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7일 화요일

최주훈 목사, <루터의 재발견>, 다큐멘터리 <다시 쓰는 루터 로드>

500년전 독일에서 루터에 의해 일어난 종교개혁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을까. 부패한 종교적 전통과 권위주의적 구습. 이에 맞선 개혁과 변화가 개신교의 시작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 개신교는 500년전 개혁대상이던 교회와 꼭 닮았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비정상회담>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등으로 시청자들에게 잘 알려진 독일 출신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32)이 <루터의 재발견> 저자인 최주훈 목사(47·중앙루터교회 담임)에게 물었다. 이들은 얼마전 함께 독일에서 루터의 행적을 여행하며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들의 여정은 현재 CBS TV를 통해 다큐멘터리 <다시 쓰는 루터 로드>로 방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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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재미있는 것이 교회 건물이었어요. 독일에는 전형적인 형태의 교회나 성당 건물이 마을에 자리잡고 있어서 누구나 보더라도 교회인줄 알죠. 그런데 한국에선 언뜻 보면 상가나 회사같은데 안에 교회가 있고 옥상에 십자가가 있어요. 전에 강남 사랑의 교회를 지나는데 정말 백화점보다 더 잘 지어져 있더라고요. 

최주훈=교회 하면 다들 건물을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예요. 게다가 외딴 섬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 시민사회의 한 부분에 존재하는 거지요. 

다니엘=유럽에서 교회는 종교보다는 문화적 느낌이 더 강한 것 같아요. 종교생활을 하지 않다가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이 되면 문화적 행사로, 또 그 주변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시장에 참여하러 교회나 성당에 가는게 일반적이에요. 때문에 유럽 교회는 종교적인 의미를 잃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최주훈=너무 비판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한국은 정말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요. 그 정도 숫자의 신자들이 있는 나라라면 이 나라의 전반적인 것이 다 변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변한게 없어요. 국회의원들 중 기독교인이 절반에 이른다는데 그들이 무엇을 했나 묻고 싶을 때가 정말 많지요. 기독교인이라면 숫자가 아니라 살아가는 세계가 바뀌어야 하거든요. 

다니엘=지금도 고향(랑엔펠트)에 가면 어릴 때 다녔던 성당을 찾는데 일요일에 성당이든 교회든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40대면 굉장히 젊은 편이거든요. 고령화도 무척 심하고. 이렇게 계속 시간이 가면 어떻게 될까 싶기도 해요. 

최주훈=역사를 보면 교회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소멸의 길로 가는 건 아니었어요. 인간의 심성 때문에 종교는 절대 사라질 수 없어요. 종교심이 어느쪽으로 분출되느냐의 차이가 있는거죠. 유럽에선 종교개혁을 거치며 기독교의 종교심이 교회라는 규정된 틀이 아니라 문화로 분출됐습니다. 그게 유럽의 기독교 역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가 오래된 곳일수록 문화와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법과 교육에 뿌리내리고 있지요. 지금 한국에도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종교성을 끊어버리지 않은 ‘가나안 성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기존 형태의 종교생활이 아니라 일종의 아카데미 운동, 신앙에 대한 공동체 운동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는거지요.

다니엘=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최주훈=긍정적이라고 봐요. 종교개혁 당시엔 라틴어 성경만 권위가 인정됐어요.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화형감이었지요. 그런데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던 것은 목숨을 걸었다는 뜻이에요. 왜 했을까요. 복음이 주는 자유와 해방의 기쁨 때문이었어요. 그전엔 신과 나 사이에 사제가 있었어요. 중간 역할을 하며 성경을 해석해주고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가야 했지요. 현재로 봤을 땐 목사에게 모든 걸 다 믿고 맡긴다는 건데 이건 종교개혁의 의미에서 봤을 때는 잘못된 거예요. 중간 단계가 필요 없어요. 스스로 성경을 읽고 고민하며 책임적 존재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 기존 질서에 저항하고 소통하며 힘을 확장시켜서 책임적 존재로 살아가는 것. 그게 종교개혁 정신이지요. 

다니엘=그런 종교개혁 정신이 독일사회와 교육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도 늘 하셨던 말씀이 자신의 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면서 늘 비판적으로 생각하라고 했어요. 어떤 사안에 대해 항상 내 생각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 서로 토론하고 상대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 그게 독일 교육의 핵심이거든요. 

최주훈=종교개혁 사상을 가장 잘 이어받은 사람으로 철학자 헤겔을 꼽을 수 있어요. 그는 근대와 전근대를 나누는 기준은 ‘끝까지 질문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 힘이 있으면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인거죠. 21세기 한국 교회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이 질문하는 힘, 용기예요. 

다니엘=한국 교회 목사님들은 신자들에게 ‘질문하라’는 이야기를 하나요?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웃음). 게다가 한국 교육에도 질문이 별로 없다는 지적이 많잖아요.. 

최주훈=유교문화 영향 때문인지 예로부터 어른이 답을 주는 것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교회에서도 목사가 답을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의 삶에 답이 정해져 있진 않은데 자꾸 답을 주려고 하고, 그게 불완전하다보니 헤매고 불신하게 되지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루터교 목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단에 들어가 체포된 뒤 사형을 받은 인물이에요. 목사인데 암살단이라? 본회퍼 입장에선 살인도 죄이지만 히틀러에 찬성하는 것도 죄, 가만히 있으면서 두고 보는 것도 죄였어요. 우리가 살면서 정답과 오답이 완벽히 갈려 있는 것은 없어요.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게 되는데 루터는 그 선택의 기준을 제시했어요. 첫번째는 내가 아닌 남에게 유익한건지, 두번째는 선한 미래를 만들 수 있는지, 마지막은 내가 책임을 달게 질 선택인지 입니다. 우리의 판단이 완벽하지 않지만 예수를 믿는다면 적어도 이런 기준으로 이웃과 미래, 사회적 책임을 고민해야죠. 그런데 한국 교회에 있는 고민 중 상당수가 교회재산이에요. 

다니엘=신자로서 믿음이 중요하지만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나느냐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유럽에선 볼 수 없다가 한국 와서 조금 낯설게 느껴졌던 모습이 거리에서 ‘하나님 안믿으면 지옥간다’고 외치는 사람들이에요. 

최주훈=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천국과 지옥은 간단해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 천국, 하나님 없는 삶이 지옥이예요.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삶과 죽음의 개념과는 달리 봐야 합니다. 

다니엘=독일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큰 장벽이 없어요. 엄마하고 같이 다녔던 성당에서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반부터 가톨릭 미사를 드리면서 전 오르간을 쳤어요. 같은 공간에서 오전 9시에는 개신교 예배를 드려요. 이를 ‘외쿠메네’, 즉 함께 살아가는 삶의 자리라고 부르는데,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거죠. 그런데 한국은 가만히 보면 개신교와 천주교는 아예 다른 종교라고 구분하는 것 같아요. 이단이라고 주장하며 차별하는 경우도 있고. 왜 그렇게 된건지 궁금해요. 

최주훈=개신교든 가톨릭이든 한국 교회가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아요. 500년 전에 서로 싸운 것만 기억하지 그 사이에 서로가 변화하고 노력한 것들은 알려고 하지 않아요. 500년전의 가톨릭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요. 개신교 역시 마찬가지고요. 교회가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우려는 장이 필요합니다. 독일에선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이 종교개혁에 대한 역사책을 만드는 작업에 함께 참여했어요. 

다니엘= 원래 기독교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 들어온 기독교에 전통 신앙이나 종교가 섞이는 그런 부분도 신기했어요. 일부 교회에서 보면 전통 샤머니즘의 무당 역할을 목사에게서 발견할 수도 있고요. 특별히 더 흥미로운 부분은 좁은 지역에서 굉장히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니 생활속에서 종교간의 갈등이나 배척이 꽤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제사 문제는 종교와 한국의 문화·역사가 갈등을 빚는 사례이기도 하고요. 제 친구가 개신교 신자인 지인에게 법륜 스님의 책을 추천했는데 그 분이 ‘난 기독교 신자라서 스님 책은 안본다’는 반응을 보여서 좀 놀랐던 기억이 나요. 그런 배타적인 부분이 발견되는 개신교 신자들을 종종 볼 수 있거든요. 어떤 대상에 대해 비판하든 긍정하든 배우려는 자세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상대를 알아야 그에 대한 의견도 가질 수 있는데 말이죠. ‘이슬람은 테러’다 라고 무조건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비판 전에 그 종교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공부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로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최주훈=이건 여담인데 코란을 독일어로 가장 먼저 번역한 사람이 바로 루터예요. 당시에 이슬람 세력과 대립하면서 다들 이슬람을 정죄할 때 루터만 ‘일단 저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아야 한다’면서 코란을 번역했어요. 루터는 모르는 채 무턱대고 움직이는 것을 늘 경계했어요. 

다니엘=제가 23년 넘게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이번에야 제대로 종교개혁에 대해 공부했어요. 독일에서 있었던 일인데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어 반성도 좀 했고요. 제가 가톨릭 신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독일에서 루터는 종교적인 느낌보다는 표준 독일어의 기초를 만든 인물로 더 와 닿는 것 같아요. 그가 번역한 성경이 현대 독일어의 기초가 됐으니까요. 현대 독일어에서 사용하고 있는 비유적 표현이나 신조어 중 상당수를 루터가 만들었어요. 평소에 자주 쓰는 표현 중 루터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번에야 알게된 것도 꽤 있거든요. 

최주훈=앞서 말했듯 루터는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는 세상을 꿈꿨어요. 그것을 위해 성서를 번역했고 누구나 평등하고 보편적으로 교육을 받는 것을 추구했어요. 그때부터 보편교육이 시작됐지요. 

다니엘=결국 종교개혁의 정신이 중요한건데, 신자라면 어떤 삶의 자세가 바람직할까요. 

최주훈=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의 일상 한가운데로 들어온 것이에요. 교회가 세상속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기독교인이라면 내 중심을 이웃에게로 향하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죽여서 남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죠. 

다니엘=전 이번에야 비로소 종교개혁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됐어요. 그간의 종교생활이라면 내가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축제를 얼마나 화려하게 보내고 있는지 그런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거든요. 본회퍼처럼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고민을 하고 선택해야 할 것인지, 저항과 용기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다시 하게 될 것 같아요.

최주훈=종교개혁이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동일하게 신적인 가치를 갖고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계급이 없어요. 다 평등하죠. 그 가치를 분명히 알아야 해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도 없어요. 그러므로 권위를 부리는 사람에게 저항해야 하고, 사람의 가치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약자를 끌어올려 섬기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삶이어야 합니다. 

다니엘=제가 이 다큐멘터리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지인이나 팬들 중 이런 분들이 있었어요. ‘다니엘, 가톨릭 신자 아니었어? 그런데 개신교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하는거야?’라고요. 이런 작은 부분들이 우리 속에 있는 선입견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입견은 쉽게 갖고 금방 커져요. 그리고 그럴수록 본질에서 멀어져가고 서로에게서 멀어지게 돼요. 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서로를 더 배우고 잘 알아가는 것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마음으로 이 프로그램을 바라봐줬으면 해요. 

최주훈=종교개혁의 역사는 교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정신이 삶에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독일을 비롯해 덴마크, 북유럽 등 루터교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일수록 보편적 복지와 인권, 교육 정책등이 잘 구현돼 있어요. 종교개혁의 정신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지가 현재 한국 개신교가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할 질문입니다.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0161033001&code=960206

500년 전 '루터'가 지금 '한국교회'에 던지는 질문 - CBS 다큐 ‘다시 쓰는 루터로드’ 1부 ‘돈과 권력’…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https://youtu.be/jluhHYL8qvY

설정 스님, <어떻게 살 것인가>

다섯 살 때부터 주역의 대가인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운 설정스님은 열네 살에 출가했다. 1954년 아버지의 생신불공을 위해 수덕사에 들렀다가 그대로 출가했다. 1955년 혜원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1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그동안 덕숭총림 수덕사 주지와 조계종 중앙종회의장을 지냈다. 설정스님은 과거 행정 소임을 보면서도 참선 수행을 놓지 않아 이(理)와 사(事)를 겸비한 대표적인 스님으로 꼽힌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엔 안거 때마다 전국 선원에 방부를 들이는 등 철저한 수행으로 운수납자의 지남이 되고 있다. 
설정스님은 특히 1994년 종단개혁 당시 개혁회의 법제분과위원장을 맡아 개혁입법을 진두지휘했다. 종단 정상화와 교육을 통한 승가의 질적 향상, 포교 활성화, 재정투명화라는 입법기조에 따라 총무원장 권한을 분산하고 제한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또한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제11대 중앙종회의장 소임을 맡아 종단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안으로는 문중과 계파를 떠나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데 힘썼고, 이를 통해 종도와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종단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설정스님은 원담스님이 입적한 다음 해인 2009년 덕숭총림 4대 방장으로 추대됐다. 이때부터는 문중화합과 후학지도에 힘썼다. ‘무슨 일이든 정성스럽게 잘하면 된다’는 선사들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젊은 후학들과 함께 하루 여덟 시간 정진하며 선농일치의 삶을 살고 있다. 스님 스스로도 일 하는 것 자체가 “정말 좋다”고 자부하고 있다. 스님은 자서전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살아나 덤으로 사는 거니까 죽을 때까지 쉽고 편하게 살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고 산다”면서 “내가 농사를 지어 열매 맺는 모습을 보면 상당히 흐뭇하다. 노동의 의미를 일부러 느끼지 않으려 해도 쾌감이 있다”고 밝혔다.
평소 자상하고 인자함이 묻어나는 스님이지만, 불의 앞에서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는 강단진 면모를 지녔다. 1980년 10·27 법난 때 대전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서는 자술서를 쓰라는 강요와 협박에도 사흘 동안 단식 좌선으로 버텼다. 이후 신군부가 주도한 ‘관제’ 법회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국민 화합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니 10만 병력을 동원해서 스님들을 잡아넣고 불교를 탄압했다. 이게 과연 국민화합인가”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종회의장을 마친 직후인 1998년 췌장암에 걸렸을 땐 “내가 다시 산다면 결코 편하게 살지 않겠다”며 참회 정진으로 병을 극복했다. 수술을 받고 몸조리를 하면서 기도로 병을 완치한 일화는 자서전에도 잘 나와 있다. “‘만약 죽지 않고 살면 반드시 진정한 수행자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사람은 어떤 위기 앞에서도 용기를 내면 살 길이 열린다. 그때 그런 용기를 내지 않았으면 점점 몸이 가라앉아 죽었을 겁니다.” 
세계적인 작곡가 고(故) 윤이상 선생의 천도재를 지내준 일화도 유명하다. 1995년 독일로 가서 윤이상 선생의 49재 추모법회를 봉행한 것. 독실한 불자였던 윤이상은 냉전시대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남한에선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인물이었다. 당시만 해도 비전향 장기수 현안으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세가 강력했던 때였다. 다들 쉽사리 엄두를 못 낼 때 불교의식으로 장례를 치르기를 원했던 유가족의 절절한 소원을 풀어줬다. 이념과 국경을 뛰어넘는 자비실천이었다. 49재를 진행하며 고인의 묘비에 ‘처염상정(處染常淨, 진흙탕 속에 피어나도 더러운 흙탕물에 묻히지 않는다)’이라는 경구도 써 주었다. ‘깨달음은 말이나 글로 전하지 않는다’는 불립문자 전통을 따르는 스님이지만 법문은 굉장히 쉽다. 한문을 많이 인용하기보다 일상의 언어로 법문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현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법회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설정스님은 수행자로서의 삶과 인생의 영원한 화두인 ‘어떻게 살 것인가’를 놓고 약 한 시간 동안 법문했다. 이어 200여 청중들은 신도들과 허심탄회하게 질의응답을 주고받으며 불교를 폭넓게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설정스님은 지난 12일 제35대 총무원장 당선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마부정제의 뜻을 거울삼아 신심과 원력을 다해 종단 발전에 쉼 없이 진력할 것”을 다짐했다. 향후 설정스님이 이러한 원력을 어떻게 실현해 나갈지 사부대중의 관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불교신문3337호/2017년10월18일자] 
출처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007

조희연 서울시교육청 교육감과 마이클 애플 교수의 대담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 세계 민주주의의 모델이다

성열관 마이클 애플 교수의 이번 방문은 지난 2015년 이후 2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때는 국정교과서 이슈가 가장 중요했는데,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오늘 대담은 평화로운 촛불혁명 이후 갖는 대담이기에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조희연 어제 ‘평화시민 교육’에 관한 컨퍼런스가 있었고 저도 참여했었습니다. 교수님이 강연 중에 하신 “한국은 명사의 나라가 아니라 동사의 나라다”라는 말씀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요. 세계적으로 퇴행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이 보기 드물게 평화적이면서 혁명적인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한국이 보여준 역동성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의미 있게 받아들이신 것 같은데 최근 한국의 거대한 변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마이클 애플 1980년대 후반 한국에 처음 왔을 때도 한국은 움직이는 동사의 나라이면서 감정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나라였습니다. 80년대가 군부에 동조하는 시대였다고 한다면 지금은 개별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국민이 힘을 가진 주체적인 위치로 변화했다는 점이 크게 다릅니다. 한국은 지금도 계속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고 그래서 ‘명사가 아니라 동사의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희연 강연에서 특별히 ‘평화시민 교육’을 강조하셨습니다. 트럼프에 대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비판적이신데 한국의 진보적 역동성에 비해 미국 사회는 퇴행적 역동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차별적, 인종적, 우익적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평화시민적인 참여교육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마이클 애플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이유 중 하나도 트럼프 대통령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만, 그는 굉장히 전략적이고 대중영합적인 인물입니다. 국민들로 하여금 다른 인종,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을 갖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으며, ‘우리’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우리’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의미의 ‘우리’를 사용합니다. 순수 미국인과 순수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해서이며 순수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을 아웃사이더로 취급하기 위한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굉장히 영리한 정치가로 사람들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갖고 있는 두려움을 자극해서 실업에 대해 대기업이나 사회 구조에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다른 인종이나 이민자를 탓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진정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좋은 역할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사정권과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한국이 보여준 변화의 모습을 통해 한국이 다른 사회에 바람직한 모델로서 큰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조희연 지난 9월 20일에 문재인 대통령께서 ‘세계시민상’을 수상하면서 “우리 국민은 촛불혁명으로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희망을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교수님께서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에 대해 파악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이클 애플 미국은 그동안 인종, 계급, 성별 등에서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지금은 다시 예전으로 되돌려지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상황은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계속 그렇게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변화 안에는 시민들뿐만 아니라 이민자를 비롯해 아웃사이더로 여겨지는 사람들까지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조희연 트럼프 대통령이 강도 높은 대북제재 방침을 내놓고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 안보위기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북핵 위기에 대해 오히려 외국에서 더 큰 위기의식을 갖고 바라보는 것 같은데 한반도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
마이클 애플 이번 한국 방문을 앞두고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김정은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더 걱정되고, 미국 정부가 지금의 갈등과 위기 상황을 즐기고 있다고 봅니다. 트럼프 때문에 야기된 문제가 많고 그의 공격적인 패턴이 문제인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을 무례하게 대하고 있는데, 다른 국가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게 ‘다 나를 따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잘못입니다. 존중은 상호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실용적인 시민교육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교육 시스템 안에서 민주시민을 교육하는 데 책임을 다해야 하고, 한국을 보며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교육혁신, 포용력 있는 세계시민교육으로 나아간다

성열관 지금까지 한국의 변화와 한반도 안보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제부터 교육과 관련해 더 집중적으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희연 저희가 교육혁신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한국의 교육혁신운동은 아래로부터 출발해서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학교문화를 극복하고, 학생중심의 교육을 만들어가고, 학교를 민주적 공동체로 재편하려는 거대한 움직임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혁신운동과 비교하면 어떤 점이 같고, 또 다른지 궁금합니다.
마이클 애플 저는 전통적으로 시험 위주의 교육이 이루어진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혁신교육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감님이 지금까지 진행한 혁신교육이 이룬 성과를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계속 잘 진행하길 바랍니다. 국제사회에서는 싱가포르나 핀란드 같은 나라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저는 특별히 노르웨이나 스웨덴의 상황을 언급하며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노르웨이의 경우 국가 주도 교육과정이 있지만 교사가 학생 상황에 맞춰 자율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래에서부터 반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익적인 그룹이 반이민주의 정서를 활용해서 혁신적인 학교를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교의 교육 수준이 떨어진다며 반발하고 있는데, 실제로 교육의 질은 떨어지지 않았고 교사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고 있습니다. 노르웨이에서 보수적이면서 인종차별적인 정책을 펼치는 정부가 들어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 시험성적이 떨어졌다거나 학교의 교육 수준이 떨어졌다며 지금까지의 성과를 뒤엎으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도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잘 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우익정당이 우세한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보수적인 정당이 힘을 잃은 상태지만 그것이 일시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다른 나라의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아 대처해나가길 바랍니다.
조희연 교수님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혁신교육운동에서 어떤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지 말씀해주셨는데, 이민자를 포용하는 부분은 내재적인 극복과제라고도 생각됩니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역동성’이라고 할 때 그 민주주의는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민주주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편협한 민족주의는 편협한 인종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일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이 타 인종이나 타 민족에 대한 배타성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개연성이 크다고 봅니다. 한국 민주주의가 포용력을 가지고 민족적, 인종적 이방인에게까지 개방할 수 있는지 또 우리 혁신교육이 이방인들까지 포용하는 열린 교육으로 갈 수 있는지가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도전과제라고 생각됩니다. ‘세계시민교육’, ‘코스모폴리턴 교육’이 중요하고 또 필요한 시점에서, 앞으로 우리 혁신 교육이 ‘세계주의적인 포용력’을 얼마나 갖는지가 관건이 되리라고 봅니다.
마이클 애플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 이유 때문에 한국이 ‘명사의 나라가 아니라 동사의 나라’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한국은 과거 한반도에 여러 다른 나라의 침략이 있었기 때문에 단일 민족과 단일 문화에 대해 특별히 더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문화’라는 것은 구성원들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고 정의 내려지는 것입니다. 한국에 다양한 구성원이 유입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하는 ‘공통 문화’에 대해서, 또 한국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계속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공통’이라는 개념 자체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서 하나의 과정이고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이 때문에 한국은 물론 모든 나라의 교육에 있어 세계시민교육이 가장 기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모든 구성원이 참여해야 하는데 학생, 학부모, 교사는 물론 미디어를 비롯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구성원을 대변하는 단체들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교육 불평등을 해소해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조희연 교육 불평등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방식, 제도적인 기회균등할당제 등이 있습니다만 한국에서는 구조 개혁적인 방식을 선호합니다. 저희는 교육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자율형사립고 같은 소수 엘리트 학교를 폐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개혁을 진행하고 있는데 미국의 경험에 비추어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마이클 애플 소수의 엘리트 학교가 가진 기존의 힘이 무력해지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교육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책에서 저는 교육 불평등이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기득권층은 대중들이 불평등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교육 불평등은 안개처럼 가려져 있습니다. 교육정책 기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육 불평등이 눈에 분명히 보이도록 진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항이나 반발에 대해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육당국이 데이터를 가장 많이 갖고 있으니 이를 활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수적인 측에서 잘못된 이야기를 퍼뜨리면서 엘리트 학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데이터를 활용해 교육 불평등을 드러내고, 계층을 없애는 것이 진정으로 모두가 참여하는 민주주의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희연 미국은 기본적으로 교육에서도 시장원리가 작용하는 방식이고 우리나라의 자율형사립고는 미국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돈을 많이 내고 엘리트 교육을 받는 게 용인되고 있고 시장원리로 보면 공정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교육평등주의가 강한 사회라 미국식 엘리트 교육 모델을 국민들이 수용하지 않습니다. 학부모가 더 많은 돈을 내고 특별한 교육을 받겠다는 자율형사립고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교수님은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신지 말씀해주세요.
마이클 애플 한국에서 자율형사립고와 같은 학교는 폐지되는 것이 맞습니다. 미국의 경우도 공립학교 유형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사립학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미국 내 소수의 사립학교의 경우 계속해서 대통령, 대법관을 배출하고 있고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을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학교들은 엘리트를 양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엘리트가 소수의 교육 기관에서 교육받는다면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는 어렵습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 교육주체들이 민주적 방식으로 주도해야 한다

조희연 한국이 제4차 산업혁명의 도전에 너무 민감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인공지능시대, 제4차 산업혁명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만큼, 그에 대해 준비하는 것 또한 교육의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적인 대량생산교육, 지식 위주의 교육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가 우리의 과제라고 여겨지는데 이 도전을 교육적으로 어떻게 응전하는 게 좋은지, 교육혁신에 어떤 내용이 추가되어야 하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마이클 애플 교육을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볼 수는 없습니다. 교육을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관점입니다. 저는 교육이 AI시대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에만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미국에서는 과학, 기술, 수학, 공학에 초점을 맞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실제로 10가지 직업 중 8가지 직업은 그런 기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민의식, 학습 의지,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치관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교육을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조희연 제4차 산업혁명 담론, 인공지능 담론에는 친기업적인 성격이 있습니다만 그것이 오히려 혁신교육이 지향하는 혁신의 당위성을 강화해주는 측면도 있습니다. 근대적인 교육, 대량생산 교육, 암기 위주의 교육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혁신교육을 어떻게 혁신미래교육으로 더 확장할 것인가, 진정한 창의교육을 혁신교육이 선도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측면에서 생각해봐야 할 게 많다고 봅니다.
마이클 애플 바람직한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삼성이나 대기업이 교육당국에게 국제적 사회에서 경쟁하려면 이런 인재가 필요하다, 이런 인재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할 것인지 아니면 교육당국이나 교사들이 아젠다를 주도할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교육에 관여되어 있는 사람들이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고, 민주적 방식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열관 오늘 두 분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민주시민교육, 다문화, 기술 환경의 변화, 학교가 미래시대에 맞춰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지 다양한 주제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http://www.nowseouledu.com/2017/09/31.php

소득주도성장, 올바른 토론의 시작 /정태인|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장

제14회 칼폴라니 국제학회를 지난 12일에서 14일까지 치렀다. 근 30년 만에(2년에 한 번씩 열리므로) 아시아에서 최초로 개최됐다. 우리는 “더 젊게” “더 구체적인 의제를” “아시아인들의 주도로” “학자들뿐 아니라 실천가들과 시민들이 참여하는” 학회를 바랐다. 많은 이들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했고 우리는 애초에 기대수준이 낮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반성했다.

'소득주도성장’ ‘기본소득’ ‘촛불과 이중운동’ ‘아시아의 사회적경제’가 주요 의제였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문재인 정부가 경제정책기조로 삼은 소득주도성장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슈탁하머 킹스턴대 교수, 오나란 그리니치대 교수, 이상헌 ILO 사무차장 보좌관 등 국제노동기구(ILO)의 임금주도성장론(wage-led growth)을 정립한 학자들은 한국에서 빚어진 오해를 불식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상헌 박사가 ILO의 잘 정리된 통계를 애써 외면하고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통계와 연구를 인용한 것도 그런 의도였을 테다.
이 박사는 이론과 정책 간의 관계(나는 종종 이론과 정책 사이에는 만리장성이 있다고 표현한다)를 해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경제학의 전통적 성장이론과 국민계정 통계 때문에 자본소득과 노동소득 간의 관계가 부각될 뿐, 실은 지대추구가 만연한 노동소득 내의 불평등, 자본 간의 불평등도 똑같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정책 역시 노동시장(노동조합 조직률 및 적용률 제고)뿐 아니라 생산물시장(공정경제), 금융시장(금융규제) 모두를 포괄해야 한다.
이어서 그는 소득주도성장이 케인스주의적 단기 정책일 뿐이라는 비판 또는 오해에 대해 이 이론은 성장의 구조적 한계를 다루는 장기 정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장기에도 수요가 중요하다는 것은 포스트케인스주의의 핵심 명제이다. 세계적으로는 1970년대 중반 이래, 한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 이래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동시에 성장률도 지속적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은 바로 그 구조적 한계의 명명백백한 증거이다. 
다음으로 소득주도성장이 공급측면을 무시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 이론 역시 물리적, 인적 자원에 영향을 미치는 혁신과 연구·개발 투자를 중시한다고 반박했고, 투자를 무시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불평등이 심화하는 모든 나라에서 높은 이윤이 투자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여기에는 또 다른 발표자인 조복현 교수의 모델이 제시했듯이 금융화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기업에 돈이 쌓여도 금융화에 따른 자산투자에 골몰한다면 성장률은 떨어질 것이다. 수출에 대한 악영향 문제에 관해서 이 박사는 수출경쟁력의 내용을 문제 삼았다. 즉 임금 몫의 상승에 적절한 정책을 결합하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져서 수출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오나란 교수는 이러한 이론적 추론을 치밀한 계량분석으로 뒷받침했다. 한국에서 임금 몫이 1% 떨어질 때 국내총생산(GDP)은 0.1% 감소한다(외환위기 이래 임금 몫이 10% 줄어든 것이 성장률 1%를 갉아먹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임금 몫의 증대가 공공투자와 결합할 때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이 공공투자는 사회적 인프라, 즉 복지 인프라뿐 아니라 녹색전환 등 기술혁신에 대한 투자를 포함한다. 또한 임금 몫의 상승이 수출에 약간의 악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내수 증가의 이익이 이를 능가한다는 결과도 제시했다. 
우니 교수(교토대)의 발표는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다. 그는 아베노믹스의 경험을 통해 수출주도경제가 소득주도경제로 전환할 때 겪을 어려움을 제시했다. 그는 동아시아의 수출주도 경제가 자국 통화의 절하 경쟁, 임금 상승 억제, 비교역재 부문의 낮은 생산성을 전제로 성과를 거뒀는데 이제 세 요소 모두 한계에 다다랐다고 진단했다. 대안은 동아시아 나라들 공동의 환율 관리, 임금 상승을 위한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조직, 그리고 비정규직의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에 의한 생산성 향상이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모두 만만치 않은 과제다. 특히 뒤의 두 과제는 노동계의 결의와 실천 없이는 달성할 수 없다. 소득주도성장의 성패는 민주노총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IMF와 같은 보수적 국제기구도 불평등이 성장을 저해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하지만 피케티가 보여주었듯이 역사적으로 이런 불평등을 시정하는 데 성공한 전후 황금기는 세계전쟁과 대공황의 결과였다. 과연 이러한 파국 없이 부드럽게 전환할 수는 없는 걸까? 만일 어떤 나라가 사회적 합의와 정부 정책을 통해 이 일을 해낼 수 있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전 세계의 모범이 될 것이다. 모든 발표자들이 대한민국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0161123001&code=990100#csidxa9be88003c50b7c9e7e16de5549f3bc 

르네 지라르/ 권우용 대학신문 기자

욕망과 폭력, 그리고 인간의 근원을 묻다

대학신문 권우용 기자, 2016년 5월 15일자 

출처: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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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실시되는 도널드 트럼프가 막말과 기행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가장 논란을 일으킨 트럼프의 태도는 이민자와 무슬림을 비하하는 언행에서 드러난다. 그는 멕시코인과 무슬림을 범죄자로 규정하며 그들을 미국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놓았다. 이런 트럼프의 태도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이민자와 무슬림을 희생양으로 삼는 그런 정치의 출현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쓴소리를 날렸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큼 트럼프의 지지율은 높고, 트럼프가 비하한 히스패닉계의 지지도 식을 줄 모른다.
무고한 희생양을 죄인 취급하는 트럼프의 태도는 한국 사회에서도 일상적으로 나타난다.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는 노동시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집단 따돌림 현상은 학생 사회를 넘어서 직장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나 장애인, 고아에 대한 시선은 한국 사회에서 아직까지 차갑기만 하다.
이와 같이 무고한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현상이 인류 문화에 보편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 사상가가 있다. 지난 11월 세상을 떠난 르네 지라르는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집단적인 폭력이 과거부터 내려온, 사회를 유지하고 문화를 만드는 메커니즘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와 같은 집단적 폭력에 우리 자신이 저항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의미라고 말한다.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의 기원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인정받아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이 됐고 ‘인문학의 다윈’이라 불렸던 지라르. 『대학신문』에서는 이번 기획에서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의 회복을 말하는 지라르의 이론을 살펴본다.
 여러 학문을 파고들게 한 변방의 체험
신영복은 그의 마지막 강의를 담은 『담론』에서 변방성에 대해 말한다. 중심부는 기존 가치를 지키는 제도권의 공간이다. 기존의 질서만을 고수하는 공간은 창조의 공간이 되지 못하고 역동성을 잃어버린 채 고착화된다. 그러므로 신영복은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그가 말했듯 변방성은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가치의 전환을 일으켜 우리에게 새로운 진실을 보여준다.
르네 지라르는 이와 같은 변방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학자다. 1923년 프랑스 남부 아비뇽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지라르는 어린 시절 프랑스 내에서 남부 출신을 깎아내리는 정서를 경험했다. 이후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그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물결에 저항한 소수의 기독교 노동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타국인으로서 고충을 겪었고, 전공인 역사학과 관계없이 문학 교수가 됐다. 이렇게 지라르는 일상적 체험들로부터 변방에 위치한 소수자의 입장을 겪고, 다수의 차별과 억압을 직접 체험했다.
이런 변방인의 체험은 지라르가 변방의 공간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문학, 인류학, 종교학 등 여러 학문의 서로 다른 텍스트를 섭렵하며, 하나의 학문과 제도권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자기 전공 이외의 다른 학문을 독학으로 공부함으로써 지라르는 자신의 학문을 확장시키고 기존 이론과는 다른 독창적인 이론을 발명할 수 있었다. 그는 문학에서 연구를 시작했지만, 신화와 종교 텍스트 같은 인류학 자료까지 분석하면서 폭력을 문화와 연관 짓는 이론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모방적 욕망으로 인한 갈등의 발생
문학 교수였던 지라르는 소설에 대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학자들과 달리 그에게 소설은 인간을 탐구하는 하나의 ‘과학적’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는 소설에 대한 분석을 실제 현상들과 연결시키려고 했다. 그로 인해 지라르가 다수의 소설 속에서 주목한 것은 인간의 행동을 촉발하는 욕망이었다. 그는 소설을 통해 인물의 욕망이 어떤 모습을 띠는지에 가장 관심을 가졌고, 이를 통해 서로의 욕망끼리 맞부딪혀 생기는 갈등에 관한 이론을 정립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욕망이 자발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욕망이란 어떤 대상을 원하는 감정으로, 사람은 보통 자신이 진심으로 명품이나 돈을 욕망한다고 생각해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근대적 세계관에서 본 욕망은 단순히 ‘나’라는 주체와 대상 간의 직선적, 일차원적 관계를 띤다. 근대 사람들은 사람이 타인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순수하게 개인적인 욕망만을 갖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욕망은 개개인이 선천적으로 갖는 특성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라르가 여러 소설을 읽으며 발견한 인간의 욕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욕망은 타인과 관계되는 것, 즉 모방적이라는 답을 내렸다. 그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욕망은 주체에서 대상을 향하는 직선 형태가 아니라, 주체와 타인 그리고 대상이 참여하는 삼각형 형태라고 말했다. ‘욕망의 삼각형’은 주체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체는 타인이 소유하거나 욕망하는 것을 똑같이 욕망한다. 김석 교수(건국대 융합인재학부)는 이를 “욕망이 선천적 본능이 아니라 타인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통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그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기사가 되기를 욕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돈키호테는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나는 의지가 아니라, 전설의 기사 아마디스가 하는 행동을 신실하게 모방함으로써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자 한다.
다른 철학자들도 “인간이 모방을 통해 교육을 받는다”는 등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지만, 그들의 논의는 모방을 하나의 단편적인 현상으로 분석하는 데 그쳤다. 지라르는 한걸음 더 나아가 모방적 욕망이 인간에게 원초적인 것이며, 그로 인해 사회적 경쟁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타인과의 거리가 가까워져 차이가 없어질수록 주체와 타인이 경쟁한다. 돈키호테는 아마디스와 거리가 멀어 만날 일이 없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적극적으로 아마디스를 찬양하고, 그를 모방하겠다고 드러내기까지 한다. 하지만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는 동등한 욕망을 지닌 두 사람, 드 레날과 발르노가 만나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기도 한다. 드 레날은 자식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발르노가 가정교사를 고용할 거라는 생각에 먼저 가정교사를 고용한다. 드 레날은 자신이 발르노를 의식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노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처럼 타인과의 거리가 가까우면, 주체는 자신이 타인을 모방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타인을 이기기 위해 경쟁하게 된다. 이런 경쟁 관계는 타인도 똑같이 주체를 모방하게 만들어서 경쟁을 격화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기존 학자들과는 다른 욕망의 구조를 밝혀 공감을 얻은 지라르는 소설 속 분석을 현실로 확장시켰다. 그는 실제 사람들도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적과 흑』의 주인공들처럼 갈등한다고 봤다. 김진식 교수(울산대 프랑스어프랑스학과)는 지라르의 분석이 “사람들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 아니라 가깝기 때문에 폭력이 난무한다는 통찰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생겨난 개인 간의 경쟁은 제3자가 또다시 모방해서 다른 개인에게까지 전염된다. 욕망은 계속해서 모방돼 사회 전체에 경쟁이 격화되고, 심각한 경쟁으로 인해 갈등도 함께 전이된다. 사회 전체에 갈등이 만연해지면 사회의 존립에 위기가 올 것이고, 이런 갈등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장치가 어딘가에 있어야만 했다. 여기서 지라르는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메커니즘이 있다고 봤고, 이는 문화의 기원을 연구하는 계기가 됐다. 
문화를 만드는 폭력에 주목하다
문화의 기원을 더욱 자세히 연구하기 위해 지라르는 소설에서 벗어나 인류학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인류학을 혼자 공부하며 갈등과 위기의 해결방법에 대해 고민한 그는 희생양에 대한 집단적 폭력이 사회를 유지한다는 새로운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경쟁이 극심해지면 사람들은 본래 욕망하던 대상을 잊고 경쟁자를 향한 증오에 사로잡혀,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서만 노력한다. 경쟁자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상황을 타개하는 유일한 방법은 한 사람에게 증오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희생양이 된 그 사람의 책임이 다른 사람에 비해 더 큰 것은 아니지만, 광기에 사로잡힌 군중은 희생양에게 전적으로 죄가 있다고 여긴다. 군중은 서로의 증오를 모방하며 모든 위기의 책임이 희생양에게 있다고 스스로를 속인다. 이렇게 희생양에게 폭력을 가한 군중은 평화를 되찾는다. 지라르는 『문화의 기원』에서 모든 사회의 출발점에는 이와 같은 폭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희생양에 대한 폭력이 있어야만 사회 갈등과 위기를 해소하고 질서를 다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생양을 통해 찾아온 평화에는 한계가 있다. 사회에는 다시 모방에 따른 갈등과 위기가 나타나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주기적으로 갈등과 위기를 통제해야만 한다. 원시인들은 ‘희생양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써 평화를 가져온’ 기억을 떠올려서,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려고 한다. 이 때 원시인들은 대체된 희생물을 만들어서 그것이 첫 희생양처럼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여긴다. 이렇게 대체된 희생물을 죽임으로써 사회는 처음의 희생양에게 폭력을 가한 것과 똑같이 갈등을 해소한다. 지라르는 이 때 처음으로 ‘어떤 것이 다른 것을 대신하는’ 상징작용이 생긴다고 말했다. 뇌에서 상징영역을 사용하게 된 인간은 다른 요소들에도 상징을 적용하면서 하나의 체계를 만들었고, 그 결과 복잡한 인식을 수행하면서 언어나 고차원적인 제도를 만들게 됐다. 정일권 초빙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는 “최근 언어학자들은 이처럼 희생양에 언어의 기원이 있다는 지라르의 이론에 굉장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문화 전체가 제의에서 유래했다는 지라르의 가설은 문화의 기원과 관련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에는 문화란 인간의 합리성이 생겨난 이후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라는 생각이 대세였다. 따라서 문화는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류가 이성적으로 개발한 것이라는 의견이 주류였다. 이와 달리 지라르는 금기와 언어, 기타 문화 제도가 모두 희생양에 대한 폭력과 그 부산물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제도권 학자들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정일권 교수는 “지라르의 말은 인류의 기원이 상당히 폭력적이라는 것”을 부각한다면서, 지라르의 문화에 대한 해석이 인류 문화의 비이성적 측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지라르는 신화 역시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숨기고 제의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텍스트로서 새롭게 해석했다. 예를 들어, 소포클레스의 신화 『오이디푸스 왕』에서 역병이 유행한 뒤 오이디푸스는 자기에게 죄가 있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추방당한다. 지라르는 비극에 나온 역병이 모방적 욕망과 그에 따른 사회의 위기를 만들고, 오이디푸스가 그 사회의 희생양이 됐다고 해석했다. 오이디푸스에게 사회의 위기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님에도, 그는 어떤 변명도 없이 추방을 받아들인다. 이는 소포클레스가 군중의 입장에서 신화를 썼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신화는 가해자의 입장과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각에서 쓰여서 희생양을 죄인으로 묘사한다. 군중은 신화를 통해 희생양의 무고함에 대한 자각 없이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화 해석은 당대 인류학을 주름 잡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해석과 달라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오이디푸스 신화에 나타나는 중요한 내용들의 관계를 언어구조적으로 분석해서, 신화가 현실의 모순을 수용하게 해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지라르는 신화에 피비린내 나는 희생제의가 숨겨져 있다고 봤고, 그에 따라 신화를 사회와 연관짓지 않은 레비스트로스의 해석을 비판했다. 정일권 교수는 “레비스트로스가 프랑스 학술원의 회장에 있을 때 그가 반대해서 지라르가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전했다. 
신화와 성경의 대비에서 자유를 모색하다
원시 사회에서 제의가 사회를 유지하고 문화를 만든 것과 달리, 지라르는 현대 사회에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고 판단했다. 현대인들은 집단 따돌림이나 무고한 사람을 죄인 취급해 마녀사냥하는 현상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기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인류 문명에 폭력을 정당화하는 신화만 전달돼왔다면, 사람들은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을 지금까지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라르는 신화와 대비되는 다른 텍스트가 있었기 때문에 현대에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이 폭력에 대해 반성할 수 있었던 단초를 종교 텍스트에서 찾았다.
지라르에 따르면 인류는 기독교를 통해 자신의 폭력을 인식함으로써 문화적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오이디푸스 신화와 구약의 요셉 이야기를 대조하며, 신화와 기독교 텍스트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요셉은 어린 시절 가족에 의해 추방된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와 같다. 그러나 희생양인 요셉은 오이디푸스와 달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야기 말미에 요셉이 자신을 추방시킨 형제들에게 보복하는 것도 합당한 결과로 서술돼 그의 무고함을 증명해준다. 이처럼 성경은 희생양의 입장에서 군중의 폭력을 묘사하고, 그것을 사탄, 카인 등으로 묘사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성경이 희생양의 무고함을 세상에 폭로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의 폭력과 욕망에 대해 처음으로 반성하고 문화의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정일권 교수는 “막스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독교가 사람들을 탈신성화시켰다고 본 것”이라며, 지라르가 기독교를 계몽적인 텍스트로 해석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지라르는 현대인에게 자유의 의미를 다시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모방적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경쟁하기 쉽다. 경쟁이 심각해지면 사회 전체가 위기에 빠지므로 사회는 한 사람에게 폭력을 집중해 그를 희생한다. 지라르는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가 발전하려면 이와 같은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끊어야 한다고 봤다. 사회 구성원들은 무고한 사람이 집단적 폭력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객관적으로 희생양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라르는 우리가 집단적 폭력을 저지르도록 부추기는 자기 내부의 모방적 욕망을 직시해,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경쟁하려는 마음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의 기원을 파고들어 폭력의 메커니즘을 찾아낸 지라르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폭력을 없애야만 인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고한 소수에 대한 폭력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문화의 기원을 밝힘으로써 폭력의 해결책을 제시한 지라르도 다른 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현대 사회에 대한 지라르의 분석은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자주 받는다. 실제로 그의 이론은 원시 사회에 대한 분석이 주가 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복잡한 현대사회에 그의 이론을 적용하기는 무리라고 입을 모은다. 이는 그가 갈등과 폭력의 해결책으로 예수를 모방해야 한다는 단순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그치는 이유기도 하다. 김석 교수는 “지라르가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는 자신의 개인적인 정체성도 많이 작용했다”며 대안적 측면에서 너무 단순하지 않느냐는 비판을 내비쳤다. 다른 학자는 지라르가 지나치게 기독교를 옹호하며 종교적 색채를 띤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라르 연구가들은 그의 기독교 옹호를 인간의 폭력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기독교 옹호는 욕망과 희생양의 구조로써 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전체 이론에 비하면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진식 교수는 “지라르가 너무 기독교를 옹호한다는 말을 듣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국한해 볼 게 아니다”라고 말하며, 그의 사상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폭력과 갈등을 보다 더 넓은 층위에서 볼 기회를 준다고 설명했다.
같은 맥락에서 지라르는 현대 사회에 나타나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멸시와 비난을 다르게 볼 기회를 준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실시되는 도널드 트럼프는 이민자와 무슬림을 비하해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트럼프는 멕시코인과 무슬림을 범죄자로 규정하며 그들이 미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원천 차단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놓았다. 이런 인종모욕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보수 세력의 지지는 굳건하기만 하다. 트럼프 지지 현상의 이면에는 미국 경제나 사회적 유동성, 계층 간의 갈등 등 복잡한 원인이 있다. 지라르의 이론은 이 현상을 분석하는 또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준다.
CNN 정치평론가 출신인 빌 슈나이더 교수(미국 조지메이슨대 정치학과)는 그에 대한 지지가 이민자, 종교적 소수자, 동성애자, 싱글맘 등 변방에 위치한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전통적인 기성 가치를 수호하는 골수 보수파로부터 나온다고 분석했다. 우리는 지라르의 이론으로 슈나이더 교수의 분석을 재조명할 수 있다. 트럼프의 소수집단 배척 논리는 희생양에게 폭력을 가하는 군중의 논리와 유사하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무고한 이민자와 무슬림을 죄인 취급하며 자기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과거의 미국’(Old America)을 동경한다. 지라르의 이론에 따르면 그들은 원시 사회의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사회 결속력을 다지고 갈등의 에너지를 배출하려는 폭력의 가해자다.
더 나아가 멕시코인을 비하한 트럼프를 히스패닉계가 지지하는 현상도 지라르의 모방적 욕망으로 다시 살펴볼 수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멕시코 이민자들은 멕시코 이외 지역 출신의 히스패닉계에게 직업이나 복지 측면에서 또 다른 경쟁자다. 그들에게 멕시코 이민자는 자기가 욕망하는 대상을 얻는 데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에, 오히려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이다. 지라르의 이론은 소수자를 배척하는 트럼프의 논리에 숨겨진 폭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그 안에 숨겨진 인간의 모방적 욕망을 다시금 통찰하게 해준다.
트럼프의 희생양 논리는 한국 사회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아직까지도 학생 사회나 직장 사회에서는 집단 따돌림 현상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에게 실제로 잘못이 있다고 간주하고 그를 따돌림하며, 자기들만의 유대감을 키운다. 학내 성소수자 동아리 ‘큐이즈’의 새내기 현수막을 찢어놓는 행위도 소수에 대한 멸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같은 소수에 대한 다수의 증오는 집단 내에 존재하는 모방적 욕망과 그로 인한 갈등의 에너지를 배출함으로써 중심부에 위치한 사람들의 유대감을 키우려고 한다.
모방적 욕망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무고한 소수에게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 지라르는 이렇게 폭력 구조의 근원을 찾아 해결책을 말했기 때문에,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성찰하라는 그의 외침은 현대 사회에도 유효하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그는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이 됐고, ‘인문학의 다윈’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세계적으로 매년 국제지라르학회인 ‘폭력과 종교에 관한 콜로키움’에서 다양한 학자들은 그의 외침을 적극적으로 적용하려고 한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폭력을 저지르기 전에, 한국 사회는 폭력과 욕망의 본 모습을 성찰하라는 지라르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한다.

오무라 마스오 인터뷰/ 백승찬, 소명출판의 오무라 마스오 저작집 시리즈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84)가 연구하는 한국문학은 한국에만 있지 않다. 그의 한국문학은 한국은 물론 북한, 중국 옌볜, 일본에도 있다. 오무라 스스로 붙인 이름은 ‘조선문학’. 동아시아 곳곳에 이산한 한국어 사용자들이 펼치는 삶과 글의 풍경이 오무라의 연구과제다. 넓지 않은 한반도 남부의 문학에 국한한 한국문학 연구자들에게 오무라의 선구적이고 넓은 지평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문학 연구자 오무라 마스오의 저작집이 소명출판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해 윤동주 삶에 대한 <윤동주와 한국 근대문학>, 일제강점기 시인 김용제를 다룬 <사랑하는 대륙이여>가 나왔고, 최근 3~5권에 해당하는 <식민주의와 문학> <한국문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한일 상호이해의 길>이 출간됐다. 조만간 <오무라 마스오 문학 연구 앨범>이 나오면 전 6권 시리즈가 마무리된다. 평생을 조선문학 연구에 바친 오무라를 e메일로 만났다.
“나는 픽션보다는 실록에, 작품보다는 그 사람의 사는 길에 직접적인 관심이 있습니다. 작품은 그 사람을 아는 하나의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오무라가 눈길을 준 작가들은 작품 못지 않게 곡절한 삶을 살았다. 대표적인 이가 김용제다. 일제강점기 네 번 체포되고 4년간 옥살이한 프롤레타리아 시인 김용제는 어느 순간 일제에 투항해 적극적인 친일의 길을 걸었다. 사회주의와 친일이라는 두 가지 꼬리표를 붙인 김용제는 해방 이후 1994년 타계까지 한국에서 백안시된 인물이었다. 오무라는 “김용제는 대열 맨 앞에 서서 일본인들과 싸운 시인이었다”며 “전향했다 하더라도 그 공적을 지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오무라는 생전 김용제와 인터뷰하고 200통 이상의 서신을 교환해 그의 생애를 연구했다.
김용제가 식민지 시기 한국문학의 그림자라면, 윤동주는 빛이었다. 옌볜에서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됐던 윤동주의 묘를 다시 세상에 알린 이가 오무라다. 오무라는 유족이 갖고 있던 윤동주 친필 원고를 연구자 중 처음으로 보았으나, “한국인 학자가 발표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유족의 요청을 이의없이 받아들였다. 옌볜 체류 시절 중국혁명가이자 조선족문학의 대가인 김학철과 교류하며 농밀한 녹취록을 만든 것도 그였다. 펑더화이, 김일성, 박헌영, 이태준, 한설야, 임화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김학철의 녹취록이 없었다면, 중국내 한인들의 투쟁사와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에는 한 층의 안개가 더 덮였을 것이다. 그는 “조선문학을 제대로 하려면 한국문학만이 아니라 북한문학, 옌볜문학, 그리고 재일조선인문학까지를 포함하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문학에 대한 오무라의 관심은 어찌 보면 ‘비문학적’이었다. 대학원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했던 그는 청말 사상가 양계초의 일본 체류 시절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양계초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소설가인 도카이 산시의 정치소설 <가인의 기우>를 번역하다가 도중에 작업을 그만두었다. 양계초는 조선이 중국의 것이라 생각했는데, 도카이는 일본 것이라 했다는 이유다. 오무라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중국과 일본 사상가가 언급하지 않은 조선 사람의 생각은 무엇인가.
오무라가 연구를 시작한 1950년대 후반엔 일한사전조차 없었다. 그는 재일 조선인 유학생 동맹을 찾아 조선어를 배우자고 청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한영사전으로 간접적으로 한국어를 배워야했다. 조선문학은 중국문학에 비해 연구자가 적고 연구를 한다해도 책을 내줄 곳이 없었다. 그래도 오무라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문학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1973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오무라는 “내 조국이라 부를 수 없지만 사랑하는 대지”라고 말했다. 아무리 전공이라지만 미묘한 관계의 타국에 대해 이렇게 말할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 오무라는 “용기는 없었다. 솔직한 마음일 뿐”이라고 답했다. 
일본인 한국문학 연구자는 한국에서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일본에서는 냉소를 받았다. 남한과 북한 정부의 알력 때문에 연구가 연구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일본 NHK에서 개설할 강좌 명칭을 ‘한국어 강좌’로 할지 ‘조선어 강좌’로 할지를 두고 남북을 대리하는 일본내 한인 단체가 일대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문화운동과 학술활동은 정치에 휩쓸려 쉽게 뒤틀리곤 했다.

하지만 오무라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며 “남의 평가나 비판은 이후에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는 오무라가 일본의 한국문학 연구자라는 ‘극소수파’로서 얻은 긍정적이고 강인한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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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Fiscal Monitor: Tackling Inequality, October 2017

Rising inequality and slow economic growth in many countries have focused attention on policies to support inclusive growth. While some inequality is inevitable in a market-based economic system, excessive inequality can erode social cohesion, lead to political polarization, and ultimately lower economic growth. This Fiscal Monitor discusses how fiscal policies can help achieve redistributive objectives. It focuses on three salient policy debates: tax rates at the top of the income distribution, the introduction of a universal basic income, and the role of public spending on education and health.

출처 http://www.imf.org/en/Publications/FM/Issues/2017/10/05/fiscal-monitor-october-2017

IMF, 보편적 기본소득을 환영

The IMF Gives A Cautious Welcome To Universal Basic Income




Universal basic income (UBI) is becoming respectable. Less than a decade ago, its principal supporters were weed-smoking hippies and Star Trek aficionados: “serious people” either laughed or sneered at it. But now, it counts among its supporters a growing number of top economistsentrepreneurs and financiers. Governments around the world are evaluating its use, and some are embarking on pilot studies. Businesses are partnering with not-for-profit organizations to conduct serious research into the costs and benefits of UBI.
And now, the IMF has joined the party. In its latest Fiscal Monitor, it says UBI could reduce income inequality and protect people affected by technological change and globalization.
Income inequality between countries has fallen significantly, especially in the last decade, but this has been offset by rising inequality within countries. The IMF says that 53% of countries have experienced widening income inequality: this includes most advanced countries, where rising inequality is driven by very large rises in the income of the top 1%. Over time, persistent income inequality inevitably causes wealth inequality.
But why do we need to reduce inequality? If everyone’s income is rising, why worry about some incomes rising faster than others? After all, “a rising tide floats all boats”, as the saying goes. Furthermore, since the savings of rich people can be deployed into productive investment, benefiting poorer people through more and better-paid employment, tax and transfer programs that take money from the rich to give to the poor could reduce investment, which over time would hurt the poor instead of helping them. In many countries, fiscal reforms since the 1980s have concentrated on reducing the tax burden of richer people to encourage them to invest productively, thus benefiting poorer people. This is the famous “trickle-down economics” popularized by President Reagan (and dubbed “voodoo” by the first President Bush).
Prosperity in much of the world has improved since the Reagan-era tax cuts. But in recent years, the incomes of low to middle income people in advanced countries have stagnated while those of the top 1% have continued to rise. Now, there are deep political crises on both sides of the Atlantic as the anger of those who see themselves as losing out fuels populist movements. Political instability threatens global growth and prosperity, already damaged by a financial crisis from which the world has been slow to recover. No wonder the IMF is concerned about rising inequality.
Chapter 1 of the IMF’s Fiscal Monitor discusses ways of reducing income inequality within countries. It considers taxes and transfers together as a framework for redistribution. Crucially, it says, taxes and transfers aimed at reducing inequality should not hamper growth, since growth is important to those at the bottom of the income scale. But it also observes in a footnote that since people at the bottom of the income scale tend to spend more of their income than richer people, raising their income can increase aggregate demand and hence spur growth. Carefully calibrated tax and transfer policies can therefore, by increasing economic growth, benefit everyone.
UBI is one such policy.  The IMF describes it as a "forward-­looking idea for addressing current tax and transfer system weaknesses....particularly attuned to how labor markets and social contracts may continue to evolve with technological change". But its costs and benefits have not as yet been firmly established, and it is fiercely opposed in some quarters. The IMF has therefore created an economic model to evaluate its potential.
The IMF divides countries into three groups:
  1. Countries with minimal or no transfer systems (e.g. Egypt, Bolivia)
  2. Countries with 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transfer systems (e.g. France, United Kingdom)
  3. Countries with patchy or insufficiently progressive transfer systems (e.g. Brazil, United States)
For each group, the IMF asks the following key questions:
  • Is there a case for the adoption of a UBI?
  • Under what circumstances could a UBI be desirable, and how could it be financed?
  • Or should governments focus on strengthening their capacity to use means-tested transfers?
The IMF gives qualified support to UBI for countries in Group 1, many of which have high levels of poverty. “UBI can be a powerful instrument for combating poverty and extreme poverty,” says the Fiscal Monitor. But UBI needs to be accompanied by other reforms such as introduction of progressive taxation and elimination of distortionary subsidies. The IMF is particularly keen on UBI as a replacement for energy subsidies in oil-exporting developing countries.
Conversely, for countries in Group 2, the IMF says that replacing existing transfer systems with UBI could mean large losses for some groups, resulting in higher poverty – precisely the opposite of the effect it is intended to have. For these countries, the IMF recommends improving existing transfer programs rather than replacing them with UBI.
Some in the UK are no doubt now scratching their heads at the IMF’s description of the UK’s transfer system as “functioning well”, given the complete dog’s breakfast the government is making of Universal Credit. Universal Credit was supposed to consolidate several different transfers into one, thus streamlining the system. But a cash-strapped government turned it into a cost-saving exercise, and now persistent staff shortages and distributional inefficiencies are causing terrible problems. The trouble is that the IMF’s evaluation was in 2011, which was before the shredding of the UK’s social safety nets really got under way. Had the evaluation been conducted more recently, the UK might have found itself in Group 3 rather than Group 2. What a mess.
Group 3 countries present something of a challenge. Replacing inefficient and inadequate transfer systems with UBI could benefit a lot of people, but some existing beneficiaries would lose out, and there might be greater benefit from improving existing systems. For the United States, for example, the IMF’s model shows that people at the lower end of the income scale would benefit more from upgrading earned income tax credits (EITC) than from UBI. But for India, replacing the Public Distribution System (PDS) operational at the time of the evaluation (2011) with UBI would have substantially improved support of low-income groups.
However, the fact that the IMF was shooting at a moving target caused something of a problem here, too. India has substantially revamped its transfer arrangement recently, and officials were upset that the IMF appeared to be recommending completely replacing it. The IMF’s Director of Fiscal Affairs, Vitor Gaspar, hastily reassured them:

“No! The goal was not to advocate UBI. It was to use the UBI as an illustration of how one could replace existing large and macro economically significant schemes that are inefficient and inequitable.”
And he went on to congratulate India on the transformation of its transfer system since 2011.
The IMF’s recommendation that for Group 2 and some Group 3 countries, improving existing systems would be better  than replacing them with UBI comes as no surprise. A universal flat-rate payment can never be as efficient as well-functioning targeted transfer payments. However, the IMF warns that means-tested solutions can be difficult to administer. It is also clear from the UK's experience that complex transfer systems are vulnerable to political interference. Wrecking social safety nets in the name of "making work pay" may be bad economics, but it can be excellent politics.
But at the end of its evaluation, the IMF put its finger on the real value of UBI for advanced countries:
In an economic environment in which job insecurity is increasing (for example, because of job market disruptions associated with technological progress), expanding available insurance mechanisms may become an important policy objective. A UBI could provide a stable source of income to individuals and households and therefore limit the impact of income and employment shocks.
UBI can support vulnerable people as traditional jobs disappear and are replaced with – well, who knows what. Bring it on.
구글 번역본(부분적인 수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보편적 인 기초 소득 (UBI)은 존경받을 만하다. 10 년 전만해도 그 주요 지지자들은 잡초를 제거한 히피족과 스타 트랙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진지한 사람들"은 웃거나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최고 경제학자기업가 및 금융가의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정부는 그 사용법을 평가하고 있으며 일부는 시험 연구에 착수하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비영리 단체 와 협력하여 UBI의 비용과 혜택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수행합니다.
그리고 이제 IMF가 당에 가입했습니다. 최신 회계 모니터 에서 UBI는 소득 불평등을 줄이고 기술 변화와 세계화로 영향을받는 사람들을 보호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난 10 년  국가  소득 불평등 이 심각하게 줄어들었지만 이는 국가  불평등의 증가로 상쇄되었다 IMF는 53 %의 국가가 소득 불평등이 심화 된 경험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는 불균형이 상위 1 % 소득의 매우 큰 상승에 의해 좌우되는 선진국을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적인 소득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부의 불평등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왜 우리는 불평등을 줄여야 하는가? 모든 사람의 소득이 상승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소득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 왜 걱정합니까? 결국, "상승 추세가 모든 보트를 떠 다닌다"는 말처럼. 또한 부유 한 사람들의 저축은 생산적인 투자로 배치 될 수 있고, 더 많은 보수를받는 고용을 통해 빈곤층에게 혜택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부유 한 사람들에게 돈을 가져다주는 세금 및 이전 프로그램은 투자를 줄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대신에. 많은 국가에서 1980 년대 이후의 재정 개혁은 부유 한 사람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어 생산적인 투자를 유도함으로써 빈곤층에게 혜택을줍니다. 이것은 레이건 (Reagan) 대통령에 의해 대중화 된 유명한 " 세류 다운 경제학 (trickle-down economics) "( " 부두교"부시 대통령에 의해).
레이건 시대의 세금 감면 이후 많은 지역의 번영이 향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선진국의 중저 소득층의 소득 은 정체되어 왔지만 최상위 1 %의 소득 은 계속 증가했다 . 이제 대서양 양안에는 인민 대중 운동에 연료를 잃어 버리는 사람들의 분노와 같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가 있습니다. 정치적 불안정은 전 세계가 회복하기 어려워지는 금융 위기로 인해 이미 손상된 글로벌 성장과 번영을 위협합니다. IMF가 불평등 증가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IMF의 재정 모니터 1 장은 국가 내의 소득 불평등을 줄이는 방법에 대해 논의합니다. 세금 및 송금을 함께 재배포의 기본 틀로 간주합니다. 결정적으로, 불평등을 줄이기위한 세금 및 이전은 소득 규모의 가장 낮은 계층에 성장이 중요하기 때문에 성장을 저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각주에서 볼 때 소득 규모의 바닥에있는 사람들은 부유 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소득을 소비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수입을 올리면 총 수요가 증가 할 수 있고 따라서 성장을 촉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조정 된 세금 및 이관 방침은 경제 성장을 촉진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됩니다.
UBI는 그러한 정책 중 하나입니다. IMF는이를 "현재의 세금 문제를 해결하고 시스템 약점을 이전하기위한 미래 지향적 인 생각, 특히 기술 변화에 따라 노동 시장과 사회 계약이 어떻게 계속 발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비용과 혜택은 아직 확고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치열한 반대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IMF는 그 잠재력을 평가할 수있는 경제 모델을 만들었다.
IMF는 국가들을 세 그룹으로 나눕니다.
  1. 최소 또는 이전 시스템이없는 국가 (예 : 이집트, 볼리비아)
  2. 종합적이고 진보적 인 이전 시스템을 갖춘 국가 (예 : 프랑스, ​​영국)
  3. 고르지 못하거나 점진적으로 전달 체계가 부족한 국가 (예 : 브라질, 미국)
각 그룹에 대해 IMF는 다음과 같은 주요 질문을한다.
  • UBI를 채택한 사례가 있습니까?
  • 어떤 상황에서 UBI가 바람직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자금을 조달 할 수 있습니까?
  • 또는 정부는 자산 조사에 의한 이체를 사용할 수있는 능력을 강화하는 데 집중해야 하는가?
IMF는 많은 사람들이 빈곤 수준이 높은 그룹 1의 국가에 대해 UBI에 대한 자격있는 지원을 제공합니다 "UBI는 빈곤과 극심한 빈곤 퇴치를위한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UBI는 점진적 세제 도입과 왜곡 된 보조금의 폐지와 같은 다른 개혁을 동반해야합니다. IMF는 특히 석유 수출국의 개발 도상국에서 에너지 보조금을 대체하기 위해 UBI에 열중하고있다.
반대로, 그룹 2의 국가들에 대해 IMF는 기존의 이전 시스템을 UBI로 대체하는 것이 일부 그룹에게는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빈곤 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 국가의 경우, IMF는 기존의 이전 프로그램을 UBI로 대체하는 것보다 개선 할 것을 권고합니다.
영국의 일부 사람들은 현재 정부가 유니버설 크레딧 (Universal Credit)을 만들고있는 완코의 아침 식사를 감안할 때, 영국의 이전 시스템에 대한 IMF의 설명에서 "잘 작동하고있다"고 머리를 긁어 의심치 않습니다 유니버설 크레딧 (Universal Credit)은 여러 가지 이체를 하나에 통합하여 시스템을 간소화하기로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현금으로 묶인 정부는 그것을 비용 절감 운동으로 바꾸었고, 이제는 직원 부족과 분배 비효율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 문제는 IMF의 평가가 2011 년에 있었는데, 이는 영국의 사회 안전망을 파쇄하기 전에 나온 것이었다. 평가가 최근에 수행 되었다면 영국은 그룹 2보다는 그룹 3에서 자신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룹 3 국가는 도전의 무언가를 제시합니다. 비효율적이고 부적절한 이전 시스템을 UBI로 대체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일부 기존 수혜자는 사라지고 기존 시스템을 개선하면 더 많은 이점이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IMF의 모델에 따르면 소득 수준의 하위 단계에있는 사람들은 UBI보다 근로 소득 세액 공제 (EITC)를 개선하는 것이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평가 시점 (2011 년)에 UBI로 운영되는 공공 배급 시스템 (PDS)을 대체하면 저소득 그룹에 대한 지원이 크게 향상 될 것입니다.
그러나 IMF가 움직이는 목표물에서 총을 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기에도 문제를 일으켰다. 인도는 최근 IMF의 이전 약정을 대폭 수정했으며, IMF는 IMF가 IMF를 완전히 대체 할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화가났다. IMF의 재정 담당 국장 인 Vitor Gaspar는 급히 그들을 안심 시켰습니다 .

"아니! 목표는 UBI를 옹호하지 않는 것이 었습니다. UBI를 비효율적이고 불공평 한 기존의 거대하고 거시 경제 적으로 중요한 계획을 대체 할 수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사례로 사용했습니다. "
그리고 인도는 2011 년부터 인도 이전을 축하하기 위해 인도를 축하합니다.
그룹 2와 일부 그룹 3 국가에 대해 기존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 UBI로 대체하는 것보다 낫을 것이라는 IMF의 권고는 놀랄 일이 아니다. 보편적 인 고정이자 지급은 잘 작동하는 표적 이동 이체만큼 효과적 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IMF는 자산 조사 방식의 솔루션은 관리가 어려울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또한 영국의 경험을 보면 복잡한 전송 시스템이 정치적 간섭에 취약하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사회 안전망을 " 일하는 임금 지불 " 이라는 이름으로 망가 뜨리는 것은 나쁜 경제일지도 모릅니다.하지만 훌륭한 정치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가가 끝나자 IMF는 선진국을위한 UBI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직업 불안정이 증가하는 경제 환경 (예 : 기술 진보와 관련된 직업 시장의 혼란으로 인해)에서 가능한 보험 메커니즘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한 정책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UBI는 개인과 가정에 안정적인 소득원을 제공하여 소득 및 고용 충격의 영향을 제한 할 수 있습니다.
물론, - 기존의 작업이 사라지고로 대체됩니다로 UBI는 취약 계층을 지원할 수 있는 무엇을 알고있다 . 가져와.
출처 https://www.forbes.com/sites/francescoppola/2017/10/15/the-imf-gives-a-cautious-welcome-to-universal-basic-income/#5ef83dc42b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