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4일 토요일

박정희와 박근혜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의 누리집은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를 전하고 있다. 위클리오피니언 53호를 통해 밝힌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조사결과는 일반 국민들 가운데 잘한 일이라는 평가가 58.6%, 잘못한 일이란 평가가 31.8%라고 한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인물 4,389명 가운데서 논쟁의 한가운데로 불려나온 인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정희대통령 인터넷기념관에 들어가보니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얼미터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역대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를 조사한 결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대통령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은 응답자가 53.4%로 가장 많았다고 26일 밝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5.4%로 뒤를 이었고, 노무현(12.4%), 전두환(2.2%), 윤보선(1.8%), 이승만(1.6%), 노태우(1.3%), 김영삼(1.3%), 최규하(0.5%) 전 대통령 순으로 조사됐다."

 

윤평중 교수(한신대 철학과,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논쟁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동아일보 2009년 11월 13일자 '동아광장'의 글 '박정희는 과연 친일파인가'. 윤평중은 이 글에서 " 전 대통령은 과연 친일파인가,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가 친일파였다고 본다."고 말하면서도 <친일인명사전>에 오를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한다. "한마디로 박정희가 일제 35년 동안의 대일부역행위를 대표하는 4389명의 한 사람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미미한 ‘피라미 친일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의 이름을 올리는 것은 '정치적'인 행위라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윤평중은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의 이름이 오른 이유는 "한국 보수세력의 거대한 성채인 박정희를 흠집 내자는 것"으로, "대다수 시민에게 신화로 남은 ‘박정희 현상’을 한국인의 역린()인 민족정서를 동원해 해체하려는 것"으로 이해한다.

 

말하자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친일파이긴 한데 '피라미 친일파'라는 것이, 윤평중의 논지다.

 

이에 대해 박한영(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평화방송의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 의 인터뷰 내용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금년 서거 30주년을 맞아 다양한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고 있고 또  박근혜 전 대표의 부친이기도 한데 이런 상황에서 이번에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논란이 큰데 ?

"가장 큰 오해가 있는 것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군 소위인데 ,피래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군대서 소위면 가장 초급장교다, 말단 초급장교다. 그래서 일각에선  박 전 대통령이  일제시기에 만주국 중위로 8.15 맞이 했는데 그런 사람까지 친일로 만드는 것은 심하다. 이 친일인명사전은 박 정희 전 대통령을 인명사전에 넣기 위해서 소위 이상을 수록한 것 아닌가 하는 얘기가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91년도에 만들어졌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그 당시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우리가 친일문제는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게 아니다 . 그리고 소위문제를  대한민국 소위하고 같이 봐선 안된다 . 황군소위다. 천황의 소위다 . 정확하게 얘기하면 고등관이다.  일제 식민지시대 군국주의 때는 군인이 최고이던 시대고 나라였다. 소위 이상이 고등관이다 . 군수에 해당한다 .이것이 차이가 있다.

조선인이 일본인 장교, 만주국 장교가 되는 것은 그 시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운 시절이었다. 일본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간 조선인 숫자를 살펴보면 1917년 이후  일년에 한 명도 못 들어갔다 . 만주군관학교도 마찬가지다. 만주군관학교는 1932년부터 45년까지 있었다 여기는  일년에 4.8명 정도가 조선인이 들어갔다 .
 
이 당시는 일제가 만주에서 조선인 독립군과 싸우던 시절이었다 .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달에 일본에 선전포고한다. 여기에 자발적으로 일본군 장교가 된다, 만주국 장교가 된다는 것은 직업군인으로 출세하는 것이다 . 박 정희 전 대통령은 1939년도에 지원해서 1940년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다 .이른바 신경 군관학교이고 .그리고 42년도에 성적우수자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가서 44년도 1월 달에 졸업해서 만주로 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혈서 지원 잘 아시지 않나?, 우리들로서도 충격을 받은 내용이다 .  박 전  대통령이 그 당시 교사를 했다는 것은 그 당시 조선인으로서 대단히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이 분은 군대를  갈 이유도 없고 갈 나이도 지났다. 당시 교사라는 것은 그 당시 엘리트다 . 사리판단이 된 분이다. 당시 학생을 가르쳤고 이 전쟁이 어떤 전쟁인지 모를 리가 없다 . 특히 그의 형님은 박상인씨라고  그 당시 독립운동하고 있었다 . 박 전 대통령이  1939년도에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했을 때 만주에 있는 일본 관동군과 만주군이 합동으로 물론 만주군은 관동군의 별동대다, 하수부대인데 거기에 있는 마지막 천여명의 조선인과 중국인으로 이뤄진 마지막 항일 독립군, 그때는 동북항일연군이라고 불렸는데, 이들을 마지막으로  이른바 소탕하기위해서 제 3차 동변도 , 쉽게 말하면 연변지역이다, 제 3차 동변도 치안숙청사업을 하고 있었다. 일명 진드기 작전이다. 완전히 섬멸시키는 작전이다. 이것이 대대적으로 국내와 만주에 보도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지식인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45년 8월 15일 현재 ,일본군 예비역 소위에 만주국 협력 중위였다 .그리고 1941년 12월 임시정부는 일본과 만주에 선전포고를 했다.  적국 장교였다. 그래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8.15 해방을 맞이 하지 못하고 패전을 맞이한 패전장교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부하였던 중국군인에 의해서  무장해제를 당했다.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된 박정희 전 대통령은  60년대 우리나라를 일으키고 산업화시키고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준  그런 점이 정상 참작이 될 수는 없었나?

"친일청산은 해방직후에 했어야 한다 . 아니면 이승만 정부 때 있었던 반민특위가 제대로 할 수 있었어야 한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그고 새롭게 대한민국은 출발했어야 한다 . 그래서 그분들  친일했던 사람들을 죽이거나 벌준다는 개념이 아니고 과오를 인정하고 책임을 느끼게 함으로써 건국에는 참여시키지 않더라도 건국된 이후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거듭나게 하는 기회로 친일청산이 필요했다는 것인데 그 당시 친일파가 반대했지 않나, 그래서 60년동안 미뤄졌어요. 이 인명사전은 1945년 8.15일까지의  사실을 다루는 것이다. 해방된 이후 대통령이 되었으니까 일제시대 친일행위에서  대통령이니까 빠지거나 이렇게  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하면 기준 성립이 필요없지요. 그렇게되면 대한민국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 기준으로 일제시대 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되면 친일 문제를 정리할 수도 없다. 저희도 유족들에게는 저희들도 같이 가슴아픈 문제다 .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제식민시대 행적에 대한 사실적 기초, 객관적 기준에 의한 부분이다.  한 인간은 젊은 시대 그렇게 보낼 수도 있다. 해방이후 삶은  또 다른 기회였지 않나.그래서  그런 부분을 끊어서 봐야지  섞어버리면 각각의 역사적 시기가 성격이 다른데 같이 섞어서 얘기하긴 어렵다.  친일인명사전은 일종의 전문사전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일제 식민시기 행적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고 물론 사전의 기술상 앞 시기나 뒷 시기도 서술은 되지만 가치평가를 하지 않는다. 사실적 기준에서 봐야 하고 이 시대에 관한 애기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재는 잣대로서  삼으라는 것은 아니다 .

-친일인명사전이 특히 세간에 논란이 된 배경 중에는 지금 현재 유력 정치인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부친이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인데 그런 점에서 유력 정치인인 박근혜 전 대표에게 이 친일인명사전이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가 하는 것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

"사실 연구소는 거듭 말씀드리자면 이 사전은 연구소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만든 것이다. 150명의 학자들이 다 다양한 생각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한 인물을 놓고 얘기했다면 그 편찬위원회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 저는 이렇게 본다 .친일 문제를 정치화시키는 오히려 한국의 정치 풍토가 문제라고 본다 . 두번째로 이것은 복잡한 문제는 아니다. 박정희 전 생애를 봤을 때 (이것은) 20대 때예요. 아버지가 수십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서 있었고 장군까지 했고 또 대통령까지 한 시기도 있다. 이런 점에서  후손들이 공은 받아들이겠지만  과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취사선택하는 태도는 공인으로서는 좋지 않다고 본다 . 그러나 그것은 저희가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후손들로서는 언제나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 그것은 인지상정이다 . 하지만 때로는 살다보면  후손이란 것은 참 고통스런 존재다. 공도 후손에게 가고 과도 후손에게 갈 수 있다. 그런 부분을  어떻게 당당하게 대면하는가 하는 문제기 때문에 오히려 죽은 분들의 문제가 아니고  살아있는 분들이  과거 아픈 역사를 어떻게 대면하느냐 하는 문제는 각각의 자신들의 역사철학에 담겨있는  몫이라고 본다.

-또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친일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바로 친 딸이 어떻게 대권을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비판적 시각도 있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도 위험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잘 아시다시피 선친에게 있었던 흠결을 도덕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후손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좌제로 적용돼선 안 된다 .우리는 이미 6.25 부역혐의자 처리문제로  우리 역사에서 연좌제가 적용돼서 수많은 불행을 겪지 않았나.  연좌제는 전 근대적인 야만적인 인식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이 볼 때 어떤 돌아가신 분의 친일행위가 그 후손에게 직접적인 불이익으로 가는 방식들은  단호히 거부한다 . 후손들의 경우에는 다만 공인으로서 그러한 과거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스스로 어떻게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공인이 가져야 할 역사적 안목의 문제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름. 그에 대한 논란은 즉각 현실정치의 일부분으로 바뀌고 만다. 왜냐면 친일파 박정희든, 피라미 친일파 박정희든 그 이름은 현실정치의 중심에 있는 박근혜라는 이름을 즉각 불러오기 때문이다. 박한영은 연좌제를 전근대적인 야만적인 인식으로 어떤 분의 친일행위가 그 후손에게 직접적인 불이익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현실에서 '친일파'에 대한 논의 자체가 정치적인 것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윤평중 교수로 말미암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파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친일파 가운데서도 '피라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바뀐 것인가. 그렇게 바뀌었다 하더라도 이 논의 자체가 정치적인 것임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현실이며, 우리의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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