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폐허, 그 대량소비의 끝 /서경식
패전 뒤 천황제 국가였던 일본에 전승국 쪽으로부터 ‘민주주의’가 공급됐다(‘강요당했다’). 그때 일본 국민은 ‘민주주의’의 소비자가 됐으나 생산자가 되는 데는 실패했다. 그 귀중한 ‘자원’을 마치 화석연료를 대량소비하듯이 자기중심적으로 소진해버린 끝에 오늘의 참상이 있다. 향후 몇년간 일본 정치는 ‘북조선의 위협’ ‘도쿄올림픽’ ‘천황의 양위’라는 토픽들을 중심으로 움직여 갈 것이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그 어두운 지하실에 들어가자 방 한가득 쓰레기들이 쌓여 있었다. 그 쓰레기 속에 절반쯤 묻히다시피 한 커다란 구형의 물체가 있다. 자세히 보니 거대한 안구다. 눈동자에 비친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다. 그것은 핵폭발 때 일어나는 여러 형태의 버섯구름이었다. 어두운 통로를 더듬어 다음 방으로 가니 폐허와 같은 곳에 수직, 수평으로, 또 비스듬히 엘이디(LED)등이 빨갛게 깜빡이고 있다. “나라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육해공군 기타 전력은” “이를 보유하지 않는다” … 단편화된 헌법 9조 조문이다. 그곳은 요코하마시 개항기념회관의 지하. 나는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미술전에 와 있다. 작가는 야나기 유키노리다.
때마침 태풍이 불어와 아침부터 각 전시회장을 돌아본 내 신발은 물에 젖었다. “이런 날씨엔 투표율도 낮겠지.” 그날은 10월22일. ‘대의명분 없는 자기 편의적 해산’에 따른 중의원 의원 선거 투표일이었다. 바로 그런 날 보기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었다고 해야 할까.
개표 결과는 알다시피 여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아베 총리는 일찍부터 개헌(헌법에 자위대 명기) 작업을 가속시키겠다고 했다. 야당은 분열한 나머지 패배했다. 가까스로 급조한 입헌민주당이 건투했으나 단독으로 개헌을 저지할 수 있는 의석수에는 턱없이 못 미쳤다. ‘희망의 당’이란 이름을 내세운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에 합류하는 길을 택한 민진당은 여지없이 자멸했다.
악천후로 인한 낮은 투표율과 소선거구 제도의 결함 등의 영향도 있지만, 요컨대 결과적으로 다수의 일본 국민이 그것을 선택한 것이다. ‘모리·가케 의혹’(학교법인 모리토모학원 부지 취득 경위 및 학교법인 가케학원 수의학부 신설에 아베 신조 총리가 관여했다는 의혹 사건)이나 ‘아베노믹스 비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북조선 위협’을 계속 외쳐온 아베 정권의 전략이 주효했다. 그 결과 일본 정계에 ‘리버럴 세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됐다. 즉 ‘전체주의’ 상태다. ‘리버럴파의 퇴락’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일본 사회는 여기서 다시 일어나 민주주의를 재구축할 수 있을까? 전쟁과 파시즘의 위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맨 먼저 희생당하는 건 재일 조선인 등 소수자(‘내부의 타자’)다. 하지만 결국 ‘국민’ 다수도 희생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재구축’ ‘재건’이라는 말을 썼지만, 애초에 ‘민주주의’가 내실을 갖춘 형태로 일본에 존재했던 적이 있는지 그 자체가 의심스럽다. 이렇게 얘기하면 “나는 민주주의자다”라든가 “나는 민주주의 가치들을 존중한다”는 주장을 하며 반발할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 소비자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닌가. 결코 그 ‘생산자’(건설자)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패전 뒤 천황제 국가였던 일본에 전승국 쪽으로부터 ‘민주주의’가 공급됐다(‘강요당했다’). 그때 일본 국민은 ‘민주주의’의 소비자가 됐으나 생산자가 되는 데는 실패했다. 그 귀중한 ‘자원’을 마치 화석연료를 대량소비하듯이 자기중심적으로 소진해버린 끝에 오늘의 참상이 있다.
향후 몇년간 일본 정치는 ‘북조선의 위협’ ‘도쿄올림픽’ ‘천황의 양위’라는 토픽들을 중심으로 움직여 갈 것이다. 이들 ‘정치적 자원’을 여당과 지배층이 자기 권익 확장을 위해 철저히 이용해 먹을 것이다. 이의를 제기하면 ‘비국민’ 취급을 당하고 ‘배제’당하게 될 것이다. 필요할 경우 ‘공모죄’ 등을 활용해 탄압도 하겠지만, 폭력적으로 배제하기 이전에 국민 다수는 (리버럴파를 포함해서) ‘자숙’하고 ‘미루어 헤아려’서 자발적 예속을 점점 더 심화시켜 갈 것이다. 전체주의의 완성 형태로 가는 것이다.
지난해 지금의 천황이 양위하겠다는 희망을 밝힌 뒤 그 법적 근거와 절차에 대해 어느 정도 논의가 이뤄졌으나 거기에 천황제 폐지를 요구하는 소리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지금 천황의 “국민에게 다가가는 인품”을 칭찬하고 천황제 존속을 당연시하는 논의에 뒤덮였다. 안보법제 반대 등을 주장하는 리버럴파 논객 우치다 다쓰루까지도 자신은 “입헌민주주의와 천황제는 양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시기도 있었으나, 지금은 “천황주의자로 바뀌었다”고 선언했다.(<아사히신문> 2017년 6월20일) 국가에는 “정치지도자 등의 세속적 중심”과는 별개로 “종교나 문화를 역사적으로 계승하는 초월적이고 영적인 ‘중심’”이 있는 게 좋다, 그것이 천황이다, 라는 것이다.
이 논의에서 빠져 있는 게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과거 천황제가 바로 천황을 “초월적이고 영적인 ‘중심’”으로 떠받들고 그것을 군부와 정계가 이용하는 결탁을 통해 구축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라는 메이지 헌법상의 규정을 이유로 천황에겐 전쟁 책임도 물을 수 없다는 억지가 버젓이 통용됐다. 최고책임자인 천황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상 그 명을 받은 자들의 책임 또한 물을 수 없게 된다. 위정자에게 이보다 더 좋은 장치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구조는 천황 이외의 인민이 ‘자발적 신민’이 됨으로써만 성립된다. 일본은 패전으로 이 제도에서 벗어났고 일본인들은 신민에서 시민으로 자신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저명한 리버럴파 지식인이 스스로 ‘신민’의 길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혁명 이래 인류사회가 쌓아올린 인권, 평등, 자유, 민주 등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파괴행위가 아닌가.
둘째로, 이런 논의에 결여돼 있는 것은 천황제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한 사람들, 특히 아시아의 전쟁 피해자들의 시점(視點)이다. 분명 천황의 ‘초월적 영성’이라는 허구를 통해 침략과 지배가 수행됐으나 전쟁 책임은 끝내 지지 않았다.
“천황제는 왜 종식돼야만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천황제는 전쟁의 원인이었고, 폐지하지 않으면 또다시 전쟁의 원인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침략전쟁을 세계를 상대로 벌인 이상 일본은 세계에 대해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천황제와 봉건주의가 일본을 호전적으로 만든 근본적 이유라면 그 이유를 제거해 천황제를 폐지하고 봉건적 잔재를 씻어내 다시는 호전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실천을 통해 세계에 보여줘야 한다.”
일본 패전 직후인 1946년 3월21일 도쿄대 <대학신문>에 게재된 ‘천황제를 논한다’는 기고문의 일부다. 필자 아라이 사쿠노스케는 가토 슈이치의 필명이다. 전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일본 안에서도 이런 정론이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아무도 천황제 폐지를 입 밖에 내지 않는 사회가 돼버렸다.
가토 슈이치는 ‘전후 민주주의’라는 한 시대의 사상과 정신을 가장 명료하게 체현한 지식인이었다. 천황제를 온존시키고 식민지배에 대한 인식이 결여돼 있는 등 많은 점에서 비판받아야 할 결함들을 지니고 있던 ‘전후 민주주의’였으나, 그럼에도 전쟁 전과는 달리 설사 원칙상으로만 그랬을지라도 ‘인권’ ‘민주주의’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들을 내걸고 있었다. 이 원칙에 내실을 부여해서 앞서 얘기한 결함들을 극복해 가는 것이 전후 일본의 리버럴파에 부과된 책무였다. 하지만 지금은 일찍이 일본에 ‘전후 민주주의’라는 한 시대가 있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주의의 희미한 빛마저 냉소하고 망각하는 게 옳을까.
일본 국민이 앞으로 타자를 또다시 해치지 않고 자신도 희생당하지 않는 길은 평화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피해 민족들과 연대하는 길밖에 없다. 국가와 국가 간의 ‘화해’가 아니라 일본인과 피해 민족 사람들 간의 ‘연대’다. 이 연대를 가로막고 있는 최대의 장벽은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이고 국가주의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7228.html#csidxd95c6c5207caf3f96091d17117073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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