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2일 일요일

the coal towm mem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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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공공도서관에서 북스타트 여는 날 행사가 있던 날(2008년 10월 1일), 나와 김유리 간사는 '뿌리관'을 찾았다. '뿌리관'에는 탄광촌의 지난날 투쟁의 역사를 기록으로 담아내고 있는 곳이다. 그 역사의 기억을 잠시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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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 당시 사북초등학교에는 시인 최승호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해 4월, 이른바 '사북항쟁'이 일어났다. 최승호 시인은 '사북, 1980년 4월'이라는 시를 남기고 있다.

 

"증오와 증오의 투석이다/거리엔 집단적인 돌들이 깔려 있었다/투구와 방패가 번쩍이고/노동의 기쁨 모르는/어두운 손들이 돌을 쥐던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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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북항쟁'을 '항쟁'이라는 단어로 쓰는 데 대해 요즘의 분위기--뉴라이트 그룹이 다시 교과서를 써내는 분위기--에서는 무슨 놈의 항쟁이냐고 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2005년 국가는 사북노동항쟁은 25년만에 민주화운동으로 사실상 인정했다. 국가는 당시 항쟁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이원갑 씨 등의 명예회복 신청을 받아들여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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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향신문>은 2004년에 <1970~90년 현대사 재조명 실록 민주화 운동>의 제3부에서 39번째 꼭지로 '사북 광산노동자 투쟁'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용문이 좀 길지만 당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인용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함으로써 신군부가 점차 실체를 드러낼 즈음인 1980년 4월24일, 주먹만한 활자들이 조간신문의 1면을 뒤덮었다. '광부 3,500여명 집단 난동' '동원탄좌 광부 3,000여명 유혈난동' '무법 휩쓴 공포의 탄광촌.' 함께 실린 사진들 역시 충격적이었다. 계엄사의 보도 통제 때문에 24일에야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임금인상과 어용노조 지부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시작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민중봉기에 다름아닌, 이른바 사북사태로 비화한 것은 4월21일이었다. 강원 정선군 사북읍 사북리에 소재한 동원탄좌는 당시 연간 채탄량 1백60만t에 종업원 수가 3,000명이 넘는 국내 최대의 민영 광산이었다. 3만명에 이르는 사북리 주민의 대부분은 동원탄좌 및 군소 덕대(광산업자와 계약을 맺고 광산의 일부를 맡아 채광하는 사람) 밑에서 일하는 광부와 그 가족들이었다.이 오지의 탄광촌에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한 것은 그해 4월 초였다. 노조 지부장 직무대리 이재기가 노조원들 몰래 회사측과 20%의 임금인상에 합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던 것이다(당시 광산노조는 전체 지부장 회의를 통해 42.75% 임금인상을 목표로 제시해 놓고 있었다). 이재기는 1년 전 지부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선거 부정 때문에 광산노조로부터 선거무효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광산노조의 미온적인 조치와 회사측의 비호에 기대어 재선거를 1년간이나 미루면서 온갖 편법을 동원해 자리를 보전했다. 이 와중에 임금인상 합의 소문이 떠돌았고, 4월15일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노조원들이 광산노조에 격렬하게 항의한 결과, 4월18일 이재기와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재기의 요청을 받고 출동한 경찰이 광부들의 대표인 신경을 연행해 가자 흥분한 광부 300여명이 사북지서로 몰려들어 시위와 농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계엄사령부의 집회 불허 벽보가 나붙은 가운데 4월21일 오후 노조원 200여명이 지부 사무실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정선경찰서 간부들이 해산을 종용하고 기동경찰 60여명이 사무실을 에워싸고는 있었으나 노조원들은 별다른 과격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후 5시쯤 농성을 유혈폭동으로 비화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광부를 가장해 농성장에 들어간 형사 한 명이 발각되었고, 이에 겁을 먹은 경찰들은 사무실 앞에 있던 지프에 올라타 농성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노조원 몇몇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지프는 그대로 돌진했다. 4명의 노동자들이 지프에 치여 쓰러졌고, 동료들이 차에 깔리는 것을 본 광부들은 극도로 흥분했다. '동료 광부가 경찰차에 치여 죽었다(실제로 죽지는 않았으나 당시 광부들은 그렇게 알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삽시간에 수백명의 광부들이 모여들었고, 흥분한 광부들은 사북읍내로 진출해 사실상 지역을 장악했다. 사북지서와 광업소 사무실이 파괴되었고, 동원탄좌 귀빈 숙소에 있던 장성경찰서장, 광업소장 등이 몰매를 맞고 쫓겨났다. 밤이 되면서 시위대에는 가족들까지 가세했고, 이들은 수백명씩 떼지어 다니며 과장급 이상 회사 간부와 이재기를 비롯한 노조 간부들의 집을 파괴했다. 시위가 밤새 이어지면서 이튿날 아침 시위대는 2,000여명으로 불어났고, 시위대의 일단은 이재기의 처를 붙잡아 옷을 벗겨 끌고 다니며 린치를 가했다. "어느 누구도 진정시킬 수 없는 극한 상황이요, 한 맺힌 분풀이"(신경의 회고)였다. 22일 오전 10시쯤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 200여명이 사북읍으로 진입했다. 읍내 시위대는 일단 동원탄좌로 후퇴해 탄좌 내에 있던 시위대와 합류했다. 5,000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철길을 경계로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철로에 있던 돌과 갱목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대치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경찰 대열이 무너졌고, 오후 2시쯤 경찰은 사북읍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경찰 70여명이 중상을 입었고, 그중 순경 이덕수는 23일 새벽에 사망했다. 경찰이 철수하자 시위대는 38번 국도와 태백선 철로를 봉쇄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역설적이게도 사북읍이 완전히 광부들에게 장악되면서 상황은 오히려 진정되기 시작했다. 광부들은 자치방범대를 조직해 과격한 행동을 막았으며 예비군 무기고와 지서 무기고, 광산 화약고를 지켰다. 항쟁 지도부 역할을 한 이원갑.신경을 중심으로 20여명의 협상단이 꾸려졌고, 이들은 22일 오후 인근 삼척탄좌 사무소에서 정부측 대책위원들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지루한 협상 끝에 24일 아침 11개항의 협상안이 타결되었다. 이재기를 비롯한 노조 집행부의 사퇴, 상여금 인상을 빼면 나머지 조항은 대부분 부상자 치료와 보상, 피해 주택 복구 등의 사태 수습책이었다. 격렬했던 싸움치고는 허무하기까지 한 결과였다. "평화로웠던 광산촌이 광부들의 난동으로 하루 아침에 공포의 거리로 변했다. …폭도로 변한 광부들에 의해 점거된 사북읍은 …술 냄새를 풍기며 각목과 쇠파이프를 든 광부들만이 오가는 죽음의 거리였다." 사건 당시 신문들은 한결같이 광부들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며 사태의 본질을 왜곡했다. 그러나 사북은 결코 '평화로웠던 광산촌'이 아니었다.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어용노조의 반노동자적 행태와 경찰의 과잉 개입이었으나 더욱 본질적인 원인은 광산촌의 절망적인 생존 환경이었다. 보통 수백m, 깊게는 수천m 지하로까지 내려가야 하는 막장 노동 속에서 한해 평균 200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고 5,000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었다. 10명 가운데 1명 꼴로 일어나는 막장 사고를 운좋게 피한다고 하더라도 진.규폐증이 광부들을 기다렸다. 79년 가톨릭대 부설 산업의학연구소가 민영탄광 노동자 9,15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가운데 16.1%가 진폐증 환자였다. 하루 3교대로 8시간씩, 한달 평균 28일씩의 중노동을 하면서도 이들이 받는 임금은 79년 당시 평균 16만4천원으로 5인 가족 최저생계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광부들이 거주하는 사택촌은 거의 집단수용소와 같았다. 가구당 주거면적 5∼6평에 30∼40가구가 한 곳의 공동변소를 이용했으며, 공동수도의 물마저 제한 급수를 받고 있었다. 탄광촌의 유일한 후생복지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목욕탕은 중앙 사택의 단 한 곳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노조였으나 회사는 지부장에게 자재 납품권, 덕대 하청권, 식당 운영권 등을 주는 방식으로 노조를 철저히 어용화시켰다. 한편 합의서에는 주동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들어있었지만, 군.검.경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는 현지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기다린 뒤 5월7일 70여명의 광부와 부녀자들을 연행해 가혹한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 그 가운데 이원갑.신경을 비롯한 25명이 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사북항쟁은 고립된 지역에서 일어난 우발적이고 비조직적인 싸움이었지만 80년 봄의 노동운동 흐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사북항쟁이 끝나자마자 일신제강.인천제철.부산파이프 등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격렬한 형태로 터져나왔다. 4월 들어 봇물처럼 터져나온 노동자들의 투쟁은 학생시위와 더불어 신군부의 권력 장악 프로그램을 위협했고, 사북에 검거 바람이 불어닥친 열흘 뒤인 5월17일 신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본격적인 권력장악에 들어갔다."

 

4.

'뿌리관'은 이런 사북항쟁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방문객을 맞이하시는 분이 다름 아닌 이원갑 씨(69)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역사

역사는 살아 있고

 

걸어다니는 역사

역사는 걸어다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어눌함

차마 말 못한다.

차마 말문을 열기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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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뿌리관'에는 사북항쟁만이 아니라 1995년 3월 3일 투쟁의 역사를 주요하게 기억하고 있다. 석탄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지역이 공동화하자 광산노동자와 주민들은 대대적인 투쟁을 벌여 1995년 3월 3일 카지노의 허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특별법 제정을 정부에게서 끌어내었고, 그 카지노가 지금 이 지역 경제의 주요한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뿌리관'은 3.3 주민생존권 투쟁의 결과물인 셈이다. 사실 '뿌리관'은 동원탄좌 복지관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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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뿌리관이 문을 연 것은 바로 올해 2008년 6월 5일의 일이었다. 물론 뿌리관의 전시실 등이 문을 열기 전에도 뿌리관에서는 지역주민들을 위한 아카데미 개설이나 문학 행사 등이 열기도 하였다.

 

분명 탄광촌, 폐광촌의 기억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희망은 어디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가? 전시실의 한 코너에는 '탄광촌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이들. 어린이들. 사진 속의 아이들은 이제 다 커서 어디선가 살림을 꾸려나가고 아이들을 키워나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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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의 아이들! 그 아이들이 다시 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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