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원래는 경주 사람인가요?
"경주 김씨라는 것 말고는 아무 인연이 없어요. 마흔이 되어서 목사가 됐는데 경주제일교회에서 1998년에 담임목사로 초빙을 해서 왔어요. 서울 마포 사람이고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했어요. 대학생 때 새문안교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유신 반대하는 횃불시위를 조직하고 그랬지요. 그때 새문안교회 대학생부를 지도하던 선배가 서경석형이에요. 새문안교회 대학생회가 유신체제 이후부터 전두환 때까지 구속자가 20명이 나왔습니다. 평발이라 군대를 면제받고 대학 졸업한 74년에 곧바로 성산중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갔는데 한달만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어요. 내란음모혐의로 1심에서 15년형을 받고 2심에서 12년형을 받고 이듬해 4월에 석방됐는데 학교로 돌아갈 수도 없고 부모님이 하시는 가게에는 계속 형사들이 들락거리니 죄송스럽고 감옥에서 알게 된 차선각씨가 부산YMCA에 간사 자리를 알아봐준다고 내려오라고 해요. 아내와 결혼까지 하고 내려가보니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대신 김광일 변호사 사무실의 서기로 일을 하게 해줬어요. 부산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라는 동부교회 최성묵 목사님(1930~1992)을 알게 됐지. 지금은 송기인 신부를 부산 민주화 운동의 대부라고 하지만 진짜 부산 민주화 운동의 대부는 송 신부보다 여덟살쯤 위인 최목사님이지요. 최 목사님이 나더러 교회의 대학생부를 지도해 달라고 해서 주말에는 교회에서 대학생들의 세미나를 지도했어요. 우리 때는 사회주의 서적은 거의 읽지 않았고 또 내가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어. 문동환 목사가 추천해준 파울로 프레이리의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교육학(페다고지)'이라는 책과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이런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는 식이었지."
_어쩌다가 양서조합을 하게 됐지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 함석헌 선생(1901~1989)이 봉원동에서 하신 간디와 노자사상 강의를 열심히 들었어요. 그때 모임 집사가 채규철 선생(1937~2006)이었어요. 고등학교 10여년 선배야. 부산에서 장기려 선생님(1911~1995)과 청십자조합을 만들었고 덴마크에 가서 공부도 하고 온 양반이야. 내가 협동조합에 대해 더 알고 싶다니까 가톨릭에 협동조합 교육원을 소개해줘요. 거기 가서 강의를 듣고는 민주화 운동을 위해 필요한 거다 무릎을 쳤지. 자본주의의 모순을 뚫고 나가는 방법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된 나라들이 있는가 하면 복지국가로 간 나라들이 있잖아. 복지국가로 간 북유럽이나 캐나다에서 선택한 방법이 협동조합이야. 소비지나 생산자가 함께 조합을 만들어 필요한 물건을 같이 만들어 소비하고 이익도 똑같이 나누는 협동조합은 골고루 함께 잘 살게 해주는 방법이거든. 그런데 내가 부산사람도 아니고 다니는 중부 교회는 신도수가 100명도 안되니 생필품을 갖고 하는 소비자 협동조합은 힘들어. 그때는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친구들이 다른 사람의 소개를 받고 나한테 많이들 찾아왔어요. 생각해보니 이런 지식인들을 모아서 책을 매개로 소비자협동조합을 하면 될 것 같아. 그렇게 해서 77년 봄에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을 만들었어."
_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거지요?
"조합원이 출자금을 모아서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 서점을 하나 냈어요. 좋은 책을 기증받아 협동도서관도 만들어서 책을 빌려볼 수도 있었어요. 협동조합은 공짜는 없으니까 도서관 이용료도 받았어. 나도 내 책 150권 정도를 기증했어. 협동조합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교육입니다. 조합원이 되면 협동조합의 원리에 대해서 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는데 이게 민주주의 교육이에요. 협동조합은 출자금이 많고 적고 상관없이 무조건 1인1표주의이고 상향식 민주주의를 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출자를 받을 때도 한 사람이 전체 출자금액의 10분의 1 이상은 출자할 수 없어요. 이사진 구성도 아주 동등하게 나이별로 했어. 이사가 모두 9명인데 45세 이상에서 3명, 30에서 45세까지에서 3명, 20대에서 3명을 뒀고 3분의 1은 반드시 여성으로 뽑았어요."
_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나요.
"출범할 때 조합원은 120명으로 기억해요. 출자금 총액이 150만원인가 그랬는데 조합장인 이흥록변호사가 10분의 1을, 조합원으로만 참여한 김광일 변호사가 10분의 1을 내줬어요. 그때 김광일 변호사는 내가 권유해서 부산변호사로는 유일하게 진주교도소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1924~2009)의 변호를 맡았기 때문에 다른 일로 눈에 띄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조합원으로만 참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대신 김광일 변호사의 친구인 이흥록변호사가 참여했지요. 학생운동 하던 애들은 조합원으로도 가입하지 말고 그냥 서점만 이용하라고 했어요. 어차피 학생들은 돈도 없잖아.(웃음) 그런데 정말 조합원이 금방금방 느는 거야. 내 기억에는 가장 많을 때는 800명까지도 됐던 것 같은데. 이용자까지 따지면 굉장히 많지."
_그냥 같이 책보는 걸로 그렇게 반향이 컸어요?
"소그룹 활동이 인기가 있었어요. 농활 세미나, 꽃꽂이 세미나, 양서읽기 독서토론회, 어떤 분야든 관심있어 하는 분야는 다 만들어주는 거야. 조합원이 들어올 때 어떤 인적자원이 있는지를 파악해서 소그룹으로 만들어주고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는 지도하게 하고 서로 좋은 사람들 만나는 기회를 주니까 굉장히 호응이 좋았지요. 조합 자체가 반체제적인 성향의 이야기를 하진 않는데도 상향식이니까 하향식 일변도의 유신체제와는 저절로 안 맞아지는 거지. 사람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여서 속에 있는 이야기를 속시원하게 하고 새로운 걸 배우고 서로 어울리는 것이 부산 전역으로 자연스레 퍼진 거야."
_제일 중요한 것은 그거군요.
"그렇지. 상향식이라는 거. 그래서 사람들이 자유를 느끼는 거지. 반독재투쟁 이야기는 양서조합에서는 철저하게 안 했어. 양서로 뽑은 책의 저자를 불러서 저자와의 대화도 했지. 조세희씨도 오고 그랬어. 이러니까 시민들이 좋아하지. 대신 나중에는 부산YMCA 간사로 일했는데 거기서 시국강연회를 만들어서 김동길 한완상 교수도 초정 했지요."
_언제까지 양서조합이 있었어요?
"1979년 10월 16일날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손학규씨가 그때 KNCC(전국기독교협의회) 간사였는데 19일에 부산으로 찾아왔어. 최성묵 목사님이랑 김광일 변호사랑 같이 다방에서 만났지. 그때는 부산에는 계엄령 선포하기 전에 군대가 벌써 들어왔는데 미련했던 거지. 다방 레지가 신고를 해서 경찰에 잡혀갔어. 나중에는 군경합동수사본부로 끌고 가더군. 우리를 부마항쟁 주모자로 몰아서 죽이겠구나 생각했어. 그런데 안 그러더라구. 나는 민청학련 사건 때도 맞지는 않았어. 걔들은 빨갱이로 엮는데, 내가 박정희 욕을 하면 김일성 욕도 꼭 같이 하거든. 26일 박정희가 죽으니까 29일엔가 우리를 풀어주더라고. 나와서 보수동 양서조합에 갔더니 폐쇄가 됐더라고. 그렇게 끝이 났지. 81년도에 검찰이 '부림사건'이라고 부산의 운동권을 잡는 사건을 만들었는데 이들이 대부분 양서조합 활동을 하던 이들이었어요."
_80년 이후에는 거의 활동을 안했네요.
"잡혀갔다가 나오고 며칠 후에 박정희 국장(79년 11월 3일)이 치러졌잖아. 그걸 텔레비전으로 보는데, 그때 좌절감을 말로 못해. 박정희가 쫓겨나가야 되는데 국장을 치르는 걸 보니 다시는 민주주의가 안 올 거다 싶었어. 광주항쟁이 터지면서 잡혀서 엄청 맞고 60일간 있다가 나왔지. 그때 몸과 정신이 완전히 상해버린 거야. 그래서 종교로 침잠했지. 서경석씨는 먼저 신학교에 들어가고 나는 <기독교 사상>이라는 잡지에 있다가 83년에 신학교에 들어갔어. 89년도에 목사안수를 받았으니까 6월항쟁에도 전혀 개입을 못 했어요."
_지금도 사회참여는 안 하나요?
"몇 년전부터 부산민주항쟁 기념사업회 부이사장도 맡고 부마항쟁 특별법제정 대책본부 상임본부장을 맡았어요. 경주경실련 공동대표이기도 하고요. 경주에는 방폐장(방사성폐기물처분장) 문제가 현안이지요. 계속 공사가 늦춰지니까 감시를 해야 하고 또 불교쪽에서 황룡사 복원을 하겠다고 하는데, 나는 그래요. 당신들이 모금을 해서 한다면 문제삼지 않겠다, 그러나 국가예산을 받아서 한다면 정확한 고증없이 무조건 복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_이 교회는 개척한 건가요? 신도가 몇 명이나 됩니까?
"2004년에 지었지요. 신도수는 내가 그래요. 눈을 감으면 꽉 차고 눈을 뜨면 휑하다.(웃음)"
_말씀 중에 나온 서경석 목사니 김동길씨들이 모두 지금은 꼴보수에 가깝게 됐네요. 무엇이 이들을 달리 걷게 만들었을까요?
"서경석씨는 북한을 열심히 도왔지요. 그런데 (북한) 봉수교회에 가서 탈북자 처형을 이야기했더니 '공화국을 배반한 자들은 죽어도 좋다'고 했나봐. 거기에 충격을 받고 봉수교회는 가짜 교회다, 그런데 진보들이 이런 실상을 폭로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기가 북한의 실상을 전하는 게 사명이라고 생각하겠지. 보수들이 진보한테 그래요. 민족공존하고 한미동맹 중에 어느 것을 우선하느냐. 나는 둘 다 놓고 싶은 생각이 없어. 친미용북(親美容北)이 맞아. 무조건 미국을 좋아한다가 아니라 미국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북한을 품자. 그리고 반미한다고 다 친북은 아니지. 김정은까지 내려갔는데 북한을 지지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또 하나는 박정희 문제인데 박정희가 근대화를 일으킨 훌륭한 정치가라는 거지. 이 문제는 심각해요. 과는 말하지 않고 공만 이야기한다면 그건 다시 박정희 시대를 받아들인다는 뜻이야. 그래서 아버지의 공만 이야기하고 과는 외면하는 박근혜씨가 무서워."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출처 http://www.hankookilbo.com/v/e71c5194b47b41b792ab103d7cb6e2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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