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청원 낸 문인들 구속, 저항의 ‘자실’이 싹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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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16 19:00 | 수정 : 20141117 20:39 |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① 백지연이 묻고 염무웅이 답하다
염무웅(73) 영남대 명예교수는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최인훈론’이 당선된 이래 반세기 동안 문예비평과 문인운동의 선두에 서왔다. 67년부터 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에 참여해 72년 주간, 78년 발행인을 맡았다. 리얼리즘문학·농민문학·민족문학 등의 평론을 개척해왔다.
학생데모와 개헌청원 운동 시작 문인들도 가만있을 수 없었어요 74년 1월7일 이호철 주도로 61명이 개헌 지지 성명을 발표하고 차례로 중정에 잡혀갔어요 2월 문인간첩단 사건이 터졌고요
염 71년 4월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대선이 있었죠. 그때 김재준 목사, 이병린 변호사, 천관우 선생 세 분이 대표가 되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를 결성하고 ‘민주수호선언’을 발표했어요. 60명 서명자 중 문인이 12명이나 된다는 게 주목할 일입니다. 내 생각에 문단에서 천관우 선생을 도와 민수협을 주도한 분은 이호철 선생이 아닌가 합니다. 이 선생은 민수협 운영위원까지 맡았죠. 당시 나는 <창작과 비평>(창비) 편집을 맡고 있었는데, 지금의 종로구청(옛 수송초교) 건너편의 출판사 신구문화사에서 방 하나를 빌려 혼자서 일을 했어요. 내 기억에는 그때 이호철·남정현 두 분이 함께 창비 사무실로 서명을 받으러 왔어요. 그래서 창비에 자주 모이던 문인들 대부분이 서명했지요. 나로서도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단체에 참여한 것은 그때가 처음입니다. 참고로 ‘민주수호선언’에 서명한 문인 명단을 밝히면 박두진·이호철·남정현·박용숙·최인훈·구중서·한남철·김지하·조태일·방영웅·박태순·염무웅 등입니다. 간첩 조작의 실체를 알게 됐고 이심전심 연대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 기반이 된 겁니다 11월18일 그날이 ‘디데이’였죠 |
왼쪽부터 백지연 씨, 염무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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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② 백지연이 묻고 염무웅이 답하다
신경림 ‘농무’ 황석영 ‘객지’는
70년 전후 문학사적 전환의 상징
김수영·신동엽 등 60년대 참여문학
70년대 민족문학으로 수렴됐지요
70년 전후 문학사적 전환의 상징
김수영·신동엽 등 60년대 참여문학
70년대 민족문학으로 수렴됐지요
문학 내부에 질적 변화가 생겼어요
골방에서 광장으로 나온 거니까
백지연(이하 백) 1977년 해직교수들이 모여 ‘민주교육선언’을 발표했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1978년 발족한 해직교수협의회 이야기와 교육지표 사건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백 그즈음 문단 내부에서도 어떤 경향에 특별히 연결되어 있지 않은 분들이 자실에 함께하게 됐구요. 요산 김정한 선생님과 자실의 인연도 그런 점에서 새삼 되짚어볼 만합니다.
1987년 6월항쟁의 민주화 열기를 타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그해 9월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재출범했다. 부산에서 칩거해온 요산 김정한 선생이 의장을 맡아 기꺼이 참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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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70년 전후에 일대 문학사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전환이 뛰어난 작품의 생산으로 표현되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신경림의 <농무>와 황석영의 <객지>같은 작품의 발표는 전환의 징후이고 하나의 상징적 사건입니다. 60년대의 김수영, 신동엽, 이호철, 최인훈 등의 문학과 더불어 해방 전 세대인 김정한의 교량적 구실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백 식민지 시대의 저항문학과 해방 후 민족문학의 연속성을 파악하는 의미에서 김정한의 소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 깊이 와닿는데요.
1974년 11월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족식 때 발표한 ‘자유실천 101인 선언문’의 원본. 당시 시인 양성우가 밤새 등사원지에 철필로 글씨를 쓰고 등사기를 긁어 인쇄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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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선생님께서는 60년대 현장에서 벌어졌던 문학의 현실참여를 둘러싼 비평적 논쟁들이 그 당대보다는 70년대에 와서 풍요로운 창작 성과로 연결되었다고 보시는데요. 이 지점에서 문인들의 현실참여 운동이 지니는 역사적, 문학사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짚어보았으면 합니다.
60년대에 김수영, 신동엽, 최인훈, 이호철 등 뛰어난 작가들이 활동했고 70년대에 들어와 고은, 신경림을 비롯해 황석영, 김지하, 조태일, 조세희, 윤흥길 등의 좋은 작품이 나왔는데, 그 작품들이 어떤 조직이나 단체활동 때문에 나온 건 아니지요. ‘자실’부터 작가회의까지 40년의 활동과, 이런 좋은 작품들의 생산을 연결지어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라고 할 순 없다는 뜻입니다. 문학도 운동도 그 뿌리는 현실이에요. 다시 말하면 현실의 변화와 민중 역량의 성장이 작품으로도 표현되고 현실 운동으로도 나타났다고 할 수 있어요.
염 88년 말에 황석영, 김용태, 임진택, 문호근, 이애주, 영화감독 이장호, 정지영 등이 주도한 연대조직이 민예총의 이름으로 결성되었지요. 내게는 민족문학위원회 위원장이란 직함이 맡겨졌어요. 이후 내가 주도해서 세미나를 열고 민족미학연구소를 만들고 92년 문예아카데미를 개설했지요. 이어 93년 9월에는 민예총이 사단법인으로 전환합니다. 민예총의 예에 따라 작가회의도 얼마간의 진통 끝에 95년 사단법인이 됐지요.
돌아보면 5년 남짓한 민예총 경험을 통해 나는 인접 장르의 예술가·활동가들과 많은 접촉을 하면서 여러 가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글쓰기가 원칙적으로 혼자 하는 작업이라면 전시와 공연은 창작자뿐 아니라 미적 감각을 지닌 사람들의 협동작업·공동작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어요. 6월항쟁 같은 운동의 고조기에 문학보다 미술이나 연극, 노래가 전위적 구실을 맡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점에서 80년대 이후 문학이 이른바 ‘딴따라’들의 노는 문화를 만나면서 자기 내부에 질적 변화가 생긴 측면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골방에서 광장으로 나온 거니까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민예총이 급전직하 추락한 것은 이유 여하를 떠나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건강한 민중예술의 퇴출을 뜻하는 현상이니까요.
2005년 북녘서 연 작가회의는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2005년 7월20~25일 북한 평양과 백두산·묘향산 일대에서 분단 이래 최초로 성사된 남북작가대회는 작가회의를 비롯한 문인들이 89년 이래 추진해온 통일문화운동의 한 정점이었다. 사진은 그해 7월23일 새벽 백두산 꼭대기 장군봉 아래 개활지에서 남·북·동포 문인 등 150여명이 천지를 등지고 동쪽 개마고원 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있는 순간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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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작가회의 이사장을 맡으실 때 가장 큰 일은 ‘남북작가대회’ 개최였을 텐데요.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다면 무엇일까요.
그런데 그때 무척 곤혹스러웠던 게 금강산으로 떠나기 직전 북한에서 핵실험을 한 거예요. 가느냐 마느냐로 고민되는 상황이었지요. 결국 가기로 결단을 내리고 무사히 다녀왔어요. 얼마 뒤 이 6·15민족문학인협회 명의로 <통일문학>이라는 잡지도 3호까지 냈어요. 남북의 편집위원들이 상대쪽 작가들 작품을 바꾸어 읽고 작품집을 만들었지요. 김형수와 정도상이 편집회의를 위해 여러 번 개성에 다녀왔고 나와 김재용 교수도 두어 번 갔었어요.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마지막 호를 냈고 그 뒤로는 그런 만남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됐습니다.
백 마지막으로 작가회의 40돌을 맞아 선생님께서 글을 쓰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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