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25일 수요일

심산 김창숙과 김수환 스테파노

아침에 출근하여 전자우편함을 열어보고 성균관대학교의 송재소 교수가 쓴 짤막한 칼럼 하나를 읽었다. 제목은 '심산 김창숙과 김수환 스테파노'. 두 분 모두 마음속 깊이 존경심이 우러나는 큰 어른이신데, 이 글을 읽으니, 그 어른들의 세심한 마음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얼마 전에 진해기적의도서관 관장으로 일해오신 이종화 선생께서 서울 나들이 길에 사무처를 방문하셔서, 이효재 선생님에 대한 일화를 전해주셨는데, 그 일화도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일화와 다르지 않았다.

 

아, 봄 기운이 느껴지는 아침에 어른이 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한다. 누군가 나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을까. 쯧쯧 언제 사람 되려고! 사람 되는 것도 쉽지 않고, 어른 되는 것도 쉽지 않구나!

 

"추기경은 “이 어른이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뵙고 절을 했어야 하는데 돌아가셨으니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 말했다고 한다."

 

심산 선생에 대한 이덕일 씨의 글도 스크랩을 해놓는다.

 

△ 심산 김창숙이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항일투쟁과 반독재 투쟁에 평생을 바쳤다.(사진/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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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과 김수환 스테파노


                                                                         송 재 소(한문학자)

명동의 기적. 김수환 추기경을 애도하는 인파가 4일간 4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새벽 6시부터 자정 무렵까지 강추위에 떨며 4,5시간을 기다려야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을 잠깐 볼 수 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것을 ‘명동의 기적’이라 불러도 좋을 듯싶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추기경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자라면 장사를 해서 25세에 가정을 꾸리고 30세에는 어머니에게 인삼을 사드리겠다는 소박한 꿈을 지녔던 소년이 47세의 나이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되어 그동안 걸어왔던 성직자로서의 큰 걸음이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나 개인적으로는 추기경의 인간적인 풍모가 가슴에 와 닿았다.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결혼해서 오순도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골 오두막집 풍경, 얼마나 정겨운 풍경인가.” 추기경인들 어찌 인간적인 고뇌가 없었을까. 이런 인간적인 고뇌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분은 또 추기경 임명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의 감회를 이렇게 술회하기도 했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망갈 길이 정말 막혔구나’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 일본 유학, 사제서품, 주교임명 등 신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결국에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도망갈 방법이 없을까’라는 궁리를 떨치지 못했다 .

물론 ‘도망간다’는 것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지만 이 얼마나 솔직한 고백인가. 이런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도 사람들은 그에게 이끌렸을 것이다. 그동안 신문과 인터넷에 소개된 수많은 일화 이외에 비교적 덜 알려진 이야기 한 토막을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몇 년 전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에서 추기경에게 심산상(心山賞)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일이 있었다. 이 상은 독립투사이자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선생의 업적을 기려서 제정한 상인데,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내부의 진통이 있었다. 심산선생은 저명한 유학자이다. 유학자인 심산선생 이름으로 주는 상을 기독교인이 받아서 되겠느냐는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수상자를 추기경으로 결정하고 추기경의 의사를 타진한 결과 추기경은 수상을 흔쾌히 수락하셨다.

종교가 장벽이 되지 않은 사랑의 베풂


그런데 심산상을 수상한 사람은 심산선생의 기일(忌日)에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묘소를 참배하려면 유교식으로 절을 해야 하는데 추기경에게 그걸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거리낌 없이 절을 했고 모두들 놀랐다. 후일 기독교계에서 이것이 문제가 되자 추기경은 “이 어른이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뵙고 절을 했어야 하는데 돌아가셨으니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 말했다고 한다.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추기경으로부터 받은 감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는 교수들의 자발적인 모임이어서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교수들의 회비와 기타 찬조금으로 운영하던 터이라 그 때 상금이 고작 7백만 원이었다. 이런 사정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으셨는지 추기경께서는 후일 사람을 시켜서 조그마한 상자를 보내왔는데 그 안에는 상금 7백만 원에 3백만 원을 더한 일천만 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

추기경은 이런 분이었다. 그분에게는 유교와 기독교의 장벽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고 가셨기에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이 그토록 그 분의 선종(善終)을 아쉬워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글쓴이 / 송재소
· 한문학자
· 前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 저 서 : <다산시선>
            <다산시연구>
            <신채호 소설선-꿈하늘>
            <한시미학과 역사적 진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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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ww.hani.co.kr/.../021147000200703140651034.html

 

허허,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느냐

유학자들이 친일로 기울 때 독립운동하다 ‘앉은뱅이’가 된 심산 김창숙…아나키스트들과 의거를 일으키고 해방 뒤엔 이승만 정권에 맞서 싸우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서 유교는 지배적 사상이었으나 유학자였던 양반 사대부들은 국망(國亡)에 무심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한 76명의 한국인들은 모두 양반 유학자였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는 이완용·송병준 등과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李載完), 순종의 장인 윤택영(尹澤榮), 명성황후의 동생 민영린(閔泳璘) 등이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전한다. 이때 일제는 1700여만원의 임시은사금을 지배층들에게 내려주었는데, 김창숙은 <자서전-벽옹(躄翁·앉은뱅이 노인) 73년 회상기>에서 “그때에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창숙은 유림으로서 독립운동에 나선다.



1879년 음력 7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김창숙은 조선 중기의 명현(名賢)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3대 종손으로서 유림의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자 김창숙은 대유(大儒)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목을 베자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고종은 아무런 회답이 없었고 김창숙은 통곡하고 돌아왔다. 그 뒤 송병준(宋秉畯)·이용구(李容九) 등의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청원하자 김창숙은 뜻을 같이하는 유학자들을 모아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라며 처벌을 주장하는 건의문을 중추원에 보냈다. 성주 주둔 일본 헌병분견대 소장 노전(盧田彌之介)이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곧 반역이 아닌가?”라며 건의문 취소를 요구하자, 김창숙은 “사직(社稷·나라)이 임금보다 중한지라, 난명(亂命·혼미한 상태에서 내린 명령)은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충성하는 길이다”라고 답한다.

단재와 함께 친일파의 집을 털다

나라가 끝내 멸망하자 김창숙은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방황하다가 ‘선세(先世)의 유업’을 망치겠다는 모친의 꾸짖음을 듣고 경서(經書)에 매진했다. 김창숙은 <자서전>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성의정심(誠意正心)·수신제가(修身齊家)·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가 모두 여기서 벗어나 딴 데 구할 것이 아님을 믿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유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선비 김창숙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김창숙은 1919년 ‘독립선언서’를 보고는 한탄했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였다. …지금 광복운동을 선도하는 데 3교(천도교·기독교·불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유교를 꾸짖어 ‘오활한 선비, 썩은 선비와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김창숙은 곽종석(郭鍾錫) 등 전국의 유림 130여 명을 규합해 파리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낸 ‘파리장서사건’, 즉 ‘제1차 유림단사건’을 주도했다. 한국의 유림이 역사 앞에 겨우 체면치레를 하게 된 것이다. 그는 1921년 2월 상해에서 북경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우당 이회영(李會榮), 단재 신채호(申采浩)와 의기투합한다. 우당과 단재는 아나키스트인데, 아나키스트와 유림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 비타협적 항일 의지로 이루어진다. 김창숙은 아나키스트들과 국내 친일파 자금이 흘러든 북경 모아호동 고명복의 집을 털기도 했다.

“모아호동은 귀족들이 사는 곳으로 경비가 철통같아 일을 끝내려면 치밀한 사전계획이 필요했다. …김창숙이 앞장을 섰고 이을규·이정규·백정기가 그 집으로 잠입하여 값진 물건을 빼내어 무사히 돌아왔다. …다음날 모아호동 사건은 각 신문마다 대서특필되었다. 교포는 물론 중국인들까지도 모두 깜짝 놀랐다. 전 수사진이 동원되어 범인 체포에 나섰다.”(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독립을 위한 실천에는 주저하지 않는 선비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김창숙은 일제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하기도 했다. 북경 정부의 임시집정 단기서(段祺瑞)의 비서였던 김달하는 독립운동가로 위장한 일제의 밀정이었다. 김달하가 조선총독부에서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비워놓았다고 회유하자 김창숙은 “네가 나를 경제적으로 곤란하다고 매수하려 드는구나. 사람들이 너를 밀정이라 해도 뜬소문으로 여겨 믿지 않았더니 지금 비로소 헛말이 아닌 줄 알았다”라며 이회영과 상의해 제거를 논의했고, 의열단 유자명(柳子明)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1925년 3월 다물단(多勿團)과 합작해 김달하를 제거한 것이다.

김달하를 처단한 직후 김창숙은 국내로 잠입했다. 김창숙은 이회영과 내몽골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북경 정부의 전 외교총장 서겸(徐謙)을 통해 북경 정부의 실권자 풍옥상(馮玉祥)과 교섭해 내몽골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에 3만여 정보(町步)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이곳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던 이회영은 이 방면에 많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자금 마련을 위해 김창숙은 1925년 8월 북경을 떠나 서울로 잠입했다. 서울에서 정수기 등과 비밀결사 ‘신건동맹단’을 조직하고는 직접 영남으로 내려가 자금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3·1운동의 열기가 사라진 뒤여서 반응이 신통치 않자 김창숙은 사람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 김창숙이 우당 이회영과 자주 어울렸던 베이징 후고루원 마을. 그는 아나키스트들과 친일파의 집을 털고 밀정을 처단하기도 했다. (사진/ 권태균)

“내가 이번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 것은 나라 사람들이 호응해줄 것을 진심으로 기대했던 것이오. 전후 8개월 동안 겪고 보니 육군(六軍·천자의 군대, 많은 숫자의 군사라는 뜻)이 북을 쳐도 일어나지 않을 지경이고 방금 왜경이 사방으로 깔려 수사한다니 일은 이미 낭패되었소. …내가 지금 가지고 나가는 자금으로는 황무지 개간 사업을 거론하기도 만 번 어려울 것이니… 이 돈을 의열단 결사대의 손에 직접 넘겨주어 왜정 각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 부호들을 박멸하여 우리 국민들의 기운을 고무시킬 작정이요….”(<자서전>)

일부 자금만을 확보한 김창숙은 1926년 3월 압록강을 건너 다시 상해로 향했다. 그가 출국한 뒤 국내에서는 그와 접촉했던 수백 명의 전국 유림들이 검거되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한다. 상해에서 김창숙은 유자명에게 청년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는 문제를 상의했는데, 유자명은 자서전 <한 혁명자의 회억록>에서 이렇게 썼다.

“그때 김창숙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고향에 가서 친구들에게 돈을 모아가지고 왔는데, 이 돈으로 폭탄과 권총을 사서 적인(敵人)들과 투쟁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나석주(羅錫疇)는 그때 천진에 있었는데, 나는 김 선생과 폭탄과 권총 한 개를 사서 상해에서 배를 타고 천진에 가서 나석주를 만나 서로 상의한 결과 나석주는 자신이 행동하겠다고 말했다.”(유자명, <한 혁명자의 회억록>)

일제의 고문, 웃으며 받다

1926년 세모를 물들였던 나석주 의사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중국인 노동자 마중덕(馬中德)으로 변장해 입국한 나석주는 1926년 12월28일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과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총격전을 벌여 경기도 경찰부 전전(田畑唯次) 경부보와 동양척식회사 토지개량부 대삼(大森太四郞) 차석 등 3명을 사살하고 총알이 떨어지자 교전(交戰) 중 자결했다.

1926년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임된 김창숙은 유자명에 의해 의열단 고문으로도 추대된다. 그러나 그해 12월 지병인 치질이 재발해 들것에 실려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에 있는 영국인 경영의 공제병원에 입원했다. 이듬해 2월에 재수술을 받고 가료를 하던 중 일본 영사관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장기(長崎·나가사키)와 하관(下關·시모노세키)을 거쳐 입국한 김창숙은 대구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형구를 야단스레 벌려놓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나는 웃으며 ‘너희들이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종이와 붓을 달라 하여 시 일절을 써주었다. ‘조국 광복을 도모한 지 십 년에/ 가정도 생명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뇌락(磊落·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음)한 일생은 백일하에 분명한데/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는가.’”(<자서전>)

이때 변호사 김완섭(金完燮)이 변호를 자청하며 거듭 만나자고 요청하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군은 무슨 말로 변호하겠는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김완섭이 ‘입회한 간수의 기록이 필시 조서에 들어가 앞으로 재판에 크게 불리할 것’이라고 염려하자, “나는 일찍이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군은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초연했다.


△ 김창숙의 생가. 그는 말년에 집 한 칸도 없이 여관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사진/ 권태균)

1928년 14년형을 선고받은 김창숙은 대전형무소에서 감옥 생활을 시작했다. <자서전>에서 “나는 고문을 받은 이래 병이 더욱 악화되어 두 다리의 마비로 진작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일어날 때 남의 부측을 받아야 했다”고 쓰고 있다. 대구경찰서에서 받은 고문 때문에 불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김창숙은 1933년 신임 전옥(典獄·간수장) 궁기(宮崎)가 절을 할 것을 종용하자 “감옥 생활 6, 7년 동안 옥리에게 머리 숙여본 적 없다”면서, “내가 너희를 대하여 절을 하지 않는 것은 곧 나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수함이다”라고 거부했다. 이 시절 김창숙뿐만 아니라 전 가족이 독립운동에 나서 고초를 겪었다. 장남 환기(煥基)는 1927년 고문사했으며, 차남 찬기(燦基)도 투옥되었는데, 아들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김창숙은, “네가 옥에 갇힌 지 벌써 이태가 지났구나… 너의 허약한 체질로 몇 년씩 고문을 받아왔으니 결국 큰 병에 걸린 것이 당연하겠구나. 비록 그렇긴 하나 네 애비가 8년의 옥고를 치르고 큰 병에 걸리고도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네가 생각하라… 때로 <소학> <논어> <맹자> 등 마음을 다스리는 데 절실한 책을 읽고 생각해라”라는 편지를 보냈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성명 발표

김창숙은 여러 번 와병으로 사경을 헤맸으나 그때마다 살아남았다. 1934년 9월에 위중하자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는데, 이때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45년 8월에는 건국동맹(建國同盟) 남한 책임자로 피선되었다는 혐의로 성주 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8·15 해방으로 옥문을 나섰다.

비록 해방은 되었지만 해방 정국은 김창숙에게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해방 뒤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나서는 한편 난립된 전국 유림을 유도회(儒道會) 총본부로 통합하고 위원장에 올랐다. 그리고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굳어지자 1948년 3월 김창숙은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성환·조완구와 ‘7인 지도자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소 양국이 군사상 필요로 임시로 정한 소위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정시키고 양 정부 또는 양 국가를 형성하면 남북의 우리 형제자매가 미·소 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니… 반쪽 강토에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지역 선거에는 참가하지 아니한다.” 2년 뒤에 벌어질 6·25 전쟁의 참화를 정확히 예견한 성명서였다. 그 2년 뒤 김창숙은 서울에서 6·25를 겪었다. 서울시 인민위원장 이승엽이 지지를 종용하자 단칼에 거절한다.

집 한 칸 없이 세상 떠난 통일운동가

1951년 1·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했는데, 그해 봄 이승만 ‘하야경고문’을 발표했다가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것을 필두로 반이승만 투쟁에 나섰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미 미 군정 산하 민주의원 회의석상에서 이승만에게 “당신은 오늘 이미 민족을 팔았거니와 다른 날에 국가를 팔지 않는다 보장하겠소?”라고 성토했다고 전하고 있다. 1952년 이승만이 당선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들고 나오자 이시영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하려다가 괴청년들의 습격으로 모시 두루마기가 피투성이가 되는 테러를 당하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의 급서로 이승만이 당선되자 “이제 전국의 민심은 각하에게서 이탈되었다”라면서 재선거를 요구하는 ‘대통령 3선 취임에 일언을 진(進)함’이란 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반이승만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김창숙을 모든 자리에서 쫓아내는 공작으로 맞섰다. 교육부는 1956년 ‘김창숙 명의’로는 신입생 모집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공문을 보냈고, 그는 결국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에는 성균관장, 유도회 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1958년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운동에 나서고 81살 때인 1959년에는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에 나서면서 이승만 대통령 사퇴권고 서한을 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축출되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 대표로 추대되어 통일운동에 나섰다. 그는 집 한 칸도 없이 여관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84살 때인 1962년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1957년 지은 ‘통일은 어느 때에’라는 시는 아직도 완수하지 못한 역사의 임무를 전해준다. “조국 광복에 바친 몸/ 엎어지고 자빠지기/ 어언 사십 년/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 사람 손아귀에/ …/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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