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6일 금요일

자료 『반일종족주의』독자 여러분에 드리는 말씀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19년 8월 16일 / 몇 가지 비판적 코멘트 업데이트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이 『반일종족주의』의 대표저자로서, 이 책과 관련한 '논란'에 대해, 2019년 8월 16일, 일종의 입장문인, '『반일종족주의』독자 여러분에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 

자료로 검토하기 위해, 이 블로그에 옮겨 놓음.
주의: 밑줄이나 강조 부분은 필자의 것이 아니라, 옮겨 온 이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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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종족주의』독자 여러분에 드리는 말씀
글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7월 초 저와 동료 연구자 5명은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민족주의는 차라리 종족주의라고 함이 더 적합할 만큼 건강한 애국심을 결여한 가운데, 대외인식이 불균형적이고, 역사인식이 비과학적이고 무조건적 반일 적대 감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지적한 내용이었습니다. 책이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한 달 보름 동안 크고 작은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기자가 대표 저자인 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에 대해 여러 차례에 답변을 드렸습니다만, 계속해서 같은 질문이 반복되고 있기에 이 자리를 빌어 가장 빈번하게 던져진 대표적인 질문 두 가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은 왜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지닌 수탈성을 부정하느냐, 그 정치적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실은 이 같은 질문은 저에게 평생에 걸쳐 수도 없어 던져진 것입니다.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고 지배한 것은 장차 조선을 영구히 일본 영토의 일환으로 편입하고 동화시킬 목적에서였습니다. 이 같은 지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총독부는 일본의 법과 제도와 기구를 조선에 이식하였습니다. 그래야 조선을 영구히 동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식된 법, 제도, 기구를 토대로 하여 조선에 대한 일본의 투자가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재정투융자가 중심이었으나 1930년대 이후가 되면 민간자본이 투자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그에 따라 식민지 조선에서는 자본주의 또는 시장경제체제가 발달하였습니다. 조선과 일본은 하나의 단일 시장으로 완벽하게 통합되었습니다. 점점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 조선의 농지를 개간하고, 조선의 광산을 개발하고, 각 산업의 공장을 세웠습니다. 이를 위해 철도, 도로, 항만, 체신 등의 사회간접자본도 활발하게 건설되었습니다. 그 결과 점점 많은 수의 조선인이 일본인 농장주의 소작농으로, 일본인 광산주의 광부로, 일본인 공장주의 임금노동자로 포섭되어 지배되었습니다.

이상이 그동안 저와 동료 연구자들이 세밀한 연구를 실증적으로 통해 밝혀온 바입니다.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식민지근대화론이라 하면서 저희들을 비판해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2007년에 출간한 『대한민국이야기』 라는 책에서 그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의 경제성장이 계속되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조선의 토지와 자원과 공업시설은 점점 일본인의 소유가 되지요. 바로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식민지적 수탈이지요.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하여 한반도의 토지와 자원과 여러 시설을 일본인의 소유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동화정책에 따른 실질적인 수탈의 무서운 결과를 보게 됩니다. 이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 이라 하면 사람들은 일제의 조선 지배를 미화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수탈과 차별이 어떠한 메커니즘을 통해 벌어졌는지를 제대로 보자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이지요.”

그리고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식민지근대화론은 이러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제국주의의 지배가 법과 제도와 시장을 통한 것인 만큼 그것은 새로운 인간과 사회원리의 새로운 문명이 이식되어 전통과 충돌하고 접합하면서 나름의 형태로 정착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 점을 동시에 보자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바로 그 과정에서 조선인 자신이 스스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자신을 근대인으로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식민지의 경제 규모가 커지는 과정에서 일본인과의 차이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만 조선인의 소득도 커지고 있었지요. 원래 그런 그럴만한 문명 능력의 전통문화였습니다. 그 점을 함부로 과소평가해서는 곤란합니다.”

이상과 같이 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수탈성을 부정하거나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취지의 발언을 하거나 글을 쓴 적은 없습니다. 수탈의 체제적 원리와 구조적 양상을 총체로 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원래 수탈이란 말에는 개발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exploitation 하면 착취한다는 뜻도 있지만 개발한다, 활용한다는 뜻도 동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제의 지배는 어디까지나 수탈이지만, 동전의 앞뒤 양면과 같은 관계로 개발의 효과를 담고 있으며, 바로 그 과정에서 전통 조선인은 근대 한국인으로 변모해 왔던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비판해 온 것은, 그리고 우리 공동저자 6명이 『반일종족주의』란 책을 통해서 지적한 것은 기존의 역사 교과서, 교양서, 소설, 영화 등등이 오로지 일제의 야만적 약탈성만 강조, 부각해 왔다는 점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총칼을 앞세워 토지와 식량과 노동력과 여성의 성을 약탈하고 약취했다는 것 아닙니까. 지난 60년간 역사 교과서의 식민지기에 관한 서술이 기본적으로 이러한 약탈설에 기초하였음은 아무래도 부정하기는 힘듭니다. 조금씩 개선되어 오기는 했습니다만, 지금도 그러한 서술의 기저에서는 본질적인 개선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약탈설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희 공저자들은 그 점을 비판하였으며, 책을 구입한 적지 않은 여러분이 그 점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계십니다.

약탈설의 더욱 큰 문제는 수탈의 다른 한 측면인 개발, 곧 일제의 억압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인이 근대인으로 자기를 변모해 온 역사를 놓치거나 왜곡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한국인과 한국사회는 언제부터 근대인과 근대사회로 변모하였는가라는 문제의식은 역사 교과서에서 송두리째 발거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오로지 일제에 무장으로 저항한 독립운동의 역사만이 그 시대의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역사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대다수 한국인이 근대 교육제를 통해, 근대 관료제를 통해, 근대 사법제를 통해, 근대 시장제를 통해 스스로를 근대인으로 개발시켜온 역사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합니까. 바로 그러한 문명사적 전환을 바탕으로 해서 이후 대한민국이란 근대 국민국가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해방 이후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그 모든 것을 일제가 지배의 목적으로 부식한 것이라 하여 파괴하거나 해체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을 그것을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이미 우리가 주도적으로 계승하고, 우리 실정에 맞게 변용한 이상, 그것은 더이상 일제가 남겨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사적으로 보아 근대 서유럽에서 발생한 근대문명이었습니다.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이 세계의 여러 후진국이 부러워하는 큰 성취를 이룬 것은 바로 이같이 우리의 의지와 선택으로 근대문명을 수용, 계승, 변용,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주장을 두고 이른바 좌파 세력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한다고 매도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반일 종족주의의 천박한 공세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것을 때려 부순 북한이 이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선왕조의 국가적 노예제나 국가적 농노제로 회귀해 버린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저에게 빈번히 던져진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2004년 MBC심야토론에 나가 일본군 위안부를 공창이라 했으며, 그로 인해 큰 소란이 일자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그 분들을 찾아가 사과까지 하지 않았으냐. 그때 발표한 성명서를 보면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지금 와서 그때와 다른 주장을 하느냐”하는 겁니다. 며칠 전 JTBC에서도 그런 취지로 저를 비판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04년 그 사건의 경과에 대해 지금 여기서 제가 설명하는 것은 시간 낭비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에 관해서 조금도 숨길 것이 없이 당시의 경과를 2007년 『대한민국이야기』이란 책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 책에 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라는 두 개의 장을 베풀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저의 이해와 입장을 서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위안부 문제의 연구를 주도해 온 일본의 요시미 요시아키라는 분의 학설을 채택하여 일본군 위안부제는 일본군의 전쟁범죄이며, 위안부는 일본군의 성노예였다고 정의했습니다.

당시 큰 소란이 일었던 것은 정부가 주도하는 친일반민족행위 청산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저의 주장을 둘러싸고 토론석상에서 오해가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위안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저는 제 독자의 주장을 펼칠 연구성과를 보유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이후 3년 뒤 『대한민국이야기』라는 책을 출간하면서도 그러한 상태는 마찬가지였으며, 이에 위안부 문제에 관해 국내외 통설을 대변하는 학설을 채택하여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성격에 관한 저의 입장을 정리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세월이 12년이나 흘렀습니다. 저는 기회가 닿은 대로 위안부에 관한 국내외 연구성과를 읽어 나갔습니다. 그 사이 전쟁말기에 일본 군인이나 노무자로 다녀온 50여 명과 인터뷰를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위안부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청취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주요한 연구 과제인 조선시대의 노비제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다가 기생제의 실태와 본질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선 기생제야말로 군 위안부제의 역사적 원류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고문서조사팀과 더불어 고문서를 탐색하다가 1943-44년 동남아의 버마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위안소의 조바(일본어), 곧 관리인으로 근무한 사람의 일기를 발굴하여 번역,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위안소제 또는 위안부제와 관련하여 그런 수준의 1차 사료가 발굴된 것은 일본에서도 없던 일입니다. 저는 그 일기를 통해 위안소의 여인들이 폐업의 권리를 보유했다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후 잘 알려진 원 위안부 문옥주 씨의 회고록을 읽으면서도 그 점을 확인하였습니다. 2017년 대학에서 정년한 뒤 저는 일본에서 이루어진 근대 공창제 및 위안소제에 관한 주요 연구성과를 모두 입수하여 세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군 위안부제는 근대 일본이 운용한 공창제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와 별도로 저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1964-67년에 작성된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학생들의 민간위안부와 미군위안부의 생활실태에 관한 석사학위 논문들이었습니다. 이 논문들은 그야말로 황금과도 같은 귀중한 학술적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만, 그간 어느 연구자도 그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논문과 더불어 대한민국정부가 매년 작성한 <보건사회통계연보>를 검토한 결과 저는 해방 후에도 위안부제가 존속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1937-45년 만의 일이 아니며, 해방 후 민간위안부, 한국군위안부, 미군위안부의 형태로 일제하에서보다 훨씬 많은 여인들이 위안부로 존속했으며, 그들의 위생상태, 건강상태, 소득수준, 포주와의 관계 등은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들보다 훨씬 참혹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저로 하여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국가에 의한, 지배신분에 의한, 가부장에 의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성에 대한 약취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재정리하는 가운데 그 역사적 위상을 올바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연구과제를 절감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일차로 이번에 출간한 『반일종족주의』 란 책 제3부에 실린 3편의 논문을 작성하게 된 것입니다.

연구자에게 “당신 왜 변했어”라고 묻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생 15-19세기 조선왕조시대의 경제사를 연구해 왔습니다만, 읽는 사료의 폭이 깊고 넓을수록 조선시대에 관한 저의 생각이 해마다 바뀌어 가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세월과 함께, 다시 말해 사료의 발굴과 천착과 더불어 연구자는 변화해 갑니다. 변화하지 않은 연구자는 진정한 의미의 연구자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만 변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숨겨서는 곤란합니다. 남에게 혼란을 주기 때문입니다. 무슨 정치적 의도가 있는가라는 오해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책에서 제가 변하게 된 사정을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요시미 교수의 성노예설을 채택하였는데, 이제 보니 문제가 많다, 일본군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폐업의 권리와 자유를 보유하였다, 그런 이유에서 성노예로 규정될 수 없다. 요시미의 학설은 틀린 것 같다는 저의 새로운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아마 위안부 성노예설을 국내에서 공개적으로 부정한 연구자는 제가 최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위안부가 관헌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거나 납치되었다는 종래의 통념을 부정하거나 수정하는 데는 세종대학교의 박유하 교수라는 분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 주장 때문에 명예훼손의 혐의로 재판까지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박유하 교수가 재판부에 제출한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면 위안부를 관헌이 강제로 끌고 갔다는 통념은 일본에서는 부정된 지는 이미 오래고, 국내에서도 더 이상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는 연구자가 없어진 실정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박유하 교수의 뒤를 이어 위안부=성노예설을 부정한 최초의 연구자가 된 셈입니다. 이 두 새로운 학설과 주장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재검토는 거의 불가피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은 오로지 사료에 충실하여 역사의 실태를 있은 그대로 밝힌다는 연구자의 기본자세,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저에게 가장 빈번하게 던져진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과 이상과 같습니다. 『반일종족주의』 제3부를 읽으시면서 저의 답변이 얼마나 진솔한 것인지, 혹 어떤 위선이나 모순을 품고 있지나 않은지 검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이 출간된 이후 공영방송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별로 아름답지 못한 사건에 대해 해명하겠습니다. 책이 출간된 지 이제 고작 한달 보름입니다. 그간 관련 학계나 연구단체나 운동단체로부터의 공식적인 반응이나 개별 연구자의 비평이 제출된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큰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의 주장을 방치한 채, 기존의 역사교육을 그대로 이어갈 수는 없으며, 기존의 위안부운동을 계속해 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벌써 여러 연구자와 연구단체가 저희들의 책을 비판하기 위한 학술적 대응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들도 책이 출간된 이후 한국사 연구자들과 정의기억연대(구 정대협)에 대해 여러 차례 공개토론의 필요성을 상기하고 촉구한 바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문과 방송이 할 일은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계나 관련 단체의 동향을 취재하여 보도하거나, 또는 관련 연구자를 초청하여 찬반 공개토론회를 개최하여 이를 전 국민에게 공정하게 보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언론이 직접 찬반 비평의 당사자로 나서서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에 종사하는 분들이 학술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룰 만큼의 훈련을 받거나 관련 연구성과를 축적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7월 22일 MBC는 스트레이트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의 책 『반일종족주의』를 두고 “친일파세력이 만든 책이라고, 해방 후 친일파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여 이런 책이 나온다”는 취지로 비난을 하였습니다. 게스트로 초대된 어느 사람은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책의 그러한 성격은 분명하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책을 방송을 통해 극구 비난한 MBC는 이후 이메일과 핸드폰 문자를 통해 인터뷰를 집요하게 요청해 왔습니다. 인터뷰의 취지나 질문의 내용을 정중하게 밝힌 공문서를 보내온 적은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공동집필자의 특정인이 특정 장소에 특정 시각에 나오는 줄 알고 길거리에서 기다렸다가 인터뷰를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8월 4일 일요일 아침 저의 아파트 부근에서 이미 잘 알려진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간편복 차림으로 아파트 앞을 나서다가 대기 중인 MBC기자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습니다. 저는 거절했습니다만, 기자는 계속 마이크를 들이대며 저를 따라왔습니다. 저는 뒤늦게 카메라기자가 저를 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습니다. 카메라를 치우라고 강하게 요구했습니다만,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저의 사생활과 인격권과 초상권이 노골적으로 무시되는 그 장면에서 저는 분노를 폭발했으며, 기자의 마이크를 후리치고 나아가 그의 뺨을 때렸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기자의 뺨을 때린 것은 제가 좀 더 원숙한 인격이었다면 피할 수 있는, 불미스런 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론 그 기자에게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돌이켜 보면 상대방의 동의를 받지 않고 마이크를 계속 들이대거나 심지어 촬영까지 하는 사실 역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역시 하나의 불법이요 폭력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의 사생활과 인격권과 초상권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처사에 최소한의 정당방위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미 2주나 지난 이 사건을 재론하는 것은 방송사가 지켜야 할 올바른 취재활동의 자세와 보도의 공정한 기준에 관해 다시 한 번 국민여러분의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공동저자들이 오랜 기간 연구를 해 온 결과로 출간한, 나름의 확신과 용기가 없이는 쉽게 출간할 수 없는 따지고 보면 고도 수준의 학술서에 대해, 그리고 관련 학계가 아직 어떤 반응도 내지 않은 동중정의 상황에서, 이 문제에 관해 전문적 식견을 보유하지 않은 방송사의 PD와 기자들이 함부로 자신의 선입견을 국민의 여론인양 포장하여 극렬하게 비방할 수 있는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라는 점입니다. 그 점을 마지막으로 환기하면서, 그동안 저희들의 책을 읽고 적극 동감하고 지지해 주신 수많은 독자 여러분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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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훈이라는 분의 페이스북 반박문/ 

*2019년 8월 17일 업데이트

'서울대 명예교수'를 사칭하던 이영훈이라는 자가, 자신이 '사료'를 분석해서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다'는 주장을 했단다. 그리고 그 소위 '사료'라는 것은 다음과 같단다.
▲ 일제강점기 군인과 노무자 경력이 있는 인물 50여 명 인터뷰
▲ 동남아시아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 일기
▲ 일본에서 나온 공창·위안소 제도 연구 성과
▲ 서울대 보건대학원 학생들이 1964∼1967년에 발표한 논문
▲ 한국 정부가 작성한 보건사회통계연보
정말 가관이다. 이딴 게 '사료'냐.
먼저, 한국정부를 운운한 다섯번째는 전혀 무의미하다. 한국정부와 위안부 문제가 무슨 관계가 있길래 들먹거리나. 그 앞의 서울대 학생들의 논문도 마찬가지다. 둘다 2차적 자료일 뿐더러, 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기도 전인 1950~60년대의 자료라 위안부 관련의 증거가치가 전혀 없다.
그 앞의 세가지는 모두 가해자측 증언이다. 직접 성폭행을 한 자들, 그 관리인,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일본. 모두 가해자다.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하는데 가해자가 '성폭행이 아니라 합의 성관계였다'라고 주장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일말의 신빙성이 있단 말인가. 그걸 감히 사료라고 들먹가리는가?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은 2차대전 패전 직후 위안부 관련의 모든 자료를 다 파기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난 4월 세종대 호사카 유지 교수가 KBS "대화의 희열"에 출연했을 당시 바로 이 '사료'들을, 진짜 당시의 사료들을 증거로 제시했었다. 일부나마 태평양전쟁 당시의 공문서들이 남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호사카 교수는 사료가 반드시 남아있을 것이라는 믿음 아래, 집요하게 일본의 국립공문서관, 방위성 방위연구소, 외무성 외교사료관 등을 뒤져 일본군 '위안부' 관련 80개의 문서를 찾아냈다고 한다. 그가 찾아낸 문서들은, 공문서이기는 하나 매우 오래된 데다 '춤추고 있는' 필기 문서여서 일본인들도 읽기가 매우 어려운 문서들이었는데, 자신의 동료 학자들도 역시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고.
호사카 교수가 방송에서 보여준 문서들에서는, '업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집했다'라는 일본정부의 주장과 반대로 '일본 정부가 '추업' 여성 3000명을 모집하라는 '명령'을 내린 문서가 있었고, 그 사실을 '극비'로 취급하라는 지침까지 명시되어 있다. 또 업주를 모집하는 데에 일본정부가 직접 개입했으며 업주가 자발적으로 희망한 것으로 조작하라는 지시까지 있었다. 또한 위안부들의 '산책' 구역을 제한하도록 지시해 사실상 감금시킨 문서도 있었다.
호사카 교수에 따르면 이 문서들은 자신이 처음 발견한 것이라고 하는데, 자칭 명예교수 이영훈은 이런, 일본의 진짜 '전시 사료'들도 검토했는가? 아니, 자신이 늘어놓은 소위 '사료'들에는 당시의 1차적 사료는 단 한가지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가 '사료'라고 주장한 것은 모조리 '가해자들의 발뺌'과, 증거 가치도 없는 50, 60년대의 엉성한 우리나라측 자료들 뿐이다. 이따위로 해놓고 무슨 '사료' 연구 드립이냐?
덧붙여서, 이미 지난해에도 이슈가 되었던 것이지만 호사카 교수가 다시 한번 중요하게 언급한 일본의 유명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의 유명 만화 "총원 옥쇄하라!"도 간접적이지만 설득력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미즈키 시게루는 태평양전쟁에 징병되어 미군 포탄에 한쪽 팔을 잃기도 했던 일본의 국민 만화가인데, "총원 옥쇄하라!"는 자신이 겪은 태평양전쟁을 자세히 묘사했던 자전 만화이다. 여기서 그는 위안부와 위안소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했다. 적지 않은 일본 국민들이 이 만화를 읽고 위안부의 실상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을텐데, 그러니 일본정부의 위안부 강제성 부인은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인 것이다.
나는 지난 4월의 호사카 유지 출연 방송을 보면서 몇번이나 거듭 호사카 교수에 감동하고 결국 깊이 존경까지 하게 됐다. 그가 2003년에 한국인이 됐음에도 일본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 그가 독도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된 계기, 그가 독도와 위안부 사료들을 수없이 찾아다니며 겪었던 어려움과 두려움. 한국인 연구자들 중에서도 저런 정도의 수고를 감수한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 이름을 갖고 있으며, 88년 이후로 무려 32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아직 일본 억양이 튀지만, '네이티브' 한국인보다 더욱 한국인인 사람이다.
반면, 이영훈은 뭔가.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에서 온갖 영예를 다 누렸으면서, 제대로 찾아보는 최소한의 성의조차도 없이 엉터리 '사료'들을 들이대며 민족의 아픔을 송두리째 부인해버리고 일본의 편을 드는 저 고약한 늙은이는, 친일파라는 말조차 너무나 아깝다. 그야말로 일본인보다도 더한, 그냥 '왜놈' 아닌가.
[6회] 대화의 희열2 - 호사카 유지 교수 2019.04.0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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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희열2에서 언근된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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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우의 코멘트 / 2019년 8월 18일 업데이트

「반일종족주의」을 읽은 소감을 두서 없이 말하자면,

(1) 민족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종족,” “종족주의”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 구사하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역시 예상했던대로 세계 학계에서 통용되는 개념과 담론 및 국내 학계의 논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고, 그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조차 있는지 의심스럽다. 여기서 말하는 종족은 ethnic group이 아니고 tribe로 이해되며 종족주의도 tribalism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 같은데, 이는 한국인의 아이덴티티를 저급한 것으로 치부하기 위한 용어 선택일 뿐 그에 대한 어떤 정의나 개념적 지도 그리기를 하고 있지 않다. 그냥 구호적 차원에서 사용하는 말에 불과하다.

종족과 종족주의를 한국인의 집단심성의 기저를 이루는 샤머니즘과 연결시키면서, 종족주의를 “객관적 논변이 허용되지 않는 불변의 적대 감정,” “이웃 일본을 세세의 원수로 감각하는 적대 감정”으로 정의한다. 한국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의 범주가 없기 때문에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다르다고 본다. 서양 민족주의가 그렇게 단순하고 한 마디로 정의되는 것인가? civitas에 대립하는 natio와 gens, polis와 demos에 대립하는 ethnos의 개념과 그것들의 역사적 진화, 그것을 소비하는 집단들의 상이한 관념들, 그것을 둘러싼 무수한 학문적 논의가 있음을 알고 있는지.

내가 대학 시절에 읽은 Hans Kohn의 민족주의론이 동유럽의 종족적(ethnic) 민족주의와 서유럽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킨다는 이유로 현재의 민족주의 연구자들에게 배척당한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한스 콘조차 배척당하는 터에 정치적 구호 수준의 말에 대해 논평을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2) 한국인의 특성으로 “거짓말”을 들고 있다. “한국인의 숨결엔 거짓말이 배여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나라의 역사학이나 사회학은 거짓말의 온상입니다. 이 나라의 대학은 거짓말의 제조공장입니다.” “그들은[법관들은] 원고들의 거짓말일 가능성이 큰 주장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어릴 적부터 거짓말의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론장에서 할 수 없는 말, 술자리에서나 하는 말을 하고 있다.
한국 사회학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특히 사회사 연구자들이 지난 20년간 발전시켜온 연구들을 충분히 음미했는지 의문이다.

(3) 토지기맥론, 혈연적 사고, 샤머니즘과 같은 한국인의 집단심성을 장기지속으로 규정하면서 브로델을 언급한다. 아날학파의 멍딸리떼 연구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4) 주변적인 언설이나 학문적 언설이 아님이 분명한 것을 인용하면서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조정래의 소설을 가지고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비난. 김영삼 정부 시절 쇠말뚝뽑기를 주류적 문화현상인 것처럼, 한국 문화는 이렇다는 식의 서술. 서경덕의 의욕에 찬 오버를 마치 주류 역사학계의 태도인 것처럼 조롱.

학계에서 그냥 어른으로 예우하는 분인 신용하 선생의 학설이 아직도 주류 역사학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전제하고 그것을 공격.

박경식의 연구를 비판한다. 박경식? 어느 시대의 연구자인가? 출판된지 45년이 넘은 저서이다. (내 반론은 박경식 연구의 한계를 인정할 뿐 그의 치열한 삶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5)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전혀 근거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주제 전문 연구자의 말을 들어보자.

(6) 위안부와 강제징용은 없었다고 하니 그 주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평가를 들어보자. 팩트에 대해서는 그렇다치고 그 주장에 담긴 관념을 보자면, 위안부와 노동력 강제동원에 대해, 사람을 그냥 폭력적으로 끌고 간 것이 아니라면 정당화된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성노예, 강제동원을 그렇게 정의한 후, 머리채를 잡아끌거나 트럭에 싣고 가지 않았으니까 성노예,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오늘날 반인도적 범죄로서 간주되는 trafficking의 개념에 반한다. Human trafficking을 금지하는 팔레르모의정서를 보자.

팔레르모의정서(Protocol to Prevent, Suppress and Punish Trafficking in Persons Especially Women and Children, supplementing the United Nations Convention against Transnational Organized Crime)
제3조(Article 3)
For the purposes of this Protocol:
(a) "Trafficking in persons" shall mean the recruitment, transportation, transfer, harbouring or receipt of persons, by means of the threat or use of force or other forms of coercion, of abduction, of fraud, of deception, of the abuse of power or of a position of vulnerability or of the giving or receiving of payments or benefits to achieve the consent of a person having control over another person, for the purpose of exploitation. Exploitation shall include, at a minimum, the exploitation of the prostitution of others or other forms of sexual exploitation, forced labour or services, slavery or practices similar to slavery, servitude or the removal of organs;
(b) The consent of a victim of trafficking in persons to the intended exploitation set forth in subparagraph (a) of this article shall be irrelevant where any of the means set forth in subparagraph (a) have been used;
(c) The recruitment, transportation, transfer, harbouring or receipt of a child for the purpose of exploitation shall be considered "trafficking in persons" even if this does not involve any of the means set forth in subparagraph (a) of this article;
(d) "Child" shall mean person under eighteen years of age.

*주석 : “팔레르모 의정서는 인신매매의 정의를 '착취를 목적으로 위협, 무력행사, 강박, 납치, 사기, 기만, 권력남용 등을 통해 사람을 모집, 운송, 이송, 은닉 또는 인수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착취는 매춘이나 성적 착취, 강제노동, 노예제나 노예제와 유사한 관행, 장기 제거 등이 포함된다고 못박고 있다.
Human trafficking ‘is’ recruitment, transportation, receipt of persons by means of the threat, use of force, coercion, abduction, fraud, deception, the abuse of power for the purpose of exploitation. 팔레르모 의정서: 2000년 이탈리아 남부의 팔레르모에서 159개국에 의해 채택된 이 의정서는 유엔의 국제범죄조직 방지협약에 부속된 의정서로 공식 명칭은 '인신매매 특히 여성 및 아동의 인신매매·예방·억제·처벌을 위한 의정서'다.
*주석: 정관웅  씨의 페이스북에서 
<인신매매>에 관해서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서 무심코 지냈으나
이번 ‘아베의 망동妄動과 국내의 그 추종세력들의 망할 짓거리’를 바라보면서
새롭게 다가온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일베들이 a조항을 엉터리로 번역했다기에……
‘or’가 많은 것을 교묘히 이용했나 보다.
그런 까닭으로 공부삼아 직접 번역해봤다.
원문 출처 : 김정란 쌤의 페북
【팔레르모 의정서(Protocol)】
(초국가적 조직범죄에 대항하는 유엔 협약을 보완하여 인신매매
특히 여성과 어린이의 인신매매를 예방과 억제 및 처벌을 규정하는 의정서
Protocol to Prevent, Suppress and Punish Trafficking in Persons Especially Women and Children, supplementing the United Nations Convention against Transnational Organized Crime)
《제3조》이 의정서의 목적 :
(Article 3) For the purposes of this Protocol:
(a) "인신 매매"란 착취를 목적으로,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사람에게서 허락을 얻거나 대가를 주고받아서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의 사람들을 권력남용, 기만, 사기, 납치, 다른 형태의 강박, 무력행사, 협박을 수단으로 사람을 모집, 수송輸送, 이주移住, 은닉 또는 인수하는 행위를 뜻한다.
(a) "Trafficking in persons" shall mean the recruitment, transportation, transfer, harbouring or receipt of persons, by means of the threat or use of force or other forms of coercion, of abduction, of fraud, of deception, of the abuse of power or of a position of vulnerability or of the giving or receiving of payments or benefits to achieve the consent of a person having control over another person, for the purpose of exploitation.
여기에서 착취란, 최소한 매춘의 착취나 다른 형태의 성적 착취, 강제노동, 노예 또는 노예와 유사한 형태, 장기臟器의 적출 등을 포함해야 한다.
Exploitation shall include, at a minimum, the exploitation of the prostitution of others or other forms of sexual exploitation, forced labour or services, slavery or practices similar to slavery, servitude or the removal of organs;
(c) 착취의 목적으로 아동의 모집, 수송, 이주, 은닉 또는 인수하는 행위는 (a)에 명시된 어떠한 수단이 포함되지 않더라도 "인신 매매"로 간주해야 한다.
(c) The recruitment, transportation, transfer, harbouring or receipt of a child for the purpose of exploitation shall be considered "trafficking in persons" even if this does not involve any of the means set forth in subparagraph (a) of this article;
(d) "아동"이란 18세 미만의 사람을 뜻한다.(d) "Child" shall mean person under eighteen years of age.

이를 소개하는 한 국내 언론보도를 보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인신매매'라고 표현한 것을 놓고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제사회에서 얘기하는 인신매매에는 국가가 개입된 강제매매가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 등 159개국은 지난 2000년 채택한 일명 '팔레르모 의정서'를 각각 국내 관련법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의정서에는 인신매매의 정의를 '착취를 목적으로 위협이나 무력행사 그리고 강박과 납치 사기 또, 기만과 권력남용 등을 통해 사람을 모집하거나 운송 또는 은닉하고 인수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의정서는 '착취'는 매춘이나 성적 착취뿐 아니라 강제노동과 노예제나 노예제와 유사한 관행 그리고 장기 제거 등이 포함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또 인신매매의 주체를 국가와 단체, 개인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 있어 일본군 위안부는 팔레르모 의정서가 규정하는 인신매매 행위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 의정서를 근거로 국내 관련법에 인신매매의 정의와 주체를 규정하고 있으며, 대외정책을 담당하는 미국 국무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으로 '인신매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7) 위안부는 매춘이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음을 비교해보자. 세월호 관련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여성 대통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여성을 우습게 여기거나 비하하는 한국인의 집단 심성이 만들어낸 거짓말이었습니다.”

실력 있는 문화연구자에게 “대통령과 위안부”라는 제목의 담론분석을 의뢰하고 싶은 심정이다.

(8) 그렇다고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을 일소에 부쳐서는 안된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이 토지 수탈의 과정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 일제시대에 일정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친일 발언이라고 비난할 것은 아니다. 일본으로 쌀을 “수출”했다고 서술한 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를 문제삼아서는 안된다. “수출”은 중립적 개념이고, 사회과학적 서술은 중립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이 최소한 민유지에서는 소유권 변동을 대량으로 가져오지 않았다는 주장은 이미 1980년대말과 90년대 배영순, 조석곤 등의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개진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실증적 반론이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영훈(경칭 생략)이 말하는 것처럼 중등 역사교과서는 그에 맞게 수정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나는 일제시대의 경제성장에 대한 김낙년의 연구 결과가 놀랍지 않다. 그것을 비판한답시고 “그 경제성장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라고 묻는 것은 과학적 태도가 아니다. 의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말 수는 없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서 김낙년과 주익종은 일제시대 경제적 근대화와 성장이 이루어졌음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일제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반일종족주의」에 이르게 되면 그러한 조심스러움은 사라진다. 일제시대에 경제성장이 있었다면, 그리고 근대적 제도가 도입되었다면, 그것만으로 일제 지배는 정당화된다는 사고가 이 책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 책이 구역질난다는 조국의 비난에 대해 이영훈은 우리나라에 근대 민법이 언제 도입되었는지를 묻고 있다. 근대 민법이 도입된 것만으로 일제 지배를 긍정해야 한다는 황당한 논리를 개진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조야한 주장 때문에 그에 대한 반론 또한 조야하게 되는 것이다.

(9) 청구권협정에 대한 주익종의 분석에 대해서는 그 주제를 전공하는 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주익종은 일제 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청구권협정을 접근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반박하고 있는데, 일제 지배의 불법성 문제는 별도의 포스팅으로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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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관 씨의 페이스북에서 /

*2019년 8월 18일 업데이트
[반일종족주의 독후감]  

‘화제의 책’인데 막상 읽었다는 분은 별로 없는 그 책, 반일종족주의를 읽었습니다. 당직 근무였는데, 업무와 관련 있어서 회사에 돌아다니는 책을 읽었습니다. 주인 있는 책이라 책의 마지막 1/3을 차지하는 위안부 관련 서술은 주마간산으로 건너뛰었습니다. 칭찬이든 비판이든 알아야 면장할 것 아니겠습니까? 비평이라고 할 수는 없고 개인적인 느낌을 적습니다.

감히 말하자면, 이 책은 진보사학계, 더 나아가 진보진영에게 40년 만의 도전이 될 수도 있겠다는 판단입니다.
‘40년’은 1979년 10월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이르는 말입니다. 송건호, 백기완, 임종국, 임헌영 등 쟁쟁한 필진들이 참여한 해전사 1권을 직접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 책은 주류사학계를 뒤집어 진보사학의 시대를 열어젖혔습니다. 10년 뒤 ‘80년대의 책’으로 인정받았고, 여전히 새로운 시대를 연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반일종족주의’는 일단 읽기에 부담이 없었습니다. 이영훈 교수의 이승만학당팀이 유튜브 동영상 강의를 한 것을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대화체라서 친근합니다.
논란이 되는 것은 내용인데, 저에게는 새로운 내용이 많아서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쟁점이 되는 징용과 위안부, 토지조사사업, 독도, 학도병뿐만 아니라 백두산 신화의 형성과정이나 쇠말뚝 얘기 등을 담았습니다. 초장부터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일부가 허구라고 비판하는데, 이 대목부터 덮어버릴 분도 많겠죠. 그런데 읽다보면 “역사 속의 일본이 결코 좋은 이웃은 아니었지만, 실체 이상으로 악마화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들게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이 책의 발간 목적도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은 제목과는 달리 “가장 큰 책임 물어야 할 사람은 당시 나라의 주인으로 대신들에게 책임을 떠넘긴 고종”이라는 당연한 결론으로 인도합니다.
1965년 6월 한일협정에 조인되기 직전에 등장해서 ‘강제징용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재일교포 사학자 박경식(이영훈팀은 조총련계로 지목한)의 존재나 “미국 경제의 예속 못 벗어난 일본 자금으로 한국의 부흥은 불가능하다”는 장준하의 발언(1964년 3월 15일), 1927년 최남선의 기행문으로부터 ‘백두산 = 민족의 영산’이라는 신화가 태동했다, 정대협이 왜 위안부를 이슈화했는가 등에 대한 해석들은 흥미로웠습니다.

이제 이 책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남는데요.
다시 해전사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해전사의 성공은 주류 사학계의 책임방기에서 일정 정도 힘을 얻습니다. 해전사는 1945년 이후 현대사를 중점적으로 다뤘죠. 해전사 속편이 연달아 나온 1980년대는 전두환 집권기였는데, 주류 사학계는 전두환의 뿌리가 되는 보수정권의 허물은커녕 공과도 건드릴 생각을 못했습니다. 해전사를 긍정하자니 반체제로 낙인찍히고, 부정하자니 독재의 옹호자로 몰리는 상황에서 대다수 학자들이 그냥 ‘침묵’을 택했습니다.
주류의 외면 속에 진보사학자들은 전인미답의 분야를 연구하고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갈채를 받았습니다. 거대권력에 저항하는 민초와 혁명가들의 삶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우리가 사는 80년대가 조상들이 고통 받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을 안겨줬습니다. 80년대 들어서 반미와 민족해방의 기치를 든 NL이 좌파 운동의 패권을 장악한 것도 이 시대의 현대사 열풍과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보수 진영은 뒤늦게 정신을 차립니다. 2006년에 내놓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그 결과물인데, 타이밍이 안 좋았습니다. 노무현 정부 후반기부터 정국의 주도권이 야당으로 넘어간 상황이어서 보수층도 역사 배우기의 절실함이 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근혜정부가 권력만 믿고 국정 역사교과서로 어설픈 사상 논쟁을 거는 바람에 진보 진영은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보수가 역사 논쟁을 제기하면 어떤 허점을 찾아내고, 어떤 프레임을 씌우면 논쟁판을 장악할 수 있다는 노하우도 꽤 쌓이게 됩니다. 보수는 문화라는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에 대한 이해도 약했고, 투쟁력도 어설펐습니다.
‘반일종족주의’는 권력도 잃고, 여론 시장에서도 내몰린 보수‘재야’사학계가 쏘아올린 공입니다. 그 동안 좌우파 모두 큰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는) 일제강점기를 공략합니다. 리스크가 크지만, 보수정권 옹호보다는 손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정치적으로는 손해를 볼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강력한 소수의견’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합니다.
이승만학당팀은 영리하게도 ‘일제 강점은 불법’이라는 전제를 깔고 자신들의 논리를 전개합니다. (400페이지 넘는 책이다보니 ‘오버’하는 대목들은 분명 있습니다. 그건 저보다 목적이 더 뚜렷한 분들이 직접 찾아보시길^^)
이승만학당에 있어서 진정한 도전(시련)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의 포장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진보사학계의 대응 여부에 따라 ‘돌파구’가 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가 ‘반일종족주의’를 대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선택처가 있습니다.
1) 법정으로 끌고가서 사법적으로 죽이고, ‘역사부정죄’ 만들어서 영원히 죽이는 것: 이영훈팀도 이런 구도를 내심 바라지 않을까 싶네요. 의도는 그렇지 않았으나 진보적인 교수나 기자들이 설익은(읽지도 않은!!) 비판론을 제기하면서 ‘반일종족주의’를 키워줬습니다.
2) 외면, 무시 : 1980년대 주류 사학계가 진보사학계에 써먹었던 방법이지만, 진보역사서들이 시장을 장악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반일종족주의’ 책 판매량이 갑자기 늘어난 것은 별도의 분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3) 학술적 논파 : 가장 생산적인 방법이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이 사학계만의 숙제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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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Yi  씨의 페이스북에서/ 
*2019년 8월 18일 업데이트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를 읽을 젊은이들에게 주는 독서 조언> 
요약: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를 읽는 젊은이들은 동시에 다음의 책들도 읽어 볼 것을 권합니다. (1) 임지현. 2019. 기억전쟁. Humanist. (2) 최정운. 2013. 한국인의 탄생. 미지북스. (3) 최정운. 2016. 한국인의 발견. 미지북스. (4) 조나단 하이트. 2014. 바른마음. 웅진지식하우스 (원저 The righteous mind, 2012, Pantheon). (5) 우치다 다쓰루 외. 2016. 반지성주의를 말하다. 이마 (원저 日本の反知性主義, 2015, 晶文社). (6) Francis Fukuyama. 2018. Identity: The Demand for Dignity and the Politics of Resentment. Farrar, Straus and Giroux.

1. 7월 27일 이영훈 교수님과 그의 지인들이 최근 펴낸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에 대한 짧은 인상평을 올린 바 있습니다.* 예감처럼 이 책은 적대적인 한일관계라는 최근의 시공간적 배경을 뒤로 단시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합리적인 양국 시민들의 소리는 묻히고, 이런 책들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victimhood nationalism)와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두개의 극단적 관점의 충돌을 견인하며 커다란 소음을 유도합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경험한 어르신들,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경험한 기성세대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 누군가도 이 책을 읽을 것입니다. 토마 피케티는 대학교수들을 ‘다른 사회구성원에 비해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할 수 있(고 심지어는 공부하면서 돈을버)는 행운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하지요. 그래서 일요일 오후 잠깐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읽을 젊은이들을 위해 독서 지도(?) 차원에서 한 꼭지 올려보겠습니다.
*주석: Han Yi
엉뚱한 사람들이 주요한 단어와 사람을 가로 챘을때 느끼는 짜증이랄까.... 성장을 위한 진지한 성찰이 사실관계의 명확한 분별에서 시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분들의 자학적 세계관, 세상이 그랬던건데 늬들이라고 뭐 어쩔수 있었겠어 모드는 21세기 선진국 국민인 우리 젊은이들이 절대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주역들은 대한민국이 조선과 완전히 결별한 자유민주주의 공화정을 지향해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많은 굴곡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김구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모두의 긍정적인 면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이해해 이들 모두를 껴 안기를 바란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편향적인 것만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도 해악이 크다는 것을 느낀다. 이 책은 뭐 굳이 살 필요 없을 정도로 이영훈 교수의 전작과 기존발언에 기대고 있다. 많은 사실들이 나열된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들을 버무려 정치적 선동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선에서 병사와 위안부는 한덩어리의 운명 공동체일 수 있고, 위안부가 가난과 폭력이 지배하는 가정을 벗어나서 도시의 신생활로 향하는 설렘도 없지 않았을 거라 망발하는 대표저자를 보니 황당하기도 하고. 이영훈 교수의 많은 경제 저작을 심각하게 독해 했던 사람으로서 이책이 많은 역사적 사실을 재료로 정치적 선동문이 된 것이 유감이다. 요새 젊은이들은 일본은 안중에 없는 이들도 상당한데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이 반도의 종특 샤머니즘에 기반한 반일 종족주의라고 외쳐 무슨 공감을 이끌어낼지 답답하다.
2. (1)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제국으로 발돋움 했는데 조선은 왜 일본에 합병되어 망했으며, 일본의 합방이 아니었다면 과연 조선은 스스로 근대국가로 변모할 수 있었을까? (2) 해방후 조선반도의 승전국 분할통치 앞에서 스스로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고 한국전쟁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 했을까? (3)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국 중 가장 빠르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함에 있어 대기업군 중심의 경제를 만들어 낸 군부독재의 권위주의적 자원배분과 그것이 만들어 낸 사회경제적 문제들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을까?
독서토론의 단골 주제였던 이 세가지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과정에서 대학시절 읽었던 송건호-박현채-최장집-박명림 등이 기획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느꼈던 감흥만큼 이영훈 교수님과 낙성대 연구소의 저작들에서도 많은 지식을 흡수했습니다. 이영훈 교수님이 기획한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한국형 시장경제체제>, <한국경제사 1, 2>는 한국경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꼭 읽어 보아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학자로 남았으면 자초하지 않았을 최근의 곤욕들은 운동가의 삶을 선택했으니 이 교수님이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이셔야 하겠지만, 최근의 MBC기자폭행논란, 조국 교수님과의 설전, 외조부 논란, 서울대 명예교수 여부 논란, 토요타연구재단 후원 논란들을 보고 있으면 본질에 대한 논쟁에 취약한 한국적 모습에 답답합니다.

3. 우선 <반일 종족주의> 전체를 거칠게 개관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책을 읽은 분이나, 스포일러를 싫어하는 분은 건너 뛰시면 됩니다. 책을 읽지 않고 다음을 읽으시는 많은 사람들은 ‘구역질이 난다’ 아니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네’ 둘 중 하나의 감정을 경험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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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한국의 민족주의는 서양의 민족주의와 달리 종족주의, 특히 반일 종족주의라는 문화 권력이다.

1부.종족주의의기원. 
1-1.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 그려진 일본의 한국 학살, 겁탈과 야만과 광기는 한국의 종족주의,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을 형상화한 황당무계의 극치다.//
1-2. 국사교과서의 40%수탈설은 한손에는 총을 들고 다른 손에는 측량기를 들고 조선땅을 수탈했다는 신용하 교수가 만든 엉터리 학설에 기반하는데, 일본의 조선 병합은 개별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영구히 지배할 목적의 거대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그들의 법과 제도를 이식한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1-3.일제시기의 농민궁핍은 농업생산성 문제에 불과하며, 일제가 쌀을 수탈해서가 아니다. 일본으로 간 쌀은 수탈이 아니라 엄연히 수출이었고, 이를 통해 쌀가격 상승과 소득의 증가가 있었다.//
1-4.주권 강탈은 분명 일제의 잘못이지만 교과서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일제가 개인의 재산을 강탈하고 수탈했다고 하는 건 사실이 아니다. 일제가 조선에 자유시장경제, 민법과 재산권의 보호 등의 근대적 제도를 도입했다.//
1-5.강제징용은 허구며, 일본에 돈 벌러 간 노동자들이 있었을 뿐이다. 문서와 사진기록은 이들은 차별을 받지 않았고 노예생활을 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2019년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 54쪽의 한국인의 강제노역 사진은 홋카이도 개척시 일본인 노동자 사진일 뿐이다.//
1-6.강제징용 노동자상은 한국인들이 숭배할 또 하나의 토템에 불과하다. 작업배치에 있어 조선인과 일본인은 차별이 없었다. 산업재해율은 조선인이 높았지만 그건 위험한 작업에서 수당을 더 많이 받으려 했던 조선인들이 더 많이 죽은 것으로 노동수요와 노동공급이 맞아 떨어진 결과일 뿐이다.//
1-7.전쟁 중 일본 탄광에서 일한 조선인으로 인해 일본노동자들은 더 적게 조선노동자들은 더 많은 임금을 받게 되었다.//
1-8.육군특별지원병은 출세하려고 자발적으로 지원한 조선의 상민 출신이고, 이들은 식민지시기에는 제국의 첨병이었지만 1945년 이후에는 조국의 간성이 되었다.//
1-9.학도지원병은 바보천치, 강제동원 피해자, 민족의 투사도 아니며 입신출세의 명예욕, 평안한 군대생활, 목숨부지의 욕망을 원했던 복잡한 존재지만 한국사는 이들을 반일지사로 묘사해 엘리트들의 흑역사를 은폐하고 있다.//
1-10.1965년 청구권 협정과 관련해서는 애초에 청구할 것이 별로 없는 상호 재산, 채권 채무의 조정 과정이었으며, 대법원이 문제 삼은 노무자의 손해와 고통까지 포함한 개인청구권까지 다 정리한 것이다.//
1-11.한국과 일본은 국교정상화로 큰 이익을 봤고, 국교정상화로 한국은 일본식민지가 된다며 반대하던 반대론자들의 예언은 어리석은 소견이며 이들은 어리석고 후안 무치하다.//

2부.종족주의의 상징과 환상.
2-12.백두산을 소중화의 상징으로 여기는 신화, 최남선의 맹호기상도, 고은의 백두산, 그리고 백두산 천지에 선 문재인 김정은 부부의 사진을 보면 백두혈통을 칭송하고 백두산 밀영의 통나무집으로 강제 동원될 남한 사람의 운명이 예감된다.//
2-13.독도는 세계사적으로 존재가 모호한 분쟁지역이다. 한국 시인들이 독도에 가 시 낭송을 하며 독도를 조상의 담낭이라고 하는 것은 독도를 반일종족주의의 신성한 토템으로 만드는 시도다.//
2-14.일제가 조선 땅에서 인물이 나는 걸 막기 전국 명산에 쇠말뚝을 박아 풍수침략을 했다는데, 이는 측량기준점(대삼각점)에 불과하며 역술인 지관의 말을 듣고 이를 쇠말뚝 신화로 만드는 한국인들은 닫힌 세계관, 비과학성, 미신성을 반일과 결합하여 저열한 정신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2-15.구 총독부 청사를 해체한 것은 반달리즘식 문화 테러이며 부끄럽고 청산해야 할 역사 지우기라는 선동을 통해 대한민국의 산업화, 근대화, 민주화를 낳은 공간을 파괴한 것이다.//
2-16.고종은 망국의 암주인데 일부 학자들은 개명군주로 미화하고 있다. 반일이면 뭐든지 존중되는 어이없는 세태입니다.//
2-17.황제는 조약체결을 끝까지 반대 했으나 을사오적들이 일본에 굴복하여 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고종이 조약체결 어명을 내렸고, 병합과 조선왕조의 멸망은 국가체제의 총체적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망국의 책임을 을사오적에게 묻는 것은 정신적 지체다.//
2-18.친일청산은 사기극이다. 제헌국회가 추진한 것은 악질적 반민족행위자 처벌인데, 노무현 정부의 친일파 청산 운동에서는 그 범위가 일정 직급 이상으로서... 탄압에 앞장선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 하수인으로 점차 그 대상이 넓혀져 왔다. 반민특위에서도 문제 삼지 않은 자들을, 실제로 피해를 입은 당대 사람들도 문제 삼지 않는 이들을 단죄하는 ‘늦게 태어난 행운을 누리는 자의 폭거’를 자행하는 게 현재의 친일인사 소탕전이다. 왜 친일청산의 열의 만큼이나 대한민국의 암적 존재인 친북, 종북파 청산에 힘을 기울이지 않는가?//
2-19.일본은 죄악을 저질렀으니 무엇이든 요구해도 된다는 식이면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보상요구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일본에 대해선 끝까지 배상을 요구하면서 훨씬 큰 피해를 준 북조선에는 1원이라도 배상을 요구하지 못하는 게 정상인가?//
2-20.토지기맥론, 유교적 생사관, 족보를 통해 아마득한 조상을 공유하는 친족문화의 바탕아래 우리의 민족주의는 일제의 탄압을 받으며 형성되어 신분적 종족주의적 신학이 되었다.//

3부.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
3-21.나는 일본군 위안부라고 고백한 여인은 170이지만 나는 미군 위안부라고 고백한 이는 불과 두세명이다. 이는 반일 종족주의가 일본인 위안부만 보호하고 지원하는 집단정서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3-22.기생제가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것이었다면 일본의 호주제 도입은 딸을 팔 권리를 아버지에게 주어 조선의 공창제와 대중 매춘사회를 촉진시켰다. 색시 장사가 돈벌이의 최고인 시대, 조선인 매춘업은 전시에 각국으로 활발하게 진출하였다. 여인의 역외 송출은 일본군 위안부 송출이었다.//
3-23.위안부들은 대부분 강제 연행되지 않았다. 여자정신근로대와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다. 그리고 위안부의 수는 터무니 없이 과장되었다. 조선군사령부는 조선의 주선업자에게 하청을 준 것이고, 미국기록에 따르면 위안소는 군에 의해 편성된 공창으로 고노동, 고수익, 고위엄의 시장이었을 뿐이다. 위안부들의 실상은 송연옥 교수의 성노예설과는 거리가 멀고 일본의 위안부제는 해방후에도 우리나라에 버젓이 살아 한국군 위안부, 민간 위안부, 미군 위안부의 형태로 존재했다. 일본군 위안부가 성노예라면 해방후 민간과 기지촌 위안부는 그것보다 훨씬 가혹한 성노예였다. 실제 한 위안부는 죽어가며 일본을 저주하지 않았는데, 양반 나부랭이 직업적 운동가들이 품은 반일 종족주의의 적대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3-24.해방 40년 동안 누구도 문제제기 하지 않다가, 1983년 요시다 세이지라는 한 일본인의 위안부 사냥이라는 거짓 증언 때문에 생긴 것이 위안부 문제다. 시간이 지나 실상을 아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기억이 희미해지자 우리 누이를 사냥하듯 끌어가 위안부를 만들었다는 가공의 새기억이 만든 것이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다.//
3-25.정대협은 원리주의적 활동으로 일본 정부의 사죄와 위로금 지급시도를 거부했으며, 위안부를 ‘국가 공권력이 폭력으로 강제한 성노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강제연행은 없었다. 오히려 조선의 여성 인신매매가 문제였다. 빈곤하고 인권이 박약한 곳에서 언제든 일어나는 일을 한국군 위안부, 미국군 위안부, 민간 위안부 문제는 빼고 일본군 위안부만 뽑아 성노예라 비판할 근거가 없다. 이들의 목적은 한일관계의 파탄이다. 진정 원 위안부들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이들을 위로하려면 해방 70년까지 반성해야 한다. 딸을 팔아 먹은 것도, 가난한 집 딸을 꾀어 위안부로 넘긴 것도, 그들이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한 것도, 돌아와도 사회적 천시 속에서 숨죽여 살도록 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한국인들이다. 위안부 문제는 가장 극단적인 반일 종족주의의 경우다.//

에필로그. 반일종족주의의 업보. 한국사회는 큰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큰 문제는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부재다. 이런 면에서 이승만은 이 나라가 지난 70년간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토대를 제공하였다. 오늘 한국의 정치가 역사가들은 이승만을 권력에 충실한 시류에 밝은 친미주의자로 규정할 뿐이지만, 다들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읽기 바란다. 역사학계는 나라가 망한 지 114년이 지나도 대한제국이 이완용 등 5명의 매국노 때문에 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임금이 비겁하고 자유와 독립의 정신을 알지 못하여 망한 것이다. 나라는 경제적으로 발전했으나 역사를 제대로 모르니 동원의 시대가 지나고 80년대 자율의 시대가 오자 샤머니즘, 물질주의, 종족주의가 발흥하였다. 반일 종족주의는 60년대부터 서서히 성숙하다가 80년대 폭발하였고 지난 30년간 한국의 정신문화는 점점 낮은 수준으로 추락하였다. 반일 종족주의는 이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 수 있는데 이를 그치기에 이나라의 정치와 지성은 너무 무기력하다. 망국의 예언은 망국의 현실이 한참 진행되고 나서야 들리고 그래서 이 책은 석양에 우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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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책의 광고처럼 저자들은 한국인들이 일본에 품는 적개감은 “아무런 사실적 근거 없이 거짓말로 쌓아 올린 샤머니즘적 세계관, 친일은 악(惡)이고 반일은 선(善)이며 이웃 나라 중 일본만 악의 종족으로 감각하는 종족주의”에 기반한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들은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이 학교 교과과정이나 여러 영화, 각종 역사서적에서 접한 대로 ‘일본이 식민 지배 35년간 한국인을 억압, 착취, 수탈, 학대했으며, 그럼에도 그 후 일본은 그를 반성, 사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이 통념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지난 포스팅에도 인용했지만, 뉴욕대학교의 도덕 심리학자 조나단 하이트는 그의 명저 <바른마음>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과 똑같은 도덕적 서사를 가진 사람들과 뭉쳐 정치적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며 어느 한 가지 서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뒤로는 다른 대안적인 도덕 세계는 더 이상 보지 못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저자들과 지지자들이 공유하는 서사는 “조선은 못나서 망해도 싼 나라였고, 일제는 조선반도에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고 기초자산을 설치했으며, 스스로 독립도 찾아 먹지 못한 이 나라는 일제의 제도적 기반과 자산 위에 자유주의자 이승만이 공산주의자들과 피 흘려 싸워 세운 것이고, 이승만의 건국과 미국의 협력과 지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후 박정희의 산업화 및 이에 따른 경제적 성과가 이 나라의 뼈대인 것이다”일 것입니다. 데칼코마니인 희생자 민족주의자들의 서사는 아마도 “무르익어 가는 자생적 근대화를 앞두고 조선을 일제가 강제 병합해 민족의 자원과 정신을 철저히 수탈 유린했고, 해방 후 미제국주의가 한반도를 냉전의 전초기지 삼기 위해 통일 국가를 방해하고 친미주의자 이승만을 내세워 반쪽 국가를 만들었으며, 친일, 친미 세력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독재에 부역했고, 지금은 이나라의 자칭 보수로 군림하며 재벌들과 함께 민중을 수탈하고 있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글쎄요, 저는 이 두 서사 다 썩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러한 극단적 거대서사는 지난 백년을 치열하게 이 땅과 전지구에서 투쟁해 온 구체적인 한국인들의 삶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시각이라고 봅니다.

5. 다시 이영훈 교수님의 책으로 돌아가보죠. 이 책의 1부는 이영훈 선생과 낙성대연구소가 전가의 보도로 삼는 많은 문헌자료(archival data)가 근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일제가 우리를 수탈한 게 아니라, 근대적 제도가 이식되었고 정상적이고 자발적인 경제활동이 식민지 공간에서 발생했다 정도로 요약되겠습니다. 3부의 위안부 관련 주장도 조선시대부터 일제,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거쳐 지금까지 불행한 성매매는 수익이 높은 비지니스라는 만연한 현상이며 일본군이 집에서 소녀를 끌어가 위안소에 보냈다는 통념은 판타지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각종 통계와 일화적 증거(anecdotal evidence)를 들이대면서 말이죠. 2부는 이영훈 교수의 정치적 주장과 개인적 소견이 뒤죽 박죽 엉긴 이상한 부분이니 논하기 어렵습니다. 자 그럼 이러한 자료와 통계들이 이영훈 교수의 거대서사를 뒷받침 할 수 있을까요? 미안한 얘기지만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6. 저도 사회과학자이고, 특히 숫자로 표현되는 회계 재무분야의 자료를 자본시장 데이터와 연관시켜 실증 논문을 쓰는 입장에서 자료의 맥락과 진실성, 분석방법의 엄밀함, 통계적 결과의 바른 해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항상 정부관료들에게 증거 기반의 정책을 세우라고 노래를 부르는 실증 만능주의자이기도 합니다. 법학전문대학원이나 문과대학의 교수님들과 한잔 하면서 ‘맨날 자료도 없이 구라나 친다’고 교수님들 놀리기 바쁘고요. 그런데 실증주의자로서 항상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하나는 실증분석의 한계, 특히 자료의 맥락과 편향성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증연구의 설계와 통계해석에 있어 인과관계와 관련한 발언은 극도로 조심스럽고 제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영훈 교수의 이번 책을 읽고 불편함을 넘어 느끼는 이 짜증스러운 기분은 이영훈 교수님의 평소 실증만능주의적 태도에 비추어 교수님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이러 저러한 통계자료라는 것이 선택적 편의(selection bias)가 너무 크고 이 책의 (정치적) 주장과 (역사적) 서사를 뒷받침하기에는 인과관계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장치가 너무 약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료를 특정 결론을 위해 해석하는 것이야 본인 마음이지만, 진짜 그런지 아닌지는 이 책 정도의 방법론으로는 누구도 알 수 없고 대체가설(alternative hypothesis)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게 학술 논문이었다면 리뷰어에 보낼 필요도 없는 데스크 리젝션 감이라고 생각합니다.

7. 여기쯤에서 올해 서강대 임지현 교수님이 출간하신 <기억전쟁>이라는 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울 힐베르크는 8킬로미터 분량의 독일 및 점령지역 문헌을 읽고 종합연구서를 펴낸 유대인 홀로코스트 실증 연구의 압도적 대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말년에 <나는 거기 없었다 I was not there>이라는 에세이를 썼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대가라고 칭송하지만 자신은 문헌으로만 아우슈비츠를 이해했을 뿐 홀로코스트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으니 자신의 연구에 한계가 분명하다는 거장다운 자성이지요. “특정한 역사 사건에 관한 공식 문서 기록과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한 증인들의 목소리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역사적 진정성을 갖느냐?”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임지현 교수님은 실증주의도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하십니다. 몇 문단을 옮겨 적어 봅니다.

//특히 기억 전쟁에서 실증주의는 ‘아래로부터의 기억이란 과장되고 부정확하며, 정치적으로 왜곡되었거나 심지어는 조작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자주 소환되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힘있는 가해자가 관련 문서와 역사적 서사를 독점한 상황에서 힘 없는 희생자들이 가진 것은 대개 경험과 목소리, 즉 기억과 증언뿐이다. 그런데 증언은 불완전하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부정확하다. 그러므로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자들의 풀뿌리 기억은 실증주의라는 전선에서는 문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다. 실증주의로 무장한 부정론자들이 증인을 취조하듯이 압박하고 증언과 증언 사이의 모순을 끄집어 내 증언의 역사적 가치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가 잦은 것도 이 때문이다. ‘거짓말’, ‘혐오스러운 조작’, ‘진실의 왜곡’, ‘사실의 날조’, ‘전적으로 날조에 의한 싸구려 픽션’, ‘각주가 있는 소설’, ‘수백가지 거짓말’등과 같은 언어폭력이 역사적 비극의 생존자-증인들에게 가해지고, 이는 ‘실증’이란 이름으로 정당화 된다 (임지현, 기억전쟁, 35쪽).//

//부정론에 실증주의를 가장 먼저 활용한 것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었다.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실행했다면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이 담긴 문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런 문서는 한 통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식이다. 명령서가 하늘에서 툭 떨어지지 않는 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에게는 모든 생존자의 증언이 꾸며낸 이야기가 된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논리도 유사하다. 국가나 군이 ‘위안부’ 제도에 관여했다고 증명할 문서 기록이 없으므로 일본군 ‘위안부’는 사실이 아니라며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두 위증으로 몰고 간다. 특히 ‘위안부’ 부정론자 중 한 사람인 후지오카 노부카쓰는 “일본군이 강제로 조선 여성을 연행했다면, 명령서가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서는 한 통도 발견되지 않았다”라며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논의를 느닷없이 강제 연행으로 제한해 버리고는, 강제 연행을 지시한 군의 공식 문서가 없으니 피해자들의 증언은 거짓이라고 몰아 붙인다.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성폭력’이라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전략으로 실증주의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임지현, 기억전쟁, 36쪽).//

이영훈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불편함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5.18의 군부책임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비슷하죠, 발포 명령서 찾아내라는 겁니다. 이영훈 교수님의 책에 제시된 각종 통계와 자료 그리고 사실이라는 것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의 연장선상에서 반일 종족주의 망국론으로 이어지기에는 논리와 인과관계의 메커니즘이 매우 부실합니다. 그보다는, 이 책의 사실과 증거라는 것이 기존 한국 역사교과서가 주장하는 일제수탈설을 포함한 일본 강점의 부정적 효과를 부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일본인들이 난징대학살의 숫자가 과장되었다거나 일제의 베트남 점령시 대기근으로 인한 아사자 숫자도 과장되었다는 식으로 기억에 대해 ‘사실’의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이 연상되는 이유지요.

8.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록 중 날조된 것들은 수미일관한 반면, 진짜 피해자들의 기록은 과장되거나 사실과 모순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으면 그걸 과장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이영훈 교수는 조정래의 아리랑에 묘사된 일제의 만행이 엉터리 소설 수준이라고 비판하지만, 피해자들의 기억이 과장되어 소설에 담겼더라도 그것이 당대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총생산 수치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조선의 패망과 해방 대한민국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 경제사만큼이나 최정운 교수님의 <한국인의 탄생, 2013>과 <한국인의 발견, 2016>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 두 권은 한국과 한국인의 정체성과 사상의 흐름을 허균의 <홍길동전>부터 공지영의 <고등어>까지 소설속의 인물들을 분석하며 읽어내고 있습니다. 방법론적으로 매우 큰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최정운 교수님은 “방법론의 아름다움으로 학문 연구의 결과를 예단하는 것은 실증주의 사회과학, 특히 현재 미국 학계의 지배적인 흐름이 낳은 심각한 병폐다. …. 인간의 앎, 지식에 대한 판단이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정당화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 주장의 내용(과정이 지식의 정당성을 결정한다)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궤변이라 할 수 밖에 없다.”라고 지적하셨고,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영훈 교수님께서 실증 또 실증을 주장하시지만 책에 제시된 1부와 3부의 실증이라는 것이 어떻게 ‘반일 종족주의가 지난 30년간 강화되어 왔고 이 때문에 망국을 예감한다’로 이어지는 지 저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9. 이영훈 교수님 결론처럼 우리가 종족 특성인 샤머니즘에 기반한 반일종족주의에 빠져 있고, 소녀상은 하나의 토템이라고 주장한다면, 일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조슈번 무사 무리의 후예가 도련님 정치로 일본 정치권의 중심이 되고, 핵폭탄 맞고 패망후 평화국가가 되기로 맹세한 것을 무시하고, 아직도 정한론 원조 요시다 쇼인과 군국주의자들을 모셔 놓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21세기에도 국가에 떠다니는 공기의 중요성이나 떠드는 사람들, 저쪽이 오히려 더 종교적이고 일본종족주의적 아닐까요?

우리나라도 그렇고 일본도 진짜 문제는 ‘반지성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아베 정권을 전후 일본의 역대 정부 중 가장 무능하고 윤리적, 지성적으로 타락한 정부로 평가하는 우치다 다쓰루(内田樹) 교수님은 <반지성주의를 말하다, 우리는 왜 퇴행하고 있는가, 2016>에서 일본 사회의 우경화 현상을 반지성주의로 설명합니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일본 지식인들이 일본을 책임 부인(否認) 선진국으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 통렬합니다. 히라카와 가쓰미는 5장에서 독일과 일본이 다른 방식으로 전후 국민의 죄를 면해 준 것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독일은 국민 전체가 전쟁의 책임을 나치에 돌리고 면죄부를 받는다는 허구를 지어내 과거를 극복한 반면, 일본은 전사한 모든 자는 영웅이며 피해자라는 신앙을 만들고 야스쿠니 신사에서 영령을 참배하며 피해자로 둔갑했다는 것이지요. 이런 결과 일본인은 전쟁 전의 상황을 잘 모르는 데다가, 태평양 전쟁은 어리석은 전쟁이라는 학교 교육은 열심히 받지만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로서 피해자들에게 책임지고 무한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는 희박하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나름 열심히 사죄를 해 왔지만 인정받지도 못하고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이 짜증을 폭발시킨 것이 이번 사태라고 하던데, 만약 그렇다면 이해는 할 수 있어도 일본이라는 국가의 교육과 지성 수준을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독일 6대 대통령이었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는 “문제는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과거를 바꾸거나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일로 돌려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눈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도 깜깜해집니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마음에 새기려고 하지 않는 자는 또다시 그런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메르켈 총리가 네탄야후 총리에게 우리가 지금까지 70년 이상 어마무시한 반성과 사과를 했으니 양국관계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이제 홀로코스트 문제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더 이상 논의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 따위는 농담으로도 상상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독일이라는 나라가 없어질 때까지 독일의 처절한 반성은 계속될 것인데, 일본인들은 속으로 독일 사람들은 바보 아냐,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10. 우리나라의 반지성주의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영훈 교수님의 저작이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학계가 일본이 우리를 철저히 수탈했으니 우리는 피해자라는 답정너 스타일의 동어반복 논문만 양산하고 시대로부터 배워야 할 성찰을 교과서에 담아 놓지 못해 특이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 이교수님의 책이라고 이해한다면 이제 우리도 피해자의식 민족주의와 결별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최정운 교수님은 2016년 저작의 서문에서 우리나라의 지성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지성계는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인 학문은 이 ‘투쟁의 시대’에 새롭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는 새로운 흐름의 반지성주의가 휩쓸고 있다. 좌우 이념 대결이 냉전이 지난 후 너무 늦게 다시 벌어졌고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투쟁에 말려들어 왔다. 이들이 싸워온 모습은 학문적 수준의 논쟁이 결코 아니었으며 정치적인 적과의 투쟁도 아닌 흡사 악귀들과의 원한 맺힌 멸절의 싸움이었다.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온갖 중상과 인격 훼손을 서슴지 않았으며 결국은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파괴하고,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싸움거리가 되는 역사의 대목들은 학생들의 교과서에서 삭제되고 삭제를 면한들 우리의 이념 투쟁의 장인 근현대사는 두 나라 이야기가 되어 갔고, 그렇게 양 진영의 싸움과 협상에 따라 우리의 역사책은 ‘별떡 달떡’으로 뜯어 먹혀 얄팍해지고 결국에는 사료도 없고 밑도 끝도 없는 고대사만 덜렁 남아 우리의 신화마저 모진 학대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마치 멀쩡한 어른이 주민등록증에 돌사진, ‘인증샷’을 붙이고 다니며 자신이 ‘수컷’임을 자랑하는 웃지 못할 지경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스스로 파괴하는 ‘북조선’ 꼴이 되어가고 있다. 자기 역사를 파괴하는 민족의 앞날은 너무나 확연하다 (한국인의 발견, 12쪽).//

11. 이영훈 교수님은 우리나라가 당장이라도 망할 것처럼 걱정을 하시지만, 저는 그것이 기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20대는 식민지, 해방, 한국전쟁을 경험한 태극기 세대도 아니고 산업화 시대의 권위주의에 반발해 마르크스와 민족주의로 무장하고 투쟁을 외치던 기성 세대도 아닙니다. 세계화 시대에 선진국 국민으로 태어나 글로벌 스탠다드를 익히며 자란 세대입니다. 이들을 자신들 서사의 볼모로 잡기 위해 문화전쟁을 벌이며 한국 역사를 편향적으로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미래세대에 대한 큰 죄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세대 만큼은 한국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젊은이들은 조선은 왜 망했느냐, 왜 우리는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느냐, 왜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할 수 있었나를 사실 그대로 바라보고 성찰하는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승만도 김구도 이해하고, 박정희도 김대중도 이해하는 세대,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장점을 계승하고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우리가 감추고 피하고 싶었던 크고 작은 역사적 실수도 겸허하게 인정하고 반성하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기 바랍니다. 그래야 더 크고 진지한 문제인 ‘이제 우리는 어떻게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 지금 전세계는 이념의 양극화와 극한 대립으로 인기영합주의적 지도자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커다란 질서가 쇠퇴하는 징후까지 보인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해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작년 <정체성 Identity>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이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서구에서 과거의 좌우정치는 좌파는 분배와 복지, 노동권을 중시하고 우파는 작은 정부, 행정의 효율성, 민간경제 우선이라는 경제적 이슈를 중심으로 대립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좌파가 경제적 평등보다는 소수집단, 여성, 인종, 종교와 관련된 소수자 보호문제에 집중하는 사이에 우파도 세계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무시되었다고 생각하는 주류 중산층의 표심을 자극해 파퓰리즘이 심화되고 있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이 점에서 저는 한국의 좌파도 최근 땀흘려 일하는 보통사람들의 생활수준에 신경 쓰기 보다는 서구의 유행을 따라 소수자, 환경 보호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정체성 정치에 지나치게 재미를 붙이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또한 정치세력들이 극단적인 상징전쟁에 너무 깊숙히 개입해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있지 않나 하는 걱정도 됩니다. 후쿠야마가 제시하는 해결책처럼 새로운 정치세력은 과거의 혈통, 이력같은 작은 범위의 정체성 정치에서 벗어나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사회를 통합시키는 큰 정체성 프로그램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일제와 해방, 전쟁과 산업화, 민주화와 세계화를 온 몸으로 열심히 살아 세계적인 수준의 경제와 사회를 일구었습니다. 그러나 먹고 살만해진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누구이고 어떤 가치를 가지고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아니 그전에 우리는 스스로 실패한 근대화라는 과제를 지금은 오롯이 성취한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혹 이영훈 교수님의 책을 읽게 될 젊은이들은 제가 소개해 드린 책들도 같이 독서목록에 넣어보면 어떨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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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수의 비판적인 글, 오마이뉴스 2019년 8월 14일자/
* 2019년 8월 19일 업데이트


'친일파' 비판이 억울? 자업자득이다
[<반일 종족주의>를 비판한다 ] 이영훈, 이우연, 김낙년의 주장에 대하여
 
이 글을 쓸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 저자 이영훈 교수와 필자는 안병직 선생의 지도 아래 동문수학한 사이인데다, 책 출간 후 이 교수가 이런저런 언행으로 욕을 먹고 곤경에 빠져 있어서다.
 
필자는 201510월 국정교과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오마이뉴스><'국정화 진원' 이영훈 선배! 국민더러 아편 맞으란 소리오>라는 칼럼을 기고해 이영훈 교수와 안병직 선생을 맹렬히 비판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 또다시 비판글을 쓰기에는 마음의 부담이 컸다.
 
다시 이영훈 선배를 비판하는 이유
 
하지만 <반일 종족주의>를 읽어보니 여기저기 억측과 무리한 논리 전개가 들어 있어서 그냥 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이런 책이 주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고 하니, 지금 적절한 학문적 비판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경우 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때마침 이영훈 교수가 SBS TV와 지난 12일 가진 인터뷰에서 책 출간 후 학자들에게서 단 한 편의 서평도 나오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필자는 안심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반일 종족주의'라는 자극적인 신조어 속에 담긴 저자들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두 번째 글 말미에서 다루기로 하고, 먼저 책의 주요 내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책에서 다루는 주제가 워낙 다방면에 걸쳐 있는 만큼 글 한 편으로 충분히 검토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글을 두 번으로 나누어 게재하기로 했다.
 
첫 번째 글은 경제문제에, 두 번째 글은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단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등에 대해서는 필자가 직접 연구한 적이 없어서 연구 방법과 논리 전개를 중심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밝혀 둔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은 일제 강점기에 토지 수탈, 식량 수탈,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인의 토지를 대량으로 빼앗은 사실은 없다(이영훈), 일제는 쌀을 돈 주고 사 갔지 수탈하지 않았다(김낙년), 19449월 이후의 단기간을 제외하고는 조선인 노동자를 강제동원하지도 않았고 노무자로 동원된 조선인이 강제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지도 않았다(이우연)는 것이다.
 
필자는 대학원에서 일제 강점기 농업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토지문제와 쌀 문제에 관해 이들의 주장을 판단할 수 있는 나름의 정보를 갖고 있다. 일제가 총칼로 조선 농민들의 토지와 쌀을 '약탈'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에 수탈이 없었다는 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은 수탈이 아닌가?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으로 구래(舊來)의 토지 관행을 모두 철폐하고 일물일권적 토지소유권을 법인하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일본인들이 안심하고 토지를 취득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을 마련했다. 이는 식민지 권력이 지세를 징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했다.
 
토지조사사업 이후 일본인들은 전북, 전남, 경남, 황해 등의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농지를 매집하여 지주경영을 확대했다. 그 이면에서 조선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일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예컨대 일제는 쌀 증산을 위해 수리조합이란 걸 활용했는데, 여기에 일본인들이 적극 참여하여 농지를 확대하고 개선했다. 일본인들은 강 주변 저습지나 상습 침수지를 대량 매입한 다음 주변 농지까지 편입시켜 수리조합을 설치하고는 수리시설 개선을 꾀했다. 이때 수리조합에 강제편입된 조선인 농민 중에는 과중한 수리조합비 부담으로 농지를 상실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반면 일본인들은 짧은 기간에 광대한 옥토를 가진 대지주로 변신했다. 1920년대에 일제가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 쌀을 대량 증산하여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할 때 그에 적극 부응한 것은 주로 일본인 대지주들이었다. 비슷한 행태를 보인 조선인 지주들도 있었지만 소수였다.
 
일본인 대지주들은 토지 매집으로 대규모 농장을 조성하고는 조선인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었는데, 소작료는 수확의 60퍼센트에 달하는 고율이었다. 일본인 대지주들은 소작료로 걷어 들인 조선 쌀을 군산, 목포 등지의 이출항을 통해 일본으로 이출했다.(일제는 일본과 조선의 거래를 다른 외국과의 거래와 구별하기 위해 수출과 수입 대신 이출과 이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소작농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소작료를 수탈하기 위해 종자 선택과 비료 사용의 강제, 경작 과정 전반에 대한 감독, 소작지·관개시설 관리 강제, 수확물 품질과 처분에 관한 규제, 자금 전대(前貸)를 통한 지배, 연대 소작인 제도 적용 등 물샐 틈 없는 지배체계를 구축했다. 그 과정에서 대지주는 자꾸 더 성장하고 소작농들은 빈곤에 빠졌다.
 
일제는 조선 농민에게 식민지 농업정책을 직접 강제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지주층을 매개로 하는 간접적인 방식을 택했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강제보다는 지주층을 매개로 한 간접적인 지배 방식이 쌀의 대량 증산에 효과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량 이출에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대지주의 발달과 농민 몰락, 그리고 대지주를 매개로 한 쌀 이출을 두고 '토지 수탈', '쌀 수탈'이라는 말 외에 뭐라 표현해야 할까?
 
게다가 일제 말기에 공출제도가 시행되면서부터는 일본 관헌이 가택을 수색하고 농민이 먹으려고 남겨둔 쌀까지 빼앗는 실질적인 쌀 수탈이 행해지기도 했다. 일제가 조선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하지 않았다고 해서 토지조사사업이 정당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또 쌀을 대가 없이 빼앗지 않았다고 해서 산미증식계획이 조선 농민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했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일제는 단지 약탈로 식민지를 지배하는 유치한 수준의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었을 뿐이다. 사람 몸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약탈은 피부에 상처를 내지만, 제도를 이용한 지배는 뼈를 손상하며 그만큼 영향도 오래갈 수밖에 없다.(오늘날 한국이 부동산 문제로 시달리게 된 역사적 기원은 바로 토지조사사업이다)
 
왜 스스로 비판하는 부조적(浮彫的) 방법을 사용하는가?
 
사실 현재 한국에 이영훈 교수 등이 비판하는 '약탈설'을 믿는 학자는 많지 않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이영훈 교수는 약탈설을 펼치는 대표적 인물로 소설가 조정래씨와 원로 사회학자 신용하 교수를 꼽는다. 조정래 작가가 토지조사사업에 반발하는 농민을 경찰이 즉결 총살하는 내용을 소설로 쓰고, 신용하 교수가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이란 말을 지어내서 토지조사사업의 폭력성을 주장하는 책을 저술한 것이 한국인들의 역사 인식을 좌우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필자가 위에서 소개한 내용으로 일제 수탈의 메커니즘을 분석한 학자도 많고 관련 연구 성과도 방대하게 축적되어 있음에도, 이영훈 교수는 그에 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조정래 작가와 신용하 교수가 학계를 대표한다고 믿는 것일까?
 
이영훈 교수는 부조적 방법을 썼다는 이유로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하는데, 이 교수의 방법이야말로 부조적이다. 부조적 방법이란 자기 가설에 유리한 사례만 취해서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을 가리키는데, 이 방법은 <반일 종족주의> 전체에서 활용되고 있다. 자본주의 맹아론과의 차이점은 맹아론자들이 자본주의 맹아의 증거를 찾을 때 이 방법을 썼다면, 이 교수 등은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을 때뿐만 아니라 비판 대상을 선택할 때에도 이 방법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이영훈 교수를 중심으로 한 뉴라이트 학자들은 주장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통계와 사료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평가를 받아 왔는데, <반일 종족주의>에서는 그들의 사료 활용 방식에 큰 문제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10만 명이 징용됐는데 강제동원이 허구라고?

강제동원 파트 집필을 담당한 이우연 박사는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가 관련 없는 사진으로 일제 강제동원의 참상을 알린 사실을 발견하고는 의기양양해진 모양이다. 마치 서 교수가 실수한 것이 강제동원이 없었다는 증거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우연 박사 스스로 인정하는 대로, 1944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8개월 동안 무려 10만 명 가까운 조선인 노동자가 징용, 즉 강제동원을 당했다. 그 전에 행해진 관 알선에서도 사실상의 강제동원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우연 박사에게는 10만 명이 별 것 아닌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강제동원이 허구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렇게 이 박사는 '강제'동원을 부정한 다음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과 임금이 일본인들에 비해 나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탄광에서 갱외보다 갱내, 갱내에서도 가장 어렵고 위험한 일에 조선인이 배치되었다는 학설을 채탄 기술의 변화를 들어서 반박한 후에, 에무카에(江迎)탄광의 <임금대장>을 소개하며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임금 차별은 없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현재 필자는 사료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우연 박사 글 자체에서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진술을 발견했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이 박사는 <반일 종족주의> 82~84쪽에서 조선인이 작업 배치에서 불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는 바로 뒤 85~86쪽에서는 위험한 작업을 맡은 조선인의 비율이 일본인보다 2배나 높았고 그 결과 사망률도 높았다고 말한다. 이건 자가당착 아닌가?
 
이우연 박사는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이 대단히 자유로웠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근거가 어처구니없다. 밤새워 화투 치고, 과음하고, 특별위안소에서 월급을 탕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노동자가 고된 노동에 찌들어서 범한 일탈로 봐야지 어떻게 그것을 자유로 이해할 수 있는가? 조선인 노동자를 사용한 탄광업주로서도 그런 '자유'쯤은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탄광에서 나온 사료 하나로 민족 간에 임금 차별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또 어떤가? 설사 그 사료가 일반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조선인이 일본인에 비해 위험한 작업을 맡았다면 양자 간에 임금이 비슷해지는 것은 당연하니 말이다. 그걸 가지고 조총련계 학자 박경식의 '민족적 임금차별론'을 격파한 듯 호들갑을 떠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김낙년 교수가 안타깝다

이영훈, 김낙년, 이우연 세 사람 가운데 김낙년 교수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지주제의 문제를 지적하고 일제 강점기 극심한 소득 불평등의 증거를 제시하니 말이다. 그는 해방 전 소득 상위 1퍼센트가 차지하는 소득 비중이 20퍼센트 전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실로 놀라운 사실이다. 불평등 때문에 아우성이 나오는 요즈음 이 비율이 12퍼센트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제 강점기의 소득 불평등은 극심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 이렇게 불평등이 심해진 원인을 지주와 소작인 간 불평등에서 찾고 있기도 해서 제법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김 교수는 이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제정책과 연결하지 않고 일제 강점기의 조선 사회가 전통 사회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으로 해석한다. 이는 그 역시 뉴라이트 역사 인식에 갇혀 있음을 알려준다. 소득 불평등 분석에서 세계적 수준의 연구 성과를 내놓고 있는 김낙년 교수가 어째서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역사 인식에 머물러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왜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에 눈을 감는가?
 
<반일 종족주의>를 읽으면서 필자는, 이영훈 교수 등이 어째서 한국 사람의 오류에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부라리는 반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수탈과 악행에는 한없이 관대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성한 식민지 사관의 뿌리가 깊고 그 폐해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스탠스를 잡았을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옛날 그들이 제국주의와 강자의 지배와 수탈을 혐오하고 피지배 민중의 처지와 이해를 옹호하는 이론적 입장에서 출발했음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영훈 교수 등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약탈설을 극복하고자 했다면,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과 일본 제국주의의 제도적 폭력성을 분명히 강조하면서 했어야 한다. 그걸 누락한 채 제국주의 통치의 합리성만을 과도하게 부각했기 때문에 <반일 종족주의>가 친일적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된 것이고, 지금 한국 대중으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이영훈 교수 등은 억울해하지 마시라. 자업자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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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 "이영훈, 끌려간 위안부 없다고? 내가 증인이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 2019-08-19 09:20/ 

*2019년 8월 19일 업데이트
김현정> 제가 그 책 내용 중에 몇 가지 부분만 직접 확인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오늘 연락을 드렸어요. 조금 들으시기 불편하실 수도 있지만 답변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보면 위안부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을 하고 있어요.위안부가 강제로 끌려갔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돈 벌려고 자기 스스로 간 사람들이다. 전선으로 끌려간 위안부는 단 1명도 없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용수> 보통 대학도 아니고 서울대학교 교수예요? 

김현정> 서울대 교수를 지낸 분입니다. 전 교수죠. 

이용수> 이 친일파가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고 친일파 행세를 그대로 지금 아직까지도 나타내고 있는데 너 조상을 팔아먹고 있어. 네가 무슨 교수라고 교수를 지냈어. 네가 교수면서 공부를 가르친 학생들이 참 불쌍하구나. 너의 조상도 끌려갔어. 네가 그럼으로써 일본이 너를 두둔할 줄 아나? 지금 하늘나라에 있는 할머니들도 다 너를 인간이라고 보지 않고 미친 인간이라고 본다. 지금이라도 책 전부 다 환수하고 전부 다 걷어라.
 
김현정> 거둬들여라.
 
이용수> 그리고 만천하에다가 사죄, 무릎 꿇고 사죄하지 않으면 너 그냥 두지 않을 거다. 내가 경고한다. 빨리 책 다 걷어라. 거두고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지 않으면 너 그냥 둘 수 없다.
 
김현정> 할머님. 이러다가 혈압 오르실까 봐 건강에 안 좋으실까 봐 제가 막 염려가 되는데.
 
이용수> 괜찮아요.
 
김현정> 일단 지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마음속 말을 그냥 서술하신 겁니다. 지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구술하신 겁니다. 여러분, 그래서 좀 반말이 섞여 있고 조금 거친 표현이 있어도 청취자들께서 양해를 해 주시기를 제가 부탁을 드리고요.
 
그런데 이영훈 전 교수는 이렇게 자신 있게 서술을 합니다. 이영훈 전 교수뿐만 아니라 몇몇 저자가 같이 낸 책인데 책에 보면 위안부 문제가 조작이 됐다. 거짓 기억을 만들어냈다. 즉 없는 얘기를 지어냈다.’ 이런 거예요. 그러면서 80년대 들어서 그쪽에 가셨던 분들이 돌아가시기 시작하고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부터 이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만 봐도 그렇다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정말로 전선에 끌려간 분이 한 명도 없습니까, 할머님?
 
이용수> 지가 지 눈으로 봤을까? 지 눈으로 보면서 끌려가는 데 가봤는가? 내가 끌려가서 대만, 신주 가미카제 끌려가서 당한 나로서 눈으로 보이나? 똑똑히 봐라. 역사의 산증인 이용수가 지금 너한테 이 얘기를 하고 있다. 카미가제 부대도 가서 죽지 않고 살아온 피해자가 있잖아. 이렇게 보이잖아.
 
김현정> 알겠습니다. 할머님, 그러니까 이영훈 전 교수를 비롯해서 저자 몇 명이 공동으로 낸 책에 제가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을 소개해 드린 건데 할머님은 내가 증인이다. 내가 산증인이고 본 사람이, 끌려간 사람이 있는데 당신 눈으로 봤느냐?’라고 묻고 계세요. 책을 당장 다 회수하라는 요청을 하셨는데 이게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할머니의 절절한 분노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오늘 아침에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이용수> .
 
김현정> 건강하십시오.
 
이용수> , 고맙습니다.

출처 http://bitly.kr/Qxuz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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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2018년 8월 18일 업데이트


차마 끝까지 읽기가 괴로워 조금씩 조금씩 읽는데 읽을수록 정말 너무 슬프다. 그 영민하고 천재적인 학자가 어쩌다 이리 되었나. 호남 지역주의를 샤머니즘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반일종족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드는 곳에 이르러서는 차마.. 사회과학적 분석이 필요한 곳에 어떻게 그런 ‘썰’을 푸는지‬..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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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페이스북에서/  
*2019년 8월 19일 업데이트


항상 느끼는 점이지만 한국 사람들 정말 책 안 읽는다. 유명하다고 하면 사놓기만 하지, 읽지도 않아. 그럴 거면 나한테나 좀 책을 사줘요. 내가 요약도 다 해주고 설명도 다 해주고 하는데.. 읽지도 않을 책 뭐 하러 그렇게 사서 모으나. <해방전후사의 인식>100만 권이나 팔렸다는데 지금 나오는 얘기들 보면 이 시리즈가 왜 나왔는지, 어떤 내용인지,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 등에 대해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다. 헛공부한 사람들이 많다는 건데.. 참 이런 걸 보면.. 나도 마케팅 잘해서 책 좀 많이 팔았으면 좋겠다. 부자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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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박정자 선생의 글은 이영훈 선생의 <대한민국 이야기>에 나오는 글을 요약해놓은 것인데 예전부터 나는 이영훈의 이런 요약에 , 아니 사실은 박정자와 같이 그 시대를 경험했을 수많은 이들이 이영훈에게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이영훈은 박정자의 요약에서 알 수 있듯이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이 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 입각한 마오주의적 혁명전략에 입각해 한국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북조선을 높게 평가하는 책이라 주장하였는데 정말 동의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왜냐하면 이 해석에는 '인식' 시리즈가 나올 수 있었던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제조건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현대 한국자본주의의 성격"에 관한 인식이 그것이다.
 
이영훈은 이 시리즈가 단순히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훼손하고 북조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책이라고만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왜 '인식'이 나오게 되었는지, 어떤 입장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거기에 더해 이영훈은 박현채를 마치 마오주의 이론가로 묘사하는데 솔직히 학자로서 해서는 안될 언급이라 생각한다. 한때 모셨던 사람을 이렇게 왜곡해도 될까. 설마 이영훈이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와 식민지반봉건사회적 사회성격 간의 개념적 구별도 못하는 저질 학자이겠나. 사회구성체와 사회성격 간의 차이를 갖고 장난질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박현채는 사회구성체로서의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긍정한 적이 없으며 그 유명한 80년대의 사회구성체논쟁 자체가 박현채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만 지적하자.
 
배경지식을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간략하게나마 설명하자면,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물론 그것이 지배적인 관계이기에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라 하지만 그 내부에는 지주제, 농민경영 등과 같은 다양한 경제제도들이 서로 얽혀 있기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여러 생산관계들 간의 얽힘과 모순관계에서 그 사회의 특질인 "사회성격"이 도출된다. 기본적인 모순관계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이기에 자본 - 노동 간의 갈등이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서는 다양한 계급, 계층들 간의 여러 상호작용이 존재하기에 정치적 가변성이 중요시된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계급과 농민계급과의 동맹, 중소부르주아지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원 등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박현채의 유명한 민족경제론과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서는 식민지성=매판자본이 주요 타격대상이 되기에 민족주의를 통해 중소부르주아지 등의 폭넓은 사회계급들 간의 협력과 연대가 가능해진다. 여기서 사회성격을 식민지반봉건적이라 한 것은 아주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식민지 지주제의 존재를 들어 농민과의 연대를 강조한 것이다.
 
돌아와서 '인식'은 기본적으로 현대 한국 사회와 자본주의를 대외의존성과 종속성이 강하며 국민경제권의 재생산 기반이 국내 자본이 아니라 국제 자본에, 특히나 미국과 일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인식한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이 형서된 기점으로 해방전후사를 새롭게 독해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식민지기와 해방 이후의 미군정기는 어떻게 파악되는가.
 
식민지기 한국 사회의 사회구성체는 분명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였으나 식민지배의 협력자로서의 반봉건적 지주제가 강고하게 존속했다는 사실로 인해 위에서 지적했듯이 식민지반봉건적인 사회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변혁의 목표는 반봉건적 지주제의 해체를 통한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에 있다. 이와 동시에 식민지 자본주의의 유산인 귀속재산을 노동자의 자주관리를 통해 앞으로 탄생할 민족경제권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식민지 공업화가 남긴 공업 유산을 노동자가 관리하고, 식민지 지주제가 남긴 유산을 농민적 토지소유를 통해 해소함으로써 한반도에 민중을 위한 민족경제권을 건설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라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할 주체로 농민(식민지반봉건적 사회성격에서 파생된)와 노동자가 지목되고 있다.
 
그런데 미군정기는 이런 시대적 과제의 온전한 실현을 통한 민족경제권의 건설과 민족국가의 형성보다 남북의 분단 속에서 한반도의 남쪽을 미국 중심의 세계자본주의적 질서에 순응하는 반공국가로 재편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시기가 된다. 하나의 통일된 민족경제권과 민족국가라는 '완성된 근대'가 아니라 "미완의 근대"로 재편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 연장에서 한국의 자본주의는 미국 - 일본 자본주의에 종속적인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으며,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저임금 - 저곡가 착취가 이뤄지는 것이 된다. '인식'의 논자마다 이것을 어떻게 이론화 할 것인가에는 차이가 큰 것 같지만 대략적인 이론적 흐름은 '주변부 자본주의론''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판단될 수 있겠다. 둘다 선진자본주의에 대한 종속성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리하자면 '인식'의 저자들은 기본적으로 당대의 한국사회를 선진자본주의에 대한 종속성이 강한 사회라 보고 있으며, 그러한 자본주의에의 종속이 노동자 농민으로 대표되는 민중에 대한 수탈과 착취의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파악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종속적 자본주의의 형성과 재생산은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탄압을 가능하게 하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의 존속과 그 존속을 정당화하는 분단체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민족주의에 입각해 자립적인 경제권을 달성하고 분단체제를 해체함으로써 민족국가를 형성해 "완전한 근대"를 향유하는 것이야말로 당면의 과제가 된다. 북조선조차도 여기서는 사실 통합의 대상에 지나지 않지, 북조선의 역사적 정당성을 강조한다는 해석에 나는 크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기본적으로 '인식'은 자립적인 경제권과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하나의 프로젝트라는 성격이 강하다.
 
모택동주의에 입각해 '인식'이 혁명을 지향하고 있다는 식의 논설은 사실 이미 2권에서부터 파탄나기 시작하는데, 2권에 실린 장상환의 논문은 농지개혁에 대해 상당히 높게 평가하며 그것에 의해 한국사회는 식민지반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했다고까지 평가한다. 일종의 본원적 축적이 이뤄졌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의의는 결코 작은 것일 수 없다. 게다가 이 농지개혁으로 소농의 농민적 토지소유가 실현되었는데 대체 어떻게 반봉건적 지주제에 입각한 모택동주의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가 있다는 건가. 황당하기 그지없는 해석이다.
 
이런 황당한 입장들이 아직도 통용되면서 특정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것을 보면 여러모로 안타깝다. 서로 상대를 매국노라 비난하며 되도 않는 주장을 늘어놓는 걸 언제까지 보아야 하는지. 한국사회에서는 지식인이라는 작자들이 그러한 오해를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보다 거기에 복무하는 모습들이 많이 보여 더 절망적이다. 이영훈의 글은 그런 면에서 굉장히 저질의 글이라 할 수 있겠다. 이래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한국현대사 연구사에 대한 이해도 넓힐 필요가 있다. 그런 책을 하나 쓰고 있기는 한데.. 모르겠다. 유의미할지. 대화해야 할 지식인이들이 이러고 있는데.. 댓글들을 보라, 가관이다 가관. 이영훈이라는 지식인이 쓴 잘못된 글이 얼마나 많은 갈등을 낳고 있나.

주석 : 손민석 씨가 자신의 글에 붙인 댓글
손민석 이영훈과 안병직은 자신들이 1980년대 중반까지도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긍정하는 입장에 있었으니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개는 자신에게 맞는 구멍을 판다고, 결국 이들은 과거의 자신과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셈이다. 아아, 전향자의 열정이여! 과거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란다. 언제까지 40년전, 30년 전의 연구들을 비판하면서 현재의 자신을 위로할 것인가. 안타깝다.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을 보면 더 안타깝다. 지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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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세대의 의식구조를 알려면 이 책을 보아야
 
현재 우리 사회의 미친 듯한 혼란상은 모두 1980년대에 나온 해방 전후사의 인식(1979~1989) 여섯 권의 이념에 그 기원이 있다. 여섯 권 합하여 100만 권 가까이 팔려 나갔다. 지금 우리 사회의 중추 세력인 386세대의 현대사 인식은 이 책을 통해 형성되었다.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 집권 세력의 행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 도대체 무슨 내용이 쓰여져 있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이영훈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강의, 대한민국 이야기(기파랑, 2007)에서 그 내용을 간추려 본다.
 
1권 총론, 언론인 송건호가 썼다. 건국 세력에 대한 도덕적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해방 후 점령군으로 온 미군정 하에서 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시켰다. (...) 그리하여 1948년에 성립한 대한민국은 신생정부임에도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참신한 기풍을 볼 수 없어서 마치 노쇠국과 같았다.”
 
2권 총론, 강만길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 여기서 펼쳐진다. 요약하면, 식민지기에는 민족해방이 지상과제였듯이 해방 후의 분단 시대에는 민족통일이 지상과제다. 민족통일이 성취되기 이전에는 완전한 시민사회와 근대국가가 성립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민족의 지상과제인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남한과 북한의 정치는 민족정치이어야 하고, 경제도 민족경제, 문화도 민족문화이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경제와 문화의 모든 것을 민족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는가? 김구 선생이 38선에 섰던 것처럼 우리도 휴전선에 선 중간자의 입장이 되어 남과 북이 갈라지고 전쟁을 치르고 분단을 고착시켜 간 역사적 과정을 비판적으로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
 
3권의 총론은 경제학자 박현채가 썼다. 박현채는 한국전쟁 당시 전남 백아산에서 소년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식민지기와 미군정기를 식민지반봉건사회(植民地半封建社會)로 규정했다. 지주제를 중심으로 한 봉건적 부문이 강하게 남아 있어 사회경제적 변혁이 필요한 사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반()제국주의 변혁과 반()봉건적 토지개혁을 치뤄야만 하는 사회라고 했다. 이는 자본주의가 성숙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해 진다는 마르크시즘 이론에 따른 것이다. 즉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자본주의 단계까지 발전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아직 반쯤 봉건주의 사회로 남아 있으므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객관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민주적 토지개혁을 수행하고, 그렇게 농민의 지지를 확보한 후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 적합한 이런 사회주의 혁명 이론을 개발한 사람은 모택동이었다.
 
4권의 총론은 최장집과 정해구 두 교수가 함께 썼다. 북한 정권의 성격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북한은 혁명적 소련군의 지원하에 혁명적인 공산주의자와 혁명적인 민중이 연합한 정권으로서, 미제와 반민족-반혁명 세력의 지배하에 있는 남한을 해방시킬 민주기지라고 했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그러한 성격 차이 때문에 거의 불가피했던 내전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미국이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남한의 혁명이 좌절되고 말았다고 아쉬워했다.
 
5권의 총론은 경력 미상의 김남식이 썼다. 북한이 반제반봉건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혁명국가라고 주장했다. .

6권의 총론은 박명림 교수가 썼는데 내용은 4권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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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수의 비판적인 글 

*2019년 8월 20일 업데이트 


당신들이 유포하는 건 '혐한 종족주의'
[<반일 종족주의>를 비판한다 ] 금기 깨니 통쾌한가? 아베가 웃는다
전강수(gsjun)
등록 2019.08.19 19:21수정 2019.08.19. 20:16
 
지난번 글('친일파' 비판이 억울? 자업자득이다)에서는 토지 수탈 문제, 쌀 수탈 문제, 노동자 강제동원 문제 등 경제문제를 중심으로 <반일 종족주의>를 검토했다. 이번에는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살펴본 다음 '반일 종족주의'라는 신조어에 대해 종합적으로 평가해 본다. 원래는 독도 문제와 관련한 내용도 함께 검토하려고 했으나 글이 길어지는 바람에 부득불 제외하기로 했다... 필자 주
 
 
위안부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다루는 다른 주제 이야기를 잠깐 하자. 거기서는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 외에 청구권 협상 문제, 지원병 문제, 고종 평가 문제, 을사오적 문제 등 다양한 주제들이 다뤄지고 있다. 저자는 이영훈 교수 외에 주익종, 정안기, 김용삼 등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한 가지 특징은 이영훈 교수 등이 이미 역사의 상식으로 자리 잡은 여러 가설을 모조리, 또 완전히 뒤집어엎는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소개하자(괄호 안은 책 페이지를 가리키며, 표현에 사소한 수정은 있었다). 군데군데 부조적(浮彫的)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한결같이 일본 극우세력 친화적인 주장들
 
일제가 조선 여인들을 전선으로 끌고 가 위안부로 삼은 사례는 단 한 건도 보고된 바가 없다. (309)
위안부 생활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선택과 의지에 따른 것이었고, 위안부는 위안소라는 장소에서 영위된 위안부 개인의 영업이었다. (325)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169)
- 이상 이영훈의 주장
 
한국은 일본과의 청구권 협상에서 애당초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 (122~123)
학도지원병은 일제의 기만과 선동에 넘어간 바보천치도, 강제로 일본군에 끌려간 강제동원 피해자도 아니었다. (112)
을사조약의 책임을 이완용과 을사오적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조약 체결은 고종의 결정이었다. (204)
- 이상 주익종 등의 주장
 
이영훈 교수 등은 자신들이 이처럼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이해관계가 걸린 것도 아니고 정치적 동기가 있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연구자의 직분에 충실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들이 어떤 동기로 이런 연구를 하게 됐고 무슨 목적으로 책을 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혹시 기존의 고정관념을 의심하고 새로운 사실을 밝히는 것을 일종의 소명으로 여기는 지식인의 속성이 발휘됐는지도 모른다. 연구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오랜 '금기'를 깬다는 쾌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황상 그들을 그처럼 순수하게 보아주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영훈 교수 등이 끌어내는 '전복적' 결론들은 한결같이 일본 극우 세력이 주장해 왔거나 그들이 반길 내용이라서 하는 말이다. 일본 극우 세력이 싫어할 방향으로 기존의 가설을 뒤집은 게 하나라도 있다면 달리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영훈 교수 등에게 먼저 한 가지 묻고 싶다. 당신들의 머릿속에서 한국 사람들은 어찌 그리 온통 엉망이고, 일본 제국주의는 모든 면에서 어찌 그리 반듯한가? 혹시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꿔 놓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스스로가 편향된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가?
 
그나저나 만일 위에서 소개한 주장들이 진실이라면, 큰일이 생긴 셈이다. 한국 국민은 수십 년 동안 엄청난 '거짓말'에 속아 살아온 바보천치들이고, 그런 '거짓말''지어낸' 한국 학자들은 몽땅 사기꾼 중의 사기꾼이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제가 공창제의 일환이라고?
 
이제 위안부 문제로 넘어가 보자. 앞에서 밝힌 대로 필자는 위안부 문제를 사료 검토를 통해 직접 연구한 적이 없으므로, 주로 사료 활용 등 연구 방법이나 논리 전개에 초점을 맞추어 비평할 것이다. 과연 이영훈 교수는 위안부에 관해 전복적 견해를 주장하면서 올바른 논리 전개와 연구 방법을 구사하고 있을까?
 
이영훈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제의 본질을 민간의 공창제가 군에 의해 동원되고 편성된 것으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위안부제는 마른하늘에 벼락 치듯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아주 옛날부터 존재했던 매춘업이 전시를 맞아 일본군 가까이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제도를 파악한다는 명목 하에 조선 시대의 기생제와 1916년 이래 시행된 공창제의 역사를 소개한다. 그뿐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제 뒤에 등장하는 한국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 그리고 민간 매춘업의 실상까지 제법 소상하게 정리한다. 이렇게 일본군 위안부제를 한국 사회 매춘업의 장기 역사 가운데 위치시키고는, 그동안 1939~45년의 역사만 달랑 떼서 일본군의 전쟁범죄라고 몰아붙였던 직업적 운동가들의 '오류'를 엄중하게 질타한다.
 
이와 같이 이영훈 교수가 제도의 장기 역사를 정리하고 통계까지 제시하면서 실상을 소개하니 그럴싸해 보일지도 모른다. 이런 연구도 없이 '공명심을 충족하기 위해, 직업적 일거리를 잇기 위해' 위안부 피해자들을 앞세운 시위를 줄기차게 벌여온 운동가들이 한심해 보일 수도 있다. 이처럼 국민의 생각이 동요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교수가 노리는 바다.
 
이영훈 교수가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호도하기 위해 오랫동안 경제사 연구를 하며 익힌 '현란한' 기법을 활용하고 있음에 유의하라.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위안부로 끌려가기 전의 조선 여성이 조선 시대 기생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또 공창제와는? 해방 후 한국군·미군·민간 위안부가 그 순진한 여성의 미래라도 된다는 말인가?
 
일본군 위안부제를 매춘업의 장기 역사 가운데 위치시키는 것은 한 가지 중대한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바로 '일본군 위안부 = 매춘부'라는 인식이다. 위안부로 끌려가기 전의 여성이 매춘부가 아니었다면, 일본군 위안부제는 당연히 따로 떼어서 파악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일본군 위안부 = 매춘부'라는 주장은 다름 아닌 일본 극우 세력의 단골 메뉴다. 일본군 위안부를 기생제나 공창제, 그리고 해방 후 위안부와 연결 짓는다는 소리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억장이 무너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영훈 교수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제도적 접근 또는 역사적 접근이 이처럼 터무니없이 활용되다니 어이가 없다.

위안부제가 일본군의 책임이 아니라고?
 
일본군 위안부제가 공창제의 일환이었다는 말은 민간 매춘업자의 영업장을 일본군이 활용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위안소 운영에 대해 일본군이 세밀하게 통제하기는 했으나, 위안부의 모집과 위안소의 운영은 어디까지나 민간 주선업자와 민간업주의 책임 아래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민간업주들은 위안소 경영권을 사고팔기까지 했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 주장이 맞다면, 일본군의 책임은 크게 경감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위안부 모집과정인데, 이영훈 교수는 그것이 주선업자와 보호자 사이의 합의로 이뤄졌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민간 주선업자가 여인을 모집할 때 보호자의 취업승낙서가 필요했는데(이는 확인이 필요한 사항이다), 그들이 가난한 호주들을 만나서 감언이설로 유혹하며 약간의 전차금(前借金)을 지급하면 호주들은 마지못해 또는 얼씨구나 하고 딸이나 동생을 위안부로 넘겼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군이 강제로 끌고 간 것이 아니라 못난 아버지들이 사악한 주선업자에게 딸을 팔아넘긴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이 이영훈 교수의 생각이다. 이렇게 되면 일본군은 위안부제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면제받는다.
 
이영훈 교수는 이렇게 일본군의 책임을 덜어주고 난 다음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군을 미화하기까지 한다. 해방 후 사창가의 여인들에 비하면 일본군 위안부의 사정이 나았다고 하면서 이는 일본군의 보호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일본군은 민간업주가 중간착취를 못하도록 엄격하게 관리하기도 했고 위안부가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보호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라면 일본군은 악덕 민간업주에게서 위안부를 지키는 흑기사 같은 존재로 격상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인식에 도달한 다음, 이 교수는 "위안소는 위안부의 입장에선 수요가 확보된 고수익의 시장"(304)이었다든가, "위안부들 역시 전쟁 특수를 이용하여 한몫의 인생을 개척한 사람들이었다"(320)고 하는 등 패륜적인 주장을 쏟아낸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있을까?
 
위안부에 관한 종래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이영훈 교수의 이런 주장은 그에 합당한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책을 자세히 살피면, 그는 일본군 위안부가 강제 연행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지만 이를 입증하는 사료는 하나도 제시하지 않는다. 위안부 모집과 배치, 관리 등에 일본군이 어떻게 개입하고 지시했는지에 관한 내용은 왜소화시키고 위안부가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눈을 애써 감고 있다. 반면 자신의 주장에 조금이라도 유리해 보이는 내용은 과도하게 부각시키고 사료가 말하지 않는 부분까지 상상으로 추론하기도 한다.
 
예컨대 이영훈 교수는 위안부 모집과 관련하여 단 두 가지의 논거만 제시하는데, 하나는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라는 일본인이 <나의 전쟁범죄>라는 책에서 했던 '부하 6명과 함께 단추공장에서 일하던 여인 16명을 위안부로 끌고 갔다'고 한 증언이 거짓말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 증언이 오염·조작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영훈 교수는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내용이 시간이 가면서 달라진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일본군에게 노예사냥을 당하듯 끌려갔다는 증언은 대부분 조작된 것이라 해도 좋다고 강변한다. 이영훈 교수 자신에게 유리한 사례로 간주하여 소개하는 문옥주라는 여인의 회고록에 헌병에 잡혀갔다는 구절이 나오지만, 이 교수는 단칼에 믿을 수 없다고 잘라 버린다.
 
일본군 위안부제의 핵심 사안에 대한 종래의 통설을 그렇게 과격하게 뒤집으면서 이처럼 취약한 증거밖에 제시하지 않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뉴라이트 대부인 안병직 선생조차 강제동원이라는데?
 
사료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아이러니한 일이 있다. 2013년에 안병직 선생 이름으로 <일본인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라는 책이 번역·출간되었다. 1940년대 말에 버마와 싱가포르에서 위안소 관리인으로 근무했던 박치근이라는 인물의 2년 간 일기인데, 위안부 모집과정과 위안소 실태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책 표지에는 안병직 선생이 번역하고 해제를 붙였다고 되어 있지만, 이영훈 교수도 안병직 선생과 함께 일기 발굴과 번역에 관여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위안소 운영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 있다. 안병직 선생은 해제에서 이 책의 의의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는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이 전시동원체제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있는 것"(41)임을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위안부는 일본군 편제의 말단조직으로 편입되어 군부대와 같이 이동할 수밖에 없었고, 폐업도 어려워서 '성적 노예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매우 중대한 의견도 함께 제시했다.
 
그러나 이영훈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에서 이 책의 내용을 적극 활용하면서도 안병직 선생이 지적한 중대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위안부업은 위안부 개인의 영업이었으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자신이 번역과 출간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책의 내용까지도 무시해 버리는 것을 보면, 이영훈 교수가 얼마나 부조적 수법에 능한지 알 수 있다.
 
1400회나 수요 집회를 이어오며 치열한 삶을 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을 오염됐다며 무시하는 것도 부족했을까? 이영훈 교수는 812SBS-TV와 가진 인터뷰에서 위안부 피해자 개인의 인생사와 역사적 제도를 구분하고, 역사학자는 양자가 충돌한다고 해서 전자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역사적 사건을 직접 체험한 당사자 따로, 제도 따로 취급하면서 당사자의 경험은 무시해도 된다는 뜻인데,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이영훈 교수 등이 세밀한 실증으로 우리가 믿고 있던 역사적 상식을 뒤집었다고 해서 걱정하는 분들이 있을 줄 안다. 듣기에는 분명 말도 안 되는 주장 같은데, '객관적인' 통계와 자료로 분석한 결과라고 하니 당황할 수도 있고 심지어 현혹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이영훈 교수 등의 분석은 합당한 근거를 갖추지 못한 과장이며 편향된 억측일 뿐이다.

반일 종족주의 때문에 온통 거짓말이 난무한다고?
 
이영훈 교수 등은 한국인들이 가진 역사 인식은 대부분 거짓말이라고 믿는다. 거짓말은 역사 인식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 사법, 문화까지 잠식해서 나라가 온통 거짓말에 물들어 있다고 진단한다.
 
이명박 정부 당시 광우병 파동도 거짓말 때문에 일어났고, 세월호 사건도 거짓말 때문에 지금까지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고, 박근혜 전 대통령도 "세월호가 침몰하는 그 시간에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미용 수술을 했느니, 마약을 했느니 애인과 밀회를 즐겼느니 등등 터무니없는 거짓말" 때문에 탄핵당했다고 생각한다(박근혜 탄핵 사유는 국정농단이었음을 모르는 걸까, 알고도 거짓말을 하는 걸까?). 이들에게 촛불혁명은 필시 거짓말에 취한 대중의 난동쯤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영훈 교수 등은 현재의 한일 무역분쟁도 위안부 문제에 관한 거짓말과 징용 노동자들이 재판과정에서 한 거짓말로 촉발되었다고 믿을 것이다. 이 모든 거짓말의 배후에 하나의 강력한 집단 심성이 있으니, 바로 '반일 종족주의'. 이영훈 교수 등은 반일 종족주의를 옛날 미개한 종족을 사로잡던 샤머니즘과 동일시한다. 여기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란 범주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웃을 세세의 원수로 느끼는 적대 감정만이 횡행한다. 반일 종족주의에는 종족을 결속하는 토템(totem)도 있는데 소녀상이 대표적이다.
 
이영훈 교수는 대한민국이 자유인의 공화국으로 세워졌으나 지난 30년간 반일 종족주의 때문에 정신문화는 갈수록 퇴락했고, 그로 인해 마침내 망국을 예감하기에 이르렀다고 토로한다. 이 교수의 생각에 현 정부는 헌법에서 자유를 삭제하자고 주장하는 세력이 장악하고 있어서 망국의 경향을 되돌리기는커녕 도리어 촉진할 듯하다.
 
책을 마지막까지 읽어가면 말미에 흘러넘치는 비장함 때문에 잠시 숙연해지기도 하고, "우리의 본향은 자유입니다,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이 평생을 걸었던 순례의 그 길입니다"고 한 마지막 문장에서는 '거룩한' 분위기까지 느낀다. 하지만 잠시만 생각하면 겉으로 느껴지는 분위기 때문에 착각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일 종족주의는 전형적인 허수아비치기
 
반일 종족주의와 거짓말이 나라를 망하는 길로 내몰고 있다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전형적인 허수아비치기다. 개인주의가 너무 강해져서 오히려 걱정스러운 판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니! 우리를 식민지로 지배한 가해자를 당당하게 대하는 것을 두고 중국과 미국한테는 안 그러면서 왜 유독 일본에게는 적대감을 드러내느냐니!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을 지극히 평화적인 방법으로 타도한 것을 두고 거짓말의 광란이라니!
 
<반일 종족주의>에서는 우리 사회 곳곳에 거짓말이 횡행하고 있다고 했지만, 내 눈에는 오히려 이영훈 교수 등이 하는 많은 진술이 거짓말로 보인다. 이 교수 등은 우리 사회에 반일 종족주의가 만연하고 있다고 개탄했지만, 내가 보기에 오히려 그들이 '혐한 종족주의'를 유포하고 있다(이 책 때문에 필자도 졸지에 토템을 숭상하는 미개한 종족의 일원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억울한 마음이 없지 않다).
 
그러면서 웬 자유 타령으로 책을 마무리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영훈 교수의 자유는 어떤 자유인가? 이 교수는 이승만이 쓴 <독립정신>을 읽고 그의 '자유' 사상에 흠뻑 빠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기에 이승만에게 자유란, 전시에 시민을 버리고 혼자 내뺄 자유, 정적을 제거할 자유, 헌정을 유린할 자유, 독재할 자유, 부정 선거 할 자유, 꽃 같은 청춘들에게 발포할 자유에 지나지 않았다.
 

필자가 말해봤자 귓등으로도 안 듣겠지만, 이영훈 교수 등에게 권면한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사용한 부조적 방법과 허수아비치기를 내려놓고 그 책의 모든 주제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정상적인 연구 방법에 따라 다시 분석해보라. 그랬는데도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면, 필자부터 기꺼이 지지하겠다. 금기를 깨는 것만이 지식인의 임무라 여기지 말라. 이미 진실로 판명이 난 상식을 견고하게 지키는 것도 지식인이 할 일이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62868&CMPT_CD=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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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석
2019년 8월 20일 업데이트

이영훈 선생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차고 넘치고 나 또한 그의 주장에 지극히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영훈 선생이 동의할만한 비판은 그리 많지가 않다. 내가 계속해서 비판하듯이 정작 "제대로 된" 비판을 해야 할 해당 분야의 연구자들은 침묵하고 있는 와중에 이영훈 선생이 수십년에 걸쳐 자신의 입론을 만든 맥락을 잘 모르는 이들이 굉장히 쉽게 비난을 하고 있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예컨대 <반일종족주의>에 나온 이영훈의 위안부론에 대한 비판이 그러하다. 이미 연구자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식민지 조선의 공창제와 깊은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 입장을 부정하는 연구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대부분이 이영훈이 지적하는 가부장제, 공창제 등과 연결시켜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이해하고 분석하지, "위안부가 성매매 여성이라는거냐?"는 식의 반론을 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비판은 이미 연구자 사회에서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강제연행에 관해서도 업자의 사기, 인신매매 등을 강조하는 연구자는 많아도 군과 경찰에 의한 강제연행을 주장하는 연구자는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말하자면 단 한 명도 없다. 그런데 여전히 여론에서는 군과 경찰에 의한 강제동원을 이영훈이 부정한다며 비난하는 목소리가 크다. 이영훈의 주장을 검토하고 그 사료적 검토의 정당성을 담보해주어야 할 연구자 사회가 일종의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이영훈과 비슷한 주장을 담은 연구논문을 일본어로 내면서도 한국에는 그러한 연구를 잘 내지 않는다. 그러면서 세미나 같은 곳에서는 "이런 말을 하면 위험하다(웃음)"고 하고 있으니 솔직히 말해 비겁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러니 이영훈 같은 이가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이영훈의 위안부론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반일종족주의>를 읽으며 이해한 그의 위안부론에 크게 두 가지 비판을 할 수 있는데 하나는 그의 시각이 지나치게 '남성중심적'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술의 불균형성에 관한 것이다. 이영훈은 생물학을 어떻게 배웠는지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고 인간의 본성은 본래 이기적인 것이라 주장했던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진화생물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그는 남성이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여성의 성을 보다 많이 향유하고자 하는 것은 남성 본성의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한다. 나는 그와 같은 지성인이 그런 주장을 입에 담을 수 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적어도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가 내가 알고 있는 서구 지식인들의 그것과 상당히 동떨어진, 경제적 자유주의로 제한된 자유주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하는 발언이었다. 이러한 관점을 갖고 있기에 그의 위안부론은 기본적으로 대단히 온정주의적인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근대국가의 여성의 성에 대한 전유는 그에게 있어 그다지 대단한 범죄가 아니다. 남성들이 그렇게 여성의 성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기생제도에 대한 그의 관점도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의 연장인데 이렇듯 온정주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기에 그는 일본과 한국에 대해 공정하게 비교하지 않는다. 가령 <반일종족주의>에서는 일본에서 있었던 공창제 폐지 운동이 조선에서의 공창제의 번창과 위안부 제도로 이어졌다고 언급하지만 조선에서 있었던 공창제 폐지 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성매매 제도란 누군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예컨대 유해정의 <일제시기 공창폐지운동에 관한 연구>를 참고해보면 식민지 조선에서의 공창제 폐지운동은 기독교 중심의 운동에서 여성 실업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겪는다. 이영훈은 이런 것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폐지운동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에 당연하게도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지극히 온정주의적으로 접근하지, 그것이 나타날 수 있던 식민지 조선의 상황 다시 말해서 여성 노동력의 사회진출을 가로막는 여러 조건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조성한 식민지 통치에 대해서 조금도 비판하지 않는다. 이미 여러 논자들이 지적했듯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전후의 한국의 위안부 제도에 비해 더 나았다는 식의 주장만 하고 있지, 궁극적으로 그러한 공창제가 번창할 수 있던 식민지 통치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얼마나 도착적인가. 위안부 문제를 매춘업의 연장에서 고찰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여성의 사회진출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오늘날의 성매매 문화를 해소하기 위해서 여성의 인권을 어떻게 향상시켜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하고 그저 남성들이 그런 성매매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것은 정말로 가부장제를 부정적으로 생각해서라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에게 여성의 성에 대한 남성의 전유는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갖고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한국의 운동단체들과 한국인들은 위선자이며 거짓말쟁이에 공연한 분란만 일으키는 이들이다. 그는 계속해서 위안부들의 생활의 비참함을 토로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를 하지 않는다. 식민지 통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다보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위안부론은 그런 점에서 한계가 큰 연구가 아닐 수 없다.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 개념을 지지하는 이들은 위안부와 한국 사회의 성매매 문화를 다루면서 한국인의 근간에 있는 샤머니즘적 세계관이 육체주의를 탐닉해 성매매 시장에 유입되는 여성이 많다는 이영훈의 주장이 얼마나 학자로서의 그의 품격과 능력에 대한 평가를 낮추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 사회진출 등의 문제와 관련해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할 사회과학자가 샤머니즘적 세계관에 입각한 육체주의와 물질주의 운운하며 성매매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 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모르는 이들이 많다는 데서 이 나라 지성의 파탄을 엿보게 된다고 하면 과한 주장일까.

관련 연구자들이 제대로 비판을 해주면서 이영훈의 위안부론이 지니고 있는 이런 특성들을 드러내어야 하는데 "그래서 위안부가 창녀라는 것이냐" 수준의 비난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니 답답하다. 좋은 위안부 제도에 대한 연구물들이 사장되거나 일본어로만 출판되는 이 상황에서 연구자들이 나서서 대중의 이해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된다. 이영훈을 제대로 비판하고 넘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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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일보] [송호근 칼럼] 한국사학자 카이텐
*2019년 8월 21일 업데이트
 
광복절에 하필 왜 이 책을 집었을까? 이영훈 교수(), 반일(反日) 종족주의. 무모하고 섬뜩했다. 그의 평생 연구는 식민통치 하 경제발전을 입증하는 것. 생산성과 소득 각 영역에서 괄목할 성장을 이뤘기에 일제를 착취로만 회칠할 수 없다는 것. 수탈론에 성찰을 촉구한 것은 분명한 업적이다. 이 책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성찰은커녕 아예 일본면책론까지 치달았다. 과거사를 핏빛 원한으로 재현하는 한국인의 야만적 심성, 소위 반일 종족주의가 한·일 관계를 파탄 낸 주범이다! 최근의 쟁점에도 충격 판결을 내렸다. ‘한국의 맹목적 적대감이 원죄, 일본은 무죄다.’

독자들은 사료와 통계에 압도돼 기가 꺾인다. 원로학자의 이런 행군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붕괴 일로의 조선에는 희망은 없었고 결국 제국 쟁탈전에서 망국(亡國)이 운명이었다는 체념 의식. 윤치호가 그랬다. 항일운동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자 무력한 조선을 절감했다. 출옥 후 그가 매진했던 것이 실력양성론, 3·1운동을 불장난이라 나무랐다. ‘2·8 독립선언서를 초안한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으로 돌아선 이유이기도 하다. 이 교수 역시 일제의 폭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억압 속에 싹튼 한국인의 근대화 노력이 소중하다면서도 주로 일제의 개발 효과를 부각시키는 항로를 개척했다. 그가 도착한 항구는 일본공적론, 무죄론이다.

체념 속에 핀 꽃인가. 일제의 개발 성과를 인정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급기야 민족주의론에 창을 겨눈다. 식민사를 착취와 수탈로 상품화해 문화 권력을 움켜쥔 사기꾼들이다. 필자도 맹신 민족주의를 경계하지만, 그의 논조는 2015년 일본 현지 대담에서 자위대 참모총장 다모카미 도시오(田母神俊雄)가 뱉은 그것이었다(이 다큐멘터리는 KBS에서 방영됨). 도시오는 포효했다. ‘당신이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것은 대일본제국의 은혜다.’ 필자가 꾹 참고 물었다. “위안부는?” “돈벌이 매춘이다.” “그럼 징용은?” “그걸로 먹고 살았다.” 놀라지 마시기를. 이 책에 그대로 쓰여 있다. ‘위안부는 조선인의 기업형 매춘이며, 조선 관기, 종군위안부, 미군기지촌 여인은 같은 계열이다’. 징용문제는 더 나갔다. ‘징용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조선인 갱부 평균임금은 교사의 4.6, 현장에서 민족차별은 없었다.’ 그리곤 일갈했다. ‘, 배상 타령인가?’ ‘대법원은 왜 선동질인가?’

두 가지 오류를 범했다. ‘사료의 편파 선택일부로 전체를 왜곡하는 일반화의 오류’. 이 책은 대체로 밝고 정상적인 사료만 골랐다. 그렇다면 해방 후 부산항엔 돈 번 귀환자가 가득해야 했다. 십년 전 군함도(하시마)에 가봤다. 미쓰비시의 다카시마와 하시마 탄광에만 4000명 조선인 징용자가 노역했다. 하시마의 파도는 무서웠다. 왜 조선인들이 탈출하다 익사했을까?

고소득은 미끼였다. 주식과 생필품 비용을 공제하고 강제 저축, 국채 구입을 강요당해 실제 지급액은 쥐꼬리였다. 송금은 언감생심 빚진 사람이 속출했다 (그는 송금통장을 사진 자료로 실었다). 일본 패망으로 저축과 국채는 휴짓조각이 됐다(김호경 외, 일제 강제동원). 이런 자료는 산처럼 쌓여 있다. 일본군이 요청하지 않았다면 종군위안부가 가능했을까? 전쟁 말기, 왜 조선 처녀들이 결혼을 서둘렀나? 군 개입과 강제연행 입증 자료가 미국기록문서고에서 수차례 발견되었다(정진성 연구팀). 누가 거짓과 허위를 생산하고 있는가.

전범기업과 군()이 요청하면 할당량이 내려왔다. 모집책, 면장과 순사가 같이 다녔다. 그는 계약서만 제시할 뿐 실상을 외면한다. 일본 후생성 통계로 징용 연인원 112만 명, 아베가 신임하는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군위안부를 5~8만 명으로 추정한다.

이 교수는 군위안부가 3600명이란다. 그중 소수 자료만으로 강제동원, 강제연행은 허구라고 판정했다. 정확히 일반화의 오류’, 왜곡이다. 그 왜곡의 비수를 한일청구권에도 꽂았다. ‘애초에 한국은 청구할 게 없었다.’ ? ‘일본이 남긴 재산 52억 달러 중 남한이 22억 달러 물권을 접수했기때문이다. 적산(敵産)은 일제의 전진기지였다. 1905년부터 40년간 한국에서 창출한 천문학적 자본수익금은 어디로 갔는가? 자국 민생과 전쟁에 쓰였다. 그래도 경제와 생활형편이 나아졌다! 
 
그런 논조로 구축한 반일 종족주의개념 자체가 허구다. 종족주의는 근대 이전 어디나 존재했던 보편적 현상으로 지금껏 일부 유증되는 문화적 심성이다. 보편 현상을 한국 특수 집단심이라 매도하는 것은 설()에 불과하다. 일본의 선민적 인종주의는 거론도 안 했다. 신주(神州)의 천손(天孫)은 선..(.滿.)와는 다르다는 광기의 신화는 그가 종족주의의 요소로 든 샤머니즘의 일본식 변종이다. 선민주의는 내선일체라는 민족 멸절의 인종 폭력으로 둔갑했다.

냉철한 반성이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식민지 한국을 원죄 국가로 바꿔치기해 잠수 공격하는 일제의 인간 어뢰, 카이텐(回天)이 되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3555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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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전 위안부 문제에 관한 포스팅을 올렸었다. 내용 중에 요시다 세이지의 책 <나의 전쟁범죄고백>을 인용한 부분이 있어서 두시간만에 내렸다.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시모노세키지부장으로서 제주도에서 젊은여성 205명을 ‘사냥’한 경험을 쓴 이 책은 일본에서 83년에 출판됐고 <나는 조선사람을 이렇게 잡아갔다>라는 제목의 한국어판이 89년에 나왔지만 결국 상당부분 허구인 것이 밝혀졌다. 그것을 체크하지 못하고 인용한 것이 부끄럽다. 
이 책은 일본인으로서 위안부 문제를 처음 폭로한 것이었고 두 나라 모두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아사히신문은 그의 증언을 토대로 10년 동안 위안부문제에 관한 기사를 잇따라 게재했지만 지난 2014년 제주도에 취재팀을 보내서 연로한 주민들을 인터뷰한 다음 요시다의 증언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 그간의 기사들을 철회하고 사과문을 냈다. 요시다 자신은 “일부 사례의 시간과 장소에는 창작이 가미됐다“고 밝혔다. 
1975년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위안부 출신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위안부 할머니 자신들이 아직 침묵하던 시절에 위안부 문제가 양국 사이에 공론화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는 공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지만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해서 ‘증언’ 내지 ‘고백’을 가장했다는 점은 어떤 경우에도 용서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일본의 우익들에게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가 없고 증언은 가짜라 주장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해악이 만만치 않았다. 영화 <주전장>을 보면 아베가 일본 의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해 “증언이라면 요시다 세이지 증언도 있지요.”라며 비웃는 대목이 나온다.
포스팅을 내린 다음 요시다의 증언이 어느 만큼 사실에 근접해있는지 알기 위해 국내에 나와있는 위안부 관련 기록들과 할머니들의 증언들을 모아서 읽어보았다. (‘성노예’가 정확한 명칭이나 지금까지 일반화돼온 ‘위안부’라는 명칭을 사용함.) 

아베정부와 이영훈교수가 같은 목소리로 하는 주장은 크게 세가지다.
1, 강제동원은 없었다; 
할머니들의 증언을 보면 동원하는 방식은 여러 형태였던 것 같다. 공장에 취직시켜준다거나 좋은 일자리 준다고 속여서 데려가는 ‘유괴’수준부터 경찰이나 군인이 무장한 채로 마을에 들어와서 잡아가는 ‘인간사냥’까지. 또는 소학교 5학년때 수예시간에 일본 지도를 벚꽃이 아니라 나팔꽃으로 수를 놓았다고 경찰서에 잡혀가 고문당하고 정신차려보니 후쿠오카의 위안소더라는 경우도 있다. (황해도 연백 출신 심미자 할머니. 인두질 등 고문당한 상처들을 찍은 사진이 증언집에 수록돼있다. 그는 자궁적출 수술한 채로 13년만에 일본에서 돌아왔고 200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독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심미자 할머니는 후쿠오카 위안부들 중 10퍼센트가 자신처럼 학교에서 잡혀왔고 “조선말을 썼다”거나 “황국신민서사를 암송못한다”는 등의 이유였다고 했다. 심달연 할머니: “언니하고 둘이 쑥을 캐는데 붉은 완장을 찬 군인이 와서 갑자기 손을 잡더니 넓은 길로 끌고 갔지요. 거기에 덮개가 있는 트럭이 서있고 군인이 여럿 있었어요” 자매가 함께 위안부가 되었는데 심달연 할머니만 돌아왔고 언니는 다른 곳으로 배치돼 생사를 알 수 없다 한다. 많은 할머니들의 공통된 증언이 덮개가 있는 트럭에 실려갔다는 것. 
할머니들이 중개업자를 직접 만났거나 마을 이장, 이웃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중개업자를 따라나선 경우가 많지만 더러 칼을 찬 순사나 헌병에게 길이나 밭에서 잡혀갔다는 증언을 하는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대체로 가난한 농어촌 마을에서다. 당시 자료들에 따르면 군에서 인력회사에 위탁하고 중개업자들이 움직이는 방식인데, 대개 다단계 인신매매 형태가 되었다. 또한 “위안부를 모집할 때 파견군쪽에서 통제하고.. 현지의 헌병 및 경찰당국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진행하라는 1938년 3월의 일본 육군성 통첩은 식민지 조선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는 순사가 길가는 행인을 지서로 데려가 고문하고 유치장에 가두어도 되는 시대였다.
2, 1년 계약의 월급제였고 노예상태가 아니었다: 
식민지이고 전시인데다 조선의 여성문맹률이 90%라 계약서가 있다 해도 의미 없었다. 간혹 “동네 구장과 반장이 계급장 없는 누런 군복을 입은 일본 사람과 집에 와서... 군복 만드는 공장에 나가는데...어머니에게 무슨 서류에다가 도장을 찍어달라 했다”(김복동)는 식으로 ‘무슨 서류’에 대한 증언들은 있다. 
위안부 나갔다가 1년만에 돌아온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고 대개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지만 못돌아온 경우가 더 많다. 김복동 할머니의 경우, 1941년부터 대만, 광동, 홍콩, 싱가폴의 위안소를 옮겨다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 해방을 맞았다. 전선이 확대되면서 위안부들은 태평양의 섬으로 여기저기 이동했는데 설사 1년 계약기간이 끝난들 혼자 무슨 수로 돌아올것인가. 종전이 임박하면서 일본이 퇴각할 때 위안부들을 데리고 이동한 경우도 있지만 죽이고 가기도 하고 현지에 버려두기도 했다. 일본군이 항복하면 위안부들도 군인들과 함께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 접대를 거부했거나 조선말을 했다거나 해서 동료 위안부가 살해당하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은 여럿이다. 
1944년 9월, 전시의 미군신문 <라운드업>이 중국 송산 전투과정에서 발견한 위안부들에 대해 보도하면서 유명해진 사진이 있다. 만삭의 조선인 위안부, 중국군에 포로로 잡힌 맨발의 조선인 위안부 넷 가운데 하나. 그 주인공인 박영심 할머니는 곤명 포로수용소에서 7개월을 지냈고 그때 사산한 이후 평생 아이를 낳지 못했다. 오끼나와에서 한국말을 거의 잊은 채로 1975년에 발견돼 위안부 인터뷰의 첫 사례가 된 배봉기 할머니는 창피해서 조선으로 못 돌아왔다고 했다. 
1년계약 만큼이나 월급제도 그 허구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 말대로라면 “해방후 부산항엔 돈 번 귀환자가 가득해야 했다”(송호근).
3, 일본정부나 군이 공식적으로 책임질 일 아니다;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출병한 일본군 병사 7만2천명 가운데 1만8천명이 성병에 걸렸다 한다. 이때문에 태평양전쟁은 1932년 상해침공 때부터 군 위안소를 설치했다. 1942년 9월 사병 위안소로 ‘북지 1백개, 중지 140개, 남지 40개, 남방 1백개, 남해 10개, 카라후토 10개, 모두 4백개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는 육군성 회의록, 중국 후베이성에 주둔하면서 직접 병영내에 위안소 설치를 명령했다는 관동군 39사단장 사자 신노스케의 증언 등도 공개됐다. 일본군과 연합군의 공문서, 연합군의 포로심문자료 등 증거들은 차고 넘친다. 
이미 1993년, 위안소 설치에 일본군이 관여했고 본인의사에 반하여 동원된 피해여성들이 있다는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담화가 있었지만 아베 정부는 그것조차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 2012년에 일본 교과서에서 위안부에 대한 언급이 삭제됐다. 이미 일본 총리도, 천황도 식민지침략에 대해 사과한 적 있다. 지금은 사과를 또다시 하고 안하고 문제가 아니라 사실을 인정하고 안하고의 문제다.
** 요시다 세이지는 자신의 경험과 주변의 이야기를 토대로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나의 픽션을 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그렇게 밝히지 않은 이유는 뭘까, 이유를 알 수 없다.
위안부들의 증언을 담은 다큐들과 서적들이 여럿 나와있다. 서울시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함께 편찬한 자료집 <기록 기억>, 증언과 사진집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푸른역사)가 있다. 위안부 20명의 증언과 사진을 담은 이토 다카시의 <기억하겠습니다>(알마)도 있다. 1991년 김학순의 증언을 세계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인, 아사히 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였다.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극장 개봉 중이다. 총기가 좋아서 정확한 증언들을 남긴 김복동 할머니에 관한 <김복동>. 그리고 마이클 무어 식 경쾌통쾌명쾌한 화법의 <주전장>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엇갈린 견해들, 무엇보다 지금 일본 사회가 어디로 가고있는지에 대해 한꺼번에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모두들 한국과 일본의 관계, 그 미래를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다. 과거를 어떻게 딛고 넘어설 것인지가 보여야 어떤 미래를 함께 할 것인지가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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