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 슬프다. 우리 조선의 민중이 너무 가슴아파한다. 내가 왜 이렇게 갑자기 먹구름 낀 죽음의 계곡에 갇히어 절망의 탄성을 발하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묵시문학이 말하는 아비규환과도 같은 혼돈 속에서, 나는 기묘하게도 <도올의 로마인서강해>라는 희한한 성서주석서를 집필하고 있었다. 너무도 슬프기에, 너무도 깊은 슬픔을 이겨낼 수 없었기에 나는 유대인 바울이라는 인물의 심정의 심연에 기대어 나의 슬픔을 극복하고자 했다. 로마인에게 보낸 이 바울의 서한은 예수라는 인물이 죽은 지 불과 25년 만에 쓰인 것이며, 그 서한이 완성된 후 15년 만에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된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의 국가는 멸망해버렸고 유대인은 흩어져 향후 2천년 동안 디아스포라의 서글픈 망명 생활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로마인서>에 새겨진 장엄한 논리는 기독교를 탄생시켰고, 예루살렘 성전을 멸망시킨 로마제국을 굴복시켰다. 향후 2천년 동안의 찬란한 서구문명의 도덕적 뼈대를 이루었던 것이다. <로마인서>는 인간혁명의 매니페스토였다. 나는 이 조선 역사의 가장 심오하게 슬픈 이 시점에서 바울의 매니페스토를 뛰어넘는 우리 민중의 매니페스토를 선포하고자 했다.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역사”라고 말한 그 뜻을 새롭게 밝히고자 했다.
지난 금요일 아침 박근혜 대통령의 두번째 사과 담화를 들었다. 그 담화는 전혀 사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첫번째 사과 담화보다도 더 사악하게 짜인 자기정당화의 변명일 뿐이었다. 자기 행위의 도덕적 정당성을 변명하는 구질구질한 언사였다. 그 담화를 가장 가소롭게 들었을 사람은 다름 아닌 박근령과 박지만이었을 것이다. 가족을 자기 죄악의 유일한 근원으로 공표하는 박근혜는 무의식적으로 최순실을 비호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는 최태민의 사교에 빠진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국민들은 박근혜의 언행 전부를 사교로 간주하고 있다.

금요일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는 대국민 담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의 은밀한 지지세력에게 “나는 아직 건재하며 굳건하게 버틸 것”이라는 사인을 보내는 일종의 암호였다. 이미 자기의 지지세력이 사라졌다는 것도 판단하지 못하는 무지한 영혼이었다. 하다못해 김병준 신임 국무총리의 내정을 둘러싼 절차상의 하자에 관하여 일말의 반성도 언급하지 않았다. 김병준은 제대로 된 학인이라 말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로고스적 상황 판단이 있어야 하고, 절차적 논리가 있어야 하며, 주어진 상황의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현 상황에서 그러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는, 누구라도 이성적 판단력이 있다면, “여야의 합의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한마디 했어야 했다. 그렇게 현명한 자세를 취했더라면 그는 이 난국을 타개하는 정석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정석이 아닌 사석(捨石)이다. 그는 입 뻥끗할 때마다 여유가 있어 보이고 단호한 듯이 보인다. 한마디로 고수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기회를 탐하기만 하는 갈욕의 노예일 뿐이다. 자진사퇴 있을 수 없다구? 잘해보시게나!
박근혜의 대통령직 유지는 국가 혼란과 부도덕성 증가시킬 뿐
바울은 이렇게 외친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선포하노라.” 나는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피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원고지 위에 펜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 홀연히 내가 집필하는 서재의 작은 창문으로 노도와 같은 민중의 함성이 들려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어느샌가 민중의 틈바구니에 끼어 종로 한복판을 걸어가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것은 진실로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의 쓰나미였다. 종로 대로로부터 광화문 네거리 주변을 꽉 메운 인파는 1만·2만으로 셀 수 있는 그런 풍류가 아니었다. 20만·30만의 인파가 외치는 함성은, 순간 나의 의식의 장에 저 바이칼호로부터 대흥안령을 거쳐 백두·두륜에 이르는 거대한 광야의 지맥을 연상시켰다. 최근 나는 동북3성의 고구려·발해성을 답사하여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맞았다! 그래! 맞았다! 이게 바로 내가 살던 고향이었어! 자동차가 사라진 텅 빈 종로와 질풍노도와 같은 인파의 홍류는 해방된 고조선의 영고·동맹제와도 같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곳은 억압도, 착취도, 사기도 없었단다! 조그만 밭뙈기 하나 있으면 못살 일도 없었고, 잘살게 해준다고 꼬시는 사람도 없었단다! 내 주목을 크게 끈 천 명 가까운 한 시위대는 바로 중고생 집단이었다. “중고생이 일어났다! 중고생이 분노했다! 박근혜는 물러가라! 사과 말고 사퇴하라! 새누리도 공범이다! 재벌기업 해체하라!”
내가 중고생 시위대 앞에서 같이 종로를 활보하자, 내 주변으로 엄청난 인파가 모이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 기억 못하세요? 고대 농악대 82학번 아무개예요. 저 선생님하고 같이 길거리 데모하면서 최루탄도 무척 함께 뒤집어썼잖아요!” “그래그래 맞다! 너 아무개 아니냐?” 이렇게 저렇게 나는 또다시 30년 전 6월항쟁의 열풍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당시 “왕정이냐? 민주냐?”라는 글을 발표하고 단식에 돌입했다. 대학생 박종철군의 고문살인 조작·은폐로 시작하여 이한열군의 사망에 이르기까지 “군부독재타도·호헌철폐”를 외치던 민중의 민주화를 향한 절규는 드디어 100만 인파를 이루어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향하는 노제의 장엄한 광경을 노정했다.
그러나 1987년 6월항쟁과 현금의 11월항쟁은 매우 성격이 다르다. 6월항쟁은 투쟁 목표가 폭압적 무단정치의 타도였으며 그 대상은 절대악으로 보이는 선명한 개체였다. 다시 말해서 투쟁 목표가 민중 밖에 치립하고 있었다. 그것은 외재적 혁명이었다. 그러나 11월항쟁은 투쟁 목표가 가냘픈 여인허수아비를 둘러싸고 놀아난 행정·입법·사법·언론·문화·체육·국방 전반의 국가체제의 부패요, 괴멸이요, 야비한 기만성이다. 그 대상도 절대악으로 보이는 선명한 개체가 없다. 최순실이 대상이 아니라, 그 야비하고 비열하고 저속한 이를 국가 최고의 실세로 만들어 놓은 장기간에 걸친 국가권력체제의 농간이요 농단이요 농권(弄權)이다! 투쟁 목표가 민중 안에 거미줄처럼 들어와 있다. 그것은 내재적 혁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민중의 자발적 각성의 힘에 의하여 민중 스스로를 개혁하고 개벽하는 어려운 혁명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험로의 종착역은 눈앞에 다가와 있다! 종착이야말로 진정한 시발인 것이다!
광화문 앞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무대 위로 아주 평범하게 보이는, 말도 아주 소박하게 하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한 분이 올라왔다. 그녀는 말했다. “하야라는 말은 할 수가 없어요. ‘하야’라는 말은 위엄 있는 대통령 인격체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말이잖아요? 그러나 박근혜는 이미 대통령이 아니에요. 대통령으로서의 위엄과 위신과 인격과 국정수행 능력을 다 상실했잖아요. 박근혜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박근혜는 불쌍하고 외로운 병자일 뿐이에요. 박근혜는 빨리 청와대를 걸어 나와서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빨리 박근혜를 입원시켜줍시다.”
11월 항쟁의 투쟁 대상은 국가체제 부패와 야비한 기만성
거대한 찬사의 함성이 일시에 폭발했다. 나는 순간 직감했다. 우리 민중은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 바스티유 감옥은 이미 터졌다! 노론-친일파-친미·반공 세력의 강고한 족쇄는 이미 풀렸다!
나는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무대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민중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민중의 함성에 떠밀려 무대 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그대들은 왜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까? 박근혜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입니까? 최순실-최태민이라는 터무니없는 인간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입니까? 이 순간 여러분께서 단상에 서 있는 도올을 바라보는 그 가슴에 뭉클거리는 감정, 그리고 뇌리에 떠오르는 모든 일치된 언어, 그것은 바로 하늘의 소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철학이요, 이 시대의 정언명령이며, 이 시대의 헌법입니다. 헌법은 조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투쟁으로만 획득되는 민중의 양심이며 양식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괘상(卦象)과도 같은 것입니다. 나는 말합니다. 그 분노의 불길로 우리 스스로의 존재 그 자체를 불살라야 합니다. 우리 존재를 얽매고 있는 모든 체제의 압박을 불살라야 합니다. 우리의 혁명은 정권의 변화를 뛰어넘는 우리 의식의 혁명이며, 제도의 혁명이며, 가치관의 혁명이며,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소망의 혁명입니다. 우리 모두 헌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혁명은 어떠한 정치적 술수나 타협으로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순결한 민중의 순결한 의지의 표출로써만 가능한 혁명입니다. 어떠한 감언이설의 교사에도 속지 마십시오. 명(命)이 혁(革)파될 때까지 조금도 행진을 늦추지 마십시오. 혁명 완수의 그날까지 행진! 행진! 행진!”
이것은 과연 무슨 말인가?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청와대가 환관으로 득실거리게 될 것이라는 말로써 이 난국을 예언한 것도 나 도올이었고,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처음으로 대통령의 “하야”를 운위한 것도 나 도올이었다(<한겨레> 2014년 5월3일치 1면 세월호 참사 특별기고). 그런데 나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진 직후에 <시비에스>(CBS) 김현정 앵커와 한 대담에서, 모든 사람이 대통령의 하야를 자유롭게 논하고 있는 분위기에서도, 나는 “하야”에는 반대한다는 역설적 논리를 폈다. 그러나 그 역설적 논리의 진의는, 쉽게 하야하고 나면 그만큼 박근혜는 쉽게 면죄부를 획득할 것이며, 또한 더욱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박근혜라는 허상을 조장해온 정계, 관계, 재벌, 보수언론, 보수여론주도층이 다 같이 쉽게 면죄부를 획득한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오늘의 사태의 죄악은 모두 박근혜·최순실과 그 주변의 사기집단 몇 명으로만 귀결되고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성의 기회를 유실하고 만다. 비록 지지부진하고 더러운 변명의 추태가 계속된다 할지라도 그 과정을 존속시키는 것이 오히려 박정희-박근혜 패러다임의 실상을 폭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의 논리는 지금 박근혜의 두번의 사과와 독선적인 신임 총리 지명 사태만으로도 설 자리를 잃었다. 박근혜는 이미 대통령의 직무수행이 불가능한 금치산자와도 같은 인물이 되어버렸고,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는 도덕적 근거인 민심이 완벽하게 이반되어버렸다. 이러한 사태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선택은 많지가 않다. 박근혜의 대통령직 유지는 국가의 혼란과 국민의 분노와 정계의 부도덕성을 증가시킬 뿐이다.
지금 정가에서 나도는 해법은 세가지로 요약된다. (1)하야 (2)탄핵 (3)거국내각. 우선 우리 국민은 하야와 탄핵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탄핵은 현행 법질서 내에서 이루어지는 정당 간의 합의에 의한 정치적 프로세스이다. 그러나 하야는 정치적 프로세스가 아닌 초법적인 도덕적 선택이다. 이 도덕적 선택의 일차적 주체는 박근혜라는 자연인이다. 그러나 이 자연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도덕적 선택을 자발적으로 내릴 수 있는 인격체가 아니다. 그러한 인격체라면 어찌 최순실 게이트의 사태에까지 당도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까 탄핵의 주체가 정당이라고 한다면, 하야의 주체는 국민이 된다. 하야를 하게 만드는 사역자가 국민이라는 뜻이다. 이 국민은 반드시 혁명의 열기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각성된 국민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탄핵은 문제가 많다. 정당 간의 합의도 어렵고, 최종적으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거쳐야 하는데, 이 전 과정은 장기화될 것이며 박근혜는 면죄와 휴식과 도덕적 마비를 얻는다. 그리고 헌재의 판결은 국민이 바라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강하다. 국민의 소망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기실 탄핵은 국민의 입장에서는 헛수고일 뿐이다.
하야라는 평화로운 사태 국민의 명령이다
그렇다면 거국내각이란 무엇인가? 국민들이 이 말의 함의를 정확히 깨닫기에는 너무도 많은 역사적 언어가 필요하다. 그 핵심을 말하자면 거국내각이란 국회가 국체의 전권을 쥔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정의롭게 이루어지려면 대통령이 소속 정당을 탈당해야 하고, 일체 정무에서 손을 떼야만 가능한 것이며, 특검도 거국내각이 구성한 엄정한 수사기관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실상 거국내각은 이루어지기가 어려우며, 그 실제 내용으로 말하자면 하야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최종 결론은 단 하나만 남는다! 하야! 하야! 하야! 그리고 또 하야!
하야를 강행하는 주체는 국민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이 시점에서 하야라는 평화로운 사태를 유발할 수 있는 힘은 정객에게 있지를 않다. 국민이 국민의 힘으로 국민을 위하여 국민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 여기 내가 말하는 “평화로운 사태”라는 말의 함의에 모두가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지금 집권자들은 국민의 분노나 항거나 시위를 과소평가하고 있을 수도 있다. 집권의 야욕을 허심하게 내려놓지 않는다면, 또다시 북한의 위협을 도발시키거나, 혹은 계엄사태를 구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국민은 더 이상 이렇게 케케묵은 수법에 농락당하지 말아야 한다. 군대도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는 명령이 아닌, 자체의 이성적 판단을 따라야 할 것이다. 군대는 국가의 군대이며, 국민의 군대이다. 경찰, 군대 모두 폭력적 사태를 유발하는 일체의 경거망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박근혜의 지지율은 제로다!
언론도 국민의 열기를 파생시킬 수 있는 불확정한 사태에 대하여 정의로운 판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미 보수와 진보, 야당과 여당, 지배자와 피지배자,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오직 불행한 사태의 저지를 위하여 박근혜의 하야에 총력을 모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사태의 죄악을 죄악으로서 깨끗하게 종결시켜야만 한다. 오늘 이 위대한 혁명의 국면에, 대인의 우환을 지닌 모든 동포들은 민주의 제물로서 모든 아집을 버리고 혁명의 완수를 위해 전진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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