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일 목요일

헤세도서관 10주년-`보아하니 투쟁은 벌써 시작되었네`

헤르만 헤세(1877∼1962), 저의 독서체험에는 헤세의 책들에 빠져들던 청소년기가 있습니다. 아래 기사 제목은 '헤르만 헤세 탄생 132주년 및 목원대 '헤세도서관' 개관 10주년'이라 되어 있는데, 헤세가 탄생 132주년이 되었다는 것이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니, 그냥 '헤세도서관 10주년'이라 해야 할 듯싶습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7년 전에 제가 썼던 글이 떠올랐습니다. 제목은 "보아하니 투쟁은 벌써 시작되었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헤세 체험을 반추하면서, 헤세에 대한 새로운 수용이 필요하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언급한 글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그 글을 꺼내어 읽어봅니다. 당시 이 글을 쓸 때, 대전 목원대 독문학과의 홍순길 교수님의 특별한 컬렉션으로 '헤세도서관'이 개관할 수 있었다는 것을 듣고 이 도서관을 방문하여 홍 교수닙을 한번 뵐 수 있기를 기대했는데, 어느덧 홍 교수님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헤르만 헤세 탄생 132주년 및 목원대 『헤세 도서관』 개관 10주년 기념

2009년 07월 02일 (목) 14:28:31

 

   
헤르만 헤세의 모습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 탄생 132주년 및 세계 최초 유일의 목원대『헤세 도서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한국헤세학회(회장 목원대 독일언어문화학과 정경량 교수) 심포지움이 7월 2일(목) 오후 2시부터 목원대 콘서트 홀에서 열린다.

심포지움은 헤세 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헤세와 나’를 주제로 헤세 전문가(황진, 장정자)들과 애독자(조분희, 노정화)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개인적으로 헤세와 관련된 잊을 수 없는 체험 등을 함께 나누는 자리로 마련된다.

이밖에도 정경량 교수의 ‘한국인이 작곡한 헤세의 시와 노래’, 김정식 선생의 ‘헤세의 시와 노래 연주’, 한기상 씨의 ‘색소폰 연주’ 등이 함께 이루어진다.

특히 이날 심포지움에서는 자신의 소장자료로 헤세 도서관 개관을 이끈 故 홍순길 교수에게 감사패를 전달할 예정이다.

헤세 도서관은 지난 6월 15일 소천한 목원대 독일언어문화학과 故 홍순길 교수가 지난 1999년 개관한 세계 최초 유일의 헤세 전문 도서관으로, 실물 도서관과 인터넷 도서관을 이상적으로 결합한 미래형 도서관이다.

 

또한 산문과 운문의 작사로써, 화가로써의 헤세에 관한 자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 헤세 동호인이나 전문 연구자들에게 학술적인 전문 자문을 하고 있으며, 헤세 관련 각종 방송매체의 패널과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소장 자료로는 헤세 초판본 20권, 제1차문헌(헤세의 글) 원서 323권, 번역서 403권, 제2차문헌(헤세에 관한 글) 외국서 1147편, 국내서 398편, 헤세관련문헌 136권, 시청각 자료 429점 및 기타 자료 120점을 보유하고 있다.

헤세 도서관은 목원대와 한국헤세학회는 물론 독일 헤세 전문 Suhrkamp 출판사, Calw 박물관, Montagnola 박물관을 비롯해 헤세의 아들 Heiner Hesse, Volker Michels, Michael Limberg 등 다수의 국내외 기관과 개인들이 후원하고 있다.

 

한편 헤세 도서관 홈페이지에 방문하면 헤세 도서관의 모든 정보와 헤세의 작품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원문출처: http://www.dhnet.kr/news/articleView.html?idxno=24485

헤세도서관 홈페이지: http://home.mokwon.ac.kr/~hesse-library/

 

---------------------------------------------------------------------------------------

 

"보아하니 투쟁은 벌써 시작되었네!"

-헤르만 헤세, 그는 과연 사춘기 취향의 작가일 뿐인가

 

안찬수, 2002/07/10

 

헤세와 다시 만난다는 것
헤르만 헤세 탄생 125주년 기념행사(Hermann Hesse 2002)가 그의 고향인 독일 칼브 시를 중심으로 열리고 있다.

지난 6월 29일 시작돼 오는 8월말까지 펼쳐지는 이번 축제에는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됐다는 소식이다. 칼브 시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예술과 문화가'라는 슬로건 아래 200개 이상의 행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함께 열리는 제11차 헤르만 헤세 국제 콜로키움에서는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을 새롭게 조명하며, 음악회에서는 <싯다르타>를 주제로 작곡된 마티아스 보니츠의 작품에서부터 미국의 록밴드 스페픈 울프의 록음악까지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청소년 시절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작품을 한 두 권쯤 읽었던, 그리하여 세계의 여느 작가보다 우리에게 친숙한 헤세. 한쪽 얼굴만을 보아왔을지 모를 헤세와 새로운 만남을 가져 본다.<편집자>


정지용이란 시인이 있다. 백석이라는 시인이 있다.
이들 시인의 작품들은 한때 읽을 수도 출판할 수도 없었던 시인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이들 시인을 공개적으로 다시 읽고 논의할 수 있게 된 것은 1988년 월북 작가들에 대한 대규모 해금 조치가 취해진 이후였다.

해금 이후, 마치 땅 속에 묻혀 있던 보물을 다시 꺼내어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들 시인의 언어가 뿜어내는 빛에 이끌렸다.

독일(서독)에서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문학이 겪어야 했던 것도 이들 해금 작가들의 경우와 그리 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 "어디에선가 어떤 사람이 조화와 인내와 우애에 대해 말하기만 하면, 그는 곧 전세계의 각 진영으로부터 적대시된다. 미국 자본주의에서부터 스탈린, 신교도 목사에서 카톨릭사제에 이르기까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무렵, 헤세는 전쟁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고 있던 게르만 민족을 향하여 '오 친구여 그런 음조로 말하지 마오'와 같은 글을 곳곳에 발표했다. 헤세는 당시 독일이 지향하고 있었던 패권주의와 게르만 민족의 결속을 주장하는 국가주의, 혹은 심각한 국수주의의 경향과 광란에 맞서 싸우는 것이 인류의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조국이 없는 놈' '자기 둥지를 더럽힌 새'와 같은 비난이 쏟아졌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무렵, 헤세의 문학은 나치에 의해 '탐탁치 않은 문학'으로 낙인 찍혔고 그의 작품은 출판이 금지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출간되지 못했다. 헤세는 나치의 반유태주의 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헤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문인도 나만큼 1933년 이래로 망명자와 유태인 편에 선 사람이 없다"고. 나치의 눈으로 볼 때 헤세는 '유태인 용병'처럼 보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독일(서독)의 문예연감에서 헤세는 자주 누락되었다. 헤세가 중립국 스위스 국적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헤세는 독일인의 민족감정을 거스르는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문학연구자들은 헤세를 낭만주의의 울타리에 가두어놓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헤세에 대한 '낭만주의의 마지막 기사'라는 규정은 굳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헤세 유고의 책임 편집자인, 주어캄프 출판사의 폴커 미헬스의 20년에 걸친 노력 끝에 헤세의 정치평론집 <양심의 정치>(Politik des Gewissens)가, 1977년 헤세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출판되자 헤세를 더 이상 비정치적인 작가로 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헤세의 '정치'에 대한 논의는, 1983년 메사추세츠 대학의 제14차 암헤스터 콜로키움에서 '헤르만 헤세와 그의 시대--정치적 비평적 국면'이라는 학술대회가 열린 뒤 더욱 더 가속화되었다.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작가에서 '문제의식을 지닌 이방인'으로

헤세 연구가인 홍순길 교수(목원대)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작품에 나타난 정치적 요소'라는 논문에서, 헤세의 문학이 '낭만주의'라는 울타리를 넘어 현실 정치와 긴밀하게 호흡했던 측면이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점을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헤세의 생애와 작품에 있어서 큰 획을 긋는 하나의 사건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많은 헤세 연구학자들은 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부터 1930년 전후를 가리켜 그의 작품과 생애의 위기 및 변혁 시대로 보고 있다. 그가 비록 그 자신을 가리켜 완전히 '비정치적이고 아시아적 수동성의 신봉자'라고 (말하며) 극구 부인하지만 그는 뱀이 허물을 벗듯이 다시 태어났으며 정치적 색채를 띄기 시작했으며 오히려 시대와 맞서 싸우는 것을 그의 작가적 사명으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시대는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그가 시대에 항거하지 않으려고 해도 시대는 그를 더 이상 낭만주의 작가로, 내면성을 추구하는 은둔주의자로 또 내적 신비주의자로 놔두지 않았다.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면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양심과 정신을 수호하는 사람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그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작가에서 '문제의식을 가진 자로서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새롭게 태어났다."

적어도 헤세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헤세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작가에서 '문제의식을 지닌 이방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독서대중에게 헤세의 문학은 여전히 소년 소녀의 취향에나 어울리는, 청소년기에 한번 읽어보아야 할 작품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고 신학교에 진학하지만, 끝내 죽고 마는, <수레바퀴 밑에서>(1906)의 주인공 한스에게서 '입시지옥'을 겪고 있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동질감을 느꼈다는 이야기나, <데미안>(1919)을 읽으며,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라고 한다"라는 말에 밑줄을 긋고 연약한 싱클레어가 되어 데미안을 찾고 있다는 식의, 청소년들의 독후감을 여전히 쉽게 만날 수 있다.

▲ 정원에서 나무를 손보고 있는 헤르만 헤세. 헤세는 이렇게 말했다. "나무들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이상 나무가 되려고 갈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되려 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인 것이다."  ⓒ Bernhard Zeller

분명, 헤세의 작품에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더욱 더 자기 자신의 본질에 접근해나감으로써 자아를 완성하고자 하고 또 그렇게 '개인'을 완성함으로써 오히려 개인의 틀을 벗고 사회로 나아가는 주인공들이 거듭 등장한다. 카멘친트, 싱클레어, 싯다르타, 클링조어, 하리 할러, 골트문트, 크네히트 등등. 이런 인물들이 청소년들의 마음을 앞으로도 계속 사로잡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헤세 연구자들이 인식하고 있는 '정치적인 작가'와 흔히 통념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춘기 취향의 작가'라는 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과연 이런 차이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 것인지 묻게 된다. 과연 이 땅에서 헤세의 문학은 '사춘기 취향의 작가'라는 허물을 벗을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잠시 헤세의 문학을 수용하게 되는 과정을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헤세의 문학을 수용하는 각 나라마다 또 민족마다 각기 다른 수용 환경이 있었다.
한국에서 헤세의 문학 수용은 우선 일제 시대 일본의 번역문학을 통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회화에서 인상파 화가들에 대해 일본의 미술계가 과도하리만큼 편향된 집착을 보여주었던 것이 아직까지도 우리 한국인의 미술 이해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처럼, 헤세의 문학에 대한 이해에서도 일본인들의 '취향'--헤세를 '유럽에 태어난 동양인'으로 받아들이는--이 영향을 끼친 측면이 있는 듯싶다. 그 다음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 1946년 헤세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때나 1962년 그가 사망했을 때 언론과 출판계가 보였던 반응이다.

이러 저런 계기를 통해서였을까. 헤세의 몇몇 작품들은 매년 청소년 추천도서 목록에 거의 빠짐 없이 등장하였다. 헤세는 지난 이삼십 년 동안 독일의 어느 작가보다도, 또 국내의 어느 작가보다도 한국에서 더 유명한 작가이자 인기 있는 작가였다.

마약을 하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교본?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영미권에서 전혀 다른 맥락에서 헤세의 문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헤세의 작품이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1956)에서 "현대 문학에서는 거의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평가를 받은 바도 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1960년대 비트족 또는 히피족들에 의해 헤세는 '성자'로 떠받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유리알 유희>(1931)를 그들이 환각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이해했다는 이야기나, <황야의 이리>(1927)를 마약을 하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교본으로 삼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우리 독자들에게는 무척 낯선 이야기일 듯싶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청소년들이 열렬히 헤세에 빠져들며 '헤세 붐'을 일으켰을 때, 미국의 보수적이며 '도덕적인' 백인·남성·신교도들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헤세를 셰익스피어나 헤밍웨이, 솔제니친과 함께 '블랙 리스트'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헤세가 가장 널리 읽혔던 때는 1970년대와 1980년대였고 1990년대 이후 헤세에 대한 열기가 식어가고 있다고 헤세 연구가들은 지적한다. 왜 그럴까. 분명, 헤세의 문학에는 폭압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을 빨아들이는 그 무엇이 있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독서욕구도 변하기 때문일까.

1990년대 이후 헤세의 문학이 우리 사회와 접점을 이루었던 부분은 '폭압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을 빨아들이는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정원 일의 즐거움>(2001년에 간행됨)처럼 자연 친화적인, 노장(老莊)적인 삶을 살았던 헤세의 면모라는 생각이 든다. 이른바 녹색 사상이 헤세의 문학을 새롭게 볼 눈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사춘기 취향의 작가'라는 허물이나 헤세 연구가들이 언급하는 '정치적인 작가'의 면모, 이 모든 헤세 문학에 대한 상(像)을 허물고 진정 새로운 눈으로 헤세 문학을 만나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과연 헤세는 누구인가. 헤세의 문학은 어떤 문학인가. 헤세의 문학은 아직도 땅 속에 묻혀 있는 보물일까.

헤세를 새롭게 만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 글을 썼지만, 두서없는 글이 되고 말았다. <유리알 유희>에서 신비로운 인물인 '음악의 노대가'가 크네히트에게 해주었던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진리는 분명 있지. 그러나 자네가 바라는 '가르침',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오로지 그것만으로 현명하게 되는 그런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네. 자네는 완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자네 자신의 완성을 바라야만 하네. 신성(神性)은 개념과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네 속에 있어.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네. 싸울 각오를 하게나, 요제프 크네히트, 보아하니 투쟁은 벌써 시작되었네."

부끄럽지만, 원문출처: http://blog.paran.com/transpoet/221095

                                        http://www.georeport.net/news/articleview.asp?no=12600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