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10월 도쿄제대 법학부 교수 야마다 사부로(山田三良)는 번민 끝에 경성제대 총장직을 수락했다. 그는 일찍이 ‘조선합병’의 근거를 마련하는 중요한 법적 조언을 한 바 있는 국제법의 전문가였다. 또 조선총독부가 식민지에 신설대학을 설립할 당시에는 도쿄제대 법학부장으로 있으면서 제자들의 식민지행을 이끌기도 했다. 그런 만큼 식민지와의 인연이 녹록지 않았던 그였다. 하지만 제국대학이라고는 해도 식민지에 세워진 신설대학을 맡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대학의 기틀을 마련했던 초대 총장인 핫토리 우노키치(腹部宇之吉)는 총독부와의 알력 끝에 2년도 못 채우고 그만두었다. 의학부를 만드는 데 산파 역할을 했던 3대 총장 시가 키요시(志賀潔)도 교수들 내부의 갈등과 알력 속에서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그나마 두루 무난했던 관료 출신의 2대 총장 마쓰우라 시게지로(松浦鎭次郞)마저도 일본 본토의 규슈제대 총장으로 허무하게 뺏기지 않았던가. 야마다는 자신이 경성제대 교수들이 바랐던 총장 1순위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돌고 돌아서 자신에게 떨어진 경성제대 총장이라는 자리. 야마다의 고민이 깊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진)1934년 5월 개학 10주년을 맞아 전시회를 개최하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풍경. 경성제대는 1926년 학부 설립에 맞춰 개학식을 거행하려 했으나 다이쇼 일왕의 죽음으로 취소됐고, 야마다 사부로 총장 시절인 1934년에야 기념식을 열었다./서울대 고문헌자료실 소장
만주 시찰에 나선 경성제대 총장
어렵사리 총장직을 수락한 그가 경성에 부임한 후의 첫 행보는 만주 시찰이었다. 당시 만주는 1931년 9월에 일어난 만주사변으로 관동군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다. 만주 시찰 당시는 관동군의 주도로 ‘괴뢰’ 만주국이 탄생하려는 찰나였다. 야마다 총장은 국제법학자로서 구축한 인맥을 총동원해서 만주사변의 주동자인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와 이타가키 세이지로(板垣征四郞)와 접촉했고 그들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 만주국의 고위 인사들과 접촉할 기회도 가졌다. 경성으로 귀환하자 그는 대학의 공식행사를 통해 만주 시찰의 성과를 보고하는 한편, 준비작업을 거쳐서 1932년 말 ‘만몽문화연구회’의 결성을 발의했다. 법문학부와 의학부, 예과를 막론하고 경성제대에서 ‘만몽(滿蒙)’ 즉 만주와 몽골을 연구할 수 있는 교수들을 모두 집결시켰고, 학생들에게 연구와 답사에 참여하는 길도 열었다. 이렇게 대학총장이 비공식적인 연구조직을 ‘전학적(全學的)’으로 만든 것은 제국대학으로선 전례가 없었다. 당시 경성제대의 사정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1926년 ‘동양문화의 권위’를 표방하며 출범했던 경성제대는 몇 년 되지 않아 ‘아시아 대륙문화의 개발자’라고 자기규정을 바꿔가면서까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그리고 그 노획물인 ‘기회의 땅’ 만주에 대학의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경성제대의 때 이른 위기는 어쩌면 이미 예견된 사태일지도 모르겠다. ‘식민지 최초의 제국대학’, ‘대륙 유일의 제국대학’ 등 화려한 수식어가 더해졌지만, 경성제대는 애초부터 식민지 사회와는 철저히 고립된 채로 설립되었고, 이후에도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浮遊)하는 상태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애초에 경성제대의 탄생은 대학 설립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열망을 찍어 누르고자 했던 식민권력의 의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병탄 직후부터 조선인들이 단독으로, 때로는 선교사들과 결합하는 형태로 독자적인 대학 설립을 모색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3ㆍ1운동 시기 보여준 학생들의 활동은 설령 일본을 통해 배웠을지언정 근대지식이 해방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예시였다. 20년대 초반 조선인 사회의 대학 설립 열기는 뜨거웠고, 식민권력은 어떻게든 이 열망을 큰 저항 없이 잠재워야 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설립을 서둘러 ‘첫 대학’이라는 명분을 장악하고, 본토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제국대학의 형식을 관철시켜, 이후 혹시라도 있을 대학 설립의 시도를 막겠다는 의도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경성제대였는데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경성제대는 식민지조선의 유일한 대학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조선, 일본 모두에 환영 못받은 설립
물론 이 때문에 경성제대가 치렀던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시간을 다투는 사안이라 식민당국은 조선인 사회는 물론 심지어 재조일본인들조차 대학 설립과정에서 배제시켰다. 조선인 사회만큼이나 재조일본인 집단이 느꼈던 소외감은 컸다. 조선인 사회가 조선인 학생 입학에 대한 식민당국의 차별적 대우에 분노했다면, 재조일본인은 식민지에서 대학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입장이었다.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전문적·실용적 지식이 부지기수인데 법과와 문과 편향의 제국대학이 웬말이냐는 것이다. 조선인은 일본인 편중이 아니냐, 일본인은 조선인의 비위를 너무 맞춘 것 아니냐 하며 서로를 비난했다. 심지어 독단으로 대학 설립을 밀어붙인 총독부마저도 대학에 대한 관심은 제한적이었다. 문화통치의 상징으로 경성제대가 설립되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국대학의 형태를 채택한 것도 민간의 대학 설립 시도를 압도하여 좌절시킨다는 정치적 의도가 컸다. 대학의 설립까지는 사력을 다했지만, 정작 대학의 운영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은 이런 사정과 관련이 깊다. 이처럼 시작도 하기 전에 경성제대는 이미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것이다.
(사진)1930년대 경성제대 도서관의 내부 풍경.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대학 설립운동의 의지를 꺾기 위해 대학을 설립했지만 충분한 예산과 대학자치의 원칙을 보장해주지 않았고, 경성제대는 본국의 전쟁과 만주 식민지화에 영합하는 학술 연구로 대학의 정체성을 확보하려 했다./서울대 고문헌자료실 소장
치명적인 위기는 곧 찾아왔다. 그것은 재정위기에서 시작되었는데, 총독부는 대학의 제도가 대략 갖춰졌던 1929년부터 경상경비를 대폭 삭감했다. 쇼와공황에 따른 긴축재정을 이유로 들었는데, 본토의 제국대학에 비교하면 엄청난 감소 폭이었다. 1932년의 경상경비는 한창 때의 75%로 최저점을 찍었는데 이후 점차 회복되기는 했지만 1939년이 되어서야 감소되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을 정도였다. 교직원이 기본적으로 총독부 관료였고 따라서 인건비는 경상경비의 삭감에도 보존되었기에 대학운영의 감소폭은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1929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지만 쇼와공황의 여파로 취업시장은 꽁꽁 얼어붙었고, 조선인 학생들은 입학 당시의 기대와는 달리 대학당국이 조선인에게는 학문의 길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수와 조교수의 상당수는 제대 교수가 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넜지만, 제국대학의 대표적인 특권적 관행인 자율적인 대학운영(대학자치)과 학문적 자율성이 식민지라는 특수성과 재정적 궁핍 속에서 조기에 실종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경성제대란 곳이 제국대학은 허울뿐이며 한갓 식민대학에 다름 아니라면, 우리는 왜 인생을 걸고 조선으로 건너왔을까. 경성제대의 사람들은 ‘제국대학’의 위상과 전통을 확인함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식민지조선이란 입지조건에 합당한 경성제대 고유의 국책(國策)을 설정하고, 제국 전역에 이와 같은 국책적 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어필하여 학리(學理), 즉 전문성과 자율성을 구축하는 물적 기반을 확보하겠다는 발상이다. 이를테면 제국대학 특유의 국책과 학리의 공존을 모색한 것이라 하겠는데, 야마다 총장의 만주행을 계기로 ‘아시아대륙의 문화개발’, 즉 만몽과 대륙이 경성제대를 대표하는 국책 과제로 전면적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국책과 학리의 공존’이라는 과제
이후 경성제대가 보여주는 방향전환의 시도들은 지금의 관점으로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우선, 교수들은 외부에서 연구비를 획득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제국학사원, 외무성 문화사업, 일본학술진흥회, 핫토리보공회 등은 그 자체가 국책적 기관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만몽’을 내세운 경성제대 교수들의 연구과제에 대한 호응은 컸다. 1934년부터는 매해 10건 이상의 연구과제가 선정되었으며 수령액은 연 1만4000 엔 규모까지 늘어난다. 만몽을 내세우고 있는 만큼 현장조사의 필요성이 커지는데, 다양한 학제의 연구자 사이의 공동연구가 활기를 띠어간다. 특히 의학부 해부학교실의 경우에는 교실 단위의 연구자 및 학생들이 장기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현지조사를 수행하였는데, 그 결과 단기간에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해당 학계의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만몽문화연구회’와 그 후신인 ‘대륙문화연구회’는 경성제대의 연구자들과 외부 연구지원기관을 연결시키는 창구, 요즘 대학의 ‘산학협력단’과 같은 역할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구축된 국책연구들의 성과들을 기반으로, 경성제대는 시국적 관점과 ‘학술지식의 대중화’를 결합하는 대규모 대중강좌를 기획했다. 대표적인 것이 1939년과 1942년 두 차례에 걸쳐 ‘대동아의 기초지식’을 보급할 목적으로 개최된 대륙문화강좌였다. 참여강사가 2회 통틀어 총 46명, 전체 강의시간이 138시간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 강의였고 청강자 수도 1만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당시 경성제대의 입장에서 이런 호응은 오랜 고립에서 벗어나 식민지 사회와 ‘결합’하는 순간으로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 경성제대 앞에 펼쳐졌던 현실은 ‘국책과 학리의 공존’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성제대는 ‘만주의 발견’을 계기로 ‘국책에 기여하는 학리’를 표방하며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지만, ‘전쟁’을 기회로 삼아 ‘학리’를 확보하고 국책과 균형을 이루겠다는 발상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경성제대는 시국적 인식의 강화라는 통치상의 필요성에 부응하는 동시에, 대륙 진출을 둘러싼 대중들의 세속적 욕망에 영합함으로써 ‘대륙 유일의 제국대학’이라는 자기정체를 선명하게 각인시킬 수 있었지만, 그 반대급부로 지식생산의 도구화, 학술지식의 도구화를 초래했다. 더욱이 전쟁의 최전선에서 이루어졌던 대륙연구들은 실제로는 학리는커녕 군사작전에 다름없었다. 군대를 대동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그렇게 수집된 정보를 연구의 후원자들에게 보고하는 일련의 연구조사 절차는 점령지에서 이뤄지는 선전전이나 정보전에 정확하게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학리’가 존속할 수 있는 최소 기반이 되었던 대학자치가 경성제대에서는 1939년 결정적으로 훼손됨에 따라 국책은 학리를 압도하게 된다. 학리는 빈껍데기만 남고 학자들은 전쟁을 위한 진짜 첨병이 되어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30년대 식민지의 대학 현실이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지금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경성제대의 운명을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다뤘던 이유는 이 이야기 가운데서 지금 우리 대학의 친숙한 모습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세계적 관점에서 볼 때 1930년대는 1차 대전 이후 총력전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지식과 학술의 전쟁 동원’이 중심과제로 등장하던 시기였다. 근대 초기 국민국가의 이념과 정당성에 기여했던 대학은 이번에는 분과학문을 총력전과 연결시키는 제도적 장치로서 다시 한 번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 받았고, 2차 세계대전의 사상·심리전을 통해 유용성을 인정 받았다. 1930년대 경성제대가 식민지 조선에서 겪었던 궤적은 이런 현대 대학의 출발점으로서의 30년대 대학의 특징을 도리어 명쾌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의 대학은 30년대 경성제대가 겪었던 이런 딜레마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을까. 이야기를 읽으면서 드는 기시감을 체제의 지속으로 읽는다면 너무 과장일까.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출처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3&oid=033&aid=0000036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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