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일 월요일

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칼럼(2018년 9월 27일, 한겨레)

문재인 정부는 국정과제 1호로 내세운 ‘적폐 청산’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까. 지난 13일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도종환)가 발표한 ‘블랙리스트 책임 규명 권고안에 대한 이행 계획’은 이 정부가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이해조차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는 수사의뢰 26명과 징계요구 104명을 권고했지만, 문재인 정부의 문체부는 수사의뢰 7명, 징계 0명, 주의 12명으로 답했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국가조직을 동원하여 헌법을 위반한 헌법 범죄다. 수많은 문화예술인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온갖 불이익을 받았다. 검열은 표현 행위자뿐만이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피해를 입힌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문화예술만을 편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다. 블랙리스트 규모는 방대했고, 불법의 늪은 깊었다. 그만큼 책임져야 할 사람의 범위는 넓고 죄는 무겁다. 블랙리스트와 같은 헌법 범죄를 형법으로 다스리기엔 한계가 있다. 형법 자체가 공무원의 범죄를 충분히 구체적으로 규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형법상의 죄만 범죄인 것은 아니다.

한국 헌정사는 수많은 국가범죄로 얼룩져 있다. 민주화 이후 국가범죄에 대한 진상 조사, 죄책 규명, 문책, 재발 방지책, 기억 등의 조치가 있었지만, 늘 미흡했다.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군 등의 국가기관은 물론 법원까지 나서 불법을 저질렀는데,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어디서 배웠는지 ‘유감’ 표시나 형식적인 ‘사과’나 할 뿐이다.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제대로 살피지 않으니 어떤 해법을 제시해야 하는지 알 턱이 없다. 그저 축소하고 은폐하기 급급하다.

4·19혁명 직후 헌법에서 볼 수 있듯 국가범죄의 죄책을 묻기 위해서는 특별법과 특별재판부가 필요하다. 권력범죄의 유형을 미리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가체제 혁신은 공무원조직 쇄신에서 시작한다. 무엇이 범죄인지 알려줘야 한다. 징계벌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공무원으로서의 책무를 각성시키는 수단이다. 적법절차와 사법제도가 억울한 이들을 구제할 것이다. 정말 피치 못할 사유를 인정할 수 있다면 징계를 감경하거나 사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예 죄책이 없다고 선언한다면 도대체 자신이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다.

헌법 범죄를 저지른 공무원의 면죄부는 자기사면이다. 자기사면은 곧 잘못의 공유다. 즉, 공범이 된다. 형사상 고발 또는 탄핵 사유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헌법적 책임은 남는다. 블랙리스트 관여 공무원의 죄책을 엄중하게 묻는 것은 그 범죄가 인권 침해임을 알지 못하고 적폐에 맞서기보다 권력에 협력·순응했던 공무원 조직 또는 개인의 과거를 청산하는 길이다. 국민의 인권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 상관의 불법한 지시에 불복종하는, 민주공화국의 공무원상을 정립하는 길이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박근혜 정부에서의 일이다. 그러나 그 해결은 현 정부의 몫이다.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로서의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문재인 정부의 블랙리스트 범죄 청산에 소극적인 태도는 피해자들만이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공무원들도 분노하고 항의해야 한다. 권력자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불법을 저질러도 책임 없는 존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인격모독이다. 무엇보다 나라를 바꾸겠다는 주권자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블랙리스트 피해자는 물론 언제든 검열 대상이 될 수 있는 문화예술인 전체 그리고 검열의 결과 눈과 귀가 가로막힌 시민이 함께 나서야 할 일이다. 국가권력의 죄책을 최후에 심판하는 일은 늘 주권자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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