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6일 월요일

한국의 승려: 명상하는 힘

'초록의 공명'이라고 지율 스님의 누리집에서 글 하나를 옮겨옵니다. 아이디 '초록'은 '초록의 공명'에 이 글을 소개하면서 "우리의 질문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돌아보며 옮겨 놓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저도 그런 질문을 저 자신에게 던져봅니다. 우리의 질문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그것을 명상하려고 합니다.

 

지난 2월에 '초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과 열흘 남은 공소 시효 종료일을 앞두고 ......내가 답해야 할 한가지 질문은 .....
나는 왜 번번히 나의 선택과 질문이 문제가 되는 세상에 놓여지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절망도 하나의 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때로는 그것이 더 깊고 고요한 희망처럼 보이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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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대법원 판결 후 LA 타임지 기자로 부터 인터뷰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현장으로 내려오겠다고 했습니다 언론의 혹독한 비판이 지나간 직후였기에 저는 망설였고,  한국의 산하를 인터뷰 한다면 안내하겠다고 했습니다. 인터뷰는 병산서원의 옥난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자님은 비스듬히 누운 채 많은 질문들을 했습니다.

특히 천성산 운동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집요 할 정도로 많은 질문들을 했는데 저는 시간을 지우며 간다고 질문들을 피했습니다. 마음을 천성산으로 옮겨가는 것도 힘이 들었고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4대강 문제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저러한 일과 속에서 잊고 있던 일이었는데  얼마전 기사를 보신분께서 번역하여 홈피에 올려주셨습니다. 외국인이 쓴 이 기사를 보면서 우리의 질문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돌아보며 옮겨 놓습니다.

















지율은 수도원에서 그녀의 사랑하는 산을 관통하는
장대 터널을 만들려는 정부 계획에 항의하는 행동을
감행했다.  그녀가 세상에 대해 배운 것이 그녀를 바꿀 것이다.

   - LA Times   2009년 5월 14일  한국 안동에서

 

 

 

 

 

한국의 승려 -자연을 명상하는 힘

잿빛 승복 속의 작은 여인은 불도저를 만났을 때 숲에서 명상의 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녀는 암자에서 주변의 숲만 거닐며 10년 이상을 고립되어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2001년 어느 봄날의 산책은 달랐다. 기계들의 난폭한 소리, 숲의 싱싱한 녹색과 대조를 이루는 튀는 색깔은 거의 그녀를 흐느끼게 만들었다.

“어떤 슬픔이 엄습해왔어요.”

불교식 신념에 따라 지율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알려진 52세의 (승려)는 회상했다.

“암자로 돌아가는 길에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약간의 조사 후에, 이 승려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국 정부는 암자 아래로 8 마일의 철도 터널을 뚫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신성하게 여기는 산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이었다.

지율은 항상 지구를, 품고 있는 것들을 기르는, 온화한 어머니로 봐왔다. 그녀의 눈에는, 상업적인 기차 여행에서 단지 몇 시간을 줄이기 위한 그런 손상을 입히는 것은 범죄였다.

조언자들은 지율에게 암자를 떠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 관료들을 골치아프게 만드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면서, 5피트 90 파운드의 승려는 수십 회의 가부좌 시위, 단식투쟁, 수백 마일의 삼보일배를 포함하는 혼자의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지율의 노력이 세상을 바꾸는 대신 지율을 바꾸려고 한 것은 세상이었다.

전직 영문학 교수이며 환경 잡지의 편집자인 친구 김종철씨는 “스님은 매우 외롭습니다. 그것이 나를 가슴 아프게 합니다. 만약 그분이 이 사회가 얼마나 사악하고 망쳐졌는지 알았다면 결코 혼자만의 세상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지율이 단순해서 현대적 삶(의 방식)에 준비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전 순진했어요.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거든요. 심지어 휴대전화와 컴퓨터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전 얼마나 큰 도전과 직면하게 될지 인식하지 못했지요. 제가 문 밖으로 한 발짝 나가자 거기엔 한 번도 보지 못한 큰 그림이 있었어요.”라고 말한다.

“문화가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요.”

수 년 동안 지율은 자신의 문제를 지키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계속 내면의 세계에 집중하며 자신을 잊고 말을 적게 하는.  그때 숲을 찢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 운명적인 산책 다음에 그녀는 천성산을 관통하는 고속전철을 건설하는 정부 계획의 세세한 부분을 공부했다.  

지율은 천천히 계획을 생각했다. : 카메라와 나침반을 갖추고 그녀는 야생 생물을 기록하고, 그 소리와 냄새와 느낌을 기록하면서 산을 자세히 알고자 했다.

그녀의 탐구대상은 심미적인 것 이상이었다고 말한다. 산의 생태계는 인간이 만든 침범에 의해 불가역적으로 변하게 될 12개의(많은) 시냇물과 24개소의 습지를 받쳐주고 있었다.
그녀는 기차의 진동에 의해, 한 때 정부에 의해 합법적으로 보호되었던, 야생생물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환경운동가들도 그 터널 계획에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지율도 처음에는 그들과 합류했다. 2002년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은 커지는 외침에 반응하여 당선되면 그 계획을 수정하겠다고 공약했다.


노무현이 이겼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일단의 불도저와 다이나마이트를 투입했다.

환경운동가들은 과격했지만 아마도 지율만큼은 아니었다. 2003년 그녀는 가는 곳마다 정부와 싸우기 시작했다. 그해 2월 그녀는 38일간의 단독 단식투쟁을 단행했다.

그 후 그녀는 네 번 더 단식투쟁을 단행했는데 매번 혼자였고, 소금, 물, 차만으로 연명했다. 한 번은 45일간, 한 번은 58일간 지속했다. 이들 단식투쟁 뒤에는 약 100일에 이르는 두 번의 단식투쟁이 뒤따랐다.

뒤에 지율은 다섯 명의 승려와 함께 부산에서 대구까지 175마일을 걸었다. “암자의 규율은 대문을 나가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규율을 깬 것이구요. 하지만 우리는 사태가 워낙 중하다고 생각했지요. 우리가 잃을 것이 무엇이겠어요?” 라고 그녀는 말한다.

(잃을 것이) 많았음이 밝혀졌다.

“전 바깥세상에서 조심하려고 노력했어요. 세상과 오랜 세월동안 단절된 후 전 많이 소심해져 있었어요. 저 자신의 성격을 극복하는 것이 고통스러웠어요. 전 적대시하지도, 선동하지도 않았어요. 비판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비판하든 그것이 진실에 입각한 것이라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지율은 말한다.

지율은 자신이 경멸의 대상임을 발견했다. 그녀들은 매체들의 거친 스폿라이트를 견뎌내야 했다. 인터넷 채팅방에서는 폭력의 위협들도 있었고, 추잡한 편지, 심한 조롱들도 있었다.

한편 어떤 이들에게는 환경운동의 영웅이기도 했지만 지율은 경찰들에게 들볶이고,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의 많은 동료 승려들로부터 배척당했다.  

정부는 그녀의 저항이 수백만 달러의 세금을 낭비한다고 했다. 2004년 정부는 그녀를 법정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검찰로부터 국가 업무를 방해한 죄로 기소되었다. 지난달 한국 대법원은 그녀의 시민불복종은 정당하지 않다고 기소를 받아들였지만 그녀가 폭력적이지 않았고 단식투쟁으로 건강이 좋지 않다고 실형을 선고하지는 않았다.    

지지자들은 지율이 정부가 이윤 추구를 위해 안이한 방법으로 일하고 있을 때 환경보호를 국가적 이슈로 만들도록 도왔다고 말한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부교수인 조은수씨는 “그녀는 분극시키는 존재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고집이 세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선구자로 봅니다. 긍정적으로 보였든지, 부정적으로 보였든지 관계없이 그녀의 일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한다.

친구들은 개인적으로 지율 (자신)이 변화된 존재라고 말한다.

“그녀는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지요. 한 사람에 의한 이런 사심 없는 행동이 그렇게 조롱당하고 무시당한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지요.” 라고 잡지 편집자인 친구 김(종철)씨는 말한다.

더 나쁜 것은 그녀의 캠페인은 그녀를 거의 죽일 뻔 했다.

2005년에 있었던 가장 최근의 단식에서 이 승려는 서울의 청와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절친한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녀는 지지자들도, 고위층들도, 정부 관리들도, 심지어 가족들도 보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그 단식투쟁을 관리들이 환경영향 평가를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한 다음에야 끝을 냈다.

그렇지만 승리는 잠시 동안이었다.

2006년 대법원은 지율과 다른 환경운동가들이 터널 공사를 중단시키기 위해 위험에 빠진 도룡뇽들을 언급하며 제소한 소송을 기각했다.  뉴스 매체들은 조롱하듯이 그녀의 수단을 ‘도룡뇽 소송’이라고 이름붙였다. 지금까지도 비판자들은 읊조리기를 계속한다. 어떤 블로거는 최근 대법원의 판결 후에 “그녀를 도룡뇽과 함께 묻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썼다.

천성산 터널은 내년에 완공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지율은 방문객에게 가죽으로 알려진 쓴 나물을 권했다.
“중들은 이걸 즐겨 먹지요. 이건 마늘 같은 맛이 나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16세기의 서원으로 가는 길에 휴식을 취할 겸 안동 시내에서 몇 마일 떨어진 흙길에 멈춰 선다.  그 뒤 서원의 누각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며 느리게 움직이는 물을 유심히 쳐다본다.
그녀가 마지막 단식투쟁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있을 동안 어느 친구가 그녀를 업고 이 장소에 왔다.

친구들은 정부가 관광과 경기부양을 추진하기 위해 어떻게 낙동강을 깊게 파서 운하를 만들 것을 계획하고 있는지 설명했다.

“제가 위태롭게 된 이 아름다운 강을 봤을 때 내 심장은 다시 박동치기 시작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그 작은 승려는 다시 그곳에 있다.

그녀는 35미리 카메라를 목에 걸고, 생각을 메모하면서, 정부의 어리석음을 증명할 강의 생명의 기록을 만들 목적으로 강을 따라 걷고 자전거를 탄다.

“이 모든 것이 습지로 이어져 있지요.  하지만 정부는 전진이란 이름으로 물을 빼버렸어요. 있던 그대로 둔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번에는 어떤 단식투쟁도 시민 불복종운동도 없다. 지율은 자신의 노트와 사진을 학교에 강을 보존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한 세미나 자료로 제공할 계획이다. 그녀도www.chorok.org라는 웹 사이트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천상)산 싸움에 대해 유감이 없다. 이날 오후 그녀는 따뜻한 태양 아래서, 단체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가운데, 평화로워 보인다.

“저의 부모님들은 이땅에서 호랑이와 곰을 본 세대이고 , 우리 세대는 늑대와 여우를 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다음 세대는 다람쥐와 토끼를 보는 행운을 누릴 겁니다.  이 변화들은 너무나 빨라서 100만년이 아닌 반세기에 걸쳐 일어난 일이지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가 이야기할 때 한 관광객이 서원의 잠긴 문틈으로 들여다보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문이 잠겼을 때 안을 들여다보는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왜죠?”라고 그녀는 물었다.


john.glionna@latimes.com
Times' 서울 지국의 박주민이 이 기사에 공헌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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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주소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korea-monk14-2009may14,0,6530756.story

 

South Korean monk: A meditative force of nature

Jiyul ventured from the monastery to take on a government plan for a train tunnel through her beloved mountain. What she learned about the world would change her.

 

Reporting from Andong, South Korea — The slight woman in the slate-gray monk's robes was taking a meditative walk in the woods when she happened upon the bulldozers.

She had spent more than a decade in solitude, leaving her rural monastery only for outings in the nearby forest. But this hike, on a spring day in 2001, was different.

The harsh whine of the machines, their garish colors contrasting with the lush green of the woods, almost made her weep.

"A certain sadness came over me," recalls the 52-year-old, who goes by the single name Jiyul in accordance with her Buddhist faith. "On my way back to the monastery, I decided I couldn't help but do something."

After some investigation, the monk discovered the unthinkable: The South Korean government was preparing to drill an 8-mile railroad tunnel beneath her monastery, piercing the heart of a mountain she considers sacred.

Jiyul had always viewed nature as a gentle mother who nourished the planet's residents. In her eyes, to wreak such damage merely to shave a few hours off a commercial train trip was criminal.

Mentors warned Jiyul against leaving the monastery, but she would have none of it. Displaying an iron will that vexed the bureaucrats, the 5-foot-tall, 90-pound monk waged a one-woman battle that included dozens of sit-ins, hunger strikes and arduous pilgrimages consisting of walking three steps and then lying down on the ground -- repeated for hundreds of miles.

But instead of Jiyul's effort changing the world, it was the world that would change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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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nk is very lonely. It really hurts me," says friend Kim Jong-chul, a former English literature professor and the editor of an environmental magazine. "If she had known how much this society has been corrupted and spoiled, she would never have come out from solitary."

It turned out Jiyul simply wasn't ready for modern life.

"I was naive -- I had been in isolation for so long, I didn't even know there were cellphones and computers," she says. "I didn't realize how big a challenge I was facing. Once I stepped through that door, there was this huge picture I had never seen before.

"The speed that the culture was moving at, it was too fast."

For years, Jiyul had kept her own counsel. For days on end, she said little, losing herself in meditation, focusing on the inner self.

Then came the grinding noise in the forest.

After that fateful hike, she pored over the details of the government project to build the bullet-train tunnel through Mt. Cheonseong.

Slowly, Jiyul devised a plan: Armed with a camera and compass, she would get to know the mountain intimately, taking hundreds of walks to d0cument its wildlife and record its sounds, smells and feel.

Her quest, she says, was more than aesthetic. The mountain ecosystem supported a dozen streams and 24 wetlands that would be irreversibly altered by this man-made intrusion.

She wanted to show how the wildlife on the mountain -- which had once been legally protected by l the government -- would be altered by the vibration of the train.

Other environmentalists were also critical of the tunnel plan, and Jiyul at first joined in their protests. Roh Moo-hyun, a candidate for president in 2002, responded to the growing outcry with a vow to redirect the project if elected.

Roh won. But as president, he sent in an army of bulldozers and dynamite.

Environmentalists were outraged, but perhaps none more than Jiyul. In 2003, she began to fight the government at every turn. She waged her first solitary hunger strike that February, for 38 days.

Over the years, she would stage four more hunger strikes, each time alone, subsisting on salt, water and tea. One lasted 45 days, another 58. They were followed by two that went on for about 100 days each.

Later, Jiyul walked 175 miles between the cities of Busan and Daegu with five other monks. "The rules of the monastery say we cannot go outside the main gate," she says. "We broke the law, but the stakes were so high, we thought, 'What do we have to lose?' "

Plenty, as it turned out.

"I tried to be careful in the outside world. I was really timid after so many years in isolation," Jiyul says. "It was painful to overcome my own personality. I didn't get hostile or agitated. No matter what the critics said, it's only important if it is based on truth."

Jiyul found herself the object of scorn. She endured a harsh media spotlight; there were threats of violence on Internet chat rooms, nasty letters, howls of derision.

Although she is considered an environmental hero by some, Jiyul says she has been harassed by police and ostracized by many fellow monks in the Jogye Order, the nation's largest Buddhist sect.

The government said her protests had cost taxpayers millions of dollars. They also brought her legal trouble. In 2004, she was indicted by federal prosecutors on charges of obstructing state business.

Last month, the South Korean Supreme Court upheld those charges, saying her methods of civil disobedience were "not reasonable." But the court did not order Jiyul to jail, noting that she was nonviolent and that her hunger strikes had left her in poor health.

Supporters say Jiyul has helped make environmental protection a national issue at a time when the government has been cutting corners in pursuit of profit.

"She is a polarizing figure," says Cho Eun-su, an associate professor of philosophy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Some people call her stubborn; others see her as a pioneer. But whether seen as positive or negative, her work has brought change."

Friends say privately that Jiyul is the changed one.

"She has become an outcast," says friend Kim, the magazine editor. "It is unprecedented that such a selfless act by one person could be so mocked and ignored."

Worse, her campaign nearly killed her.

In her most recent fast, in 2005, the monk lay near death in a house not far from the presidential mansion in Seoul, watched over by a few confidants. She refused to see supporters, dignitaries, government officials, even her own family.

She ended the hunger strike only after officials promised to conduct an environmental impact study.

But the victory was short-lived

In 2006, the Supreme Court rejected a lawsuit Jiyul and other environmentalists had filed in an attempt to stop the tunnel project, citing an endangered salamander.

The news media mockingly dubbed her legal salvo the "salamander suit."

Even now, the critics continue to crow. "Bitch!" wrote one blogger after the recent Supreme Court ruling. "It would be better to bury her with a salamander."

The Mt. Cheonseong tunnel is scheduled to open next year.

*

Jiyul offers a visitor a bitter plant known as kajuk.

"The monks like to eat this one," she says. "It tastes like garlic."

She stands along a dirt road a few miles from the central city of Andong, taking a break during a drive to a 16th century Confucian academy.

Later, sitting on an academy observation deck overlooking the Nakdong River, she scans the lazily moving water. While she was recuperating from her last hunger strike, a friend carried her piggyback to this spot.

Friends related how the government planned to turn the Nakdong into a deep-water shipping canal to promote tourism and boost the nation's economy.

"When I saw the beauty of this endangered river, my heart started pumping again," she says.

So now the tiny monk is at it again.

She is walking and biking along the river, a 35-millimeter camera hanging from her neck, jotting her thoughts in a pocket notebook, with the aim of creating a d0cument of river life that will demonstrate the government's folly.

"This all used to be wetlands, but the government drained the water in the name of progress," she says. "How beautiful it would be if they just left it the way it was."

This time there won't be any hunger strikes or civil disobedience. Jiyul plans to present her notes and photographs to schools for seminars on the importance of saving the river.

Still, she has no regrets about her mountain war. On this afternoon, she sits in the warming sun, groups of tourists swarming about her, and seems at peace.

"My parents saw tigers and bears on this land and my generation can see wolf and fox," she says. "But our descendants will be lucky to see squirrels and rabbits. It's all happening so fast, not over a million years but only half a century."

As she talks, she spots a tourist peering through a gap in a crooked door at the ancient academy.

"Why is it," she asks, "that people have such curiosity to look inside a place when the doors are closed?"

john.glionna@latimes.com

Ju-min Park of The Times' Seoul Bureau contributed to this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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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1막 2장            

12 “말도 안 되지요. 법리적으로 안 돼요. 도롱뇽을 대상으로 무슨 재판을 합니까. 생태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도 순전히 감(感)입니다.  제가 ‘도롱뇽’을 상대로 재판을 한 겁니다. 동물하고 재판을 했으니…(웃음)  (김종대 판사 2006.3.1 신동아 인터뷰)  

1. 일 년이나 천성산을 다녔지만 도롱뇽을 본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장인수 생태학 박사 현장 검증 증언시)

2. 도롱뇽으로 세간의 이목을 쫌 끌고 싶었을 뿐이겠지요. (고속철 본부장 허억준)

3. 천성산 여승 한분이 도롱뇽을 대신해 목숨 건 단식을 결행했고 무려 1백일을 버텼다고 합니다. 3촌 짜리 도롱뇽으로 인해 4천7백만 인구가 이 무슨 주책입니까. 도롱뇽이든 풍뎅이든 어떤 헛것으로 누군가 나와 곡예를 부리면 언제든 흥분해서 18조원 국가사업을 다시 중단시키고 수천 억 원 혈세를 덧없이 날려 보낼 사람들이 바로 한국인이고 그들이 선출한 정부입니다.  (중앙대 경제학 교수 김봉영)

4.고속철도는 도마뱀의 사촌인 도롱뇽을 위험에 빠뜨리므로 두말할 것 없이 반(反)환경적인가하는 겁니다.  도롱뇽 살린다며 날린 血稅는 누가 매웁니까 (동아사설)

5. 천성산 도롱뇽을 보호하는 데 2조5000억원이 들어갔습니다. 환경이 모든 것에 앞서야 한다든가 반미(反美)가 다른 가치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이념 이기주의로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도롱뇽을 이주시켜 공사 후에 다시 돌아오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청와대 박재완 실장)

6. 도롱뇽을 보호해야 한다며 무작정 천성산 터널을 뚫지 못하게 했던 것을 보며 고개를 저은 국민이 많습니다.. 환경단체가 상식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국민이 지지해주지 않습니다.  국민 지지없이 어떻게 환경운동을 하겠습니까. (조선일보 )

7. 누군가 도롱뇽을 멸종위기보호종인 것처럼 왜곡하고 나아가 ‘몇 사람의 잘못된 욕심이 대지를 거짓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울산대 생명학부 최기룡)

8. 천성산의 도룡농이 중요하다면 기차를 타고 빠른 시간 내에 이동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투데이 사설)

9. 천성산 터널 개통을 막는 지율 스님의 단식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천성산 도롱뇽은 소송주체가 될 수 없다'라는 법철학적 문제를 남겼습니다. (김지하 시인)

10 한마디로 미친 짓이었습니다. 말이 안 되죠. 도롱뇽이 어쩌고 하는 것은 경상도 말로 「포시라운」 소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도롱뇽을 무조건 살려야 합니까? 저는 반대입니다.  (문경시장  신현국)

1막 3장

12 “말도 안 되지요. 법리적으로 안 돼요.  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법률에 따른 선고로 갈 경우 환경단체가 100% 패소한다는 것을 예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김종대 판사 신동아 인터뷰)

1  “여성 한 분의 단식으로, 2만여 군민의 반대로, 몇몇 환경단체의 반대로 국책사업이 번번이 실패해 수십조 원의 예산이 낭비됐습니다. 낭비된 예산으로 기업을 만들었으면 30만명의 일자리는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이명박 대통령)

2. 지율스님은 내가 살렸습니다. 당시 지율스님은 그대로 뒀으면 분명 돌아가셨을 것이며 지율스님께서는 지켜야할 기득권이 아무것도 없었고 죽으면 천성산을 지키다 환경을 위해 죽었다고 후세에 길이길이 이름이 남게 될 판이었습니다. (한덕수 부총리)

3. 대한민국은 리더십을 만들 수도, 행사할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스님이 밥을 굶으며 버티면 터널 공사를 중단해야 합니다. (유시민)

4. 정부는 도롱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한 여승의 '로맨티시즘'을 살리느라 천성산 공사를 지연시켜 2조5000억원의 국고 손실을 초래했습니다.(서울대 윤리학과 박종효)

5. “자기편의 행패를 끔찍이 봐주던 노무현 정권은 건축비가 1억 원인 근사한 집 2만5000채를 지을 수 있는 돈을 억지 부린 여승에게 선물한 셈이죠. (월간조선 조갑제 )

6.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죄책감을 대속(代贖)하듯 환경운동해온 ‘천사’의 눈에는 자연만 보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보이지도 않습니까. 환경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순진무구한 천사의 이미지로 국민의 혈세를 축내기엔, 아무도 뽑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환경운동가들은 너무 많이 국정에 개입돼 있습니다. 그럴 바엔 환경당 또는 천사당을 만들어 정책을 내고 평가를 받는 게 훨씬 정직한 일입니다. (동아. 김순덕논설부사장 )

7. 원리주의자들은 종종 「생명 평화세력」이라는 간판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지율이라는 女僧(여승)은 천성산의 도롱뇽을 살리겠다며 「58일 단식」, 「100일 단식」을 벌였습니다. 이 여승이 단식을 할 때마다 국책사업이 중단되고, 청와대 수석과 환경부장관이 가서 매달렸습니다. 지율 앞에서 정책의 일관성, 「적법 절차」라는 원칙이 무너졌습니다.  (안상수 전 인천시장 )
8. 지율’이라는 승려가 ‘천성산의 도롱뇽이 죽는다’며 경부 고속철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소송을 내고 단식을 벌였지만 공사가 한창인 오늘날도 도롱뇽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죽은 것은 그가 걱정했던 도롱뇽이 아니라 공사 지연으로 인한 수천억 원의 국민 세금과 몇 년간의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동아 이규민 논설의원 )

9. 지율이라는 특정인이 단식이라는 감정에 호소하는 운동을 하자 정부가 졌습니다. (충남대 사회학과 박재묵)  

10. 이건 국력 낭비예요. 한 사람이 반대한다고 국책사업을 추진하지 못하다니요. 이미 결정된 국가정책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에 일종의 범죄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서울 법대 송근호)

2009년 7월 3일 금요일

그림책 읽어주기--다케사코 유코와 배화한일가족회

다케사코 유코(일본 치히로미술관 부관장) 씨가 송파어린이도서관에서 펼치는 '일본 그림책의 발자취' 전시회 일정에 맞추어 방문한다고 하여 2009년 7월 1일 오전 시간 송파어린이도서관에 갔습니다. 

 

특히 이 시간에는 야마구치 나오에 씨가 이끄는 배화한일가족회aiai(한국으로 시집 온 일본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다문화가족들의 모임, 배화여자대학교에 일본어 책의 작은도서관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가보지는 못했습니다.)의 작은 모임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모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직접 참석해보니, 다케사코 유코 씨가 대략 10쌍 정도의 엄마와 아기들을 대상으로 '그림책 읽어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보다는 조금 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일본의 '그림책 읽어주기'의 현장을 우연치 않게 참석하게 되었던 셈입니다. 아이들의 깜찍한 반응, 집중, 그리고 호기심을 끌어내는 다케사코 씨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송파어린이도서관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본 그림책의 발자취'는 사실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전시회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이 전시회는 일본 그림책의 발자취 즉 역사적 발전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둘째 이런 계기를 통해 한국 그림책의 역사적 발전을 반추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셋째 세계 속의 한국 그림책의 위상을 가늠해보고, 그 발전방향을 탐구하는 연구를 촉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지역사회 속에서는 그림책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일 것입니다.

 

오전에 있었던 다케사코 씨의 '그림책 읽어주기'의 모습을 몇 장의 사진으로 남겨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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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 가는 길

"진창이라는 게 뭐니? 그것은 우리 태양계의 일부야. 형형색색의 다양한 모습을 하고, 이슬에 번쩍이며, 미세한 식물의 뿌리들이 박힌 작은 돌멩이들이 가득한, 끝없는 우주의 작은 부분이야. 우리 둘에게 진창이 무슨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니? 없었어. 왜 그런지 아니? 우리 집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지 않기 때문이야. 얘, 사람은 하나를 가지면 다른 것을 가지려고 들게 되어 있어.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야.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에만, 넌 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어."

(샤일라 오흐 지음, 신홍민 옮김, <2인조 가족>, 양철북, 2009, 31쪽에서)

 

2009년 7월 2일(목요일) 아침 일찍 서둘러서 사북으로 가려고 중부고속도로에 올라섰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 단 일 미터도 꼼짝을 하지 않습니다. 십 분, 이십 분, 무려 한 시간 반이나 제자리에 꼼짝없이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 속에서 대형 트럭이 고속도로 길 위에 말 그대로 '드러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운전하던 차에서 불과 십 여 미터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 트럭을 운전하시던 분은 어떻게 무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길조심, 사람조심, 차조심, 그리고 미친 개에게 물리지 않도록 개조심도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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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그림책의 발자취

일본 치히로미술관 컬렉션 전시회  "일본 그림책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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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어린이도서관에서는 7월 1일(수)부터 16일(목)까지 "일본 치히로미술관 컬렉션-일본 그림책의 발자취" 전시회를 엽니다. 이 행사는 일본 치히로미술관과 송파어린이도서관이 공동 주최하며, 일본국제교류기금의 후원으로 이루어집니다.


사진 897_re이 전시회는 세계 최초의 그림책 전문 미술관인 <일본 치히로미술관 컬렉션> 중에서 일본 최고(最古)의 그림 두루마기인 8세기의 <에인가쿄>를 비롯하여 에도시대의 왕성했던 출판문화 속에서 나온 간행물, 서양의 근대 출판문화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다이쇼 시대의 ‘어린이를 위한 그림 잡지’에 이르기까지 일본 그림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입니다.
사진 918_re

 

또한 꽃과 어린이 그림으로 유명한 일본의 그림책 작가이자 화가인 이와사키 치히로의 작품도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전시회는 무료입니다. 많이들 오셔서 재미있게 관람하시길 바랍니다.사진 917_re

 

                 송파어린이도서관(www.spclib.or.kr)
  • 기 간 : 2009년 7월 1일(수) ~ 7월 16일(목)
  • 장 소 : 송파어린이도서관 3층 물동그라미 극장

사진 988_re











 


치히로미술관전시포스터


고성군 북스타트 여는 날

우리나라에도 '토성'이 있습니다.  목성, 다음에 있다는 토성 말고 '토성'.

 

우리나라의 '토성'은 바로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을 말합니다. 고성군 누리집(http://www.goseong.org/)은 이 '토성'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1910년 간성읍 토성면에서 1919년 양양군에 편입된 후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북괴 치하에 넘어갔다. 1954년 10월 21일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양양군에 행정권이 인수되었다가, 1963년 법률제1178호에 의거 고성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 사진리(沙津里)와 장천리(章川里)가 속초시로 편입되었다."

 

토성이 어디어디로 편입되었다가, 넘어갔다가, 인수되었다가, 편입되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행정구역 상으로도 '토성'이 우여곡절이 꽤나 많았던 지역입니다.

 

이 '토성'에 지난 2007년 12월 28일 '토성공공도서관'이 개관하였습니다.  토성공공도서관은 사업비 15억원을 투입 토성면 천진리 145-1번지 외 2필지에 지상 2층, 연면적 879.83㎡ 규모로 지어졌으며 1층에는 유아열람실과 종합자료실, 시청각실, 노인ㆍ장애인 열람실이 있어 도서 대출과 각종 자료를 열람할 수 있고 2층에는 일반인열람실, 학생열람실, 디지털 자료실 등을 설치하였다는 기사가 났었습니다.

 

이 '토성공공도서관'에서 2009년 6월 12일(금요일) 오후 1시 북스타트 선포식이 열렸습니다. 이 날 저는 아침 10시에는 동해시 묵호동주민센터에서 열렸던 북스타트 선포식에 참석했다가 고성군 토성면으로 올랐갔던 것입니다. '토성공공도서관'에서 열렸던 북스타트 선포식 소식을 전하여야 하는데, 이렇게 늦었습니다.

 

이 날 멀리 제천에서 올라와 참석하였던 백영숙(제천 내보물1호도서관 관장)은 이런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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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색 바다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 고성군에서 북스타트 선포식이 있었습니다.

지난번 방문 땐 공공도서관의 느낌이 물씬 풍겨 아가들이 오기 쉽지 않겠구나 생각했는데 오늘은 도서관 출입구부터 달라져 있었습니다. 알록달록한 풍선꽃들과 무지개빛 풍선들이 아가들의 얼굴을 더욱 환하게 만들었고, 토성과 간성 도서관의 사서선생님들과 자원활동가 여러분들께서 꾸며놓은 다양한 볼꺼리들이 엄마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습니다.

작은 인구에 집들마저 드문드문 있는 곳이 많아서 아가와 엄마들이 얼마나 올 수 있을까하고 모두들 많이 걱정했지만 걱정은 괜한 일이었습니다. 엄마들만 헤아려도 70여명 이상이 참석하셔서 도서관 개관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북적인 하루였답니다. 선포식이 이루어진 시청각실이 비좁아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있어야만 했던 엄마와 아가들도 있었습니다.

선포식을 축하하기 위해 토성어린이집 친구들이 사물놀이와 율동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작은 친구들의 ‘얼 ~ 쑤 ! ’ 하며 시작된 사물놀이는 우리들의 흥을 더욱 돋구었으며, 엉덩이를 씰룩쌜룩 흔들며 춤을 추는 아이들의 모습에 모두들 행복한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1부 행사가 마무리 된 후에는 아가들을 위한 베이비 마사지 시간이 있었습니다. 전문가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우리 아가들이 건강하게 쑥쑥 자랄 수 있도록 엄마들의 정성 과 사랑이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예쁘게 장식 된 포토존에서는 아가와 엄마들의 멋진 포즈를 즉석 사진으로 찍어주었으며, 북스타트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는 자원활동가분들의 정성스러운 안내가 있었습니다. 또한 잔치에 빠질 수 없는 다양한 먹거리들로 풍성한 잔치를 치룰 수 있었습니다.

작은 지역이라 영유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찾기 어려운데 북스타트가 고성지역에 아가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로 자리매김하여 아가들이 책과 함께 건강하고 바르게 성장 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제천 내보물1호도서관 백영숙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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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제 똑딱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몇 장 더 붙여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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