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기 관장입니다. 함께 둘러보시겠어요" 나들이 삼아 들린 한 가족방문객이 그의 제의를 흔쾌히 수락한다. '만물박사'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이 농담섞인 발랄한 분위기로 박물관 관람의 참 재미를 선사하고, 사진만 찍고 가려했던 이 가족은 뜻밖의 값진 경험을 했다.
이정모 관장이 출근하면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하는 일이다. 하루 한 팀, 이 관장은 직접 전시물 해설을 맡는 큐레이터로 변신한다. 관장이라면 으레 집무실에서 무게 잡고 행정 업무만 처리할 것으로 여기기 쉬운 데 이 관장은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Science Communicator·SC)일에 더 열심이다.
"한번은 선배 가족이 찾아온 적 있는 데 돌아간 후 전화가 걸려왔죠. '너 때문에 아이가 생물·지질학과로 진학하려고 한다. 망했다'고요. 내신 1등급으로 선배는 의대를 가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더 잘 됐네요. 지금 우리 세대는 의사가 부족하니까 고소득직장이었지만, 그 아이 세대에 의사하면 망합니다'라구요."
이 관장이 SC로서 재능을 갖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건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연세대 생화학 전공 학부생 시절, 교수님께 들었던 DNA 등의 강연 얘기를 어머니께 해 드렸는데 재미있게 들으셨어요. 어머니는 아들이 대학가서 어떤 수업을 받는지 항상 궁금해 하셨죠. 어머니가 어려운 과학이론을 줄줄 꿰기 시작하면서 '어라! 내게 이런 전달력이 있었나'라고 생각했어요."
이후 이 관장은 1992년, 독일 본 대학 화학과에서 공부하던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SC의 꿈을 키워갔다. 그는 관장으로 부임하기 전 과학자에서 전업작가로 변신해 책을 쓴 이력도 있다.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인데 제법 잘 팔렸다. 지난 2002년 12월 출간한 '해리포터 사이언스'는 6만5000부를 찍었다.
활동 중 겪은 슬럼프는 SC로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특히 쉽게 알리려는 과정에서 과학의 본질을 제대로 전달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과학 대중화가 소용없는 허튼짓처럼 느껴졌어요. 과학을 그저 쉽게만 전달하려 하다 보니 어려운 내용을 죄다 빼버렸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코미디언과 함께 과학이론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는데 엉뚱한 곳으로 계속 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담당 프로그램 PD가 "너무 재밌다. 계속하자"고 제안했지만, 그건 코미디였지 과학은 아니었죠. 출판사에서도 무조건 쉽게 써달라고 얘기해요. 하지만 화학식 없는 화학책, 수식 없는 물리책, 알파벳 없는 영어책, 연도 없는 역사책, 이런 건 없는 거잖아요. 1980년에서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별 반성 없이 흘러왔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죠."
이후 이 관장은 과학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무턱대고 내려오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과학의 대중화만큼 대중의 과학화 노력도 필요하다는 주장을 새롭게 폈다.
"3년 전부터 우리 박물관에선 '세상과 통하는 과학' 강연을 하고 있죠. 입자물리학 교수가 대학원생에서 하는 얘기를 그대로 해요. 청중들이 다 이해한다고 보지는 않아요. 나머지 디테일(Detail, 세부적인) 부분은 자기가 앞으로 채워나갈 몫이죠. 우리는 강연을 통해 각자의 수준에서 무슨 내용을 더 알아봐야 하는지 그 방향만을 제시해요.
잘 따라주면 언젠가는 자기도 모르게 교양과학 서적이 아니라 대학물리 교과서를 읽는 수준까지 올라가게 되죠. 그땐 일반인들이 못보고 놓치는 포인트까지 모두 챙길 수 있는 내공을 갖게 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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