판의 기계글씨를 골라 두드리기란 얼마나 편하고 빠른가.
그런데 문제는 붓의 수고로움을 키보드의 편안함에 맡기는 순간부터 인간이 바로 기계가 되어간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치매의 급습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스마트폰이 이기도, 흉기도 되는 이율배반의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숙세가’ 글씨의 무심한 필획 숨결에 귀기울여 볼까. 다호리 붓은 알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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