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양서협동조합의 역사와 의의
오균현(전 서울양서협동조합 전무)
차성환(부산대 사회교육연구소)
1. 머릿글
서울양서협동조합(이하 서울양협으로 표기)은 1970년대 말경 전국 7개 도시에 설립되었던 양서협동조합들(이하 양협으로 표기) 가운데 몇 가지 점에서 매우 흥미 있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양협은 어느 지역보다 오래 지속했던 단체였다. 서울양협은 1978년 11월 12일 창립하여 1982년 3월에 해산하였다. 햇수로 따지면 대략 만 3년 4개월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는 대개 2년을 넘지 못했던 다른 지역의 양협들에 비해 가장 오랫동안 지속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 점에서 서울양협의 저력은 충분히 확인된다.
당시나 지금이나 서울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물질적, 문화적으로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활동 여건도 매우 유리한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서울양협 그 자체는 부산이나 광주 등의 지역에 비해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재정적으로나 인적으로 서울양협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다가 1982년 3월 해산 총회의 결의로 해산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서울양협의 해산 후에도 지속되었던 어린이도서연구회라는 단체가 1990년 서울양협 재발기 움직임을 계기로 도약하여 학부모가 중심이 된 어린이독서운동체로 크게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즉 어린이도서연구회는 서울양협의 정신을 잇는 단체로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활동하면서 한국의 출판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서울양협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서울양협이 남겨놓은 성과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서울양협의 역사
1) 서울양협의 출범기 - 대현동 시절
서울 양협은 부산 양협의 중심 멤버로 활동하던 최준영이 대학교 복학을 위해 서울로 이거하면서 전파되었다. 최준영은 부산출신으로 1971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하였고, 1972년 박형규 목사가 봉직하던 서울제일교회에 나가면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과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운동 등 기독교 청년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1974년 말 육군에 입대하여 1975년 여름, 부산으로 배치 받아 군 복무를 하는 가운데 주말마다 외출을 나오면 중부교회를 찾아 김형기, 김희욱 등과 만나면서 부산양협의 창립을 위한 준비 과정에 처음부터 참여하였다.
그는 부산양협의 창립을 앞둔 1978년 3월 대학 복학을 위해 서울로 이거하면서 당시 서울 새문안교회 소속으로 EYC전국회장이었던 오균현에게 부산양협을 소개하였고, 오균현은 양협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에서 양협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이어졌고 오균현을 중심으로 같은 새문안교회 소속의 허성삼 등은 양협 창립을 위한 준비모임을 구성하게 되었다. 준비모임은 EYC쪽 인사 2~3명, 언론사 문화부 기자 2~3명, 출판사 대표 2~3명, 교사 2~3명 등 10명 정도의 인사들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부산양협의 김형기 등과 긴밀한 협의를 거쳤다.
준비모임은 1978년 6월 20일부터 7월 25일까지 주 1회씩 전체 모임을 가지고, 협동조합에 관한 의견 교환, 부산 양협 소개 및 검토, 부산 양협의 정관 분석, 서울 양협 운영방안 등을 논의하고, 운영위원회를 열어 운영방안을 검토하고 발기위원회 발족을 준비하였다. 또 준비모임에서는 당시 해직 상태에 있던 한완상 교수 등 대학교수들을 지도위원으로 위촉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8년 7월 26일 서울 양협 발기위원회(위원장 오균현)를 발기인 30명으로 구성하게 되었다. 발기위원회는 매주 교육 세미나를 개최하고, 정관위원회, 교육위원회, 홍보위원회, 조직위원회, 서점준비위원회, 도서선정위원회 등 6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중 교육위원회는 10월과 11월에 총 8차의 회의를 가지고 교육정책 수립, 교육자료 발간, 발기위원 세미나, 신규조합원교육 등을 수행하였다. 홍보위원회는 8월 9일에 구성하여 홍보자료, 교육자료를 발간하고 소책자, 회보의 발간 계획을 세웠다. 조직위원회도 8월 9일 구성하여 매주 1회씩 14회의 모임을 갖고 회사원그룹, 교수 ․ 교사그룹, 주부그룹, 언론 ․ 출판인그룹, 학생그룹 등 계층별 조합원 확보방안을 검토하였다. 서점운영위원회는 8월 6일에 구성하여 총회 전에 서점 등록을 하여 11월 2일부터 임시 서점을 운영하기로 하였다. 또 정관 초안을 작성하고 사무실을 확보하며 발기위원들의 출자를 통해 200만 원의 출자금을 조성하는 등의 계획을 추진하였다.
서울양협의 정관을 부산과 비교하면 거의 비슷하지만 사업의 원칙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양쪽 다 롯치데일 원칙을 채용하고 있는데 서울은 여기에 양서보급의 원칙, 문화사업의 원칙을 추가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중립의 원칙과 함께 문화사업을 강조함으로써 정부와의 마찰을 줄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8년 11월 12일 서울양협은 종로에 있는 YMCA 대강당에서 조합원 100여 명이 모여 창립총회를 가졌다. 조합장에는 소비자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조영황 변호사, 부조합장은 김쾌상, 전무는 오균현이 선출되었고 이사, 감사와 각 분과위원장도 선임되었다. 출범 당시 이사들의 면면은 소홍열(이대교수), 임헌영(문학평론가), 김쾌상(월간 기독교사상 편집장), 부길만(태화상사), 강명숙(중화중학교 교사), 김정한(삼성물산), 문일규(삼광인쇄), 허성삼(건국대학교 경제학과), 황혜원(동화출판사) 등이었으며, 감사는 이재헌(성 바$황혜병원장), 어춘수(한일건재), 우신천(외환은행) 등이었다. 작가 박완서와 김동댸강당 한완상 교수, 출판인 윤형두(범우사), 김언호(한길사) 사장 등도 윸운동에 관 서울양협의 창립은 당시 주요 일간지에 소개되어 널리 알려 김동댸강당.
창립총회에서 서울양협은 신규 조합원 가입 및 교육, 독서토론회 및 저자와의 대화, 주간 소식지 및 격월간 조합지 발간, 양서목록 책자 발간, 소그룹 및 스터디 그룹 운영, 직영서점 및 직영출판사 경영, 기타 각종 세미나 개최 등의 사업을 결의하였다.
출범과 함께 서울 양협은 서대문구 대현동(신촌 주변)의 한 건물 2층을 세 내어 사무실 겸 직영서점 ‘양서의 집’을 개설하였다. ‘양서의 집’은 전무 오균현이 간사 남미숙, 김충선 등과 함께 상근하면서 운영해 나갔다.1) ‘양서의 집’에서는 양서와 함께 판매 금지된 도서나 유인물 등을 은밀히 보관하였다가 조합원이나 일반인에게 판매, 유통하였다. 경찰에서는 서울양협의 동태를 일상적으로 감시하였다.
이 시기에 조합원 수는 200명을 상회하였는데 구체적으로 보면 제2차 정기총회에서 기획위원회는 1979년 3월 24일 현재 조합원 231명, 조합원 교육 21회를 보고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대학생과 함께 회사원, 기자, 교사 등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많았다. 조합원들의 관심사와 취향에 따라 다양한 소모임이 조직되었는데 1979년 3월 24일 현재, 일어반은 매주 6명이 9회, 한문반은 매주 8명이 9회, 독어반은 매회 4명이 3회, 한국근대사 연구반은 매회 12명이 9회, 사회과학연구반은 매회 7명이 2회의 모임을 가진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각 모임의 구성과 운영은 다양했다. 예를 들면 한국근대사연구반은 10여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되었는데 대학생과 교사들이 주를 이루었고 일반 직장인도 2, 3명 참여하였다. 그들은 매주 모임을 가졌고, 이기백 교수의『한국사 신론』, 카(E. H. Carr)의『역사란 무엇인가』, 조동걸의『한국농민운동사』와 신채호의 저작 등을 읽고 와서 발제하고 토론했다.
한문반은 동양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었다. 당시 조합원이었던 김영복이 한문 고전을 강의하였는데 그는 통문관 직원으로 한문에 박식했던 선비 풍모의 지식인이었다. 10명 안팎의 조합원들이 고전 강의를 듣고 마치면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토론했다.
독어반은 서울대학교 독문학과를 다니던 김태현이 이끌었는데 그는 서울대학교 학생운동 그룹에 속해 있었다. 당시 김태현은 서울양협에서는 김경수라는 가명을 썼다. 서울양협은 대외적으로 정치성을 띠는 것은 경계했기 때문에 학생운동가들의 경우는 가명을 쓰기도 했고 가입을 자제하도록 하기도 했다. 서울양협의 운영자들은 조합 내에서 정치적 대화는 가급적 조심하도록 하고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임원을 맡기지 않았다. 이러한 소모임을 통해 조합원들은 해 와 토론을 통해 사회의식을 함양하고 친목을 도모했다.
또 서울 양협은 출범 이후 독서 토론회, 저자와의 대화 등의 행사를 가졌는데 독서토론회에 선정된 책은『어떻게 살 것인가』(78. 12. 6),『유토피아로의 모험』(79. 1. 6),『여성의 사회의식』(79. 1. 20),『떼레즈 데께루』(79. 2. 17),『객지』(79. 3. 3)『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79. 3. 17) 등이었다.
저자와의 대화에 초청한 인사는 김정한 교수(『낙동강의 파숫꾼 』79. 3. 10), 이오덕 선생(『삶과 믿음의 교실』79. 1. 27), 송건호 선생(『한국현대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79. 2. 24), 시인 문병란(『한국 시인의 사명은 무엇인가』79. 3. 10), 작가 김성동(『만다라』80. 12. 13)등이었다.
1978년 12월 25일에는 주간 『양서소식』이라는 소식지를 창간하였다. 이 소식지를 통해 양서의 소개와 사업보고 등을 했는데 소식지는 제호를 약간씩 달리하면서 지속적으로 발간되었다. 소식지에는 ‘양서는 양심을 낳고 양심은 정의로운 사회를 낳는다.’ 라는 구호를 넣어 서울양협의 지향을 잘 드러내었다.
서울 양협은 1979년 3월 24일 제2차 정기총회에서 서점 운영 실태를 보고하고 있는데 개업 초기를 제외하면 도서의 판매액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는 볼 수 없으며 도서의 이용도 역시 월평균 1권 이하가 72.3%를 차지할 만큼 저조한데 이는 서점이 도서를 제대로 구비해 놓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어서 서점 이전확장 계획을 제출하였는데, 이전이 필요한 이유로는 중심가에서 거리가 멀어 대부분 직장인들인 조합원의 이용이 어렵고, 2층이라 일반 고객이 거의 없어 출판사와의 거래도 힘들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중심가로 이전할 경우 교통이 편리한 1층 매장이라 조합원의 이용률이 높아지고 조합원의 확보에도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1979년 4월 1일부터 광화문으로 이전할 계획을 공지하였다.
2) 서울양협의 시련기 - 광화문 시절
서울양협은 1979년 3월 24일 제2차 정기총회에서 공지한 대로 1979년 4월 14일 서점을 광화문으로 확장 이전하였다. 광화문에 서점을 개설함으로써 조합원들의 이용은 편리해졌으나 지나치게 비싼 임대료(월세 120만원) 때문에 심각한 재정적 곤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균현 전무는 광화문으로 서점을 이전하면서 개인적으로 부채까지 떠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서울양협의 사업에도 지장이 초래되었다.
교육위원회는 이 기간 중에 총 8회의 독서토론회를 개최하였는데 제6회 『소유나 삶이냐』(79. 9. 29), 제7회 『여자팔자와 여성해방』(79. 6. 3), 제8회 『죽음의 형태』(79. 9. 29), 제9회『사랑의 기술』(79. 9. 28), 제10회 『제2의 성』(79. 9. 29), 제11회 『서러운 사람들』(79. 10. 20), 제12회 『날개』,『광염소나타』(79. 11. 10), 제13회 『사람의 아들』(80.2.9) 등의 책을 주제로 선정하였다.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사업은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어린이도서연구 모임의 결성이며 둘째는 ‘양서 읽기 가두 캠페인’이었다.
어린이도서연구모임은 1979년 5월 조합원 김우정이 어린이전문서점을 만들자는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1979년은 ‘세계아동의 해’였다. 이 해에 어린이들을 위한 일을 해 보자는 취지로 어린이문화에 관심을 가진 김우정, 송창석, 이주영, 이규선, 최선희 등 7명이 당시 신아일보 소회의실에서 첫 모임을 갖고 이후 서울양협 내에 어린이책을 연구하는 소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이 모임이 다음해 어린이도서연구회를 결성하는 모태가 된다.
‘전국 양서 읽기 가두캠페인’은 1979년 7월 27일~28일에 서울의 광화문과 종로 2가 그리고 부산, 대구, 청주, 광주, 전주, 울산 등에서 벌였던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로써 당시 전국 각 지역의 양협과 일정한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서울 외의 지역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계획으로 그친 듯하다.
광화문 서점이 있던 시기에 조합원 교육은 많이 하지 못했고 조합원의 확대는 언론을 통한 홍보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서울양협은 MBC 라디오에 양서읽기 캠페인을 제안하여 ‘밤을 잊은 그대에게’라는 심야 프로그램에 매주 출연하여 양서를 소개하고 엽서를 보내 주는 청취자에게 소개된 책을 우송해 주었다. 이런 캠페인을 통해 그 프로그램을 청취하는 고등학생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조합 운영은 외견상 홍보는 많이 되었으나 조합원을 훈련하고 조직적 내실을 다지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시기에 서울양협은 두 가지 큰 시련을 겪게 되는데 첫째는 재정적 곤란이고 둘째는 급격한 정치변동 때문에 생긴 정권의 탄압이었다.
서울양협은 조합원들의 출자금을 투자하여 광화문에 낸 서점이 큰 손실을 보면서 출자금이 거의 바닥이 났고 임원들이 그 출자금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이 기간 중 직영서점의 경영 상태를 보면 신촌에서 광화문으로 옮긴 이후 판매액과 이익금도 증가하였으나 임차료, 급료, 광고홍보비 등 경비가 이익금의 증가보다 훨씬 커서 450여만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 중 5명의 서점 직원이 교체되었고 1979년 7월의 이사회에서 서점 불황 타개방안이 논의되었지만 경영난을 타개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조합장 조영황 변호사가 500만원을 추가 출자하여 손실액을 메웠으나 그래도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지나치게 임대료가 비싼 지역에 양협의 서점을 개설한 것 자체가 무리한 전략이었다.2) 기초부터 다져가지 않고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 결과였다. 결국 1979년 말, 광화문을 떠나 신문로에 있는 한정식 집(상호 ‘가전’)의 2층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로 이전하면서 서점은 문을 닫게 되었다. 이 무렵에는 위탁판매방식으로 출판사에서 공급받아온 책의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반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재정난으로 말미암아 서울양협은 정상적인 사업추진이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 시기에 서울양협의 운영을 어렵게 만든 또 하나의 문제는 정권의 탄압이었다. 서울양협에 대한 당국의 감시와 탄압은 처음부터 있었다. 경찰과 정보기관은 서점 을 감시하고, 교육에 참가하는 조합원을 조사하고, 실무자를 연금하거나 책을 압수하는 등의 방법으로 조합의 활동을 방해하였다.3)
그러던 중 1979년 10월 유신체제 하 최대의 민중저항이었던 부마항쟁이 발생했다. 부산에서 붙은 항쟁의 불길은 마산으로 번졌고 유신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군사력으로 항쟁을 진압한 유신정권은 항쟁의 배후세력으로 부산양협을 지목했다. 부산계엄사령부는 1979년 11월 부산양협 이사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양협을 해산시켰다. 부산양협에 대한 정권의 탄압은 서울양협 조합원들에게 이전보다 더 큰 공포감을 심어 주었다.
게다가 이사였던 임헌영이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조합원들 사이에서 “양협은 이제 끝났다”라는 위기감, 양협에 참여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 등이 확산되면서 서울양협은 크게 위축되었다. 소모임에 참여하던 조합원들 가운데 발길을 끊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이 겹치면서 서울양협은 매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1980년 3월 16일에 열린 제3차 정기총회에서 조합장 조영황은 “모든 조합의 힘은 직영서점의 경영으로 모아졌으나 경영미숙과 재정의 절대부족과 조합원의 참여부족으로 어려움이 많았다.”라고 토로하였다. 제3차 총회에서 보고된 조합원 수는 413명이었다.
3) 서울양협의 조정기 - 신문로 · 봉원동 시절
1980년 3월 22일 서울양협 이사회는 조합장 인배환, 부조합장 김정한, 전무 부길만으로 임원진을 개편하였다. 제3회 총회에서는 서울양협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지도력의 필요가 제기됨에 따라 부길만 전무가 실무를 이끌어 가게 되었다. 오균현 전무가 일을 치고 나가는 스타일이었다면 부길만 전무는 신중하고 치밀한 스타일이었다. 부길만 전무는 재정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경비는 가능한 한도까지 줄이되 정치적 환경변화로 인한 조합 활동의 위축은 최소화하도록 노력했다.
이 시기에 특기할 활동은 어린이책전시회의 개최와 어린이도서연구회의 출범이다. 1979년에 발족한 어린이문화연구모임은 1980년 2월 총회에서 어린이독서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여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어린이사업을 대표하여 이주영이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해 4월 14일 어린이문화연구모임은 어린이독서연구모임으로 발전했다. 그동안 어린이전문서점의 설립 가능성을 약 반 년간 조사해 온 어린이독서회연구모임은 어린이전문서점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대신 이동식 아동도서전시회를 기획하였다.
아동도서전시회는 1980년 5월에 개최했는데 서울양협의 조합원 50명 정도가 6일간 열성적으로 함께 일했다. 또한 전시회와 함께 이오덕 선생을 강사로 모셔 어린이독서교육 강연회도 함께 개최하였다. 이 전시회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많은 시민들이 어린이들의 손을 잡고 전시회장을 찾았다. 이 전시회는 한국 최초의 아동도서를 주제로 한 전문적 전시회로서 문화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전시회의 성공은 어린이독서연구모임 구성원들만이 아니라 서울양협의 모든 조합원들을 크게 고무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서울양협의 초대에 시민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은 조합원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다.4)
그러나 이 무렵부터 정치 환경은 최악의 상황으로 악화되어 갔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광주에서 피의 학살을 시작했다. 국회가 해산되었고 모든 정상적인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정치활동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사업이나 행사도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5·18항쟁 직후 서울양협은 자체 기금 마련을 위한 1일 찻집을 체육회관 지하공간에서 개최하려 했으나 계엄사령부가 허용하지 않아 취소해야만 했다. 5·18항쟁으로 광주양협은 계엄군의 진압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강제 해산되었다. 부산, 광주처럼 해산되지는 않았지만 대구, 울산, 수원 등의 양협도 정치적 탄압으로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정치 환경 때문에 5·18항쟁 이후에는 사람들이 공포감 때문에 서울양협에 가입하기를 꺼렸다. 게다가 조합원 중에 당국이 잠입시킨 프락치5) 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누구 누구가 프락치 같다”는 말들이 조합원들 속에 유포되기도 했다. 우애와 믿음으로 결속해야 할 협동조합이 이처럼 불신의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사업과 활동이 활기차게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어린이도서전시회의 성과를 바탕으로 1980년 6월 6일에는 어린이도서연구회가 서울양협 산하에 결성되었고 회보「어린이독서」를 창간하여 서울시내 200여개 초등학교에 무료로 배포하였다. 어린이도서연구회는 이전의 어린이독서연구모임과 달리 소모임의 수준을 넘어서 상당히 전문적이고 독립성이 강한 산하 단체로 발전한 것이었다.6)
1980년 6월 서울양협은 신문로에 있던 사무실을 봉원동으로 이전했다. 신문로 역시 도심지여서 임대료가 비쌌기 때문에 비용을 더 줄일 필요가 있었다. 이전한 장소는 조합원인 장의균이 출판사(개마고원) 사무실로 쓰는 건물이었다.
봉원동 사무실에서는 이전에 비해 경비가 크게 절감되었고 따라서 조합을 유지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출자금은 이미 소진되었고 매월 납부하는 조합비만으로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현상유지는 가능했지만 조합원들이 늘어나서 재정구조가 개선되거나 활동력이 크게 증대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서울양협은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노력했다. 비활동 조합원을 대폭 정리하여 조직을 정비하고 회원제 서점을 개설하였으며 어린이마을도서관을 개관하기도 했다.7)
제3차 정기총회(1980년 3월 16일)에서 제4차 정기총회(1981년 3월 21일)에 이르는 기간 중의 서울양협 활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교육위원회는 신규조합원 가입교육을 5회 실시하여 24명의 조합원을 확보하였는데 이는 전년에 비해 조합원의 신규가입이 대폭 축소된 것이었다. 대신 기존 조합원에 대한 재교육을 7차에 걸쳐 총 88명에 대해 협동조합을 주제로 실시하였다.
1981년 1월, 서울양협 이사회에서는 의무 이행이 미진한 조합원에게 탈퇴를 권고하기로 결의하고 동년 2월의 이사회에서는 157명의 조합원을 제명하기로 결의하는 등 조직의 재정비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4차 정기총회 때는 재적 조합원이 213명으로 제3차 정기총회의 절반 수준이었다.
기획위원회가 운영하는 소그룹모임은 역사학모임을 매주 1회씩 24회, 한문반 모임을 매주 1회씩 10회, 어린이도서연구회가 매주 1회씩 28회, 협동철학연구모임이 매주 1회씩 13회, 영어소설연구모임이 매주 1회씩 3회, 중고교생 독서실태조사준비 모임이 4회, 교양 철학 모임이 1980년 하반기에 모임을 가졌다.
협동철학연구 모임은 부산양협에서 활동하다가 한신대로 유학 온 박철수가 이끌었다. 박철수는 서울양협의 조합원 교육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협동조합 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협동조합 관련 자료를 함께 읽고 토론했다.
이 시기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린이도서연구회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는데 제1회 어린이 도서전시회와 제1회 어린이 독서교육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서울양협 전체의 사업으로서 초기에 활발하게 해 왔던 강연회 등은 문학 강좌 4회, 저자와의 대화 1회에 그쳤다.
광화문 시절 이후 열지 못했던 서점은 봉원동에서 회원제 서점의 형태로 다시 개설되었다. 이 서점은 청넝쿨소비자협동조합과 함께 했는데 일반인에게 책을 판매하지 않고 조합원들만 이용하였다. 또 1981년 10월에는 봉원동 지역의 어린이들이 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어린이도서관을 서울양협 사무실 공간에 만들었다.
경영상태는 긴축경영의 결과 상당히 호전되어 제4차 정기총회에서 감사위원회는 서울양협이 소액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하여 조합의 경영이 점차 안정세를 찾아 간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전에 비해 상대적인 호전일 뿐 경영은 현상유지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웠고 지속적인 조합원의 증대는 난망하였다.
제4차 정기총회가 열렸던 시기는 신군부가 한국사회 전체에 대한 이른바 숙정의 칼날을 휘두른 후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때였다. 전두환 정권의 공포정치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다.
4) 서울양협의 해체기 - 봉원동 · 충장로 시절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 놓였지만 서울양협은 내실을 다지면서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그러나 경영상태가 획기적으로 개선될 여지는 거의 없었고, 전두환 정권 초기의 엄혹한 정치 환경으로 인하여 서울양협은 해체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해산 총회 이전의 마지막 총회가 되었던 제4차 정기 총회는 1981년 3월 21일에 개최되었다. 재적 조합원 213명 중 34명이 참석하고 83명이 위임하여 성립된 총회에서 이루어진 임원 선출로 9명의 이사와 3명의 감사가 선출되었다. 이사는 김효고, 김쾌상, 오균현, 권병길, 김경수, 이이순, 이가희, 남미숙, 이주영이며, 감사는 조용웅, 홍선화, 서영숙이었다. 새로운 이사들은 총회장에서 이사회를 열어 조합장에 김쾌상, 부조합장에 오균현, 전무에 부길만을 선출하였다. 신임 김쾌상 조합장은 교육을 통해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서 활발한 조합 활동을 전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제4차 정기총회(1981년 3월 21일) 이후 서울양협의 활동을 살펴보면, 먼저 3월 30일부터 새로운 소식지(주간양협소식)을 새롭게 발간하기 시작하였다.8) 또 4월에는 4월 4일과 18일에 두 차례의 조합원 교육을 실시하였다.
1981년 4월 8일에는 양서문학회를 발기하고, 5월 30일 문학사회학을 주제로 제1회 양서문학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소그룹모임은 동화연구모임, 양서문학회, 협동조합모임, 역사학모임, 소요학파모임9) , 중학생독서실태조사모임 등이 운영되었다.
어린이도서연구회는 1980년에 이어 1981년 5월 9일부터 13일까지 제2회 어린이도서전시회를 열었는데 하루에 7천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전시회는 지하철 시청역 지하전시실에서 국내 창작동화를 중심으로 32개 출판사 2,000여 종의 도서를 전시하였다. 또 어린이도서연구회가 발간한 ‘어린이와 학부모 및 교사를 위한 권장도서목록’을 발간하여 행사장과 서울 시내 초등학교에 배포하였다. 5월 16일에는 제2회 어린이독서교육 강연회도 개최하였다.
1981년 6월에는 연휴를 이용하여 1박 2일의 수련회를 개최했다. 이 수련회에는 25명의 조합원이 참여하였고 리더십 이론, 협동조합과 창의적 인간 등의 주제로 교육을 실시하고 캠프 파이어를 하면서 조합원의 결속을 다졌다.
1981년 8월에는 14일부터 16일까지 2박 3일간의 조합원 하기수련회를 열었다. 이 수련회에는 21명의 조합원들이 참여하였는데 여주 신륵사에서 풍요로운 삶, 조직 관리 기법, 어린이운동, 성인교육과 양서조합 등의 주제로 발제와 토론,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1981년 10월 24일에는 어린이도서연구회가 제3회 어린이독서교육 심포지움을 개최하고 조합원 이주영, 송창석이 주제 발표를 가졌다.
1981년 11월 14일에는 서울양협 창립 3주년을 기념하는 잔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조합원 40여명이 참석하여 3주년을 자축하였다. 이 자리에서 서울양협은 조영황, 인배환, 오균현 조합원에게 감사장을 전달하고 남미숙, 순남숙, 이가희, 김재숙, 김일모, 이종희 조합원에게 시상했다.
1981년 12월에는 조합원교육이 있었고, 각 소그룹의 모임들이 지속되었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서도 서울 양협은 나름대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으며 사무실도 봉원동에서 다시 충장로로 이전하였다.
이 무렵 조영황 전 조합장은 모종의 채널을 통해 서울양협의 존립에 중대한 위협요인이 될 수 있는 정보를 알게 되었고 이를 이사들과 의논했다. 그것은 전두환 군사정권이 서울양협을 해체하기 위해 약점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양협은 광화문 서점의 실패로 조합원의 출자금이 바닥난 상태였다. 조합비로 현상유지는 하고 있었으나 출자금의 고갈은 법적으로 중대한 하자였다. 만약 전두환 정권의 정보기관이 어떤 조합원을 회유하여 서울양협 집행부를 상대로 사기죄로 고소하게 한다면 서울양협은 치명적인 도덕적 타격을 입게 될 것이며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서울양협 스스로 해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합원 사이에서는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의 프락치가 조합 내부에 들어와 있다는 소문도 퍼졌고, 조합원 중에서는 서울양협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으므로 해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단기간 내에 서울양협이 고갈된 출자금을 회복할 가능성은 없었다.
결국 조합원들은 논의 끝에 해산총회를 하고 청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1982년 3월 서울양협은 충장로 사무실에서 해산총회를 갖고 3월 4개월에 걸친 역사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5) 서울양협의 재건 시도 - 서울양협 재발기위원회
서울양협이 해산한 후에도 어린이도서연구회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꾸준히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어린이도서연구회는 서울양협의 지원이 절실하였으므로 해산에 반대하였으나 당시 상황에서는 해산이 불가피하다고 여겨 수용하였다. 서울양협이 해산되자 어린이도서연구회는 갈 곳이 없어 다른 단체의 도움을 받아 근근이 버텨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린이도서연구회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 한벗회, 초원봉사회, 조영황 변호사 사무실, 소설가 김영현의 개인 사무실, 천지출판사, 만민사 등을 전전하며 모임을 갖고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1989년에 접어들어 서울양협을 재건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하였다. 서울양협의 해산을 아쉬워하던 조합원들이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된 사회분위기를 배경으로 서울양협을 재발기하였다. 신영환이 발기위원장을 맡아 주도적 역할을 했고 김일모, 순남숙, 김효고, 김형기, 부길만, 이주영, 조월례 등 50여명이 열심히 참여하였다. 재발기 모임을 약 6개월간 계속하면서 300여만원의 출자금도 모았다. 총회를 개최하고 용산에 사무실을 마련하여 간사까지 채용하였다. 어린이도서연구회도 용산 사무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서울양협의 재건은 쉽지 않았다. 재발기한 서울양협은 모든 절차를 마치고 조합원 교육을 실시하는 등 활동을 시작했으나 모임 구성원들은 각자의 일이 바빠 적극적인 참여가 어려웠고 조합의 확대는 지지부진하였다. 이렇게 되자 서울양협의 재발기를 추진한 조합원들은 재발기를 포기하고 출자금 등 모든 자산을 어린이도서연구회에 넘겨주기로 결정하였다.
1982년 서울양협 해산 후에 10여명만 남아 떠돌이처럼 다른 단체의 도움으로 겨우 유지해 오던 어린이도서연구회는 재발기위원회의 결정으로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모았던 출자금 뿐 아니라 그 구성원들도 어린이도서연구회의 발전에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3. 어린이도서연구회의 발전
이상으로 서울양협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는데 서울양협과 관련하여 어린이도서연구회의 발전과정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어린이도서연구회의 뿌리가 서울양협이며 그 정신을 잘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 어린이도서연구회의 활동이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교육민주화운동의 씨앗을 뿌린 소중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서울양협이 해산될 무렵, YMCA연맹의 이창식 간사가 이주영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이주영은 양협의 활동을 소개했고 이창식 간사는 양협의 방식을 차용해서 독서운동을 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이후 교육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1982년 1월 에는 YMCA중등교육자협의회가, 1983년 10월에는 YMCA초등교육자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서울양협의 조합원이었던 교사(이주영, 노미화, 이상길 등)들은 교육자협의회에 참여하여 그 모태 역할을 했고 이주영은 초등교육자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이주영이 당시 YMCA중등교육자협의회 회장이었던 이수호 선생과 운동의 확산을 의논하면서 광주의 윤영규 선생이 연결되었다. 윤영규 선생은 1970년대 말 광주에서 양협운동을 했고 같이 하던 선생님들이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1985년 3월에 발생한 민중교육지 사건을 계기로 1986년 5월 10일 YMCA중등교육자협의회는 810명의 교사가 서명한 교육민주화선언을 발표하게 되고 전두환 정권은 주동자를 징계함으로써 교육민주화운동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1987년 9월 27일에는 민주교육실천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가 발족하고, 1989년 5월 28일에 마침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어린이도서연구회에 소속되었던 초등 및 중등교사들은 중심적 역할을 맡았고 이후 전교조의 지회, 지부의 책임을 맡으면서 교육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한편 어린이도서연구회의 본래 활동인 독서운동은 서울양협의 조합원이었던 조월례가 1986년부터 실무를 맡으면서 큰 힘을 얻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실무자가 없어 사업의 추진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조월례가 자진하여 실무를 맡으면서 회원의 구심점이 되고 어린이도서연구회의 정신을 담아 알리는 매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이 1986년 3월부터 월간으로 발행한『어린이와 책』이었다. 이 잡지는 회보인 동시에 학부모와 교사를 대상으로 한 독서교육 정보지였다. 이 잡지는 이후 5년여 동안 18집을 내면서 어린이도서연구회를 사회에 각인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40쪽 안팎의 작은 잡지를 내는 일도 당시 어린이연구회로서는 너무나 어려웠다. 송창석, 강창환, 허성삼, 박혜준 등 여러 사람들의 도움과 원고료 없이 글을 써준 많은 사람들 그리고 조월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 잡지를 그나마 지속적으로 발간할 수 있었다. 1986년 12월에는 『마음을 살찌우는 글읽기』라는 잡지도 월 1회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 잡지는 작은 분량으로 발간하여 재정 부담이 적었다. 1990년 경 『어린이와 책』은 재정 상의 이유로 중단하고 『마음을 살찌우는 글읽기』만 계속 발간하게 되었다.
1989년 서울양협 재건은 실패했지만 그 자산을 이어받은 어린이도서연구회는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중심이었던 교사모임이 교육민주화운동에 그 역량을 투입하게 되자 어린이도서연구회는 학부모를 교육하고 조직하는 방향으로 활동을 전환하였다. 학부모들의 참여는 ‘동화읽는어른’ 모임을 통해 조직화되었다. 이 모임은 어린이도서연구회의 지역조직으로서 1993년 부평지역 모임을 시작으로 2004년 12월 현재 기본지역모임이 104개이며 지역단위의 10개 협의회 그리고 총 4,114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큰 조직으로 발전하였다.10) ‘동화읽는어른’ 모임은 어린이도서연구회가 1990년대에 펼친 다양한 활동을 통해 각성한 학부모들의 자발적인 독서운동으로서 어린이도서의 출판과 유통, 소비 등 어린이문화를 변화시킨 큰 동력이 되었다.11)
4. 맺음말 - 서울양협 활동의 의의
이상에서 간단히 정리한 서울양협의 역사를 보면 여러 측면에서 당시 양협운동이 갖는 강점과 약점, 시대적 한계를 동시에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서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서울양협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풍부한 물질적, 문화적 자원을 가진 수도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조합원울양씑적 확대를 이루어내지도 못했고, 흑자경영을 시현하지도 못하였다. 서울양협이 초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전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운동울양원칙에 충실하지 못한 경영을 함으로써 스스로 뢅 의미좁히고 극심한 재정난을 초래하였다. 조합원 교육을 통한 사회적 공감울양확대를 기반으로 한걸음씩 다져나가야 음에협동조합울양운영양원칙을 위배 통한단기간에 급성장하려는 조급함이 앞서 합리적 경영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실무자들의 경영 능씥협이미숙함과 함께 조합운영양전략을 선택함에 있어 의사결정과정의 문제가 불구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서울양협은 이러한 초기의 실패를 수습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합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광화문 서점을 닫은 이후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울양협은 2년 이상 의미 있는 활동을 지속하였다. 또한 어린이도서연구회를 키워내어 양협의 정신을 이어가는 새로운 운동의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군부파시즘의 탄압국면 아래서 제대로 발현되기 어려운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부산과 광주의 양협을 강제 해산시킨 신군부세력은 매우 조심스럽게 활동을 지속하고 있던 서울양협조차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결국 서울양협은 어쩔 수 없이 방어적인 해산 결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서울양협은 형식적으로는 자발적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강제해산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산보다 더 적극적으로 1989년에 양협의 재건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양협의 재건은 여의치 않았는데 양자 사이에는 양협이라는 조직이 유효했던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차이가 가로놓여 있었다.
서울양협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구성원들은 각계 각층에서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투신하였고 각자의 방식으로 서울양협의 정신을 실천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협의 정신을 이어받으면서도 보다 당대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분화되고 전문화된 운동으로서 어린이도서연구회는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어린이문화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큰 역할을 현재까지 수행하고 있다. 사단법인 어린이도서연구회는 서울양협이 남긴 가장 풍요로운 유산이며 이는 서울양협이 지향했던 목표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김진영, 2003. “부산민주공원과 양서협동조합”. 민주공원 편. 『부마민주항쟁연구논총』. 부산: 부산민주공원.
차성환. 2004. “양서협동조합운동의 재조명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억과 전망』가을호.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차성환. 2004. “양서협동조합운동의 재조명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억과 전망』겨울호.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어린이도서연구회20년사편찬위원회. 2000. 『겨레의 희망 어린이에게 좋은 책을』(20년사 자료집). 서울: (사)어린이도서연구회.
사단법인 어린이도서연구회 역사편찬위원회. 2005. 『어린이도서연구회』(25년사 자료집). 서울: 사단법인 어린이도서연구회.
서울양협 관계인사 집단구술 녹취록(2011년 3월 25일)
1) 당시 전무 오균현은 현대건설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서협동조합의 출범을 소개하는 신문기사가 이를 문제 삼아 퇴사를 요구하였고 오균현은 강요에 의한 퇴사를 당하게 되었다.
2) 당시 광화문에는 사회과학 전문서점으로 ‘논장서점’이 있었다. 당시 서울 시내에는 이런 서점들이 여러 곳 있었다. 사회과학 전문서점의 주 고객층이었던 대학생들에게 논장서점은 잘 알려져 있었으나 ‘양서의 집’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양서의 집’은 ‘논장서점’에 비해 경쟁력이 훨씬 뒤졌다. ‘양서의 집’이 광화문에 입지할 수 있으려면 ‘논장서점’과 비견할만한 조직적 내실을 갖춘 다음이라야 했을 것이다.
3) 이주영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 ‘양서의 집’에 책을 사러 갔을 때 오균현 전무가 안에서 책을 꺼내 오면서 “저 맞은 편에 서 있는 사람이 형사니까 저 사람을 피해서 서점을 나가라”고 해서 바깥을 살펴보다가 몰래 빠져나간 일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조합원들을 위축시키고 공포감을 조성하였다.
4) 이 전시회는 지하철 시청역의 지하 전시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처음에는 출판사들도 그 효과를 확신하지 못하여 참여가 저조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이 시민들에게 열성적으로 홍보하여 관람자가 크게 늘어나자 각 신문에서 큰 기사로 다루었고 많은 출판사들이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에는 어린이 도서를 취급하는 서적이 적었기 때문에 관람객들의 요청에 따라 도서의 판매까지 하게 되었다(어린이도서연구회 20년사 자료집, 2000).
5) 프락치는 원래 정당이 대중조직 속에 설치한 당원 조직을 말하지만 넒은 뜻으로는 밀정, 첩자, 스파이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한국에서 군사정권 시기에 정보기관이 시민단체나 저항조직 속에 첩자를 잠입시킨 사실은 때때로 폭로되기도 했으며 그런 의심 때문에 종종 단체 내부에 심각한 불신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례가 많았다.
6) 당시 서울양협 내에서는 어린이도서연구회가 독립성이 강한 단체로 발족하는데 비판과 반대가 적지 않았다. 다른 소모임과 같은 위상을 넘어서 서울양협과 대등한 수준의 조직형태가 필요한가라는 문제제기였다. 그러나 양협의 목적을 어린이 부문에서 달성하려면 이러한 단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우세하여 어린이도서연구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7) 어린이도서관은 서울의 잠실(채규철), 봉천동, 동두천 등에서 마을어린이도서실을 운영하는 데 자극받아 조합원과 출판사의 기증을 받아 1,500여권의 도서를 갖추고 조합원들이 중심이 되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함께 산책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활동을 했다. 또 회보 「어린이독서」를 발간하여 돌려보고 학교에 보내는 일들을 했다.
8) 주간양협소식은 제3호(1981년 5월 25일)부터 양협소식으로 제호가 바뀌어서 11호(1981년 12월 9일)까지 발간된 것이 확인된다. 이후 더 발간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9) 소요학파 모임은 1981년 8월 21일에 첫 모임을 가지고 기독교 신학, 샤머니즘, 선철학, 문학 등을 주제로 강의와 토론을 하는 모임이었다.
10) ‘동화읽는어른’모임은 좋은 어린이책 권장, 어린이책 문화행사, 강연회와 강좌, 어린이 독서환경 개선, 어린이책 출판문화와 유통 개선 등의 일을 하며 학부모 독서강연을 바탕으로 생긴 모임, 정회원이 자기 지역에서 만든 모임,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생긴 모임, 어린이책 전문서점을 토대로 생긴 모임, 도서관을 중심으로 생긴 모임 등 여러 유형이 있으나 모두 어린이도서연구회의 정신에 동의하는 모임으로 구성된다.
11) 어린이도서연구회가 추천하는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서점에서는 추천된 책들을 일급 매대에 진열하였다. 그만큼 어린이도서연구회가 어린이도서의 출판문화에 미친 영향력은 컸다.
출처 https://goo.gl/HTHWs5
*블로그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몇 군데 글자가 깨져 나옴. 원문을 확인해서 인용할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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