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28일 화요일

김종철-대지로 회귀하는 문학

김종철 선생이 2010년 3월 25일 오후6시 동대문도서관에서 열렸던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포럼 '통찰과 연대' 때의 강연록을 <녹색평론> 2010년 9-10월 통권 제114호 에 실었다. 당시 사무처의 간사들과 함께 이 자리에서 강연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수첩을 넘겨보니, 거칠게 메모해놓은 것이 있었다. 당시 강연 제목은 '대지를 떠난 문학'이었으나 <녹색평론>에 게재할 때에는 '대지(大地)로 회귀하는 문학'이라고 바뀌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종철 선생은 이시무레 미치코의 <슬픈 미나마타>(원제: 고해정토)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당시 나는 그 강의를 들으면서 내 식으로 메모를 남겨놓았다. 그 메모를 오늘 다시 넘겨 본다.

 

"문장이 나와야 한다. 결국 기록이다. 중요한 것은 민중의 기록이다."

"구체적인 육성, 의식의 내면"

"근대가치로는 세계를 구원하지 못한다. 탈근대처럼 지식인의 논리는 생명력이 없다. 문제는 풀뿌리 민중의 탈근대/ 비근대이다"

"행복: 물과 흙과 공기와 신체적으로 접촉하면서 사는 것"

"문학은 궁극적으로 주술사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근대는 원죄다, 근대는 홀로코스트다. 모든 생유들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키고 인간을 인간에게서 분리시킨다. 그것이 근대다."

"비근대적인 언어로 산하의 의미, 아름다움을 말해야 한다."

"강이 없으면 시가 없다."

"절대로 출구는 없다. 정말로 근원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시인은 근본적으로 질문이다."

 

김종철 선생의 강연록 원문을 <녹색평론> 누리집에서 그대로 옮겨놓는다. 길다. 그래도 좋다. 아래 사진은 당시 강연을 들으면서 메모했던 수첩의 한 쪽이다.

 

 

대지(大地)로 회귀하는 문학


 

 제가 오늘 일본소설 한권을 가지고 왔는데, 이 소설을 중심으로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슬픈 미나마타》라고 번역되어 나온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고해정토(苦海淨土)’예요. 이시무레 미치코(石牟?道子)라는 작가가 쓴 소설입니다. 참 좋은 작품인데,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읽히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이 작가야말로 ‘새로운 작가’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어요.


근대의 일본문단에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많이 배출되었죠. 그런데 모두 일류대학 출신의 엘리트 작가들이에요. 한국문학의 경우도 대학출신 작가들이 적지 않지만, 일본의 근대문학은 거의 완전히 대학 출신, 그것도 소위 명문대학 출신들에 의해 주도돼왔어요. 이것은 근대 일본문학의 큰 특징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알게 모르게 지식인 중심의 이야기, 엘리트 특유의 세계인식이나 자의식이 지배하는 문학이 주류를 형성해왔다고 할 수 있어요. 나쓰메 소세키는 말할 것도 없고, 이름 있는 작가들이 거의 대부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비하면 이른바 사소설이냐 아니냐 하는 구별은 부차적인 거예요. 거의 모든 작가들이 극히 엘리트적인 언어, 서구화된 논리와 이성적인 언어로 세상을 보고, 인간경험을 보는 공통적인 성향을 드러냅니다. 반서구적인 논리를 펼 때도 마찬가집니다. 전통적 일본정신의 부활을 외치면서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죽을 때 군국주의 프러시아 장교복 차림이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입니다. 미시마는 천황주의자이되 굉장히 서구화된 엘리트였습니다.


일본문학의 이런 경향은 지금도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령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높이 평가하는 나카가미 겐지(中上健次)나 재일조선인 작가들은 예외인 듯하지만, 따져보면 그들도 결국은 엘리트 작가예요. 좀더 주변부의 소외된 삶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비판정신에 있어서는 돋보인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비판적 정신 역시 엘리트의 언어와 논리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엘리트 문학이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봐야지요. 문제는 이게 시효가 끝났다는 거예요. 사실, 일본이 1960~70년대를 거치며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한 이후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계보를 이어받는 엘리트 작가들의 임무는 사실상 끝났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고도경제성장에 의해서 소비주의문화가 만연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엘리트 작가들의 진지한 작품이 설 자리가 없다는 단순한 얘기가 아닙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고도산업사회가 된 상황에서 근대 초기의 비판적 지성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보면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사의 큰 역설의 하나는 서구화·산업화를 죽을 힘을 다해서 성취해낸 순간 그 결과가 바로 수습하기 어려운 재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충격일 수 있는데, 어쩌면 서구에 대한 열등감을 심하게 앓아온 동아시아 사회가 특히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이 제구실을 하자면 이런 역설을 직시해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죠. 근대문학의 오랜 습성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우리가 문학이라고 생각해왔고, 문학이라고 배워왔던 모든 것이 사실은 근대주의 논리에 충실한 사고방식을 근저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는 오히려 이런 맥락에서 진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을 거예요.


길게 말씀드릴 시간은 없습니다만, 하여간 이런 상황에서 예외적이라고 생각되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시무레 미치코예요. 나쓰메 소세키가 일본근대의 엘리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한다면, 이시무레는 그 근대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묻는 작가이고, 그런 의미에서 고도성장 이후의 대표적인 작가가 아닌가 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말했을 때, 그는 사실상 문학다운 문학은 이제 끝났다고 보았습니다. 아마 그가 이시무레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 문학의 역사적, 문명사적 의의를 간파할 시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좀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시무레의 작품을 다 읽지는 못했어요. 일본어 실력이 짧아서요. 현대 일본어로 쓰기는 하지만, 기층민의 언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대략 분위기와 느낌으로 짐작하는 정도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영문학 공부한답시고 한 게 그런 식이었어요. 대충대충 읽었어요. 순전히 글자로만 배운 외국어를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어요. 하층민의 구어 같은 건 정말 파악하기 어렵죠. 그렇지만 기분이 통하면 알아볼 수 있어요.


현재 이시무레의 작품은 몇편이 서양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서양인들 중에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 꽤 있어요. 그런데 그런 서양인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일본 독자들도 사실은 별로 믿을만한 독자들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런 독자들은 대개 이시무레를 공해문제에 민감한 작가 정도로 보고 있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실은 전혀 그렇게 보아서는 안될 작가이거든요.


아까 이 소설의 제목이 원래 ‘고해정토’라고 말씀드렸죠. 한국의 요즘 젊은 세대가 한자를 거의 모르니까 출판사들이 책 제목에 한자 쓰기를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제 생각엔 한글전용정책의 후유증이 심각한 것 같아요. 왜 귀중한 한자 유산을 다 버리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한자를 옛날처럼 기본적인 것이라도 익히면 적어도 동아시아 사람들끼리는 필담으로 다 의사전달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동아시아의 이 귀중한 문화적 공통유산을 우리만 내버리는 것 같아서 정말 아쉬워요. 아까 얘기로 돌아가지요. 어쨌든 ‘고해정토’라고 한글로 써놓으면 무슨 말인지 모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책을 출판하면서 ‘슬픈 미나마타’라고 이름을 고친 거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제목을 변경함으로써 이 작품이 갖고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완전히 놓쳐버렸어요. 이것은 공해문제를 주제로 한 소설도, 환경보호를 얘기하는 소설도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더 깊은 얘기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미나마타, 근대의 표상


물론 ‘슬픈 미나마타’라는 한국어판 제목에 드러나 있다시피, 이 소설은 ‘미나마타’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나마타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떠들썩하게 알려진, 근대적 산업활동으로 인한 미증유의 재앙이었습니다. 굉장히 큰 충격과 센세이션을 일으킨 역사적인 사건이죠. 사실 기본적으로는 아직도 미해결인 상태로 진행 중인 사건이에요. 1950년대 말에 터져나왔는데, 일본 규슈에 있는 구마모토(熊本)현 남단에 조그만 항구도시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한가로운 어촌이었다고 합니다. 그곳이 미나마타예요. 미나마타(水?)라고 할 때, 마타(?)라는 한자표기는 아마 일본에서만 쓰는 것 같아요. 우리 옥편에는 안 나옵니다. 일본어로 ‘마타’라는 건 강줄기나 바다 물길이 갈라지는 곳을 뜻한다고 해요.


미나마타사건은 대부분의 아시아 사람들이 대체 산업화가 뭔지, 산업문명이 뭔지, 채 실감도 하기 전에 터져나온 가공할만한 산업재해였습니다. 그 미나마타의 바다를 끼고 조업하고 있는 일본질소비료회사가 수십년 동안 산업폐기물을 그 만(灣)으로 유출시켜왔던 거예요. 화학비료를 만드는 공정 중에서 나오는 유기수은을 그냥 바다에 방류해왔던 거죠.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것이 점점 쌓여서 그 연안바다에 사는 해양생물들의 생체 속에 계속 축적이 되었고, 그걸 일상적으로 먹었던 어부들, 주민들 그리고 짐승들이 그 독성물질의 피해를 입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마을의 고양이들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이상하게 몸을 비틀고 춤을 추면서 바닷물에 텀벙 빠져 자살을 하는 일들이 속출하더니, 드디어 사람들에게 언어장애가 생기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중추신경이 마비되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그런 사태들이 벌어진 겁니다.


1956년에 비로소 그게 모두 유기수은중독 증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것을 질소비료회사와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까지는 또 많은 세월이 걸렸습니다. 15년이 넘게 걸려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개개인들에 대한 배상문제를 두고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재판을 해야 했어요. 그게 실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항상 이렇습니다. 병든 환자나 그 가족이 비료공장의 수은 때문에 그 병에 걸렸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사실 없어요. 정황증거일 뿐이죠. 사람이 병에 걸리는 원인은 수없이 많아요. 같은 환경, 같은 조건 속에서 살아도 체질이 다르면 병에 안 걸릴 수도 있어요.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기업주나 정부는 늘 이런 근본적인 약점을 파고들어서 오리발을 내미는 게 아주 상습화되었어요. 명백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증명하기가 어려우니까 재판과 배상문제가 한없이 질질 끄는 거예요.


국가와 기업은 오리발을 내미는 게 뿌리깊은 체질이에요. 어디서나 그래요. 이런 사건들이 세계 전역에 걸쳐서 지금도 흔하게 벌어지고 있어요. 늘 피해자들은 당하기만 하고, 당연히 받아야 할 보상을 받지도 못하고, 받더라도 너무나 늦게 그것도 쥐꼬리만한 보상금을 받는 게 고작이에요. 산업사회라는 시스템은 이렇게 늘 약자들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단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는 괴물입니다. 


어쨌거나 미나마타사건은 시기적으로도 선례가 없는 탓도 있고, 사진으로 보아도 그 환자들의 모습이 너무 비참해서 뉴스를 보는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고, 세계 각지에서 저널리스트들이 몰려들어와 취재도 하고, 아주 저명한 사진작가들도 장기간 상주하면서 기록사진을 찍고 그랬습니다. 저도 학생시절에 이 뉴스를 듣고, 사진도 보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젊었을 적에 들어서 그런지 그 인상이 강하게 뇌리에 박혀서 지금도 산업재해라고 하면 이 미나마타부터 먼저 떠올라요.


일본질소비료공장이 창립된 것은 1901년이라고 합니다. 그 자회사가 예전에 우리나라에 있었어요. 식민지 조선 땅에 있던 흥남질소비료회사예요.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라는 사람이 설립한 회사죠. 압록강을 막아서 물길을 바꾼 다음 댐을 세워서 수력발전소까지 만든 게 바로 이 사람이에요. 어떻게 보면 아주 스케일이 컸던 사람이죠. 아마 당시에 물길 바꾸면서 별로 조사 같은 것도 안하고 밀어붙였겠죠. 이명박의 대선배인 셈이죠.(웃음)


그런 사람이 조선 땅에 또 질소비료공장이라는 거대공장을 세웠어요. 그 공장의 정식명칭은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로 돼있어요. 1927년에 함경남도 함흥군 운전면 운남리 1번지에 자본금 1천만엔으로 설립이 되었습니다. 원래 어촌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죠. 그런데 이 회사가 용지를 매수할 때 경찰관 입회하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겠어요?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얘긴데, 작가가 조사를 해보니까 1937년에 일본질소비료공장에서 편찬한 회사 역사책이 있었어요. 그걸 뒤져보니까 그렇게 나와있다는 거예요. 역사책이라는 것은 아주 거짓말은 못하잖아요. 왜곡하더라도 어느 정도 기초적인 사실은 적을 수밖에 없죠. “경찰관 입회하에 이루어졌다”라는 말은 결국 주민들의 저항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죠. 당시 공장부지가 들어서던 땅은 조선인 가옥 30호 정도가 있었고,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거의 자급자족하면서 살고 있었겠지요. 바다에서 고기 잡고, 땅에서 작물을 길러서 말이죠. 이시무레는 조선사람들의 토지 매수에는 여간 복잡하고 성가신 문제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얘기지요. 거의 틀림없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주민들을 쫓아냈겠지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게 없어요. 


그러니까 용산참사의 역사는 뿌리가 깊어요. 국가와 결합한 자본가에 의한 토지수용 때문에 풀뿌리 민중이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상황 말입니다. 그렇지만, 주류 역사에서는 이런 문제가 늘 스쳐지나가는 에피소드에 불과해요.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인데도 그래요.


지금도 그런데, 당시 식민지 상황에서 함경도의 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이런 일이 무슨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었겠어요? 그 당시 언론이라는 것도 제약이 많았을 것이고, 작가라고 해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고달픈 시절이었으니까요. 세월이 많이 흐른 뒤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누군가가 그것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다시 음미해본다는 게 중요하죠. 미나마타사건을 다루는 도중에 식민지 조선 벽지의 민초가 겪었을 운명을 이 작가가 떠올려보는 것은 그게 본질적으로 미나마타 백성들의 운명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광독사건과 다나카 쇼조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시무레의 이러한 근대문명 비판에는 중요한 사상적 배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걸 작품 속에서 작가 자신이 몇번이나 언급하고 있어요.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일본이 근대국가체제를 굳혀가던 지금부터 100년 전쯤, 러일전쟁 무렵에, 아시오 구리광산(足尾銅山) 광독사건(鑛毒事件)이라는 게 있었어요.


근대적 산업을 일으키고, 또 전쟁까지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구리는 매우 요긴한 광물이었습니다. 다양한 용도로 쓰이지만, 무기를 만드는 데도 구리는 필수적이죠. 나중에 일본의 큰 재벌이 된 후루카와(古河)라는 사람이 당시 일본정부의 허가를 받아 구리광산 채굴권을 독점적으로 확보합니다. 옛날부터 구리를 채굴하던 광산이었지만, 이제는 대규모 근대적 광산시스템을 도입한 거죠. 그런데 구리가 독성이 굉장히 강한 물질이잖아요. 대량생산체제가 갖추어지자 광산 아래 마을들에서 아우성이 일어납니다. 구리의 생산과정에서 유출된 독성물질로 농작물이 말라 죽고, 병들고, 게다가 한번씩 홍수가 나면 범람하는 물을 통해서 그 광독이 인근 지역까지 퍼져서 광범위한 재해를 유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재해도 당시 전쟁을 수행하고, 빠르게 산업시스템을 건설하던 일본 전체의 분위기 속에서 쉽게 묻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고 지금도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그것은 한사람의 지독한 투쟁 덕분입니다.


다나카 쇼조(田中正造)라는 인물인데, 혹시 들어보셨어요? 일본 근대사상사에서 꼭 언급되는 인물인데,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에요. 요즘 동아시아공동체에 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더 깊이 공부해보아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싫으나 좋으나 근대적 국민국가라는 틀을 넘어가야 할 것인데, 그러자면 민족이라는 테두리를 떠나서 정말로 존경할만한, 보편적인 가치를 위해 헌신한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기억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해요. 


다나카 쇼조는 국회의원까지 지낸 인물입니다. 초기에는 유학을 신봉하는 집안에서 유교적 윤리를 체득하고 성장한 사람입니다. 본래 성격이 불의를 참지 못하고, 의인적인 면모가 강했다고 그래요. 청년시절에 이미 마을에서 관리들의 부당한 행패, 부조리한 행정 같은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저항하다가 옥살이도 몇차례나 했어요. 그런데 옥살이를 하면서 기독교를 발견했어요. 우연히 성서를 읽은 다음에, 읽고 또 읽고서는 크게 감복하고 평생 두터운 기독교신앙을 갖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교와 기독교라는 두개의 세계관이 한 인물 속에서 혼합된 셈이지요.


그런 양반이 아시오 광독(鑛毒)사건을 물고 늘어져요. 죽을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국회의원이 된 다음에 국회활동 전부가 이 문제를 거론하고, 해결책을 강구하라고 정부에 요구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당시의 분위기에서 굉장히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쟁을 그만두라는 얘기이고, 근대국가로 가는 길을 포기하라는 요구일 수도 있으니까요.


당시 일본 국회는 제국의회였어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나라의 주인이 천황이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는 제국헌법에 의거하여 성립한 국회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엉터리 헌법이라 하더라도, 헌법은 헌법이에요. 헌법이라는 이름을 듣자면 최소한의 합리성과 논리를 갖추고 있어야 하거든요. 다나카 쇼조는 바로 이런 헌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주권은 천황에게 있다고 명시돼 있지만, 신민(臣民)들의 삶을 편하게 하고, 신민들의 생명권을 보장한다는 게 헌법의 요지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는 이 제국헌법의 논리에 근거하여 물고 늘어져요. 그는 일본국민이 모두 하루도 빠짐없이 헌법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시오 광독사건은 백성을 사랑하시는 천황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위반이다, 그러니 책임자를 처벌하고 구리광산을 폐쇄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도저히 이런 주장을 들어줄 수 없죠. 정치적인 영향력이 큰 광산재벌의 경제적인 이해관계도 있지만,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곳이었으니까요.


이른바 국익과 민익(民益), 즉 국가의 권리와 민중의 권리 사이의 대립이 이 다나카 쇼조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 극한적으로 드러난 셈이죠. 그러다가 결국 국회에서 자기 뜻이 통하지 않으니까 국회의원직을 내던져버려요. 그리고 곧장 광독 피해를 당하고 있는 마을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정부에서는 이 사람이 하도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하니까 편법을 써서 광산 아래 마을들을 국가에서 수용을 해서 저류지(貯留池)를 만들려는 계획을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광산의 독성물질을 가두어두겠다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결국 마을은 수몰을 면치 못합니다. 그래서 다나카 쇼조는 수몰 위기에 처한 마을로 직접 들어가 거기서 버티면서 마을을 철거하려는 당국에 맞서 싸워요. 그리고 최후까지 버티다가 그 마을에서 결국 생애를 마칩니다.


그런 투쟁 중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1901년 12월 10일, 육십이 된 나이에 천황한테 직소(直訴)를 했어요. 일본에는 아주 예전부터 직소라고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해요.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공의(公義)를 위해서 봉건영주라든지 번주(藩主)와 같은 통치자에게 중간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접 아뢰는 행동이지요. 이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결국 통치자나 그의 참모들의 부당한 처사를 지적하는 일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통치자를 비판하는 행동이거든요. 그래서 직소를 듣고 그 내용이 합당한 경우에는 일을 바로잡은 뒤에도, 통치자는 직소를 올린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는 거예요. 그게 일본의 오래된 전통이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하극상이라고 간주한 거지요. 그런 전통을 다나카 쇼조가 모를 리 없지요. 아닌 게 아니라, 나중에 밝혀진 거지만, 그는 직소를 결행하기 전날 가족 앞으로 유언장 비슷한 것을 작성해두었어요. 그러고는 마침 천황의 행차가 예정되어 있는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천황의 수레가 다가오자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가 상소문을 들이밀었어요. 순간적으로 경비병과 뒤엉켜 길바닥에 나둥그러졌어요. 이게 언론에도 보도되고 세상이 발칵 뒤집혔어요. 천황도 물론 그 현장을 보았겠지요. 나중에 전직 국회의원인데다가 사사로운 행동도 아니라는 게 확실하니까 천황이 특별히 용서를 해서 처벌은 면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중 일이고, 원래 직소를 결심했을 때 그 자신은 죽음까지도 각오했던 거죠. 대단한 사람입니다.


글도 많이 남겼습니다. 전집이 수십권 정도로 정리돼 나와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사실 우리가 보면 별것 아닌 인물들도 온갖 기록을 다 모아서 전집도 만들고, 사상가로 기리고 그러잖아요. 그러나 이 다나카 쇼조는 지금 읽어보아도 대단해요. 글이 힘이 넘쳐요. 대사상가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아요. 전문적인 문필가도 아니고, 책상에 정좌해서 글을 쓸 여유가 있는 생애를 보낸 사람도 아니지만, 투쟁의 현장에서 그때그때마다 기록하고, 매일매일 일기를 충실히 썼던 것 같아요. 


그가 남긴 글을 보면 그는 이미 근대문명의 궁극적인 방향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대로 간다면 파국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던 게 분명해요. 그리고 근대국가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산업자본과 결합되어 민초들에게는 혹독한 폭력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그는 그러한 재앙을 막기 위해서 일본국민이 전부 매일 헌법을 읽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이미 그때 근대문명의 핵심적인 어둠을 꿰뚫고 있었어요. 그의 생각으로는 “참다운 문명은 산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고, 마을을 파괴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래의 문명을 야만으로 돌리는” 근대문명은 실은 “허위 장식이며, 사욕(私慾)이며, 노골적인 강도(强盜)”라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보다도 몇십년이나 앞서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이런 훌륭한 선각자가 있었기에 나중에라도 그 정신을 잇는 작가가 출현할 수 있는 것이지요.



민중의 역사와 기록


여기서 조금 다른 얘기지만, 누구랄 것 없이 우리는 기록들을 잘 안해요. 아까 흥남질소비료공장 얘기를 했지만, 그런 사건이 우리 근현대 역사 속에 무수히 존재해왔을 거란 말이에요. 그렇지 않겠어요? 지금은 하도 많이 겪었으니까, 사람들이 그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요. 물론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지만, 하여튼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발전이니 진보니 하는 게 구체적인 민중의 현실에서는 풀뿌리공동체의 파괴로 나타난다는 것은 대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저 식민지 조선, 시골마을에 어느 날 난데없이 비료공장을 짓는다면서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나가라고 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의 심경은 어떠했겠어요? 그런 날벼락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때 그런 상황에 처했던 사람들에 관한 생생한 기록이 없어요. 문학의 종언이다 뭐다 그런 데 신경쓰지 말고, 글 쓰는 사람들이라면 우선 그런 얘기들을 기록하는 데 충실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여기가 작가회의 회원들이 모인 자리니까 한마디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지금은 ‘한국작가회의’라고 하지만, 원래는 ‘민족문학작가회의’라고 불렀잖아요. 그런데 명칭을 변경할 때에는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한 나라의 중요한 작가, 시인, 평론가들의 회의체라고 하는 단체가 자신의 명칭을 바꾸면서 투표를 해서 바꾼다는 게 말이 되는 얘긴지 모르겠어요. 저는 참석해본 적도 없고, 작가회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명색이 문학인들의 조직이라면 역사적인 문장이 나와야 되지 않겠어요? 이 시점에서 왜 ‘민족문학’이라는 이름은 더이상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당당한 문장으로 논쟁을 하는 게 옳지, 그냥 손쉽게 투표라는 형식을 빌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문학인들이 할 행동은 아니라고 봐요. 우리는 역사적인 문헌을 남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자각이 중요해요. 결과적으로 어떤 명칭이 되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기록과 문건을 너무 등한시한다는 게 문제예요. 지금에 와서 왜 민족이라는 말이 어색하거나 부적합하다는 느낌이 드는지, 그 상황을 깊이있게 점검하고 토의한다는 게 중요하잖아요.


바로 얼마 전에, 문학예술위원횐가 하는 데서 작가회의에 대해서 말도 안되는 답변을 요구했을 때도 그래요. 촛불집회 참석여부를 문제삼아 지원금을 지급하겠다느니 말겠다느니 하는 행위는 물론 유치하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지요. 그렇지만 이걸 그냥 욕이나 하고, 화를 내는 것으로 대응해서는 안되잖아요. 품위있는 글을 써야죠. 그래서 이 시점에서 이 나라의 양식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을 표현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둬야죠. 시인은 시만 쓰고, 소설가는 소설만 써야 한다는 생각은 착각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착각이에요. 좋은 시인, 좋은 작가는 잡문을 쓰는 사람입니다. 노신(魯迅)을 보세요. 거의 전부가 잡문이잖아요. 노신의 글 가운데 우수한 창작은 몇편 안되잖아요. 우리가 노신을 보면서 감탄하고 배우는 게 다 그의 ‘잡감문(雜感文)’ 때문이에요. 이 잡감문이 아니었다면 노신이 중국의 혼돈과 어둠에 맞서서 그처럼 가열하게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기록이 없으면 결국 역사가 없는 민족인 거예요. 《조선왕족실록》 가지고 너무 좋아할 것 없어요. 중요한 것은 기록된 ‘민중의 역사’가 조금이라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5년 전에 학교에서 나와버렸지만, 영남대에 있는 제 동료들이 ‘민중생활사’라는 기획단을 조직해 가지고 몇년간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근현대의 우리나라 민초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걸 재구성해보려고 노력해왔어요. 더 세월이 지나면 완전히 망실돼버리니까 지금 고령인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녹취를 한 거죠. 과거에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이발사도 하고, 유랑극단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동대문에서 설렁탕을 팔기도 했던 사람들의 생애를 채록해보려는 작업이지요. 민중의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은 그런 구술을 통한 역사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 녹음된 것을 풀어서 지금 책을 간행하고 있는데, 저도 조금 읽어봤어요. 재미도 있지만, 문제가 많아요. 구술사(口述史)라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제일 큰 문제가 고령자들의 기억이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을 회상하면서 끊임없이 미화한다는 점이에요. 자기도 모르게 기억을 왜곡시키고 있어요. 그래서 진정한 민중생활사를 보기가 힘들어요. 


그런 거 생각하면, 우리의 정신문화라는 게 굉장히 빈곤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우리가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게 그거죠.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데 엘리트들만이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조선시대 말기부터 식민지시대에 이르기까지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았던 민초들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역사예요. 그 무렵의 우리나라 사정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에 와서 생활했던 몇몇 선교사들의 기록이 고작이에요. 조선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것은 거의 없어요.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런 것들은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겠죠. 지금도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민중의 얼굴’을 잘 몰라요. 그러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인이 민중의 세계에 접근하기 어려워진다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의 삶을 모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책 《슬픈 미나마타》를 보면서 느끼는 게 그런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정말 이시무레 미치코 같은 경력과 관심과 열정을 가진 작가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밑바닥 민중의 삶과 내면을 이렇게 리얼하게 그릴 수 있겠느냐? 저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자료가 없어요. 지금 농촌이나 어촌에 가서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해보세요. 이미 도시사람 이상으로 도시화되어 있습니다. 텔레비전 같은 것 때문에 이제는 방언 쓰는 사람들도 드물어요. 그런데 왜 이런 기록들이 중요하냐 하면 근대적인 가치로는 이제 나아갈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때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탈근대주의니 하며 학계와 지식사회에서 요란하게 떠돌아다닌 것은 지식인 엘리트들 몇몇의 머릿속에서 나온 추상적인 논리일 뿐, 전혀 생명력이 없는 거예요. 요새는 그거 이야기하는 사람도 별로 없잖아요. 중요한 것은 풀뿌리 포스트모더니즘이에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도 필요없어요. 원래 풀뿌리는 삶 그 자체가 비근대적 가치세계 속에서 쭉 영위되어왔으니까요.



도(道)의 실현과 근대국가


이시무레 미치코는 이 비근대의 논리에 아마도 가장 철저한 작가가 아닌가 싶어요. 《슬픈 미나마타》는 단순한 반(反)공해 소설이 아니에요. 원래 이 작품은 소설 취급도 못 받았습니다. 이게 1969년에 처음 출판되었을 때, 일본의 주요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이 작품을 논픽션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때 무슨 문학상을 받았는데, 논픽션부문의 수상작품으로 선정되었어요. 그렇게 기성문단의 오해를 살만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까 보았듯이 흥남질소비료공장에 관한 회사 측 자료로부터의 긴 인용이라든지, 미나마타병 환자들에 관한 병원의 진단기록, 의사들의 증언내용, 회사 측이나 당국자, 정치가, 언론들의 이 문제에 관한 발언, 보도내용 등등을 사실 그대로 옮겨놓고 있는 부분이 꽤 많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7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장은 피해자 개개 인물에 관한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들 이야기를 꿰뚫고 있는 것은 ‘미나마타’의 문명사적, 인류사적 의미에 관한 집요한 천착, 근원적인 질문이에요. 미나마타사건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에는 남녀노소가 다 들어있고, 심지어 태아까지 감염되어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로서 비참한 인생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작가는 이런 희생자들을 실제로 만나보고 개인마다 얽혀있는 사연을 주의깊게 듣고, 그것을 자신의 스타일로 풀어내는 그런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사건의 시간적인 순서도 뒤바뀌기 일쑤고, 비현실적인 신화, 꿈 이야기가 계속 나오면서 어느 것이 현실인지 몽환의 세계인지 잘 구별이 안될 만큼 뒤섞여서 전달되고 그래요. 그런데 이런 기법은 가령 서양의 현대소설에서 배운 게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태어나 자란 땅의 민초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충실히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나중에 밝혀진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이 작품을 보면 마치 작가가 희생자들을 일일이 만나서 꼼꼼히 취재한 것을 나중에 살을 붙여서 재구성한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하자면 작가의 출신배경에 대해서 좀더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해요.


이시무레의 고향, 구마모토(熊本)는 일본에서도 좀 특이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자본주의국가로 빠르게 돌진해가던 정치·문화의 주류에 대항하여 본원적인 인간가치를 지키려 했던 이상주의적 사상가, 실천가들의 근거지의 하나였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교과서에서는 대표적인 정한론자(征韓論者)로 기록하고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도 이 구마모토와 인연이 깊어요. 사이고 다카모리는 원래 사츠마(薩摩)번의 하급무사 출신으로, 메이지유신의 주역 중 한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츠마번은 지금의 가고시마(鹿兒島) 지방으로, 구마모토와는 지척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나중에 메이지 신정부에서의 직책을 버리고 고향으로 물러나와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이라는 반정부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구마모토는 그의 주요 거점이었고, 또 그가 최종적인 패배를 당하고, 자결을 한 곳도 구마모토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인물이 참 흥미로운 사람이에요. 단순한 정한론자라고 가볍게 처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에요. 사실 요즘 일부에서는 그를 정한론이 아니라 오히려 견한론(遣韓論)을 주창한 사람으로 봐야 더 정확하다는 견해가 있어요. 당시는 조선과의 새로운 외교관계 수립이 유신정부의 최대 현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정부가 ‘천황’이라는 표현이 가당치 않다고 일본 쪽의 외교문서를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거든요. 사실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당시는 아직 새 국가의 틀을 잡는 데 경황이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기록을 보면 일본정부에서는 조선과의 관계가 꽉 막혀있는 게 굉장히 고민거리였던 것 같아요. 국가체제가 근본적으로 변경되었고, 이걸 이웃나라에 통보를 해야겠는데, 이게 안되니 심한 가슴앓이를 한 거죠.


물론 당시 막번(幕藩)체제가 무너짐으로써 몰락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컸고, 이것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조선침략을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역사가들도 흔히 그렇게 썼습니다. 그러나 정한론이라는 것은 그때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일본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또 몇몇 특정 인물에 국한된 논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적어도 사이고 다카모리는 우리가 정한론자라고 할 때 쉽게 연상하는 그런 호전적인 인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그는 외교문제는 어디까지나 평화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철저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정부의 최고 실권자인 자신이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에 갔다 오겠다고 견한사(遣韓使)를 자청했던 거죠. 그런데 이게 당시 일본의 최고 실력자들 사이의 권력 헤게모니 쟁탈이라는 복잡한 역학관계 때문에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메이지유신 10년째 되는 해에 사무라이들의 반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권력에 대한 개인적 야심 때문에 이 반란을 지도한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세이난전쟁 자체는 확실히 이른바 불평사족(不平士族)의 신체제에 대한 불만이 분출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 자신은 이 전쟁을 사전에 면밀히 준비하거나 조직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의 논리에 의해서 거의 떠밀리다시피 해서 결국 반란의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는 이 전쟁에서 승리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패배할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이걸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거죠.


이런 행동은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에요. 한때는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에 앞장을 섰고, 그 결과로 신정부의 최고 실력자 지위에까지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홀연히 그 지위를 버리고 귀향해서는 자신이 세운 정부를 반대하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게다가 그 전쟁은 아무 승산도 없는 전쟁입니다. 모순덩어리죠. 왜 그랬을까요? 물론 그 인물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보지 않으면 잘 알 수가 없죠. 그러나 여러가지 자료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합니다. 우선 그는 시대의 추세로 볼 때 구체제의 붕괴는 필연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온몸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국가체제가 단순히 서양식 물질문명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道)’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서는 유학의 민본주의 이념에 충실한 매우 양심적인 사무라이의 체취가 느껴져요. 그래서 자신의 희망과는 자꾸 멀어지는 현실 속에서 점점 낙담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어떤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동료들, 즉 신정부의 권력자들이 개인적인 사치를 한다거나 동경 거리를 마차를 타고 거들먹거리고 지나가는 모습을 굉장히 역겨워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인물은 낭만적인 혹은 몽상가적인 기질이 농후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희망이나 이상과는 반대방향으로 전개되는 현실의 정치, 즉 근대적 자본주의 독재국가 체제로 굳어져가고 있는 현실에서 심한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 자신이 논리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했어도, 그는 이미 근대국가 형성의 가장 초기 단계에서 이 근대국가 체제의 근본적인 ‘어둠’을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근대국가와 ‘도(道)’는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통감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시대의 대세를 막을 도리는 없죠. 거기에 그의 근원적인 절망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사상의 원점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패배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정신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히 죽어버리는 게 아닙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죽은 뒤에 이상사회를 꿈꾸는 자들의 맥은 잠복된 형태로나마, 특히 구마모토 주변 일본의 서남지방에서, 꽤 지속되어온 게 아닌가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전후 일본시인 중에 다니카와 간(谷川雁)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동경대학을 나온 소위 엘리트 지식인인데, 청년시절에 폐결핵에 걸려서 고향인 구마모토로 돌아와요. 그러고는 서클촌(村)이라는 문예운동을 하고, 노동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면서 1960년대에 신좌익운동이 한창일 때 젊은이들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그의 혁명사상의 핵심이 뭐냐 하면 동아시아적 농민공동체의 복원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이었습니다. 통상적인 맑스주의의 입장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죠. 그는 상부상조의 원리에 의한 협동과 자치의 공동체를 자신의 이상으로 삼고, 그것을 ‘원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그가 벌인 문예운동에 참가했던 멤버 가운데 한사람이 바로 이시무레 미치코였습니다. 이시무레는 본래 이렇다 할 학력도, 경력도 없는 여성이었어요. 예전에 실과(實科)학교라는 게 있었는데, 가난한 집 자녀들이 주로 다닌 학교였습니다. 그런 학교 출신으로 전쟁 말기에는 자기가 졸업한 학교에서 임시교사로 잠시 근무한 게 경력의 전부였어요. 그런데 어렸을 적부터 혼자서 단가(短歌)를 짓기 좋아하는 취미가 있었고, 그게 빌미가 되어 다니카와 간이 운영하는 문학교실 같은 데서 만났겠죠. 그러니까 별 볼 일 없는 시골 밑바닥 출신 아줌마가 당대 일본의 문제적인 시인을 만나서 문학과 사회에 대해 눈을 뜨게 된 셈이죠.


그런데 여기서 또 언급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 와타나베 교지(渡邊京二)라는 평론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이른바 재야의 지식인인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저서는 특히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본사회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데 뛰어난 통찰을 보여줍니다. 아까 제가 사이고 다카모리에 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그것도 실은 대개는 이분의 책에서 본 것을 밑천으로 한 겁니다. 그런데 이분도 구마모토사람이에요. 평생 지방에서 살면서 한번도 대학이나 제도권 연구기관에 소속하지 않고, 독립적인 저술활동과 시민강좌를 해온 평론가예요. 그런데 이분이 젊었을 적에 작은 잡지를 편집하고 있었는데, 그때 투고되어온 작품에서 이시무레의 천재성을 이미 알아보았다고 해요. 그 인연으로 이시무레의 문학적 성장을 옆에서 쭉 지켜본 사람이니까 작가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죠. 그래서 《슬픈 미나마타》가 나온 뒤에 한번은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당신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이 굉장히 내밀한 부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당신이 취재 도중에 어떻게 그렇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느냐?” 그러니까 처음엔 어물어물하더랍니다. 그러다가 결국 고백을 하는데, 그 환자들이 그렇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준 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실, 아픈 사람들이 그렇게 구구절절 자상하게 이야기를 들려줄 형편도 아니지요. 작가 자신도 실은 기껏해야 작중 인물들을 한두번씩밖에 만나지 못했고, 몇마디 정도밖에 들을 수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소설에는 굉장히 자세하게 나옵니다. 여러 해 동안 같이 친숙한 생활을 해도 캐낼까 말까 한 내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한두번 어설프게 만나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썼느냐는 추궁에 대해서 작가가 뭐라고 답변했느냐 하면, “내가 만난 그 환자나 가족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글로 옮기면, 그렇게 되는 걸요.” 그러니까 작가는 외면적인 취재를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작품의 주인공들이 될 사람들의 내면으로 들어갔고, 그 내면에서 그들과 마음이 완전히 일치했다는 뜻이죠. 다시 말해서, 그 환자들의 고통과 번뇌를 자신의 고통, 번뇌로 느꼈다는 거죠. 결국 무당이에요.



샤먼으로서의 비근대 작가


그러니까 작가는 한사람의 무당으로서 글을 쓴 거예요. 이시무레는 무당이 될만한 소질도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이 할머니가 거의 치매에 가까운 상태였다고 해요. 어린 소녀가 집안 어른들이 다 외면하고 돌보지 않는 할머니와 같이 지내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막막함이랄까, 절망적인 고통을 그냥 몸으로 깊이 내면화했던 것 같아요. 평론가 와타나베 교지는 《슬픈 미나마타》에 대해서 “이 작품은 이시무레 미치코의 사소설이며, 이것을 낳은 것은 그녀의 불행한 의식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언젠가 와타나베는 작가생활 초기에 이시무레의 집을 찾아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생활을 하는 주부에게 자신만의 서재 같은 게 있을 리 없죠. 한쪽 골방에 다다미 반장 정도의 공간에 책을 쌓아둔 채, 그 옆에 조그마한 밥상을 하나 놓고 쭈그려 앉아 글을 쓰고 있더라는 겁니다. 창문이 있기는 한데, 워낙 비좁은 공간에 책과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다 보니 대낮인데도 깜깜한 방이었다고 합니다. 식구들하고 격리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그 어둠의 공간이었던 거죠. 그 공간에서 이시무레는 신들린 듯이 글 쓰는 일에 열중해 있었습니다. 한사람의 평범한 가정주부가 그렇게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될 만큼 크나큰 충동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불행한 의식’ 때문이에요.


행복한 인간은 글을 쓰지도 않고, 쓸 수도 없어요. 쓸 이유가 없죠. 요즘 우리 주변에 늙어서까지 치열하게 글을 쓰는 사람도 드물지만, 글이라고 발표되는 것을 봐도 다들 편하고, 한가로운 얘기들이에요. 절실한 얘기들이 아니에요. 그러니 엄밀히 말해서 문학이 아니죠. 예전에는 고생들 했지만, 이제는 이만큼 살게 되었노라고, 다들 편하게 생각하고 사는 것 같아요. 4대강이 저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이른바 문단의 대가라는 분들이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세요. 절망적인 기분이 없다는 증거예요.


아무튼, 이시무레에게 있어서 ‘불행한 의식’은 어렸을 적부터 싹트고 자랐던 것 같아요. 정신이든 육체든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본능적인 관심과 애정, 이런 게 할머니와 같이 고통스럽게 지낼 수밖에 없었던 소녀시절의 체험에서 비롯된 거죠. 그 때문에 그는 미나마타의 희생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돌아가서 그들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또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자신의 아저씨, 아주머니, 언니, 동생 같은 사람들이 오염된 바다의 물고기를 먹고 모두 죽거나 평생 장애자가 되어 괴로움 속에 살 수밖에 없게 됐다고 해서, “이제 우리는 행복한 인생이 끝장났다”라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단순한 사회고발 문학밖에는 안됩니다. 반공해 소설밖에 안되는 거죠. 그러나 이시무레는 환자들의 내면의 심층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나 좌절을 경험하면 의식이 굉장히 날카로워집니다. 괴로움이 깊을수록 의식은 극한적인 한계까지 가닿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그 극한에서 오히려 사람은 굉장히 풍요로운 생명감각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한사람의 작가이자, 무당으로서 이시무레가 자신의 작중인물들을 대변해서 전하고자 한 것은 결국 이 생명감각, 생의 근원적인 행복과 풍요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생생한 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해정토


미나마타병에 걸리기 전에 바다를 터전으로 해서 살았던 사람들은 늘 자연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들의 일상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물과 흙과 공기와의 끊임없는 직접적인 접촉 가운데서 영위되었던 거죠. 그러니까 도시인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생명에의 근원적인 감각이 그들에게는 살아있습니다. 민초들의 삶을 묘사할 때, 계급적 모순이나 사회적 모순을 그려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런 외면적인 접근만으로는 절대로 포착할 수 없는 핵심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도시출신의 작가가 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농촌출신이라 하더라도 쉬운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 농촌현실이나 떠돌이 노동자의 삶에 관해 뛰어난 이해력을 보여준 이문구 같은 작가도 이런 차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어요. 작가가 아무리 자상한 관심을 가지고 아무리 유연하게 접근한다 하더라도 늘 ‘흙’ 속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삶과의 생생하고 유기적인 접촉이 없는 한, 근원적인 생명감각을 포착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시무레는 타고난 무당입니다. 이 작가가 미나마타의 비극 가운데서 포착해낸 것은 이 살아있는 생명감각이 빚어내는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극한적인 절망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해가고 있는 환자들을 통해서 말하자면 고해정토(苦海淨土)의 원리를 발견한 거죠. 즉 지독한 절망과 고통이 도리어 축복이 되는 상황 말입니다. 이시무레는 치유 불가능한 병고의 고통과 절망의 한가운데서 환자들이 오히려 여태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자신들의 삶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끼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몇구절 인용해볼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위만 안 보고 살면 더는 부족한 게 없지. 어부보다도 좋은 직업도 없지. 우리 같은 일자무식인 사람한테는 세상에서 이것만큼 좋은 일도 없을 거요. 우리 집에 딸린 밭이나 정원 같은 바다가 저 앞에 언제나 있고, 물고기들이 언제 나가봐도 있으니까.


밤이 되면 가장 생각나는 것은 역시 바다야. 바다가 제일 좋았어. 봄부터 여름이 되면 바다 속에도 온갖 꽃들이 만발하지. 우리 바다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 바다 속에도 명소라는 게 있어. 빙 한바퀴 돌면 익숙해진 우리 코에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의 바다 향기가 풀풀 풍기거든. ‘회사’냄새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도쿄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해요. 평생 신선한 생선 맛도 모르고, 햇볕도 제대로 못 쐬고, 불쌍하게 살다가 늙어가겠네. 우리가 봐도 도쿄사람들 정말 불쌍해. 도미도 청어도 물들여서 팔고 있다잖우. 그에 비하면 우리 어부들은 천하의 부러울 것 없는 생활 아닌가.


바다내음 중에서도 봄색이 짙어진 파래가 물기 마른 바위 위에서 햇볕에 구워지는 냄새라니!


기록을 보면 미나마타의 어부들과 그 가족들은 곡물은 별로 안 먹었다고 합니다. 날생선과 감자, 그게 주식이었다고 해요. 그렇게 언제나 바다생선을 물리지도 않고 먹던 사람들이었으니까 결국 수은중독에 걸리고 만 거죠. 환자들 가운데는 자신이 생선을 먹은 일은 없어도, 이미 태아 때 감염되어 평생을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비록 이제는 다만 기억 속에서일망정 바다를 의지해서 지내던 예전 생활에 대한 회상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게 사실이고, 이 기쁨으로 환자들의 고통은 견딜만한 것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바다생활이 다 즐거웠던 것은 아니겠지요. 또 이 소설에 묘사된 바다생활이 대개 환자들의 기억 속의 장면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많은 경우 현실과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바다생활이란 심한 중노동을 수반하는 삶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러나 농사짓고, 고기 잡는 일이 중노동이고 고통뿐이라면 그런 생활이 천년, 만년 계속되어왔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고통과 괴로움뿐이었다면 벌써 농경이나 어로(漁撈)는 끝이 났을 겁니다. 그러나 농사를 지어 봐야 손해만 보게 되는 상황에서도 농촌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농사나 고기잡이 일을 접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면 대개의 농민이나 어부는 피눈물을 흘립니다. 왜 그럴까요. 결국 농민이나 어부의 노동과 생활에는 근대식 공장노동이나 도시의 월급쟁이들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이 존재한다는 얘깁니다.


오늘날 한국작가들 중에서 이런 차원을 주목해서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실은 이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차원이란 말이에요. 밑바닥 노동자나 농민의 의식과 삶을 대변한다는 작가라 할지라도 대개는 이념적 갈등이나 계급문제를 중심으로 보는 이른바 좌파적 상상력을 넘어서지 못해요. 왜냐하면 엘리트적 사고습관에 길들여진 작가가 정작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와 의식의 내면을 알 턱이 없으니까요.


미나마타의 어부들은 “옛날부터 도미는 임금님이 드시는 생선이라 했는데, 우리 어부들은 평생 맨날 도미 먹고 맨날 임금생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비록 누더기 같은 옷이지만 찢어진 것은 기워 입고, 하늘이 먹여주신 것을 먹고, 조상을 섬기고, 신들을 받들고, 다른 사람 원망하지 않고, 남이 하는 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면서” 살아왔다고 합니다. 이런 자족감과 평화로운 심성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바다에 대한 무한한 신뢰 때문이겠지요. 그들은 바다가 설마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어촌마을 삶의 공동체적 성격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고기떼가 몰려온다는 소리가 들리면 어부들은 하던 일을 전부 멈추고 집을 뛰쳐나와서 어영차어영차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함께 고기잡이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왔는데, 언제부터인가 “고기떼가 온다!”며 동네방네 퍼지던 외침소리가 사라지고 적막한 마을이 돼버렸어요. 그러고는 “입원해 봐야 대책이 없는” 병에 걸려, “평생 병신으로 살든가, 죽든가”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로 폐허가 돼버린 거죠. 



인간정신의 쇠약


한번 망가진 자연과 공동체는 회복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망실된 삶은 돈 몇푼으로 보상할 수 있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이시무레에 의하면, 근대국가란 기본적으로 ‘기민(棄民)’, 즉 밑바닥 민중을 내팽개치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구하는 체제입니다. “산업공해가 변방의 촌락을 정점으로 발생했다는 것은 자본주의 근대산업이 체질적으로 하층계급에 대한 모멸과 공동체 파괴를 심화시켜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더 기막힌 것은 이 체제 밑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의 ‘비인간성’입니다. 미나마타의 비극 중에서 가장 기막힌 대목은 재해의 주범인 일본질소비료회사라는 대기업의 종업원들과 시민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미나마타병이 큰 사회적 이슈가 됨에 따라 행여 회사의 입지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환자들과 그 가족, 친지들에 대하여 몹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시민들 사이에 미나마타병 환자 111명과 미나마타 시민 5만4,000명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라는 냉혹한 논리가 ‘들불처럼’ 확산되고, 시가 주최한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에도 이시무레 자신을 제외하고는 일반시민은 단 한명도 참석하지 않습니다. 미나마타병이라는 현상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젠가는 모든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될 수 있다는 논리도 이 지역사회에서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황량한 현실’은 결국 오늘날 “인간정신이 극도로 쇠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어떤 대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정신의 쇠약’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기 위해서 이 소설에 나오는 장례행렬의 한대목을 인용해보죠. 


내 고향인 이 지방에는 한세대 전까지만 해도 … 명정 하나 세우지 못한 초라한 장례라도, 길 한가운데를 엄숙하게 행진하면 마부는 말을 멈추고, 자동차는 뒤로 물러서주었다. … 죽은 사람들 대부분은 살아있는 동안 다소간 불행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일단 죽은 사람이 되면 숙연한 친애와 경의의 뜻이 담긴 장송의 예우를 받았던 것이다. … 지금 1965년 2월 7일, 미나마타병의 마흔번째 사망자인 아라키 타츠오 씨의 장례행렬은 굉음을 울리며 연달아 질주해가는 트럭에 길을 내주고 질척한 흙탕물을 뒤집어쓰면서 국도의 가장자리를 위태롭게 비틀비틀 숨죽이며 … 묘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은 여전히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런 역설이 참 기막혀요. 인간의 손으로 세계는 벼랑끝으로 다가섰는데, 그리하여 목숨들은 도처에서 처참하게 죽어가거나 학대받고 있는데, 세상은 변함없이 그 근원적인 아름다움의 빛 속에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이시무레가 미나마타병으로 거의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어떤 환자를 찾아서 병원을 방문했을 때의 묘사입니다.


1959년 오월 하순, 뒤늦게나마 내가 처음으로 미나마타병 환자를 시민의 한사람으로 병문안 갔던 것은 사카가미 유키가 있는 병실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곳곳에는 겹겹이 어지러운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진한 정기를 내뿜고 있는 신록의 산들과 정답게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미나마타강이며, 강변과 무르익기 직전의 보리밭, 아직 꽃대에 꽃을 달고 있는 푸른 콩밭, 이런 풍경을 건너다볼 수 있는 이곳 2층 병동의 창이란 창에서는 일제히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고, 오월의 미나마타는 꽃향기 가득한 계절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워요.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우리 고향 생각을 했어요. 물론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고향의 풍경, 오로지 내 마음속에만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풍경이죠. 그 풍경 속에 오늘날 근대문명이라는 제단에 희생물로 바쳐진 약자들이 지금 크나큰 고통을 겪으며 꼼짝없이 누워있는 것이죠.



강과 꽃과 인간영혼


좋은 문학은 결국 삶에 대한 근본적인 긍정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악마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더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인간정신이 있고, 아무리 할퀴고 짓밟아도 끝끝내 소멸될 수 없는 근원적인 기운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게 하는 게 좋은 문학과 예술의 몫입니다.


지금 4대강이 파괴되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기가 막힙니다. 여러분도 현장에 한번 가보세요. 이제 우리는 강은 사라지고 거대한 수로만 존재하는 나라에서 살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강은 없어지고 수로만 있게 될 것이라는 얘기는 얼마나 참혹한 얘기예요? 그러나 그것을 알아듣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학을 하는 여러분은 그게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강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물이 오염되고, 농경지가 없어지고, 홍수 위험이 높아지고 등등, 그런 것보다도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용인하기 어려운 것은 인간정신에 대하여 강이 끼쳐왔던 근원적인 의미가 소멸된다는 사실일 겁니다.


결국 ‘미나마타’와 다른 얘기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강이 주는 시적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 채 황량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산하(山河)만큼 정답고 아름다운 데가 어디 있어요? 지금 지율 스님은 강을 살릴 수만 있다면 강물에 뛰어들어서 자결이라도 하고 싶어 합니다. 지율 스님은 제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서 최고의 ‘시인’이에요. 강에서 얻는 무슨 공리적인 이익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강 그 자체의 신비함이 자아내는 근원적인 아름다움에 굉장히 민감한 분이에요. 그래서 강이 저렇게 처참하게 훼손되고 있는 것을 못견뎌하는 거예요.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의 심정도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가 자연을 묘사할 때의 어조와 문체를 보면 그걸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아직 꽃대를 달고 있는 푸른 콩밭, 물새가 유유히 날아오르는 강변 모래톱, 이런 것 사라지면 인간다운 삶은 끝이에요.


이시무레는 근대라는 것 자체를 ‘원죄’라고 규정합니다. 하나도 틀린 얘기가 아니죠. 얼마 전에 어떤 책을 보니까 강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들이 그냥 단순히 때가 되어 산란하는 게 아니라고 해요. 어떤 물고기들은 꼭 진달래가 피는 것을 보고 산란을 한답니다. 물론 생리적으로 그 시기 봄철에 산란하도록 돼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실은 좀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물고기도 진달래가 피기를 기다리고, 진달래로 온 산천이 붉게 물들여지는 것을 보면서 환희를 느끼는 게 틀림없어요. 적어도 시인, 작가, 예술가라면 세상만물이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교감하고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느껴야 합니다.


예전에 제가 번역한 글이 하나 있는데, 루이스 멈포드라는 문명비평가의 글이에요. 거기에 보면, 지구상의 장구한 생물진화과정에서 파충류 다음에 포유동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포유동물이 나타날 때에 동시에 지구상에 꽃이 폭발적으로 출현했다는 설명이 있어요. 저는 이게 우연이 아니라고 봐요. 우리가 꽃을 보면 자연히 기쁨을 느끼고, 뭔가 생명이 고양되는 느낌을 갖는 게 일반적인데, 그것은 내가 가진 지식이나 지성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이 기본적으로 포유동물의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얘기죠. 이 사실을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꽃을 없애고, 식물을 훼손하고, 나아가서 모든 생물의 기초적인 서식지인 습지와 강을 파괴한다는 것은 진화생물로서의 우리들 자신의 존속을 심히 위태롭게 하는 굉장히 어리석은 행위라는 거죠.


근대의 논리를 넘어가는 진정으로 새로운 문학을 꿈꾸는 시인, 작가라면 결국 이러한 진화생물로서의 인간의 위상, 즉 만물이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샤먼적 감각이 살아있어야 하겠죠. 그렇게 되면 4대강의 파괴는 바로 인간다운 삶, 인간영혼의 붕괴라는 것을 금방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은 원래 비참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꿈을 현실화하려는 꿈을 간절히 꾸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진정한 문학은 몽상의 기록이자, 일종의 기도(祈禱)라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상황입니다. 이런 캄캄한 상황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것인가, 얼른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슬픈 미나마타》에서 중요한 암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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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본지 발행인. 이 글은 2010년 3월 25일, 동대문도서관에서 열렸던 한국작가회의 주최 문학강연회에서 했던 얘기를 정리, 보완한 것이다. (《녹색평론》제114호 2010년 9-10월호 )

2010년 9월 27일 월요일

이찬갑 선생의 글을 읽으며

홍성에 다녀온 신영호 연구원의 책상에 있는 책. 이찬갑 선생의 <풀무학교를 열며>라는 책을 넘겨보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물코'(대표 장은성) 출판사가 펴내고 있는 갓골문고 1권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책을 일간지나 인터넷 언론에서 서평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거나, 다루지 못하고 있음이 우리의 서평문화의 현실이라는 생각은 문득 해봅니다.

 

<풀무학교를 열며>라는 책은 이찬갑 선생이 1958년 4월 23일 풀무학교를 여는 날 하신 말씀을 2010년 8월 홍동밝맑도서관 개관을 기념하여 엮었다 하며, 이 책의 수익금은 도서관 운영을 위해 쓰여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영호 연구원의 전언에 따르면, 홍동밝맑도서관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태라 합니다. 어떻게든 자원을 만들어 이 도서관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첫머리에 있는 글귀를 옮겨 적습니다.

 

"지금까지는 현대문명의 총아인 도시를 중심으로 한 그 도시교육 선발교육 물질교육 간판교육 출세교육에서 이 인간이 멸망하고 이 민족이 썩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새 교육은 새로운 시대의 총아일 농촌을 중심으로 한, 농촌교육으로, 민중교육으로, 정신교육으로, 실력교육으로, 인격교육으로, 이 민족을 소생시키고 이 인간을 새로 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2010년 9월 9일 목요일

행함 없는 믿음, 야고보서 읽기

<야고보서> 묵상 '행함 없는 믿음은 공허하다'에서 한 대목.  

 

그래서 그는 믿음 지상주의자를 일컬어 '알맹이 없는(공허한) 사람'(2:20a)이라고 호칭한다. 행함 없는 믿음은 공허한 것임에도 그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깊이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쓸모가 없다'로 번역된 단어인 '아르고스'에는 본래 '게으른', '일하지 않는'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일하지 않는 믿음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생산적인 믿음인 것이다. 그러니 어떤 신자가 이런 믿음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 봐야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저 신앙고백에 그친 믿음만으로 세상과 삶에 무슨 변화를 줄 수 있겠는가?

 

Bookstart Japan의 시라이 테츠 대표의 메시지

このたびは第二回ブックスタート全国大会の開催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

 

私は2008年に韓国を訪れ、第一回全国大会に参加させていただくとともに、チェチョン市のブックスタートや共同育児を見学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

 

全国大会は、ブックスタートに携わる関係者やボランティアの方々のエネルギーが結集 した素晴らしい大会でした。また共同育児ではアイデアと工夫が凝らされた楽しいプログラムを拝見し、これが保護者どうしの自主的な集まりだと聞いて、その企画力や実行力に   目を見張りました。

韓国の皆様の情熱と行動力は、大変印象深く、今も心に残っています。

 

日本のブックスタートは今年で10年目を迎え、これまでに200万人以上の赤ちゃんがブックスタート・パックを受け取りました。ブックスタートに携わるボランティアや行政職員は一万人を超え、地域ごとに、絵本の楽しいひとときを親子に届けるための、様々な工夫が重ねられています。

 

両国でブックスタートに携わっている人々を思うと、国は違っても、“子どもたちが心健やかに幸せに育ってほしい”という同じ思いでつながっていることを感じます。

これからも情報交換を通してお互いの経験から学びあい、両国の子ども達のために、   ともに活動を充実させていきましょう。

 

第二回ブックスタート全国大会のご盛会と、韓国ブックスタートのますますの発展を  お祈りしております。

 

2010.9.10

Bookstart Japan 代表 白井

Bookstart National Conference 2010

2010년 9월 7일 화요일

대학 구조조정이 더딘 이유

<노컷뉴스> 2010년 9월 2일 구용회 기자의 보도. 대학 구조조정, 교과부는 왜 칼 못빼드나 가운데 일부분이다.

▶먼저 대학 구조조정이 시급한 이유를 설명해달라?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84%에 이르고 있다. 이러다 보니 입학정원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대학이 많다. 충원율이 30%인 대학이 1개, 40%인 대학이 7개, 50%인 대학이 11개나 된다. 사실 충원율도 믿을 것이 못된다. 어느 대학은 신입생 충원율을 부풀리고 고교 진학교사에게 금품을 제공하고 신입생을 모집하는 대학도 있다. 또 불법 취업을 목적으로 외국인학생까지 무분별하게 유치한 대학도 십 수개에 이르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이들 대학은 '학위장사'를 하고 있는 셈인데, 이를 방치하는 것은 해당학생들에게 죄를 짓는 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이 교육계 인사들의 말이다.

 

▶그러면 왜 이런 대학들이 빨리 퇴출이 되지 않는 건가?  

=가장 큰 문제는 설립자들이 대학이나 학원은 비영리 재단이지만 내 것이라고 '소유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이 퇴출.폐쇄되면 모든 재산은 국고로 환수되거나 다른 학교와 합병되면 넘어가게 돼 있다. 그것이 비영리 재단의 정신이지만 사립재단 설립자들은 퇴출되면 학교와 학교 부지를 모두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버티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이상적인 설립자가 아닌 한 비영리재단 소속이지만 자기 소유재산을 다 잃는다면 쉽게 비영리재단 소유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을 제대로 모집하지 못하고도 부실대학들이 어떻게 학교경영을 유지할 수 있나?

=기업은 원가 개념
이 있다. 그래서 원가에 비해 수익이 적으면 망하든지 구조조정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학교는 그런 시장논리 개념이 없다. 수익금이 10%만 들어오면 그 수익금에 맞춰 비용을 줄인다. 비용을 줄여 학교 투자 안하고 교원 임금도 삭감한다.

교과부 관계자에 따르면, 심지어 이런 대학에서는 교직원들도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괜히 나가서 실업자가 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임금을 조금만 받더라도 학교 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이 이런 대학 실정을 모르고 들어가기 때문에 궁극적인 희생자가 되고 만다. 장학금 준다고 등록금 깍아주고 해서 들어가지만 손해는 학생 당사자들이다.

▶왜 이렇게 부실한 대학들이 남아돌게 된 건가?

  • =우리사회가 대학과잉 사회를 맞게 된 것은 지난 1997년 김영삼 정부 때 대학 설립요건을 아주 쉽게 규제를 완화한 '준칙주의'를 도입하면서 부터다. 그러니까 대학 설립 허가는 원하는 사람은 다 해줄 만큼 쉽게 만들어줬는데 그로 인해 마주할 부작용, 즉, 부실대학 퇴출 잣대는 마련하지 않은 것이다. 입구는 성문처럼 활짝 열어놓고 출구는 어디에도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수 년간 우리 사회는 부실대학으로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다. 대학이 버티면 퇴출을 시킬 수 있는 방편이 없기 때문에 '교과부의 칼집은 빈 칼집'이라는 것이다.

    ▶부실대학 설립자들이 '소유의식' 때문에 퇴출을 결사반대 한다면 정부도 이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정부는 사립학교 법인이 폐쇄되면 남은 재산을 다시 공익법인이나 사회복지법인 설립을 위한 재산으로 출연을 허용하는 특례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니까 설립자가 퇴출시키고 남은 재산으로 장학재단,박물관을 운영하거나 노인요양 시설 등의 법인을 설립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가 '학교 법인은 개인 소유재산이 아닌데 다시 어떻게 돌려 줄 수 있느냐', 또는 '교비 횡령 등으로 학교경영을 잘못해 퇴출되는 설립자에게까지 그런 특례를 주는 것이 정의와 공정에 맞느냐‘ 이런 논란이 있다.

     

    혁신학교와 관련한 소식 하나

    <교육희망> 2010년08월29일자 기사, 강성란 기자의 보도, '혁신학교'확산 불붙었다-서울·경기·강원·전북 등 전국 교사와 교육관료 모두 관심을 눈여겨 보았다. 관련된 기사, “학교를 바꿀 수 있는 건 내부 구성원들 뿐”-수업혁신 통한 학교 개혁의 가능성 탐색 연수 열려도 함께 스크랩해놓는다.

     

    이 기사 가운데 한 대목 “사람들은 교육이, 학교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말하는 이는 없습니다. 비전의 부재,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지요. 비전 없는 개혁은 무의미합니다.”

     

    '혁신학교'확산 불붙었다
    서울·경기·강원·전북 등 전국 교사와 교육관료 모두 관심
     

    교육주체들이 새로운 학교 만들기, 작은 학교 살리기 등의 이름으로 경기를 중심으로 일부 학교에서 추진해 온 학교 개혁 실천 방안이 진보교육감식 공교육의 변화로 부르는 혁신학교의 옷을 입고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혁신학교는 학급당 학생 수를 25~30명 수준으로 줄이고, 학교 교육과정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한편 학생 개별 맞춤형 교육을 통해 공교육을 정상화 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경기교육청은 이미 지난해부터 33개교를 혁신학교로 지정해 시범운영을 통해 일정한 성과를 내며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 교육계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7월 진보 교육감이 취임한 서울, 강원, 전북교육청 등에서도 2011년부터 혁신학교 시범운영을 시작한 뒤 연차적으로 이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앞 다투어 쏟아내고 있다.
     
    이처럼 혁신학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난 여름방학에는 시도 교육청을 포함한 각 단위에서 혁신학교 관련 연수가 진행됐고, 참여한 교사들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지난 17일 성남 보평초 시청각실에서는 전교조 경기지부, 스쿨디자인 21 등 4개 단체 공동 주최로 '수업 혁신을 통한 학교 개혁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연수가 진행됐다. 일본 학교 개혁의 성공 사례로 꼽히는 '배움의 공동체'를 일궈낸 사토 마나부 일본 동경대 교수의 강연과 경기 지역 혁신학교 운영 사례 발표로 채워진 이번 연수에도 역시 경기, 서울 등에서 200여명이 넘는 교사들이 참가했다.
     
    사토 마나부 교수는 강연 내내 "위로부터의 개혁은 실패하게 되어 있으며 학교는 오직 내부에서 그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학교 혁신의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수업 개혁을 제안하는 '배움의 공동체'를 혁신학교에 결합해 실천해 온 교사들의 사례 발표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방학이 지겹다"는 말로 발제를 시작한 박현숙 경기 장곡중 교사는 "학교 수업 모델을 배움의 공동체로 선택한 뒤 교사들은 꾸준한 수업 연구를 진행했고, 반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만든 작품(아이들의 변화)에 모두 놀라고 있다"는 말로 수업 혁신을 통한 혁신학교의 가능성을 전했다.
     
    지난 7일과 8일에도 혁신학교인 경기도 용인 흥덕고에서 1박2일 일정으로 마련된 '혁신학교를 위한 교사 리더십 연수'에도 교사와 교육청 관계자 300여명이 참가해 혁신학교를 향한 높은 열기와 관심을 보였다.
     
    이제 막 혁신학교를 시작하려는 지역의 반응도 가히 폭발적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지역 초중고교 교사 160명을 대상으로 한 '혁신학교 기초연수'를 여름 방학 기간 2회에 걸쳐 진행할 계획을 세운 뒤 방학 직전 관련 공문을 학교에 보냈다. 교장, 교사, 교육청 관료 등 400명이 넘는 인원의 신청자가 몰렸고, 교육청은 이들 전원을 대상으로 연수를 진행했다.
     
    연수에 참여한 이준범 서울 숭미초 교사는 "강의 시간 내내 질문이 쏟아진 역동적 연수였고, 혁신학교 운영 사례가 발표될 때는 마치 자신의 학교 일인 양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면서 "미처 연수를 신청하지 못한 교사들은 연수장에 직접 찾아와 청강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말로 연수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서울시교육청 연수의 강사로 나선 성열관 경희대 교수는 "대안적 교육에 대한 각기 다른 열망이 편의상 혁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수렴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혁신학교가 추구하는 목표는 물론 그것이 가진 한계까지 명확히 인식한 뒤 학교 구성원들이 함께 혁신학교의 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학교를 바꿀 수 있는 건 내부 구성원들 뿐”
    수업혁신 통한 학교 개혁의 가능성 탐색 연수 열려

    “사람들은 교육이, 학교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말하는 이는 없습니다. 비전의 부재,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지요. 비전 없는 개혁은 무의미합니다.”

    사토 마나부 교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는 학급의 모든 아이들이 뒤처지지 않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배움의 공동체’에서 학교 개혁의 실마리를 찾을 것을 제안했다. 강의실을 가득 메운 150여명 교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장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
    지난 18일 성남 보평초 시청각실에서는 전교조 경기지부, 배움의공동체, (사)함께여는교육연구소, 스쿨디자인 21 공동 주최로 '수업 혁신을 통한 학교 개혁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연수가 열렸다. 이날 연수는 30여년에 걸쳐 일본 학교 개혁의 성공 사례인 ‘배움의 공동체’를 일궈낸 사토 마나부 일본 동경대 교수의 강연과 경기 지역 혁신학교 운영 사례 발표로 진행됐다.

    기조 발제에 나선 사토 마나부 교수는 배움의 공동체를 시작하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교장의 변화’를 꼽았다.

    강의를 진행중인 사토마나부 교수. 강성란 기자
    “교장이 비전을 갖고 책임있게 학교 개혁을 주도한다면 교사들이 앞 다투어 따라오는 것은 물론 학부모와 지역사회의 변화까지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교장들에게는 비전과 책임의식이 부재합니다.

    소위 말하는 문제 학생이 생기면 교장은 ‘그것도 해결하지 못하냐’며 교사를 질책하지요. 하지만 이것은 일이 그 지경까지 가도록 방치한 교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교장은 교사 및 학생 개개인을 모두 관리하고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졌다는 것을 대부분의 교장들이 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실 붕괴를 말하지만 교실 붕괴 전에 이미 교무실 붕괴가 이루어졌고 협력하지 않는 교사, 책임지지 않는 교장이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합니다.”

    사토 교수는 학교 위기론이 대두된 일본에서는 10여년 전부터 ‘유능한 교장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교원노조 출신 등 다양한 교장이 배출되어 ‘배움의 공동체’를 주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관리자들의 체질적 한계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내부형 교장 공모제 등을 통해 새로운 학교 만들기를 모색하고 있는 경기 조현초, 충남 홍동중 등의 사례를 의식한 듯 “한국도 최근 비슷한 경향으로 가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혁신학교에 배움의 공동체 시스템을
    수업 개혁을 학교 혁신의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제안하는 ‘배움의 공동체’를 소위 진보 교육감들의 핵심 정책인 ‘혁신학교’에 결합하려는 교사들의 의욕도 엿보였다.

    “방학이 지겹다”는 말로 발제를 시작한 박현숙 경기 장곡중 교사는“학교 수업 모델을 배움의 공동체로 선택한 뒤 교사들은 꾸준한 수업 연구를 진행했고, 반 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만든 작품(아이들의 변화)에 모두 놀라고 있다”는 말로 배움의 공동체의 가능성을 전했다.

    사토마나부 교수의 강연이 끝난 뒤 혁신학교 운영 사례 발표 및 토론이 진행됐다. 강성란 기자
    서우철 경기 서정초 교사 역시 △교사 업무경감 △학부모 총회, 개교기념식을 제외한 학교 행사 취소 △회의 조정 △업무전담교사제 도입 △연수 통한 수업 능력 향상 등을 통해 교사가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교육여건을 조성한 사례를 소개하는 등 실제 혁신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업 혁신을 통한 학교 혁신의 사례들을 소개했다.

    교사의 눈 ‘수업’으로 돌려야
    “지금까지 전교조는 교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무관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교장의 중요성을 역설하던 사토 교수는 교사 역시 수업에 눈을 돌려야한다고 강조했다.

    “교사가 수업의 질을 높이려면 수업 연구를 통한 전문성 함양에 힘써야 합니다. 교사-학생의 관계 변화와 학생인권 신장을 말해왔지만 교사 개인의 공간으로 여겨지는 교실 변화를 이야기하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이제 ‘배움의 공동체’에서 답을 찾고 있는 일본의 교원노조처럼 전교조 운동 역시 배움의 공동체를 통해 재편되길 바랍니다.”

    사토 교수는 수업 혁신을 교사 개개인의 운동을 넘어선 전교조의 운동으로 확산하기를 제안하기도 했다.

    “4년 전인가 한국에서도 교육혁신위원회가 배움의 공동체식 수업을 제안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지요. 하지만 오늘 사례를 발표한 학교들은 해냈습니다. 교장, 교사, 학생, 학부모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학교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학교는 오직 내부에서 그 구성원들만이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사토 교수는 아래로부터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파리가 앞발을 싹싹 비빌 때는..."

    조국(서울대 법학) 교수의 페이스북에 있다는 내용입니다. '김주완 김훤주 지역에서 본 세상' 에서 읽었습니다.

    "파리가 앞발을 싹싹 비빌 때는" 사과라고 착각하지 말고 때려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Kuk Cho 유명환 장관은 야당 찍은 사람은 북한 가라는 '충성' 발언으로 장관직을 유지했지만, 결국 다른 데서 터지고 말았다. 옷 벗는 것은 시간 문제. 외통부 내에 암암리에 존재하는 '음서제'가 이번에 드러난 것은 다행이다. MB 주변에는 '공정한 사회'에 반하는 인간만 득실거림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실 '신하'는 '주군'을 보고 따라하는 법이거늘.

    한편 유명환을 비롯한 고위직들이 무슨 일이 터지면 '사과'를 한다. 어디선가 들은 우스갯소리 하나 하겠다. "파리가 앞발을 싹싹 비빌 때 이놈이 사과한다고 착각하지 말라." 이에 내 말을 추가하자면, "파리가 앞발 비빌 때는 뭔가 빨아 먹을 준비를 할 때이고, 우리는 이놈을 때려 잡아야 할 때이다." 퍽~~ (교정은 인용자)

    이 글은 루쉰 선생의 글을 떠올리게 합니다. 루쉰 선생은 잡감문인 '페어 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글에서 "요컨대 만약 사람을 무는 개라면, 땅위에 있거나 물 속에 있거나 모두 때려야 할 종류의 개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 요약하자면 흠씬 두둘겨패서 다시는 사람을 물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비평가는 흔히 "죽은 호랑이를 때린다"와 "물에 빠진 개를 때린다"를 함께 다루면서 그 어느 것이나 비겁한 일로 친다. 나의 생각으로는 "죽은 호랑이를 때리는" 것은 겁쟁이가 용감한 자의 시늉을 내는 것으로 자못 익살스러운 데가 있으며, 비겁의 협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미워할 수 없는 비겁이다. 그런데 "물에 빠진 개를 때리는" 쪽은 그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 개는 어떤 개인가, 왜 물에 빠졌는가, 그걸 보지 않고는 결정할 수 없다. 생각건대 물에 빠진 원인은 대충 세 가지이다. (1) 개가 스스로 발을 헛디뎌 빠진 경우, (2) 다른 자가 밀어서 빠진 경우, (3) 자기가 스스로 빠진 경우이다. 만약 앞의 두 종류를 만나 남과 함께 부화뇌동하여 때린다면, 그것이 너무나 멋쩍은 짓임은 말할 나위도 없으며, 또한 비겁에 가까운 짓인지도 모르다. 그러나 만약 개와 힘껏 싸우다가 물속으로 밀어넣었다면 물속에 빠진 개를 몽둥이로 마구 때리더라도 결코 심한 것이 아니다. 앞의 두 종류의 경우와 같이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들은 바로는 용감한 권법가는 이미 땅에 넘어진 적에겐 절대로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한다. 참으로 우리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다만 거기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곧 적도 또한 용감한 투사여야 할 것, 패한 뒤에는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면서 다시 대항하지 않든가, 또는 당당하게 복수를 해오든가, 그렇게 한다면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다. 그러나 개는 그 같은 예에 어울리는 대등한 적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개는 아무리 미친 듯이 짖어대도 실제로는 '도의(道義)' 같은 건 절대로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개는 헤엄을 칠 수 있다. 따라서 틀림없이 뭍에 기어올라와서 마음놓고 있노라면, 갑자기 몸을 털어 물방울을 사람의 몸이나 얼굴에 마구 뿌리고 나서 꼬리를 감추며 달아날 것이다. 더구나 그 뒤로도 그런 성정(性情)은 여전히 변치 않는다. 우직한 사람은 개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세례를 받으면서 참회하는 것으로 알는지 모른다. 따라서 다시 나타나 사람을 무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요컨대 만약 사람을 무는 개라면, 땅위에 있거나 물 속에 있거나 모두 때려야 할 종류의 개라고 나는 생각한다.

    ......

    속설에 "얌전은 무능의 별명이다"는 말이 있다. 좀 야박한 말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도록 부추기는 말이 아니고 쓴 경험을 많이 한 끝에 나온 경구임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물에 빠진 개는 때리지 않는다"는 설만 보더라도 그것이 생긴 원인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때릴 힘이 없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비교의 착오다. 전자는 잠시 논외로 하고, 후자를 살펴보면 그 착오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실각한 정객을 물에 빠진 개와 마찬가지로 보는 착오이고, 또 하나는 실각한 정책들 가운데도 착한 자와 악한 자가 있는 것을 가리지 못하고 한타령으로 보기 때문에 도리어 악을 만연시키는 착오이다. 그 같은 경우를 오늘의 상태에서 말한다면, 정국의 불안정 때문에 일어났는가 하면 자빠지고, 자빠졌는가 하면 일어나 흡사 수레바퀴 돌 듯 그 교체가 격심하다. 그리고 악한 자는 권력의 뒷받침이 있을 때에는 횡포하기 이를 데 없으나, 일단 실각하면 곧바로 남의 동정을 구한다. 그렇게 하면 무는 것을 실제로 보거나 자기가 직접 물려 본 일이 있는 우직한 사람은 그것을 '물에 빠진 개'와 동일시하여 때리는 일을 그만둔다. 아니 때리지 않을 뿐 아니라 동정까지도 베풀려고 한다. 정의는 드디어 이겼으니 이제야말로 의협심을 보일 때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니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그는 정말로 물에 빠진 것이 아니고, 보금자리는 물론 양식도 넉넉히 쌓아 놓았다는 것을, 더구나 조계(組界 : 치외법권이 작용하는 중국내 외국인 거주지)안에다... 드물게는 그가 부상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절름발이 흉내로 사람들의 동정을 끌다가 틈을 보아 유유히 사라지는 계략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땐가 다시 세력을 되찾게 되면 그 전과 같이 순직한 사람을 물어뜯는 것을 시작으로, 별의별 나쁜 짓을 다하는데, 그 원인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순직한 사람들이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금 가혹하게 말하자면 개에게 물린 것은 자기 스스로 묘혈을 판 탓일 뿐,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할 일이 전혀 아니다.

    어진 사람들은 반문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들에게 페어 플레이란 일체 쓸데없는 것인가라고. 나는 당장 대답하겠다. 물론 필요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직 이르다고, 그것이 바로 '자업자득'의 논법이다. 어진 사람들은 이 논법을 따르지 않으려고 할지 모르나 내 주장이 사리에 맞는 걸 어쩌랴. 왜냐하면 국산형 신사 , 또는 서양형 신사들은 중국에는 중국 나름의 사정이 있으므로 외국의 평등이나 자유 따위는 중국엔 적용할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되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페어 플레이'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잖으면 그가 너에게 '페어'하지 않은데 너는 그에게 '페어'하게 대한 결과, 너만 바보가 되고 만다. 그래서는 '페어'하기를 바라다가 '페어'에 실패할 뿐 아니라, 가령 '페어'하지 않기를 바라더라도 그 역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페어'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상대를 잘 보고, 만약 '페어'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면 조금도 '페어'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 상대가 '페어'하게 나올 때, 비로소 '페어'를 문제삼아도 늦지 않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다분히 이중도덕을 주장하는 협의가 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중국엔 따로 더 나은 길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중도덕이 있다. 주인과 노예 사이나 남자와 여자 사이의 도덕이 다 다르며, 통일이 되어 있지 않다. 만약 '물에 빠진 개'와 '물에 빠진 사람'의 경우만 유독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편파적이고, 너무나 이른 조치이며, 신사들의 이른바 자유 평등은 나쁘지 않지만 중국에서 실행하기는 너무 이르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페어 플레이' 정신이 널리 실행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적어도 앞에서 말한 '물에 빠진 개'가 인간다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지금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앞에서 말한 대로 상대를 잘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꼭 가려내야 할 필요가 있다. '페어'는 상대에 따라 베풀어야 한다. 무엇 때문에 물에 빠졌던 상대가 사람이면 구해내야 하고, 개면 그대로 둬야 하며, 나쁜 개면 때려야 하는가.(인용자: 마침 사무실의 제 책상 머리맡에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가 없기에 인터넷 인용 후 몇 군데 오자를 수정하였습니다.)


     

    2010년 9월 6일 월요일

    양두구육

    양두구육(), 양의 머리를 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간판으로 내걸어놓고 선전하면서 실상은 나쁜 물건을 판다는 것, 즉 대의명분은 그럴듯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누리꾼(케네디언)의 글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양두구육이라는 말이 이렇게 적절하게 사용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조금 더 덧붙인다면, '약자에게 공정한 기회뿐만 아니라 결과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부터 이명박 정부는 공정사회라는 양두구육식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정부의 정책과 제도는 이미 모두 기득권에 철저히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국민들을 편하게 하는 규제완화는 없고, 재벌기업과 개발업자에게 유리한 규제완화로 넘쳐납니다. 상위 5%의 부동산 부자들을 위해 부동산 거품을 떠받치면서도 13%가 넘는 최소 주거여건에 미달하는 가구에 대한 최소한의 주거 복지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고 있는 나라입니다. 상당수 선진국들에 비해 간접세 비중이 더 높아 조세정책을 통한 소득재분배 효과가 OECD최저 수준을 기록하는데도 부자감세를 실행하는 정권이 공정한 사회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모자라는 세수를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이제 에너지세와 부가가치세 등 간접세를 추가로 올릴 태세입니다. 부동산 부자들이 막대한 불로소득을 올려도 이를 세제를 통해 흡수하기는커녕 제대로 시행도 못해본 종합부동산세를 사실상 무력화하고 말았습니다.(중략)

     

    이러한 불공정 사회를 고착화시키는 구조적, 제도적 틀들을 바로잡지 않고, 구호만 외쳐서는 결코 공정 사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이 같은 구조적 틀을 바꾸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이 같은 상황을 더욱 고착화하고 있습니다. 정책은 늘 반서민이면서 입으로만 친서민을 떠드는 이명박 정부가 또 다시 들고 나온  공정 사회 구현이라는 말이 양두구육으로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정말 공정한 사회를 이루고 싶다면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반칙하는 강자들에게는 더 많은 경쟁을, 약자들에게는 공정한 경쟁 출반선과 기회를!

     

    한국의 '주거복지'의 현실

    강수돌 교수가 지은 <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2010 6. 23. 생각의나무)이라는 책을 넘겨보고 있다. 이 책의 한 대목. 한국의 주거현실에 대한 부분이다.

     

    주택보급률이 이미 2002년 이후 100퍼센트를 넘는데도, 가계의 절반 이상은 '자기 집'이 없다. 또 국민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산다. 아직 206만 가구가 최저주거기준(국토해양부 고시 최저기준은 가구원 1인인 경우 침실은 1개, 총 주거면적은 12평방미터-약 3.6평, 3인 가구는 최소 8.8평) 이하의 집에서 살며, 단칸방에 사는 가구는 112만 가구, 쪽방(벌집방) 생활도 6만 6천여 명이다.(<시사저널> 2009. 8. 26) 월세로 사는 집은 300만 가구라 하고, 방공호로 출발한 반지하에도 150만 가까이 산다.

     

    "반칙왕들이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

    아침에 <프레시안>을 열어보니 우석훈 박사가 쓴 칼럼이 첫 기사로 떠 있다. 제목은 '유명환 딸'만 문제인가? '한국의 반칙왕'들이 사는 법--"그들이 만드는 공정한 사회?"라는 글이다.

     

    정부 여당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후반기 국정 기치로 내건 '공정한 사회'가 부메랑이 될 것이라고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우석훈 박사는 어떻게 반칙왕들이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느냐고 비아냥거리기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들이 만드는 공정한 사회'에 대해 물음표를 붙인 것은 편집자의 생각이다.

     

    오히려 이 글에서 우석훈 박사는 "정치적으로 감사원의 작동을 막고 있어서 그렇지, 나는 아직 한국의 감사원과 자체적 감사기구들이 이런 정도의 일을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부패 정도에 대해서 체감하는 정도는 개인마다 편차가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 사회는 어느 만큼 '썩은' 사회일까.

     

    CPI 즉 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s Index)라는 게 있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 TI)가 매년 국가별 청렴도 순위를 매겨 발표하는 지수다. 한국에도 한국투명성기구(TI Korea)가 있다.

     

    "반부패지수(CPI)는 국내외 기업인 등 전문가들이 바라본 한 국가의 공공부문 부패 정도를 0∼10점으로 나타낸 것으로, 0점에 가까울수록 부패 정도가 심하고 3점대는 사회가 전반적으로 부패한 상태를, 7점대는 전반적으로 투명한 상태를 나타낸다. 한국의 CPI는 전 세계 180개국의 평균(4점)과 아시아ㆍ태평양지역 국가 평균(4.03점)보다는 높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의 평균(7.04점)과는 2점 이상 차이가 났다."(한국, 부패지수도 4년만에 악화--OECD국가 중 최하위권으로 전락, 2009년 11월 17일 보도기사) 이 측정에 따르면 우리 사회가 완전히 '썩은' 사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투명한 사회도 아니다. 하지만 그건 이 조사를 시행하는 국가들 전체를 살펴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고, 이른바 '선진국'의 관점에서 보면 무척이나 투명하지 않은 사회, 즉 '썩은' 사회라고 할 수밖에 없다.

     

    부패인식지수 혹은 반부패지수는 그렇다치고. 우석훈 박사는 칼럼에서 다섯 가지 제안을 해놓고 있다.이 다섯 가지 제안만 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행시 채용의 개편과 관련해서도 이 제안은 의미 있는 제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이 칼럼에서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유명환 사태'의 본질을 청년 실업 문제와 관련한 '파토스'와 연관지어 언급한 부분이다. "지금 한국 대중의 파토스는 단연 취업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경기순환의 문제도 있고, 경기 구조의 문제도 있지만, 어쨌든 20대가 새로 사회에 나오면서 부딪히는 취업의 문제는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대의 파토스인 셈이다. 유명환 딸 사건은 바로 이 파토스를 건드렸다. 핵심은 취업 비리이지만, 본질은 반칙왕 사회에 대한 청산 요구가 사회적으로 그만큼 높다고 할 수 있다."

     

    <뷰스앤뉴스> 2010년 9월 6일자 기사 "외교부만이 아니다. 모두가 썩었다"--네티즌 '내부고발' 속출 "썩은내 진동하는 나라 싹 바꿔야"라는 기사는 그 실상은 고발하고 있다.  '유명환 사태'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확 드러내 보여주었다. "과연 '공정한 사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이명박 대통령이 전방위적 '낙하산 특채 비리'에 메스를 들이댈지 여부를, 지금 국민들은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과연 "반칙왕들이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나는 거기에 물음표를 붙이는 쪽이다.  

    TED가 밝힌 100대 사이트

    The Web is constantly turning out new and extraordinary services many of us are unfamiliar with. During TED University at this spring’s TED2007 in Monterey, Julius Wiedemann, editor in charge at Taschen GmbH, offered an ultra-fast-moving ride through sites in many different areas, from art, design and illustration, to daily news, blogs and curiosity. Now, by popular demand, here’s his list of 100 websites you should know and use >>

    CURIOSITY & KNOWLEDGE
    reuters.com
    research.philips.com
    readme.cc.png
    podtropolis.com
    papertoys.com
    new7wonders.com
    lipsum.com
    thomasedison.org
    beelinetv.com
    useit.com
    submarinechannel.com/titlesequences
    visual-literacy.org
    cartype.com
    captology.stanford.edu
    bannerblog.com_au
    ge.com
    curiosityshoppeonline.com
    creativecommons.org
    lawsofsimplicity.com
    gnu.org
    digg.com

    GRAPHICS, MUSIC & ARTS
    yugop.com
    vincent-vella.com
    uva.co.uk
    tutorialblog.org/free-vector-downloads
    tate.org.uk
    squidfingers.com/patterns
    sohodolls.co.uk
    radioblogclub.com
    photogravure.com
    netdiver.net/illustration
    mine-control.com
    matthewmahon.com
    marcelod2.com.br
    magwerk.com
    kraftwerk.blocmedia.net
    headbangers.tv *
    grupow.com/circulo
    creaturesinmyhead.com
    bernhardwolff.com
    arturofuentes.com
    alennox.net

    E-COMMERCE EXPERIENCE
    colette.fr
    imaginemusicstore.com
    canyon.com
    coft1.com
    heftyrecords.com
    ourtype.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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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keid.nike.com
    feelthepower.biz
    shopcomposit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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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gentprovocateur.com

    SEARCHING & FI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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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평수 염형철 장동빈

    <미디어오늘> 2010년 9월 4일자 인터넷판에 실린 인터뷰 기사 "4대강 중단, 수도요금 거부운동 검토"- 이포보 '41일 고공농성' 마무리…박평수 염형철 장동빈 환경운동가를 읽는다. 이 세 분의 발언 속에서 한국 언론의 문제점이 조금 더 여실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 경향 한겨레 등 일부 언론을 제외하면 대형 신문은 고공농성 현장을 많이 다루지 않았다. 조중동은 4대강 사업 저지를 하는 환경 단체들이 쓰레기를 불법 매립했다는 보도 등 이번 농성과 관련한 부정적인 보도를 하는 것이 많았다.

     

    박평수
    "실제로 우리가 이포보 올라가서 활동을 시작할 때 조중동에서는 제대로 보도를 안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느닷없이 KBS, 조중동에서 쓰레기 관련 뉴스
    가 툭 튀어나왔다. 정말 이런 보도를 볼수록 언론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MB의 홍보 매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환경 운동하는 사람들이 언론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됐다. 고양 지역 환경운동 연합 책임자로서, '지역의 양심세력과 함께 언론과도 관련된 일을 함께 묶어서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염형철
    "언론은 사회적 소통의 도구로서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현재 한국 언론은 사실과 뉴스를 전달하는 매체라기보다는 거의 자신들의 정치 의견을 전달하는 형태가 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면서 소통하고 통합돼서 발전되는 근거가 사라지는 비극이다."

     

       
     

    ▲ 박평수 고양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장, 장동빈 수원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염형철 서울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왼쪽부터)모습. 염 처장은 "살이 10킬로그램이나 빠졌지만, 다시 금방 찌고 있다"며, 장 국장은 "40여일 간 기른 수염을 자르는데만 20분이나 걸렸다"며, 박 위원장은 "쉬운 질문을 해달라"며 웃음을 내보였다. 이치열 기자 truth710@.jpg

     

     

    2010년 9월 5일 일요일

    지역공동체와 독서생태계 키우는 ‘북스타트’

    <한겨레> 2010년 9월 4일자, 백원근 책임연구원(재단법인 한국출판연구소)의 칼럼, 지역공동체와 독서생태계 키우는 '북스타트'를 스크랩해놓는다. 백원근 책임연구원은 <문학사상> 2010년 8월호에 '책 읽는 나라 만드는 ‘북스타트 운동'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도 있다.

    지역공동체와 독서생태계 키우는 ‘북스타트’

    백원근의 출판 풍향계 /

     

    9월은 독서문화진흥법이 정한 ‘독서의 달’이다. 그래서 매년 9월이면 다양한 독서 관련 행사가 전국의 도서관과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열린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이 10일부터 이틀간 충북 제천 기적의도서관에서 열리는 ‘2010 북스타트 전국대회’이다. 2년 전 서울에서 첫 전국대회가 열린 뒤 지방에서 처음으로 개최하는 북스타트 축제이다.

     

    북스타트(Book Start)는 ‘책과 더불어 인생을 시작하자’는 취지를 담아 출생 후 1년 미만의 영아와 그 양육자를 대상으로 지역사회가 실시하는 독서 및 육아지원 운동이다. 지역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에게 탄생 축하의 그림책 2권과 도서관 이용 안내 등이 들어 있는 북스타트 가방을 선물하고, 가정마다 그림책을 매개로 아기와 소통하는 행복한 시간을 갖도록 계기를 마련한다. 맹목적인 조기 독서교육과는 뿌리가 다른 ‘책 읽기의 즐거움’과 ‘독서 평등’을 선사하는 사회적 모성의 실천이다. 그래서 시민과 행정기관이 협력하여 시행하는 민관 협력의 모범 사업으로 꼽히기도 한다.

     

    영국, 일본에 이어 2003년 시작된 한국의 북스타트는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대표 도정일)이 주도하여 조직한 북스타트코리아와 전국 활동가들의 노력, 정부·지자체 후원에 힘입어 현재 전국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절반에 가까운 곳에서 시행중이다. 여기에는 <한겨레>의 기획기사 연재도 큰 도움이 되었다.

     

    제천시와 북스타트코리아의 지원으로 출범한 제천북스타트는 2005년 5월에 발족하여 올해로 6년차를 맞이했다. 매주 목요일을 ‘북스타트 데이’로 정하고, 제천시에 태어난 모든 아기들에게 첫 선물로 그림책 두 권과 손수건, 가방, 안내 책자로 꾸려진 북스타트 가방을 자원활동가가 도서관, 보건소에서 배부한다. 책 선물에 그치지 않고 2개월 과정의 체계적인 정규 부모교육 과정을 만들어 아기와 양육자(엄마 등)가 친교하며 아기의 사회성을 길러준다. 북스타트 후속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진 33개의 ‘품앗이 공동육아 동아리’에서 그림책을 읽어주며 ‘나의 아기’가 아닌 ‘우리의 아기’를 함께 키운다. 육아 스트레스도 날려버린다.

     

    제천북스타트는 무엇보다도 ‘찾아가는 북스타트’에 중점을 둔다. 즉 북스타트에 관심을 갖기 어려운 다문화가정, 장애우 및 소외지역 가정의 아기들 모두가 그림책을 보고 자라며 인생을 시작하도록 자원활동가 엄마들이 산 넘고 물 건너 집에까지 정기적으로 방문해 그림책을 읽어준다. 이러한 ‘얘들아, 그림책이랑 놀자’ 프로그램과 연계된 북스타트의 진화, 공동육아 동아리는 선진국에서도 전례를 찾기 어려운 한국 시민사회의 놀라운 활동력을 보여준다.

     

    제천북스타트 위원장인 김수연 교수(대원대학)의 최근 연구를 보면, 북스타트를 접한 아기들과 그렇지 않은 아기들 사이에는 책에 대한 태도와 창의력 등 여러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시민의 힘을 바탕으로 품앗이 공동육아와 함께하는 책 읽기 문화 조성으로 건강한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 제천, 이외에도 진해를 비롯한 전국 여러 지역의 사례는 우리 사회의 희망이자 독서 생태계 발전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이번 전국대회를 계기로 북스타트 미실시 지역의 관심과 참여가 더욱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책 읽는 사회야말로 삶의 질이 높은 성숙한 민주사회를 만드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백원근 재단법인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2010년 9월 4일 토요일

    강신준 교수의 <자본> 번역

    <한겨레> 신문 2010년 9월 4일자 한승동 기자의 기사 '왜 오늘 다시 ‘자본’을 들춰야 할까요'와 <한겨레21> 2010년 9월 3일자(제826호) 안수찬 기자의 '이상하게 가난한 자본주의 탐구'를 모두 스크랩해놓는다. 더불어서 <프레시안> 2010년 9월 3일자 강양구 기자의 인터뷰 기사 '대박' 꿈에 취해 벼랑 끝에 선 개미들아, '무기'를 들자! 도 함께 스크랩해놓는다.

     

    〈자본- 경제학 비판 1~3〉

    카를 마르크스 지음·강신준 옮김/길·전5책 각각 3만~3만5000원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독일어판 원전의 한글 번역본이 완간됐다. 2008년 5월에 1쇄를 찍은 제1권 2책, 그리고 이번에 나온 제2권, 제3권 2책, 해서 모두 5책으로 묶인 최초의 제대로 된 독일어판(MEW판) 한글 번역본. 10년 가까이 번역작업을 해온 강신준(56) 동아대 교수에게 완역의 의미나 소회부터 물어봤지만, 실은 2년 전 1권 2책이 먼저 출간된 뒤 반응이 어땠는지가 더 궁금했다.

     

    “기대보다는 미지근했다. 이 책(<자본>)에 대한 주의 환기 효과는 분명 있었으나 진보진영의 실천현장에서조차 기대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출판사 쪽에 알아보니 지난 2년간 1권 2책의 총판매량은 7천여권. 영국 <비비시>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꼽았고, 우리나라 <교수신문>도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 1위 도서라는 지식사회 조사결과를 실은 적이 있는 <자본>을 정작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고 읽었더라도 제대로 읽은 사람은 더욱 드물다는 항간의 진실이 원전 번역본이 나온 뒤에도 크게 바뀐 게 없다는 얘긴가? 충실한 완역본이 나온 뒤에도 그럴까?

     

    지난해 1년간 연구년을 얻어 가 있던 독일에선 2008년 세계금융공황 위기 이후 <자본>이 더욱 각광을 받았다. 독일 전역의 대학 <자본> 수강생 수가 3배 이상 늘었고 <자본> 출판과 판매량도 크게 늘었다. 사민당 좌파와 통일사회당 계열이 합친 독일 제3정당인 좌파당 링케도 강령에서 빼버렸던 마르크스 이론을 다시 넣을 가능성이 커졌다. 가히 마르크스의 부활, 마르크스 르네상스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한국에선 “마르크스의 책 판매나 <자본> 수강생 수에 별다른 변화가 없고, 다만 <자본>의 다이제스트 개설서류 출판만 좀 늘었다”고 강 교수는 말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읽기는커녕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위험을 각오해야 했던 책, 그래서 읽기를 열망했으되 읽을 수 없었던 <자본>을 막상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니 이젠 읽으려는 열망이 사라져버린 것인가? 왜 읽지 않는 것일까? 읽기도 쉽지 않고 값도 만만찮은 이런 방대한 저작을 지금 이 시대에 도대체 왜 읽어야 한단 말인가 하는 강박적 푸념과도 상통할 수 있다.

     

    “우선 읽지 않는 게 문제지만, 읽어도 그 속에 풍부한 실천적 의미나 대안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냥 단순한 자본주의 비판서, 또 하나의 고전 정도로만 받아들인다. 그러니 더욱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일반 노동자들도 아는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단순한 비판서라면 마르크스가 왜 3천 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을 썼겠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비판을 통한 새로운 대안 건설이라는 실천적 목표를 추구했다.” 대학 강단에서, 노동 현장에서 <자본>과 씨름하면서 살아온 지 20년이 넘은 그는 말한다. “한국 진보운동의 한 축인 노동운동을 보면서 대안 제시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본주의 모순을 넘어설 새로운 대안, <자본>은 그 대안 모색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한국 진보운동에 대안이 부족한 것은 <자본>을 읽지 않았거나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란 얘기다. 따라서 강 교수가 이번 완간의 의미, 소회를 무엇보다 “제대로 된 번역본을 냈다는 것, 그래서 한국 진보운동의 올바른 대안 모색에 나름대로 기여하게 됐다는 것”에서 찾는 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자본>을 쓰게 만든 주요 배경 중의 하나는 ‘지독한 가난’이었다. 특히 노동자들에게 가난은 더 심하고 일상적이었다. 가난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19세기의 가난은 그 전에는 없던 특수한 가난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시작된 그 이상한 가난,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신분사회의 정치적 불평등이라는 족쇄는 깨졌지만 부르주아들의 독점과 더불어 심화된 경제적 독재가 마르크스를 혁명과 <자본> 집필로 이끌었다.

     

    “경제상태는 서울보다 부산이 더 열악하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학비를 댈 수 있는 학생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내가 나가는 부산지방노동위원회 자료들을 보면 기가 막힌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200만원 이하의 봉급으로 ‘동물적 수준’의 삶을 힘겹게 이어간다. 잘 사는 나라에 속한다는 우리나라 빈곤율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상당한 성장률을 유지하는데도 노동소득 분배는 계속 줄고 성장의 과실은 기득권층이 부동산이나 금융소득 형태로 앗아가버린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적 문제상황은 지금도 변함없다. 케인스 이론이 등장한 193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의 ‘전후 번영’기간에만 빈곤이 줄었는데 자본주의 역사에서 그건 예외적인 기간이었다.”

     

    노동자들이 죽도록 일해도 겨우 죽지 않을 정도의 재생산 여력만 남기고 그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부자들이 부등가교환을 통해 앗아가버리는 모순. 이 노동과 가난의 불일치가 존재하는 한 <자본>을 읽고 재해석해야 할 이유도 사라질 수 없다. 마르크스는 여기에다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킨 자본주의적 ‘교환’이 야기하는 모순에도 주목했는데, 두 사람 이상의 사이에서 이뤄지는 교환은 사회적 합의민주주의가 전제돼야 하지만, 그것은 사적 소유 때문에 왜곡돼버린다. 강 교수는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반기업적이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대기업을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생각했다며, 다만 누가 그것을 소유하느냐는 사적 소유와 전횡의 문제를 파고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우리 상황에선 기업민주주의를 비롯한 이 민주주의 문제가 특히 중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11월 서울에서 열릴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의 주요 의제 중에도 신자유주의 파탄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일부 사적 부문을 사회화하는 쪽으로의 방향전환, 사회적 관리 비율을 높이는 쪽으로의 선회가 포함될 것이라고 그는 내다봤다. “사회적 관리 비율이 일정 수준을 넘게 되면 이미 그건 자본주의체제가 아니다.” 혁명은 폭력이 아니라 민주주의 증진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강 교수는 <자본>이 재미있다고 했다. “레버리지 효과 등 지금 월스트리트의 신자유주의 대변자들이 입에 올리는 얘기들이 그대로 들어 있고, 지금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현실이 150년 전 영국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걸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들로 가득 차 있다.” 마르크스는 금융·신용은 두 개의 얼굴, 하나는 사기꾼, 또 하나는 다음의 세계를 보여주는 예언자의 얼굴을 보여준다고 했단다. 금융공황이 일어난 건 그만큼 자본주의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얘긴가.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강신준 교수 “‘자본’은 내 운명”

    이론과실천판 감수 뒤 20여년 ‘씨름’
    “제4권 ‘잉여가치학설사’ 번역 도전”

    강신준 교수에게 <자본>은 “내 운명을 바꾼 책”이다. 그는 농민운동에 관심이 있었는데, 집안 형편도 어려워 생계도 도모할 겸 농협에 들어갔고 그곳을 평생직장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직장 길 건너편에서 출판사를 하던 친구 김태경 이론과실천 사장이 어느날 대학생들이 초역한 <자본> 제1권 원고뭉치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논문을 쓰려고 휴직중일 때는 아예 2권, 3권 번역을 ‘요구’했다. 애초 사회철학을 공부하려고 독문학과에 들어간 덕에 그는 간호사로 독일에 가서 살고 있던 누나를 통해 용케 입수한 위장된 가짜표지의 <자본> 원전을 이미 읽은 터였다. 그렇게 해서 1987년에 한국에선 처음으로 그가 감수한 익명의 <자본> 제1권이 이론과실천에서 나왔다. 출판사 관계자들한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령이 내리고 난리가 났는데, 그 뒤 제2, 3권을 강 교수 실명으로 낼 때는 별일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뜻밖에도 그 번역 출간이 연구업적으로 인정받아 동아대에 교수로 임용되기까지 했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막 시작된 한국 사회의 상전벽해가 그의 운명도 바꾼 것이다.

    <자본>의 또다른 판본인 김수행 교수의 영어판 중역본 <자본론>(비봉출판사)이 나온 것은 그 바로 뒤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서는 마르크스가 <자본> 제1권을 펴낸 지 120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한글판 <자본>이 선을 보였고 1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고서야 충실한 독일어판 원전 번역이 이뤄졌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한글판 <자본>은 이렇게 김수행, 강신준 딱 두 판본뿐이다.

    이번에 완역된 것은 이론과실천본의 모본이었던 메프(MEW: Marx Engels Werke)판이다. 마르크스 전집은 메프판 외에 메가(MEGA: Marx Engels Gesamtausgabe)판이 있는데, 메가판은 전문학술판이라 할 수 있다. 메가판은 애초에 학술연구 목적으로 원본 주석 외에 아무 주석도 달지 않은 채 초판, 중판에다 미발간 초고와 발췌노트, 부속자료까지 망라하고 있는데, <자본>만 24권으로 기획할 만큼 분량이 방대하고 20권이 간행된 지금도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고 메프판이 학술적 엄격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제2권, 3권의 원고도 1865년 무렵 이미 써 놓았으나 손보며 미루다가 결국 끝맺지 못했다. 하지만 대신 그 작업을 마무리한 엥겔스는 제2권 제1판 서문에서 “내가 개조하거나 삽입한 분량은 모두 합쳐야 인쇄된 쪽수로는 10쪽에도 못 미치는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마르크스가 남긴 원고를 원문 그대로 살리려 애썼다. 마르크스의 또 다른 유고인 ‘잉여가치학설사’는 엥겔스도 마무리짓지 못해 카우츠키가 1905년에야 <자본> 제4권(3권 분책)으로 출간했다. 일반적으로 <자본>은 제3권까지를 이르는 것이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4권도 넣어야 한다.

    강 교수가 모본으로 삼은 건 제1권의 경우 1867년 마르크스(1818~1883)가 직접 편집한 초판본이 아니라 1890년 엥겔스(1820~1895)가 편집한 제4판이다. 2권은 1890년의 제2판, 3권은 1894년의 초판을 각각 사용하였다. 그로서는 1987년 이론과실천본 제1권 감수까지 계산에 넣으면 20년 넘게 <자본> 번역에 관여해온 셈인데, 이번 완간이 “하나의 매듭,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4권 잉여가치학설사 번역에도 도전하겠다고 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강신준은 친구가 불쑥 내민 보따리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가져가보면 알 거야.” 친구 김태경은 그렇게만 말했던 것이다. 둘은 대학 시절 ‘74학번 이념 공부 모임’에서 만났다. 졸업 뒤 김태경은 ‘이론과실천’이라는 출판사를 차렸고, 강신준은 농협 조사부에 취직해 주경야독하며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펼쳐보니 원고 뭉치였다. 독일어판 <자본> 1권을 한글로 번역한 원고였다.

    군사정권 서슬 아래 가명으로 첫 번역

    그 내용이 낯설진 않았다. 강신준은 대학 2학년 때 독일에 있던 누나에게 부탁해 독일어판 <자본> 발췌본을 우편으로 받아 읽은 적이 있었다. 외국 우편은 안기부·문화공보부·체신부에서 차례로 검열하던 때였다. 대담하다 못해 무모한 짓이었지만, 못 보게 하니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일부러 표지를 바꿔 씌워 책의 정체를 군사정권의 공무원들이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이번엔 발췌본이 아닌 원본이었다. 익명의 ‘빵잡이’(징역을 살다 나온 운동권) 6명이 초벌 번역을 했으니 감수해달라는 게 출판사 사장이 된 친구의 부탁이었다. 그들 ‘빵잡이’의 정체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대학 3·4학년이면 ‘금서 번역’도 곧잘 해내던 시절이었다. 독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강신준이 완결의 적임자라고 친구는 생각했을 터다. 그래도 그렇지, 쿠데타 주역인 전두환 대통령의 서슬이 밤과 낮으로 짜르르했다. 박사 논문 준비생 강신준은 제 앞길을 생각했다. 교수의 꿈은 둘째 치고, 다니던 직장마저 잃는다면?

    거친 원고를 두루 감수해 펴냈으나, 결국 번역자의 이름은 가짜로 지었다. 한국 최초의 <자본> 1권은 ‘김영민’이라는 허구의 번역자를 표지에 내붙이고 1987년 9월 세상에 나왔다. 그 운명은 여름 한철 매미와 같았는데, 오직 일주일 동안만 시중에 나돌았다. 문화공보부의 납본필증을 받아야 정식 판매가 가능했다. 책을 문공부에 납본하면 필증이 나올 때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어차피 허가해줄 일이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만, 필증 없이 책을 팔기로 했다. 예측한 대로 전두환 정권은 김태경 사장 등 출판사 관계자 2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했다. 그들이 잡히면 익명의 번역자를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공안 검사가 강신준을 구했다. 실은 <자본>까지 구해냈다.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거든요. 경제학자들의 자문을 구하려 했는데, 아무도 나서는 학자가 없고…. 결국 검사가 혼자서 몇 번이나 읽었대요. 그래도 이적성을 입증할 논리를 찾지 못해 기소를 포기해버렸어요.” ‘금서’로 통했던 <자본>까지 덩달아 해금됐다. 무작정 기소하고 보는 요즘 검사들에겐 우스운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소련의 88올림픽 참가가 절실했던 당시 군사정권의 처지도 은근히 영향을 줬겠지만, 군인 출신 대통령의 진짜 마음을 이제 와서 캐낼 도리는 없다. 어쨌건 살판난 젊은 사장과 번역자는 곧바로 후속 번역에 착수했고, 이번엔 처음부터 강신준이 일을 도맡아 제 이름으로 책을 냈다. 1989년, <자본> 2·3권이 마저 나왔다. 한신대 해직 이후 강사로 떠돌던 김수행이 번역한 <자본론>(비봉출판사 펴냄)이 나온 것은 그로부터 반년 뒤였다.

    »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 끼친 책’ 〈자본〉 .

    한국의 마르크스경제학, 논의 없이 경시만 난무해

    논문 준비하랴 은밀히 번역하랴 정신없던 젊은 경제학도는 이제 교수가 됐다. 그리고 20년 만에 다시 한번 <자본>(도서출판 길 펴냄)을 완역했다. 2008년 1권을 펴낸 뒤 2년여 만인 올해 8월, 마지막 3권이 나왔다. 2002년부터 시작한 번역 작업의 열매다. 강신준 동아대 교수(경제학)는 ‘옮긴이의 말’에서 “20년 동안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이제야 겨우 일부나마 내려놓는 기분”이라고 썼다.

    그가 짊어졌던 짐의 정체는 조금 복잡하다. 우선 ‘이론과실천판’ <자본>은 1990년대 후반 출판사가 망하면서 절판됐다. 남아있는 ‘비봉판’ <자본론>은 영어판을 번역한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독일 사람이다. 독일어로 <자본>을 썼다. 정확한 번역은 당연히 독일어판을 따라야 하는데, 오랫동안 ‘완역된 원전’이 한국에는 없었던 것이다. 20년 전 번역에 대한 아쉬움도 컸다. “젊을 때라 용감하게 번역했지만, 실은 한두 번만 읽어본 상태였고, 한글로 다듬는 수준도 떨어졌거든요.”

    그러나 진짜 ‘짐’은 따로 있다. 마르크스경제학의 현실이다. 한국경제학회 회원은 2천여 명이다. 비주류 경제학자들이 모인 사회경제학회 회원은 150여 명이다. 그나마 케인스주의 등을 주로 전공했고,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는 10여 명 정도다. 박사학위 소지자를 포함해서 그렇다. “몇몇 대학에 겨우 하나씩 있지요.”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들이 얼마나 있는지 물었을 때, 강 교수는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짚어 헤아렸다.

    “<자본>이 완역되자마자 1991년 소련이 붕괴했지요. 마르크스를 공부하겠다고 독일에 유학간 학자들이 돌아와서 ‘마르크스는 틀렸다’는 이야기만 하고 다녔어요. <자본>을 한국의 현실에 본격적으로 접목시킨 학문적 논의는 거의 없었고…. 진보세력 가운데도 마르크스주의를 경시하는 그룹이 주류를 이뤘지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이 책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겁니다.”

    영국 〈BBC〉가 1990년대 말, 지난 1천 년간 인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을 조사해 발표했다. <자본>이었다. <교수신문>이 2008년,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을 조사해 발표했다. <자본>이었다. “그런데도 정작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자본주의 비판 말고는 별 내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자본주의가 모순에 가득 차 있다는 건 요즘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알아요. 그걸 왜 3천 쪽에 걸쳐 썼을까요? 마르크스의 <자본>에는 ‘건설’의 내용이 있거든요. 자본주의 상품관계, 자본의 축적, 자본의 재생산 등을 품는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건설’ 말입니다.”

    강 교수는 러시아 혁명과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를 비교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부였던 로자 룩셈부르크, 카우츠키, 베른슈타인 등이 모두 ‘러시아 혁명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라고 했어요. 러시아 소비에트는 레닌주의, 또는 더 나쁜 왜곡인 스탈린주의지요. 마르크스주의의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부분을 승계한 것은 오히려 북유럽입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그들이 구축한 엄청난 복지제도의 가닥마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새로운 사회 건설의 처방이 담겨 있어요. 한국도 마르크스의 과학적 요소를 잘 추렴해서 북유럽 모델보다 더 좋은 생산체제를 갖출 수 있습니다.”

    북유럽 모델의 가닥마다 숨은 마르크스식 처방

    그것이 완역본을 다시 낸 이유다. 20년 전, 영문 모를 보따리를 열었을 때, 전율했던 이유다. 옮긴이의 해제에서 강 교수는 <자본>이 탄생한 배경으로 ‘이상한 가난’을 꼽았다. 가난은 예전부터 있었으나, 죽도록 일해도 가난한 자본주의의 ‘특수한 가난’에 대한 의문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상한 가난의 시대를 강 교수는 오늘에 다시 만난다. <자본>은 여전히 까다로운 책이지만, 자본주의도 여전히 잔인하다. 둘 중에 무엇으로부터 희망을 얻을 것인가. 강 교수는 묻는다.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영국의 BBC가 1999년 9월 밀레니엄을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사상가를 시청자에게 물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과학자 앨버트 아인슈타인을 2위로 밀어내고 상당한 표차로 1위를 차지했다.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 방송국은 2005년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를 시청자에게 다시 물었다. 역시 1위는 마르크스였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한 금융 위기로 전 세계 경제가 지금까지 휘청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평가에 토를 달 이들은 더 이상 없을 듯하다. 마르크스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아니, 2003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최근의 상황은 "자본주의의 오류에 대한 마르크스의 지적이 많은 부분에서 옳았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시켰다.

    '마르크스 르네상스'를 지켜보면서 눈을 한국으로 돌려보자. 유럽은 물론이고 일본, 중국, 러시아, 타이, 이란 등 세계 곳곳에서 '마르크스 재조명'이 한창이라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다. 대중은 물론이고 학계도 마르크스를 '죽은 개' 취급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강신준 동아대학교 교수(경제학)가 <자본> 번역을 마무리했다. 지난 2008년 1권을 펴낸 데 이어서 최근에 3권이 나왔다. 1987년 <자본> 번역과 첫 인연을 맺고 나서 23년 만의 일이다. 그는 "20년 동안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이제야 내려놓는 기분"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 27일 서울 통인동의 한 카페에서 강신준 교수를 만났다. 그는 1978년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대학교 2학년 때 <자본>을 첫 대면했다. 왜 그는 30년이 넘게 마르크스의 <자본>에 매달려 왔을까? 21세기에 다시 <자본>을 번역해 펴낸 까닭은 무엇일까? 그에게 직접 물었다.

    ▲ 강신준 동아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자본> 때문에 바뀐 인생

    프레시안 :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이 '김영민'이라는 가명으로 번역돼 나온 게 1987년이다. 23년 만에 <자본>을 완간했다. 소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강신준 : 그렇다. 지난 1000년 동안 출판된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꼽히는 귀중한 지적 유산이 이제야 한국에서 올바른 자리를 찾게 되었다. 사회과학의 큰 조류의 출발점이 되는 책이 <자본>인데,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의 원본을 제대로 소개할 수 있어서 20년 넘게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이제야 일부나마 내려놓은 기분이다.

    프레시안 : 엄혹한 시대에 <자본> 1권이 가명으로 출간되다 보니, 그 뒷얘기를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강신준 : 개인적으로는 <자본> 때문에 내 인생이 바뀌었다. 나는 1974년에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했다. 나중에는 독일에 가서 철학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당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재에 대한 반대 운동을 막고자 긴급 조치를 연달아 발표할 때라서 결국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끌려갔다. 군대를 다녀와서 1978년에 학교에 복학했다.

    철학을 공부하려던 학생이니까, 당연히 마르크스의 <자본>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마침 독일에 누님이 있어서, <자본>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책을 그대로 보냈다가는 당장 검열에 걸릴 테니까, 누님이 <자본>의 표지를 벗기고 괴테 책의 표지를 입혀서 보냈다. <자본>의 주요 내용을 발췌한 문고본이었는데, 그게 <자본>과 나의 첫 대면이었다.

    그 책을 읽다 보니 <자본>을 제대로 보고 싶다, 이런 욕구가 더 커졌다. 제대로 된 <자본>을 보고자 서울 시내의 대학 도서관을 다 뒤졌다. 당연히 어느 대학에서도 책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성균관대학교에서 사서가 <자본>을 찾아주었다. 독일어 원본을. 사서가 실수를 한 것 같은데….

    그렇게 구한 책을 학교 앞에서는 복사를 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학교 안팎을 사찰할 때니까. 의정부까지 가서 책 전체를 한 번에 복사하고 나서 파지까지 전부 다 수거하고서야 나만의 <자본>을 가질 수 있었다. 1978년 여름방학 때 마산의 경남대학교 도서관에서 그렇게 복사한 <자본>을 읽기 시작했다. <자본>과 정식 인사를 하는 순간이었다.

    프레시안 : 그렇게 만난 <자본>과 인생이 엮이기 시작했는데….

    강신준 : 그렇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가 <자본>을 번역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자본> 3권에 나오는 '이윤율 저하 경향'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그런데 나는 석사 학위를 마치고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 없었다. 집안이 넉넉지 않아서 빨리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부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석사 학위를 받자마자 한국전력공사를 거쳐서 1985년에 농업협동조합(농협)에 취업했다. 당시에 농협은 아주 좋은 직장이었다. 본부의 대졸 직원 중에는 진보적인 이들이 많았다. 그들과 어울려서 공부도 하고, 동아리 활동도 하고, 그렇게 평범한 직장인으로 농협을 잘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자본>이 내 인생으로 들어왔다. 1986년의 어느 날이었다. 출판사를 경영하던 오랜 고향 친구가 만나자고 하더라. 그 친구가 바로 출판사 이론과실천의 대표였던 김태경 씨다. 김태경 대표와 최광열 편집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한테 원고 뭉치를 보따리에 싸서 주었다. 가타부타 얘기도 없었다. "집에 가서 한 번 읽어봐!"

    집에 와서 원고를 살폈더니, 그게 바로 <자본> 1권의 원고였다. 깜짝 놀라서 사정을 들어보니, 김 대표의 얘기가 이랬다. "운동권 학생 6명이 오랫동안 강독을 하면서 나눠서 번역을 한 원고다. 그 원고를 출판하고 싶은데 출판을 해도 될 상태인지 한 번 봐 달라." 당시 이론과실천은 시국 사건으로 제적된 대학생의 집합소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이해가 되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살폈는데 원고가 들쭉날쭉했다. 어떤 부분은 번역이 상당히 좋은데, 어떤 부분은 매우 나쁘고….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독일어 실력도 편차가 있고, 한국어로 쓰는 데도 차이가 있었을 테니까. 검토 끝에 이 상태로 내기는 힘들다, 이런 결론을 김 대표에게 전했다. 그러자 김 대표가 이렇게 제안했다. "그럼, 자네가 교열을 봐!"

    직장을 다녀야 하는 처지에 난감했지만 <자본>이 아닌가. 시간을 낼 만큼 의미가 있었다. 수개월 동안 초벌 원고를 고치는데 매달렸다. 분량이 많아서 나중에 일부는 산업은행에 다니는 후배도 참여했다. 그렇게 최종 원고가 만들어졌는데,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다. 애초에 남의 원고니까, 고쳐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자본>을 거칠게나마 해독이 가능한 한글로 옮겨놓았다는 것일 텐데…. 김 대표가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김 대표가 원고가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찍어내는 게 의미가 있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자본>을 출간하는 게 '검열'이라는 지적 족쇄를 깨는 역사적 의미가 있지 않나, 이런 생각도 했었고.

    당연히 찍으면 고발이 되고, 유죄가 될 가능성이 크니까. 애초에 김 대표가 나는 철저히 보호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가명으로 출판을 했다. 어차피 문화공보부에 납본을 하고 1주일쯤 뒤 검열을 받으면 판매 금지가 될 테니까, 딱 한 주만 팔자, 이런 각오였다. 실제로 그 한 주일 동안 전국에서 상당히 팔렸다. 물론 그러고는 바로 고발되었고.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그 뒤에 이론과실천의 김태경 대표가 당한 고초는 많이 알려졌다.

    강신준 : 그렇다. 김태경 대표와 최광열 편집장은 곧바로 따로 도망을 갔다. 나중에 들으니 김 대표는 충청남도 서산의 외진 곳에서 회만 실컷 먹었다고 하더라. (웃음) 그 와중에 당시 김 대표의 아내였던 강금실 변호사가 남편을 변호하고자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을 하고.

    프레시안 : 결국 담당 검사가 기소를 못했다.

    강신준 : 그렇다. 검사가 기소를 하려면 <자본>이 이적 표현물이라는 걸 입증해야 했다. 그런데 검사가 대여섯 번을 읽어봐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니까 답답했겠지. 사실 <자본>은 경제학 전공자가 읽어도 어려운데, 검사가 단숨에 이해를 할 수가 있었겠나. (웃음) 그래서 검사가 자문을 구할 전문가를 찾았다.

    1987년 당시에 <자본>에 대해서 얘기를 해줄 만한 학자가 진보 측에서는 김수행, 박영호, 고(故) 정운영 교수가 있었다. 모두 다 한신대학교에서 재직 중이었다. 이분들이야 검사 측에 유리한 얘기를 해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검사가 서울대학교에 재직 중이던 학자들 그러니까 경제학과의 안병직 교수, 고 배무기 교수 두 분에게 자문했다.

    그런데 안병직 교수, 배무기 교수 모두 검사의 자문 요청을 거절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설사 두 분이 자문에 응할 의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의 분위기가 그런 것을 용인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만약 검사 측에 유리한 증언을 하면, 당장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을 테니까.

    결국 검사가 기소를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상황에서 도망을 다니던 김태경 대표는 서대문경찰에 자수를 했고, 조서를 꾸미던 도중에 검사가 마침내 기소를 포기했다. 우여곡절 끝에 <자본>을 옥죄던 족쇄가 풀린 것이다. 이렇게 <자본>이 한국의 독자를 처음 만났다.

    프레시안 : 이렇게 <자본>과 인연을 맺고 나서 1990년까지 이론과실천에서 <자본> 2권, 3권도 번역해 펴냈다.

    강신준 : 뒷얘기를 더 하자면, 원래 김태경 대표가 <자본>을 그렇게 낼 생각은 없었다. 김 대표가,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상당히 권위 있는 학자에게 <자본>의 번역을 의뢰하려 했었다. 그런데 결국은 그 분에게 일을 맡길 수 없었다. 위험 부담을 염두에 두고 영세한 출판사가 감당할 수 없는 상당한 금액의 선인세를 요구했으니까.

    아무튼 <자본>의 족쇄가 풀리고 나서 이론과실천은 당연히 2권, 3권의 번역을 의뢰했다. 마땅한 역자를 못 구한 상황에서 다시 김태경 대표가 나한테 제안을 했다. "2권, 3권도 자네가 번역을 하게!" 1권을 검토, 교열했던 인연도 있었고, 대학원을 다니던 나는 싸니까, 김 대표가 쉽게 제안을 할 수 있었겠지. (웃음)

    프레시안 : 그 제안을 곧바로 받아들인 건가?

    강신준 : 마침 내 신상에 변화가 있었다. 당시 나는 농협에 다니면서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박사 논문 때문에 휴직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휴직을 하는 도중에 생활비를 벌 방도를 찾아야 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던 김태경 대표가 많지는 않지만 매월 생활비를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휴직하는 기간 동안 하루의 반은 논문에, 나머지는 번역에 할애를 하겠다, 이렇게 약속을 하고서 <자본> 2권, 3권의 번역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을 해 놓으니까, 이론과실천에서 2권, 3권은 실명으로 내자고 제안했다. 물론 이미 족쇄는 풀린 상황이었지만, 나로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실명으로 <자본>의 번역을 출판하는 순간 학계랑은 영영 인연이 없어지는 것이니까. 애초에 대학 교수할 생각은 없었지만, 나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게 농협에 복직하는 데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농협의 여러 선배들과 공식, 비공식 면담을 통해서 양해를 받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있었다. '그래, 이런 역사적인 일에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내 이름을 올리는 게 얼마나 영광인가. 설사 <자본> 때문에 농협에 복직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밥이야 굶겠나.' 그래서 2권, 3권을 번역해서 1990년까지 순차적으로 이론과실천에서 펴냈다.

    사실 나중에 당시의 원고 상태를 살펴보면서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많다. 그 때는 박사 과정을 막 마쳤을 때니까, 아직까지 <자본>은 물론이고 마르크스의 사상 자체에 대한 이해가 일천할 때였다. 사실 <자본>은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그 면모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데…. 젊으니까 무모했고, 무식이 용감했다. (웃음)

    프레시안 : 학계는에선 엄두도 못 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동아대학교에 1991년에 임용되었다.

    강신준 : 그러니까 <자본> 때문에 내 인생이 바뀌었다고 하지 않았나! 1990년에 <자본> 번역도, 학위 논문도 끝내고 나서 1991년 9월에 농협 복직이 예정된 상황이었다. 그 즈음에 (그 뒤 한나라당 국회의원,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박형준 씨가 나한테 이런 얘기를 했다. "형, 동아대학교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칠 교수를 뽑는데 지원해 봐요."

    1978년에 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입학한 박형준 씨는 내가 아끼던 동아리 후배였다. 하도 강권을 해서, 밑져야 본전이니까 교수 지원 서류를 준비해 그에게 줬다. 자기가 지원을 하면서 내 것도 낸 모양이었다. 정말로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동아대학교 교수로 채용이 되었다.

    알고 보니, 동아대학교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자를 교수로 채용하려고 했는데 지원자가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자본>을 제대로 읽은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그것을 논문으로 쓴 사람은 더 귀했으니까. 그나마 있었던 몇몇은 이미 다른 대학에 자리를 잡았고. 그런 상황에서 <자본>의 역자가 지원을 했으니 학교에서는 맞춤하다고 생각을 한 거다. (웃음)

    프레시안 : 학계와 인연을 만들어준 1등 공신이 <자본>과 박형준 씨인데, 그와도 여전히 친분이 있나.

    강신준 : 1991년에 같이 동아대학교 교수로 채용이 되었으니까 학교에 있을 때는 친하게 지냈었다. 그 때까지는 박형준 씨도 좌파 성향의 학자였으니까. 그러다 2004년에 부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한다고 얘기를 해서 덕담을 주고받고 헤어졌다. 그 뒤로는 우연히 공항에서 한 번 본 것 빼놓고는 연락을 끊었다. 자기 갈 길을 간 거지.

    ⓒ프레시안(손문상)

    독일어 원전 번역 완간의 의미

    프레시안 : 그렇게 인연을 맺은 이론과실천의 <자본>은 지금 출판사 사정 탓에 절판 상태다. 그리고 약 20년 만에 다시 새로운 번역의 <자본>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미 비봉출판사에서 나온 김수행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의 <자본>이 널리 읽히는 상황이다. 또 북한에서 번역한 <자본>도 있고….

    강신준 : 우선 김수행 교수의 <자본>은 독일어 원본이 아닌 영어판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예전에 읽던 소설 중에는 일본어판을 중역한 것이 많았는데, 그것의 문제점이 여러 차례 지적되지 않았나. 하물며 1000년 동안 출판된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꼽히는 <자본>의 원본 번역본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독일어 원본과 영어판은 그 자체로 많이 다르다. 게다가 김수행 교수의 <자본>은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독자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전의 화폐 단위를 전부 다 한국식으로 옮겨 놓았다. 독일 사람이 썼는데 '근'이 나오고, '필'이 나오고.

    프레시안 : 북한에서 번역한 <자본>은 어떤가?

    강신준 : 그것도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다. 잘 알다시피 해방 직후에 마르크스, 엥겔스가 잠시 주목을 받다가 곧바로 전쟁이 났다. 마르크스, 엥겔스에 관심을 가지던 이들이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계열이었는데, 전쟁이 끝나면 이들이 숙청을 당하면서 북한에서는 사실상 마르크스, 엥겔스 연구의 명맥이 끊겼다.

    우리나라에서 <자본>을 한글로 최초로 번역한 학자는 역시 남로당 계열이었던 전석담 교수다. 전 교수는 국민대학교, 동국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다 월북해서, 나중에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전 교수도 <자본> 1권의 일부를 번역하다 말았고, 이후에도 작업의 진척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북한의 <자본>은 러시아판을 중역한 것인데, 이 러시아판 자체가 문제가 많다. 레닌 사후 스탈린의 해석이 대폭 반영된 책이기 때문이다.

    ▲ <자본>(전5권, 카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길 펴냄). ⓒ길

    프레시안 : 기존의 <자본>과 비교했을 때, 새로 번역을 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무엇인가?

    강신준 :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김수행 교수의 <자본>을 비롯한 기존의 번역은 학술적인 면에서 보자면 부족한 점이 많다. 그래서 최대한 독일어 원본에 충실한 학술적으로 문제가 없는 번역을 하고자 신경을 썼다. 번역의 대본인 MEW(Marx Engels Werke) 판의 쪽수를 병기해, 누구나 학술적 인용을 할 때 원본의 출처를 밝힐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20년 전에 번역을 할 때는 가능하면 원전을 직역했었는데, 이번에는 독자들이 읽기 쉬운 방향으로 했다. 오랜 공부로 뜻을 확실히 아는 것은 자신 있게 풀고, 독일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원전 속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경우에는 다소 어색하더라도 엄격한 독일어식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다.

    독자들이 읽기 쉬게 하면서도 학술적 엄밀함을 놓치지 않는 번역으로,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려고 했는데…. 굳이 점수를 매기자면 한 80점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계속해서 보완해 나가자고 다짐하면서 일단 책을 내놓았다.

    지금 왜 <자본>인가?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자본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책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21세기 지금 이 시점에 <자본>이 다시 번역되어야 하고, 또 가능하면 많은 이들이 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강신준 : 그 질문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준비된 답변이 있다. 대개 지금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자본>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데만 주력했지,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을 놓고는 침묵했다'고 입을 모았다. 과연 그런가? 나는 20년 넘게 현장의 노동자와 <자본>을 같이 읽으면서 이런 평가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 생각해 보자. 오늘도 밥벌이에 지친 노동자들이라면 자본주의가 잘못된 체제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택시 기사는 12시간 맞교대로 일해서 하루 14~5만 원을 번다. 그 중 11만 원을 회사에 사납금으로 바치고, 자기는 고작 4~5만 원을 가져간다. 그 택시 기사들이 과연 이런 어처구니없는 자본주의 체제를 정상이라고 생각할까?

    850만 명이나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어떤가? 자동차 공장에서 정규직 노동자인 옆의 동료는 연봉 6~7000만 원을 받는다. 그런데 자기는 그들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고작 연봉 2000만 원을 가져가는 게 전부다. 이런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본주의 체제는 잘못된 것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 노동자라면 누구나 자본주의 체제가 잘못돼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왜 그는 번역을 해보면 3000쪽이나 되는 어렵고 방대한 책을 썼을까? 단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책을 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프레시안 : 그럼, <자본>에서 진짜로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강신준 :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에는 변증법이 있다. 그에 따르면 봉건 사회의 모순이 폭발하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등장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바로 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하나씩 점검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이후에 등장할 사회, 즉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도 찾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그의 기획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의 구체적 상(긍정의 미래)이나 혹은 그런 사회로 이행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이행 수단)을 쓰지 못한 대신에, <자본>의 곳곳에 그런 '긍정의 미래'의 모습과 '이행 수단'의 내용을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남겨 놓았다.

    노무현,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진보 진영에 절실히 필요한 게 바로 '대안' 아니었나? 바로 그 대안의 단초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파헤친 <자본>의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한국 사회는 <자본>의 제대로 된 번역도 가지지 못한 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 사회에서 <자본> 1, 2, 3권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나? 특히 <자본>에서 가장 대안의 단초가 많이 들어있는 부분은 3권인데, 그것까지 읽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단언하건대, 한 다섯 명 정도일 것이다. 대안에 대한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안 읽었으니 진보의 수준이 낮을 수밖에….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로 촉발된 대공황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적으로 드러난 상황에서 <자본>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준비하는 대안 논의의 출발점이다. 지금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본>을 읽어야 한다. 바로 지금이 <자본>의 시대다.

    금융 위기 예고한 <자본>

    프레시안 : 방금 지적한 대로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면서 전 세계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정체를 해명하는 데 <자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1970년대부터 얘기했던 이들도 머쓱해진 상황이다.

    강신준 : <자본> 3권을 읽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현대 금융의 특징을 얘기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게 '레버리지(leverage, 지렛대) 효과'다. 개인이나 기업이 차입금 등 타인의 자본을 지렛대처럼 이용해 이익을 올리려다 결국은 금융 위기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바로 이 레버리지 효과가 <자본> 3권에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이 레버리지 효과가 결국에는 공황을 낳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얼마나 놀라운가? 140년 전의 마르크스가 오늘날 금융 위기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류 경제학의 상황을 보자.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다는 <맨큐의 경제학>이나 요즘 대안 교과서로 많이 읽히는 <스티글리츠의 경제학>은 항상 시장에서 시작한다. 현실의 경제는 생산-교환-소비의 3단계로 이어지는데 주류 경제학은 '생산'이 빠지고 '교환(시장)'부터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황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마르크스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공황은 생산 영역에서 시작된다.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의 상품을 생산한다. 이렇게 과잉 생산된 상품을 소비하려면 더 많은 소비가 필요한데, 이를 금융 자본이 부풀린다. 여기서 아까 언급한 레버리지 효과가 등장하고.

    그러다 더 이상 과잉 생산된 상품을 소비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는데 바로 여기서 공황이 발생한다. 생산을 자신의 체계에서 뺀 주류 경제학이 공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847년 대공황, 1929년 대공황, 2008년 대공황, 이런 전 세계적인 공황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지적한 학자는 마르크스가 유일하다.

    이런 공황의 메커니즘을 설명한 부분이 <자본> 3권이다. 이곳을 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

    "(공황을 촉발하는) 신용의 주요 대변인들은 협잡꾼과 예언자의 얼굴이 함께 뒤섞인 모습을 하고 있다."

    '예언자'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공황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것을 통해서,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의 경제의 조건을 따져보려고 했던 것이다. 공황이 일어나는 원인을 파악하면 그것을 극복할 수단을 궁리할 수 있으니까.

    프레시안 : 예를 들자면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 게 가능할까?

    강신준 :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과 소비가 불일치한다. 시장을 맹신하는 주류 경제학자의 바람과는 달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항상 생산이 소비보다 많이 이루어진다. 생산과 소비가 시장에서 균형을 딱 맞춘다면, 왜 기업이 그렇게 많은 비용을 소비자를 현혹하는 광고에 쏟아붓겠나?

    이런 불일치의 파국적인 결과가 바로 공황이다. 그렇다면, 공황을 극복하는 방법은 생산과 소비가 가능한 한 일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시장을 맹신하는 이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이다. 100개의 상품을 빌 게이츠 같은 이들이 승자 독식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다른 방식은 1929년 대공황을 겪으면서 케인스가 단초를 제시했던 방법이다. 바로 100개의 상품이 생산되면 무조건 50개를 떼서 사회의 구성원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방법이다. 그 50개를 '사회 임금'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그것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복지 제도다.

    실제로 1998년부터 전 세계가 금융 위기로 큰 충격을 받았을 때, 가장 피해를 덜 본 국가들이 독일, 덴마크, 스웨덴과 같은 유럽의 복지 국가들이다. 바로 이렇게 <자본> 곳곳에 숨어있는 대안의 단초를 찾는다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한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마르크스가 꿈꿨던 사회는…

    프레시안 : <자본>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마르크스가 꿈꿨던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강신준 : <자본>을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확실한 답변을 얻었다.

    먼저 생산 부분부터 살펴보자.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사회주의'라는 말도, '공산주의'라는 말도 쓴 적이 없다. "생산 수단에 대한 공동의 통제"라는 표현을 쓰긴 했는데, 이것을 "생산 수단의 국유화"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생산은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것이고 마르크스는 그것을 명확히 인식했다.

    "생산 수단에 대한 공동의 통제"는 노동자 전체가 의사 결정을 포함한 생산의 전 과정에 참여하는 모습을 뜻한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민주주의다. 흔히 마르크스주의하면 즉각적으로 소련의 볼셰비키가 보였던 소수에 의한 독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연상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절대로 마르크스가 얘기했던 그것이 아니다.

    실제로 레닌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마르크스주의자는 모두 다 이 사실에 공감했다. 내가 2006년에 번역한 칼 카우츠키(1854~1938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한길사 펴냄)를 보면 이런 사실이 잘 나온다. 이 책은 레닌이 1919년 10월 혁명을 통해서 정권을 잡은 후의 행보를 놓고 진행된 논쟁 속에서 나온 것이다.

    레닌은 정권을 잡자마자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비밀 정보기관을 가동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한다. 프랑스 혁명 때 로베스피에르가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다. 이런 레닌의 행보를 놓고 당시 제2인터내셔널의 걸출한 마르크스주의자 세 사람(로자 룩셈부르크, 카우츠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보면 레닌 역시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공개적으로는 카우츠키에게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했지만, 정작 카우츠키와의 논쟁 속에서는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임을 레닌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카우츠키는 이 책 속에서 그런 고민이 담긴 레닌의 글을 인용하면서 주장을 편다.

    역사가 말한다. 똑똑한 소수가 "좋은 사회"라는 답을 내놓고 다수가 그것을 따라가는 식으로는 절대로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는 '천국'보다는 '지옥'이 되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사회 전체의 수준, 그러니까 그 사회의 노동자의 역량이 사회주의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결코 사회주의의 이상향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러시아의 상황이 그랬다. 결국 소수의 정치인이 다수의 노동자를 이끌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독재와 폭력으로 귀결되었다. 그 체제를 바로 노동자들이 1991년에 끝장내지 않았나?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는 민주주의를 강조한 마르크스주의가 옳았다는 걸 입증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소비 부분은 어떨까? 마르크스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소비하는 사회"를 말했다. "능력에 따라서 일하는 사회"는 앞에서 얘기한 대로 생산의 전 과정에서 노동자의 의사가 반영되는 것이다. 한편,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욕망을 사회가 더 많이 채워주는 것이 바로 "필요에 따라서 소비하는 사회"다.

    독일, 덴마크, 스웨덴과 같은 복지 국가는 교육, 보육, 의료 등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욕망을 사회가 채워주려고 노력했다. 이런 기반에서 생산의 영역에서 개인의 창의성이 마음껏 발현되는 사회야말로 마르크스가 가려고 했던 바로 그런 사회다. 마르크스의 이상은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이 실현할 수 있다.

    마르크스 르네상스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자본>의 완간을 앞두고 2009년 독일에서 1년을 보냈다. 실제로 마르크스와 <자본>에 대한 열광을 실감했나?

    강신준 : 난리다. 독일의 베를린에 있을 때 새로운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GA)'을 준비하는 학자들과 교류가 많았다. 그 중에 게랄트 후프만 박사가 대학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강의하는데, 금융 위기 이후로 수강 인원이 세 배로 늘어서 나중에는 인원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독일의 디츠(Dietz) 출판사는 금융 위기 이후 <자본>의 판매량이 2007년에 비해 세 배나 늘었다. 심지어 2009년 기독교민주동맹(기민당)과 사회민주당의 대연정이 깨질 때까지 사민당 소속으로 독일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페어 슈타인브뤼크가 "마르크스가 여전히 옳다"고 선언을 하기도 했고.

    독일에서는 사민당이 1959년 고데스베르크에서 채택한 강령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폐기한 이래로 현실 정치에서 마르크스가 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 최근에 오스카 라퐁텐을 중심으로 한 좌파가 사민당을 나와서 결성한 좌파당(LINKE)의 강령에 마르크스에 대한 재해석을 반영하려는 논의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흐름 속에서도 얼마나 마르크스가 되살아날지는 의문이다. 여전히 수십 년의 분단을 경험한 독일 대중에게, 특히 서독 사람에게는 마르크스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마르크스에 대한 거부감을 마치 한국의 마르크스에 대한 거부감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독일의 금속산업노동조합에서 펴내는 일반 노동자를 위한 교과서 중 한 권을 보면, 임금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노동자가 받아야 할 임금을 이론적으로 따져보면 '지불노동'과 '부불노동(不拂勞動)'으로 나뉜다." 지불노동, 부불노동, 이런 개념을 사용한 이는 마르크스밖에 없다.

    이렇게 독일에서는 마르크스를 명시적으로 내세우지 않지만, 자신들도 모르게 일상생활 곳곳에서 마르크스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은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과 같은 북유렵 국가도 마찬가지다. 즉, 이런 나라에서는 마르크스를 얘기하지 않아도 모든 논의의 전제에 마르크스의 사상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대중은 물론이고 학자 중에도 마르크스의 주저인 <자본>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사회에서 '마르크스 이후'를 얘기한다.

    프레시안 : 요즘에는 마르크스 대신 소스타인 베블런, 칼 폴라니, 생태주의자를 거론하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강신준 : 아까 얘기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그 모든 사람의 출발점이다. 베블런, 헨리 조지, 발터 베냐민, 폴라니, 생태주의자 모두 서양이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한 세기 동안 소화한 마르크스의 유산 위에서 마르크스가 단초로만 제시했던 것, 혹은 그가 생전에 보지 못했던 자본주의의 모습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채우면서 자신의 사상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들 모두의 출발점이 되는 마르크스의 유산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류에 휩쓸려 마르크스 이후를 얘기한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본주의 비판과 대안의 출발점이 되는 마르크스, 특히 그의 주저인 <자본>을 다시 읽는 것이다.

    냉전 시대 마르크스 연구의 한계

    프레시안 : 1960년대부터 특히 유럽을 중심으로 <자본>의 재해석에 목소리를 높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사상 전체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위상을 낮춰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흐름은 한국의 지식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줬는데….

    강신준 : 냉전 시대 마르크스의 사상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었다. 1917년에 혁명이 일어나고 정권을 탈취하자마자 레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당대 최고의 문헌학자 다비드 랴자노프에게 유럽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마르크스의 원고를 모아서 정리토록 한 일이었다. 비록 랴자노프는 레닌 사후 스탈린에게 숙청을 당했지만 이 과정에서 상당한 양의 원고가 소련으로 집중됐다.

    얼핏 생각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적자였던 독일의 사민당이 마르크스의 원고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았다. 1930년대 사민당이 도피 중에 마르크스의 원고의 상당 부분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독지가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이 원고의 상당 부분을 지금 네덜란드의 국제사회사연구소(IISG)에서 보관 중이다.

    심지어 이때 사민당이 경매 시장에 내놓은 마르크스의 원고 일부는 일본으로도 넘어갔다. 당시 일본의 오하라 연구소의 구성원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유럽까지 와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고를 수집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은 지금도 대단해서 한 권에 1500부 정도 찍는 MEGA의 절반 정도가 일본에서 소화된다.

    이런 얘기를 길게 하는 것은 냉전 시대 마르크스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다. 마르크스의 유고 중 상당 부분, 특히 <자본>을 비롯한 후기 원고의 대부분이 소련을 비롯한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상황에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경제학-철학 수고>(강유원 옮김, 이론과실천 펴냄)와 같은 초기 저작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자본>과 같은 후기 저작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는 스탈린에 대한 문제제기의 의미도 있었다. 이러다 보니,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자본>을 폄훼하는 흐름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의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프레시안 : 마르크스 사상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위상을 간단히 설명한다면….

    강신준 : 앞에서도 언급한 MEGA를 예를 들어보자. MEGA는 현재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고를 보유하고 있는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일본 등이 공동으로 펴내는 새로운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이다. 총 116권으로 출간될 예정인데 현재 절반인 58권이 나왔다. MEGA는 1부, 2부, 3부, 4부로 구성돼 있는데 이중 2부는 전적으로 <자본>에만 할애됐다.

    그런데 이 2부의 권수가 전체 116권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자본>이야말로 마르크스 사상의 모든 것이 용해된 그의 주저인 셈이다. 경제학뿐만 아니라 철학, 역사학, 문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이 <자본>에 달려들어서, 마치 금맥에서 금을 찾듯이 마르크스 사상의 정수를 추출해야 한다.

    ⓒ프레시안(손문상)

    <자본> vs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프레시안 :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월급쟁이들 사이에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샤론 레히트 지음, 형선호 옮김, 황금가지 펴냄)라는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서 많은 이들이 "아, 이건 거꾸로 읽는 <자본>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책의 메시지는 "노동자로 살면 만날 그 모양 그 꼴이니, 자본가(자산가)가 되어라" 이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착취를 당하는 노동자에게 저항하기보다는 차라리 자본가가 되라고 유혹하는 책이었다. 1980년대에 마르크스와 <자본>에 열광(만) 했던 많은 이들이 이런 유혹에 넘어갔다.

    강신준 : <자본>에 엥겔스가 오늘날의 '재테크'를 놓고 이렇게 주석을 써놓았다. 재테크는 노동자가 만들어 놓은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나눠 먹고자 경쟁하는 것이라고. 물론 이런 경쟁에 노동자도 참여할 수 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는 이런 경쟁에 참여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책이다.

    그런데 노동자가 그런 자본가 사이의 경쟁에 참여해 돈을 벌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마르크스가 <자본> 3권에서 개별 자본가가 자본가 사이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지배할 수 있는 자본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써놓았다.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가 대자본을 이용해서 버는 돈과 이른바 '개미'가 버는 돈은 비교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또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1997년 외환 위기를 지나면서 2000년대에 본격적으로 재테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997~98년에 주식 시장, 부동산 시장의 폭락했다가 오르면서 현금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엄청난 차익을 챙기면서 모든 사람이 재테크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버핏이나 소로스나 또 개미들의 몫이 커지려면, 마르크스의 설명을 염두에 두면, 잉여가치가 커져야 한다. 잉여가치가 커지려면 노동자를 착취해야 한다. 누군가의 '대박' 뒤에는 노동자의 '착취'가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997~98년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정부의 공식 통계를 봐도, 1997년 이전에는 비정규직이 250만 명이 안 되었다. 그런데 2009년도 비정규직은 570만 명이다. 정부 통계를 그대로 따라도 노동자 300만 명이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락했다. (학자들은 비정규직이 350만 명에서 850만 명으로 약 500만 명이 늘어난 것으로 본다.)

    1997년 이전에 월 250만 원을 받았던 노동자 300만 명이 이제는 150만 원씩 월급을 받고 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에게 애초에 월급으로 갔어야 할 돈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 돈이 다 재테크 시장에서 대박 터뜨린 이들, 그러니까 버핏, 소로스 같은 사람의 주머니로 돌아간 것이다.

    정상적으로 받아야 할 월급 100만 원을 300만 명이 덜 받았다고 치자. 한 달이면 3조 원이다. 1년이면 36조 원, 13년이면 수백조 원이라는 엄청난 규모가 된다. 이렇게 노동자에게 착취한 돈이 다시 그 노동자, 즉 대박을 꿈꾸는 개미에게 돌아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나는 15층 빌딩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을 확률과 비슷하다고 본다.

    물론 개미도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 15층 빌딩에서 뛰어내려도 살아남는 사람이 가끔씩 뉴스에서 화제의 인물로 등장하는 것처럼. 자, 15층 옥상에서 뛰어내릴 자신이 있는 사람은 계속 재테크에 몰두해라. 그럴 자신이 없는 사람은 이 잘못된 자본주의를 가만히 둬서는 안 된다.

    나한테 소박한 꿈이 있다. 제대로 된 노동조합이라면,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이렇게 변했으면 좋겠는데, 조합원에게 '노동 계급의 성서'인 이 <자본>을 선물로 줘야 한다. 지금도 노동조합 창립 기념일에 많은 돈을 들여서 조합원에게 선물을 준다. 텐트 같은 것. 그런 데다 돈을 쓸 게 아니라 이 <자본>을 조합원에게 나눠줬으면 좋겠다.

    만약 그런 일이 현실이 된다면, 10주든 20주든 노동자들이 원하는 만큼 강의를 할 의향이 있다.

    노동자가 <자본>을 읽는 방법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마르크스 본인도 얘기했듯이 <자본>은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사회과학을 공부하지 않은 보통 사람이 <자본>을 읽기는 더욱더 어려울 것이다. 특별히 권하고 싶은 <자본> 읽기 방법이 있는가?

    강신준 : <자본>은 앞부분이 어렵다. 보통 제1편(상품과 화폐)을 읽다가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가는 경우가 많다. 나는 뒷부분부터 읽기를 권한다. 1권 제4편(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부터 읽으면 좋다. 4편의 앞부분도 읽기 힘들면 12장 정도부터 읽으면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

    제7편(자본의 축적 과정)도 읽어볼 만하다. 특히 7편의 제23장(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 법칙)은 나라와 연도만 빼면 한국의 얘기와 똑같다. 노동자를 정규직/비정규직으로 가르고, 임금을 깎고, 해고를 하고…. 이렇게 1권도 앞이 아니라 뒤부터 읽다 보면 <자본>에 익숙해질 수 있다.

    2권은 경제학 공부를 하지 않은 독자라면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아까 언급했듯이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고민할 때 자극이 될 만한 부분이 많은 3권은 읽어볼 만하다. 특히 공황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설명한 부분이 중요한데, 한국 사람들은 요즘 화폐 금융 쪽에 상식이 많아서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3권을 읽다 보면 재테크에 눈을 뜰 수도 있다. 나 같으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책을 읽을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핵심 비밀을 파헤친 <자본>을 읽겠다. (웃음)

    프레시안 : 최근에 낸 <그들의 경제 우리들의 경제학>(길 펴냄)을 포함해 <자본>에 대한 해설서를 몇 차례 펴냈다. 그 책들은 <자본>에 대한 정확한 설명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자본>을 읽을 때 같이 보면 좋을 만한 책이 또 있는가?

    강신준 : 요즘에는 <자본> 해설을 하는 책이 많이 나와서 그 중에서 한두 권만 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처음에 폴 말러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The Theory of Capitalist Development)>(이주명 옮김, 필맥 펴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정리가 아주 잘 된 책이다.

    그러나 어떤 해설보다도 <자본>을 직접 읽는 게 좋다. <자본>을 강의하는 독일의 교수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는데, 나랑 똑같은 의견이었다. 한 번 마음먹고 1권의 23장부터 천천히 읽어보라. 답답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될 뿐만 아니라, 본인이 찾고 있었던 해답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 번역은 진행 중


    프레시안 : 오랫동안 <자본> 번역에 매달려 왔다. <자본> 완간 이후에 계획하는 일이 있나?

    강신준 : 이렇게 번역한 <자본>을 노동자들과 같이 읽는 일이다. 지난 학기에 전국금속노동조합 조합원 100여 명과 8주 동안 <자본> 강의를 했다. 앞으로 그들과 <자본>을 같이 읽으면서, 그들의 문제의 해답을 같이 찾아볼 생각이다.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자본>에서 단초처럼 제시된 대안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축적된 성과를 논문으로도 발표하고, 구체적인 정책으로도 내놓을 예정이다.

    프레시안 : <자본> 외에도 번역이 안 돼 있거나, 번역이 다시 되어야 할 마르크스의 저작이 있는가?

    강신준 : 사실은 MEGA를 펴내는데 참여하는 일본 도호쿠 대학교 오무라 이즈미 교수 등이 중심이 돼 마르크스의 원고 중에서 공황과 관련된 부분만 편집해서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일본에서 그 작업이 이뤄지면 그것은 번역을 해서 국내에 소개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 저술 계획 속에서 <자본>의 4권에 해당하는 <잉여가치학설사>도 번역해야 하는데, 분량이 많아서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작업이다.

    프레시안 : 인터뷰 중에 MEGA 얘기가 종종 나왔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철학자들을 포함해 MEGA 번역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 출판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본> 역자로서 MEGA 번역에 직접 참여할 의사가 있는가?

    강신준 : 고민도 하고, 준비도 하는데 엄두가 안 난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를 MEGA 번역을 시작하려면 장애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두 권 하고 그만둘 수 없으니까. 장기간 번역에 몰두하려면 기금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사실 개인적으로 제일 급한 건 <자본>의 문헌 비판이다.

    이번에 번역한 <자본>은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1957년과 1968년 사이에 소련과 동독이 중심이 되어 발간한 MEW 판이다. 이 <자본>은 엥겔스가 정리한 원본을 놓고 소련, 동독의 학자들이 주를 다는 등의 작업을 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 <자본>을 완성하기까지 세 벌의 초고가 있었다.

    이것을 일일이 검토해서 어떤 부분이 달라졌는지 확인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본> 번역도 아직 끝난 게 아닌 셈이다.

    프레시안 : <자본> 역자로서 MEGA 번역을 비롯해서 마르크스의 저서의 번역에 나서려는 이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가? '함부로 시작하지 마!'와 같은…. (웃음)

    강신준 : 한국에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학자가 없다. 시류에 자꾸 흔들린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정체를 규명하는 데 마르크스만큼 중요한 학자가 막스 베버인데, 한국에서는 베버를 제대로 연구하는 학자도 없는 것 같다. 그나마 최근에 베버의 주저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김덕영 옮김, 길 펴냄)이 제대로 번역돼 나왔으니까….

    초심을 버리지 않고,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마르크스를 연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광맥에 닿는다. 내가 그렇다. 20년 동안 동아대학교에서 마르크스를 강의하면서 <자본>을 읽었다. 또 해설을 펴내느라 꼼꼼히 본 것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한 15년이 지난 2004~5년에야 <자본>에 대한 깨달음이 오더라. '아, 이 책의 구조가 이렇구나.' 그 때야 어렴풋이 감이 왔다.

    내가 존경하는 학자 중에 고 김진균 선생이 있다. 그 선생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고향 마을의 느티나무는 내가 동네를 떠날 때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타지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서 지쳐서 찾아가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내가 죽을 때도 그 자리에 서 있다고. 이 느티나무처럼 한 곳에 뿌리를 내려라. 한 길로 매진하면 반드시 열매가 나타난다.

    ⓒ프레시안(손문상)


    우리의 천국은 우리가 만든다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자본>과 같은 공부를 위한 책 외에 즐겨 읽는 책은 무엇인가?

    강신준 : 나는 원래 문학을 좋아한다. 특히 소설을….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끊임없이 옆에 두고 반추한 소설이 이청준의 작품이다. 군대에 있을 때,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견해가 다르겠지만, 나는 이 소설을 굉장히 정치적인 작품으로 여긴다.

    그 안에 마르크스가 얘기했던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핵심이 들어 있다. 한 사람이 소록도로 내려가서 나병 환자를 위한 천국을 건설한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에 천국은 소록도의 환자들에게는 지옥이다. 당신의 천국이 우리의 지옥이다. 천국은 누가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이게 바로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청준의 소설은 여러 번 읽으면서 음미해 볼 만하다.

    다른 책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다. 최근에는 레닌 관련 책이 여럿 나오지 않았나? 지젝 등이 공저한 것을 비롯해서. 나는 비교적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는데 사실 쏙 마음에 드는 책이 없었다. 마르크스만큼은 아니어도 레닌의 글에서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지금까지의 시도는 불만족스럽다.

     

    강양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