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교수를 서예가라 부르진 않는다. 스스로도 자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글씨는 웬만한 서예가 못지않게 유명하다. ‘더불어 숲’ ‘처음처럼’ ‘서울’과 같은 그의 글씨는 꽤 익숙하다. 그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정 때문에 많은 글씨를 썼다. 그 수가 얼마인지는 본인도 모른다고 했다. 두어 해 전 경향신문은 신 교수에게 글씨 탐방을 제안했다. 그때 신 교수는 자신의 많은 글씨들이 ‘변방’에 있음을 새삼 알게 됐다. ‘변방을 찾아서’라는 기획시리즈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신 교수의 글씨 탐방은 2011년 9월 해남 땅끝마을 초등학교 분교의 ‘꿈을 담은 도서관’ 편액에서 시작해 그해 말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 묘역’으로 끝을 맺었다. 이듬해 신문 연재물은 돌베개에서 같은 제목의 책으로 묶여 출간됐다.
최근 출간된 일본 학자의 <상실과 노스탤지어>는 ‘여백’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가장자리의 빈 공간’이라는 뜻의 여백은 변방과 유사하다. 이 책의 저자 이소마에 준이치 역시 신 교수처럼 ‘여백’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소마에는 여백을 주류 세계에 균열을 가하는 힘이라고 정의한다. 주류의 동질성, 정체성에 섞이지 않는 배타성, 이질감이 여백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이소마에는 ‘여백’을 민족주의, 일본 사회의 보수화를 비판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러면서 그는 “학문 제도나 국민국가와 같은 기존의 경계를 횡단하고 그 내부와 외부에서 여백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새로운 지식이 태어날 토양은 만들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변방론’과 ‘여백론’을 주목한 것은 이번 가을 경향시민대학에서 사회학자 김덕영 교수의 강의를 접한 뒤였다. 김 교수는 오귀스트 콩트에서 피에르 부르디외에 이르는 서구 사회학 거장들의 이론을 한국사회와 접목해 쉽게 풀어냈다. 강의가 끝난 뒤 수강생들로부터 “요즘 보기 드물게 공부를 많이 한 학자”(철학강사), “사회 현상을 구조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얻을 수 있었다”(치과의사)는 찬사가 쏟아졌다. 나는 김덕영 교수의 힘이 변방과 여백에 있다고 믿는다. 그는 유명 학자는 아니다.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독일에서 박사학위와 함께 ‘하빌리타치온’(독일 교수자격취득 논문)을 받았지만, 정작 이 땅의 지식사회에서는 홀대받고 있다. 교수 임용은 고사하고 강사로 초빙받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가 이처럼 학계의 ‘왕따’가 된 것은 태생적으로 변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업고교 출신이다. 대학진학도 늦었다. 독일로 유학가서는 13년이나 머물렀다. 다른 유학생들이 쉬운 주제를 잡아 뚝딱 박사 논문을 쓰고 귀국할 때 그는 짐멜이나 막스 베버와 같은 거대이론과 씨름했다. 그가 학계와 불화하는 것은 학문에 대한 엄격함과 고지식함 때문이다. ‘변방인’ 김덕영 교수는 주류에 들어가지 못해 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정식 교수가 됐다면 현재와 같은 연구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김덕영 교수는 일년 중 한 학기만 독일에서 강의하고 나머지는 국내에서 저술, 번역활동을 한다. 그가 낸 저서와 번역서는 <막스 베버>, <돈의 철학> 등 30권에 달한다. 이 가운데 10권 가까이는 문화부나 학술원이 선정한 우수학술도서이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 짐멜의 <돈이란 무엇인가>, <개인법칙>을 번역·출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년에도 서너 종의 저서가 나올 예정이다. 김 교수는 독일 카셀대 강의를 위해 12월1일 출국한다. 3개월간 그곳에 머무르며 베버의 <종교사회학>을 강의하고, 짐멜의 저서 <렘브란트> 번역을 마무리할 것이라고 한다. 노마드 사회학자인 그에게 한국도, 독일도 정주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의 학문은 깊어지고 있다. “고향 상실자야말로 전 세계를 자신의 집으로 삼을 수 있다. 당신의 집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세계 전체가 당신이 사는 곳이다.”(<상실과 노스탤지어>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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