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11일 화요일

'마들레느 아저씨' 를 마음속에 그린다

'마들레느 아저씨' 를 마음속에 그린다
6.13 지방선거를 맞아…


<모래시계 古今- 6.13> 1.
1789년 프랑스 시민들은 대혁명을 일으켰다. 이 혁명으로 왕정은 폐지되었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을 이끌던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쟁에서 패하자 공화정은 몰락하고 프랑스는 다시 왕정으로 돌아갔다. 19세기 프랑스의 역사는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의 대립과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공화파의 이념을 담은 '라 마르세예즈'는 혁명기인 1792년에 작곡되어 국민의회에 의해 국가(國歌)로 선포되었지만, 1879년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프랑스 국가가 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1830년 7월 혁명과 1832년의 폭동에 이르는 시기의 정치 사회적 격변을 무대로 하여,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1862년 간행)을 썼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겠지만, 소설의 큰 줄기를 잠시 살펴본다.

주인공인 장 발장. 그이는 굶어 죽어 가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는 잘못을 저질러 감옥을 가게 되고, 몇 차례에 걸쳐 탈옥하려 하지만 실패하여 무려 19년 만에야 가석방으로 풀려나게 된다.
  
 ▲ 뮤지컬로 만들어진 <레미제라블>의 포스터. ⓒ  
 
이때가 1815년. 디뉴(Digne)의 주교에게서 은촛대를 훔쳤지만 용서를 받음으로써 크게 회심(回心)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 나가게 된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823년, 몽트뢰유-쉬르-메르(Montreuil-sur-Mer)라는 조그만 도시. 장 발장은 이곳에서 마들레느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감추고 공장을 경영하며 전해져 내려오던 이 도시의 산업을 더욱 발전시켜 시장이 된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체포된 사실을 알게 되어 자수를 한다. 하지만 여직공이었던 팡틴느와의 약속--사생아인 코제트를 죽을 때까지 맡아서 돌봐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도망친다.

워털루 전쟁의 패잔병인 테나르디에의 여관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고 있던 팡틴느의 딸 코제트를 구해낸 장 발장은 파리(Paris)의 어느 수녀원에 몸을 숨긴다. 장 발장은 정원사로 일하면서 코제트를 키운다. 코제트는 아름답게 성장하고,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 마리우스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1832년 왕정에 항거하는 공화파의 폭동이 일어난다. 마리우스가 동지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바리케이드로 간 장발장은 마리우스를 구출하여 하수도로 도망친다.
그때 폭도들에게 붙잡혀서 처형을 기다리던 자베르를 보고, 장 발장은 집행을 자원하고 자베르를 풀어준다.
법과 제도를 신봉하며 범죄자를 단죄해야만 한다는 원칙주의자 자베르는 자신의 원칙과 장 발장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랑' 앞에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며 세느 강에 투신, 자살한다.
부상을 입었던 마리우스가 다 나은 뒤 코제트와 결혼식을 거행한다. 장 발장은 마리우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뒤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장 발장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프로타고니스트인 장 발장과 안타고니스트인 자베르, 이 두 사람의 대립적인 인물 형상은 공화파와 왕당파의 대립과 갈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낡은 시대를 대표하는 자베르의 죽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계기는, 디뉴의 주교에 의해 촉발되었고, 코제트를 키우고 코제트와 마리우스 사이의 사랑을 지켜보면서 성숙하게 되었던 장 발장의 연민과 사랑이었다. 이런 소설적 결말은 인간의 행복과 인류의 진보란, 19세기 '혁명가'들이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자비심(慈悲心)에 의해 이루어질 거라는 휴머니스트 빅토르 위고다운 생각이 밑받침되어 있는 것이다.

위고가 그려놓은 '아름다운 시장'을 만날 수 있을지…
2.
<레미제라블>의 내용을 언급하느라 서두가 길어졌지만, 이렇게 <레미제라블>의 내용을 살펴본 까닭은 '마들레느 아저씨'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마들레느란 장 발장이 몽트뢰유-쉬르-메르 시에서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사용했던 이름이었다. 일종의 '위장 취업'을 위해 사용했던 '가명(假名)'이라고 할까.

'마들레느 아저씨'를 떠올리게 된 까닭은 6월 13일 지방자치 선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완성은 지방자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나라의 지방자치의 현실을 보면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월드컵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러 투표장에 가자는 캠페인조차 조금 부끄러운 노릇이 된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뽑은 사람이 우리가 낸 세금으로 우리를 위해 일해 줄 거라는 생각보다는, 그놈이 그놈, 다 똑같은 '도둑놈'처럼 보이고 누굴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정이 드니 문제인 것이다.

  
 ▲ 들라크로와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년 7월 28일>.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포스터에 나타난 코제트의 모습은 바로 이 그림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실제로 비리 사건으로 구속된 자치단체장의 수도 적지 않다. 또한 지역 주민의 이익과 의사를 대변한다는 미명 아래 아무런 원칙 없이 무분별하게 개발 계획을 남발함으로써 오히려 주민들의 삶의 질만 나쁘게 만드는 일도 많았다.

전시적인 행정과 개발 만능주의가 지배하고 있지만, 이를 견제하고 감시해야 할 지방의회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주민투표제와 주민소환제, 주민감사청구제 등 주민들이 직접 나설 수 있는 제도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 청렴하고 정직하고 겸손할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는 '아름다운' 시장과 군수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위고가 그려놓은 시장님 '마들레느 아저씨'의 모습을 조금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가 몽트뢰유-쉬르-메르에 온 것은 은혜였고, 섭리였다
3.
"어쨌든 그가 거기에 온 것은 하나의 은혜요, 그가 거기에 있는 것은 하나의 섭리였다. 마들레느 아저씨가 오기 전까지는, 그 지방은 모든 것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노동의 신성한 생명으로 살아 오르고 있었다. 왕성한 활기가 모든 것을 따습게 만들고 모든 것에 스며들고 있었다. 실업과 빈궁은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리 못난이의 지갑에도 돈이 없는 일이 없고, 아무리 가난한 집안에도 낙이 없는 일이 없었다."(이휘영, 정기수, 방곤 역, 정음사, 1979년)

마드레느가 몽트뢰유-쉬르-메르에 온 것은 은혜요 섭리였다고 위고는 소설 속에서 말한다. 마들레느가 이 도시에 와서 한 일은 침체에 빠져 있던 흑 구술 제조업에 새로운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일대 혁명을 초래한 것이었다. 그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 지방의 '입싼 양반'들이 "작자는 장사치야", "작자는 야심가야" "작자는 사기꿈이야" "작자는 상놈이야"라고 비난하고 질시하였다.

하지만 "1820년, 그가 몽트뢰유-쉬르-메르에 와서 5년이 되던 해, 지방에 대한 그의 공헌이 실로 혁혁했고 그야말로 지방민 전체가 희망했기 때문에" 그는 시장이 된다.

"마들레느 아저씨는 자기 자신이 그 근원이고 중심이었던 그 활기 속에서 재산을 이룩한 것이었으나, 단순한 상인으로서는 좀체로 있을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돈벌이를 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인 것같이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남들만을 주로 생각하고 자기 일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1820년에 그는 라피뜨 은행에 자기 명의로 6십3만 프랑의 금액을 예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6십3만 프랑을 저축하기 전에 그는 이미 시와 빈민을 위하여 백만 프랑도 더 썼던 것이다."

시와 빈민을 위해 백만 프랑도 더 썼던 마드레느가 했던 일들을 살펴보자.

"시내의 병원이 설비가 나빴기 때문에, 그는 침대 열 개를 기부했다. 몽트뢰유-쉬르-메르는 웃녘 시와 아랫녘 시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가 살고 있던 아랫녘 시에는 학교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쓰러져 가는 허술한 파옥이었다. 그래서 그는 학교 둘을 세웠다. 하나는 계집아이를 위하여, 또 하나는 사내아이를 위하여. 그리고 그는 그 양쪽 선생에게 관(官)에서 주는 박봉의 2배의 수당을 자기 돈에서 지급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것을 보고 놀란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 제일의 관리는 보모와 학교 선생의 둘입니다' 그는 또 자기 돈으로, 당시 불란서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유치원을 세우고, 늙고 병든 노동자를 위하여 구제 기금을 세웠다.
그의 공장은 한 중심으로 이루었기 때문에 수많은 세궁민 가족이 사는 새로운 주택가가 그의 주변에 급속히 형성되었다. 그는 또 거기에다 무료 약국을 세웠다."

병원과 학교와 새로운 유치원 제도, 새로운 의료를 포함한 복지 정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차차 때가 흐름에 따라 반대는 모두 사그라져 버렸다. 마들레느 씨는 처음에, 입신출세한 사람들이 으레 받기가 예사인 저 중상 모략을 받고 있었으나, 다음에는 그것이 험구에 불과해지고, 그 다음에는 빈정댐에 불과해지더니, 그 다음에는 완전히 스러져버렸다. 그는 완전무결하고도 진정한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하여 1821년 무렵에는, 몽트뢰유-쉬르-메르에서 시장이라고 하는 말은, 1815년에 디뉴에서 주교 각하라고 하던 말과 똑같은 어조로 불리게 되었다. 그 부근에서는 백 리 밖에서까지 그에게 상의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분쟁을 종결시키고, 소송을 미연에 방지하고, 원수지간을 화해시키고 있었다. 누구나 그를 자기의 정당한 권리의 심판자로 받들고 있었다. 그는 자연법칙의 책을 가지고서 자기의 마음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한 존경은, 마친 전염인 듯 6, 7년 동안 차츰차츰 그 지방 전체에 퍼졌다."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을 것이오"
4.
빅토르 위고가 그리고 있는 마들레느 시장님의 모습에는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현명한 자치단체장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시대적 한계'도 있다. 마들레느가 기존의 산업에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자본가(부르주아) 형이라는 점을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르주아 혁명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위고의 의도를 지금의 시점에 맞게 해석해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들레느 시장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첫 번째로는 신뢰와 존경의 회복이다. 전염병처럼 퍼지는 존경심은 아니더라도 믿고 따를 수 있는 시장님, 군수님이 되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우리의 격언처럼 맑은 윗물이 되라는 것이다. 반드시 깨끗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는 모름지기 우리의 정당한 권리의 대변자가 되라는 것이다. 완전무결하고 진정한 만인의 존경을 받기는 무척 힘들겠지만 주민들의 권리의 대변자로서 나선다면 리더십을 일부러 만들어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리더십은 생겨날 것이다. 괜히 정당을 주도하는 인물들의 찬조 연설이나 들으면서 그들과 함께 손을 드는 것으로서 리더십이 생긴다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뭔가 색다르게 눈에 보이는 정책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기존의 산업을 발전시키는 지역 발전 전략을 세우라는 것이다. 몽트뢰유-쉬르-메르 시에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새로운 관광지를 개발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첨단 산업 벨트를 만드는 것도 아니었으며, 지역의 역사에서 작은 꼬투리를 찾아내서 새로운 축제를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원래 있었던 흑 구슬 제조 기술을 개량함으로써 지역의 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지금 자치단체장으로 나서는 이들 가운데 태반이 자기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외부의 자본을 끌어들이고 그 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뭔가 새롭고 획기적인 산업을 만들어낼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지역 발전 전략이란 지역에서 출발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네 번째로는 공부하고 연구하라는 것이다. 앞서 마들레느 아저씨의 이야기에서 빠진 이야기로는 '쐐기풀'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쐐기풀을 뽑고 있는 것을 보고는 쐐기풀의 이용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이 쐐기풀은 아직 여릴 때에는 잎사귀는 훌륭한 야채가 되고, 쇠었을 때에는 삼이나 어저귀처럼 줄기와 섬유가 생기는데, 이 쐐기풀로 짠 베는 삼베와 마찬가지요. 잘게 베어 놓으면 쐐기풀은 가금의 모이가 되고, 찧어 놓으면, 뿔 달린 짐승의 밥이 되오." 등등.

자기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든 책을 보고 얻은 지식이든 공부하고 연구함으로써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도 지역 발전의 토대로 삼을 것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여러분도 잘 알아두시오.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는 것이오. 다만 가꾸는 사람이 나쁠 뿐이오."라고 마들레느 아저씨의 입을 통해 위고는 말한다.

소설 속 인물이지만, 그를 마음에 그리며 투표장에 갈까 한다
5.
뭐, 특별한 것 없는 생각거리인가?
하지만 우리의 지방자치 현실을 되돌아보면, 이 몇 가지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는 시장님, 군수님이나 지방 의회 의원님들을 만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마들레느 아저씨와 같은 분이 시장님이 되고 군수님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들레느 아저씨가 주민들에게 요구한 것은 딱 한 가지, 정직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직!
나도 시장님이 되고 군수님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딱 한 가지만 요구하겠다.
제발 좀 정직하라고!
어린이들도 소탈한 마들레느 아저씨를 좋아했다고 위고는 적고 있다. 그래서 주민들은 '마들레느 씨'나 '마들레느 시장님'이 아니라 '마들레느 아저씨'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비록 소설 속의 인물이지만, 나는 '마들레느 아저씨'를 마음속에 그리며 투표장에 가볼까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이가 있을지...

2002년 6월 4일 화요일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과연 그런가?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과연 그런가? 한국-폴란드 경기를 몇 시간 앞두고 던져 보는 질문

1.
2002년 6월 4일, 세상 사람들의 눈이 온통 월드컵에 쏠려 있는 듯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의 첫 경기가 열리는 날이다. 과연 한국의 축구 대표팀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기대와 열망에 찬 눈들이 부산의 아시아드 주경기장에 몰리고 있다.

주요 언론들도 '첫 승의 아침이 밝았다'는 제목으로 기대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48년간 6번 본선에 출전해 4무 10패,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지만, 이번만은 다르리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다. '홈'에서 열리니 '붉은 악마'를 비롯해서 온 국민의 열화와 같은 응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난 1년여 동안 한국 대표팀을 이끌어 온 히딩크 감독에 대한 신뢰감도 그 어느 때보다도 높고 선수들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한국팀의 1승, 그리고 16강, 더 나아가 8강, 4강에도 진출하기를 바란다.

2.
그렇지만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이 말은 한국과 폴란드의 경기에서 어느 팀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제프 플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한 말이다.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이 말은 나에게 묘한 느낌을 던져 준다.

월드컵의 역사를 들추어보면, 축구는 단지 축구만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열린 1930년 우루과이 대회 결승전에서 맞붙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이 결승전을 계기로 국교를 단절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 맞붙은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전쟁을 벌였던 일은 '축구 전쟁'이라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국가 단위로 맞붙어 싸우는 축구는 그 어느 경기보다도 '민족성(nationality)'을 자극한다. 한국과 일본, 잉글랜드와 독일이 경기를 벌이면, 축구는 축구가 아니라 '전쟁'이 된다. 이번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개막전에서 세네갈이 프랑스를 제압하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세네갈은 '한(恨)'을 푼 듯 승리의 날을 국경일로 삼겠다고 하였다.

월드컵이 거대한 산업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 자체로 거대한 스포츠 산업이기도 하지만, 월드컵을 계기로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려고 하거나 새로운 사업 개발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대기업들의 발빠른 움직임이 심심찮게 전해진다. 그러나 거대한 스포츠 산업의 이면에는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될 일들도 있다. <다른 월드컵, 축구공 만드는 아이들--그라운드의 함성 뒤엔 '작은 손'의 혹독한 노동>(지오리포트 5월 4일자)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스포츠 용품 생산업체에서는 어린이 노동 착취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축구는 축구만은 아닌 것이다.

3.
그런데 개막전뿐만 아니라 연이어 열리는 경기마다 관중석 공석 때문에 입장권 수입에 차질이 있을 뿐만 아니라 대회의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지난 4월 30일, 한국의 관광호텔 예약 숙박권 전체를 독점 판매해주기로 하는 협약을 한국 월드컵조직위와 체결했던 영국의 바이롬사가 계약을 해지하는 통고를 했지만, "2002년 4월 30일까지 해약하면 위약금을 물지 않는다"라고 계약했기 때문에 월드컵 특수만을 노리던 숙박업계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 바 있다.

그런데, 바이롬이라는 회사는 월드컵 티켓 해외판매분 판매대행까지 맡고 있는 회사다. 정식 직원이 3명에 불과하다는 이 회사에서는 해외판매량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확인하고 이것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경기가 열리기까지 과연 어느 정도 관중석이 찰지도 파악하기 힘든 실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월드컵축구대회 대구 첫 경기(6일)를 앞두고 해외입장권판매 대행사인 영국 바이롬사의 해외판매량이 공개되지 않아 대구시가 경기장 관람석의 무더기 공석을 우려하고 있다.(연합뉴스, 윤대복 기자)"는 보도가 있었다. '관중석 공석 사태'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치명적인 '불명예'로 남을 듯싶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바이롬사가 한국의 관광호텔 예약 숙박권을 독점 판매하고, 월드컵 티켓 해외판매분을 판매대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단지 제프 플래터 국제축구연맹 회장과 친척이라는 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플래터 회장이 말한,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라는 말은 그러니까 그라운드 안에서 뛰는 선수들, 관중석에서 열띤 응원을 펼치거나 텔레비전 앞에서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이들의 환희와 탄식에는 상관없이 '축구는 축구, 돈벌이는 돈벌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4.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이나, 응원에 열을 올리는 '국민'이나, 그 열의를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려는 기회로 삼으려는 기업이나, 무언가 월드컵을 계기로 한몫 잡으려는 이들 모두에게 '축구는 축구만은 아니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은 개인적으로 더 큰 스포츠 시장으로 도약하려고 하고, '국민'들은 월드컵을 무언가 '한'을 푸는 계기로 삼으려 하며, 대기업들은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려고 애를 쓰고, 또 어떤 이들은 큰 사업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축구는 축구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앞서 말한 아동착취를 금지하라는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파업을 하던 노동자의 권리도 축구 열기에 묻혔으며, 6·13 지방선거도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축구를 구경하는 것은 재미 있고, 우리 팀을 응원하면 신이 난다.
하지만 축구가 점점 더 우리의 일상을 '점령'해나갈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 우리 삶의 밑바탕은 조금 더 끔찍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드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