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3일 수요일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와 관련된 두 편의 글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와 관련된 글이 두 편, 눈에 띕니다. 한 편은 이현우 씨의 글, 한 편은 고두현 씨의 글.


공무원이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시적 정의>/마사 누스바움 지음/박용준 옮김/궁리 펴냄

얼마 전 지방도시에 내려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러시아문학 고전에 대한 강의를 했다. 통상 그런 연수 프로그램에는 독서의 효용이나 방법에 대한 강의가 포함되곤 하지만, 러시아문학에 대한 강의 요청은 의외였다. <죄와 벌>이나 <안나 카레니나>를 진지하게 읽는 공무원이라고 하면 좀 특이하게 생각하는 게 우리 사회의 통념 아닐까.

그런 강의의 서두에 인용했더라면 좋았을 책이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궁리)다.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이 부제니까 더할 나위 없다. 미국의 저명한 고전학자이자 법철학자인 저자는 ‘공적인 시’가 필요하다는 월트 휘트먼의 말에 공감하며 우리의 공적 삶에 문학적 상상력이 개입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옹호의 근거는 간명하다. 직역하면, “그것이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거꾸로 그러한 상상력을 함양하지 않는다면 사회정의로 이어지는 필수적인 가교를 잃게 되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카고 대학 ‘법과 문학’ 강의 토대로 집필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08년 방한했던 마사 누스바움 교수.
ⓒ연합뉴스
2008년 방한했던 마사 누스바움 교수.
시카고 대학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을 강의한 경험에 토대를 둔 이 책에서 누스바움은 주로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을 사례로 활용한다. 흥미롭게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교장선생님 그래드그라인드는 교육자이자 경제학자로서 계산만을 중시하고 감정과 상상력 따위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문학은 인간의 복잡한 삶을 ‘도표 형식’으로 나타내려고 애쓰는 정치경제학의 적이다. ‘쓸데없는’ 이야기책은 사람들을 공상에 빠뜨리고 비합리적 행동으로 내몰 수 있다. 좁은 의미의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문학과 문학적 상상력은 무용하고 위험하다.

하지만 그래드그라인드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누스바움은 이야기책이 공적 합리성 교육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공적 영역이란 무엇인가.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고 국회의원이 법을 제정하며 행정부에서는 다양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공간이다. 소설에서는 특이한 인물로 비치는 그래드그라인드식의 공리주의적 관점과 경제적 비용 편익 분석이 이 공적 영역에서는 오히려 표준화돼 있다. 국책사업 대부분이 점수화된 사업타당성 조사를 통해 결정되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문학이 이런 영역에서 과연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문학은 ‘인간 존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해 

핵심은 그래드그라인드식 시각이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걸 보게 해준다는 데 있다. 공리주의적 계산과 경제학적 사유는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내면적 깊이, 그리고 희망·사랑·두려움 따위를 보지 못한다. 의미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반면에 문학, 특히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과 관계를 맺게 하고, 그들의 계획과 희망, 공포를 공유하면서 삶의 복잡한 일들을 풀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에 동참하게끔 한다. 그래드그라인드의 관점에서 볼 때 소설이 ‘형편없는 경제학’이라면, 소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래드그라인드식 경제학은 ‘형편없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내가 속한 사회적 계급의 구성원만이 아닌 다른 동등한 인간 존재를 인식할 수 있으며, 노동자들도 복잡한 사랑의 감정과 소망, 풍부한 내적 세계를 가진 사려 깊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놓치는 과학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대단히 미흡하며 부적절한 과학일 수밖에 없다. 숫자와 도표로 채워진 보고서만 읽고 판단하는 대신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소설을 읽는 공무원들을 응원한다. 

출처: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8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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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살아난다는데…

세계적인 법철학자이자 시카고대 석좌교수인 마사 누스바움은 법학과 학생들과 함께 찰스 디킨스, 소포클레스, 플라톤, 세네카의 작품을 읽는다. 왜 변호사나 재판관, 정치인이 될 학생들과 문학 작품을 읽을까. 문학에서 얻는 공감과 상상력, 부드러운 감정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과 함께 유엔대학 세계개발경제연구소에서 한 국가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방법을 공동연구해 유엔의 인간개발지수를 개발한 주인공이다. 소득 수준뿐만 아니라 교육, 건강, 정치적 권리, 민족, 인종 등을 포괄하는 삶의 질을 측정하는 방법을 창안한 그가 문학의 사회적 가치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 법관들이 문학을 읽어야 하나

그는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인간 삶에 대한 복합적인 시각을 발견할 수 있는 문학 작품을 점점 더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충격을 받았다”며 강의 시간마다 묻는다.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은 단순히 재미를 위한 것이거나 팍팍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안식처일 뿐인가, 아니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인가.

그의 명저《시적 정의》(궁리 펴냄)에 해답이 들어 있다. 문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정의로운 공적 담론과 민주주의 사회의 필수요소가 되는지를 집중적으로 탐구한 책이다. 가령 경제성장률 4%, 1인당 국민총생산 2만달러 등의 숫자로만 보면 세상은 그런 대로 살 만해 보인다. 총합이나 평균 수치의 오묘한 힘 덕분이다. 노인 빈곤율 45%, 세계 기아인구 4000만명 증가 등의 뉴스가 남의 일처럼 보이는 것도 그것이 추상화된 숫자이기 때문이다. 반면 눈앞에 구체적인 이름과 이야기를 가진 인물이 있다면, 우리는 그가 처한 상황에 쉽게 반응을 보인다. 마치 내 일처럼 느끼고 행복과 기쁨, 고통, 두려움을 공감한다. 세상을 숫자와 기호로 보는 것과 소설을 통해 보는 것은 정말 다르다. 

베스트셀러 10권 중 7권이나

‘합리적 감정’에 대한 생각 또한 그렇다. 감정은 오랫동안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졌기에 공적 추론 과정에서 배제돼 왔다. 이런 한계를 문학은 단숨에 뛰어넘는다. ‘각각의 삶에 스민 신비와 복잡성’을 읽으며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사람으로서 공유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적 상상력은 재판관들이 판결을 내리고, 입법자들이 법을 제정하며, 정책 입안자들이 다양한 인간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행히 최근 서점가에서 문학이 살아나고 있는 모양이다.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소설이 네 권이나 들어 있다. 국내 작가보다 외국 작가들이 많은 게 아쉽기는 한데, 몇 년 만에 빛을 본 노벨문학상의 특수도 한몫한 것 같다. 에세이도 세 권이나 10위 안에 들었다.《참 좋은 당신을 만났습니다》(송정림, 나무생각) 등 따뜻한 시선으로 삶의 이면을 비추는 내용이 많다. 자기계발서로 도배되다시피 했던 예년의 목록과 사뭇 다르다. 

누스바움 교수의 바람처럼 이 가을에 문학을 읽는 공직자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인문학을 처세술쯤으로 혼동하는 사람들이 문학과 역사, 철학의 참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면 더 좋겠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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