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책과 출판의 문화사] 근대 과학혁명의 원동력이 된 인쇄술 /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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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출판의 문화사]  
근대 과학혁명의 원동력이 된 인쇄술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유럽의 과학 논문은 종교 서적과 달리 시장이 형성돼 있지 못했다. 그러나 인쇄술의 도입으로 과학지식을 전파하는 방법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사진술이 발명되기 전이었지만 알브레히트 뒤러처럼 뛰어난 판화가들은 동판화를 통해 지도는 물론 동식물의 모습, 해부도 등을 보다 정교하고 세밀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이전에 사용됐던 목판은 인쇄를 거듭할수록 그림의 질이 떨어졌으나 금속판에 새겨진 삽화들은 더 정확한 시각 정보를 제공했다. 인쇄술을 통해 학술 서적이 유통되자 연구자들은 고대의 기록들을 좀 더 자유롭게 참고하고, 연구결과를 동료들과 서로 비교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16세기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코펜하겐의 서점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구할 수 있었다. 선배 연구자들의 책을 접한 덕분에 그는 처음부터 혼자 출발해야 하는 어려움을 덜 수 있었고, 그들의 성과 위에서 새로운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브라헤의 제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뒤를 이어 궁정 수학자가 되어 천체의 운동궤도가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밝힌 과학자가 됐다. 하지만 왕족 혹은 귀족의 후원을 받아야 했던 시절의 천문학자였던 그는 당시엔 별점을 잘 쳐주는 점성술사로 더 높이 평가받았다. 

파도바대학교 수학과 교수였던 갈릴레이 갈릴레오 역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 의탁하고 있었다. 그는 1608년경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됐다는 풍문을 듣고 1609년 스스로 당대 최고 배율의 망원경을 제작했다. 그는 반복적인 관측을 통해 예술가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달 표면이 실제로는 매끄럽지도, 평평하지도 않으며 정확한 원구 형태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피렌체 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을 만큼 소묘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그는 뛰어난 그림 솜씨를 이용해 자신이 관찰한 달의 돌출 부위와 함몰 부위를 명암법으로 표현했다. 

명암법은 원근법과 함께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적인 성과이자 당대의 최신 기법이었다. 그 시절엔 성당 제단화로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를 묘사하는 무염시태(無染始胎) 같은 작품들이 반복적으로 그려졌는데 이런 부류의 작품에서는 흔히 도상학적으로 달 위에 성모 마리아가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스페인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벨라스케스가 1618년에 그린 <무염시태>에는 달 표면이 매끄럽게 묘사돼 있지만, 갈릴레오의 친구였던 루도비코 치골리가 1612년에 그린 <무염시태>(로마 산타마리아 마조레 파울 교회 천장 벽화)에서 성모 마리아가 딛고 서 있는 달 표면은 울퉁불퉁하게 묘사됐다. 

16세기에서 17세기로 이어지는 서구의 근대과학혁명은 인쇄술에 의해 사실적이고 실증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획득하게 됐고, 인쇄술을 통해 이런 이미지들을 접하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의 눈이 아니라 과학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됐다. 그것이 바로 근대의 서막이었다. 비록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천체를 관측해 펴낸 책 <별의 전령(Sidereus Nuncius)>에 수록된 달 표면 이미지는 그만 인쇄업자의 실수로 달 표면의 앞뒤가 거꾸로 인쇄되긴 했지만 말이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책과 출판의 문화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핏빛의 르네상스/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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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출판의 문화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핏빛의 르네상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 서유럽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겠다며 여덟 차례에 걸쳐 일으켰던 십자군 전쟁은 참혹한 대실패로 끝났다. "신이 인도하여 주시리라" 믿었던 성전(聖戰)에서 패배한 그리스도교 진영은 커다란 혼란에 휩싸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4세기에 유행했던 흑사병은 봉건제의 하부구조를 지탱했던 낡고 폐쇄적인 장원경제를 붕괴시켰다. 전염병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농민들은 더 나은 노동조건을 찾아 다른 도시로 이동하였다.
 
14세기 이후, 유럽의 봉건질서는 총체적인 위기 상황이었다. 한 가지 위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아시아와 이슬람보다 낙후되고 정체되어 있던 서유럽에 드디어 문명의 불꽃이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의 길목이자 배후지 역할을 담당하였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등 상업도시들은 이슬람으로부터 새로운 천문학과 지리학 등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르네상스는 14~16세기에 일어난 문화운동으로 학문이나 예술의 부활·재생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세의 혼돈은 인간 정신의 동요를 가져왔고, 파국의 연쇄는 새로운 사회적·경제적 관념을 탄생시켰다. 우리는 흔히 르네상스 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해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브루넬레스코 같은 르네상스의 천재들이 남긴 위대한 예술작품을 먼저 연상하지만, 르네상스는 절대 평화롭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 이후 종교전쟁의 외피를 쓴 절대왕정의 처절한 정복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지만 수많은 도시국가로 분열된 이탈리아는 뜯어먹기 좋은 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보다 중·북부 유럽에 있어 더욱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서구가 십자군전쟁을 통해 이슬람문명을 수용했던 것처럼 알프스 이북의 유럽은 침략전쟁을 통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워낙 완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중·북부 유럽은 문화나 예술보다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에서 르네상스를 수용했고, '종교개혁'이라는 형태로 르네상스를 치르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남쪽은 문화와 예술을, 북쪽은 활판인쇄의 전파를 통해 고전 문헌 연구를 중심으로 지식탐구가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부도덕하더라도 더 큰 목적(국가)을 위해 책략과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결단력과 뛰어난 지성을 갖춘, '사자의 힘과 여우의 책략'을 지닌 군주를 요구했던 것도, 국가의 생존강화를 목적으로 권력이 법·윤리·종교보다도 우선해야 한다는 국가이성(reason of state)을 주장했던 것도 이런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 통일 이탈리아를 염원했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천재적인 예술가 이전에 소수의 병력으로 중·북부 유럽의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전쟁병기를 개발하기 위해 날밤을 지새운 발명가였다. 이런 상황을 서양에서는 '르네상스'라 부르고, 동양에서는 '춘추전국시대'라 했고, 이런 사람들을 서양에서는 '천재'라 불렀고, 동양에서는 '제자백가'라 부른 차이가 있었다. 물론 시기적으로는 동양이 2000년 이상 빨랐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책과 출판의 문화사] 종교개혁은 어떻게 인쇄술의 자식이 됐나 /전성원




[책과 출판의 문화사]  
종교개혁은 어떻게 인쇄술의 자식이 됐나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을 '인쇄술의 자녀'라고 기록한다. 그 같은 단언을 무리라 할 수 없는 까닭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개인(독자)의 수가 극히 적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인쇄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초기 서적시장은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로 국한돼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류의 대다수는 평생 한가지 언어만을 구사하며 살아가는데, 우리가 흔히 모어(母語)라고 부르는―'지방어(地方語)' 또는 '민족어'―언어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전 크리스트교가 지배하던 중세 시대의 독자들은 소수의 엘리트들로 '라틴어'라는 언어를 통해 국경이나 민족(이 시기는 근대의 민족 개념 생성 이전)을 넘어 기독교인이자 라틴어 사용자라는 공통점을 지닌 보편의 세계에 살았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면죄부 폐지를 주장하는 95개 조항을 공표하고, 마침내 교황권에 도전하기로 결심하면서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시작됐다. 루터 이전에도 종교개혁 시도는 있었지만, 인쇄술 등장 이전까지 로마교황청은 언제나 도전자들을 능가하는 통신망과 매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이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기도 전에 도전자들은 종교재판이나 화형대 위에 서야 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가 교회 문에 붙인 논제는 독일어 번역본으로 인쇄돼 15일 만에 독일의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었다.

루터 이전까지 일개 지방어에 불과했던 독일어였지만, 종교개혁이 촉발된 이후 20년(1520~1540년) 동안 그 이전의 20년(1500~1520년) 보다 3배나 많은 책들이 독일어로 출판됐다. 이처럼 놀라운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루터였다. 이 시기에 독일어로 출판된 책의 3분지 1이 루터의 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는 대중에게 알려진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는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그의 이름이 붙어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은 기꺼이 책을 구입했다. 이처럼 놀라운 현상의 밑바탕엔 매스커뮤니케이션 기술로서 인쇄술이 있었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가 독일어 독자라는 새롭고 광범위한 독자 계층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얻으려는 거대한 전쟁에서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구교는 '라틴어'의 성채를 지키는 방어적 입장이었고,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신교는 지방어를 선택해 대중(민족)에게 호소했다. 종교개혁 사상가들의 저작물들은 당대로선 놀라운 판매부수를 올렸는데, 한 예로 1520년에 발행된 루터의 <독일 국민의 고귀함에 대하여>라는 팸플릿 4000부는 며칠 만에 동이 나버렸다. 종교적 논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마르틴 루터는 이처럼 독일 민족주의를 부추겼고, 대중에게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독일어를 사용했다. 신구교간에 벌어진 종교 논쟁은 인쇄술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팸플릿 전쟁을 촉발시켰고, 신교와 인쇄술, 그리고 지방어의 연합은 보편적 크리스트교 세계라는 중세의 파국을 몰고 왔다. 새롭게 출현한 신흥 독자들, 상인 계층이자 신교도들은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에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했던 것처럼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책과 출판의 문화사] 구텐베르크는 왜 파산했을까? /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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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출판의 문화사]  
구텐베르크는 왜 파산했을까? 

요한 겐스플라이시, 이른바 '구텐베르크'는 14세기 말 경제적으로 활기를 띠고 있던 교역도시 마인츠의 금은세공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에 대한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1434년부터 1444년까지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그는 거울로 만든 성지순례 기념품을 제작해 판매하는 등 다양한 상품 개발에 진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쇄술과 관련한 연구들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연대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이 무렵 그는 처음으로 기도전례서와 책력들을 인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구텐베르크는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바로 성서의 인쇄였다. 그러나 성서 인쇄를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구텐베르크는 여러 자본가들을 물색한 끝에 요한 푸스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인쇄술 발명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종이와 양피지, 잉크 구입, 활자 주조, 직공의 급료 지불 등-을 감당했다. 푸스트는 재정 이외의 일에도 관여했는데, 페터 쇠퍼로 하여금 구텐베르크의 발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종갓집 손맛을 딸이 아닌 며느리가 물려받듯 유럽에서는 장인이 아들이 아닌 동업자 관계에 있는 사위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푸스트와 쉐퍼 역시 장인과 사위 관계였다. 

1452년부터 3년여 동안 고생한 끝에 구텐베르크는 드디어 <42행(行) 성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성서를 제작하는 데 부호를 제외하고도 대략 300여개가 넘는 상이한 활자들이 필요했다. 구텐베르크는 160권에서 180권 정도의 성서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30권은 값비싼 양피지에 인쇄한 것이었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와 성서 인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50여권의 성서 인쇄본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가 만든 금속활자는 전례용 필사본에 사용됐던 고딕체에서 따온 것들이었다. 그는 성서 인쇄본이 손으로 쓴 필사본의 아름다움에 비견되길 바랐기 때문에 각별한 공을 들였고, 그 덕분에 필사본에 버금갈 만큼 아름다운 책이 만들어졌다. 인쇄 상태가 얼마나 훌륭했던지 거의 700여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어쩔 수 없이 파손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정확한 판매부수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구텐베르크 성서는 상당히 잘 팔렸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벌고 뒤로 밑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초기 투자액을 회수하기엔 여전히 부족했다. 실망한 쇠퍼는 1445년 말 구텐베르크에게 소송을 걸었고, 모든 계약을 파기했다. 이후 두 사람은 결별하고 각자의 인쇄소를 경영했다. 어떤 이들은 쇠퍼가 구텐베르크에게 인쇄술을 빼앗기 위해 일부러 소송을 벌인 것으로 짐작하지만, 당시 유럽의 문맹률, 필사본보다 값이 싸졌다하더라도 인쇄된 책이 여전히 고가품이었던 점을 생각해본다면 수요가 증대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구텐베르크는 이후 성서보다는 면죄부 인쇄에 더 공을 들이게 되었을 것이다. 성서 인쇄보다 면죄부 인쇄가 훨씬 남는 장사였다는 것은 이후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책과 출판의 문화사] 금속활자 인쇄술은 구텐베르크의 발명인가? /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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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출판의 문화사] 
금속활자 인쇄술은 구텐베르크의 발명인가? 

'세상은 1등만 기억한다'는 기업광고도 있었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간발의 차이로 1등을 놓친 사례들이 종종 있다. 1876년 2월14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 특허를 접수하고 1시간 뒤 당시 전신전화 분야 최고의 기술을 가진 엘리샤 그레이가 특허를 접수했다. 기술적으로는 그레이의 특허가 좀 더 우수했지만, 1시간 먼저 접수했다는 이유로 전화기에 대한 특허는 벨이 획득했다. 찰스 다윈은 1856년 진화론을 쓰기 시작했으나, 미처 완성하기 전 후배 과학자인 앨프리드 월리스로부터 자신의 학설과 똑같은 취지의 논문이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서둘러 논문을 완성했고 친구인 후커와 라이엘의 배려로 1858년 린네학회 총회에서 월리스와 함께 공동으로 발표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가지고 있다. 이 인쇄물은 8세기 중엽에 인쇄된 것으로 불경이 봉안된 석가탑은 751년 김대성에 의해 불국사가 중창될 때 세워졌으므로 이 불경 역시 그 무렵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인쇄물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은 770년경에 간행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 세계 최고(最古)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있으니 세계의 모든 사람이 우리를 목판 인쇄술의 발명국가라 생각할까? 우리나라의 인쇄술과 종이제조 기술은 역사 이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이지만 흔히 목판 인쇄술의 발명국은 중국일 것으로 추정한다. 설령 그렇다고 해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역사적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흔히 구텐베르크를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명가로 기록하지만, 일찍이 구텐베르크만큼 명성과 함께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발명가는 없었다. 비록 역사는 그를 인류에게 인쇄술의 혜택을 선사한 위인으로 기록하지만, 그에 대한 전기나 평전 작업이 어려울 만큼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가 인류 문명사를 새롭게 기술해야 할 만큼 거대한 발명을 한 인물이라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중세 대학의 등장은 13세기 서구 역사의 가장 중요한 현상 중 하나였다. 대학의 등장과 함께 점점 더 늘어나는 텍스트를 전부 필사본으로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이보다 훨씬 전부터 좀 더 빨리 많은 필사본을 생산해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왔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갑자기 '유레카(Eureka)!'를 외치듯 등장한 것이 아니라 목판 인쇄술과 화학기술의 발달로 출현한 인쇄 잉크, 포도주를 만들기 위한 압착기, 금속주조술 등 여러 기술이 종합적으로 발전한 결과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텐베르크가 인쇄기의 원리를 만들고, 새로운 인쇄술을 도입하기 위해 15년여동안 숱한 역경과 시행착오를 거듭했다는 사실이 사라지진 않는다. 벨과 그레이가 전화기를 발명하기 위해 맥스웰의 전자기파 이론이 존재해야만 했던 것처럼, 다윈과 월리스의 진화론이 나오기 위해선 그들보다 앞서 진화론의 개념을 정립했던 뷔퐁, 라마르크 등이 필요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역시 알려지진 않았으나 그보다 앞서 토대를 닦았던 무수한 이들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책과 출판의 문화사']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 /전성원



['책과 출판의 문화사']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 

이슬람교는 성립(610년)한 지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지금의 중동은 물론 북아프리카로부터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중국을 비롯해 스페인을 위시한 유럽까지 점령했다. 이슬람교의 놀라운 전파 속도에 대해 서구 사회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란 말로 폄하해 왔지만, 이것은 자신들의 문명과 문화가 우월하다고 여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이슬람교가 그토록 빨리 전파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이 지역을 통치하던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가혹한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민중들이 이슬람의 평등주의를 환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슬람교의 교리는 어떻게 그처럼 빨리 전파될 수 있었을까?

<성경>은 대략 850여년에 걸쳐 여러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서술한 내용을 결집한 것이고, 비슷한 시대 소아시아 일대부터 인도, 중국에 이르기까지 이슬람과 경쟁했던 마니교는 여러 언어로 경전이 번역되는 것을 장려했다. 그에 비해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꾸란>의 번역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꾸란>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신의 가르침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전해진 것이므로, 이것을 아랍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은 경전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기 때문에 해설서란 의미에서 '타프시르'라 부른다. 종이 이전에 <꾸란>은 암송으로 구전되거나 양피지, 가죽조각, 돌판, 대추야자 잎이나 나무껍질, 낙타의 골편 등에 기록돼 왔다. 

탈라스 전투(751년)에서 승리한 이븐 살리흐는 당나라 포로들 가운데 제지기술자가 여러 명 있는 것을 알고 현지인들에게 제지술을 가르치게 했다. 당시만 해도 이슬람 상인들은 중국에서 비단과 함께 종이를 비싸게 수입해야 했지만, 탈라스 전투 이후 6년여가 흐른 757년경이 되자 사마르칸트는 제지업의 중심도시가 됐다. 사마르칸트 종이는 중국의 기술로 만들어 중국 종이와 품질 차이가 거의 없었기에 이른바 '서역한지(西域漢紙)'라 불렸다. 사마르칸트 종이의 생산은 단순히 수입 물품 대체 정도의 효과만 거둔 것이 아니었다. 종이와 <꾸란>이 만나면서 구전문학 중심이었던 이슬람문학이 아랍어를 중심으로 한 문자문학으로 전환됐고, 저렴한 가격에 종이가 공급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꾸란>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슬람문명이 세계의 질서를 주도했고 이슬람은 세계무대의 주인공이었다.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이끈 지도자들은 다마스쿠스와 이스탄불 등 곳곳에 제지공장을 세웠고, 서적의 발행이 활발해지면서 개인도 책을 소지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책이 발간되고, 가장 많은 서점이 즐비한 곳은 바그다드였다. 이슬람의 지식인들은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사라질 위험에 처했던 인류 문명의 고전들을 보존해주었다. 아랍어와 <꾸란>을 중심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희랍철학의 고전은 물론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인도의 수학과 접목시켰고, 근대의 의학과 화학, 천문학 역시 이슬람의 과학과 연구에 힘입은 것들이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서구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부활하고 르네상스가 시작될 수 있었던 배경에 이슬람이 있었고, 그 배후에 종이가 있었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책과 출판의 문화사'] 종이가 바꾼 세상, 세상을 바꾼 책 /전성원



['책과 출판의 문화사']  
종이가 바꾼 세상, 세상을 바꾼 책 

세상을 바꾼 한 권의 책에 관해 묻거나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있다. 세상의 모든 책이 그에 해당하지만, 동서양 문명의 경로를 역전시킨 출발점이 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1299년)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서구인들에게 동방에 대한 호기심과 탐험 욕구를 한껏 부추겼다. 1492년 신항로 개척을 위한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의 선장실에 놓여 있던 책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었다.  

747년 고선지 장군이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중국은 서진 정책을 펼칠 여유가 없었다. 황소의 난으로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이 다시 서역 개척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칭기즈칸이 중원을 차지한 뒤부터였다. 몽골제국이 등장하기 전(7세기부터 13세기 중반)까지 이슬람 세력은 동서교통로를 독점하며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이슬람 세력에게 동서무역의 교통로를 차단당한 로마교황청에 동방으로부터 이슬람교도를 물리치는 크리스트교 군주 '프레스터 요한'이 출현했다는 시리아교회 주교의 보고가 전해진 것은 1145년의 일이었다. 프레스터 요한의 전설이란 예수의 탄생을 전한 동방박사의 후손 중 하나가 동방에 크리스트교 왕국을 세웠다는 것이었는데, 초기에는 인도, 몽골, 아프리카로 그 대상이 점차 달라졌다.  

서방의 크리스트교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 동방 군주가 이슬람 군대를 물리치며 다가온다는 구원의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1245년 로마교황청은 몽골의 3대 칸의 즉위식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11세기 말에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지만, 초원의 몽골 기병들은 1258년 사막을 가로질러 단숨에 바그다드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얼마 뒤 전해진 몽골제국의 잔인한 정복 소식은 전 유럽을 충격으로 벌벌 떨게 하였다. 

13~14세기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를 구축했다. 역참과 패자(牌子) 제도를 통해 초원길과 실크로드를 재건하는 한편 항만시설마다 시박사를 설치하는 등 문물교류를 장려했다. 특히 서구와 이슬람이 종교 갈등을 빚고 있던 당시에 이미 종교적 관용으로 교역의 장애물을 제거하였고, 그 덕분에 크리스트교도인 마르코 폴로의 뒤를 이어 이슬람교도 이븐 바투타가 몽골제국을 여행할 수 있었다. 몽골제국에 의해 동서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중국에서 화약과 도자기가 아랍에서 수시력을 비롯한 과학기술이 중국으로 전해졌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저술된 책으로 서양 중세에 <성경> 이래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로 손꼽힌다. 당시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출현(1450년대)하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일일이 필경사의 손을 거쳐야만 했지만, 오늘날까지 이탈리아, 라틴, 프랑스 어 등 유럽 각국 언어로 번역된 140여개의 필사본이 남아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것이 가능했던 배경엔 탈라스 전투 이후 서방에 전해진 값싸고 질 좋은 '종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출현 덕분이었다. 종이는 이집트에서만 구할 수 있었던 파피루스나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200여마리의 가죽이 필요했던 값비싼 양피지와 달리 값싸고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질 좋은 매체였던 것이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책과 출판의 문화사' ⑦ - 실크로드와 페이퍼로드(2)] 유럽 인쇄혁명의 시초가 된 탈라스 전투 /전성원



['책과 출판의 문화사' ⑦ - 실크로드와 페이퍼로드(2)]
유럽 인쇄혁명의 시초가 된 탈라스 전투 

혜초가 한자문화권과 이슬람문화권의 접촉을 이끌어냈다면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 요동성 성주 고사계의 아들로 태어나 문명의 충돌을 통해 중국과 이슬람 세계의 문화교류를 촉진한 인물이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의 부흥을 저지하기 위해 3만8200호(약 20만명)에 달하는 유민들을 장강 이남과 당경 이서의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 중에는 고구려의 문무백관들은 물론 예술가, 장인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의 역사는 한족만의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이민족들의 침략과 정복이 어우러진 융합의 역사였으며 이민족의 침략은 문명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해왔다. 한족이 수립한 왕조들은 대부분 대외활동에 폐쇄적이었지만, 이민족이 수립한 왕조들은 정복과 문물교류가 주는 경제적 이점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성당(盛唐) 시대 중국의 국경선은 서역의 실크로드를 향해 남쪽의 토번(吐蕃), 북쪽의 흉노(匈奴) 사이로 가늘고 긴 통로를 뚫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 길을 개척한 사람은 혜초를 비롯한 구법승들이었지만, 이 길을 따라 정복전쟁을 이끈 사람은 고선지였다. 한반도 출신의 세계인으로 동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은 과연 만났을까? 혜초와 고선지가 동시대, 같은 길을 오갔더라도 두 사람이 추구한 길은 서로 달랐다. 

비록 중국의 자치구 중 하나로 전락했지만, 역사적으로 토번(티베트)은 중국을 위협한 강국이었다. 741년 톈산산맥 서쪽의 달해부가 당에 반기를 들자, 고선지는 2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나가 토벌했다. 이 공으로 안서도호부의 부도호가 된 그는 서역(西域)의 군사 요충지인 4진을 담당하게 됐다. 747년 토번이 다시 세력을 확대하자 고선지는 보병 1만과 기병을 이끌고 서역정벌에 나섰다. 파미르 고원을 넘어 힌두쿠시 산맥 동쪽의 연운보(連雲堡)에서 토번군을 격파하고, 파키스탄 북부의 소발률(小勃律)을 비롯해 72개국의 항복을 받아내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그의 승리로 당나라의 영향력이 서아시아 일대까지 퍼지게 됐다.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에서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과 히말라야 힌두쿠시 산맥의 다르코트 정상에 이르는 비단길을 단숨에 장악한 것이다. 

우마이야 왕조를 몰아내고 이슬람의 패권을 장악한 압바스 왕조는 당의 서역 진출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에 항복했다가 억울한 죽임을 당한 석국 왕의 아들이 이슬람세력에 도움을 청하자 압바스 왕조는 지야드 이븐 살리흐를 내세워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연합군에 맞서게 했다. 두 세력이 양대 문명의 명운을 걸고 탈라스 벌판에서 만나 5일 밤낮으로 싸웠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 연합군은 내부의 배신으로 10만의 병사 중 불과 2000여명만 생환하는 대패를 경험하고, 실크로드를 이슬람에게 빼앗긴다. 탈라스 전투의 승리로 실크로드를 장악한 압바스 왕조는 이후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열었고, 이때 이슬람군의 포로가 된 중국 병사가 전해준 제지술은 751년 사마르칸트, 793년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이스탄불을 거쳐 1056년 시칠리아, 1276년 베네치아, 1319년 뉘른베르크에 이르며 유럽 인쇄혁명의 물적 토대가 됐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책과 출판의 문화사'- 실크로드와 페이퍼로드 혜초와 고선지는 만났을까? /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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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출판의 문화사'- 실크로드와 페이퍼로드 

혜초와 고선지는 만났을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한국문학사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여행기이자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문헌 중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혜초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857∼?)보다 110년쯤 앞선 719년 16세의 나이로 유학길에 올랐던 신라의 승려였다. 중국 광저우에서 남인도 출신의 승려 금강지(金剛智)와 제자 불공(不空)에게 밀교를 전수받은 혜초는 당 현종 시대(723년경), 4년여에 걸쳐 인도를 비롯해 카슈미르·아프가니스탄·중앙아시아 일대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당시는 동아시아 일대가 오랜 전란을 마치고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요동 일대에서 당을 위협하던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와 발해, 일본이 모두 중국의 유교식 율령체제를 받아들였다. 동아시아 각국이 불교를 사회통합 이념으로 활용하면서 문화적 동질성이 크게 강화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활발한 교역과 문물 교류가 전개되었다. 사회가 안정되자 사회적 문제를 넘어 인간 자신의 문제를 탐구하는 구도의 길을 추구하게 되었고, 혜초의 뒤를 이어 일본의 엔닌 등이 구법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과연 한 개인이 불경을 구하고자 하는 신심만으로 4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그토록 머나먼 순례의 길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혜초의 순례가 본질적으로 구법여행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나 동천축에서 중천축,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에 이르는 혜초의 기록들은 불교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언어와 의식주 같은 일상사와 지리, 기후 등 자연환경 심지어 각 지역의 임금들이 소유하고 있는 전투 코끼리의 수와 병력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또 아랍 제국이 인도 방면에 어느 정도 세력을 펼치고 있는가 하는 등 국제정세까지 두루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중국으로 귀환한 뒤 스승 금강지의 장례를 당 현종의 도움으로 성대하게 치르고, 이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보낸 기록이 있는 점 등으로 비추어 당 조정과 혜초의 밀접한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은 건국 세력부터 서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실크로드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수양제를 격파하고, 당 태종까지 물리친 고구려의 존재는 당의 서역 진출에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등 뒤에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고구려가 존재하는 한 서역 진출에 나설 수 없었던 것이다. 흔히 실크로드라고 부르지만, 문명 교류의 가장 중요한 길목은 톈산산맥에서 발원한 시르다리아 강과 파미르 고원에서 발원한 아무다리아 강 사이에 위치한 트란스옥시아나 였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남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대발견의 시대 이전까지 동서양이 만나는 문명충돌의 길목이었으며 트란스옥시아나의 패자(覇者)가 그 시대 세계문명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었다. 트란스옥시아나로의 진출을 위해 혜초가 다녀왔던 길을 되밟아 서역 정벌에 나섰던 사람이 바로 '힌두쿠시의 제왕'이라 불렸던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수 고선지였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책과 출판의 문화사' ⑤ -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문/ 음독(音讀)과 묵독(黙讀)/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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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출판의 문화사' ⑤ -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문>

음독(音讀)과 묵독(黙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4대 교부(敎父) 중 한 명으로 헬라철학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통합시킨 교부철학의 대가이자 최고의 논객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젊은 시절은 그리스도교와 거리가 멀었다. 제국의 중심 로마의 지식인들에게 초기 그리스도교는 변방의 유대인 목수 아들을 섬기는 투박한 종교에 불과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대신 마니교에 빠져 음행(淫行)을 일삼았지만, 그가 마니교에 빠져든 이유 중 하나는 불멸의 지혜를 탐구하려는 열망 때문이었다. 그의 오랜 방황은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어린 설득과 당시 밀라노의 주교이자 최고의 신학자였던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그리스도교로 귀의하면서 끝났다. 

 한때 로마의 집정관을 지냈을 만큼 뛰어난 학식과 인품을 고루 갖추고 있던 암브로시우스는 지적 갈망에 목말라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그의 탁월한 설교와 신심 어린 처신은 오랫동안 아우구스티누스를 괴롭혀 왔던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교회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시켜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랐지만, 그의 책 읽는 습관만큼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의문은 대단한 독서가였던 암브로시우스가 책을 읽을 때, 소리 내어 읽지 않고(音讀), 눈으로만 읽는다(黙讀)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책을 읽을 때 그의 두 눈은 책장을 뚫어져라 살피고 가슴은 의미를 캐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혀도 움직이지 않았다"며 스승의 기이한 독서법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묵독이 일반화된 현대에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고대의 독서법은 서당에서 "하늘 천 따지 가마솥에 누룽지"를 외치는 학동들처럼 음독이 기본이었다. 플라톤 시대의 그리스인들에게 문자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것이었기에 기록된 문장(text)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소리 내 읽는 것이 필수(음독이 텍스트 안에 내재)적이라고 여겼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교회 내부에 말씀전례(Liturgia Verbi) 형식으로 남아있다. 현실적으로 음독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띄어쓰기나 맞춤법, 문장부호가 없었기 때문에 소리 내서 읽지 않으면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낱말 사이에 여백을 넣어 읽는 것을 구두법(句讀法)이라 하는데, 글에서 뜻이 끊어지는 곳인 구(句)와 구 가운데 읽기 편하게 끊는 곳을 일컫는 두(讀)가 발전하면서 7세기경부터 서양에 묵독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묵독은 책 읽는 속도를 배가시켜주었고, 깊이 있는 독서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묵독이 점차 증가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수도원에서 귀중품인 책을 보관할 때 쇠사슬에 묶어 두었기 때문이다. 쇠사슬에 묶인 책을 읽기 위해 수도사들이 모여 각자의 책을 소리 내 읽는 것은 소란스럽고 불편한 일이었다. 묵독이 일반화되면서부터 도서관은 점차 침묵이 지배하는 엄숙하고 성스러운 장소로 변화하게 되었다. 11세기부터는 묵독이 일반화되었고 독자들은 더 이상 타인의 눈과 귀를 신경 쓰지 않고도 지적 호기심의 근원을 완전한 자기 통제 아래 둘 수 있게 되었다. 은밀한 독서가 가능해지면서 저자와 독자 모두 점차 대담해졌으며 비로소 생각의 자유가 시작되었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책과 출판의 문화사' - 사해사본은 왜 항아리 속에 담겨있었을까? 두루마리 권자본과 책자본 /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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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출판의 문화사' - 사해사본은 왜 항아리 속에 담겨있었을까?
두루마리 권자본과 책자본 

<성경>을 종교적으로 보면 유대교와 기독교에 국한된 경전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세계 문명에 전례 없는 충격과 영향을 준 위대한 고전이며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읽은 책이다. <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의 전통이 확립되기 시작한 기원전 1000년부터 400년까지 600여년에 걸쳐 기록되었다. 그러나 <신약(그리스도 성서)> 27권, <구약(히브리 성서)> 39권으로 이루어진 <성경> 전체가 모두 기록된 원본은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다. 이것은 <성경>이 처음부터 하나의 고정된 텍스트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개최된 공의회를 통해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서사시인 '구약성서'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을 담은 '신약성서'는 4세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의 정경(正經)체제가 확립되었다. 19세기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의 티셴도르프 교수는 평생을 성서 사본을 찾는데 바쳤다. 1844년 5월, 러시아의 한 수도원을 방문한 그는 땔감더미 속에서 양피지 43장을 발견한다. 그가 발견한 것은 이제까지 발견된 것들 중에 가장 오래된 '신약성서'를 담고 있는 양피지 사본의 일부였다. 이것이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 발견의 단초가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만들어진 '시나이 사본'은 오늘날의 책과 흡사한 '코덱스(冊子本)'였다.  

1947년 봄, 베두인 목동 주마 무하메드는 양과 염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사해(死海) 북동쪽 인근 키르벳 쿰란의 절벽 기슭에 있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롯이 가족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하다가 그의 아내가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었다. 잃어버린 염소를 찾기 위해 가파른 암벽을 기어오르던 소년은 자신이 서 있는 곳 바로 위에 작은 동굴이 있는 걸 발견했다.  

동굴 안에서 항아리 더미를 발견한 소년은 금은보화가 들어있길 기대했지만, 항아리 속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는 낡은 두루마리가 들어있었다. 이것이 바로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이었다. '사해사본'은 '시나이 사본'보다 역사적으로 앞선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에스더서'를 제외한 '구약성서' 전부를 수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서학자들은 지난 2000년 동안 성서의 기록이 실제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해사본'은 어째서 항아리 속에 있었을까? 고대의 책은 대부분 두루마리(권자본)의 형태였다. 동양에서 책을 뜻하는 한자 '권(券)'도, 시리즈 책을 의미하는 영어 'volume'도 모두 두루마리 형태의 책이 남긴 흔적이다. 그런데 두루마리 책들은 그 형태 때문에 보관하기도 힘들고 책상 위가 아니라면 펴놓고 읽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책을 길쭉한 튜브 형태의 질그릇에 담아 보관했다.  

그리스도교는 오늘날 우리가 읽는 코덱스 또는 책자본이라 부르는 네모난 종이의 한쪽을 실로 꿰맨 책의 보급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도교가 박해받던 시절, 신자들은 권자본 <성경>을 네모나게 자르고 끝을 이어 붙여 아코디언 주름처럼 접었다 펼 수 있도록 책자본을 만들어 품속에 숨겨놓고 읽었던 것이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소크라테스는 왜 평생 단 한권의 책도 쓰지 않았을까 책과 출판의 문화사/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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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BC 399)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철학자를 나타내는 하나의 아이콘(icon)이다. 철학의 '철'자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소크라테스에 대해선 아는 체를 한다. 소크라테스는 오늘날에만 유명했던 것이 아니라 생존해 있던 당시에도 이미 '아테네의 명물'이었다. 다만, 그 시절의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후대에 길이 이름을 남기는 철학자가 될 것이란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에겐 별 볼 일 없는 석수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맨발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하루 종일 시장(agora)을 돌아다니며 아무하고나 기꺼이 토론하는 사람이자 귀족 자제들을 가르친답시고 대답하기 어려운 이야기나 물어보는 괴팍한 소피스트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훗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현혹시켰다는 죄목으로 독배(毒杯)를 마셔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위대한 철학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소크라테스는 살아생전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만날 수 있는 것은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과 크세노폰, 친구 아리스토파네스 등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왜 그랬을까? 소크라테스의 시대만 해도 텍스트(text)는 보편적인 도구가 아니었다.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에는 이미 상당수의 책이 존재했고 서적 교역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개인적인 독서 관행은 적어도 한 세기 뒤 귀중한 필사본들을 수집했던 최초의 독서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충분히 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소크라테스보다 훨씬 이전 사람이었던 호메로스(Homeros, BC 800 ?~BC 750)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문자로 정착된 것이었지만, 그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BC 425?), 투키디데스(Thukydides, BC 460?~BC 400?)는 책을 썼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의 대화를 담은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파이드로스(Phaidros)>에 그 힌트가 있다. 

'주사위, 숫자, 문자, 기하학, 천문학' 등을 발명한 신 '토트(Thoth)'가 이집트의 파라오를 방문하여 자신이 발명한 것들의 장점을 열거한다. 토트가 "문자는 사람들의 기억을 향상시켜 줄 배움의 한 종류로 내 발명은 기억과 지혜 모두에게 유익한 비결"이라고 주장하자, 파라오는 "사람들이 그걸 배운다면 그들의 영혼에 망각할 수 없는 무언가를 심는 결과가 되어 사람들은 앞으로는 쓰여진 것에만 의존하려 들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기억 속에 무언가를 담아 찾아내려 하지 않고, 눈에 드러난 기호에만 의존할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유사품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아는 것도 아니면서 말만으로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 것이기 때문에 결국엔 짐만 될 것"이라며 반론을 제기한다. 이 일화는 소크라테스가 '텍스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에게 문자로 기록된 '책'이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마음의 지혜[眞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지혜를 모사해 그린 그림(模寫)'에 불과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책이란 기억과 지식의 보조 역할을 했지만, 진정한 철학자라면 책 없이도 해낼 수 있어야 했다. 책에 대한 진정한 권위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성경> 출현 이후의 일이었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시간과 공간의 대결-점토판(tablet)과 파피루스(papyrus) 책과 출판의 문화사/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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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사회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인류는 사제와 정복자라는 지배계급도 덤으로 얻게 되었다. 지배계급은 세금을 거두고, 법률과 계약서, 종교적 포고 등을 위해 기록의 보존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문자가 출현하게 된다.  

기원전 4000년에서 3000년 경에 나타난 세계 4대 문명은 모두 농경과 수운에 유리한 강을 끼고 발달했다. 그중에서도 인류 역사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Sumer)인들은 기원전 약 3100년경 수(數)를 발명했고, 이와 거의 동시에 문자를 발명했다. 이들은 주변의 흔한 재료인 점토판(tablet)을 이용해 언어를 기록했다. 종이가 등장하기 전까지 문자를 기록하는 매체는 수메르인처럼 점토판이나 동물 가죽, 뼈, 잎사귀, 떡갈나무 껍질, 조개, 비단과 면화, 뼈, 거북 등껍질 등등을 사용했지만, 양피지와 종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점토판과 파피루스(papyrus)였다.  

오늘날의 영어에는 고대의 책 문화에서 출발해 현재까지 사용되는 용어들이 있는데, 수메르인들이 점토판에 설형(쐐기)문자를 새기는 도구였던 스타일러스(stylus)는 현대의 태블릿PC에서도 같은 용도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말에서 고정된 문체나 양식(樣式)을 뜻하는 스타일(style)이란 말이 나왔다. 영어에서 '쪽(page)'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낱장(leaf)'이란 단어는 나무 '잎사귀(leaf)'에 글을 썼던 흔적이 남은 것이고, '도서관(library)'이란 말도 나무껍질의 안쪽을 뜻하는 라틴어 'liber'에서 나왔다. '책(book)'은 앵글로색슨 어로 나무껍질을 의미하는 'boc'에서 출현했고, '종이(paper)'는 잘 알려진 대로 이집트의 파피루스에서 왔다. 그리스어로 파피루스를 뜻하는 '비블로스(byblos)'에서 성서를 뜻하는 말 '비블리아(Biblia)'가 나왔고, 여기에서 다시 '책 중의 책(Bible)'이란 말과 서지학(書誌學)을 뜻하는 '비블리오그라피(bibliography)'가 출현했다.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일찍이 "인쇄술의 출현이 비-문자언어로서의 건축을 죽였다"고 말한 바 있는데, 고대 문명이 남긴 위대한 서사시들도 각기 어떤 매체에 기록되었느냐에 따라 다른 길을 걸어야 했다. 인류 최초의 역사가 시작된 수메르 문명이 남긴 위대한 서사시 <길가메시>는 <성경>과 <그리스로마신화>에 기록된 대홍수와 방주, 바벨탑 이야기의 원형질을 이루는 신화였다. 그러나 <길가메시>는 <성경>이나 <그리스로마신화>와 달리 1872년 대영박물관에서 근무하던 조지 스미스(1840~1876)가 판독해내기 전까지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못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문자 도입 이전까지 신화는 구전을 통해 전해졌지만, 문자 출현 이후 수메르 문명은 점토판에 이집트와 그리스 문명은 파피루스에 기록했다. 점토판은 시간을 견디는 힘(내구성)에 장점이 있으나 기록의 전달과 전파에 한계가 있었고, 파피루스는 시간을 견디는 힘은 약했으나 지식의 공간을 넓히는, 지식과 정보의 전파에 커다란 장점이 있었다. 다시 말해 점토판에 기록되었던 <길가메시>는 그 이야기가 처음 만들어진 지역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 채 남겨져 있어야 했던 반면,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던 <성경>과 <그리스로마신화>는 더 널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문자의 발명(The Invention of Writing) 책과 출판의 문화사 인류 최대 사건 … 기억·기록 한계로부터 해방/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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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인류는 글에 마력(魔力)이 있다고 믿어왔다. 
스페인 식민통치를 받던 카리브 해의 토착민들은 스페인 정복자가 쓴 편지를 초자연적인 물체로 여겼다.  역사가이자 산토도밍고의 총독이기도 했던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 이 발데스(Gonzalo Fernandez de Oviedo y Valdes,1478~1557)는 "토착민들은 편지가 받는 이의 미래를 예견해준다고 믿는 듯하다.  

이들 중 가장 미개한 부류의 일부는 편지에 영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고 기록했다. 
한 장의 종이에 담긴 편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될 수밖에 없었던 토착민들로서는 당연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1400년경 중국에서는 거북이 등껍질이나 소의 어깨뼈를 불로 지져 생긴 갈라진 곳을 읽어 점을 쳤고, 이를 통해 갑골문이 등장하게 되었다. 
역사 속에서 문자는 이처럼 소수의 엘리트 집단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적과 상징의 힘을 지닌 것으로 간주하여 왔다.  

고대 인류가 남긴 최초의 '쓰기' 흔적은 암벽화와 동굴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0년 프랑스 남서부 라스코 동굴에서 발견된 사슴과 들소 그림은 기원전 1만5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스페인 라스 모네다스 동굴에는 빙하기 순록의 그림이 남아있다. 

한반도에도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이르는 동안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병풍 같은 바위 면에 고래잡이 모습, 배와 어부의 모습, 사냥하는 광경 등이 표현되고 있으며 묘사된 동물들 가운데에는 교미의 자세를 취하고 있거나 배가 불룩하여 새끼를 가진 것으로 표현된 동물 모습 등도 보인다.  

고대 인류에게 이 같은 회화적 이미지의 모사(模寫)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呪術)적 작업으로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이 일체를 이루던 '신화의 시대'가 만든 산물이었다.

대개의 역사서들은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문자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간략하게 기술하는 경향이 있지만, '문자의 발명(The Invention of Writing)'이란 인류사 최대의 발명품이자 사건이었다.  

이 발명품은 350여만년 전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하고, 1만3000년 전 농경생활을 시작하고도 거의 9000여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출현했다. 
최초의 문자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이라크 남부 지역에 있었던 수메르문명이 사용했던 쐐기(설형)문자였다.  
수메르문명은 쐐기문자 이전에 상형문자를 먼저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것이 이집트 상형문자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농경을 통해 공동체가 성장하고, 사제와 정복자라는 지배계급이 출현하면서 법률, 종교적 포고, 세금, 계약서 같은 활동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문서와 기록 보존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했던 것이다. 
지식의 저장을 위해 문자가 발명되면서 인류는 비로소 기억의 한계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고, 그로부터 지식 기록의 용량적 한계가 사라졌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책과 출판의 문화사' - 연재를 시작하며 한국·세계사 책 역사 문화적 통찰 동·서양 교류 통한 시대변화 고찰/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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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책은 이 두 가지 혁명을 동시에 수행한다. 

시대를 움직이는 책은 한 시대를 만들고, 그 시대의 변화를 추동하지만 사회적·문화적 조건들에 의해 규정받는다.  
책의 문화(출판문화)는 그 시대의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구조적'이지만, 한 시대의 조건을 극복하고 '조직하는' 현상이란 점에서 시대를 만든다. 

문자의 탄생 이래 책은 개인의 지성과 감성을 키우는 가장 유용한 도구였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을 한 사람의 시민으로 키워내는 것이 교양이다. 
교양이란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도, 소장하는 것도 아닌 키우고 품어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시대의 교양이란 타인과 어울려 사적인 관계를 구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공동체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내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나치 독일은 자국 내에서 유대인과 체제 저항적인 지식인들의 책을 압수하여 불태웠다.  
또한 군국주의 일본도 '출판법'과 '일반검열표준' 등의 기준으로 출판을 탄압하고 금서(禁書)를 양산했다.  
그에 비해 미국은 학계의 지식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자국민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들을 '그레이트 북스(Great Books)'란 이름으로 선정했고, 이 책들을 미국 내의 여러 대학에 보급하고 비치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책을 불태운 나라인 독일과 사상을 통제한 일본은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 

세종대왕(世宗, 1397~1450)은 한글을 창제할 만큼 뛰어난 성군이었고 학문에도 두루 능했으나 서양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742~814)는 간신히 편지나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는 죽기 전 날 밤까지 침대 옆에서 작은 왁스판을 놓고 쓰기 연습을 했지만, 죽을 때까지도 쓰기를 배우지 못했다.  
실제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올 때까지 서양의 왕들 중엔 쓰기는커녕 글을 읽지도 못하는 왕들이 수두룩했다.  
서양에서 왕족이 글을 읽고, 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이후의 일이었다.  

동양은 그와 정반대로 거의 모든 왕들이 읽고 쓰기에 익숙했으며 심지어 학자들과 토론까지 하고, 책을 쓰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데 어째서 동양은 서양에 뒤처지게 되었을까?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한 이 땅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목판인쇄술을 배태한 인천이 그로부터 780여년이 흐른 오늘 '세계 책의 수도'로 선정되었다. 

본 기획 연재는 우리 역사와 세계사 속에서 탄생한 책의 역사를 문화적 관점에서 고찰해보고, 동양과 서양의 문화, 문물교류의 역사를 통해 '한 권의 책'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수

세계책의수도 인천] 목숨 걸고 지켜낸 보물 … "제자리 강화로 돌아와야" 인천, 활자의 시대를 열다 - 14.정족진과 정족사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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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족진은 정족사고를 보호할 목적으로 운영한 조선시대 군사주둔지이다. 정족진에서 바라본 전등사 경내의 모습. 이 방향에서 왼편으로 정족사고가 위치한다.
<왕실서적 수호> 
프랑스군 강화부 점령 … 서리·사서 등 토굴 파서 봉안

<정족사고 구조> 
단층·별관 타 사고와 대조 … 보관에 열람 기능까지 겸비



눈동자 색깔이 시퍼런 오랑캐들이 강화부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랑캐들이 곧 '정족사고'까지 올라와 모든 책을 불태워버릴 것이란 정보가 올라왔다. 

"놈들이 여기까지 올라온다면 책들이 모두 불 타고 말 것이오.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기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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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실서적을 보관했던 선원보각.
정족사고를 지키던 서리 조희영을 비롯한 7인의 사서들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왕실서적을 궤에 담기 시작했다. 사서들은 물론 전등사에 머물던 승려들까지 모두 나서서 책을 궤에 담는 작업에 동참했으므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담겨진 수천 권의 책들이 하나 둘 '선원보각'과 '장사각'을 떠나 어디론가 옮겨지기 시작했다. 정족사고가 텅텅 비었을 때, 비로소 사서와 승려들의 피범벅이 된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났다. 수풀과 가시덤불을 헤치며 책궤를 옮기느라 긁히고 찢긴 상처로 사람들의 얼굴과 몸은 엉망진창이 돼 있었다. 왕실서적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는 안도감으로 피어난 사람들의 미소는 진흙 속에서 피어났지만 진흙이 조금도 묻지 않은 연꽃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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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실서적을 보관했던 장사각.
1866년(고종3) 10월 함대 7척과 600여명의 해병대를 거느리고 강화도에 들어온 로즈제독은 강화성을 점령한 뒤 무기, 서적, 식량 등을 마구 약탈했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학살 탄압을 빌미로 한반도에 들어온 프랑스군은 최신식 무기로 순식간에 강화를 점령한 뒤 무서운 화풀이를 해대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다음 목표는 정족사고가 있는 전등사였다. 정족사고는 전국 사고 가운데 가장 많은 왕실서적을 보관하던 핵심 사고였으므로 프랑스군에겐 반드시 점령해야 할 고지였고, 조선인들에겐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보장처였다.  

사서들이 왕실서적을 모두 옮긴 뒤,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정족진에서 배수진을 치고 결전의 날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11월7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해병 160여명이 정족산성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승병들과 호랑이를 잡는 범포수와 합세한 조선군은 남문을 통해 정족산성으로 기어오르는 프랑스군에게 총공세를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대패하고 만다.  

최신 무기로 중국, 일본과 같은 동양인들을 제압했지만, 조선인들은 달랐다. 체구가 작고 얼굴이 새카맣지만 눈빛만큼은 호랑이처럼 이글거렸다. 조선인들은 함포를 쏴도 도망가지 않았고, 총이나 칼을 맞으면 그냥 쓰러지지 않고 조롱하는 얼굴로 적의 얼굴에 "칵"하고 피를 내뿜은 뒤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그런 조선인들은 사람이 아니라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군은 11월11일 한 달 동안 점거했던 강화성에서 철수하며 관아를 불태우고 보물, 무기, 서적 등 약탈한 전리품을 갖고 결국 중국으로 떠난다. 

오랑캐들이 떠난 뒤 은밀한 장소에 숨겨두었던 왕실서적을 환안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정족사고에서 나갈 당시는 워낙 시급한 상황이었으므로 조정의 허락을 받기조차 어려웠으나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을 때는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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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부를 점령하자 왕실서적을 임시 피난처로 이동시킨다. 사진은 당시 왕실서적을 숨겨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등사 북문 아래 토굴.
강화 유수 이장렴이 '정족사고와 외따로 떨어진 깨끗한 곳에 토굴을 파고 선원각과 사각에 보관된 첵궤들을 임시로 봉안했는데 환안을 해야 하니 윤허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윤허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서리 조희영을 비롯한 7인의 사서들은 상까지 받는다. 

병인양요 뒤 정족사고에 보관되던 <조선왕조실록>이 지금의 규장각으로 가게 된 건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1905) 뒤 일본군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부터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은 뒤 조선에 대한 사실상의 식민지배를 시작한다. 이때 정족사고의 서적이 일제 통감부 도서관으로 옮겨졌고, 1924년 일제가 서울에 관립종합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세우며 다시 이곳으로 옮겨 놓는다. 경성제대는 광복 뒤 국립 서울대로 바뀌었고, 서울대 규장각이 계속해서 정족사고에 있던 왕실서적을 보관해오고 있다. 결국 일제에 의해 옮겨진 인천 강화의 유산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외지에서 머물고 있는 셈이다.

정족사고는 단층구조로 돼 있다. 전국의 다른 사고들은 모두 2층 구조인데 유일하게 정족사고만 단층으로 돼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고들이 보관 기능만 하는 반면, 정족사고의 경우 열람기능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취향당'과 같은 별관 역시 정족사고에서만 볼 수 있는 건물이다. 취향당 편액은 특히 영조임금이 전등사를 찾았을 때 직접 써서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현재 정족사고는 텅 비어 있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있는 사고임에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은 것도 과제로 지적된다.  

범우 전등사 주지스님은 "일제에 의해서 서울로 가게 된 것인만큼 제자리로 환원하는 것이 민족정신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본다"며 "강화도나 인천에 국립기록문화유산 보존시설을 설립해 원자리로 되돌려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세계책의수도 인천] 조선왕조실록 품은 왕실도서관 … 전국 최대 규모 인천, 활자의 시대를 열다 - 13. 전등사 정족사고와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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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강화도의 고찰 '전등사' 경내에 있는 '정족사고'는 전국 4대 사고(史庫) 가운데 가장 많은 왕실서적을 보관했던 전국 최고의 사고였다. 전등사 주지인 범우 스님이 지난해 복원한 정족사고를 가리키며 설명을 하고 있다.
<전등사 정족사고> 
실록·서책 등 4000여권 보관 
4대 사고 중 '가장 방대한 양' 
<조선왕조실록> 
'태조~철종 472년역사 기록 
'정족산본' 현재 규장각 보관 



인천 강화도에서 1236~1251년 판각해 150년 간 보관되다가 1398년 합천 해인사로 옮긴 '팔만대장경'의 '출판 인쇄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이어진다. 특히 청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등 전란을 겪으며 강화도의 진가를 확인하면서 여러가지 새로운 시책이 나온다. 그 가운데 하나가 왕조실록 등을 보관하는 사고( 史庫)를 강화도에 설치한 것이다.

중원의 새로운 강자인 청(淸) 나라는 명(明) 나라와 수교하던 조선에게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명과의 의리를 중시한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는데 이게 인조5년에 발발한 정묘호란이다. 이때 조선왕조는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처럼 강화를 임시수도로 삼아 대피한다. 몇 차례의 전란을 겪으며 강화도의 중요성을 알게 된 조선왕조는 강화도에 사고를 설치하기로 결정한다.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사서(史書)는 매우 중요하므로 전쟁이 나도 피해를 입지 않을 곳에 보관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몽골과 청나라의 침입을 방어한 강화도는 왕실의 중요한 서적을 보관하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1659년 강화 유수로 부임한 유심(1608~1667)이란 사람이 있었다. 선조의 외손자인 그는 1660년 강화가 지리적으로 외적의 침입을 피해기에 적합한 곳이라며 왕실 세보와 문적, 실록 등을 전등사 경내로 옮기는 게 좋겠다고 조정에 건의한다. 오랫동안 그의 보고서를 검토한 조정은 1678년(숙종4) '전주사고'에 보관했던 책을 정족산 사고에 보관하기로 결정한다.

'정족사고'는 전등사 경내에 위치했다. 정족사고를 품은 전등사는 정묘호란 때 한 차례 중수됐던 터였고, 이때 '장사각'을 지었으며 '선원보각'을 지어 '선원세보'를 비롯, 왕실관계 책들을 보관하기 시작한다. 1707년엔 강화유수 황흠이 장사각을 고쳐짓고 별관도 새로 만든다. 전등사는 정족사고를 관리하는 사찰로 공식 지정되며 1734년(영조10) 일종의 정부지원금인 선두포답의 곡식을 하사받기도 한다.  

정족사고에 보관한 책은 4000여책에 이르는 것으로 전국 4대 사고 중에서 가장 방대한 양이었다. 그 중의 백미는 역시 <조선왕조실록>이다. 

▲ 태조실록
국보 제151호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 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약 470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왕실서적이다. 정족산본 <조선왕조실록> 1707권 1187책은 현재 '규장각'에서 보관 중이다. 이 책은 정치, 사회, 외교, 경제, 군사, 법률,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으며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은 점이 인정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그도 그럴 것이 실록 편찬은 국왕이 서거하고 다음 왕이 즉위한 뒤 진행됐으며, 국왕이라도 마음대로 실록이나 사초를 볼 수 없었다. 사관들이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는 얘기다.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는 일찍이 조선 전기 서울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에만 있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며 춘추관과 충주·성주사고의 실록은 불에 타 없어지고 '전주사고'본만 남게 된다. 전쟁이 끝난 뒤 1603년(선조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4부를 재간행한다. 이때 간행한 실록은 춘추관 강화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등 5곳에 사고를 세워 나누어 보관한다. 실록은 이후에도 5부씩 간행돼 각 사고마다 한 부씩 보관되었다. 1678년 지어진 정족사고는 병자호란을 겪으며 전국의 사고가 상당한 피해를 입은 뒤 세운 것이다. 

정족사고에 보관한 <조선왕조실록>은 25대에 걸친 임금에 대한 실록으로 472년 간 조선의 역사를 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세월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중국의 <대청역조실록>의 296년보다 훨씬 긴 기록이다. 또 가장 풍부하고 다양한 콘텐츠 때문에 백과사전적 실록으로도 평가되기도 한다. 많은 대하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될 수 있는 것도 이같은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은 한국 인쇄문화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서로 강화도의 금속활자인 <상정예문>과 <증도가자>의 맥을 잇는 시대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2014년 복원을 완료한 정족사고는 큰 자물쇠로 굳게 닫혀져 있는 모습이다. 범우 주지스님의 도움으로 안으로 들어가자 '장사각', '선원보각'이라 쓴 현판이 눈 앞으로 확 다가온다. 현판을 올려다 보는데 갑자기 강렬한 태양광선이 얼굴을 뒤덮는다. 강렬한 한낮의 해를 등진 정족사고는 지금 500년 조선왕조의 기운을 내뿜는 중이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세계책의수도 인천] 고려 목판인쇄술 집대성 … 제작·이운 과정 미스터리 인천, 활자의 시대를 열다 - 12.합천으로 간 대장경의 불가사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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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1년부터 150년 간 강화도 대장경판당에 보관돼 있던 '팔만대장경'은 조선 태조 7년인 1398년 서울 용산강을 거쳐 합천 해인사로 이운된다. 당시 팔만대장경을 떠나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외포리선착장이 검붉은 노을에 물들고 있다.
<제작 ~ 완성 16년> 
나무 1만5000개·종이 60만장·옻액 400㎏ 
글 5000만자 … 연 5만명 필생·125만명 각수 

<1398년 강화도 → 합천 해인사> 
2.5t 트럭 100대·높이 3200m 분량 
엄청난 양 훼손없이 옮긴 점 경이 
바닷길·내륙 '이동경로' 안밝혀져  



1398년(조선 태조 7년) 5월 어느 날. 강화도 외포리선착장에 비가 내렸다. 빗줄기 속에서 수천명의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이었다. 얼핏 보면 불규칙해 보였으나 사람들은 한 줄로 겹겹이 서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머리 위엔 나무판 한 장 씩이 얹혀져 있었다. '팔만대장경'이었다. '대장경판당'에서 시작한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이 외포리선착장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오는 대장경함도 눈에 띄었다. 팔만대장경이 배에 실려지는 동안 사람들은 기도를 올렸다. 눈물인가, 빗물인가. 사람들의 얼굴을 타고 물줄기가 쉼 없이 흘러내렸다. 

강화도에 150년 간 보관하던 팔만대장경이 합천 해인사로 옮겨진 건 1398년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7년(1398) 5월 임금이 용산강에 행차해 강화 선원에서 운반해온 대장경판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당시 '해인사'로 옮겼다는 기록은 나와 있지 않으며 왜 강화도에 있던 것을 해인사로 옮겼는 지도 알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듬해인 정종 원년 '경상감사에게 명해 해인사의 대장경을 인쇄하는 승려들에게 공양했다'고만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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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의 경판 8만여장을 옮기려면 2.5t 트럭 100대, 4t 트럭 70대가 필요하다. 이런 엄청난 양을 어떻게 훼손하지 않고 해인사까지 옮겼을까. 내륙을 통해 옮긴 것인지, 아니면 바닷길로 옮긴 것인지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무슨 이유로 옮겼는가에 대한 것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확실한 것은, 당시 옮겨지지 않았다면 우린 2015년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대장경판 한 장의 두께는 마구리를 포함해 4㎝ 정도다. 모두 8만1258장인 대장경을 땅에서부터 쌓으면 높이가 3200m에 이른다. 한라산 1950m, 백두산 2744m 보다도 높다는 얘기다. 경판은 한 면이 아닌 앞뒷면에 모두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한 면에 새겨진 글자는 약 300자 정도. 따라서 글자를 모두 합하면 무려 5000만여자에 달한다. 한문을 아는 사람이 읽는다고 가정할 때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양은 4000자에서 5000자 정도이다. 그렇게 경판을 모두 읽으려면 3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팔만대장경 제작에서부터 완성까지 걸린 시간은 16년이었다. 16년 만에 8만여장을 판각할 수 있었다는 얘기는 고려가 이미 상당한 불교지식과 인쇄기술을 축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물리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어마어마한 인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학자들은 이때문에 팔만대장경이 강화도나 남해 두 곳에서만 제작된 것이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과 사람들이 참여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6년 만에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 불교지식을 집대성하면서 8만여장이나 판각하려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참여하기 전에는 사실상 판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중요한 이유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의 힘으로 물리치고, 전쟁으로 황폐해진 고려인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결집하기 위한 것인만큼 가능한 많은 백성들을 참여시켰을 것이란 추론도 가능하다.  

경판을 만들 수 있는 나무 역시 최소한 길이가 1m가 넘고, 굵기는 40㎝ 이상 돼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1m 길이에 40㎝ 굵기의 통나무를 가공해 생산할 수 있는 경판의 양은 7장 정도이다. 더욱이 옹이가 박혀 있거나 갈라진 나무를 버리고 나면 경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양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8만여장의 경판을 만들려면 통나무 1만5000개 이상이 필요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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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의 대장경 판당.
5000만자에 달하는 경판의 글씨쓰기(원본쓰기)를 담당한 사람들은 필생들이었다. 이들은 불교경전을 일일이 베껴쓰되, 글자체가 비슷해야 했다. 그렇다 쳐도 하루 한 사람이 1000자 정도 글씨를 썼다고 볼 때 원본쓰기에만 연인원 5만여명이 참여했다고 봐야 한다.

필사에 들어간 고려지(한지)의 양 역시 엄청났다. 앞뒤로 경판을 새겼으므로 8만여개의 경판에 붙일 종이는 2배인 16만장이 필요했다. 그러나 글씨를 잘못 쓰는 경우가 있으므로 서너배의 종이가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50만~60만장의 종이가 소요됐으며 원료인 닥나무를 삶고 빻아서 만드는 고려지는 한 사람이 하루 50장 정도를 생산할 수 있었다. 고려지 제작에만 연인원 1만여명이 들어갔다고 추정하는 이유다. 

판각은 더우기 고난도의 기술과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하루 한 사람이 새길 수 있는 글씨는 30~40자 정도에 불과하다. 5000만자를 새길 각수를 연인원으로 환산하면 125만명이 각수로 참여한 셈이다.  

마지막 작업은 옻칠이었다. 경판 한 장에 필요한 옻액은 5g 정도이다. 하루 채취량을 150그루 400g이라고 볼 때 대장경판 전체에 필요한 옻액의 양은 400㎏에 이른다. 연인원 1000여명이 동원돼야 가능하며 마구리인 구리장식에 참여한 사람을 더할 때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2015년 3월 어느 날의 늦은 오후 외포리선착장. 617년 전 팔만대장경을 떠나 보낸 선착장엔 무심히 오가는 배들과 그 위를 맴도는 바닷새들 뿐이다. 갈매기들의 날개 위로도, 카페리호의 마스터 위로도 외포리의 낙조가 내려 앉는다. 글자처럼 새겨지는 석양의 그림자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