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 중심' 중부교회와 최성묵 목사 / 부산일보 2007년 6월 1일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1979년 부마항쟁 등 부산의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는 항상 중부교회가 있었다.
부산 중구 보수동에 위치한 중부교회는 유신시절부터 수배를 받고 쫓기던 재야인사와 학생들의 단골 피신처가 됐을 뿐만 아니라 1987년에는 비디오 상영을 통해 5·18 광주항쟁의 진실을 부산시민에게 알리는데 앞장섰다. 서슬 퍼렇던 5공시절 목숨을 내걸만큼 용기가 없으면 감히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평가다.
또 6월 항쟁 당시 중부교회는 민주화운동 진영이 발행한 선언문, 유인물 등 소위 '불온문서'들이 모이는 집결지였다. 중부교회는 이 문건들을 부산 전역으로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실제 87년 6월 민주항쟁 때 방관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저항자로 전환하게 된 많은 시민들이 중부교회에서 보게된 5·18 광주항쟁의 진실과 각종 유인물들이 참여의 큰 동기로 작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중부교회는 1979년 부마항쟁의 밑거름이 된 부산양서협동조합 운동을 앞장서 이끌기도 했다. 양서를 통해 진정한 시민의식을 키우자는 취지에서 1978년 4월 2일 창립된 양서조합은, 요시찰 인물로 당국의 수배를 피해 중부교회에 은신해 있던 서울대 출신의 김형기씨에 의해 착안됐고 조합원 70% 가량이 중부교회 당회원들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이처럼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의 전초에는 항상 중부교회가 있었고, 중부교회의 중심에는 한국민주화 운동의 거목인 최성묵 목사(1992년 작고)가 있었다.
최 목사는 암울했던 1970년대 유신시절 부산의 보수적 기독교 토양에서 NCC운동을 일궈냈고, YMCA를 통해 교회연합운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그가 시무한 17년동안 중부교회는 학생 시민 종교인 교수 등 의식있는 인사들의 집회장소가 되어 관계기관으로부터 늘 감시 대상, 문제 교회로 지목되곤 했다.
그는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수석공동대표 등을 역임하는 등 부산 민주화운동을 앞장서 이끌다가 1992년 3월 62살의 나이로 작고했다. 박진국기자
부산 중구 보수동에 위치한 중부교회는 유신시절부터 수배를 받고 쫓기던 재야인사와 학생들의 단골 피신처가 됐을 뿐만 아니라 1987년에는 비디오 상영을 통해 5·18 광주항쟁의 진실을 부산시민에게 알리는데 앞장섰다. 서슬 퍼렇던 5공시절 목숨을 내걸만큼 용기가 없으면 감히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평가다.
또 6월 항쟁 당시 중부교회는 민주화운동 진영이 발행한 선언문, 유인물 등 소위 '불온문서'들이 모이는 집결지였다. 중부교회는 이 문건들을 부산 전역으로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실제 87년 6월 민주항쟁 때 방관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저항자로 전환하게 된 많은 시민들이 중부교회에서 보게된 5·18 광주항쟁의 진실과 각종 유인물들이 참여의 큰 동기로 작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중부교회는 1979년 부마항쟁의 밑거름이 된 부산양서협동조합 운동을 앞장서 이끌기도 했다. 양서를 통해 진정한 시민의식을 키우자는 취지에서 1978년 4월 2일 창립된 양서조합은, 요시찰 인물로 당국의 수배를 피해 중부교회에 은신해 있던 서울대 출신의 김형기씨에 의해 착안됐고 조합원 70% 가량이 중부교회 당회원들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이처럼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의 전초에는 항상 중부교회가 있었고, 중부교회의 중심에는 한국민주화 운동의 거목인 최성묵 목사(1992년 작고)가 있었다.
최 목사는 암울했던 1970년대 유신시절 부산의 보수적 기독교 토양에서 NCC운동을 일궈냈고, YMCA를 통해 교회연합운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그가 시무한 17년동안 중부교회는 학생 시민 종교인 교수 등 의식있는 인사들의 집회장소가 되어 관계기관으로부터 늘 감시 대상, 문제 교회로 지목되곤 했다.
그는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수석공동대표 등을 역임하는 등 부산 민주화운동을 앞장서 이끌다가 1992년 3월 62살의 나이로 작고했다. 박진국기자
출처: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07060100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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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기추모준비위, 평전 펴내 ... 출판기념회, 21일 저녁 부산YMCA오마이뉴스 2014년 3월 20일 아! 최성묵 목사.
70~80년대 암울했던 시절,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고 최성묵(1930~1992) 목사의 평전이 나왔다. '최성묵 목사 20주기 추모 준비위원회'는 21일 오후 7시 부산YMCA 강당에서 '평전 출판기념회'를 연다.
이번 출판기념회는 부산YMCA, 민주공원, 부산NCC, 부산중부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이 함께 함다. 송기인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이 헌사, 차선각 한국YMCA전국연맹 증경 이사장이 추천사를 한다.한울타리 중창단이 공연하고, 차성환 전 민주공원 관장이 저자 인사를 한다. 마지막으로 고 최성묵 목사의 가족들이 인사한다. 차성환 전 관장은 고인의 목회 활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평전을 발간했다.
고인은 서울에서 기독학생운동을 한 뒤 부산에 와서 부산YMCA 사무총장과 부산중부교회 담임목사를 지냈고, 1979년 부마민주항쟁과 1980년 계엄 확대, 1987년 민주화운동 등 과정에서 함께 했다.
고 이태춘(당시 27세) 열사가 1987년 민주화 시위 도중 부산 좌천동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사망하자 시민사회진영은 장례위원회를 꾸렸는데, 최 목사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장례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부산대 학생운동사건, 미문화원 방화사건, 양서조합운동, 도시산업선교회, 부산NCC인권위원회,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참여 등의 활동을 했다. 그는 6월항쟁 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가 만들어졌을 때 실질적 책임자로 부산의 항쟁을 이끌기도 했다.
또 민주화운동과 기독교사회운동에 나섰던 고인은 1990년 '한울장애어린이집'을 만드는 등 장애인 자활사업에도 앞장섰다. 최 목사는 1992년 3월 22일 뇌출혈로 쓰러져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최성묵목사20주기추모준비위는 "고인은 독재와 불의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보였고, 부산의 양심세력을 이끌어주었으며, 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숱한 사건과 운동들이 그가 담임하였던 중부교회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또 준비위는 "최근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는 시대 상황 아래에서 더욱 최성묵 목사의 민주화를 위한 여정이 그리워지고, 고인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오면서 올곧은 자세로 남다른 인생역정을 걸어오셨다"며 "20주기를 맞아 추모제를 열면서 평전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밝혔다.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70818----------------------------------------------부산민주화운동의 거목, 최성묵 목사 25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고 기리는 행사를 갖습니다. 3월 22일(수) 오후 7시 부산중부교회에서 추모예배가 열립니다. 이 자리에서는 전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안재웅 목사의 '한 사람때문에"라는 강연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25일(토) 오전 9시30분 부터 '부산시민과 함께하는 민주올레 걷기' 행사를 진행합니다. 민주공원을 출발해 6월민주항쟁의 현장이였던 부산가톨릭센터, 보수동 일대를 걷는 코스입니다. 5월 19일에는 네팔과 필리핀 인권활동가들을 초청해 '부산민주주의 포럼'을 개최합니다.출처 http://archive.ozmailer.com/archive/sns_article.php?sid=3291326-----------------------------------------------------
70~80년대 암울했던 시절,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고 최성묵(1930~1992) 목사의 평전이 나왔다. '최성묵 목사 20주기 추모 준비위원회'는 21일 오후 7시 부산YMCA 강당에서 '평전 출판기념회'를 연다.
이번 출판기념회는 부산YMCA, 민주공원, 부산NCC, 부산중부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이 함께 함다. 송기인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이 헌사, 차선각 한국YMCA전국연맹 증경 이사장이 추천사를 한다.한울타리 중창단이 공연하고, 차성환 전 민주공원 관장이 저자 인사를 한다. 마지막으로 고 최성묵 목사의 가족들이 인사한다. 차성환 전 관장은 고인의 목회 활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평전을 발간했다.
고인은 서울에서 기독학생운동을 한 뒤 부산에 와서 부산YMCA 사무총장과 부산중부교회 담임목사를 지냈고, 1979년 부마민주항쟁과 1980년 계엄 확대, 1987년 민주화운동 등 과정에서 함께 했다.
고 이태춘(당시 27세) 열사가 1987년 민주화 시위 도중 부산 좌천동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사망하자 시민사회진영은 장례위원회를 꾸렸는데, 최 목사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장례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부산대 학생운동사건, 미문화원 방화사건, 양서조합운동, 도시산업선교회, 부산NCC인권위원회,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참여 등의 활동을 했다. 그는 6월항쟁 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가 만들어졌을 때 실질적 책임자로 부산의 항쟁을 이끌기도 했다.
또 민주화운동과 기독교사회운동에 나섰던 고인은 1990년 '한울장애어린이집'을 만드는 등 장애인 자활사업에도 앞장섰다. 최 목사는 1992년 3월 22일 뇌출혈로 쓰러져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최성묵목사20주기추모준비위는 "고인은 독재와 불의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보였고, 부산의 양심세력을 이끌어주었으며, 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숱한 사건과 운동들이 그가 담임하였던 중부교회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또 준비위는 "최근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는 시대 상황 아래에서 더욱 최성묵 목사의 민주화를 위한 여정이 그리워지고, 고인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오면서 올곧은 자세로 남다른 인생역정을 걸어오셨다"며 "20주기를 맞아 추모제를 열면서 평전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밝혔다.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70818----------------------------------------------부산민주화운동의 거목, 최성묵 목사 25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고 기리는 행사를 갖습니다. 3월 22일(수) 오후 7시 부산중부교회에서 추모예배가 열립니다. 이 자리에서는 전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안재웅 목사의 '한 사람때문에"라는 강연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25일(토) 오전 9시30분 부터 '부산시민과 함께하는 민주올레 걷기' 행사를 진행합니다. 민주공원을 출발해 6월민주항쟁의 현장이였던 부산가톨릭센터, 보수동 일대를 걷는 코스입니다. 5월 19일에는 네팔과 필리핀 인권활동가들을 초청해 '부산민주주의 포럼'을 개최합니다.출처 http://archive.ozmailer.com/archive/sns_article.php?sid=3291326-----------------------------------------------------
최성묵 목사, 독재정권 맞서며 민중과 함께한 진정한 크리스천
- 서울·학생 인력 연결고리 역할
- 1979년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 박상도 전 YMCA 이사장 회고
- 25주기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
- 오늘 가톨릭센터 등 돌아보는
- 부산시민 민주올레 행사 열려
"故 최성묵(1930~1992) 목사님은 진정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돈 권력 명예 관습 등 모든 구속을 벗어나 옳고 바르고 정의로운 것만 생각하며 자유롭게 산 사람입니다."
최성묵 목사 추모예배가 열린 지난 22일 부산 중구 부산중부교회(이하 중부교회)에서 만난 박상도(71) 전 부산 YMCA 이사장은 최 목사의 삶을 이렇게 정의했다. 최 목사는 1970, 1980년대 부산 민주화운동의 거목이었다.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 곁의 중부교회 담임목사를 지내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박 전 이사장은 최 목사와 함께 다양한 기독교단체, 민주화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참여하며 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최 목사는 1930년 11월 경북 영일군 흥해면 중성동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모두 신심이 깊은 크리스천으로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심을 지니고 주일이면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했다. 1959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마친 그는 마음만 먹으면 목회자, 학자로 평온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재정권 아래서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하는 삶을 택했다.
박 전 이사장은 최 목사가 부산에 오던 무렵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줬다. "서울에서 기독학생운동단체를 통합해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를 발족한 뒤 1968년 부산으로 이주하셨습니다. 당시 부산 YMCA의 몇몇 젊은 이사들이 목사님을 총무로 모시겠다는 의사를 타진해 내려오셨는데, 보수적인 이사들의 반대로 이사회에서 부결됐어요. 그때부터 1년 이상 굉장히 어렵게 사셨어요. 일요일에 남포동에서 성경공부를 지도하셨는데 차비가 없어 양정의 자택까지 걸어가실 정도였죠."
최 목사는 이후 1970년 부산 미문화원 학생 담당 간사, 1972년 부산 YMCA 총무를 거쳐 1977년 중부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박 전 이사장은 "최 목사가 온 뒤로 부산 민주화운동에 불이 붙었다"고 기억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아래서 일어난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은 최 목사가 관여한 다양한 종교·사회단체 구성원들이 주축이 됐다. 그는 1974년에 부산인권선교협의회를 창립해 총무를 맡았고, 1975년에는 송기인 오수영 신부 등과 신·구교가 함께하는 정의구현기독자회를 만들었다. 1977년에는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부산지부, 1977년 부산도시산업선교회, 1979년 부산생명의전화를 창립했다.
이들 단체는 중부교회와 부산 YMCA 강당 등에서 민주화를 주제로 강연회, 기도회 등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부산에 민주화 열망이 서서히 퍼져나가 1979년 마침내 부마민주항쟁이 이어졌다.
1970년대 국제신문 기자를 지낸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1987년 편찬한 책 '유고'에서 "중부교회는 부산 저항운동 인력의 공급처, 사회의 민주화운동과 대학의 반체제 학생운동을 연결시키는 고리였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지하 유인물과 갖가지 민권운동 관계 정보는 이곳을 매개로 부산에 퍼졌다"며 "최성묵 목사는 이 불안한 성역의 성주답게 문제가 생겼을 때 최종 책임을 혼자서 짊어짐으로써 그의 날개 밑에 젊은이들을 감싸고 돌았다. 이론을 바탕으로 신앙과 용기와 정열을 겸비한, 정의감이 강한 민권운동의 리더였다"고 평가했다.
신앙인로서 삶은 어땠을까. 박 전 이사장은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표현했다. "요한복음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는 인간 해방을 위해 이 땅에 왔습니다. 인간 해방이란 인간이 굴레에서 벗어나 양심껏, 올바르게, 자유롭게 사는 삶입니다. 최 목사님은 어떤 관습이나 법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소신껏 살았습니다. 설교도 잘하셨고, 교인에게 소탈하셨습니다."
최 목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소천한 3월 22일 중부교회와 믿음교회에서 추모예배를 매년 열었다. 올해는 25주기와 6월 항쟁 30주년이 맞물려 다양한 기념사업이 마련됐다. 최성묵 목사 25주기 기념사업회는 지난 22일 추모예배를 개최했다.
25일에는 민주화운동 역사가 깃든 민주공원, 중부교회, 가톨릭센터, 부산근대역사관(옛 미문화원)을 돌아보는 '부산시민 민주올레'를 진행한다. 다음 달 19일 오후 2시부터 부산시청 국제회의실에서는 '2017 부산 아시아 인권과 민주주의 포럼'을 연다. 박 전 이사장은 "최 목사님의 업적과 정신을 아시아권으로 넓히는 것이 남은 이들의 사명"이라고 전했다.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
출처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70325.22011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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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보수동 책방거리 故 최성묵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0711227&code=61221111&sid1=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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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은 부산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한국기독신문 2017.06.12△문재인 변호사, 최성묵 목사와의 첫 만남문재인 대통령은 1982년 8월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 무렵 재야의 고 김광일 변호사, 이흥록 변호사, 송기인 신부, 심응섭 목사, 임기윤 목사, 최성묵 목사 등을 중부교회 바로 앞 큰 대로변에 있는 유기선의원의 이층 원장실에서 처음 만났다.당시 사법연수원을 마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판·검사로 임용이 되던 시절이었으나 문재인 변호사는 판·검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변호사로 개업했다. 유신시대 학생 운동을 하며 구속, 재적됐던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을 받지 못한 것이다.그때 부산은 부림사건과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는 상태로 시국이 민감하고 늘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를 받던 시절이었다. 그런 가운데 개신교의 진보적 교단인 기장의 심응섭, 최성묵 목사와 통합의 박광선 목사, 감리교 임기윤 목사, 복음교단의 전병호 목사와 가톨릭의 송기인, 오수영 신부 등 용기 있는 재야의 인물들이 민주화운동의 싹을 키웠다.그 당시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와 집회의 중심은 부산 중구 보수동 소재 헌책방 골목에 있는 중부교회로 담임목사였던 최성묵 목사는 늘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때 관의 억압과 탄압을 견딘 재야인사들이 민주화 운동 단체를 복원하고 서서히 논의하면서 모이기 시작한 것이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부민협은 부산에서 식어가는 민주화의 열기를 재생산하고 부산지역의 최초로 민주적이고, 통일적인 민주화 운동의 산실로 태동된 단체로서 부산 민주화 운동의 지휘부 역할을 했을 만큼 그 결성은 대단한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문재인 변호사는 그때 그 단체의 논의과정에서 참여한 막내였는데, 노무현과 문재인을 끌어들인 인물이 김광일 변호사였다. 김광일, 이흥록, 문재인은 모두 경남 고교 출신으로 선, 후배 사이였다. 그 후로 부민협이 먼저 결성하자, 개신교에서는 부산NCC인권위원회, 민주헌법 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부산국본) 등의 활동을 했다. 문재인 변호사는 부산지역의 민주화운동의 가장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시대적 상황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송기인 신부는 타의에 의해 미국에 유학을 떠나고 중부교회가 6월 항쟁의 본부로 역할을 했다. 1987년 고 이태춘 열사의 노제 때 부산 최초 6월 항쟁 가두시위에 노무현 변호사는 이태춘 열사의 사진을 들었고, 그 옆에 문재인 변호사가 섰다. 고 최성묵 목사 바로 뒷편에는 황대봉 목사와 박찬종 변호사가 서서 거리로 나선 광경을 필자가 교계기자로 사진에 담고 직접 눈으로 체험했다.문재인 변호사는 당시 상임위원, 인권위원, 상임집행위원 등의 직책을 맡아 활동했으며, 이흥록 변호사는 김희욱 집사와 더불어 양서협동조합의 이사장, 총무일 맡았다. 문재인 변호사는 6월 항쟁이후 민족학교와 한겨레신문 창간에 후원회로 참가한바 있다. 고 최성묵 목사의 추모집 ‘그의 부활을 기다리며’ 속에 ‘6월 항쟁의 중심’이란 글을 통해 “돌이켜 보면 시대가 필요로 하였던 그런 일들을 그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나의 인생에서 크나큰 행운이었다”고 소회를 적어 놓았다.△6월 항쟁의 시작은 서울이 아닌 부산이다6월 항쟁은 직선제 개헌이란 목표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설정한 가운데 전국적인 연대 투쟁 기구를 결성하고 그 지휘부하에 사전 계획된 대규모 대중 집회 시위로 조직적으로 민중의 힘으로 전개했다. 강력한 군사 독재정권을 굴복시키고 목표를 쟁취함으로서 민중의 힘으로 세워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밑거름이 되었다.1987년 2월 박종철 군의 사건에서 시작된 부산의 6월 항쟁을 이끌어 마침내 6.29선언을 받아내는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다. 6월 항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부민협은 부산민주화운동의 산실로서의 역할이 컸다고 고 김광일 변호사가 훗날 자서전에 기록했다.금요기도회 등 서울 등지에 중도 재야인사들을 초청했다. 집회 장소는 중부교회였고, 박형규 목사, 문익환 목사, 문동환 목사, 강원용 목사, 이문동 교수, 서남동 교수, 한완상 교수 등이 주요 강사였다.그때 필자는 교계신문기자이자 중부교회 집사였는데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한 재야운동인사들의 활동을 현장에서 취재했던 산 증인이 되었다.1975년 변호사 개업 당시 고 김광일 변호사는 ‘동아가 죽으면 나라가 죽고 동아가 살면 나라가 산다. 부산지방변호사회 변호사 김광일’이라고 격려 광고를 실었던 관계로 요산 김정한 선생, 노경규 선생, 임기윤, 최성묵, 심응섭, 유기선 장로들과 만났고, 가톨릭에서 송기인, 오수영 신부, 이홍록 변호사, 언론계에서 윤경규 국제신문 논설위원, 조갑제 기자, 김재규, 김희욱, 박상도, 김형기 목사, 고호석 등 민주운동의 대표적 인사들과 결집할 수 있었다.고 최성묵 목사, 고 김광일 변호사가 만나지 못했다면 6월 항쟁은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으로 필자는 진단하고 싶다.
- 1979년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 박상도 전 YMCA 이사장 회고
- 25주기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
- 오늘 가톨릭센터 등 돌아보는
- 부산시민 민주올레 행사 열려
"故 최성묵(1930~1992) 목사님은 진정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돈 권력 명예 관습 등 모든 구속을 벗어나 옳고 바르고 정의로운 것만 생각하며 자유롭게 산 사람입니다."
최성묵 목사 추모예배가 열린 지난 22일 부산 중구 부산중부교회(이하 중부교회)에서 만난 박상도(71) 전 부산 YMCA 이사장은 최 목사의 삶을 이렇게 정의했다. 최 목사는 1970, 1980년대 부산 민주화운동의 거목이었다.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 곁의 중부교회 담임목사를 지내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박 전 이사장은 최 목사와 함께 다양한 기독교단체, 민주화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참여하며 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최 목사는 1930년 11월 경북 영일군 흥해면 중성동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모두 신심이 깊은 크리스천으로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심을 지니고 주일이면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했다. 1959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마친 그는 마음만 먹으면 목회자, 학자로 평온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재정권 아래서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하는 삶을 택했다.
박 전 이사장은 최 목사가 부산에 오던 무렵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줬다. "서울에서 기독학생운동단체를 통합해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를 발족한 뒤 1968년 부산으로 이주하셨습니다. 당시 부산 YMCA의 몇몇 젊은 이사들이 목사님을 총무로 모시겠다는 의사를 타진해 내려오셨는데, 보수적인 이사들의 반대로 이사회에서 부결됐어요. 그때부터 1년 이상 굉장히 어렵게 사셨어요. 일요일에 남포동에서 성경공부를 지도하셨는데 차비가 없어 양정의 자택까지 걸어가실 정도였죠."
최 목사는 이후 1970년 부산 미문화원 학생 담당 간사, 1972년 부산 YMCA 총무를 거쳐 1977년 중부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박 전 이사장은 "최 목사가 온 뒤로 부산 민주화운동에 불이 붙었다"고 기억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아래서 일어난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은 최 목사가 관여한 다양한 종교·사회단체 구성원들이 주축이 됐다. 그는 1974년에 부산인권선교협의회를 창립해 총무를 맡았고, 1975년에는 송기인 오수영 신부 등과 신·구교가 함께하는 정의구현기독자회를 만들었다. 1977년에는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부산지부, 1977년 부산도시산업선교회, 1979년 부산생명의전화를 창립했다.
이들 단체는 중부교회와 부산 YMCA 강당 등에서 민주화를 주제로 강연회, 기도회 등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부산에 민주화 열망이 서서히 퍼져나가 1979년 마침내 부마민주항쟁이 이어졌다.
1970년대 국제신문 기자를 지낸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1987년 편찬한 책 '유고'에서 "중부교회는 부산 저항운동 인력의 공급처, 사회의 민주화운동과 대학의 반체제 학생운동을 연결시키는 고리였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지하 유인물과 갖가지 민권운동 관계 정보는 이곳을 매개로 부산에 퍼졌다"며 "최성묵 목사는 이 불안한 성역의 성주답게 문제가 생겼을 때 최종 책임을 혼자서 짊어짐으로써 그의 날개 밑에 젊은이들을 감싸고 돌았다. 이론을 바탕으로 신앙과 용기와 정열을 겸비한, 정의감이 강한 민권운동의 리더였다"고 평가했다.
신앙인로서 삶은 어땠을까. 박 전 이사장은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표현했다. "요한복음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는 인간 해방을 위해 이 땅에 왔습니다. 인간 해방이란 인간이 굴레에서 벗어나 양심껏, 올바르게, 자유롭게 사는 삶입니다. 최 목사님은 어떤 관습이나 법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소신껏 살았습니다. 설교도 잘하셨고, 교인에게 소탈하셨습니다."
최 목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소천한 3월 22일 중부교회와 믿음교회에서 추모예배를 매년 열었다. 올해는 25주기와 6월 항쟁 30주년이 맞물려 다양한 기념사업이 마련됐다. 최성묵 목사 25주기 기념사업회는 지난 22일 추모예배를 개최했다.
25일에는 민주화운동 역사가 깃든 민주공원, 중부교회, 가톨릭센터, 부산근대역사관(옛 미문화원)을 돌아보는 '부산시민 민주올레'를 진행한다. 다음 달 19일 오후 2시부터 부산시청 국제회의실에서는 '2017 부산 아시아 인권과 민주주의 포럼'을 연다. 박 전 이사장은 "최 목사님의 업적과 정신을 아시아권으로 넓히는 것이 남은 이들의 사명"이라고 전했다.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
출처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70325.22011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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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보수동 책방거리 故 최성묵 목사
최성묵 목사(1930~1992)는 평생을 세례 요한처럼, 본 회퍼 목사처럼,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주교처럼 산 목회자다. 불의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청소년 운동에 앞장섰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 거리에 있는 '중부교회'(77년 부임) 사역을 하다가 92년 3월 22일 거리에서 과로로 쓰러져 소천했다.
경북 영일군 흥해면 출신으로 1950년 8월 빨치산에 의해 총상을 입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생환했다. 이후 서울대 수학과를 나와 흥해중과 포항고 교사를 역임했다.
사진은 55년 포항고 재직 시절이다. 뒷줄 오른쪽 끝이 최 목사다. 크리스천 교사였던 그는 그 무렵 김재준 목사(민주화운동가·1901~87)가 포항 설교에 나서자 김 목사에 대한 자유당 정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포항고 강당을 설교 장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그 무렵 6.25당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살려만 주신다면 남은 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약한 기억을 떠올리고 56년 한신대에 진학, 목회자가 되었다. (사진)1978년 4월 '부산대 자율화 민주투쟁 선언문' 사건으로 구속된 교회청년 등을 위한 기도회를 알리는 전단지.
68년 부산 이주 이후 부산민주화운동의 대부로 활약했으며 숱한 고난을 거쳤다. 부마항쟁 배후 혐으로 모진 취조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끌던 중부교회는 가난하고 갇힌 자들을 위한 성소이자 경찰수배에 쫓기는 청년, 학생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출처 '최성묵 평전' 산지니 刊)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부산 보수동 헌책방 거리에 있는 '중부교회'(77년 부임) 사역을 하다가 92년 3월 22일 거리에서 과로로 쓰러져 소천했다.
경북 영일군 흥해면 출신으로 1950년 8월 빨치산에 의해 총상을 입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생환했다. 이후 서울대 수학과를 나와 흥해중과 포항고 교사를 역임했다.
사진은 55년 포항고 재직 시절이다. 뒷줄 오른쪽 끝이 최 목사다. 크리스천 교사였던 그는 그 무렵 김재준 목사(민주화운동가·1901~87)가 포항 설교에 나서자 김 목사에 대한 자유당 정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포항고 강당을 설교 장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그 무렵 6.25당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살려만 주신다면 남은 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약한 기억을 떠올리고 56년 한신대에 진학, 목회자가 되었다. (사진)1978년 4월 '부산대 자율화 민주투쟁 선언문' 사건으로 구속된 교회청년 등을 위한 기도회를 알리는 전단지.
68년 부산 이주 이후 부산민주화운동의 대부로 활약했으며 숱한 고난을 거쳤다. 부마항쟁 배후 혐으로 모진 취조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끌던 중부교회는 가난하고 갇힌 자들을 위한 성소이자 경찰수배에 쫓기는 청년, 학생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출처 '최성묵 평전' 산지니 刊)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0711227&code=61221111&sid1=al
---------------------------------------http://galtong.tistory.com/44-------------------------------------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4159----------------
당시 전도사로 있던 김형기가 아이디어를 처음 냈다. 당국 감시와 탄압이 심해 공개 강연이나 모임이 어렵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협동조합이란 형태는 '공개적, 합법적이며, 도덕적이고 온건'한 조직체로 문화운동과 시민운동을 한 그릇에 담을 수 있었다. 뒤이어 최준영 김희욱 등이 가세했고 드디어 1977년 말 부산양서협동조합(이하 양협)이 만들어졌다.
양협은 이내 독재의 부당함을 일깨우고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통로가 됐다. 재야인사나 지식인 강연도 들을 수 있었다. 2년 만에 회원만 600여 명으로 늘었고 대학생 시민 주부에 고교생까지 가입할 정도였다. 그렇게 양협 운동은 부산 민주화운동이 확산되는 구심점이 돼 갔고, 이후 참여 인사들은 부마항쟁을 비롯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최성묵 목사 '평전' 발간
70·80년대 민주화운동 대부
양서조합 정신적 지주 역할
이 양협 운동이 싹 트고 퍼져 나간 곳이 바로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의 중부교회였다. 또 그 중부교회가 부산의 명동성당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평가되는 고 최성묵 목사가 정신적 지주로 버티고 있어서다.
최 목사의 삶을 집중 조명한 '최성묵 평전'(산지니)이 나왔다. 최 목사가 타계한 지 20주기가 지나고 2년을 더 넘기고 난 후다.
십자가를 지고 민중과 민주주의에 헌신한 최 목사의 삶을 통해 '실천하는 종교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자 기록이다. 부산에서는 민주화 인사들의 삶을 조명하는 저술이 많지 않은 풍토여서 뒤늦은 감이 있지만 그 의미는 적지 않다. 평전은 차성환 부산민주공원 전 관장이 5년에 걸쳐 종교인과 재야 지도자, 가족 등 최 목사 주변 인물 30여 명의 증언과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 펴냈다. 차 전 관장은 "'6월 항쟁' 주역의 한 명, 기독교 단체인 KNCC 설립 주도 등 민주화 운동은 물론 다양한 사회사업을 펼친 목사님의 삶이 타계 후에는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해 평전을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평전에는 현대사의 모순과 질곡의 한가운데를 지나온 최 목사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겼다. 10대 때인 1930년대부터 신사 참배를 거부한 저항 교회 목사였던 부친과 함께 산에서 숨어 살고, 한국전쟁 때는 학도병으로 빨치산에 붙잡혀 총살형에 처해졌다 살아남기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남은 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맹세하며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삶을 조망한다. 그런 종교인의 자세가 굳건했기에 연고도 없는 부산에 내려와 부산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생은 나그네처럼 살아야 한다." 늘 주변에 했다는 말 그대로 최 목사 스스로 청빈의 삶을 살았다. 저자는 "주머닛돈은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줘 버렸다. 그 때문에 목사님은 물론이고 사모님과 가족도 고생했지만 전혀 내색을 안 했다. 민주화운동에 몸 담은 사실뿐 아니라 삶 자체도 모범이 되는 종교인이었다"고 평가했다.
부산일보 김영한 기자 2014년 4월 11일
원문 읽기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40411000032
--------------------------------종교개혁과 부활, 그리고 최성묵 목사유럽은 역사적으로 중세이전에는 매우 진부하게 발전된 지역이다. 유럽은 동쪽으로 갈수록 부유했고 서쪽으로 갈수록 가난했다. 영국과 독일 등 서유럽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난립된 부족국가들로 인하여 혼란기를 겪었다. 중세유럽은 5세기에서 8세기 동안 국토확장과 이교신앙을 배제하기 위해 그리스도국가들이 급속하게 증가되면서 교황의 권위는 높아졌고 문화와 언어는 통일되는 과정에서 영주들의 세상이 되었다. 이 시기에 로마교황은 중심 권력이 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상을 얻었다. 반면, 농민들은 빵을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대부분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평균수명이 30세 전후였다. 따라서 굶주림을 피해 수도원에서 고된 일과 어려운 과정을 견디면서 비인간적 생활을 했다. 특히, 20년 동안 총 8차례의 십자군원정으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맞으면서 성장하게 된다.중세는 그리스도교가 각 수도원을 중심으로 인생만사의 중심에 있던 신정시대였다. 그들은 생활·정치와 연계되면서 인간의 죽음까지 관장하는 막강한 권력을 유지했다. 십자군전쟁(1092년∼1272년) 배경에는 610년 마호메트의 이슬람 성장이 있었지만, 또 다른 배경에는 농업 발달과 인구 증가로 교회의 재산탐닉과 부정부패에 의한 세속화에 있었다. 교황은 ‘성지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자들이 이슬람교도들에게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특히, 전쟁자금이 부족하면서 시장세, 통행세, 관세 등과 제후들은 후추와 향신료를 구입하고 세금을 뜯기 위해 상업도시를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상인들에게 ‘자유도시’ 자치권을 주게 되면서 부르주아가 탄생케 된다. 더 큰 문제는 1346년 이후 흑사병과 기근, 전쟁으로 유럽인구 절반가량이 사망하면서 하나님에게 진노를 달래는 채찍질고행과 유태인학살의 만행까지 저지르게 된다.유럽 각국은 국민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중세 가톨릭교회는 쇠퇴되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과는 다르게 신도의 기증 등으로 교회와 성직자들이 토지와 재물을 가지게 되면서 재산을 불리고 사치에 빠지게 되었다. 루터의 고백처럼 당시는 온갖 미신적인 요소와 유물숭배가 성행하였다. 흑사병으로 인한 채찍질 고행에서 쇠퇴한 왕실과 부패한 교회, 가혹한 세금으로 농민을 괴롭히는 영주들로 이어지면서 종말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넘쳤다. 따라서 청빈•순결•순종과 성직매매와 성직자 결혼금지의 ‘수도원운동’ 등이 일어났지만, 대세를 막지 못했다. 루터는 사제만이 가지는 구원기능과 로마교회 경건과 위선을 비난하고, 하나님만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믿음만으로, 은혜만으로, 성서만으로!(sola fide, sola gracia, sola scriptura)”라는 말하면서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게 되었다.1483년 구리 광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루터가 수도사에서 박사학위와 교수까지의 사건은 중세의 사회현상적인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다양한 사회적 체험과 다양한 시련은 그 시대적인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인간이 가지는 자유란 민주주의 가치체제에서 살아가는 모두에게 최고의 가치다. 인간들은 어떠한 시대적인 외부억압이나 불평등에 의한 구속과 착취들이 있을 때는 자유의 한계성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우리 사회는 산업화와 대중민주주의 사회를 경험하면서 자유•민주의 한계성을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루터는 1520년 ‘그리스도인의 자유(Freiheit von eines Christenmenschen)’에서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만물에게 예속된다”고 하는 대명제를 만들었다.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고 다음 주는 부활주일이다. 또한 지난 3월 22일은 부산운동권의 대부였던 최성묵 목사가 소천한 25주년이었다. 최 목사는 서울문리대,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목회자와 학자로 평온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고통 받는 민중과 함께하는 삶을 택했다. 그는 서울에서 KCM총무 등과 부산 USIS학생과장과 YMCA총무, 중부교회 담임목사를 거치면서 보수권력과 맞섰다. 송기인•오수영 신부 등과 정의구현기독자회를 조직하고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부산지부, 부산도시산업선교회, 부산생명의 전화, 장애자자립센터를 창립하면서 부마민주항쟁으로 이어져 갔다. 필자는 지난시절, 최목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부산 대학-Y 초대회장과 결혼 주례와 중부교회 집사 등을 거쳤다. 그러나 그가 남기신 ‘인간해방과 진리’를 위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무엇인지 묵상하면서 시대적 부활정신과 맞물려 제자로서 무엇을 실천할 것인지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임실근 한국스마트유통물류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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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건 장로
출처 http://kcnp.com/m/page/detail.html?no=2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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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과 유년 시절 3
2. 소년시절 8
3. 6·25전쟁의 발발과 학도의용대 10
4. 생사의 기로에 서서 12
5.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15
6. 다시 남으로 18
7. 혈육을 찾아서 19
8. 기적의 생환 20
9. “원수를 사랑하라.” 20
10. 서울대학교 입학과 연애 21
11. 최석현 장로의 소천과 흥해교회의 분립 24
12. 부모님이 불참한 결혼식 25
13. 포항고등학교 교사 시절 28
14. 한신대 입학 29
15. 4· 9와 기독교학생운동 30
16. KSCM 간사 시절 32
17. 기독교 학생운동의 통합을 위해 35
18.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진학 38
19. 운동의 제단에 집까지 바쳐 40
20. 부산으로 가는 길 41
21. 거리의 신학자 43
22. 미문화원 학생담당 간사로 44
23. 부산 YMCA 총무를 맡다 45
24. 중부교회 전도사로 가다 49
25. ‘책방골목’지 사건 50
26. 중부교회 담임목사가 되다 52
27. 부마항쟁의 폭발 55
28. 뇌졸중으로 쓰러지다 57
29. 부림사건과 미문화원방화사건 59
30. 중부교회 내분사태 60
31.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서 67
32. 사회사업에도 헌신을 68
33. 6월항쟁과 대통령 선거 69
34. 설교와 신학사상 72
35. 거인의 최후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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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묵은 1930년 11월 11일 경상북도 영일군 포항읍 포항동 468번지에서 부친 최석현
장로와 모친 안갑선 권사 사이에서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가 두 분
이고,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한 명씩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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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신민화 교육이 지배하던 일제 말의 분위기에서 최성묵의 세대는 불행한 유년기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최성묵은 1944년 경 약 1년 동안 고현의 한 산촌에서 생활했던
일이 있는데 이것은 일제의 말기적 상황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한 자료에 의하면 이 산촌 생활은 학병으로 끌려 갈 위기에서 산으로 도피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4) 가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발악적 폭압에 위협을 느낀 최석현 장로가 자신과 장남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산촌에
서 벌목 일을 하면서 피신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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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흥해교회 박순석 목사는 1948년 1월 7일 미래세대의 신앙교육을 위해 흥해교회
소년회를 창립하였는데 최성묵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포항중학교 3학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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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최성묵의 정치적 입장은 전쟁 체험을 기록한 육필 원고를 통해 표출된 강력한 반
공사상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최성묵의 위치는 당시 중학생의 신분
이었음에도 면장이나 다른 어른들이 그리고 교회에서도 그를 학생으로 취급하지 않고
‘최 선생’으로 호칭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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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가 지고 밝은 달이 떠올라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절망이었다. 이제 여기
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죽기 전에 하느님께 마지막 기원을 드리고 죽겠다고
생각했다. 최성묵은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누운 채 부모형제를 위한 기도
를 드리고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하느님께 눈물로써 통회하고 죽음을 기다렸다. 이왕 죽
을 것이라면 이 무서운 고통을 벗어나 빨리 죽고 싶었다. 그리고 만약 이 죽음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면 남은 생은 하느님을 위해 바치겠다고 마음속으로 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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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묵은 1953년 1학기를 부산에서 다닌 후 2학기에는 휴학계를 냈다. 그 해 가을부터
서울대학교는 서울로 옮겨갔고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반드시
서울대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학생활은 이미 충분히 맛보았고
그의 관심은 점점 더 신학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6·25의 체험을 겪으면서 하느님께 자신
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한 바도 있고 교회활동을 통해서도 목회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
다. 그리고 서울대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한 것은 목회를 하더라도 일반 과학의 지식을 풍
부히 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지 졸업장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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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골목’은 중부교회 대학생부가 발간하는 회지의 이름이다. 1976년 2월 10일 경찰은 ‘책방골목’에 실린 글의 내용을 문제 삼아 중부교회의 교인인 대학생 3명을 구속했다. 구속자는 인사말을 쓴 부산대학생 조태원, 대학생회장인 동아대학생 이태성, 회지를 배포한 부산대학생 김영일이었는데 그들 모두 YMCA의 핵심 인물이었다. 회지 내용 중 인사말에서 문제 삼은 대목은 “… 힘써 이 땅에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현시키자. 한국적이니 유신이니 따위는 말고 좀 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눈으로 써 이 땅의 인류를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서 십자가를 짊어지자. …”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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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묵이 목사로 취임한 이후 중부교회는 부산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전국의
다른 지역에서 부산을 찾는 민주인사들은 중부교회를 통해 부산 인사들과 접촉하고, 부
산 내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중부교회를 통해 만나고 교류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박상도,
김형기, 차선각, 박점룡 등 중요한 민주 인사들이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각기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양서협동조합운동(양협
운동)이다. 양협은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모인 청년그룹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책을 매개
로 한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이다. 양협은 당시의 정세에서 민주화운동의 대중조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77년 11월부터 중부교회에서 준비를 시작하고 1978년 4월 창립총회를
거쳐 설립된 양협은 당시 정확한 정보와 새로운 문화에 목말라하던 시민들의 요구와 맞
물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 양협은 곧 전국의 다른 도시에도 파급되어 광주, 마
산, 서울, 대구, 수원, 울산 등에 설립되어 그 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촉진하는 역할을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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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4월 17일 중부교회 청년회원 정외영, 이성동, 전중근, 서연자 등이 부산대 학생
들에게 우편으로 유인물을 배포하고 교정에도 살포한 사건이 일어났다. “부산대 자율화
민주투쟁선언문”이라는 제목의 이 유인물은 반민주적 탄압중지, 긴급조치 해제, 노동자
농민의 권익 방해 및 인권침해 중지, 언론탄압 중지 등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성
동, 전중근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정외영은 최성묵의 도움으로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그
해 8월 전주에서 열린 기장전국청년대회에 참가했다가 검거되었다. 최성묵은 이 사건의
경과보고를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5월 13일 불구속 입건되었다. 이 사건의 재판은 특
히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집단으로 방청을 하면서 오히려 학생들의 정치의식을 일깨우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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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마지막에는 부산 중부교회 목사인 최성묵 목사님과의 관계를 추궁했다. 용돈을
최성묵 목사로부터 얼마를 받았느냐고 추궁하길래 1천만원 밖에 안주더라고 대답해 주었
다. 그 놈이 1천원이라고 잘못 듣고는 “어느 놈이 돈 1천원을 줄 턱이 있노, 거짓말 아이
가?”하고 되묻기에 나는 피식 웃으면서 “1천만원이요-.”하고 끝의 요자를 길게 빼주었다.
(김현장, 『빈체시오, 살아서 증언하라』,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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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묵은 이런 가운데서도 사회사업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힘을 기울였다. 맨먼저
장애인을 위한 사업에 착수하여 1985년 2월 한울장애인자활센터를 열었다. 이는 당시까
지 장애인 교육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부산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한울장애인
자활센터에서는 매년 교육생을 모집하여 무료로 1년간 직업교육을 실시했는데 먼저 컴퓨
터 교육을 시작했다. 이 교육은 제10기까지 계속되었다. 지금은 컴퓨터가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는 일반에게 보급되기 전이었다. 당시로서는 첨단기술을 가르친
셈이었다. 그래서 1년의 교육으로도 교육받은 장애청년들이 공기업, 도서관, 회사 등에
취업하여 떳떳한 직업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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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송기인 신부님의 도미 중에 맞이한 1987년의 6월항쟁 기간 동안 그는 부민협 회
장으로서 부산 국본의 상임공동대표가 됨으로써 무거운 짐을 홀로 도맡았을 뿐 아니라,
중부교회를 항쟁의 본부로 제공하고 젊은이들과 함께 직접 가두에 나서 시위대의 선두에
섬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항쟁의 중심이 되었다. … 당시 부산시민들은 유신체제를 끝
낸 부마민주항쟁에 큰 자부심을 가지면서 6월항쟁에서도 부산시민들이 똑같은 역할을 해
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였다. 그러나 시민들의 항쟁의지를 결집시켜 어느 지역보다 뜨겁
게 타오르게 한 데는 부산 국본의 상임공동대표였던 최 목사와 상임집행위원장이었던 노
무현 변호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때 그들은 단지 간판이나 상징적인
존재에 머물지 않고 직접 가두에 나서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섰고 최루탄
을 맞으면서 경찰과 맞섰다.
목사, 신부, 변호사 같은 점잔 빼는 이들이 매일 일반 시민들과 뒤섞여 최루탄에 쫓겨
다니면서 가두시위에 참가하고 나아가서 선두에 서서 시위대열을 이끈 것은 아마도 6월
항쟁 때의 부산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대표 최성묵, 집행위원장 노무현이라는 환상적
인 콤비의 앞장 선 솔선수범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6월항쟁에서 그들이 보여
준 행동은 지식인들의 사회참여 방식의 마지막 한계 같은 것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땅의 민주화를 좌우할 결정적 국면이라는 역사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터
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회적 체면 같은 것에 얽매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래서 나는 그들이 특히 존경받아야 마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문재
인,『그의 부활을 기다리며』, 333-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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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설교는 아름다운 시적인 표현과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격분과 때로는 너
무나 사람냄새가 나는 인간적인 말씀이셨다. 생전에 선생님께 “선생님! 설교집 하나 만
듭시다”라고 말씀드리면, “야! 그런 것 필요 없어.”라고 하셨다. 당시 교인들이 선생님의
설교 내용을 개별 녹음한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임실근,『그의 부활을
기다리며』,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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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묵 목사의 설교의 특징은 성서 본문과 오늘의 상황 사이에 균형(balance)과 조화
(harmony)를 잘 이루고 있는데 있다. 한편으로 그의 설교는 성서 본문이 담고 있는 사회
역사적 연구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 민중이 겪는 고난의 현실과 오늘
한국 민중이 겪고 있는 고난의 현실이 그의 설교 메시지에서 하나로 합류한다. 아마도
그의 설교가 당시 부산지역의 비판적 지식인과 사회참여적인 청년학생들에게 감동을 주
고 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것은 그의 설교가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시
켜주었기 때문일 것이다(김명수,『그의 부활을 기다리며』,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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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의 분석대로 최성묵의 설교는 성서에서 시작해서 오늘 이 땅의 구체적 현실을
파악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현실을 하나님과 예수의 사랑을 통해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최성묵은 “연대성의 지평”이라는 설교에서 그 사랑의 범위를 무한히 확대
한다. 즉, 예수의 사랑은 보편적이므로 원수까지 사랑의 대상이 되지만 예수가 각별히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불구자, 창녀, 세리 등이었다. 한마디로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에 대한 연대의 확대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교의 핵심이라고 보
았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자유와 해방에서 찾는다. 복음에 있어서 해방
과 자유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최성묵은 “해방자 예수”라는 설교에서 예수가 민
중을 질병, 공포, 악령, 궁핍으로부터 해방시켰고, 인간을 걱정과 불안 등 실존적 허무로
부터 해방시켰으며, 분노, 욕망, 증오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말한다. 예수를 통해, 그 안에
서 자유를 얻은 사람은 현실을 도피해서 안 되며,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의 구조악을 좌
시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자유, 평등, 인권을 세우는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역사의 한 복
판에서 그리스도의 해방과 자유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 설교의 핵심이
었다.
이러한 최성묵 목사의 신학사상은 1970-80년대 한국에서 형성된 민중신학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기 군사독재 하의 한국사회에서 억압된 민중의 삶을 신학의 주제
로 삼아 발전한 민중신학은 이미 잘 알려져 있거니와 최성묵 목사는 이 민중신학을 구
체적 목회 현장에서 또한 민주화투쟁의 일선에서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민중신학에 생명
력을 불어넣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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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묵은 1991년 4월 재야 인사 중심의 신민주연합당 준비위원회(신민연)와 김대중 총
재가 이끄는 평화민주당(평민당)이 통합해 창당한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에 최고위원
으로 참여하게 된다. 당시 상황에 대한 박상도의 증언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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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묵은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에서 서울과 부산을 오가면서 열심히 선거를 준비해
나갔다. 1992년 3월 24일로 예정된 국회의원 총선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선거를 이틀 앞 둔 3월 22일 그는 오후에 거제도에서 열린 기독교 장로회 경남노회를
다녀왔다. 그는 노회 참석자들을 숙소에 쉬게 한 후 자정 무렵 교회로 돌아오는 길에 부
평동 시장 바닥에 쓰러졌다. 사람의 왕래가 끊어진 시각이었는데 인근 술집의 주인이 그
를 발견하여 메리놀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늦었던 것이다. 향년 61세, 평생을 민주화에
몸바쳤던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이며, 훌륭한 목회자이며, 사회사업가였던 위대한 인물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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