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9일 목요일

“운이 좋아 오래 살아남은 내 자신이 미워졌다” 이기홍 강원대·사회학과

특별시론
요즘의 학문후속 세대에게는 송구한 이야기이지만, 석사학위 논문만 쓰면 대학 교수로 초빙되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과 신군부 일당은 국민적 지지를 겨냥한 조치 가운데 하나로 대학 정원을 두 배로 늘리고, 그것에 더하여 ‘졸업정원제’라는 듣도 보도 못한 제도로 다시 30%를 더 늘렸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권력이 하라면 하는 데에서는 대학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런 준비도 없으면서 적극적으로 가담해 돈벌이 기회로 삼았다. 내가 다녔던 학과는 시설이나 교수진에 아무런 변화도 없이 20명의 입학 정원을 52명으로 늘렸다.

대학들은 부랴부랴 교수들을 끌어 모았다. 물론 준비된 학자도 있었지만, 엉겁결에 석사 학위를 받고 급행으로 대학으로 달려간 학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立稻先賣’ 세대로 불렸다. 게다가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른바 ‘육개장’이라는 파격적인 특혜까지 받았다. 동년배들이 32개월 안팎의 기간을 군복무로 보낼 때, 석사 학위를 소지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그들은 ‘특수전문요원’으로 대접받으며 6개월간의 군대 체험만으로 장교 계급장을 달고 전역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아들들을 위한 일시적인 제도로, 그들의 의사나 요구와 무관하게 ‘운 좋게’ 주어진 혜택인 만큼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동년배들이나 후배들에게 미안해해야 할 부채인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그 80년대는 광주의 선혈이 지식인들에게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일깨운 시대였다. 이제 그들이 은퇴하고 있다. 

나도 그 ‘입도선매’ 세대의 막차를 타고 대학 교수가 됐다. 그리고 ‘직업’ 교수로서 남 보기에 아주 풍족한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잘 지내왔고 이제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연구자로서, 교사로서, 지식인으로서 저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나는 부끄러움을 떨칠 수 없다.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된다’며 박완서 선생은 부끄러움을 가르쳤지만, 누구를 가르칠 주제가 못되는 나로서는 후배 교수들께 반면교사, 타산지석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끄러운 자화상을 말씀드린다.

그저 그런 연구자

사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한 것부터 ‘운’이었다. 한해의 절반은 방학으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에서도 절반은 휴교 등등으로 대학생활을 허송한 탓에 졸업을 눈앞에 두고도 나는 딱히 하고 싶다거나 해야 한다거나 하는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까닭은 모르겠지만 뒷날의 대학 팽창을 예비하기라도 하듯,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대학원 입학 정원이 늘어났고, 공부의 목표나 사명, 또 내 적성이나 능력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마침 대학원에 응시해 행운인지 불운인지 입학하게 됐다. 

대학원 시절, 同學들은 종속자본주의니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니 하며 한국의 사회현실과 뜨겁게 씨름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서구에서 대처와 레이건을 앞세운 신보수주의가 득세하고 동구에서 사회주의가 붕괴하던 좌절의 1980년대를 한국에서는 ‘질풍노도의 시대’로 만들 만큼 치열하게 공부하며 ‘학술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나는 과학이란 무엇인가, 사회과학이란 무엇인가를 따지는 현학으로 도피해 한가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덜컥 교수가 된 것이다.

모름지기 연구자는 천직으로서 소명의식, 구도자적 겸허, 무한책임의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한 大家는 설파한 일이 있는데, 나도 처음에는 단순히 서양 학자들의 주장을 모으고 얽어서 내 이야기처럼 내놓는 것이 아니라 ‘一家’를 이루겠노라는 야심찬 포부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전공하는 ‘사회과학철학’은 국내에 전문연구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과 토론을 통해 성장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학술지 편집자의 충동질을 못 이겨 몇 차례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얻은 소득은 무지하고 당파적이라는 평판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서양 학자들의 글을 주로 읽어야 했고 언어장벽 때문에 늘 뒤쫓아 가는 처지일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무슨 새로운 착상을 하더라도 그것을 발표하고 서양 학자들과 경쟁하는 일은 꿈꿀 수 없었다. 

결국 한국어로 한국독자를 대상으로 글을 썼고, 전문연구자들이 희소하기 때문에 적당히 얼버무려도 책잡는 사람은 없었다. 교수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소소한 논문들을 발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지식 수입상’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도 학문 후진국 연구자의 운명이라며 자위했다. 연구 성과를 묻는 질문에는 “대가는 나중에 저서로 말한다”는 은사의 말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는 사이 내가 근무하는 대학은 실적을 강조하면서 저서를 논문보다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는 이상한 제도를 도입했다. 논문을 ‘많이’ 발표하면 탁월한 연구자로 평가받을 수 있었지만, 그 기준마저도 내게는 힘에 부치는 것이어서, 한해에 그저 그런 논문 한편을 발표하는 데 급급하며 지내왔다. 

엉터리 교사

교수는 무엇보다 ‘교사’이다. 우리 사회의 대학들 대부분이 자칭으로 내세우는 ‘연구중심 대학’이라는 것이 냉전체제의 중요한 유산이라는 것을 나는 근래에서야 알았다. 그것은 미국의 군부가 군비경쟁에 필요한 과학지식 개발을 위해 연구비를 제공하면서 대학과 교수들을 동원할 때,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진 대학의 경영자들이 그리고 그들을 통해 대학을 통제하려는 권력자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양보해서, 연구중심이라고 하더라도 대학은 연구소가 아니라 엄연히 학교이다. 학교의 일차적인 사명은 ‘교육’에 있고, 그러므로 교수는 일차적으로 교사이다.

그러나 운 좋게 교수가 된 나는, 하다못해 교육학 개론조차 공부해본 적이 없는 준비되지 않은 교사였다. 학문의 자유는 들어라도 봤지만 교사의 책무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아는 것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작정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 준비에 꾀가 생기면, 자기주도 학습이라는 허울로 학생들에게 발표를 맡기고, 더러는 호연지기를 키운다는 핑계로 산이나 들로 데려가 육신의 양식으로 마음의 양식을 대신하기도 했다. 무엇을 어떻게 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 것은, 근래 ‘취업준비’를 강요하는 총장에 맞서 대학교육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떠드는 과정에서의 일이다. 

그러니 내게 배운 학생들 가운데, 내 전공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학을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대여섯에 지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회학에 흥미도 느끼고 지식욕구도 생길 수 있도록 제대로 가르쳤다면, 아무리 지방대학이라고 하더라도, 30년 동안 대여섯의 후학을 배출하는 데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자의 논문을 가로챘느니 대학원생의 인건비를 착복했느니 어쩌니 하는 말들이 떠돌지만, 공부하는 제자가 없으니, 내게 그런 일은 애당초 일어날 수 없었다. 

공부를 계속했으면 좋겠다 싶은 대학원생이 학교를 떠날 때에도 나는 말리기는커녕 등을 떠밀었다. 솔직히, 나는 그가 사회학 공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제대로 된 교사라면, 사회학 공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그를 훈련시키고, 또 사회학 공부를 하는 사람도 밥 먹고 살 수 있도록 세상을 고쳤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군자의 세 번째의 즐거움으로 꼽은 선현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엉터리 교사의 자업자득이다.

여우의 신포도

교수로서 나는 어쩌면 염불보다 잿밥에 더 마음이 있었는지 모른다. 총장이 보직을 맡아달라면, ‘생각해볼 시간을 달라’는 상투적인 인사치레조차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맡았다. 줄 때에는 확실하게 줘야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고 핑계를 댔다. 대학에 대해, 학문에 대해, 교육에 대해, 무엇보다 행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학습한 적이 전혀 없음에도 나는 ‘그래도 다른 사람이 맡는 것보다는 내가 맡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근거 없이 합리화했다. 그리고 ‘구조조정’이라는, 이제 생각해보면 대학에는 가당하지 않은 이름을 앞세운 ‘대학 황폐화 작업’에, 내가 근무하는 대학이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며, 가담하고 앞장섰다. 보직을 맡지 않았을 때에는 적당한 수준에서 총장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식사라도 같이 하자는 전갈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기애애하게 지냈다.

근래 나는 대학에서 보직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모호한 일을 맡고 있는데, 엊그제도 ‘당신은 회의를 기준이나 원칙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했을 뿐 아니라, 자제하지 못하고 화를 냈으니 사과하고 책임지라’는 공박을 받았다. 내 능력과 품성이 감당할 수 없는 ‘자리’ 욕심이 불러온 설화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저런 연줄에 기대어 정치판에도 기웃거렸다. 이름을 말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알만한 정치인들과 밥도 같이 먹고 나라를 걱정하는 ‘高談峻論’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면서 불러주면 열심히 수발을 들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내 지식의 깊이가 얕았던지, 내 이름값이 저렴했던지, 아니면 내 태도가 미덥지 못했던지 나를 불러주는 정치인은 없었다. 

텔레비전에도 한 번 출연한 적이 있다. ‘숫자 어쩌고’ 하는 책을 놓고 서너 명이 대담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나는 내용 없는 잡담으로 시청자의 시간을 빼앗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나갔다. ‘혹시 아는가, 나도 대중매체에 적합한 체질이어서 계속 기회가 생길지.’ 분장 담당자의 조언을 무시하고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고집했는데, 내가 몰라볼 만큼 늙은 내 얼굴이 화면에 나오는 것을 보고 낙담하고 말았다. 그런 외모 탓이었던지, 아니면 어눌하고 재미없는 말주변 탓이었던지 그 뒤에는 어디서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신문사 같은 곳에서 원고를 부탁해오면 군말 없이 응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지역 신문에서 (아마도 거기 근무하는 제자의 주선으로) ‘고정칼럼’을 부탁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자를 성추행한 뒤 ‘식당 주인인 줄 알고 그랬다’고 거듭 망발한 검사 출신의 지역 유력 정치인과, 교수들의 항의를 피해 병실에 입원해서 치명적인 결정을 한 (내가 근무하는 대학의) 총장을 싸잡아 ‘최소한의 품위라도 지키라’고 힐난하는 첫 번째 원고를 보낸 것으로 끝났다. 그 원고가 게재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나는 내 원고의 행방에 대한 해명이나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그리고 악명이 퍼졌던지 그 뒤에는 원고를 부탁받는 일이 아예 없었다.

동료 교수가 이름을 얹어줘서 지방정부의 용역사업에 참여한 일도 있지만 그 또한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지역개발 사업 항목을 ‘제안’하라는 것이었는데, 중간보고를 한 뒤 용역비 지급이 중단되고 용역사업은 유야무야 끝났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알아본다며 그 돈으로 심지어 일본 구경까지 했던 마당에, 황당했지만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역을 맡긴 시장의 의도는 자신이 추진하려는 ‘폼 나는’ 토목건설 사업을 정당화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엉뚱한 다리를 긁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폴리페서를 비웃고 텔레페서를 조롱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은 여우의 신포도라고 해야 한다. 이리 재고 저리 간보며 이익을 구하면서도 ‘교수’라는 명함으로 속물스러움을 적당히 감추고 고상한 척했을 뿐이다. 단적으로, 나도 가끔은 ‘시국’과 관련한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고, 서너 번은 후배 교수들에게 등 떠밀려 앞에 나서기도 했다. 친분 있는 국정원 직원이 더러 연락해온 것을 보면 어디선가 뒷조사 같은 것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리고 연구재단의 무슨 단장 자리인가를 제안 받았다가 ‘당신 꼬임으로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사실이 드러나 없었던 일이 됐다’는 이야기를 동료 교수에게서 들은 적은 있지만, 딱히 내가 교수 노릇하는 데 불이익이 된다고 느낄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겁하게도 뒷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상황이 기울어졌을 때에나 나는 지식인으로서 공공성을 수호하는 척 나섰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교수가 된지 10년쯤 지난 후, 지금 젊은 교수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렵지 않게 ‘정년보장’을 받았다. 정년보장이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 그러니까 이런 저런 압력에서 자유롭게 뜨겁게 연구하고 발표하라는 명령인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내 몸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경력이 늘어난 만큼 무게도 잡고 싶었고 평판도 얻고 싶었다. IMF 관리의 경제위기를 거쳤어도 신자유주의의 혹독함은 아직 교수들에게 당도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모임에 얼굴을 내밀고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면, 모났다거나 괴팍하다거나 분위기 파악을 못한다고 뒷담화를 하면서도, 각박하게 대접하지는 않았다. 그런 기회들을 챙기고 만들면서 ‘교수’의 자세가 관성으로 몸에 익었고 당연히 연구와 교육은 뒷전으로 밀렸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보냈다. 

잔혹한 시대, 암울한 시대, 각박한 시대를 거치며 나는 운이 좋았던 덕택에 ‘직업’ 교수로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그렇게 대충대충 지내왔다. 교수를 두고 “실력이 없다. 품격이 낮다. 휴강이 많다. 가르치는 일에 성의가 부족하고 연구와 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타박은 이미 1950년대부터 있었지만, 바로 내 이야기였다. 나는 교수 사회의 관행과 규범에 적당히 타협했고 적당히 안주했다. 누구에게도 뜨거운 적이 없으면서도, 나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믿으며,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찼다. 브레히트는 운이 좋아 오래 살아남은 “자신이 미워졌다”고 자멸(自蔑)했다.


출처 :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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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부터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공부했다.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사회이론을 전공한다. “사회과학에서 법칙과 설명”(2016), “양적 방법의 지배와 그 결과: 식민지근대화론의 방법론적 검토”(2016), “사회과학에서 가치와 객관성”(2015), “한국사회학에서 마르크스와 과학적 방법”(2013), “양?질 구분을 다시 생각한다”(2012), “양적 방법의 사회학”(2010), “과학과 정치 또는 과학의 정치화”(2008), “설명적 사회학과 글쓰기”(2006), “추상화?비판적 실재론의 해석”(2003), “사회현실과 사회이론”(2003), “사회구조는 무엇을 가리키는가”(2002), “실재론적 과학관과 사회과학의 연구방법”(1998), “행위, 행위주체 그리고 구조”(1994), “철학의 빈곤, 과학의 빈곤”(1988)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번역서로 『사회연구의 방법론』(2015), 『사회과학의 철학』(2014), 『비판적 실재론: 로이 바스카의 과학철학』(2010),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2007), 『비판적 자연주의와 사회과학』(2005), 『초월적 실재론과 과학』(2005), 『새로운 사회과학방법론: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2005), 『사회연구의 철학』(2000), 『사회과학방법론: 실재론적 접근』(1999), 『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1997), 『새로운 사회과학철학』(1995), 『마르크스의 방법론』(1989, 까치) 등이 있다. 저서는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2015)가 있다. 

2018년 4월 11일 수요일

일본, 교육위원회가 소관하고있는 박물관 · 도서관 행정을 자치 단체장 부서가 담당하도록하는 논의 본격화

현재는 교육위원회가 소관하고있는 박물관 · 도서관 행정을 자치 단체장 부서가 담당하도록하는 논의가 중앙 교육 심의회에서 본격화하고있다. 수장 부국에 이관 관광과 산업의 담당 부서와 연계가 쉬워 지역 활성화에 이바지한다는 기대가 배경에있다. 한편 조사 · 연구 기능 등의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있어, 중앙 교육 심의회는 신중하게 심의를 진행하고 연내에 결론을 정리한다.
 논의의 대상이되고있는 것은 박물관, 도서관, 공민관 등의 「사회 교육 시설 " 정부는 2017 년 말 지방 창생의 일환으로 박물관 행정의 수장 부국 이관 검토를 각의 결정했다. 이에 따라 하야시 요시마사 문부 과학상이 3 월 중앙 교육 심의회 사회 교육 시설의 이관을 포함한 사회 교육의 진흥 방안을 자문했다.
 이관의 장점은 관광이나 산업을 관장하는 부서와의 연계가 원활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미에현. 교육위원회는 사무의 일부를 수장에게 위임 할 수 있다고하는 지방 자치법의 규정을 이용하여 박물관과 도서관 등 4 시설의 운영을 수장 부국 환경 생활부가 맡고있다.
 동현은 박물관과 도서관 등에서 같은 주제의 기획전을 실시. 16 년에는 닌자, 17 년 올림픽 · 패럴림픽을 거론했다. 파라 경기 체험 이벤트를 개최 한 현 종합 박물관 (쓰시)의 테라 모토 히사 彦副 관장은 "수장 부국이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관광 관련 부서와의 연계도 원활하다"고 말했다.
 다만, 현재도 소관은 교육위원회에서 관의 영업 시간을 바꾸기위한 조례 변경 등은 교육위원회와 의회의 교육 관련위원회를 통과해야한다. 소관을 수장 부국에 옮기면 "지금보다 속도감을 낼"고 말했다.
 이관에 긍정적 인 의견은 교육위원회 측에있다. 읍면의 교육장으로 구성된 전국 읍면 교육 회장단은 "급격한 과소화와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 교육 시설과) 마을 만들기 관계 부처 등 다양한 주체와의 연계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문부 과학성에 따르면, 다른 부서와 함께 보조금을 신청할 수 등으로 예산이 윤택하게되는 경우도 있다고한다.
 한편, 이관에 따른 우려는 학교 교육과의 연계 및 자료의 보존 등 기존의 기능이 약화 될 수 있다는 점. 이관을 검토하고있는 중앙 교육 심의회의 실무 그룹에서 동북 역사 박물관 (미야기 현 타가 죠시)의 타카노 미츠 유키 관장은 "수장 부국에서는 (자료의 수집 · 보관 등) 박물관의 본질적인 역할과 활동이 제약을 받을지도 모른다 "고 지적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는 에미리트와 교육위원회 중 소관를 지자체가 선택할 수있는 방식이 유력시된다. 실무 그룹은 시설 관계자와 지자체의 의견을 들어 5 월 중에도 일정한 방향성을 결정 해 중앙 교육 심의회가 연내에 결론을 낼 전망이다.

출처 https://www.nikkei.com/article/DGXMZO29165480Z00C18A4CR8000/  구글번역

아일랜드 더블린 시의 한 도시 한 책 읽기

Dublin One City One Book Festival은 Flann O'Brien 's at Swim-Two-Birds가 4 월 한 달 동안 Dubliners를 읽는 책으로 선정 된 2006 년부터 운영되었습니다. 올해는 The Long Gaze Back : Sinéad Gleeson이 편집 한 아일랜드 여성 작가의 선집으로 조직위원회가 가장 큰 해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많은 도시가 비슷한 계획을 세웁니다. 뉴욕과 시카고 모두 더블린과 유사한 프로젝트를 갖고있는 미국의 개념으로 특히 인기가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규칙적이고 꺼리는 독자 모두가 같은 책을 읽고 공유하고 토론하도록 권장하는 간단하고 강력한 방법입니다.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여기에 훌륭한 책이 있습니다 - 공공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져 가거나 자신의 사본을 사서 읽고 읽고 책 클럽, 가족, 직장 동료 및 친구들과상의하십시오 - 심지어 도서 클럽을 시작하십시오. 이 아이디어는 램프 게시물에 배너, 서점 창에 포스터 및 도서관에 도서 디스플레이와 함께 옥내 및 옥외에서 선택된 타이틀을 축하하기 위해 도시가 "축제"가되는 것입니다.
도시 전역의 파트너 조직은 매년 수많은 유리한 점에서 책을 탐험하는 이벤트를 계획하는 데 참여합니다. 올해 The New Theatre는 아일랜드 문학의 여성 목소리를 기념하여 The Long Gaze Back의 4 편의 단편 소설을 각색 한 후 저자와의 토론을했습니다. 아이랜드 작가 센터 (Irish Writers Centre)는 단편 작문에 관한 워크샵을 진행하고 있으며, 현대 음악 센터에서는 지난 130 년 동안 여성 음악가들에 대한 두 가지 행사를 개최합니다. Kilmainham Gaol은 Inni-K, Lisa Loughrey, Sinéad White 및 Fehdah를 특징으로하는 The Song Gaze Back이 지난 200 년 동안의 여성 작곡가의 작품에 반응 할 것입니다.
2006 년 창립 이래 더블린 시의회는 James Joyce의 Dubliners, Oscar Wilde의 Dorian Grey, James Plunkett의 Strumpet City, Roddy Doyle의 The Barrytown Trilogy와 같은 소설을 기반으로 한 행사를 읽고 시민들을 초청했습니다. 더 최근의 시간에 Dedalus Press는 Dublin Unesco City of Literature 사무소와 협력하여 완전히 새로운 제안을했습니다. If You Go Go :시와 노래의 더블린지도, 시가 주목을 받았고 전체로 가져옴 새로운 관객.
13 년 동안 고전에 중점을 두었지만 여러 해가지나면서시와 함께 단편 소설이 새롭게 등장했습니다. 아이디어는 책이 관심을 가짐 - 독자가 아직 시도하지 않은 장르이거나 언제나 다뤄야 만하는 고전 일 수 있습니다. 단편 소설은 현대 시민에게 좋은 선택처럼 보입니다. 쾌락을 위해 독서에 바칠 수있는 20 분짜리 슬롯으로 돌진하거나 통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The Long Gaze Back과 같은 훌륭한 프로그램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독자들에게 영감을 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2016 년에이 페스티벌은 북아 일 랜드 도서관과 합동으로 Lia Mills의 Fallen이 Dublin과 Belfast 시민들에 의해 읽혀 두 도시의 프로그래밍 이벤트가 책 주위에 테마로 만들어 졌을 때 함께했습니다. 이 책은 1916 년 라이징에 푹 빠져있는 더블린의 일반 시민들의 삶을 묘사 한 그해 완벽한 해였습니다.
해마다 책은 주제에 따라 다른 사건에 스스로를 빌려줍니다. 오스카 와일드 (Oricar Wilde)의 연극 (도리안 그레이의 그림)에서 이탈리아 90 이벤트까지의 공연과 4 월 한 달 동안 바리 타운 (Barrytown)의 킬 바락 다트 (Kilbarrack Dart) 역의 이름 변경에 이르기까지 (로드니 도일의 <배리 타운 부작> ) 텔레비전 시리즈 Strumpet City (James Plunkett)의 성공을 되돌아 봅니다. 더블린시의 Seamus Heaney에 대한 찬사는시 시리아, Theo Dorgan, Liam O'Flynn, Paula Meehan 및 노벨상 수상자의 작품을 축하하는 많은 시인과 음악가들과 함께시 아일랜드와 파트너십을 맺어 2014 년 축제 기간 중 개최되었습니다.
2010 년에 더블린은 에딘버러, 멜버른, 아이오와 시티 다음으로 지정을받은 네 번째 도시인 문학의 유네스코 도시로 지정되었으며 더블린 (Dublin)과 같은 축제가있었습니다. 하나의 도시 하나의 책은 작가로 유명한 도시에서 책과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아일랜드의 맹인 협의회 (National Council of the Blind of Ireland)의 협조 덕분에 전자 및 심지어 점자로 된 도서뿐만 아니라 오디오 및 대형 인쇄물 형식의 도서를 제공하는 민주적이고 포괄적 인 이니셔티브입니다.
이 포함은 Dublin : One City One Book 웹 사이트를 통해 Dublin Unesco City of Literature에 연락하여 앞으로 할 수있는 제목을 제안 할 수있는 대중 초청장으로 확장됩니다. 실제로 제목을 선택하는 것은 출판사, 사서 및 더블린 문학 세계의 모든 측면에 관련된 사람들과 많은 토론을하면서 매년 긴 과정입니다. 책은 물론 작가와 발행인이 함께 참여할 의향이 있지만 고맙게도 그 계획은 보통 선상에서 얻을 수있는 매우 긍정적 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The Long Gaze Back에는 Maria Edgeworth, Mary Lavin, Anne Enright와 같은 작가로부터 Elizabeth Reapy와 Eimear Ryan과 같은 젊은 작가까지 3 세기에 걸친 30 편의 단편 영화가수록되어 있습니다.

https://www.irishtimes.com/culture/books/dublin-one-city-one-book-the-long-gaze-back-1.3457188 구글번역

‘번역청 설립’ 어떻게--박상익, 이승우 대담, 한겨레신문

올해 초 청와대 누리집 게시판에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국민청원이 올라와 관심을 끌었다. 타국에 견줘 빈약한 고전 번역 실태, 번역을 학술 성과로 인정해주지 않는 풍토, 대중과 소통하지 않는 학계 등 우리나라 학술·출판계의 ‘번역’ 문제에 많은 이들이 공감해 지금까지 1만명 가까이 청원에 참여했다. 마침 정부도 번역사업 예산을 대폭 증액하고 주요 대학에 관련 연구소를 설립하는 계획을 세우는 등 번역의 중요성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지난 6일 오후, 청원을 냈던 박상익 우석대 교수(역사교육과)와 도서출판 길의 이승우 기획실장이 서울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나 번역과 학술출판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박 교수는 <번역은 반역인가>(2006) <번역청을 설립하라>(2018) 같은 저작들을 펴내는 등 번역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제기해온 학자이고, 이 실장은 20년 넘게 학술출판을 해오며 굵직한 국외 고전을 우리말로 펴내는 데 매진해온 출판인이다.

박상익(이하 박) 지난주에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 담당자들이 만나자고 해서 만났다. 먼저 한국연구재단의 ‘명저번역지원’ 사업의 예산을 내년에 4배 가량 증액하고 차차 더 늘려갈 것이라 했다. 둘째로 현행 인문한국(HK) 사업을 번역사업으로까지 확대하고, 주요 대학에 ‘번역연구소’(가칭)를 만들어 7년 동안 지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선진국과 한국의 번역 실태를 비교할 수 있는 통계 자료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 말고도 같은 취지의 청원을 낸 사람이 여럿이라 하는 걸 보니, 드디어 여론이 정부 부처를 움직이게 만든 것 같다.

이승우(이하 이) 학술과 출판이 함께 가는 풍토가 없다는 것이 큰 문제다. 출판은 학술의 ‘하청’ 정도로 취급받는 것이 현실이다. 대표적인 번역지원 사업인 ‘명저번역지원’ 사업도 마찬가지다. 어떤 책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모든 결정이 나온 뒤에야 출판사에는 그저 하청을 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세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반드시 기획 단계에서부터 출판과 학술이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 둘째, 번역 중에서도 학술번역은 국가가 나서야 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 있다. 민간 영역에서 학자 혼자서 할 수 없는 프로젝트를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하며, 거기에는 반드시 장기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 ‘명저번역지원’ 사업이 20년이나 됐지만, 거기서 뚜렷한 목표와 방향을 찾아보기 어렵다. 연구재단이 고전번역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에게 ‘일단 다 올리라’고 하고, 그 중에서 지원 대상을 고르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앞으로 10년 동안 고전 번역을 집중적으로 추진하지 않으면 아예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 지금 학계에선 40대 중후반 학자들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후속세대’가 부족한 실정이다.


‘번역청 설립’ 국민청원 낸 박상익 교수
“서양학술 500년은 번역의 역사
우리는 유럽의 16~17세기 수준
학술 고전 번역 1차 과제 삼아
사상사 큰줄기 잡을 고전 선별해야”


박 번역청 설립 제안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뜻은, ‘번역청’이든 ‘번역위원회’든 그 형태가 어떻든 간에 국가 재정으로 국민의 지식접근권, 행복추구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중세 유럽을 보면, 라틴어를 학술의 보편 언어로 쓰다가 16~17세기 들어 자국어 사용이 본격화된다. 라틴어를 자기 말로 옮기지 않으면 이전 세대의 텍스트를 읽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라틴어 번역을 시작했고, 점차 외국의 명저 번역까지 하게 됐다. 이 과정을 국가가 대대적으로 주도했다. 이것을 500년 동안 축적해온 것이 서양 학술의 역사다. 비록 물리적 시간은 같지만, 학술에 관한 한 현재 한국의 역사적 시간은 유럽의 16~17세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문자를 본격적으로 쓴 역사는 100년도 안 됐다. 때문에 서양이 전에 했던 작업, 곧 번역을 지금이라도 소급해서 해줘야 할 필요성이 크다.

이 마키아벨리의 고전 <군주론>은 저자 사후 500년 동안 판본이 제대로 확정되지 않고 있다가, 이탈리아 정부가 지원에 나서서 지난 2006년 ‘국가 판본’(마르텔리판)이 나왔다. 당시 살레르노 출판사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깊이 참여했고, 어마어마한 주석이 달린 책을 만들어냈다. 이것이야말로 국가가 학술·출판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거기서 출판은 왜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이에 견줘 우리에겐 ‘모든 걸 다 동원해서 표준 정본을 만들어낸다’는 인식 자체가 부족하다. 출판계, 학계, 관료 모두가 그렇다. 세 분야에서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다. 출판인으로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출판의 구실이다.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지식인 에라스무스는 전설적 출판인 알두스 마누티우스의 공방에 와서 자기 책의 활자를 하나씩 일일이 확인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결과물도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으면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

박 거칠게 말해, 글씨만 박아넣으면 책이 되는 줄 아는 교수들이 많다. 공부의 결과물로서 책의 의미와 그 기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학자의 연구 결과는 출판물로 활자화되어야 사회로 흘러가서 일반 독서 대중에게 영향을 일으키고 지식을 축적하는 효과를 낸다. 존 밀턴(1608~1674)은 <아레오파기티카>에서 “좋은 책은 위대한 영혼의 고귀한 생혈이다. 책은 한 생명이 죽은 뒤에도 그 영혼을 불멸의 보물로 고이 간직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우리 학계는 저술과 번역, 그리고 그것을 담는 출판에 여전히 무관심하다. 논문만 쓰면 임용, 재임용 등 자급자족이 완결되는 대학 사회의 구조에 그 이유가 있다. 대다수 대학이 학술 결과물로 책보다는 논문을 요구하고, 더우기 번역은 제대로 평가조차 하지 않는다.

이 실제로 번역을 해보자고 제안하면, 대부분의 학자들이 논문을 비롯한 학교 일들에 치어 하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끝내 우리말로 번역되지 못한 텍스트만이 결과로 남는다. 저술과 번역을 논문 못지 않은 교수 평가 항목으로 넣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박 학교, 연구소마다 편차가 크다. 교육부에서 일률적으로 방침을 정해 모든 대학이 그렇게 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단행본 1권의 학술적 성취는 논문 3~4편에 필적한다고 본다. 우리 학계는 왜 이렇게 번역을 하찮게 여길까? 자국 문화와 자국어에 대한 긍지, 포부, 비전 같은 게 원천적으로 부족한 것이 아닐까? 17세기를 살았던 밀턴의 저작에선 그가 유럽 여행을 다녀온 뒤 앞으로 라틴어가 아니라 영어로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는 대목이 나온다.

20년 학술출판 이승우 기획실장
“‘신학대전’ 같은 고전
출판사 홀로 번역·출판 꿈도 못 꿔…
국가가 학계·출판계 아울러
기획·집행력 지닌 컨트롤 타워 돼야”


이 출판계에서 번역 작업을 대우해주는 방법은 인세 정도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출판 시장이 시장화, 상업화되고 학술출판 영역이 급격히 위축되다보니, 학술 번역이 갈수록 설 땅이 없어지고 있다. 1년에 신간을 20종 낸다 쳐도, 학술책 1000부 찍는 출판사가 존립하기 어렵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같은 고전을 일개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때문에 국가가 학술 번역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단지 지원만 늘리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번역하고 출판할 것인가 하는 가치 기준을 세우는 것이 절실하다. 출판 역량이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자들은 대체로 자기 분야만을 잘 알지만, 출판인들은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따진다. 학계와 출판계를 모두 아우르며 일관된 가치 기준을 세우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곧 기획 역량을 지닌 ‘컨트롤 타워’가 ‘번역청 설립’ 제안의 고갱이라고 본다.

박 번역청 같은 것이 설립된다면, 학술 고전에 대한 번역을 1차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상사의 큰 줄기를 잡을 수 있는 고전들을 선별하고, 우선 순위를 정해서 기초적인 번역을 해나가야 한다. 방대한 공무원 조직을 새로 만드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 출판계, 대학, 번역계 역량을 모을 최소한의 실무 역량만 있으면 된다. 우리 한문 고전을 번역하는 고전번역원이 시간적 단절을 연결시키는 구실을 한다면, 번역청은 정신적으로 고립된 섬나라 같은 이 나라의 공간적 단절을 연결시키는 구실을 할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처럼 우리가 서 있는 땅에 대한 인식, 곧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문학은 16~17세기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 국가에서 예산을 받아와서 집행하는 것은 행정조직이 되겠지만, 번역을 직접 실행하는 것은 학계와 출판계다. 이번에 교육부와 연구재단이 번역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나선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다. 다만 기획의 필요성이나 출판과의 결합이 빠져 있는 등 전체적인 방향에 대해선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예산을 늘리고 사업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번역 및 학술 지원에 대한 크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본다.
사회·정리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39991.html#csidxff2917642001d08882f8d4470218a54 

2018년 4월 3일 화요일

호모 루덴스의 저자는 누구인가

호모 루덴스의 저자는 누구인가
1. <호모 루덴스Homo ludens>(1938)의 저자 Johan Huizinga(1872~1945). 국제음운알파벳IPA의 발음기호는 [ˈjoːɦɑn ˈɦœy̯zɪŋɣaː]
2. (1)<호모 루덴스>가 우리말로 처음 번역되어 소개된 것은 1974년 중앙일보사 발행의 것입니다. 이때의 저자는 ‘요한 호이징가’입니다. (2)1981년에 중요한 번역판이 두 종류 나오는데, 하나는 김윤수 번역, 까치 출판사 발행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영빈 번역, 홍성사 발행의 것인데, 둘다 ‘J. 호이징하’라고 하였습니다. (3)전문번역가인 이종인 씨가 2010년 <호모 루덴스: 놀아하는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적이 있는데, 이때의 저자는 ‘하위징아’입니다.
호이징가/ 호이징하/ 하위징아, 어떤 표기가 맞는 것일까요?
3.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네덜란드 일람표'에 따르면, Huizinga는 하위징아가 맞는 표기입니다.
(1) 자음 h 우리말 표기는 ㅎ(Heineken 헤이네컨, Hendrik 헨드릭)
(2) 모음 ui 우리말 표기는 아위(Zuid-Holland 자위트홀란트)
(3) 자음 z 우리말 표기는 ㅈ(Zeeman 제이만)
(4) 모음 i 우리말 표기는 이(Nicolaas 니콜라스, Tobias 토비아스)
(5) 자음 ng 우리말 표기는ㅇ(Inge 잉어, Groningen 흐로닝언)
(6) 모음 a 우리말 표기는 아(Asser 아서르, Frans 프란스)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네덜란드어 일람표만 표면 분명 ‘하위징아’가 맞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네덜란드어를 조금 더 들여다보니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네덜란드어에는 4가지 음절 규칙이 있다 합니다.
4. 네덜란드어의 음절 규칙
(1) 두 개의 모음이 하나의 자음으로 분리되면, 자음은 두 번째 음절의 시작을 형성합니다. moeten moe-ten
(2) 모음이 하나 이상의 자음으로 분리되어 있으면, 첫 음절은 자음 하나를 얻고 나머지는 두 번째 음절을 얻습니다. dingen din-gen
(3) 합성어는 둘 이상의 분리된 단어로 구성됩니다. 합성되기 이전의 단어는 그대로 음절을 구성합니다. meeteenheid meet-een-heid
(4) 발음을 용이하게 할 것. 다음 음절이 발음하기 어려운 자음으로 시작하면, (필요한 경우) 앞의 음절 끝에 자음을 하나 이상을 배치합니다. ambtenaar amb-te-naar not: am-bte-naar
이런 음절 규칙에 따르면 Huizinga의 음절은 Hui-zin-ga가 됩니다. IPA의 발음 기호 [ˈɦœy̯zɪŋɣaː]도 이러한 음절 규칙과 일치합니다. Hui[ˈɦœy]-zin[̯zɪŋ]-ga[ɣaː]의 음절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그런데 연구개 유성 접근음(velar approximant)인 ɣ가 문제. 실제 발음을 들어보면(https://en.wikipedia.org/wiki/Voiced_velar_fricative)는 ‘아’보다는 ‘가’로 들립니다. 즉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네덜란드 일람표에 따르면 ‘하위징아’라고 해야 하겠지만, 실제 발음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어의 우리말 표기법과 발음의 차이, 어렵습니다.

2018년 4월 2일 월요일

네덜란드 도서관 탐구-31 헤이그, 평화궁전도서관, 휴고 그로티우스

평화 궁전 도서관은 국제법을 전문으로 하는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도서관 중 하나입니다. 주요 목적은 국제사법재판소 , 상설중재재판소 , 헤이그국제법학원 등 평화 궁전에 거주하는 기관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서관은 헤이그의 다른 모든 국제법 기관의 직원뿐만 아니라 국제법의 모든 학자 및 학생에게도 똑같이 열려 있습니다.

국제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화궁전도서관에 와서 도서관의 광범위한 컬렉션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구 가이드 와 상세한 카탈로그는 전 세계 어느 누구도 특정 주제에 익숙해지고 관련 문헌을 찾을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카탈로그는 국제법에 관한 거의 모든 간행물이 주제에 포함되어 상세하게 분류되기 때문에 특히이 목적에 유용합니다.

역사

영원한 재판소 (PCA) 를 대신하여 도서관을 설립하려는 아이디어로   인해 카네기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법원에 "국제법의 표준 도서관"을 제공하기를 원했고, 1913 년 8 월에 궁전이 열렸을 때 이것이 정확히 제공되었다. 그러나 10 년 안에 국제 사법 재판소 (1946 년  국제 사법 재판소가 승소 )가 1923 년에  헤이그 국제법 학원 (International Law of Academy of International Law)건축가와 이사회 어느 쪽도 공간의 급성 문제를 일으킨 궁전의 기능이 그렇게 급속히 확장 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1913 년에 많은 사람들이 터무니없이 큰 비판을 받았던이 궁전은 실제로 10 년 내에 너무 작음이 입증되었습니다.

도서관의 주된 목적은 1913 년에 현재 궁전에 거주하는 기관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었습니다. 처음에는  영구 상원 법원에 한해서  10 년 이내에이 서비스는 현재 국제 리그 연맹 법원과  헤이그 국제법 학원을 포함 합니다. 이 기관들은 모두 동일한 분야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확장은 공공 및 사설 영역 모두에서 주로 국제법이었던 도서관의 적절한 지방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국제 사법 재판소의 추가 분야로 인해이  기관은 자체 도서관을 제공 받았다.

파트너십과 프로젝트

국제 사법 재판소 는 상설 중재 법원 과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는  도서관의 주요 클라이언트입니다. 헤이그 아카데미의 경우, 도서관은 "홈 라이브러리"의 역할을 수행하여 아카데미의 연례 여름 강좌 학생들에게 필요한 모든 서적 및 기타 출판물을 제공합니다. 도서관은 아카데미 국제법 및 국제 관계 연구 및 연구 센터 연구원 및 고급 연구 세미나에 연구원에게 서지 지원을 제공합니다.

헤이그 지역의 다른 국제기구들, 특히 화학 무기 금지기구 , 헤이그 사립 국제법 회의 , 유고 슬라비아 재판소 , 레바논 특별 재판소 , 이란 - 미국 청구 심판소 및 국제 범 죄장 법원 은 또한 도서관을 빈번하게 사용합니다. 이런 식으로 도서관은 평화와 정의 의 국제 도시 인 헤이그의 네트워크에서 필수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

Leiden University  ( 헤이그 캠퍼스 ), Hague University 및 Asser Institute 와 같은 주변 교육 및 연구 기관의 학술 직원 및 학생들은  정기적으로 도서관을 방문합니다.

도서관은 평화와 정의를위한 세계적인 싸움에서 헤이그의 중심 역할을 증진하고 강화하기위한 목적으로 위에 언급 된 기관 중 일부 프로젝트와 협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Hague Justice Portal이 있습니다.

전화 번호 : +31 70 302 42 42 
팩스 : +31 70 302 41 66 (직통 번호) 
전자 메일 : 서비스 데스크 :  info@peacepalacelibrary.nl 웹 팀
:  webteam@peacepalacelibrary.nl
위에서 언급 한 이메일 주소로 이메일을 보내주십시오.

우편 주소

평화 궁전 도서관 (Vredespaleis 도서관) 
Carnegieplein 2, 
2517 KJ Den Haag 
네덜란드

도서관 방문

평화 궁전 도서관은 일주일에 5 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 시부 터 오후 5 시까 지 운영됩니다. 주말에는 도서관이 닫힙니다.
도서관을 방문하고 싶다면 평화 궁궐 문앞에있는 보안관에게 알려야합니다. 유효한 신분증 (여권, 운전 면허증)을 지참하십시오. 정문에서 ID를 제시해야합니다. 정문에서 방문자의 당일 패스가 제공됩니다. 유효한 신분증이 없으면 도서관을 방문 할 수 없습니다.


https://www.peacepalacelibrary.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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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고 그로티우스 (Hugo Grotius, 1583-1645)

소개

휴고 그로 티 우스 (Hugo Grotius, 1583-1645) - 국제법 연구 가이드
평화 궁전 도서관은 국제법에 관한 체계적인 현대 교리의 창시자이며 보편적으로 '국제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휴고 그로 티 우스 (Hugo Grotius, 1583-1645)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 인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신학 적, 시적, 역사적, 철학적 주제가 포함됩니다.

11 세의 나이에 그는 자신의 고향 인 델프트 (Delft)를 떠나 레이덴 대학 (University of Leiden)의 편지 학부에서 수학했으며, 1597 년 박사 학위 논문을 옹호했습니다. 1598 년 올리언즈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한 후, 옹호자가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바다의 자유에 관한 공화국과 영국 간의 분쟁에 대한 그의 참여는 바다 법칙의 현대 연구원들에 의해 여전히 연구 된 Mare liberum (1609)에 게재 된 그의 견해로 이어졌다 .

1618 년에, 그는 정통파 칼뱅 주의자들과 개혁자 들간의 종교적 싸움에 사로 잡혔다. 그는 반역죄로 혐의를 받고 투옥되어 루 부트 에인 성으로 보냈습니다 . 책가방에서의 탈출과 파리로의 비행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파리에서 그는 그의 걸작 De iure belli ac pacis 를 출판했다.(1625). 자연 법에 기초한이 작품에서 그는 '공정한 전쟁'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조사하고 설명했다. 전쟁이 정당화 될 때, 전쟁의 원인은 무엇이며 전쟁의 규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현대 국제법의 기초'로 널리 간주됩니다. 네덜란드 당국이 네덜란드로의 귀환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혀 지자 그는 1634 년 스웨덴 대사로 외교적으로 진출했다. 1645 년 스톡홀름의 크리스티나 여왕을 방문했을 때 그는 난파하고 씻겨 버렸다. 1645 년 8 월 28 일에 피로를 앓 았던 아프고 날씨가 빠진 로스톡 (Rostock) 해안에서 그의 마지막 말은 : "많은 것을 시도함으로써 나는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그의 시체는 마침내 젊음의 나라로 돌아와 델프트 에있는 새 Kerk 에 안장되었습니다 .

이 리서치 가이드는 휴고 그로 티 우스 (Hugo Grotius)의 작품 연구를위한 출발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평화 궁전 도서관에서 인쇄 및 전자 형식으로 제공되는 기본 자료를 제공합니다. 핸드북, 주요 기사, 서지, 정기 간행물, 연속 간행물 및 관심있는 문서는 선택적 서지 섹션에 나와 있습니다. PPL 카탈로그 링크가 삽입됩니다. 도서관의 체계적인 분류 →  그로티우스 (Grotius) 수집 및 주제 표제 (키워드) 휴고 그로 티 우스 (Hugo Grotius, 1583-1645)카탈로그를 검색하는 데 도움이됩니다. 데이터베이스, 전자 저널, 전자 서적 및 기타 전자 자료에 대한 구독에 특별한주의를 기울입니다. 마지막으로,이 연구 가이드는 관련 웹 사이트 및 기타 특별한 온라인 리소스에 대한 링크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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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궁전 https://www.vredespaleis.nl

평화 궁전

상설 중재 재판소, 국제 재판소, 헤이그 국제법 학원 및 평화 궁전 도서관이 있습니다. 궁전은 1913 년 8 월 28 일에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으며, 미국의 강철왕이자 박애주 의자 앤드류 카네기 (Andrew Carnegie)의 특별한 선물로 지어졌습니다. Peace Palace는 헤이그 (Haague), Legal Capital of the World 및 평화와 정의의 국제 도시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도서관 탐구-30 2018년 우수 공공도서관

2018 네덜란드 최우수 공공도서관

Beste Bibliotheek van Nederland 2018
 
NBD Biblion Award의 최종 우승자는 전문가 배심원과 대중이 함께 선정합니다. 6주 동안 (2018118일부터 31일까지) 일반인이 도서관잡지(www.bibliotheekblad.nl) 웹사이트를 통해 투표할 수 있습니다. 최종으로 2018320일 전국도서관대회에서 발표했습니다.
 
올해에는 총 15,379명이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이 숫자는 공공도서관이 네덜란드 사회에서 큰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최종 후보였던 6개의 공공도서관은 각기 다음과 같은 득표율을 보여주었습니다. 1. 즈볼레 공공도서관(32%). 2. 벤담 공공도서관(27%), 3. 퓌를메렌트 공공도서관(15%), 4. 암스테르담 베일메르플레인(12%), 5. 바렌드레흐트(7%), 6. 시따르트(7%).
 
이전 수상자는 DOK델프트(Delft), 새로운 라이브러리(Almere), 바세나르 공공도서관(Wassenaar), 헨헬로 공공도서관(Hengelo), 암스테르담 공공도서관(중앙도서관), 아른헴 공공도서관(Arnhem)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도서관의 유투브 경연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바렌드레히트 도서관 Bibliotheek Barendrecht (AanZet)

https://youtu.be/P1kMO7pVQQY


2.리녜 시따르트 도서관Bibliotheek Ligne Sittard (Domijnen)

https://www.youtube.com/watch?v=3dzIW8lEJAE

3. 퓌르메렌트 도서관 Bibliotheek Purmerend (Waterland). 

https://www.youtube.com/watch?v=sGsX9keRF-Y

4. 벤담 도서관 Bibliotheek Veendam (Biblionet Groningen)

https://www.youtube.com/watch?v=b2dQIdNoylI

5.즈볼레 도서관 Bibliotheek Zwolle (Stadkamer) 

https://www.youtube.com/watch?v=lkZteGEqs8o

6. 베일메르프레인 도서관 Bibliotheek Bijlmerplein (OBA)
https://www.youtube.com/watch?v=j7NqKxrfeqI
 

네덜란드 도서관 탐구-29 헤이그(덴 하흐) 공공도서관

헤이그 공공도서관 미션


미션

지난 10 년에서 15 년 동안 도서관의 기능에 많은 변화가있었습니다. 라이브러리는 이전보다 훨씬 광범위한 작업을하므로 라이브러리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많은 특성을 명명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 도서관은 다양한 기능과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입니다. 독서와 문학 외에도 4 가지 중요한 기능이 도서관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 도서관은 교육 기관입니다. 여러분은 무언가를 읽거나 배우면서 자신을 풍부하게합니다. 이것은 지역 센터와 구호 기관의 도서관을 구별합니다.
  • 도서관은 모두를위한 곳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오는 유일한 공공 장소입니다 : 젊고 노인, 가난하고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고 교육 수준이 낮은 Hagenaar와 expat. 도서관은 도시에서 독특하고 긍정적 인 요소입니다. 자명 한 만남의 장소로서, 그들은 사회적 응집력을 실현하는데 중요한 요소를 형성합니다 [1].
  • 도서관은 대규모 도서관으로, 연간 10 만명 이상의 회원과 연간 250 만명의 방문객을 보유한이 도서관은 미국에서 가장 큰 문화 기관 중 하나입니다.
  • 도서관은 파트너 기관과 긴밀히 협력하여 목표를 실현하는 네트워크 조직입니다. 이것은 작업장에서 도서관 비즈니스의 파트너를 통합함으로써 점점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도서관은 시정촌이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을 시행 할 수있는 도구입니다. 건강 관리, 해방 또는 언어 자극 예방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도서관은 이에 대한 유용한 도구입니다.
도서관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특징을 출발점으로하여 미션을 공식화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도서관은 개별 시민을 풍성하게하고 
도시 전체에 가치를 더합니다.
  
정책 비전 2016-2019 Library The Ha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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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Vereniging Openbare Leeszaal en Bibliotheek ’s-Gravenhage werd opgericht in mei 1905. In januari 1906 werd de Openbare Leeszaal en Bibliotheek geopend. 헤이그 도서관은 1905년 5월에 설립되었습니다. 1906 년 공공 독서실과 도서관이 열렸다.

De eerste wijkbibliotheek werd in 1925 in Transvaal geopend, een tweede volgde in 1930 in het Laakkwartier, een derde in 1931 in Scheveningen. Het vierde filiaal kwam in 1933 in de Vruchtenbuurt en het vijfde was het filiaal Duinoord. In 1983 waren er in totaal 16 wijkvestigingen. Na de bouw van bibliotheekvestigingen in de nieuwe wijken (2006 en 2009) telde Den Haag in 2011 18 wijkbibliotheken.
첫 번째 지역 도서관은 1925 년 트랜스 발 (Transvaal)에 개관되었고, 1930 년에는 두 번째 도서관이 개장했습니다. Laakkwartier, Scheveningen에있는 1931 년에 세 번째. 네 번째 지점은 1933 년 Vruchtenbuurt에서 나왔다. 다섯 번째는 Duinoord 지점이었습니다. 1983 년에 총 16 개의 지부가있었습니다. 건설 후 새로운 이웃의 도서관 사무실 (2006 년과 2009 년), 헤이그는 2011 년에 18 개의 지역 도서관을 운영했습니다.

Een typisch Nederlands verschijnsel - de verzuiling - werd ook in het prille bibliotheekwezen volledig doorgevoerd, zodat Den Haag in 1920 naast een openbare ook een katholieke en een christelijke leeszaal bezat. In 1980 maakte een grote fusie een einde aan het verzuilde systeem en bleef de openbare bibliotheek als enige over. In dat jaar werd de bibliotheek onderdeel van de gemeente als zelfstandige dienst met een bestuurscommissie. In 2000 werd de bestuurscommissie opgeheven. Sinds 2014 is Bibliotheek Den Haag een sector binnen de Dienst Publiekszaken. Dat de openbare bibliotheek onderdeel is van de gemeentelijke organisatie is uitzonderlijk. Landelijk gezien zijn bijna alle bibliotheken stichtingen met een subsidierelatie met de lokale overheid. 
전형적인 네덜란드 현상 - 지주화 (pillarization) -는 초기 도서관 시스템에서 완성되었다.
대중과 함께 1920 년에 헤이그 또한 카톨릭과 기독교 독서실. 1980 년에 합병은 지주화 시스템에 종지부를 찍었고 그해에 도서관은 다음과 같은 시정촌의 일부가되었습니다.
관리위원회와 독립적인 서비스. 2000 년 이사회가 해산되었습니다. 2014 년 이래로 헤이그 도서관은 지방 자치 단체의 일부. 

Krimp en groei
De grens van 100.000 leden werd in 2007 overschreden. Het ledental bedraagt 103.000. Hiervan is iets meer dan 50% volwassen – en dus betalend – lid. Voor de jeugd tot 18 jaar en Ooievaarspashouders is het lidmaatschap gratis. Aan alle Haagse bibliotheken samen worden jaarlijks meer dan 2,5 miljoen bezoeken gebracht, waarvan aan de Centrale Bibliotheek alleen al 1,2 miljoen. In 2013 werden zes wijkbibliotheken gesloten. Daarvoor in de plaats kwamen zes - kleinere - buurtbibliotheken. De in 2013 gesloten wijkbibliotheek Schilderswijk is in september 2015 heropend. De buurtbibliotheek in buurthuis De Mussen werd als gevolg daarvan gesloten. In het Statenkwartier werd de buurtbibliotheek gesloten als gevolg van verhuizing van het Couvéehuis, waar het gastvrijheid genoot. Den Haag telt op dit moment naast de Centrale Bibliotheek 13 wijkbibliotheken en vier buurtbibliotheken. Een nieuwe subsidieregeling stimuleert sinds dit voorjaar maatschappelijk initiatieven op het gebied van buurtbibliotheken.

2013 년에는 6 개의 지역 도서관이 폐쇄되었습니다. 대신에 6 개의 작은 도서관. 2013 년에 폐쇄 된 지역 도서관 Schilderswijk는 2015 년 9 월에 재개되었습니다.
커뮤니티 센터 De Mussen에있는 인근 도서관은 결국 폐쇄되었습니다. Statenkwartier는
인근 도서관은 환대의 장소였다 쿠부에호이의 이전에 의해 폐쇄되었습니다
헤이그는 현재 13 개 지역 도서관과 4 개의 도서관이 있습니다

Bestuurlijke rolverdeling
De Haagse bibliotheek behoorde tot de eerste Nederlandse openbare bibliotheken. Vanaf 1910 kregen deze rijkssubsidie. Dat was anders in het voorbeeldland Amerika, waar met name door Andrew Carnegie - hier bekend als stichter van het Vredespaleis - vele openbare bibliotheken werden gesticht. In 1921 werd een nieuw stelsel van rijkssubsidie ingevoerd, dat in feite de lokale overheid aanwees als hoofdrolspeler. Er werden ook kwaliteitseisen gesteld aan de voorziening en aan het personeel ervan.
In 1975 kwam de Wet op het Openbaar Bibliotheekwerk tot stand. Gemeenten kregen een rijksbijdrage voor het bibliotheekwerk. De wet karakteriseerde de bibliotheek tot een basisvoorziening. In lijn daarmee werd contributievrijdom voor jongeren tot 18 jaar geïntroduceerd. Het leidde landelijk tot een grote uitbreiding van bibliotheken en leden. Dat was ook in Den Haag het geval. Daar werden in de periode 1966-1981 zeven nieuwe wijkvestigingen geopend. In 1987 werd het bibliotheekwerk met een aantal andere terreinen ondergebracht in de Welzijnswet. De verantwoordelijkheid voor het lokale bibliotheekwerk - en de financiering daarvan - werd overgeheveld naar de lokale overheden. Sinds 1994 maakte het bibliotheekwerk deel uit van de Wet op het specifiek cultuurbeleid waarin in twee artikelen (artikel 11a en 11b) jeugdcontributie en 
netwerkvorming aan de orde kwamen. Deze wet bevatte in tegenstelling tot de Welzijnswet geen verantwoordelijkheidsverdeling tussen de overheden. 
헤이그 도서관은 네덜란드 최초의 공공 도서관 중 하나였습니다. 1910 년부터 접수
이 주 보조금. 그것은 앤드류가 특히 미국의 모범적 인 국가에서 다르다. 평화 궁전의 창시자로 알려진 카네기 - 많은 공공 도서관이 설립되었습니다.1921 년에 새로운 정부 보조 시스템이 도입되었는데, 실제로 지방 정부를주인공. 품질 요구 사항도 시설과 직원에게 부과되었습니다.1975 년 공공 도서관 업무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지방 자치체가 정부 보조금을 받음도서관 업무용. 이 법은 도서관을 기본 조항으로 규정했습니다. 라인그로 인해 18 세까지의 청소년을위한 기부없는 회원이 소개되었습니다. 그것은 전국적으로 하나가되었다.도서관과 회원의 대규모 확장. 그것은 헤이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기간 1966-1981 7 개의 새로운 지역 사무실이 열렸다.1987 년에는 여러 분야의 도서관 업무가 복지법에 통합되었습니다.지역 도서관 업무 및 그 자금 조달에 대한 책임이
지방 당국에 양도. 1994 년 이래로 도서관 업무는특정 문화 정책에 관한 법률, 두 개의 조항 (조항 11a 및 11b), 청소년 기여 및네트워크 형성. 이 법은 복지법에 위배되지 않았다.

정부 간의 책임 분담.

Het ministerie van OCW, de VNG en het IPO entameerden vanaf het jaar 2000 gezamenlijk een proces van bibliotheekvernieuwing. De rolverdeling tussen de verschillende overheidslagen ten aanzien van het bibliotheekwerk werd sindsdien vastgesteld in interbestuurlijke bibliotheekcharters. Het Rijk is daarbij verantwoordelijk voor de bibliotheekvernieuwing op het gebied van de digitale infrastructuur, de provinciale overheid bekostigt de provinciale serviceorganisaties die de lokale bibliotheken ondersteunen en de lokale overheden zijn verantwoordelijk voor de lokale bibliotheek. Deze bestuurlijke rolverdeling is overgenomen in de nieuwe Wet stelsel openbare bibliotheekvoorzieningen (Wsob), die op 1 januari 2015 van kracht werd. In deze wet worden een aantal taken op nationaal niveau neergelegd bij de Koninklijke Bibliotheek (KB). Het Sectorinstituut Openbare Bibliotheken en de uitvoeringsorganisatie Bibliotheek.nl zijn om die reden met de KB gefuseerd.
De KB is onder meer verantwoordelijk voor het organiseren van de nationale digitale bibliotheek, die de e-books bevat voor klanten van de openbare bibliotheken. Om deze nationale digitale bibliotheek te bekostigen is een korting doorgevoerd op het gemeentefonds. Daarnaast is er sprake van zelfregulering in brancheverband. Samen met de VNG heeft de bibliotheekbranche de Richtlijn voor basisbibliotheken2 vastgesteld. Eveneens in overleg met de VNG zijn certificeringsnormen3 voor openbare bibliotheken vastgesteld.
문부 과학성, VNG 및 IPO는 2000 년부터 공동으로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도서관 갱신. 관련 정부 차원의 역할 분담 도서관 업무는 이후 행정 간 도서관 헌장에서 확립되었다. 제국은 디지털 인프라 분야의 도서관 갱신 책임자, 지방 정부는 지역 도서관이 제공하는 지방 서비스 기관에 자금을 지원합니다지원 및 지역 당국은 지역 도서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러한 역할의 행정 부서는 새로운 공공 도서관 시설법 (Public Library Facilities Act) (Wsob)는 2015 년 1 월 1 일에 발효되었습니다. 이 법에는 여러 가지 업무가 있습니다.왕립 도서관 (KB)에서 국가 수준으로 기탁 됨. 공공 부문 연구소
따라서 도서관과 Bibliotheek.nl 집행 기관은 KB와 합병되었습니다. 무엇보다 KB는 국가 디지털 도서관을 조직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공공 도서관 고객을위한 전자 서적. 이 국가 디지털 도서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지방 자치 단체의 기금이 할인되었습니다.
또한, 업계 상황에서 자체 규제가 있습니다. VNG와 함께 도서관 부문에서는 기본 라이브러리 지침 2를 채택했습니다. 또한 VNG와 협의하여 공공 도서관에 대한 인증 표준 3.

이하 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