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4일, 주간경향 커버스토리
저성장시대에 본격 진입한 한국경제, 소득의 대부분을 임금에 의존하는 가계는 정부ㆍ기업에 비해 대책 마련이 쉽지 않다. 어떻게 해야 이 암울한 저성장 터널을 지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소비·금융·부동산 등 가계 경제활동을 근본부터 다시 재점검하라고 말한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박영걸씨(52·경기 용인시)는 내년 경제만 생각하면 숨이 탁 막힌다. 정부나 언론에서 말하는 경제전망보다 체감경기가 훨씬 나쁘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안 좋은 얘기만 들린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한국이 따라가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저성장시대에 진입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무엇보다 한국 경제를 떠받쳐왔던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마저 성장동력을 잃어버린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하다. 증권·조선업계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을 진행 중인 것도 불안감을 키운다.
“삼성전자가 애플이나 중국 기업들에 시장을 빼앗기고 있는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고. 대기업들마저 실적이 나빠지고 있다는데 내년에는 더 힘들 것이라는 말들이 많아요. 어떻게 이 험난한 파고를 헤쳐가야 할지 모르겠네요.”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비단 박씨만 품고 있는 게 아니다. 거의 모든 경제주체들에게 마치 에볼라 바이러스처럼 퍼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실제로 한국 경제에 드리운 먹구름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는 경고도 끊이지 않고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나타나고 있는 한국 경제의 저성장 흐름이 꽤 길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정부는 저성장시대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시중에 돈을 풀고 부동산 규제완화 등을 통해 경기 부양에 나서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강달러에 치이고, 엔저에 밀리고, 중국에 쫓기고 있는 게 한국 경제의 현주소다.
가계는 가계대로 힘들어졌다. 국내 가계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동산은 가격 하락으로 자산규모가 쪼그라들었다. 이자소득으로 생활하는 은퇴생활자들은 실질금리가 마이너스가 되면서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미 1000조를 넘어선 가계부채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경제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빛이 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의 국면. 이런 저성장기에 가계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어떤 생존전략으로 이 험난한 위기의 시대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
소비와 재테크, 부동산 등 가계 경제활동의 근간이 되는 분야를 중심으로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저성장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가계의 생존전략을 모색해 봤다.
사실 획기적인 비법은 없었다. 전문가들의 조언은 ‘신용카드는 한 장만 쓰고, 소비 눈높이는 낮추면서, 부동산·주식 비중을 낮추고 현금 비중을 늘려라’로 요약할 수 있다.
너무 평범하다고? 그래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진리가 숨어 있다.
■소비-신용카드는 한 개만
저성장시대에는 소비 눈높이를 대폭 낮춰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건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그래서 소득을 늘리기가 구조적으로 어렵게 되면 본능적으로 줄이는 게 소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비를 줄이는 데도 전략이 필요하다.
고득성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이사는 “저성장기에는 소비도 훈련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소비자들은 소비의 동선을 따라 신용카드를 무분별하게 발급받아 사용했다”면서 “자신에게 꼭 맞는 신용카드를 한 개만 갖고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지갑 속에 수두룩하게 들어 있는 카드부터 없애라는 얘기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박사는 “지금까지는 소득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 이를 믿고 무의식적으로 소비지향적인 생활을 해 왔지만 저성장시대에는 그런 행동경제는 통하지 않는다”면서 “소득은 꺾였지만 소비성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게 요즘 사회다. 소비의 현실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소비에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김 연구위원은 “교육 등 미래를 위한 투자 성격의 소비가 많은 게 한국 가계의 특징”이라면서 “앞으로는 이런 미래 기대수익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면서 교육비에 대한 과도한 지출을 점차적으로 줄여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금융 재테크-고수익보다는 지키기로
직장인들 사이에 한때 ‘10억원 만들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저성장기에는 ‘10억원 만들기’ 같은 꿈이나 목표는 망상에 가깝다. 저성장기는 기본적으로 돈 버는 게 힘든 시대다. 고수익보다는 안정적인 투자가 최우선 목표가 돼야 한다.
김학균 KDB대우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저성장기에는 투자의 개념을 짧은 시간에 얼마를 버는 것보다 지키는 데 주안점을 두고 최소한의 수익을 얻는 쪽으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돈이 마르면 주식도 위험하다.
김연준 하나은행 서현역 골드클럽 PB센터장은 “금융투자 형태도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들도 보수적 성향으로 바뀌고 있다”면서 “과거에는 수익률이 높은 이머징마켓에 투자하는 펀드가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채권처럼 안정적이면서도 장기간 투자하면 은행금리 못지않은 수익을 낼 수 있는 금융상품이 유망하다”고 말했다.
김학균 투자전략팀장도 “주가도 많이 오르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적립식 펀드에 가입해 주가가 떨어져도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취약한 국민연금을 보완할 장치 마련도 필요한 것으로 꼽혔다.
안기돈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20년 이상 가입한 국민연금 수급자의 평균 수령액은 89만원에 불과해 너무 취약하다”면서 “저성장기 부동산을 줄이고 개인연금에 적극적으로 가입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부동산-닥치고 현찰
한국 가계자산 구성의 특징 중 하나는 부동산 비중이 평균 75%를 차지할 정도로 높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금융위기 직후 국내 주택 가격이 크게 떨어지면서 가계의 실질 자산규모도 크게 줄었다.
전문가들은 저성장시대에 적절히 대비하기 위해서는 가계자산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을 빨리 줄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앞으로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큰 부동산보다는 현찰 보유 전략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부동산은 사놓으면 무조건 돈이 될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게 좋다”면서 새로 주택을 구입하려는 수요자는 월수입의 20% 이상을 주택 구입에 필요한 이자를 물지 않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부 교수는 “저성장시대에는 부동산이 제일 먼저 직격탄을 맞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주택연금도 대안으로 꼽혔다. 고득성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이사는 “60세 이상 은퇴자라면 주택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주택연금에 하루빨리 가입하는 것이 좋다”면서 “현재 3억원짜리 주택의 경우 70세에 가입하면 매달 103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부동산’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수익형 부동산 투자가 제시됐다.
부동산 정보업체인 리얼투데이 양지영 팀장은 “저성장기에는 소득이 창출되는 수단이 확 줄어들기 때문에 부동산의 경우 운용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투자가 좋다”면서 “소형 빌라·상가 등 적은 투자로 장기간 월세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수익형 부동산 투자로 자산 리모델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창업·재취업-창업보다는 재취업
한국인 평균 기대수명은 81.5세다. 60세에 정년퇴직을 한다고 해도 임금소득 공백기간이 점점 길어질 수밖에 없다.
소득 공백기간을 최소화하려면 재취업을 하든지, 창업을 하든지 해야 한다. 저성장시대에는 창업보다는 재취업이 유리하다. 창업을 하더라도 수요가 위축돼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저성장시대에는 재취업 일자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불가피하게 창업을 해야 할 때는 자신의 능력과 경험 등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아이템을 찾는 게 좋다.
김천규 충남대학교 창업교육센터 산학협력중점교수는 “누가 창업해서 성공했다고 하면 아무 생각없이 따라서 창업하는 ‘철새 창업’이 적지 않다”면서 “적어도 창업하기 전 최소 2년 정도는 현장조사를 하고, 자기가 뭘 잘할 수 있는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과 연결해 창업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귀농 등 공동체 문화
귀농도 저성장시대의 생존전략으로 꼽히고 있다. 농촌생활은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도시처럼 소비성향도 높지 않다. 상대적으로 적은 소득으로 도시에서 누리는 소비수준 이상을 누릴 수 있다.
이준엽 현대경제연구원 박사는 “농촌 거주자들의 소비생활은 자연친화적이면서 소비를 덜하는 합리적인 경제행위를 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농촌 공동체 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소비를 줄일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뿐 아니라 건강한 삶을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어 저성장시대에 도시 소비자들이 본받을 만한 생활패턴”이라고 말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꼭 귀농을 하지 않더라도 도시에 살면서 지역공동체에 적극 참여하는 게 좋다”면서 “저성장시대에는 아등바등 돈을 벌려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단절된 아파트 이웃과 공동체적인 삶을 적극적으로 유지하면서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찾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병태 선임기자 cbta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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