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터넷판 2012년 5월 28일에 올라온 칼럼, 천정환 교수(성균관대 국문학)의 글이다. 제목은 '홍세화 김종철이 만나야 할 이유'.
통합진보당 사태를 두고 '진보의 죽음' 운운한 사람도 있지만 과장 아닌가. 진보당은 진보의 일부일 뿐이다. 진보당 때문에 초래된 이 위기가 차라리 좋은 기회로 느껴진다. 드디어 한국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북한과 근대적 민족주의의 그늘로부터, 그리고 주사파적이거나 마키아벨리적인 정치를 벗어나서, 노선으로나 정치문화에 있어서나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아닌가.
그래서 의회정치를 지향하는 세력들 중에서는 당장 녹색당과 진보신당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두 당은 이전투구 권력다툼과 종북 문제로부터 여러 걸음 떨어져 있으면서, 진보의 원칙에 상대적으로 충실하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노동ㆍ소수자ㆍ생명 등의 문제에 대한 가장 적절하고 미래적인 의제를 고뇌하는 운동의 흐름을 두 당이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두 당은 지난 총선에서 초라한 성적으로 해산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재창당 작업을 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듯하지만 여전히 일반의 관심을 끌기에는 미미하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내적으로 그들의 논리가 여전히 어렵고 관념적이며 그들의 '정치'가 아직 폐쇄적이거나 자기만족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보신당의 정치적 상상력은 일면 고전적 이념에 기대있고 그래서 '노동'에 중심을 둔다 하지만, 정작 21세기적인 노동의 상황을 정치화하기 위한 어떤 적극적인 노선이 있는지는 좀 막연하다. 정치문화에 있어서도 진보신당에는 활동가보다는 평론가나 이론가가 더 많고, 당의 기반도 노동자보다는 많이 배운 지식인과 수도권 중간층에 두고 있다는 평도 있다. 통진당의 처참한 꼴이 진보의 노선과 정치문화의 재구성을 요청한다면 기실 진보신당에게도 요구되는 것이 많을 것이다. 물론 다른 각도에서 그렇다.
한편 녹색당의 가치는 선하고 고매하기 이를 데 없다. 녹색당 강령을 읽노라면 저절로 착하고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약점도 있는 듯하다. 이상에 비해서는 실천의 방략이 상당히 왜소한 느낌이다. 이를테면 개발과 성장주의를 거부한다지만, 개발과 '성장'에 당장 실제로 이해관계가 달린 많은 가난한 소상공인이나 노동자들을 설득하거나, 그들에 대한 현실적인 정책을 내오는 것은 아직 추상적인 단계인듯하다. 또한 녹색당의 정치문화는 비폭력적이고 심지어 '비정치의 정치'를 표방해 '더러운' 현실정치에서 가장 동떨어져 있다 할 수 있겠으나, 정치에 관한 한 녹색당은 아직 '싹'이나 '아마추어'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녹색당의 노선은 시민의 구체적이고 작은 삶들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극복을 표현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래서 필자는 두 당의 정신을 대표하는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과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가 만나서 빨리 대화하기를 완곡히 청하고 싶다. 두 사람은 가장 양심적인 실천가이자 인문주의적 지식인으로서, 많은 노동자ㆍ시민ㆍ지식인의 존경을 받아왔다. 두 사람이 이후 진보정당정치의 책임까지 짊어지라는 게 아니라, 이들의 대화가 진보의 상상력과 담론 지형의 변화를 위한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두 당은 정치문화와 노선ㆍ경험이 서로 많이 다르다. 녹색당의 강령적인 내용인 '비폭력대화' 같은 것만 봐도 차이는 확연하다. 그러나 풀뿌리 생활정치와 노동이, '생태'와 '복지'가 결합할 방법론이 제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좀 길게 보면서라도 두 당으로 대변되는 녹색과 적색의 정치가 서로를 용납하고 수렴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배출해야 한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서로를 의지하거나 핑계로 삼아야 '진보당 이후'의 새로운 진보정치의 틀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진보당의 낡은 운동권들과 권력중독자들 때문에 진보에 크게 실망한 시민ㆍ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줘어야 한다. 진보당 사태의 가장 큰 문제는 진보에 대한 시민과 민중의 실망이다. 극우 수구세력의 노림수도 거기에 있겠다. 하지만 현실에는 여전히 정치에 대한 건강한 관심을 갖고 있는 수백만의 노동자ㆍ시민과 청년들이 있다. 언론도 이제 진흙탕 보다는 다른 대안과 새로운 희망에 관심을 기울일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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