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9일 토요일

도산 안창호, 조선학회의 설립과 농촌 도제문고(徒弟文庫) 발행, 동아일보 1936년 1월 1일 기사(칼럼/논단)

사회교육

조선학회의 설립과 농촌 도제문고(徒弟文庫) 발행

도산 안창호

나로서 지금 어떠한 의견을 발표하기는 매우 곤난한 일이다. 첫째 나의 발표한 의견이 그대로 실현될 가능성이 없고 따라서 나의 의견이 과연 조선 현실에 적합한가 의문이다. 둘재로는 귀사의 설문에 대하야 구체적으로 대답하여야 할 터인바 아즉도 요양 중에 잇는 몸이라 충분히 생각할 머리를 갖지 못하엿다.-- 이렇게 말하기를 주저하시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씨는 사담(私談)의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엿다. 

나는 일상 생각하기를 조선문화의 원동력이 될 최고기관을 하나 세웟으면 한다. 

1. 그 기관 이름은 조선학원(朝鮮學院) 혹은 조선학회(朝鮮學會)라 하고 각계를 강라(綱羅)하야 구성할 것인데 특히 현재 교육계에 잇는 분들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찬동하는 이라는 누구거나 참가할 수 잇도록 할 것이다. 

2. 그래서 귀사의 설문한 바의 농촌문고(農村文庫) 또는 도제문고(徒弟文庫)를 굵은 활자(活字)와 싼값으로 발행하야 널리 읽히게 할 것이고 과거의 우리 찬연한 모든 문화를 연구조사하야 책으로 만들어내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문화를 수립하는 데에 원동력이 되게 할 것이다. 과학은 물론, 문예, 미술, 음악, 영화은 물론이오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편찬까지도 이 기관에서 맡어할 것이고 또한 발명에 뜻을 두엇으나 돈이 없어 성공하지 못하는 청년에게는 보조(補助)를 하야 진흥시킬 것이다. 

3. 이러한 큰 문화사업(文化事業)을 일으키자면 자금이 잇어야 할 것인데 유지(有志) 잇어 이러한 문화사업에 투자를 한다면 첫재 중앙지대인 경성(京城)에 회관을 하나 건축하야 조선 사람의 왼 정신이 이를 목표로 하야 나아가게 하엿으면 한다. 

이것은 내가 늘 추상적으로 생각하엿을 뿐이오 구체적으로는 아직 생각하지 안하엿다

강진국(姜辰國), 농촌사업을 부대한 농촌문고 창설의 급무(9), 동아일보 1936년 3월 11일자 기사(칼럼/논단)

농촌사업을 부대한 농촌문고 창설의 급무(9)

강진국

 

8. 농촌문고의 직능과 위정자의 책무 

원래 학교(學校)와 문고(文庫)는 불가분할 성질의 것으로 양자가 접근하여야 그 목적은 호상조장(互相助長)되고 그 사명은 연몌발휘(連袂發揮)되어 교육의 온전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잇나니 이런 의미에서 여기 설계한 농촌문고는 그 규모와 조직은 비록 미충(微衷)하나마 정히 사도(斯道)의 이상적 기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야 이 농촌문고는 또 불원장래할 1면수교(一面數校) 내지 1리동1(一里洞一校)의 보통학교 건설의 기초가 되고 또 이 운동을 촉진하는 전초(前哨)가 될 것이다. 

또 이 문고를 중심으로 한 소비조합이며 농구(農具)의 공동이용기관의 부설은 나날이 쇠잔하여 가는 우리 농민경제에 막대한 복리를 줄 뿐만 아니라 생사기로의 수기(數奇)한 운명 속에서 한없이 악랄하고 수 없이 가혹한 시련에 짜들여온 남어지 걸핏하면 극단의 이기주의와 또 투쟁적 경향이 파심(頗甚)하여 가는 그들 농어산촌민에게 공존공영(共存共榮)의 정신 배양과 그 실훈(實訓)을 교시함이 불소(不少)할지니 그 과반이 농민대중으로 구성된 우리 민족 사업에 이보다 더 유익하고도 귀중한 사명을 가진 사업이 또 어디 잇으랴. 근자에 제창되는 물심동체주의(物心同體主義)의 이상(理想)은 이 사업에서 구현되지 아니 하는가! 

이런 점을 보아서도 위정자는 맛당히 이 사업을 솔선 장려하고 건설할 책무가 잇다 하겠다. 

더구나 지방군수들은 이 사업 실현상 가장 유리한 지위에 처하여 가장 만흔 편의와 기회를 장악하고 잇다 하겟다. 즉 관하(管下)의 면장과 구장을 독려하는 일방(一方) 지방유지를 설복하야 이 사업 창설에 노력함이 잇다면 그리 힘들고 어려운 일은 아닐 것같이도 상상된다. 그리한다면 일군일군(一郡一郡)을 단일체로 한 지도원 양성 문제와 이 사업이 확대되는 날의 국고(國庫) 보조(補助)도 용이히 해결될지니 이 최선의 첩경과 건을 가진 군수는 이 농촌문고 사업 건설의 당위성을 부담한 도덕적 의무를 가진 자라 하겟다. 여긔 제첨(諸僉)의 재음미와 궐기를 촉()하야 마지 안는 바이다.

 

9. 도시 투자가의 방면(方面) 전향(轉向)과 언론기관에 일 제언 

마주막으로 문화 투자가, 특히 도시 방면의 문화 투자가에게 투자 방면 전향 즉 농어산촌 방면의 문화투자에로 전향하기를 권원(勸願)하는 동시에 신문 기타 언론기관에게 일언(一言) 제의(提議)하고저 한다. 

근일 문화사업 투자가 거이 도시급 준 도시지대에 집중하는 경향이 농후하며 심하야 경성(京城)과 같은 조선 제일의 도시-문명한 외국에 비하여도 그리 큰 손색이 없을 문화도시(文化都市)에 잇어는 이 방면의 투자가 접종(接踵)하야 출현하니 마치 투자경쟁의 감이 불무(不無)하다. 더욱히 지방인사가 자기네 향촌의 암담한 문화와 황무한 토지에는 돈착(頓着)이 없이 또 그 가족 동양(同樣)의 소작인의 쇠잔곤궁과 그 자녀들의 문맹 우매는 시안(視眼)에 두지 안코 불순한 명예와 무모한 허영에 정관(正觀)을 잃고 도시투자(都市投資)에 흥미를 느끼는 양은 이성 잇는 방관자로 하여금 오히려 연민지정을 포회(包懷)케 하는 일이 잇다. 예하면 함경도 어떤 부자가 파고다 공원에 고성기 라디오를 기증하야 인접한 도서관(圖書館)의 열심한 열람자(閱覽者)들의 자자한 원성을 듣는 종류도 그 중의 하나이겟다. 

이런 동기는 역시 허영과 불순한 명이욕(名利慾)에 밭은 까닭이겟으며 이것을 자극한 것은 안전사실(眼前事實)과 지척기사(咫尺記事)만 방대히 취급한 도시 중심의 신문 기타 언론기관의 불공평한 찬양에 다대한 원인이 잇을 것이다. 이 점 특히 신문 기타 언론기관에게 대하야 재고(再考)를 촉()하는 동시에 문화투자의 기부행위에 관()하는 한, 동일한 방법 아니 차라리 지방의 것을 더 크게 찬양하야 차종(此種)의 투자가 지방 아니 그들의 향촌(鄕村)에 귀()하도록 장려할 것이다. 그리하야 산간 벽지에 헤매는 무사가련(無事可憐)한 자녀들을 구제할지며 투자가로 하여금 참다운 명성과 그 장구한 존속은 지하에 뿌리깊이 백이고 지상에가지 넓이 퍼질 농촌문고 창설사업에 투자함에 잇음을 교시하여 주기를 바래는 바이다.

 

10. 결론 

우리는 이상에 술()한 대자본의 투하를 기걸하야 말지 안는 한편 이 천혜(天惠)의 강하(降下)만 합장기원할 수 없는 일이다. 

먼저 농촌의 지도청년은 전자에 술한 아키라기(明木) , 이토(伊藤) 씨의 문고 경영 정신과 그 수단을 배우고 보광리(寶光里) 이용조합(利用組合)의 김인흥(金仁興) 씨의 수완과 방법을 수작(酬酌)하야 볼 것이며. 

군수 기타 위정자는 그 부여된 요직을 이용하야 이 사업의 실현을 위하야 노력함이 잇기를 기걸(祈乞)하여 말지 안으며 농구 기타 농촌 수용품 제조 혹은 취인(取引) 회사는 그 상품의 판로를 맨맨기 위하여서라도 그 이익의 일부를 할양(割讓)하야 농촌문고 건설 자금에 기여할 것이오. 

신문 잡지 등 기타 언론기관은 그 광대한 배경을 이용하여 이 사업의 건설과 조장(助長)을 최촉(催促)하고 선전하야. 

각기의 기능과 역량을 다하야 민족문화 개척운동이오 농촌개발운동인 이 농촌사업을 부대(附帶)한 농촌문고 창설 사업에 공동 협력함이 잇기를 바라고 언제나 이 사업에 직접 투족(投足)할 농촌 청년에게 더 한번 궐기를 최촉(催促)하면서 이 붓을 놓는다.

() 

(이 글을 마침에 제(際)하야 또 다시 이 사업의 설계와 경영법에 관한 것을 축차(逐次) 발표하고저 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문의를 하고저 하는 분은 경성부립도서관(京城府立圖書館) 종로분관(鐘路分館)의 필자(筆者)에게 직접 상의하여 주기를 바란다.)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과 관련하여, 위키 실록사전 '경성도서관' 참조. (인용 및 정리 2023년 4월 29일. '경성문고'를 중심으로 기술한 것으로 보이는 이 기사의 논의를 모두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야마구치 세이가 설립했다는 경성문고/경성도서관, 김윤식 윤익선 윤양구 등이 설립했다는 경성도서관, 이범승이 세웠다는 경성도서관, 이 3개의 도서관을 마치 하나의 도서관의 변천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것입니까?)

1. 경성도서관(京城圖書館)은 일본인상업회의소 서기장 야마구치 세이[山口精]가 사재를 털어 설립한 도서관으로 19089경성문고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되었다. 경성문고는 서울 수정(壽町)에 있던 일본인상업회의소 내에 설립되었는데, 19092월 개관하여 일반에 무료로 공개되었다. 이용객이 늘어나면서 서고와 열람실이 좁아져 19118월 남미창정(南米倉町: 현 남창동)으로 이전·신축하여 경성도서관으로 개칭하였다. 야마구치의 경성도서관은 1919년 경영난으로 폐관했는데, 그때까지 야마구치 개인의 사재로 운영된 사립도서관으로 당시 한국에서는 최대 규모였다.

2. 경성도서관은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한국 도서관사상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이 도서관은 창립 당초부터 참고도서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야마구치 자신도 경성도서관개황(京城圖書館槪況)에서 산업 및 상공업 조사의 편의를 제공할 목적으로 창설했다.”고 서술하였다. 실제로 야마구치 세이는 조선산업지(朝鮮産業誌)의 저자이기도 했다. 이 책은 당시 한국의 농업·상업·공업·산림·광업·어업·통화·금융·교통·운수에 관한 각지의 사정을 조사하여 실은 것인데, ··하 세 권으로 이루어졌다. 야마구치 세이는 191175일에 이 책 10부를 경성도서관 이름으로 순종황제에게 바쳤다(순종실록부록475). 이에 대해 순종황제는 713일 경성도서관에 기부금 150원을 하사하였다(순종실록부록4713). 

둘째, 실제의 도서관 활동도 상당히 활발했다. 경성도서관개황1915년도 통계에 의하면, 개관 일수는 연 303, 입관자 수 5,420, 열람 책 수 2637책에 달했다. 이용자 중 8할이 일본인, 2할이 한국인이었다. 또한 이 도서관은 1912년에 경성도서관도서월보라는 홍보지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은 조선 최초의 도서관보이기도 했다. 

셋째, 이 도서관은 당시 최대의 장서 수를 보유하였고, 장서 내용도 충실했다. 1919년 폐관 당시, 장서 수가 16,000권에 달하였고, 참고 도서류, 관청 자료 등 비시판(非市販) 자료를 다수 소장하고 있었다. 그 장서의 대부분이 1921년 봄에 김윤식(金允植윤익선(尹益善윤양구(尹亮求) 등에 의해 설립된 경성도서관, 즉 취운정도서관(翠雲亭圖書館)으로 계승되었다. 취운정도서관에 대한 일반의 기부금은 19212월 당시 약 5,300원에 달했고, 각계에서의 도서 기증도 계속되었다. 19212월 조선도서주식회사도 경성도서관에 자사 발행 도서 300권을 기부하였다. 당시 장서 수는 약 35,000권에 달했다고 한다. 부인독서실을 따로 설치했으며 종람 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 그 장서의 일부가 현재 서울특별시립 종로도서관 장서로 승계되었다.

3. 192216일에는 교토[京都]제국대학을 졸업한 이범승(李範昇)이 탑골공원 뒤에 있는 전 양악대(洋樂隊) 자리에 경성도서관을 개관하였다. 개관에 앞서 1921910일에는 신문잡지 종람소(縱覽所)를 공개하였다. 여기에는 40여 종의 신문과 150종의 잡지를 비치했다. 매일 수백 명의 관람자가 이용하여 910일 개관 이후 12월 초까지 그 수가 총 9,000여 명에 달했다.

4. 이범승은 1921년 봄에 개관한 취운정도서관을 인수하여 경성도서관 분실로 사용하기로 했는데, 여기에는 한문 서적을 주로 비치했다. 본관에는 신간 서적으로만 5,000여 권을 비치했다. 192216일 개관 당일에는 무료입장이었으나 17일부터는 입관료로 1인당 2전을 받았다. 한달 표는 40전이었다. 개관 시간은 오전 10부터 오후 5시까지였다. 1922년부터 야간개관도 계획하였으며, 경성도서관 주최로 시민 강좌나 전문 학술 강연, 그리고 순회문고 제도도 실시할 예정이었다. 192341일부터는 개관 시간이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로 변경되었고, 수요일은 정기 휴관일로 지정하였다.

5. 1922624일 휘문고등학교 총장 민영휘(閔泳徽)가 기부한 1만 원과 관민의 기부금을 받아 이해 겨울부터 신관 건축에 착수하여 1923728일 낙성식을 가졌다. 종로 인사동에 위치한 신관은 건평 130여 평으로 1층 오른쪽에는 백여 종의 신문 잡지를 갖추어놓은 신문실(新聞室)이 있었고, 왼쪽에는 9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열람실이 있었다. 1층과 3층의 일부, 그리고 2층 전부는 7,200권의 신간서와 2,300권의 고서적을 보기 쉽게 진열해놓았다. 그 밖에 특별실과 사무실이 있었다. 구관은 아동관으로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경성도서관은 연 9,000원에서 1만여 원에 달하는 유지 경비와 그동안 도서관 운영을 위해 은행에서 차입한 부채 3만 원을 감당하지 못하여 1924101일부터 수차례에 걸쳐 무기 휴관에 들어갔다. 일시적으로 건축비와 도서구입비를 지원했던 민영휘가 유지 경비를 담당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에 경성부에서 매입하여 부영도서관으로 운영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19252월부터 일시적으로 경성부의 보조로 개관하기도 했다.

6. 결국 1926325일에 경성부에 양도되어 41일부터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이 되었다. 후임 관장으로는 이범승의 친척인 이긍종(李肯鍾)이 부임하였고, 직원들이 한국인들만으로 이루어져 민족 도서관으로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7. 1945918일에는 서울시립 종로도서관이 되었다.

  • 『동아일보』 1921년 2월 25일자; 1921년 3월 1일자; 1921년 12월 6일자; 1921년 12월 12일자;1921년 12월 31일자; 1922년 1월 7일자; 1922년 1월 17일자; 1922년 3월 17일자; 1922년 6월 26일자;1922년 12월 31일자; 1923년 4월 1일자;1923년 6월 11일자;1923년 7월 29일자;1924년 1월 27일자;1924년 4월 7일자;1924년 10월 1일자; 1925년 1월 30일자;1925년 3월 19일자;1926년 4월 24일자
  • 山口精, 『朝鮮産業誌』 上·中·下卷, 寶文館, 1910-1911(복간 民俗苑, 1992).
  • 山口精, 『京城圖書館槪況』, 京城圖書館, 1916.
  • 宇治鄕毅, 「近代韓國公共圖書館史の硏究ー開花期から1920年代までー」, 『參考書誌硏究』 第30號, 1985.
  • 서울시립 종로도서관 홈페이지, https://jnlib.sen.go.kr/jnlib/index.do
  • “이긍종(李肯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837


강진국(姜辰國), 농촌사업을 부대한 농촌문고 창설의 급무(8), 동아일보 1936년 3월 8일자 기사(칼럼/논단)

농촌사업을 부대한 농촌문고 창설의 급무(8)

강진국

 

여기에다 그 실례와 실적을 무루(無漏)히 들기에든 너무나 방대하고 장황하다. 그러므로 이상의 수례(數例)를 그 중요한 것이라고 보아 또 그 지도정신의 대략을 엿볼 수 잇음으로 이 말은 이상으로 끝을 맛치이고저 한다.(더 자세히 참고하실 분은 오사카시大阪市 마미야상점間宮商店, 이토 신이치伊藤新一 , 쵸손학교도서관경영의 실제 町村学校図書館経営実際, 가격 2원에 의함이 가할 것이다.) 

물론 수만흔 우리 농촌에도 이러한 정신을 가진 지도자가 없지 아니할 것이다. 또 그러케 믿는다. 다만 필자가 불행이 그런 분에게 접촉치 못하고 또 듯지 못하야 이 곧에 인용치 못함을 유감히 느낄 뿐이다. 

또 여기 농구(農具)의 이용 조합이라는 실례가 다소 이 정신에 견련(牽連)됨이 잇음으로 일례를 들어보겠다. 그것은 우리 따 황해도(黃海道) 안악군(安岳郡) 은홍면(銀紅面) 보광리(寶光里)에 잇는 안악농민공생이용조합(安岳農民共生利用組合)’이다. 김 모 씨를 주재자로 한 17인의 조합원이 처음에 매인 1원씩 출자하야 도급기(稻扱機) 1대를 구입하여 조합원이 쓰고 나머지 극히 저렴한 사용료를 받고 이민(里民)에게 사용을 식혓다. 그것이 당년에 기구대(機具代)를 빼내게 되어 익년에는 2대를 비치하야--이 성찬(成纘)으로 2,3년이 지난 뒤 5년만에는 농촌에서 가장 적당한 소마력의 발동기를 구매하야 보광(寶光)과 이에 인접한 부근 농촌에 불소한 편선(便宣)과 복음을 주고 잇으며 또 간접적으로나마 농촌개량운동과 지도를 하고 잇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조합원의 1원 출자가 현재 1인당 5원이란 목을 차지하게 되엇다고 한다. 

이 조합이 확장수단으로 식리적(殖利的) 방법을 취하고 안흠은 별문제로 하고 소에서 대에로 허에서 실에로 확충진전하는 그 합리적 태도와 실천적 운동 정신에 장래할 우리 농촌문고 지도자들의 배울 점이 다대함을 부언한다. 

상술한 바와 같은 정신을 가진 농촌지도청년이 궐기할 것 같으면 대자본은커녕 소자본도 요치 안는다. 각자의 부락에서 구장(區長)과 및 유지(有志)의 동의를 얻어 서당 기타 공간을 이용하야 이 시안을 실행하여 볼 것이다. 자기가 가진 수 권의 책자와 농구를 제공하고 이것을 기초로 동지를 구하야 그들의 소장(所藏)을 얻는 한편 문맹한 농민의 편지나 기타 간이한 행정 계서(屆書) 등의 대서와 농구의 무료 대여를 하야 지성과 진지와 노력으로 동민(洞民)의 이해와 환심을 산다면 여기 농촌문고는 견실한 지반 우에 확립할 수 잇으며 이러한 문고의 수량이 늘고 성적이 양호하게 되면 사회는 결코 무심히 간과치 안흘 뿐 아니라 이를 원조할 기관의 출현도 의아(疑訝)치 안는 바이다.(중략 *편집자 주석: 이 '중략'은 원문에 나오는 '중략'이다.) 

상기한 아키라기도서관(明木圖書館)의 이토(伊藤) 씨의 공적은 30년간의 긴 시일을 꾸준히 싸하온 노력이다. 일본의 문화는 조선의 그것에 비하야 적어도 반세기는 앞서 잇으며 그의 농촌개발현상과 농민의 수준은 조선의 그것에 비하야 오히려 더욱 앞섯다 할 수 잇겟다. 그런데도 그곳에서는 그러한 장시일과 대노력을 요하엿거든 이곳에 잇어는 바야흐로 백년지대계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 지도자는 불완불급하고 노력부절하야 우연한 동기와 주의(主義)에 부화뇌동함이 없이 고위하고 중대한 그 사명과 대계를 일조일석에 수포로 몰리는 비창한 희비극을 연출함이 없도록 세심한 주의(注意)를 잊지 아니 하여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서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https://cir.nii.ac.jp/crid/1130282272486739200

이토 신이치伊藤新一 지음 쵸손학교도서관경영의 실제町村学校図書館経営実際』, 間宮商店, 19311, 23cm

**편집자 주석마미야 후지오間宮 不二雄1890~1970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도서관 용품 상사를 연 인물인데 그 상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

***참고

https://www.nankyudai.ac.jp/wp/wp-content/uploads/2022/04/142e71ff165ffd1b09edeb1ec838546d.pdf

강진국(姜辰國), 농촌사업을 부대한 농촌문고 창설의 급무(7), 동아일보 1936년 3월 7일자 기사(칼럼/논단)

농촌사업을 부대한 농촌문고 창설의 급무(7)

강진국

 

농촌에서 적응될 만한 대중적 정치, 법률에 관한 것이라든가 농촌의 부업과 그 개량 방면에 관한 것이라든지 일용 상식적의 화학, 공예에 관한 것이라든지, 가정의료에 관한 영역에까지 그 독서는 심오히 또 광범히 반근(盤根)을 장라(張羅)하엿다. 

농촌의 정치, 법률은 촌회(村會) 의원선거 혹은 국회대의사(國會代議士) 선거 시에 필요하다. 문명의 은택을 윤택히 받지 못하는 산간벽지의 백성들에게도 선거 계절의 소연한 물정은 잊지 안코 찾어와서 자칫하면 선거위반이니 무엇이니 하야 그들의 머리를 썩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 지도자는 부락민에게 이것을 경계지도하는 임무를 등한히 하지 아니한다. 

또 그는 의류염색의 신방법과 고안을 연구하야 촌민에게 교시하고 보통환자에게 치료방법을 지시하야 이 촌의 백과전서 작용을 하고 잇다. 환언하면 그는 이 촌의 지낭(智囊)이오 또 구주(救主)이다. 예를 들면 젖먹이 아기가 어떠케 우니() 이것을 어떠케 하면 좋으냐고 묻는 자가 잇스면 그는 곧 서고(書庫)에 들어가 소아과 의서류(이것은 부인잡지나 그 부록 등에 상당히 자세한 주의와 설명 잇다)를 찾어보고 여사여사히 하라고 조처방법과 주의를 시켜보낸다. 도 산부(産婦)가 이러이러한 증세를 하니 어찌 하리까 하는 자가 잇으면 산부인과 관계 의서를 참색하야 차역(此亦) 동양(同樣)한 조치와 주의를 교시한다고 한다. 

이러하야 그는 아키라기(明木) ()의 신앙의 목표가 되고 그 도서관은 그 촌민(村民)의 생활의 중심이 되어 잇다 한다. 이러하거니 그들의 생활중심이오 신앙의 목표인 도서관(圖書館)과 그 지도를 위하야 정신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또는 물질적으로나 간에 무엇을 아낌이 잇으랴. 

그러나 그는 이 절호한 기회를 이용하야 결코 무단한 기부며 조력을 요구치 아니한다. 농가의 좌우(坐隅)에서 퇴진착구(堆塵着垢)한 무소용된 고잡지를 기증받아 다림이(아이론)로 구김살을 펴고 낙정(落丁)과 파손을 수리하야 기증자의 씨명(氏名)을 표지에 기입하야 소중히 비치하여 두엇다가 기회를 이용하야 기증자에게 보이고 그 공을 찬양하면 휴지 동양(同樣)으로 처분할 길이 없어 기증한 그 기증자는 이 의외의 칭찬과 과분의 사례에 대개로 얼굴을 붉히지 아니하는 자 없다 하며 그 우에 자기가 내어준 것과는 딴판이 소생(蘇生)된 문헌(文獻)이 자기의 공명을 항구부단히 표창하고 잇는 것을 보고는 기뿐에 넘친 감사를 표치 안는 자 없다 하며 그 후에는 잡지 기타를 정중히 취급하얏다가 기증을 경쟁한다고 한다. 도서관 경영상 경률(輕率)이 취급할 수 없는 잡지 예산비(豫算費)는 소년소년의 잡지에서 위시하야 부인잡지 각종은 물론이오 기타 전문잡지에까지 거진 기증으로서 충당하고 별도 지불이 태무하다 하니 이 도한 얼마나 큰 도음이며 자연스러운 성공이냐. 

또 도서(圖書)도 이러한 방법으로 기증을 받는다. 문고로써 필요한 도서를 미리 조사하야 양서선택부(良書選擇簿)에 기재하여 두고 절호한 기회를 이용한다. 가령 어떤 농가에서 자녀의 출생이 잇든지 혹은 결혼식 거행이 잇어서 출생 축하 혹은 결혼피로의 연회가 잇어 이 지도자를 초청할 시에 그는 참석치 안코 그 후에 틈타서 방문 혹은 서면으로 그 경하스러운 자녀의 탄생을 기념하는 의미로 혹은 결혼 축하 기념으로 자기가 참석하야 당연히 소비되엇을 비용의 한도 내에서 그들의 정도를 짐작하여 5,6십전 내지 1,2원 정도의 도서를 지적하야 양서선택부를 첨부하여 보내면 이 기증 의뢰를 받은 영광을 마음껏 기뻐하면서 이것을 쾌락한다고 한다. 이 기증을 받은 도서에는 보기 조흔 곧에 하모(何某) 탄생기념 하모 결혼기념 등 그 기증 취지를 명시하여 두고 촌회나 기타 중인(衆人)이 집회하는 장소에서 이 기증의 미지(美旨)를 보고(報告), 감사하면 이 대상(代償) 이상의 광영에 욕()한 기증자는 무한이 기뻐하여 소액의 기증자는 도로혀 적면(赤面)하고 재기증의 신청을 하여오는 자도 잇다고 한다. 촌회의원의 당선 촌장의 피선(被選) 등등 경하할 일이 잇으면 대개 이러한 기증을 받아온다. 또 잡지 기타 신문 등에서 중대한 문헌을 누설(漏泄) 없이 채취하여 도서 이상의 효용을 내고 잇는 것도 물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결과, 메이지 39년 창립 이래로 총 경비 5백원이란 소예산을 가지고 근 15천의 장서를 갖게 되어 전 일본 쵸손(町村) 도서관의 모범 도서관이란 자타 공인하는 금일의 지보(地步)를 확립한 그 백절불굴한 정신과 낙수천암의 꾸준한 노력을 우리 지도(指導)들이여! 배우고 본받으면 오인(吾人)의 거대한 이 사업도 무난히 실현 확립할 수 잇는 일이다. 

다시 그는 현재 형식상 야마구치 현청(縣廳)의 촉탁(囑託)을 받아 아키라기(明木) () 청년의 훈련과 그 지도에 전력을 경주하고 잇다. 촌 청년들을 이 완비된 문고에 취()하야 도서 이용방법을 전심지도하는 한편 그들의 직업교육, 농촌개량, 부업 장려 등등의 지도교육을 혹은 도서에 취()하야 혹은 실습에 의하야 하고 잇다. 이러한 결과 수년 전까지도 중등, 기타 상급학교에 진학한 자 불소하엿으나 현재에 잇어는 이것이 태무하야 특수 가정의 몇 자녀를 제하고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도 소학 졸업 후는 곧 이 문고에 와서 지도를 받으며 독학(獨學)한다고 한다. 사실, 특수전문교육을 받을랴면 모르거니와 여간한 중등교육을 받기 때문에 5개년간의 장황한 시일과 그 간의 막대한 비용, 그리고도 이 상식교육(常識敎育)이 그 거대한 희생에 응당한 성과를 얼마나 내고 잇는가를 생각하여 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실천적(實踐的)이고 또 경제적(經濟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