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 21일 화요일

간디가 쥐어 준 `허공을 가르는 무기`

잘록한 허리의 유리병 속에 모래가 흘러내리고 있다.
모래를 흘러내리게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중심에서 작용하는 중력,
그리고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이다.
중력이나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모래시계는 이것들을 눈앞에 보여준다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는 뒤집어놓아야 한다
그러면 오래된 미래와 다시올 과거가 흘러내린다.
'모래시계 고금'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속에서 옛일의 뜻을 되새기면서,
과거 속에 숨겨져 있는 미래를 만나고자 한다. <편집자주>


  
 ▲ 마하트마 간디의 미소.
ⓒ nuvs.com
 
 
1991년 5월 21일 당시 인도 총리였던 라지브 간디가 암살 사건으로 사망했다.

라지브 간디는 인디라 간디의 아들, 그리고 인디라 간디는 인도 초대 총리였던 네루의 딸이었다. 네루는 국부인 간디에 대한 존경의 마음에서 자신의 딸에게 간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도 암살 사건으로 죽었으니, 암살로 죽은 간디라는 이만 모두 3명인 셈이다. 라지브 간디의 죽음으로 네루가(家)의 인도 통치도 끝났다.

1948년 1월 30일 마하트마 간디는 암살당했다.
암살자 나투람 고두세는 소송이 진행될 때 철저히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화해를 주장한 간디의 정신을 고두세처럼 편협한 종교적 울타리에 갇힌 이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인도의 파키스탄의 영토 분할은 간디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반목과 갈등과 분쟁도 간디가 바란 것은 아니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 스와라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코란>을 읽어도 좋을 겁니다.
<코란>에서는 힌두교도들이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구절들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바가바드 기타>에는 이슬람교도라 하더라도 이의를 달 수 없을 만한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코란>에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구절이 있다고 해서 이슬람교도를 싫어해야 할까요?
싸움을 벌일 때는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합니다. 내가 싸우려 하지 않는다면 이슬람교가 내게 은근히 싸움을 걸려고 해도 싸움은 일어나지 않을것도,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가 나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싸움을 벌일 수 없을 것입니다.
허공을 가르는 무기는 아무것도 벨 수 없습니다."

"인도의 망국병은 분열과 대립" …과연 그럴까?

간디가 말한 종교는 우리가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과 같은 개별 종교를 말할 때의 그 범주를 뛰어넘은 종교다.
우리는 각기 다른 종교를 믿고 다른 언어를 쓰지만, 한 가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고 간디는 믿었다. 그리고 간디에게 하느님이란 진리(Truth)를 말하는 것이었다.

진리가 하느님이다, 이것은 간디의 아주 중요한 테제였다.

하지만 인도의 현실을 마하트마 간디의 신념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인디라 간디가 그리고 라지브 간디까지 암살을 당했다. 라지브 간디가 폭사를 당했을 때 사람들은 시크교도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말했다.
과연 종교적 차이가 만들어낸 끔찍한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최근에 나는 어느 외국인이 쓴 칼럼을 읽었다. <세계일보> 2002년 3월 15일자 7면에 실린 "인도의 망국병은 '분열과 대립'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글을 쓴 이는 토마스 소웰이라는 미국의 칼럼니스트. <워싱턴 타임스>에 실린 글을 권화섭 객원편집위원이 정리한 것이었다.

토마스 소웰이라는 사람은 인도의 구자라트 주에서 일어난 처참한 폭력사태--이삼일 사이에 사망자가 489명이 일어난 사태로 이슬람 사원 터에 힌두 사원을 지으려는 힌두 과격분자들이 피살되자 폭도들이 이슬람교도를 보복 살해한 사건이었다--를 보면서 인도의 근원을 이루는 다양성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당했던 장소. ⓒ nuvs.com 
 
그리고 언어와 문화, 종교, 계급에 의해 분열된 세계 여러 나라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이 외국인으로 남아 있기보다는 미국인이 되었지만, 오늘날에는 한사코 이민자들이 집단적 정체성과 지위 보장을 요구하며 외국인이나 소수 인종으로 남으려 한다는 데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니까 토마스 소웰은 미국이 인도처럼 다양성을 인정하는 이민자 정책을 편다면, 인도와 같은 분열과 대립상을 보게 될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칼럼을 싣고 있는 국내 언론의 저의를 모르겠다.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책을 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종교나 문화의 다양성보다는 우리의 단일한 민족적 정체성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 생각은 토마스 소웰과는 다르다.
비록 인도의 현실이 마하트마 간디의 생각과는 다른 길로 나아갔지만, 간디의 생각은 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간디는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당신이 언급한 잔인한 행위들이 비록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하더라도 종교의 책임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들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실제로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암살행위가 자행될 때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테러 사건이 일어난 것이 과연 종교의 차이에 기반한 증오심 때문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패권적 세계 정책이 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을까?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비슷하고 같은 것에 더욱 친화력을 보이는 것이 인간의 정서이고 태도이다.
그러나 지구촌이 점점 더 좁아질수록 우리는 다른 것, 차이가 나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화롭게 살 수가 없다. 자기와 다른 것을 무력으로 억지로 자기와 같은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불행은 싹튼다. 간디의 죽음을 생각하며, 아무것도 베지 않는, 허공을 가르는 무기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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