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3일 김두식 교수의 박경신 교수(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인터뷰
지난달 29일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만난 박 교수는 “사실은 우리가 검열된 세상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궁지에 몰린 자신의 상황을 언급할 땐 얼굴을 잔뜩 찌푸리기도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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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저항하는 검열자’ 박경신 고려대 교수
인터넷에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박경신 교수를 검색하면 온갖 험악한 기사와 댓글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986년 고1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간 박경신은 1999년 교수가 되어 귀국하면서 “병역을 기피하려고” 미국시민권을 취득합니다. 그러고도 “뻔뻔스럽게”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언소주)의 광고불매 운동을 옹호하는 등 각종 사회활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위원 같은 “공직”에도 진출합니다. 심지어 지난해 7월에는 자신의 블로그에 남성 성기 사진 5장과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 그림을 연달아 올려, 포털 검색순위 1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남성 성기 사진은 검찰에 의해 정식으로 기소되어 현재 형사재판이 진행중입니다. 어느 보수언론 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피할 요량으로 미국시민권을 딴 박 교수가 그렇게 걱정하는 ‘우리나라’는 대체 어느 나라인지 꼭 한번 묻고 싶다.”
실제로 박경신은 지난 13년간 사법개혁을 주장하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며 미국 헌법이론을 소개하는 엄청난 분량의 논문과 칼럼을 생산했습니다. 또한 피디수첩, 언소주, 미네르바, 군 불온서적 법무관 파면, 인터넷실명제 사건 등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중요한 재판에는 거의 빠짐없이 불려나가 전문가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참여연대와 함께 기획하고 조직한 소송도 한두 건이 아닙니다. 동료 법학교수로서 꽤 긴 기간 그를 관찰해온 제가 궁금했던 것은 그의 국적이 아니라 이런 독특한 ‘에너지의 근원’이었습니다.
-얼마 전 <한겨레>에 ‘검열자 일기, 기소되다’라는 칼럼을 기고했죠. 성기 사진이 박 교수 것이라는 <한겨레> 트위터의 오보를 보고, 옛 여자친구가 “박경신 것이 아니라고 제보하겠다”고 연락했다는 내용이 나오던데, 공개적으로 이런 농담을 해도 괜찮나요?
“물론 제 처에게 허락을 받고 썼죠.(웃음) 저를 아는 사람들은 그걸 읽고 빵 터졌다고 하더군요. 엄밀하게 말하자면 제 옛 여자친구의 농담이지 제 농담은 아니에요.”
왜 발기된 성기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나
-성기 사진을 올린 이유는?
“제가 방심위원이 되면서 국민의 정신생활을 통제하는 ‘검열자’가 된 셈이잖아요. 국가가 국민의 머리에 들어가 직접 생각을 통제할 수는 없으니까 국민이 보고 듣는 것을 통제하는 방식을 취하는 거죠. 법학 지식을 이용해서 불합리한 통제를 막는 게 저의 임무인데, 국민이 검열 때문에 어떤 것을 보지 못하는지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박경신 자료실’(blog.naver.com/kyungsinpark)이라는 제 블로그에 ‘검열자 일기’를 쓰기 시작했죠. 촌스러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제가 쓴 논문이나 칼럼을 지인들과 나누는 소박한 블로그예요. 제가 양심적으로 판단해도 무리하게 삭제되거나 차단된 경우를 자료실에 남겨놓고 나중에 추가적인 논의나 연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성기 사진은 ‘청소년유해물로 접근을 제한하자’고 타협했는데도 음란물로 삭제돼버려서 이건 꼭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죠.”
-사진까지 직접 올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제가 저작권법이나 명예훼손을 가르치다 보면 판결문만 봐서는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음악이든 영화든 꼭 실물을 구해서 틀어주죠. 박정희 대통령을 소재로 한 <그때 그 사람들>의 명예훼손 사건도 제가 관여했는데, 장면을 아무리 설명해도 실물을 보지 않으면 토론이 되지 않거든요. 이번에도 저는 검열에 대해서 매우 건조한 토론을 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성의 과학>이라고 관련 전문가들이 내놓은 야심작을 보면, 발기된 총천연색 사진을 보여주면서 발기의 진화학적 유래, 즉 삽입의 용이성을 설명하죠. 저는 그런 사진들이 당연히 허용되어야 하고, 청소년 유해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혹시 청소년 유해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네이버에 그 페이지만 성인 인증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안 된다고 하더군요.”
-법률가들은 제3자적 입장에서 남을 옹호하는 역할만 하는 게 보통인데, 박 교수님은 직접 당사자가 되기로 결심한 건가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덕분에 사람들이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구분할 줄 알게 됐잖아요.(웃음) 아무도 모르게 게시물을 내리는 검열자의 존재가 알려진 거죠. 검찰이 징역형을 구형하려고 저를 표적으로 정식기소했다는 얘기도 있던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저는 검열자 일기에 성기 사진을 올린 때가 아니라, 미네르바, 언소주 등을 옹호하는 글을 쓰며 검찰을 비판했을 때 이미 당사자가 된 거죠.”
-일종의 보복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미네르바가 쓴 글 280개를 탈탈 털어서 부정확한 내용은 딱 2개였어요. 누가 글을 써도 그 정도 오류는 있기 마련인데 미네르바만 잡아서 기소한 것은 시끄러운 비판자의 입을 막기 위함이죠. 이제는 제가 미네르바와 똑같은 신세가 됐어요. 위축효과를 노린 거죠. 표현의 자유는 조금만 겁을 주면 사람들이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게 귀찮고 번거로워서라도 말을 조심하게 되거든요.”
화제를 돌려, 대전과학고 1학년 재학중 카이스트에 합격했지만 갑작스런 미국 이민으로 입학을 포기하게 된 과정을 물었습니다.
“작은누나가 이대 정외과를 다니면서 운동권이 됐어요. 집에 오면 저한테도 농민가 같은 이상한 노래를 가르쳤죠. 시골에서 농사짓던 아버지가 그걸 감지하고 ‘딸을 감옥에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셨어요. 6·25 때 인민군이 안면도에 들어오면서 지주였던 할아버지를 인민위원장에 앉혔는데 나중에 국군이 들어오면서 맞아 죽을 뻔하셨대요. 장남인 아버지는 그걸 옆에서 지켜보셨고요.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절대로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믿으셨어요. 친지의 초청을 받아 86년에 가족이 이민을 갔죠.”
운동권으로부터 딸을 구하려 했던 미국행
그러나 운동권에서 딸을 구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88년 여름 전대협은 “가자 한라에서, 오라 백두에서, 남북은 통일로, 양키는 아메리카로”를 외치며 북한 쪽과 8·15 남북청년학생회담을 추진했습니다. 연세대에서 전대협 의장 오영식과 남쪽 대표 김중기 등이 온몸에 태극기를 감싸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소원’을 불렀던 바로 그 시절입니다. 국내에서는 전대협의 움직임이 원천봉쇄되었지만 ‘미주청년조국통일협의회’는 남녀 두 명의 대표를 북한으로 파견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박경신의 작은누나 박미화(당시 활동명 ‘박진아’)였습니다. 임수경씨가 방북하기 정확히 1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누나는 동지들을 설득해 출발 몇 시간 전에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 ‘못 돌아올 수도 있으니 딸 하나 잃은 걸로 생각하라’고 당당하게 말하고는 부모님이 몸으로 막는데 그걸 밀치고 그냥 나갔죠. (한동안 침묵) 그땐 누나가 싫었어요. (다시 침묵) 안기부는 북한에서 찍은 누나의 비디오를 보여주며 부모님을 위협했고, 한국에 있는 친척들은 요즘 문제 되는 민간인 사찰을 당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죠.”
-동생 입장에서 누나가 집안을 망하게 한다고 생각했겠군요?
“실제로 망했죠. (한동안 침묵) 그 위의 큰누나는 결혼을 하고 나서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됐어요. ‘결혼할 때는 몰랐는데 네 동생 때문에 내 앞길이 막혔다’면서 큰누나를 학대한 거죠. 큰누나의 남편은 분단이 남긴 편견과 공포를 그대로 간직한 사람이었어요. 결국 학대를 못 이겨 이혼을 하는 과정에서 큰누나가 자살을 해요.”
이 장면에서 박경신은 눈물을 참느라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80년대 운동권 얘기를 한번 벗어나 보고자 애써 고른 인터뷰 대상이었는데, 분단의 상처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한국의 표현의 자유 상황을 묻는 외신기자의 전화가 걸려와 영어로 한참을 통화한 뒤에야 그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작은누나가 분단을 투쟁과 극복의 대상으로 삼았잖아요. 작은누나의 운동을 막으려고 가족이 이민을 갔는데, 결국 그 분단이 낳은 편견과 공포에 큰누나가 희생된 거죠. 사람들은 흔히 ‘좌파는 너무 이상적이다, 비판은 옳은데 방법이 틀렸다’고 얘기하며 방관자의 입장에 서요. 그런 핑계로 눈앞의 문제를 피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나쁜 일인지 그때 알게 됐어요. 만약 제가 그때 적극적으로 작은누나를 변호하며 편견과 공포에 맞섰다면, 큰누나도 ‘내 동생이 뭐가 잘못됐냐?’며 당당할 수 있었을 테고, 자살도 없었겠죠. 지금도 책임을 느껴요. 그다음부터는 큰누나 몫까지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무슨 일을 하든 더 열심히 해요. 큰누나가 살지 못한 만큼 제가 대신 살아주는 게 죽은 사람에 대한 가장 올바른 추모라고 생각하는 거죠.”
-88년 가을 하버드대 물리학과에 진학하면서 누나 같은 운동권이 됐나요?
“그건 아니고요. 90년 여름 이철 의원실에서 인턴을 했어요. 정확히는 이철 의원의 비서관이던 안희정씨 밑에서 신문기사 번역을 한 거죠. 그때 아줌마 아저씨들이 국회 담벼락 옆에 불쌍하게 앉아서 농성중인 걸 봤는데 전교조 선생님들이었어요. 여름방학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가니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어느새 누나를 따르고 있더군요. 그해 가을부터 하버드에서 서재정 교수, 서무석 목사의 도움을 받아 풍물패를 조직하고 우리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죠. 91년에 피코 아줌마들이 피코 본사를 상대로 소송할 때는 풍물패가 모금공연도 하고, 미국 북동부지역에서 인기가 많아 투어를 다닐 정도였어요. 누나 같은 운동권이 아니라 누나보다 더 잘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죠.(웃음)”
-하버드에서 함께 공부한 홍정욱 의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농담이었겠지만 그 친구는 그때부터 일본어 시간에 ‘뭐가 되고 싶습니까?’ 하면 ‘다이토료’(대통령)라고 대답했어요. 요즘 시민단체들이 민주주의나 공정성을 요구하면서 근거로 드는 문헌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미국 사회의 제도는 엄청난 보수성과 함께 엄청난 해방성이 있거든요. 홍 의원은 그 해방성을 우리나라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죠, 마음만 먹으면요.(웃음) 에프티에이(FTA) 날치기에 불참한 거나 이명박 정부의 언론정책을 치졸하다고 비판한 게 홍 의원의 진짜 모습이라 믿고 싶어요.”
대학 졸업을 앞둔 박경신은 하버드에 강연을 하러 온 서승 선생에게서 “최고가 아니라면 동포사회에 물리학자가 그렇게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조언을 듣고 진로를 틀어 로스앤젤레스캘리포니아대(UCLA) 로스쿨에 진학합니다. 아침에 배운 노동법을 저녁에 이주노동자센터에서 상담과 자원봉사를 하며 바로 써먹고, 이주노동자센터에서 알게 된 첨단의 노동법 이슈를 다음날이면 로스쿨 공부에 반영하는 “선순환”이 이어진 로스쿨 생활이었습니다.
졸업 후 이주노동자를 돕는 변호사 생활을 계속하던 그가 귀국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버지가 박정희 시절 산을 개간해 이룬 얼마 안 되는 재산이 있었는데, 국내에서 사기 비슷한 걸 당했어요. 큰누나가 죽은 후라 그 돈마저 찾지 못하면 아버지가 미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국내 최고 변호사들이 모두 ‘억울하지만, 질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는 거예요. 직접 와서 어떻게든 돈을 찾아야 했어요. 마침 한동대 법학부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아 귀국하게 됐죠. 교수로 일하면서, 하승수 이상훈 변호사가 쓴 <혼자 소송하는 법> 책을 공부해 결국 나홀로 소송으로 아버지 돈을 되찾았죠.”
보수언론에 두들겨맞은 그 병역문제
-그 당시 “병역문제 때문에” 미국시민권을 취득했다고 본인 스스로 밝힌 걸 나중에 보수언론에서 문제 삼았죠?
“아버지 재산을 되찾으러 한국에 온 건데, 군대에 가면 그걸 할 수가 없잖아요. 그 당시로는 피할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되찾은 뒤에는 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느냐? 막상 한국에 있다 보니 변호사 정원제 같은 현실 문제가 점점 저를 사로잡았어요. 정의를 주장하는 변호사들이 가장 불공정한 특혜를 받는데 이걸 깨지 못하면 양극화고 뭐고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런 문제들과 싸우다 보니 한동대에 미국식 로스쿨을 만들게 되었고, 한국법에 대해 글 쓰는 것도 재미있어서 조금씩 체류를 연장하게 됐습니다. 재귀화할 기회도 있었지만, 김두식 교수님이 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책을 읽고 ‘국적까지 바꾸면서 총을 들어야 하나?’ 하는 의문도 생겼고요. 하여튼 영구 체류가 확실해졌을 때는 이미 군대 갈 나이가 지나 있었고, 그때 재귀화하는 것은 정치할 목적 빼고는 의미가 없었어요. 어쨌든 병역을 마친 저의 초중고 친구들을 볼 때마다 미안함을 느껴요.”
-그런 약점을 안고도 사회적 발언을 계속하는 이유는 뭔가요?
“운명처럼 가지게 된 약점이죠. 특권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저의 초중고 친구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씁니다. 그 친구들도 제가 더 떠들어 주기를 바라고요. 신문사에서 불러주지 않아도 현안이 있을 때마다 기고하는 것도 다 부채감에서 하는 일이에요. 친구들에 대한 부채감, 누나에 대한 부채감.”
-우문이지만 박경신은 한국인인가요, 미국인인가요?
“국가 중심의 국적 개념보다는 공동체 중심의 주민 개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까지 제 경험을 보세요. 작은누나, 큰누나, 아버지, 그리고 지금 저의 삶, 제가 정말 한국인으로 살고 있지 않은 걸까요?”
-요즘은 뭘 하고 지내시나요, 향후 계획은?
“태안 기름유출사고 때 200여명의 학생들과 법률봉사활동을 했어요. 그때의 좋은 기억을 가지고 학생들과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학생들과 함께 네팔, 미얀마 난민촌에 가서 인권교육도 하고, ‘인터넷법 클리닉’(http://www.internetlawclinic.org)이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저작권, 명예훼손, 문화와 관련된 법률상담도 합니다. 제가 13년 전 귀국할 때부터 참여한 변호사 숫자제한 철폐운동의 결정체가 로스쿨인데 아직도 끝이 보이지를 않네요. 끝장을 봐야죠. 저는 가만히 있는데 억지로 공부할 주제를 던져준 이명박 정부 덕분에 <진실유포죄>라는 교양서도 곧 나옵니다.”
외롭지 않으냐는 질문에 박경신은 “충성을 바쳐야 할 인맥이나 집단이 없다는 게 나에게는 오히려 힘”이라고 답변했습니다. 그가 가진 독특한 에너지의 근원은, 누나를 잃은 상처가 남긴 ‘문제를 피하지 않는 용기’, ‘두 몫의 책임감’, 그리고 ‘인맥의 뒷받침 없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외로움이 오히려 힘”이라는 그의 말은 저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박경신 같은 ‘주민’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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