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9일 월요일

인간실종 사태--고 이상림 씨를 생각함

솔직이 할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하랴. 너무나 뻔한 조사결과, 너무나 뻔한 발표. 그런데 뭐하러 며칠씩이나 또 뜸을 들여야 했을까? 검찰이 '용산 참사'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예상했던 대로다. 뭐 특별한 것은 없었다. 인구에 회자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참상만이 또렷해질 뿐이었다.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이 참사의 원인과 과정, 그 결과에 대해 꽤 오랜 기간 이야기해야만 할 것이다. 이 참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말은 아니 한다 해도 국민들도 이 참사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람이 살고 있는 현실이고 그 현실의 아픔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이 아닐까? 나는 이 참사가 알려지고 몇 가지 신문기사를 읽은 뒤, 고 이상림 씨와 그 가족 이야기에 눈길이 갔다.

 

사건이 나고 어떤 사람들이 희생되었나 하는 궁금증은 현장을 뛰어다니는 사회부 기자라면 기초 중의 기초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른바 보수적인 언론의 기사에서는 이 참사 희생자들의 '삶'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도 없고, 삶도 없고, 오로지 정치적, 이념적 공격만이 있을 뿐이다. 끔찍하다. 내가 이 사태에 할 말이 있다면 이 한마디 말 뿐이다. "법을 보기 전에 사람을 보아야 한다."(참고: http://blog.paran.com/transpoet/221451)

 

그리고 검찰의 조사결과 발표 이후, 이 사건은 단지 재개발에 떠밀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서민들의 비참한 현실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 앞에서 내서워지는 법과 질서, 정권의 자기 안위와 관료들의 자기 보신, 눈을 뜨고도 제대로 된 진실을 외면하는 인간실종의 사건, 인간실종의 사태가 되었다.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인 이상, 이 사태는 묵과할 수 없으며, 묵과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경찰이든, 용역이든, 검찰이든, 청와대 관계자이든, 기자든, 시민단체 관계자이든. 누군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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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동산계급사회>의 저자인 손낙구는 '대통령 이명박과 철거민 이상림'을 대조하고 있다. (출처: http://blog.ohmynews.com/balbad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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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용산 철거민 참사의 희생자 고 이상림씨는 성도 같고 나이도 칠십대 전후로 비슷하다. 대통령은 소망교회 장로, 이씨는 신용산교회 집사를 지낸 같은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해방과 분단, 경제개발과 민주화 시대를 함께 겪어온 두 사람의 운명이 어디서부터 갈렸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30년 전 마흔 살 즈음에 한 사람은 재벌건설사 사장이 됐고 한 사람은 용산에서 남의 가게를 세내어 식당을 차렸다.


 

한 사람이 국회의원과 서울시장을 거쳐 대통령이 되기 위해 새벽기도를 했을 2년 전 즈음에, 다른 한 사람은 전 재산을 털고 빚까지 내서 식당 자리에 차린 호프집 장사가 잘 되길 새벽기도 때마다 빌었을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추진한 뉴타운 재개발과 용산 국제빌딩 주변 도시환경정비 계획이 철거민 이상림씨의 운명을 가혹하게 바꿔놓을 줄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이상림씨의 일상을 며느리 정영신씨는 이렇게 전한다.

 

“매일 새벽 4시30분이면 어김없이 기침했다.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고, 자전거로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가볍게 운동을 한 후에는 바로 가게(레아호프)를 향했다. 호프집은 저녁 장사니 남편과 나는 보통 새벽 3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시아버지는 잠긴 문을 열고 환기를 하고 청소를 했다. 노량진 수산시장과 경동시장을 둘러 시장도 봐주었다. 시아버지에게 레아호프는 분신이었다.”

- 참세상 2009.2.2 [인터뷰] 고 이상림씨 며느리 정영신씨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사글세 신세였지만, 한 자리에서 30년 가까이 식당을 운영해 삼남매를 키우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온 이씨는 나이 일흔에 식당 일이 힘에 부치자, 막내아들과 함께 빚을 내고 전세금을 빼서 식당을 호프집으로 바꿨다고 한다. 늙은 아내는 주방 음식을 하고, 며느리는 홀을 맡고, 막내는 카운터를 보고 온 가족이 그렇게 새벽 3시까지 몸이 녹초가 돼 잠이 들면, 이씨가 가게 문을 열고 쓰레기통을 비우거나 테이블을 닦으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 것이다.

 

30년이 넘은 낡은 남의 가게였지만 전 재산을 들여 깨끗이 공사를 하고 온 가족이 달라붙어 열심히 한 덕에 장사가 제법 됐다. 며느리는 그 때 ‘몇 년 더 고생하면 빚도 갚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더 가게 나오셔서 고생 안하시고 쉬시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그러나 재개발의 날벼락이 떨어지고 속전속결로 강제철거가 시작되고 가게에는 용역깡패들이 진을 치고…. 세입자들의 전 재산을 털고 투기와 고분양가를 통해 개발이익의 잔치를 벌이려는 건설재벌과 부동산 소유자, 철거용역깡패들의 탐욕은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를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용역은 시아버지의 급소를 잡아 댕겼다. 70 노인의 어른을 그럴 수 있나…. 말이 안 나온다. 주먹에 맞아 바닥에 쓰러져 옷이 찢기고, 그 광경을 본 시민들은 어처구니없어 했다. 백주대낮에 30살 먹은 건장한 남자가 70 노인을 때리고 끌고 갔다. 사진을 찍으려 하니 카메라를 부셔버린다며 대들었다. 경찰도 안 왔다. 다 피신했다. 용역 한 명이 식식대며 대걸레자루에 갈고리를 달고 나타났다. 현수막을 찢었다.”

- 참세상 2009.2.2 [인터뷰] 고 이상림씨 며느리 정연신씨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위기를 돌파한다며 청와대 지하 벙커에 들어가 있을 때인 보름 전, 철거민 이상림은 5층 건물 옥상 망루로 올랐다.

 

대통령은 부동산 재산만 369억 원으로 고위 공직자 중 최고의 부동산 부자다. 오래 전 약속대로 '집 한 칸'만 남기고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더라도 남은 그 '집 한 칸'이 30억 원이 넘는다.

 

그러나 철거민 이씨는 대통령처럼 헌납할 집도 없을 뿐 아니라 재개발 과정에서 전 재산을 사실상 털리게 된 것이다. 서른여섯 살 먹은 이씨의 막내아들은 철거민대책위원장을 맡아 정당한 보상과 장사할 공터를 마련해달라 호소했지만 돌아온 건 폭력뿐이었다. 막내아들과 서로 망루에 오르겠다 옥신각신하다 막내만 보낼 수 없어 칠순 노인도 따라 올랐다.

 

하지만 망루에 오른 지 25시간인 20일 새벽, 테러진압 담당 경찰 특공대의 과잉 진압 과정에서 이씨는 목숨을 잃었다. 진압을 피하다 옥상에서 떨어진 막내아들은 무릎 뼈가 다 으스러지는 부상을 당한 채 감옥에 갇혔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상림씨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참사가 터진 날 대통령은 ‘진상규명이 우선’이라 했다. 물론 ‘대통령의 사람들’이 나서서 ‘과격시위’ ‘떼를 쓰는 철거민’ ‘도심테러분자’ ‘배후에 전철연이 있다’ 등 막말을 쏟아냈지만, 그 뒤로도 대통령은 말을 삼갔다. 그러다 지난 달 30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원탁대화 자리에서 대통령은 용산 철거민 진압이 과도한 강경책이었다는 지적에 대해 “완전히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며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 철회 의사가 없다는 강경한 소신을 털어놨다.

 

이명박 대통령과 고 이상림씨의 인생역정은 우리사회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계층의 삶을 보여준다고도 하겠다. 이명박 대통령의 인생역정이 개발주의의 성공 신화라면, 철거민 이상림씨의 죽음은 개발주의의 탐욕이 부른 억울한 죽음이라 하겠다. 부동산 부자가 부동산 서민의 주머니를 터는 투기와 개발로 돈을 벌고 계급을 이루며 사는 부동산 계급사회의 극명한 단면인 것이다.

 

용산 철거민 참사가 일어난 지 보름이 지나고 있다. 어쩌다 억울한 사람 여섯이 목숨을 잃게 됐는지 검찰이 곧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동안 모든 책임은 철거민에 있고 경찰 잘못은 없다는 쪽으로 몰고 온 검찰 여당 청와대 극우언론의 언행을 볼 때 발표 내용은 뻔해 보인다.

 

지난 보름 동안 우리사회의 힘 있는 집단은 ‘가재는 게 편’ ‘초록은 동색’을 넘어 ‘대통령 이명박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고 모든 책임은 철거민 이상림에게 있다’ 나아가 ‘이명박 대통령처럼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철거민 이상림처럼 살아온 사람들을 탓하라’는 식으로 사태를 몰고 왔다. 심지어 국민 전체를 대변해야 할 대통령조차 억울한 죽음에 대해 사과한 마디 하지 않고 살인진압을 두둔하는 벌거벗은 부동산 계급사회의 야만성 앞에 제3자인 국민들도 원통하고 화가 나는 데 유가족들 심정은 오죽하랴.


 

“이번 참사는 재개발이 주범입니다. 재개발을 부추기는 정부와 재개발로 돈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재벌 기업들이 주범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충실히 해온 경찰과 용역들이 주범입니다. 여러분들께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주범들은 가만히 두고 검찰은 우리 철거민들만 구속시켰습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돌아가신 분들에게 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진실이 밝혀지고 우리 아버지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 2009.1.31 촛불집회에서 고 이상림씨의 딸 이현순씨가 낭독한 호소문

 

나이가 들수록 부모의 삶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게 자식이지만, 칠순 아버지를 잃고 무릎이 으깨진 채 감옥에 갇힌 막내 동생을 둔 이현순씨의 사부곡(思父曲)은 가슴을 치게 한다.

 

“저는 두 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 씩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부모님한테는 한 번을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말을 한 번도 못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품에 안겨서 한 마디 ‘사랑해요’라고 하고 싶습니다. 제가 한 번만 아버지 손을 잡고 한마디만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2009.1.31 촛불집회에서 고 이상림씨의 딸 이현순씨가 낭독한 호소문

 

무엇이라도 하자. 정 용기가 나지 않거든 가까운 사람들과 호프집에 갔을 때 잠시 마음속으로 고 이상림 할아버지의 넋을 달랜 뒤 잔을 기울이자. 혹시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탐욕에 젖은 인간들이 부디 회개하기를 기도하자. 이상림 할아버지처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열심히 살아오신 우리의 부모님들과 결국 그렇게 살아갈 우리와 자식 세대를 생각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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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만 사랑한다고 하게 해 주십시오"



                         - 고 이상림씨의 딸 현선씨 발언 전문


저는 고 이상림씨 딸인 이현선이라고 합니다.


토요일 오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신 것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참사가 발생한 20일부터 설연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촛불을 들고 우리 아버지들을 추모해 주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눈앞이 캄캄했던 우리 유가족들은 여러분들이 들어주신 촛불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 참혹한 일이 우리 유가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시는 일이기에 우리 유가족들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보통 요즘 장례는 3일장을 치루는데 저희들은 벌써 열흘이 넘었습니다. 열흘이 넘게 영안실을 지키고 있는 일이 막상 해보니 보통 큰일이 아니더라구요. 유가족들 모두 잠도 부족하고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지만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 조문과 계속 관심을 가져주시는 많은 분들 덕분에 오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어머님들과 함께 고인들의 자녀들도 나와 있습니다. 저희들은 모두 집회란 곳에 나와 보는 것이 오늘이 처음입니다. 우리 아버지들이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아마 평생 집회에 나오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집회나 시위에서 제가 이렇게 마이크를 잡고 많은 분들 앞에서 발언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해 봤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용산 4지구에서 30년 가까이 식당을 운영해 오신 평범한 한 아버지셨습니다. 재개발을 하면서 4지구니, 5지구니 자기들 마음대로 구역을 나누었지, 제가 어렸을 때에는 4지구니 하는 말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님들은 식당 일을 하시면서 우리 3남매를 키우셨습니다. 한자리에서만 30년 동안 장사를 하셨으니 저희 부모님들도 참 대단한 분들입니다. 아버지께서 일흔을 넘기시며 식당을 호프집으로 리모델링하고 우리 3남내의 막내부부가 호프집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2년전입니다. 막내동생이 바로 용산 4지구 철대위원장으로 어제 구속된 이충연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장사는 막내 부부에게 맡기셨지만 그 호프집을 얼마나 아끼셨는지 모릅니다. 30년 동안 아버지 손길이 묻었던 곳이니 오죽하셨겠어요. 매일 새벽가게 주변을 청소하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밤늦게까지 장사하느라 제대로 치우지도 못하고 집에 들어간 막내 부부를 대신해서 쓰레기통을 비우고 테이블을 손수 닦으시고 나서야 아침식사를 하셨던 분이십니다.


재개발을 한다며 가게를 비우라고 통지를 받기 전까지, 용역회사 직원들이 가게를 빨리 비우라며 가게 앞에 쓰레기를 한가득 부어놓기 전까지, 용산구청에서 “생떼거리”를 쓴다며 아버지를 문전박대 하기 전까지, 우리 아버지는 누구보다 자상하시고 따뜻한 아버지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비록 가난했지만, 집한칸 마련하지 못한 사글세 신세였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족이었습니다. 누가 우리 아버지를 거리로 내몰고 죽음으로 내 몬 것입니까?


여기 있는 저희들이 아버지들을 이 참혹한 일로 잃고나서야 이렇게 처음 집회에 나온 것처럼, 아버지도 집에서 쫓겨나고, 30년동안 장사하던 터전에서 내쫓기게되시고야 처음 집회에 나가셨을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용역들의 폭력을 피해 옥상망루에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운동권”은 바로 이 사회와 부자들이 만드는 것 같습니다. 용산에 재개발이 시작되기 전에는 너무나도 평범하게 살아왔던 저희 아버지, 어머니, 막내동생 부부가 재개발이 시작되고 운동권이 되었으니까요. 아버지는 수천도의 화염 속에서 돌아가시고, 무릎 뼈가 다 으스러진 우리 막내가 목발을 집고 감옥에 갇히게 될 줄을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요즘 저희 유가족들은 아예 TV나 신문을 보고 나면 두통약을 한 알씩 먹어야 할 지경입니다. 어제도 이명박 대통령이 나온 프로그램을 보고 우리 유가족들은 분통이 터져서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용산 참사 이야기가 나오자 이명박 대통령은 “법치주의”를 들먹이며 동문서답을 하시더군요. 말이 좋아 법이지요. 도대체 누구에게 어떤 법을 지키라는 말을 하는 겁니까?


30년 동안 장사하던 곳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는 사람들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게 하는 법, 서민들 쫓아내고 비싼 아파트 지어서 수백억, 수천억을 벌어들이는 재벌 기업들을 위한 법, 용역 깡패들이 주민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폭력을 퍼붓고 가게 담벼락에 시뻘건 페인트로 목매달린 시체를 그려놓아도 내버려 두는 법, 우리 아버지들의 시신을 우리 유가족들이 한번 보기도전에 아무런 동의도 없이 부검을 한답시고 난도질 하고도, 검사가 법대로 한일이니 법적으로는 책임이 없다고 하는 법, 국민 다섯명을 죽이고도 정부에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법, 그런 법도 법이라고 지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인터넷에는 참 별의 별 말들이 다 올라와 있더군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들은 그냥 여러분들과 똑같은 서민들이셨습니다. 많이 배우시거나 특별한 능력을 가지신 분들도 아닙니다. 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것이 부당하니 부당하다고 말하고 살기위해 싸우신 것 밖에는 없습니다. 혼자 싸우기 힘에 벅차니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함께 싸운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번 참사는 재개발이 주범입니다. 재개발을 부추기는 정부와 재개발로 돈 버는 일에만 열안이 되어 있는 재벌 기업들이 주범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충실히 해온 경찰과 용역들이 주범입니다. 여러분들게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주범들은 가만히 두고 검찰은 우리 철거민들만 구속시켰습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돌아가신 분들에게 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진실이 밝혀지고 우리 아버지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끼리는 할 수 없지만 여러분들의 힘이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들도 여러분들이 함께 있어주시는 한 지치지 않고 겁내지 않고 끝까지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혹시 사랑한다는 말 얼마냐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두 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하루에도 열 두번 씩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부모님한테는 한 번을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말을 한 번도 못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품에 안겨서 한 마디 사랑해요라고 하고 싶습니다. 제가 한 번만 아버지 손을 잡고 한 마디만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uid=15539&table=seoprise_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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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 노인, 망루, 죽음 . . .

 

[인터뷰] 고 이상림 씨 며느리 정영신 씨

유영주 기자 www.yyjoo.net / 2009년02월02일 11시21분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이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나이 칠십에 화염병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야만 했던 그 쓰라린 현실을 외면한 이 세상이 두렵습니다.”

 

며칠 전 박김형준 다산인권센터 활동가가 쓴 글이다. 그는 “그들이 손에 쥔 ‘화염병’은 마지막 남은 ‘희망’이자 세상을 향한 ‘절규’”였다고 썼다. 나이 칠십에 화염병을 들고 옥상으로 올랐던 분은 며느리 정영신 씨의 시아버지다. 2차 추모대회가 있던 날 오전에 순천향병원을 찾아 정영신 씨를 만났다.

 

2007년 말부터 용역과 부딪혀야 했다. 꼬박 1년, 불특정한 서울 시민 일가족이 특정한 철거민이 되었다. 살다가 살다가, 어떻게든 살아보려다 몰리고 몰려 맨 마지막에 가서야 두드리게 된다는 곳, 그게 망루였다. 칠십 노인은 망루에 오른 지 25시간 만에 30년을 살아온 분신같은 마을 입구 건물 옥상 위에서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노인의 아들, 정영신 씨의 남편은 용산철대위원장이다. 그는 입원 중에 구속되었다. 정영신 씨의 이야기를 받아적었다. 

 

용산에서 30년을 살아온 시아버지

 

시아버지(고 이상림 씨)다. 72세. 30년을 용산에서 살았다. 매일 새벽 4시30분이면 어김없이 기침했다.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고, 자전거로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가볍게 운동을 한 후에는 바로 가게(레아호프)를 향했다. 

 

프집은 저녁 장사, 남편(이충연, 용산철대위원장)과 나(정영신)는 보통 새벽 3시쯤 집으로 들어왔다. 시아버지는 잠긴 문을 열고 환기를 하고 청소를 했다. 노량진 수산시장과 경동시장을 들러 시장도 봐주었다. 시아버지에게 레아호프는 분신이었다.

 

호프를 하기 전에 시아버지는 시어머니(전재숙)와 갈비집을 하며 조카를 데리고 살았다.

 

남편과 만난 건 2003년 경이었다. 연애를 시작했다. 강변역 등지에서 노점상을 하며 돈을 모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악세사리도 팔고 옷도 팔며 한푼 두푼 모았다. 쉽지 않았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점점 힘에 부치고, 손님도 많이 줄었다. 신랑과 나도 노점상을 계속 하기에 여의치 않았다. 같이 뭉치자 해서 시작한 게 호프였고, 식당 공사에 들어갔다.

 

30년이 넘은 건물이었다. 빚을 내고, 집 전세금을 빼서 새로 짓다시피 공사를 시작했다. 어떻게든 공사비도 아끼려 애썼다. 시아버지가 자제를 사오고 남편은 페인트칠을 했다. 시어머니는 밥을 지었다. 온 가족이 달라붙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한 달에 걸쳐 공사를 했다. 테이블도 직접 다 만들었다. 진짜 공을 들인 가게다.

 

2006년 10월에 가게를 오픈했다. 가게는 깔끔했다. 시어머니가 주방 음식을 하고 내가 홀을 맡았다. 온가족이 달라붙어 일을 하는 걸 보고 주변 사람들도 많이 도와주었다. 장사는 동네에서 손꼽힐 정도로 잘 되었다. 희망이 보였다. 빚 이자 내고, 대출금 내고 그러고도 시어머니 생활비와 가족 생활비가 나왔다. 몇 년 고생하면 빚도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아버지, 시어머니에게 쉬시라 하고 우리가 하면 될 것 같았다. 연애 5년 만인 작년에는 결혼을 했다. 행복, 희망 같은 말이 피부에 와닿았다.

 

가게를 오픈한 지 4개월 후인 2007년 2월 조합이 설립되고 4월에 재개발사업 시행 인가가 떨어졌다. 2007년 10월 조합총회가 열렸다. 이주 및 주거 이전비 지급안과 철거업체가 선정됐다. 통상 사업인가 기간이 3-4년은 걸린다던데, 인가가 떨어진 지 불과 한 달 만에 용역이 들어와 상주하기 시작했다.

 

사업 승인이 나기 얼마 전에 감정단이라며 찾아왔다. 가게 시설이 얼마나 들었냐고 물어왔다. 뭔지를 몰랐다. 그러더니 사업인가가 났다. 좀 지나니 우편물이 하나 날아왔는데 거기 감정평가 금액이 쓰여 있었다. 터무니 없는 금액이었다. 무슨 근거냐 물었더니 답이 없었다. 권리비는 인정을 안 해도 시설비는 인정할 줄 알았는데 아무런 기준이 없었다. 레아호프는 많이 줬으니 조용히 하라는 거였다. 이 사람들 하고는 대화가 안 되는구나 싶었다. 그전부터 구청과 용역이 같은 패거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았던 터였다. 그쪽에서 대화를 피했다. 대화를 하려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가게는 목이 좋다. 참사 건물 맞은 편에 있다. 시어머니가 식당을 했을 때도 들어오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 당시 시설비를 빼고 권리비만 1억5천만 원이 오갔다. 레아호프 가게 공사를 하면서 시설비가 꽤나 들었다. 거물을 새로 지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그건 쳐주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가 없었다. 대책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들 동병상련의 그 사람들 밖에 없었다. 시아버지도 신랑도 열심히 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는 그래도 장사도 잘 되고 하니 많이 주는 거라고 이야기했다. 막상 터무니 없는 금액을 받은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현재 여관을 하는 분은 감정평가가 불과 2백만 원 나왔다. 그것 받아 어디 가서 뭘 하겠나. 노점상은 아예 안 나왔다. 그분들 권리금 주고 자리 사서 들어왔다. 옛날에는 구청에서도 와서 한 달에 얼마씩 치고 그랬다.

 

용역과 부딪혀,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되고

 

용역이라는 사람들과 부딪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최근 한 용역이 참사가 있은 후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작년 7월 1일에 있었던 일이다. 분하다.

 

시아버지와 주민 3분이 현수막을 걸기 위해 사다리에 올랐다. 투쟁이 살길이라는 현수막이었다. 대책없이 이주하라 하니 우리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 시아버지는 열심히 했다. 내 일이었으니까. 이를 보던 용역이 달지 말라, 내려오라며 소리를 쳤다. 4-5군데 열댓 명 정도가 있었다. 그냥 와서 사다리부터 끌어내렸다. 시아버지가 너희들이 무언데 그러느냐며 항의했다. 주위 사람들은 다칠까 걱정돼 말렸다.

 

용역은 시아버지의 급소를 잡아 댕겼다. 70 노인의 어른을 그럴 수 있나.. 말이 안 나온다. 주먹에 맞아 바닥에 쓰러져 옷이 찢기고, 그 광경을 본 시민들은 어처구니없어 했다. 백주대낮에 30살 먹은 건장한 남자가 70 노인을 때리고 끌고갔다. 사진을 찍으려 하니 카메라를 부셔버린다며 대들었다. 경찰도 안 왔다. 다 피신했다. 용역 한 명이 식식대며 대걸레자루에 갈고리를 달고 나타났다. 현수막을 찢었다.

 

그 용역은 갈고리를 들고 협박한 사람이었다. 만약에 시아버지가 입술을 뜯었다고 하면 피가 났을 거고 바로 병원으로 가서 조치를 취했을 거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저들끼리 자해도 하고, 이야기하면 의자를 집어던지는 등 예상하지 못하는 행동을 했다. 주민들은 그랬다. 사람이 한 대 맞으면 한 대 때릴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상식적으로 30대 사람과 70 나이의 사람이 싸워서, 더군다나 누워있는 상황에서 입술을 잡아 뜯어 먹었다는 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돌아가신 분한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우리 가족에 대해 한마디로 시아버지와 신랑이 위원장이라는 이유 하나로 끊임없이 괴롭혔다. 다른 사람이 해도 위원장이 했다고 뒤집어 씌우기 일쑤였다. 다음 날 시아버지는 고소를 했다. 용역도 맞고소를 했다. 시아버지는 3주가 나왔는데, 용역은 4주 진단이 나왔다고 하더라. 시아버지한테 사전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잡으러 왔다. 도망을 다녔다.

 

장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레아호프는 여름이면 문을 열어놓고 장사를 했다. 앞에 꽃가게에서 파라솔을 내놨는데, 한번은 용역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시비를 걸어왔다. 사장을 찾더라. 내가 사장이라 했다. 너 말고 남자 있잖느냐며 시비를 걸어왔다. 유리창을 차고 테이블을 밀고 그러더라. 경찰에 신고를 했다.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들도 겁이 나 신고를 하면 경찰이 오긴 한다. 오면 그들(용역)도 사람이고 하니 이해하라고 한다. 그게 전부였다. 보복이 두려워 다시는 우리 가게 오지 못하도록 경찰한테 부탁했다. 경찰은 알았다고 했지만, 그 뒤로도 건너편 꽃집에 일주일간이나 나타났다. 무서워서 안 나갔다. 아르바이트 직원들이 사장이 없다고 하면 너희들 장사할 수 있을 지 두고 보라고 말했다.

 

어느 날은 손님이라고 말하며 술을 달라고 했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시어머니가 왜 그러냐고 하면 할머니하고는 할 말 없다, 그년 데려오라 라며 일주일 간 횡포를 부렸다.

 

레아호프에서 집으로 가려면 골목으로 가야 한다. 집에 들어가기 전 4거리가 있는데 용역들이 서서 못 가게 했다. 집에 가야 한다고 하면 서 있을 권리가 있다며 비켜주지 않았다. 112에 신고를 했다. 용역들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하니 경찰은 돌아다니라고 하더라. 밤에 길을 못 다니게 하고 편의점에 앉아 있다가 쳐다보면 와서 때린다. 우리도 사람이라 대든다. 그러면 주먹으로 때린다.

 

용역들이 들어오고 나서는 거의 매일 싸우다시피 했다. 거의 매일. 동네에는 포장마차 하는 분들이 많고, 식당이나 꽃집 등 저녁 장사하는 분들이 많았다. 주민들은 동네 규찰을 서기 시작했다. 건장한 애들이 저녁 때가 되면 나와서 쌍소리 해가면서 동네를 휘저었다. 남녀노소도 없다. 잡히는 대로 했다.

 

한 번은 팬티 바람에 목검을 들고 나온 용역이 있었다. 거지 같은 년들 회 쳐 먹는다면서 난리를 폈다. 끊임이 없었다. 망루를 하는 전날까지 계속됐다. 용역 회사 2개라 하는데 사실상 하나였다. 현암이나 호람이나 같았다. 숫자가 부족하면 서로 다 오라고 해 라며 부른다.

 

우리 집 앞이 주차장인데 용역은 거기다 컨테이너 3개를 갖다놓고 상주했다. 가게는 전면이 유리라 밖이 보이는데 주위에 계속 배회했다. 오죽하면 옆 가게가 이사를 나갔다. 옆 가게가 이사를 하니 거길 때려 부수고, 오물을 갖다 뿌렸다. 손님들은 냄새가 난다며 술 마시다가도 일어난다. 비둘기 죽은 거, 계란 썩은 거 던져놓고 가게가 난리다. 장사 하지 말라는 거다. 시아버지가 용역을 잡았다. 끝까지 따라가니 용역 사무실로 들어갔다. 112에 신고했다. 경찰은 30분이나 걸려 현장으로 나왔다. 증인도 있다. 세계일보 기자가 그걸 봤다. 사무실에 있으니 잡으라고 했지만 경찰은 잡으러 들어가지 않았다. 약 40분 후 그 용역은 뒷문으로 도망을 갔다. 경찰? 믿을 수 없다.

 

나는 철거민이지만 전철연 회원은 아니다. 하지만 시아버지와 신랑은 회원이다. 신랑은 걱정되는 걸 나한테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늘 괜찮다며 안심시키곤 했다. 하지만 사람이 들어올 때가 됐는데 안 들어오고, 며칠 있으면 해결될 거라고 했지만 앞이 불투명해 보였다. 망루란 거, 몇 번 따라다녀 보았기 때문에 그게 무언지 안다. 철거민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투쟁이다. 민주노동당이나 평화적 방법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주비 몇 푼 더 받도록 해주는 게 다였다. 그게 아니었다. 삶의 터전, 30년을 살아온 내 집, 내 가게, 내 삶이란 게 있다. 건설사와 조합과 당국은 건설 공원 부지에 가수용단지 만들어서 장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작은 소망조차 묵살했다.

 

19일 새벽, 시아버지와 신랑이 망루에 올라갔다. 올라간 후에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바닥에 경찰이 우체국까지 쫙 깔렸다. 가게 맞은 편 건물 옥상에는 용역과 경찰이 계속 물을 뿌렸다. 망루가 채 지어지지도 않았는데 아래층에서는 계속 시커먼 연기가 났다. 용역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엄청 맞을 거라는 생각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기도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죽을 줄은 몰랐다.

 

대화가 이루어질 줄 알았다. 우리가 뭘 원하는지. 한 번만 이야기를 들어줬어도 망루로 올라가지는 않았을 거다. 그들은 끌어내 반 죽여야지 하는 생각밖에 없어보였다. 용역과 경찰이 내 옆에 서서 내가 누군지 모르니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하는데, 2시간이면 끝난다는 식으로 말하더라.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루종일 찾아다녔다. 현장을 한 번만 들어가게 해달라며 3시간이나 울며 매달렸다. 용산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따라갔더니 신원 미상의 시신이 3구가 있다고 했다. 왜 신원 미상이냐고 물아봤다. 시신이 너무 많이 훼손이 되어서 그랬다고 했다. 허락없이 부검을 했다. 국과수 결과 나왔대서 순천향병원으로 왔다. 한참 후 시신을 확인했는데 알아볼 수가 없었다. 우리 시아버지 아니다,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다음날 시아버지가 맞다는 거였다. 지문이 나왔다는 거다. 미칠 지경이다. 지문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신을 왜 하루동안 신원미상이라 하고, 가족 허락도 없이 부검을 했나. 시어머니가 시신을 봤다. 반지를 끼고 있었다. 처음에 한 번만 보여줬어도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한 번만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는데 안 된다는 거였다.

 

신랑 입원 중 체포, 구속

 

신랑이 체포되기 전 날 내과 의사는 29일 검사 결과를 보고 퇴원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매일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28일 엑스레이에는 가스로 인한 폐 염증이 나타났다. 코를 풀면 피가 나고 가래를 뱉으면 까만 재같은 게 나왔다. 체포되는 그날도 엑스레이를 찍고 이비인후과에 갖다왔다. 기브스를 한 무릎 붕대를 푸니 많이 부어 있었다. 엠알에이 찍어야겠다던 차에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자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퇴원 조치되었고 체포한다는 거였다.

 

망루 왜 올라갔겠나

 

시아버지도 돌아가신 분도 가진 게 없어서 돌아가셨다. 살아보려고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살려고 들어간 거지 죽으려고 들어간 게 아니다. 원주민 다 내쫓고 땅투기에 눈먼 부자들만 득시글했다. 그렇게 무리한 요구였나. 30년을 한 곳에서 장사하고, 자녀가 학교에 다닌 터전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대체 그 돈 받아서 어디를 가서 뭘 하고 살 수 있겠나.

 

공사하는 기간만이라도 해줄 수 있을 거 같았는데, 0.001%만 생각해도 해줄 거 같았는데, 용역 줄 돈은 있고 세입자한테 줄 건 없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망루에 올라가신 분들 한 번만 대화를 했어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다.

 

이 분들 망루 왜 올라갔겠나. 왜 경찰이 처음부터 와서 진압하고, 용역이 경찰 방패를 들고 다니나. 조합과 이야기하기 위해서지 경찰과 싸우려고 올라간 거 아니다. 그 분들은 범죄자가 아니다.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이다.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억울한 사람들이 계속 생길 거다. 이젠 뭐가 진실인지, 뭐가 현실인지 분간도 안 된다.


 
▲  고 이상림 씨의 며느리 정영신 씨
 
 
 

▲  7월 1일 벌어진 사건에 대한 주민 김진흥 씨의 진술

▲  고 이상림 씨가 용역의 폭력에 당한 상처

 

▲  주민의 진술

 
▲  용역들이 길을 못 가게 막아선 모습

 
▲  용역들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스프레이 그림.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 그림과 같은 말을 하고 다닌 것으로 확인됐다.

▲  용역들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스프레이 그림.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 그림과 같은 말을 하고 다닌 것으로 확인됐다.

 

▲  경찰을 불렀으나, 경찰은 길을 돌아서 다니라고 했다.

▲  레아호프 입구에 죽은 비둘기, 계란 등을 던진 모습

 

▲  폭행당한 이충연 용산철거대책위원장

 
▲  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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