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인간’을 일부러 키운다고?
교육은 시장과 달리 무한책임의 영역이다. 당장은 성과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주식회사가 되어버린 일본과 한국에서는 학교를 시장으로 여기는 풍토가 형성되고 있다. 우치다 다쓰루는 다시 배움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김은남 기자 | ken@sisain.co.kr
[357호] 승인 2014.07.22 08:57:21
글처럼 말에서도 박력이 넘쳤다. 우치다 다쓰루(고베 여학원대학 명예교수)는 스스로를 무도인(武道人)이라 소개하곤 한다. 실제로 합기도 7단인 그는 2011년부터 자신의 집 1층을 ‘개풍관(凱風館)’으로 개조해 무도와 공부를 겸한 배움의 공간으로 개방하고 있다.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부터 영화론·공부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를 대중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온 그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하류지향> <교사를 춤추게 하라> 같은 일련의 교육 관련 저서가 소개되면서다. 그가 책에서 묘사한 일본의 교육 현실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한국에서도 판박이로 재연되는 것을 보며, 그의 통찰에 관심을 보이는 이가 부쩍 늘었다. 이를 입증하듯 6월24일과 25일 흥덕고(경기도 용인)와 서울여성프라자(서울 대방동)에서 열린 그의 강연회는 만석 행진을 기록했다. ‘에듀니티’와 ‘참여소통교육모임’이 공동 초청해 이뤄진 강좌를 지상중계한다.
일찍이 본 적 없는 아이들의 출현:교육 관련 글을 쓰면서 내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일본 교육이 왜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렸나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내 글이 관심을 끈다는 것은 뭔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일 터이다. 한·일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이 그렇다. 급속한 글로벌화에 의해 교육 자체가 뒤틀어지는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듯하다.
<하류지향><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의 저자인 우치다 다쓰루(오른쪽)가 6월25일 서울여성프라자에서 한국 독자들을 상대로 강연하고 있다. 1980년대 들어 일본 교사들이 놀란 건 ‘일찍이 본 적 없는 아이들’이 출현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아이들은 자신의 학력이 낮은 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만족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뿐 아니다. 수업 중 실컷 떠들다 교사가 다가가 “왜 떠들지?” 하고 물으면 “안 떠들었는데요”라고 태연하게 답하는 아이들, 담배 피우다 눈앞에서 걸려도 “안 피웠는데요”라고 발뺌하는 아이들도 속출했다. 이런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출현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고민하던 내게 단서를 던져준 것이 스와 데쓰지 선생의 <왕자와 공주가 되어가는 아이들>이다. 이 책에서 스와 선생이 제시한 개념이 ‘등가교환(동일한 가치를 지닌 상품끼리의 교환)’이다. 곧 시장 논리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아이들은 자신이 잘못한 행위와 교사가 내릴 처분을 등가로 만들고자 하며, 이에 따라 자신의 잘못을 최대한 축소하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내가 관찰한 것도 아이들이 일종의 소비자로서 학교를 대한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학교는 시장이고, 교사는 교육 서비스를 파는 사람이다. 소비자의 관심사는 가장 적은 단가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다. 학생들도 마찬가지. 이들이 지불해야 할 단가는 수업 시간 50분을 인내하며 앉아 있기, 교사에게 경의 표하기, 학교 규칙 지키기 등이다. 그렇다면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것(학점·졸업장)을 끌어내는 게 이들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소비 행위가 되는 것이다.
학교는 시장, 학생은 소비자:등가교환에 충실한 이런 아이들의 행위는 처음에는 학교 규칙을 무시하고 교사에 대한 경의를 표하지 않는 등 교실 붕괴 현상으로 나타났다. 1990년대 접어들면 이것이 학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60점만 받으면 합격하는데 뭐하러 70~80점을 받으려 전심전력해야 해?’ 이런 소비자 마인드를 깊숙이 내면화한 결과 아이들이 배움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다. 대학은 이를 더 부채질했다. 1990년대 들어 일본 대학은 교양 과목을 없애고 1학년 때부터 전공만 공부하게끔 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에브리싱(everything)에 대해 섬싱(something)을 알고, 섬싱에 대해 에브리싱을 아는 사람이 지식인’이라는 합의가 있었던 과거와 달리 ‘당장 필요한 지식만을 최소의 비용으로 손에 넣는다’는 시장주의적 사고가 대학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실패로 판명되고 있다. 전문가란 다른 분야 사람들과 어떻게 콜라보레이션(협력)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4년간 전공만 공부한 이들은 자기 분야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뭘 공부하는지조차 설명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가장 심각한 분야가 의학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환자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컴퓨터만 들여다보며 얘기하는 의사가 흔하다.
‘우리가 뭔가 방향을 잘못 설정했구나’ 하고 다들 느낄 때쯤 교육 행정은 더 나쁜 쪽으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국립대 법인화 시도가 그것이다. 모든 대학에 교육 예산을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원칙은 이로써 무너졌다. 대신 외부의 선택, 특히 기업의 선택을 받은 대학만이 살아남는 구조가 됐다. 선택을 받지 못한 대학은 사실상 사라져도 좋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국립대의 주식회사화가 이뤄진 셈이다.
글로벌 인재라는 허상:대학이 주식회사처럼 된 것은 결국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라는 시장의 요구를 따른 것이기도 하다. 글로벌 인재의 조건이 뭘까? 한 가지다. 기업의 수익을 올리는 거다. 그러려면 숙련되었으면서도 값싼 노동력이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동성(모빌리티)이다. 글로벌 인재는 내일부터 외국 지점에서 근무하라면 오늘 당장 짐을 쌀 수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이런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족 사회나 지역사회 네트워크의 허브 구실을 하는 사람, “네가 없으면 곤란해” “네가 여기 있어주면 좋겠어”라고 주변 사람들이 붙드는 사람은 이런 명령에 쉽게 응할 수 없다. 결국 기업이 원하는 모빌리티가 뛰어난 인재는 주변과의 연결점이 없는 사람, 뿌리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글로벌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일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다. 지금 일본에서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라면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고 외국에 집과 친구가 있는 사람’ ‘1년에 절반 정도는 외국에서 체류하는 사람’ 등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 일본 내 커뮤니티가 필요 없는 사람, 극단적으로는 당장 일본 열도가 붕괴하고 원전이 재폭발해도 도망가면 그뿐일 사람들이 지금 일본의 권력과 재력을 틀어쥐고 있는 셈이다.
이런 글로벌 인재 외에 일본이 새롭게 육성하고자 하는 계층이 있다고 나는 본다. 힘없고 학력도 낮고 자기평가도 낮은 계층이 그것이다. 이를 만들려니 모든 국민에게 교육 기회를 확대할 필요가 없다는 발상도 나온다. 왜? 글로벌 기업이 판단하기에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인건비가 비싸고 안전 기준이 까다로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데도 한계가 따른다. 중국이건 동남아건 갈수록 인건비가 오르고 있고, 그 나라 정치·사회 시스템에 맞추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러느니 일본 내 인건비를 낮추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잘 믿기지 않으시나? 2012년 중의회 선거에서 하시모토 도루(오사카 시장)가 이끈 일본 유신회가 돌풍을 일으켰는데, 그때 하시모토가 내건 것이 최저임금제 철폐였다. 당시 오사카 최저시급이 800엔(약 8000원) 수준이었는데, 이걸 3분의 1로 줄이면 고용을 3배로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시급을 270엔으로 줄이면 하루 8시간씩 한 달 일해서 5만 엔(약 50만 원)가량을 번다는 얘기다. 그걸로 어떻게 결혼을 하고 애를 낳나. 그런데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은 이런 주장을 하는 정당에 일본 노동자와 샐러리맨들이 높은 지지를 보냈다는 거다.
주식회사가 되어가는 일본:결국 핵심은 일본 사회 전반이 주식회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앞장서 이끄는 이가 아베 신조 총리다. 그는 스스로를 주식회사 일본의 CEO라 여기는 듯하다. 그런데 주식회사는 민주주의와 관계가 멀다. 경영 방침을 정하거나 새 제품을 개발하는 데 종업원의 의견을 수렴하는 회사는 없다. 이사회 내용도 전부 공개하지 않는다. 경영에서는 모든 것을 톱다운 방식(top-down:위에서 의사 결정을 내린 다음 아래에 이를 지시하는 방식)으로 결정하며, 경영상 판단 기준은 오직 시장이다. CEO가 아무리 독재적인 판단을 내렸더라도 시장이 반응하면 오케이다. 시장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는 게 비즈니스맨의 신조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식회사와 국민국가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각각 유한책임과 무한책임을 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주식회사는 실패할 경우 도산하면 끝이다. 그런데 국민국가는 정책에 실패할 경우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의 책임이 패전했다고 사라지나? 아니다. 식민 지배를 경험했던 분들이 그만 됐다고 할 때까지 일본은 과거를 책임지려 노력해야 한다. 국가는 무한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국가의 결정에 모든 구성원이 참여해야 하는 것은 그래서다. 자칫하면 우리가 잘못 결정한 것에 대한 책임을 내 아들, 손자는 물론 증손자까지 져야 한다. 그런 만큼 우리가 민주적 절차를 거치는 것은 이 모든 책임을 나눠지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내가 자민당에 대해 화가 나는 건 정책 그 자체보다 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태도 때문이다. 아베 신조가 늘 하는 말이 “내 정책에 반대하면 다음 선거에서 나를 떨어뜨리라”는 것이다. 이건 전형적인 주식회사 마인드다. 나는 아베가 일본을 정말 위험한 길, 망치는 길로 몰아가고 있다고 본다.
다시 배움의 본질로:교육은 시장과 달리 무한책임의 영역이다. 학교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아이들을 길러내는 곳이고, 그것이 교육 목표가 되어야 한다. 취업률·진학률처럼 당해 연도에 결정되는 것으로 교육의 성과를 잴 수는 없다.
스티브 잡스 자서전을 보면, 대학을 중퇴하고 미대 캘리그래피(서체학) 수업을 도강한 얘기가 나온다. 그로부터 10년 뒤 매킨토시를 만들면서 그는 PC에 캘리그래피를 응용한 폰트 개념을 최초로 도입해 선풍적 인기를 끈다. 잡스는 ‘그제야 10년 전 내가 왜 그 수업을 들었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배움이란 그런 것이다. 배우기 시작할 때 목적을 설정하면 안 된다. 대학에서 보면 “난 이런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학생일수록 그 연구를 끝까지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더라(웃음). 그보다는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이것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진짜 연구자가 되곤 한다.
자기가 어디를 향하는지 잘 모를 때 오히려 성숙이 일어난다. 자기가 설정한 목표대로만 살아가서는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 한참을 앞으로 가다 ‘아, 그땐 내가 참 유치했구나’ 하면서 출발점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 그러면서 자신이 놓인 상황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의 과거를 끊임없이 고쳐 쓰게 되는 것, 그것이 성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숙의 반대말은 미성숙이 아닌 트라우마다.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해도 과거의 자신에 사로잡혀 바뀌지 않는 게 트라우마 아닌가. 그러니 ‘난 ○○대학에 가서 △△기업에 취직한 다음 연봉 얼마를 받고 살아갈 거야’ 하는 식으로 인생 설계도를 만든 다음 그대로 살아가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트라우마적인 삶을 살아가는 거라 볼 수 있다(웃음). 교육은 미래를 내다보며 아이들의 성숙을 이끄는 일이다. 당장은 성과가 나지 않는다. 일본이 50년 뒤 민주주의가 잘 구현되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살만한 곳이 되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교육의 성과가 될 것이다.
|
|
|
|
|
|
|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