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학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동물 중 하나가 당나귀다. 대표적인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에플레이우스의 <황금당나귀>, 셰익스피이어의 <한 여름밤의 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등.
시에도 당나귀는 등장한다. 디(D).에이치(H). 로런스의 <제대로 된 혁명>에는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라는 구절이 있다. 자크 프레베르는 <오월의 노래>에서 노래한다. “당나귀 왕 그리고 나/ 우리는 내일 죽을 것이다/ 당나귀는 배고픔 때문에/ 왕은 권태 때문에/ 그리고 나는 사랑 때문에/ 오월에”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당나귀 시는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이다. 이 시에는 “응앙응앙” 우는 흰당나귀가 나온다. 사실 당나귀는 그리 울지 않는다. 당나귀 울음 소리는 거칠고 시끄럽기로 유명하다. “응앙응앙”이 아니라 “응헝응헝”이 맞다. 그러나 눈오는 밤 “응헝응헝” 우는 흰당나귀를 상상해보라. 그 당나귀는 사랑스럽기는커녕 불쾌하고 짜증스럽게 느껴진다.
왜 당나귀가 문학에 그리도 빈번히 나타날까? 특히 유럽에서는 오랜 세월 인간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져 주고 인간의 여행길에 동행하는 동물이 당나귀이기 때문이리라.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세벤에서 당나귀와 함께 한 여행>이라는 에세이를 펴낸 바 있다. 이 책에서 스티븐슨은 ‘모데스틴’이라는 당나귀와 프랑스를 도보여행한다.
내가 보기에 당나귀 문학의 백미는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플라테로와 나>이다. 이 책은 크리스마스를 맞는 아이들을 위한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마치 자신의 아이나 혹은 이웃집 아이에게 말하듯 시인은 당나귀 ‘플라테로’에게 정겹게 말을 건넨다. “플라테로야, 너는 모르겠지만 부드럽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네 눈은 아름다운 두 송이 장미란다.”
히메네스에게 플라테로는 삶의 동반자에 가깝다. 시인은 하루하루 일상을 보내면서 당나귀와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당나귀와 시인이 나누는 언어는 평화롭고 목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제 봄이 왔는데 나는 산호세 거리에서 하늘로 가 버린 그 바보 아이를 생각한다. 하늘나라에서 그 아이는 만발한 장미들 옆에서 여전히 자기 의자에 앉아서 새롭게 뜬 제 두 눈으로 천사들의 황금빛 행렬을 보고 있을 것이다.”
대화 상대가 당나귀이기에 시인은 시의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슬픔과 기쁨, 삶과 죽음이 하나인 말, 사람의 말이자 동물의 말인 말, 혹은 사람의 말도 동물의 말도 아닌 제 삼의 말, 지극히 소박하지만 누구도 누구에게 해보지 않은 최초의 말.
“플라테로야, 대략 두시쯤 되면, 해가 중천에 뜬 그 고독의 순간에 투우사들과 귀부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그 틈을 이용해 우리는 뒷문으로 빠져나가서 거리를 가로지른 다음 지난해처럼 들판으로 가자.”
나는 백석과 스티븐슨과 히메네스가 부럽다. 나에게 당나귀가 있다면, 나에게 흰당나귀와 모데스틴과 플라테로가 있다면, 몰래 삶을 빠져나갈 수 있는 동행자가 있다면… 당나귀를 찾아야 한다. 당나귀 등에 내 짐을 얹고 그의 뒤를 쫓아 가야 한다. 당나귀가 없다면 나에게는 이 지긋지긋한 삶에 갇혀 느릿느릿 죽어가는 일만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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