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보수동 쪽으로 이십 분 남짓 걸어가면 동서를 가로
지르는 책방골목이 있다. 책방골목 가운데에 부산 민주화의 성지로 일컬어졌던 중부교회가 있다.
일요일 오전 11시. 문을 연 헌책방마다 손님들이 제법 있다. 한달전 TV 프로그램 ‘1박 2일’에 책방 골목이 방영된 후 방문객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50여 곳의 헌책방이 양편에 줄지어 늘어선 골목을 거닐면 책 냄새에 취해 발길을 떼기 쉽지 않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영화를 잃었지만 70년대 이곳은 부산의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사상 검열의 시대, 이 골목에서 부산의 지식인들은 일제시대 출간된 마르크스주의 저작물을 구할 수 있었다. 일반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귀한 책들이
먼지 쌓인 책더미 속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마르크시즘에 목말라 있는 70년대의 지식인들에게 샘
물과 같은 곳이었다. 강담사의 마르크스 전집도 구할 수 있었고, 『자본』의 영어 원서, 전석담 씨가 번역한 『자본』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 구매한
책들이 은밀하게 대학생들 사이에서 읽혔다. 학생들은 마르크시즘을 공부하
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해가며 책을 읽었다. 더러 이를 아는 책방 주인들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불온서적’을 찢고 소각시켰다.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네 평 가량 되는 옛 협동서점 건물은 구멍가게로 바뀌었다. 협동서점은
1978년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약칭 양서조합)에서
문을 열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 단체들을 살피다 발견한 양서조
합은 낯선 이름이었다. 민주화운동사에서 잊혀질 뻔한 양서조합을 재발견한 이는 차성환(전 부산민주공원 관장)
이다. 그는 부산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서술한 『부산민주
운동사』를 읽던 중 짧게 소개된 ‘양서조합’부분에 눈이
머물렀다. 그도 30여 년 전 양서조합의 창립 과정에 참여
했었다.
양서조합이 그 중요성에 비해 간략하게 소개된 점이
아쉬웠다. 그래서 양서조합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위 책에 기술된 것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기록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연구를 시작했어요. 우리 세대가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까 우리 역사를 기록으로 정리하지 못했어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저도 한때 관여했던 일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었는지 궁금했어요. 하지만 30년이 지나 당시 자료를 찾으려 하니
여러모로 힘들었어요. 지금이라도 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흩어진 자료들을 모으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
은 것들을 찾아다녔다.
“양서는 양심을 낳고 양심은 정의로운
사회를 낳는다.”
양서조합의 제안자는 당시 중부교회의 전도사로 있던
김형기(현재 경주 팔복교회 목사)다. 그가 양서조합을 시작하게 된 배경에는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송보경이 번역한 『앤티고니쉬 운동의 철학과 전략』이다. 이 책은 캐나다의 앤티고니쉬에서 일어난 협동조합 운동을 다루고 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형기는 박희섭, 송보경을 통해 협동조합 운동을 접한 후 이를 민주화운동
과 연관시킬 고민을 했다.
그는 소비자 협동조합의 매개체로 양서, 즉 좋은 책을
떠올렸다. 사람은 책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각성하고 변화된다. 좋은 책 한 권이 지닌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그는
문화와 사상을 전파하는 책에 주목한 것이다. 책과 협동
조합. 독창적인 결합이었다.
양서조합의 표어는 “양서는 양심을 낳고 양심은 정의로운 사회를 낳는다.”였다. 유신 말기의 사회적 배경에서
양서로 떠오른 책들은 돌베개, 청사, 광민사 등에서 발간
하는 사회과학 서적이었다. 양서조합 건설의 주역은 김
형기가출석하는 중부교회 청년들이 많았다.
차성환은 처음 양서조합의 구상을 듣고 온건한 운동
방식이라는 이유에서 비판적이었다. 그렇지만 준비 과정에서 함께했다. 세월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유신체제 하에서는 이러한 방식의 합법적인 운동이 필요했고 어떤 면에서 더 효과적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서조합 창립에 앞서 발기위원회를 구성하고 세미나와 토론을 통해 조합운동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다. 다른
지역의 양서조합에 비해 부산 지역이 질적 양적으로 풍성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5개월여에 걸친 이러한
철저한 준비과정 때문이었다.
1978년 4월 2일. 양서조합은 YMCA 강당에서 창립 총회를 열고 9일 후 책방 골목에 협동서점을 개업한다. 출자금 1천원을 내면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고 한 사람이 출자할 수 있는 지분에 제한을 두었다. 협동서점 건물
1층은 책방, 2층은 소모임 활동 공간으로 사용했다.
김희욱이 전무로서 실무를 책임졌고 이흥록 변호사가
이사장을 맡았다. 그리고 부산 지역 민주화운동의 기둥들인 최성묵 목사, 송기인 신부, 김광일 변호사 등이 뒷받침했다.
양서조합은 짧은 시간에 부산 지역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을 불러들였다. 유신 정권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 금지되고 책을 검열하던 시기 양서조합은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는 활로였다. 협동서점에 오면 각지에서 가져온 유인물과 판금 서적들을 몰래 구할 수 있었다.
창립 첫 해 141명의 회원은 78년 말 300여 명, 79년 10월에
이르면 회원 수가 507명에 이르렀다(김형기는 조합원 수가 800명에 이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조합의 특징 중 하나는 소모임의 활성화였다. 소모임
수가 수십 개에 이르렀다. 소모임은 어학 연구 모임, 지역
사회 개발 연구모임, 전문 학술 연구모임, 종교 연구모임,
예술 연구모임 등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협동서점을 드나들던 대학생들은 부산대와 동아대 등으로 돌아가 스터디 모임을 만들며 대학가의 여론을 형성했다.
양서조합 간사 박철수는 고신대에 재학중인 1978년 7월
동일방직 사건 재판을 방청하며 김형기 등 양서조합 관련자를 만나게 됐다. 생활 형편이 어려워 잘 곳이 없었던
그는 협동서점 2층에서 숙식하며 지냈다.
“가족 이상의 친밀감이 있었어요. 하루하루가 정말 재밌었어요.
매일 무언가를 배운다는 게, 깊은 신뢰를 느낄 수 있는 사람들과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재밌고 행복한지 그때 알았어요.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신나는 때가 없어요.”
차성환은 양서조합 성공의 요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다른 운동 방식에 비해 양서조합 운동의 장점은 대중들이 두려움을 갖지 않고 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고 양서를 통해 사회의식을
지닐 수 있는 데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조합이 대외적으로 온건했기 때문에 대놓고 탄압하기 어려웠죠.”
양서조합은 매달 양서를 선정해 회원들에게 소개했고
조세희, 임헌영 등의 강사를 초대해 강연회를 열었다. 조합원들에게 책을 기증받아 2층에 협동도서실을 운영했고 농촌활동을 하는 등 활동의 폭을 넓혔다.
소문을 듣고 다른 지역의 운동가들이 양서조합을 찾아왔다. 이들이 부산 양서조합의 운영방식을 배워 각 지역에 또 다른 양서조합을 만들었다. 각 지역의 환경에 따른
다양한 형태의 양서조합이 생겨났다. 전국에서 일곱 개의 양서조합이 운영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양서조합들은
‘광주양서조합’이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며 문을 닫는 등
신군부의 탄압으로 하나씩 문을 닫게 되었다.
“민주시민의식을 키우는 길은
건전한 비판과 정신을 담은
양서에 있기에 양서를 읽게 하여
시민의식을 키우자는 것이 이들이
내세운 기치였다.
양서는 양심을 낳고 양심은
정의로운사회를 낳는다.”
악서가 양서를 구축하는 병든 사회
부산 양서조합의 해산은 부마항쟁이 계기가 되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에서 시작된 시위는 시민들이
호응하며 들불처럼 번져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자연발생적인 시위였다. 정부는 10월 18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0월 19일. 중부교회 최성묵 목사, 김광일 변호사, 김형기, 박상도 등이 연행되었고 해병보안대에 끌려가 간첩 혐의로 고문을 받았다. 이들은 박정희가 암살된
다음 날 풀려났다.
11월 19일. 군부는 양서조합 이사회에 참여해 자진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 해산하겠다고 협박했다. 양서조합은
2년에 걸친 활동과 시대적 역할을 마치고 해산된다. 출판사 운영과 도서관 건립, 연구소 설립, 자유협동대학 설립
등의 장기 계획은 조합의 해산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양서조합은 해산되었지만 회원들의 활동이 멈춘 것은
아니다. 수백 명의 회원들은 이후 다양한 영역에서 조합
운동의 정신을 실천하며 부산 지역 민주화운동의 뿌리를
깊게 한다. 양서조합의 결실은 바로 이러한 인적 토대를 마련해 준 데 있다고 차성환은 설명한다.
“이후에 다양한 운동 영역으로 분화가 돼요. 부산 지역 사회운동 초창기에 지역의 일꾼들을 배양하는 역할을 한 거죠. 이들이 그
후 노동운동, 빈민운동, 환경운동 등의 영역으로 옮겨갑니다.”
박철수는 5년 전부터 영등포 지역에서 '해보자' 모임을
함께하고 있다. 이 모임은 영등포 지역의 주거 상실 3대
빈곤 계층(노숙인 복지시설 이용자, 기초 생활 수급자, 일
용 노동자)이 모여 저축하고 연대하고 협동하는 모임 다. 30여 년 전 양서조합의 기억과 경험이 시공을 넘어 등포로 이어진 것이다.
“그때 선배들이 토론하고 합의하고 협동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본 것이 내 마음속에 토양으로 남아 있다가 협동조합 방식을 영 포에서 적용한 거예요. 협동함으로써 우리 삶이 더 나아질 수 있 는 취지에서 만든 모임입니다. 그때 느낀 행복감을 영등포 빈민들
과 함께 누리고 싶었어요.”
양서조합은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의 융성과 1980년대
말 도서원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서원이 맨 처음 긴 곳 역시 부산이었다. 최초의 도서원인 부산의 ‘아롬도서원’을 만든 전중근은 양서조합 회원이었다. 아롬은 앎의 우리말 고어라고 한다. 그는 양서조합 운동의 경험이
도서원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6월 항쟁 이후 시민들 의식이 성장하면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생각한 것이 도서원이었어요. 제가 양서조합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접목할 수 있었습니다.”
도서원은 부산에서 문을 연 이후 전국에 걸쳐 생겨났고, 1990년대 초반까지 융성했다.
차성환은 양서조합 운동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변형된 형태의 조직운동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양서조합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어요. 소비자협동조합적
측면, 문화운동적 측면, 민주화운동적 측면이죠. 이중 가장 중심적인 역할은 양서조합의 형성과 쇠퇴의 과정으로 볼 때 민주화운동적인 측면이라고 봐요.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이 협동조합적인
틀과 아이디어를 가져오면서 시작했기 때문이죠.”
70년대는 정보의 자유로운 생산과 유통이 억압되던 시기였다. 군사 정권에 대한 비판은 금기시되었다. 양서조합은 소비자협동조합의 형식을 통해 대안적인 소통을 시도하며 저항의 불씨를 준비했다. 그 불씨를 밑불로 부마
항쟁이라는 불길이 타올랐고 이를 계기로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70년대가 막을 내렸다.
30여 년이 흐른 현재 인터넷의 바다엔 정보가 홍수처럼 흘러넘치고 있다. 서점엔 너무도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양서를 가려 읽기가 쉽지 않다. 세월은 흘렀지만 좋은 책은 여전히 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1978년 6월 15일 발행된
‘양서조합소식’지엔 지금 읽어도 고스란히 다가오는 글이 있다.「문자공해를 추방하고 새로운 지적풍토를 조성하자」라는 제목의 글이다.
“수많은 출판물들이 화려한 그림과 센세이쇼날한 표제를 담고
나타나 대중들의 이러한 속성을 자극함으로써 인기를 얻어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려 한다. 여기에 또한 매스콤이라는 괴물이 대중의 기호와 취향을 조작하고 지배하면서 사회의 가치 척도를 획일화해 버린다. … 이러한 틈을 타고서 문자 공해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산업공해에서 비롯하는 환경오염보다도 더욱 무섭게 만연해
가고 있다…. 악서가 양서를 구축하는 그것은 병든 사회이고 문자
공해에 오염된 사회이다.”(*)
출처 http://www.kdemo.or.kr/book/hope/page/1/post/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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