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일 월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21) 진감선사대공탑비

ㆍ굽은 듯 탄력적 필획에 담긴 해서의 전형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 주석은 뜻밖에도 고운 최치원(857∼?)의 ‘범해(泛海)’라는 시 한 구절을 읊었다. ‘掛席浮滄海(돛달아 바다에 배 띄우니)/ 長風萬里通(긴 바람 만리를 통하네).’ 

새로운 한·중관계를 천년 전 인연으로 불러낸 것이다. ‘창해’나 ‘장풍만리’ 등 당과 신라를 넘나드는 고운의 호연지기가 시 주석의 뜻과 오버랩되면서 중국과 한국의 우의를 바라는 마음이 읽혀졌다. 

고운이 남긴 시문은 <계원필경> <사산비명>을 포함해 <삼국사기>에만도 문집 30권이 전해질 만큼 방대하다. 이 중 당 유학 시절인 25세(881년) 때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적장 황소가 혼비백산했다는 일화가 전해올 정도로 뛰어난 문명을 자랑한다. 특히 잘 알려진 것은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한 인간의 외롭고 괴로운 심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자전적 시로, 꿈과 현실의 불화 때문에 방황하는 작자의 심회가 눈에 밟힌다. 고운은 신라로 금의환향해 아찬 벼슬에 올랐지만 진성여왕의 난정으로 국운이 사정없이 기울자 개혁책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리고는 주유천하하다가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진감선사대공탑비 두전. 지리산 쌍계사에 있는 이 비는 국보 47호로, 통일신라 고승 혜소(774∼850)의 행적을 담고 있다. 고운의 문명(文名)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시인이자 문장가, 경세가였던 고운의 사상은 유교, 불교, 도교가 회통하면서도 유교 입장에서 양교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한국 유학사에서 처음 제기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런 삼교회통의 입장은 경남 하동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이하 진감선사비) 명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석가여래와 주나라 공자는 출발은 비록 다르나 귀착한 곳은 하나이다. 지극한 이치를 체득함에 있어 양자를 겸응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물이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謂如來之與周孔 發致雖殊 所歸一揆 體極不兼應者 物不能兼受故也)”

퇴계 이황 같은 조선의 도학자들은 ‘최치원은 불교에 아첨한 사람인데 외람되게 문묘에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崔孤雲以全身□佛之人 濫厠祀禮)’고 할 정도로 비판했다. 하지만 고운은 유학을 토대로 신라 고유사상을 새롭게 인식해 유·불·도를 하나로 통합해냈다.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는 삼교를 회통시키는 풍류도를 우리 사상의 고유전통으로 처음 제시하고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設敎之源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이 글에서 고운이 말하는 풍류도가 신라의 화랑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데 그 기원은 고대 신앙과 사상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고유사상에 유·불·도 등 외래사상이 녹아든 풍류도를 고운은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 정의했다. 그는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도 신라를 ‘해 뜨는 나라’라는 해동의 중심체로 인식했다. 

이러한 사상과 미감을 조형언어로 보여주는 것이 고운의 글씨이며 그 대표작이 바로 진감선사비다. 당에서 돌아온 지 3년 만인 31세(887년) 때 문장을 짓고 쓴 유일한 비문이다. 본문 글씨는 구양순, 저수량은 물론 보는 이에 따라 안진경까지 떠올릴 만큼 당해의 전형적인 필법이 녹아 있다. 국운이 기울고 있었지만 이것을 바로잡을 기세라고나 할까 통일기의 미감이 긴장감 있게 붓끝에서 마감되고 있는 것이다. 굽은 듯하면서도 한없이 곧고 낭창낭창한 탄력적인 필획에다 해서의 전형답게 키가 크고 균제미가 뛰어난 짜임새다.

두전(頭篆·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가며 쓴 글씨)에서는 고운의 학식은 물론 정신의 폭과 깊이가 짐작된다. ‘□海東故眞鑑禪師碑(□해동고진감선사비)’라고 쓴 글자는 당시 당에서 유행한 균일한 점획과 대칭구도의 이양빙체 소전(小篆)도 아니고 7세기 말 태종무열왕비 두전과도 다르다. 연원을 따지자면 멀리 위나라 정시연간(240~248)의 ‘삼체석경(三體石經)’에 보이는 고문이나 ‘한간(漢簡)’은 물론 오나라의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 북위의 ‘휘복사비(暉福寺碑)’의 필법과 자형에까지 거슬러간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해내고 있다.

이런 글씨의 맥락에서 보더라도 12세부터 16년간의 당나라 유학으로 글로벌 인재가 된 고운을 사대나 모화로 보는 것은 그의 철저한 동인(東人)의식을 간과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처럼 지금 동아시아도 미국과 중국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되면서 대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다. 우리에게 민족자존과 새로운 문명 개척이라는 과제가 동시에 던져진 것이다. 이것이 고운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2282043185&code=960202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20) 무구정광대다라니경

ㆍ해서의 전형 속에서도 강철 같은 고신라 글씨의 미감

문자문명의 변천사는 인간의 인지능력 확장의 역사다. 칼에서 붓으로, 다시 키보드로 도구가 바뀌는 것은 결국 저장하고 전달해야 할 정보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바일 기기나 유비쿼터스 IT환경이 지배하는 키보드의 ‘치기’ 이후 또 다른 도구의 발명이 가져올 문자문명이 궁금해진다.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이하 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 물론 그 판하본(版下本)은 사람이 직접 붓으로 쓴 것이지만 쓴 것을 토대로 찍어냈다는 점에서 이미 우리 시대 키보드의 치기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 결과 일일이 불경을 필사하던 것과 달리 정보전달의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또 인쇄술이 없을 때의 필사한 책마다 다른 글자가 아니라 표준화된 글자로 복제된다는 점에서 지금의 문자 치기와 다르지 않다. 다만 지금의 기계 자판은 표준글자를 개인이 다시 소유하는 시대가 된 것이 다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부분. 다라니는 ‘주문’을 뜻하며 이 경을 석가탑에 안치한 것은 일종의 사경공양이다. 이를 통해 한없이 깨끗하고 밝은 세계의 실현을 염원하는 것이다. 751년 이전에 간행된 이 목판인쇄본은 너비 8㎝, 길이 620㎝이며 1행 8∼9자의 다라니경문을 두루마리 형식으로 적어놓았다. 이 인쇄물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은 770년경 간행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으로 알려져 왔다.

다라니경은 빠르면 704년, 늦어도 751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근거는 애초 산스크리트어로 된 다라니경이 처음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된 해가 704년이고 751년은 석가탑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중국이나 일본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벌어진다. 인쇄문화의 종주국임을 자부하는 중국은 다라니경에 나오는 8개의 무주제자(武周制字, 당나라 측천무후가 685~704년 재위 당시 새롭게 만든 글자)를 들어 자기 나라에서 만들어 통일신라로 전해진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일본은 석가탑의 완성이 아니라 만들기 시작한 때가 751년이라는 점을 들어 ‘백만탑다라니경’이 먼저라고 흠집을 내고 있다. 하지만 무주제자는 당시 중국은 물론, 신라나 고려에서도 사용되었고 다라니경의 지질은 신라의 닥종이다.

그런데 이런 우격다짐이나 흠집 내기를 넘어 다라니경의 명성에 의구심이 들게 하는 일이 2005년 일어났다. 다라니경을 석가탑 안에 넣었다고 기록한 1024년(고려 현종 15년)의 중수기문이 사계 전문가들에 의해 판독된 것이다. 1966년에 발견된 이후 40여년 만이다. 결락된 글자나 종이가 찢겨져 나간 부분을 감안해서 해당 기사 부분을 보자. “대금도 한 묶음과 구리에 도금한 ○, ○칼 한 묶음, 무구정광다라니경…, 금으로 만든 병 하나, 수금대 하나, 사리 8○, 수금도 한 묶음, 두루마리로 된 무구정광다라니경 한 권, 수금대 하나 등을 이 탑에 안치하옵니다.(○○矣臺錦刀冬音一銅鍍金○...○刀冬音一无垢淨光○羅尼[經]九偏全金甁一隨[錦]一舍利八○..○金○一隨錦刀冬音一无垢淨光○羅尼經一卷隨[錦]一右之安藏爲白置...)” 요컨대 1024년 석가탑 중수 때 여러 부장품과 함께 다라니경을 안치하였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다라니경이 통일신라 때가 아니라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탑 속에 넣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구심은 탑을 창건할 때 넣었던 다라니경을 고려 때 보수하면서 도로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적은 것으로 보면 어느 정도 풀린다. 더구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신라 때 탑에서만 발견되며 고려로 넘어오면 ‘보협인다라니경’으로 완전히 대체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 다라니경이 발굴된 신라 탑은 10여기에 이르지만 고려 탑에서는 발굴된 예가 없다. 또 1007년 간행된 보협인다라니경은 정교한 인쇄기술로 제작된 반면 다라니경은 초보 수준이다. 인쇄기술로 봐도 다라니경이 보협인다라니경보다 나중에 제작됐을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관련 학계에서 등한시하는 부분은 글자의 제작연대를 판정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글자 자체의 구조나 서풍이다. 글자는 내용은 물론 같은 서체 안에서도 점과 획, 글자의 짜임새로 결정되는 조형미감에서 시대 및 지역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다라니경의 서체 조형이나 글자구조는 이미 당나라 해서가 통일신라에 들어와 소화된 지 길게는 100여년이 지난 지점이다. 그래서 글자의 기본 골격은 응당 전형적이면서도 8세기 중반 당시 중국에서 유행한 글씨미감과는 차이가 난다. 다라니경은 안진경체도 아니고 초당 때 유행한 구양순체도 아니다. 사경이라서 북위서와 비교할 수도 있지만 이미 시기적으로 한참 후다. 고졸, 한가하면서도 강철같이 강한 고신라 글씨의 미감이 진하게 배어 있는 필획이다. 해서의 전형 속에서도 다양한 변화의 비정형 구조를 띠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다라니경은 중국글씨와 맛이 다르다. 굳이 명명한다면 해동서성 ‘김생체’라 하듯 그냥 ‘무구정광대다라니경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지금 우리는 디지털시대 키보드 치기의 한가운데를 살면서 점점 더 기계문자의 기성품 ‘치기’에 함몰되고 있다.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 지역마다 다른 ‘쓰기’라는 글씨미학에서 더욱 문맹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 IT문명을 주도하는 우리가 1300여년 전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앞에 놓고 오늘날 디지털 문자문명의 씨앗과 뿌리가 어디이고 기계 글자에 인간의 체온을 담은 글씨미학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절실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2212045025&code=960202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9) 문무대왕릉비명

ㆍ바둑판 같은 괘선에 정해서 ‘7세기 글씨의 교과서’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 30대 문무대왕과 얽힌 역사기록은 우리의 통념을 깨는 사실들이 많이 있다. 무덤을 땅속이 아니라 바닷속에 만들어 달라는 것이 일례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가을 7월1일,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귀의 큰 바위에 장사 지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임금이 화(化)하여 용이 되었다’라 하고, 또 그 바위를 가리켜 대왕석이라 불렀다(秋七月一日 王薨 諡曰文武 群臣以遺言葬東海中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石爲大王石).”

역사라는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이미 동해라는 바다이름은 문무대왕 때부터 확인된다. 죽으면서까지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무찌르고 바다를 지키겠다고 한 데서 동해를 두고 벌어지는 오늘의 한·일관계를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최대 높이 52㎝, 너비 64㎝, 두께 24㎝. 682년(신문왕2) 건립되었다. 비가 깨지고 마멸되어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 왕실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업적, 신라의 백제 평정 사실이, 뒷면에는 문무왕의 죽음과 유언, 문무왕에 대한 찬미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시작된 ‘동해 병기’ 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번져가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주요 뉴스다. 뉴욕에서 동해병기법안이 발의된 가운데 뉴저지주는 물론 캘리포니아 등 네댓 개 주도 이 대열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뉴욕타임스도 동해표기 문제를 본격 거론하기 시작했다고 국내 언론들이 전하고 있다.

재미나는 점은 이 신문에서 “한국인들은 동해가 수세기 동안 사용됐으며 일본해는 일제식민지 역사 이후 퍼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은 19세기 초부터 일본해가 쓰였다고 말한다”고 양쪽의 입장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식민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적 근거라고 일본이 들이대는 것이 고작 19세기 초라는 사실이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만든다. 또 같은 기사에서 에이 고이치 일본 총영사관 대변인이 “일본해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유일한 명칭이다. 과거의 식민지 역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동해바다 속에 용이 되어 바다를 지키고 있는 문무대왕이 들으면 기가 찰 노릇이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왕의 유언을 보면 더욱 그렇다. “과인은 어지러운 운을 타고 태어나 전쟁의 시대를 만났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영토를 평정하였고, 배반하는 자는 정벌하고 협조하는 무리와는 손을 잡아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모두 평안히 하였다(寡人運屬紛 時當爭戰 西征北討 克定疆封 伐叛招 聿寧遐邇)”고 하는 지점에서는 당시 전쟁시대를 맞아 당나라와 왜의 틈바구니 속에서 삼국을 통일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본해(SEA OF JAPAN)’에 대항해 ‘동해(EAST SEA)’를 지켜내는 한인동포들의 노력에도 불구, 정작 본국에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으니 이것 또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새삼 느슨해진 우리의 역사의식을 다시 한번 가다듬을 때임을 다짐해볼 뿐이다.

호국의 화신인 문무대왕의 능비는 경주 사천왕사에 682년에 세운 이래 1100여년 동안 역사에서 실종되었다가 1796년(정조20년)에야 우연히 발견되었다. 조선시대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1724~1802)의 문집 <이계집(耳溪集)>에는 밭을 갈다가 비석 하단부와 우측 상단부 조각이 발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탁본은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1793~1853)에게 전해져 그의 저작인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비문 내용이 실렸다. 이후 비편의 실물들은 소재가 묘연했으나 비석의 하단 부분이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그 가운데 1개가 다시 발견되었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이미 발견 당시 많이 훼손되었지만 바둑판 같은 괘선에다 정해서로 한 자 한 자 박혀 있다. 글자는 적갈색 화성암의 앞뒷면에 가로 3.2㎝, 세로 3.3㎝의 크기다. 비문을 국학의 소경(차관)인 김○○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던 만큼 글씨는 당대 명필인 대사 한눌유가 구양순체의 해서로 작정을 하고 썼다. 정자의 모범으로 글씨의 교과서 중 교과서인 이 서체가 7세기 말 동아시아 세계의 표준서체로 거의 시차 없이 통일신라에 전해져 소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비문에는 또 다른 미스터리가 있다. 김씨의 시조를 ‘성한왕(星漢王)’이라 하고 문무왕의 15대조라고 함으로써 당시 신라 왕실 계보와 조상에 대한 인식을 살필 수 있어 좋다.

그래서 이 비를 능비나 묘비로 보기도 하지만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기록에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무덤을 쓰지 않고 화장하여 그 재를 동해에 뿌렸다는 사실과 어긋난다. 더욱 주목할 것은 죽어서까지 대왕암의 해중 능침(陵寢)에서 동해의 파도에 뒹굴며 바다를 지키고 있는 문무대왕의 뿌리다. 문무대왕릉비에는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英異)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제천지윤(侯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하였다.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라는 대목이 있다.

‘제천지윤’이란 천신족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종족 정도로 볼 수 있는데 투후(侯)는 바로 한나라 무제가 흉노와 싸울 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의 아들인 김일제를 가리킨다. 요컨대 이 비문은 문무왕의 뿌리를 흉노족으로 볼 수 있기도 한 것인데 역사는 알아가면 갈수록 미궁에 빠지는 듯하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2142109165&code=960205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8)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下)

ㆍ왜 150년이나 지난 김생의 글자를 택했을까

문자언어는 내용과 조형, 즉 텍스트와 이미지가 한 몸이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 시대 서예를 보면 지나치게 문자의 조형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뒤집어 말하면 내용이 부차적이거나 무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예가가 직접 자기의 생각이나 생활 경험을 시나 문장으로 지어낸 작품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서예가 현실적인 힘을 잃었거나 심하게는 죽었다고 하는 것은 작품 내용에서 동시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바람직한 서예가는 세계의 궁극적인 질서를 문자라는 시각언어로 구현해내는 미술작가인 동시에 말언어로 드러내는 시인이기도 하다. 

듣건대 무릇 불법의 참된 경계는 심오하고/ 깨달음의 세계는 아득하고 아득하니/ 맑기가 푸른 바다와 같고 아득하기가 하늘과 같으니/ 지혜의 배로 어찌 그 물가에 이를 것인가/ 또한 지혜의 수레로도 그 끝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聞夫 眞境希夷 玄津杳渺 澄如滄海 邈若太虛 智舟何以達其涯 慧駕莫能尋其際)

배(舟), 바다(海), 나루(津)를 통해 수행자가 무한한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에 이르는 것을 비유해내고 있다. 그 과정과 세계가 너무 거대하고 생생하다. 이 구절은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명(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의 첫 머리인데 이 탑비의 주인공인 낭공대사 행적(行寂, 832~917)의 깨달음과 사람됨의 경지를 창해와 태허에 견주고 있다. 행적은 24세 때인 신라 문성왕 17년에 복천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경문왕 11년에 당나라에 가서 주유천하하며 선현(禪玄)의 이치를 깨친 인물이다. 통일신라 말기 효공왕과 신덕왕의 스승을 지낸 그가 85세로 석남사에서 입적하자 경명왕은 낭공이란 시호와 백월서운이란 탑명을 내리고 최치원, 최승우와 함께 삼최(三崔)로 문명과 필명을 날린 최인연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고탁본 부분. 개인소장

그러나 이 탑비는 입적 당시 세워지지 않았다. 50여년이 지난 고려 광종 5년(954)에 순백 스님이 태자사에 세웠는데 글씨는 단목 스님이 김생(金生, 711~790 이후)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왜 50여년 늦게, 그것도 당대 명필이 직접 쓸 수도 있을 법한 집자를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입비로부터 따지면 150여년 전인 8세기의 글씨다. 집자비는 문장에 맞도록 한 글자 한 글자 일일이 따붙여 재구성하고 새겨낸 것이다. 한 사람이 한 필로 써내린 것과는 당연히 글자의 흐름이 다를 수밖에 없다. 

태자사비는 2500여 글자를 김생의 해서·행서 중에서도 소자(小字) 중심으로 발췌했다. 이 정도의 글자를 찾아내자면 모집단은 이보다 몇 십배가 넘는 규모여야 하고 그러자면 김생이 일생에 걸쳐 써낸 글씨를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방대한 예산과 대규모 집단작업이 불가피하다. 사경(寫經)에서 ‘일자삼배(一字三拜)’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8세기 김생의 글씨는 이미 9, 10세기 나말여초의 시대서풍과도 차이가 있다. 이미 이 시대는 하대신라의 혼란을 지나 고려왕조 개창 이래 구양순, 구양통 계통의 도끼로 찍은 듯한 삼엄한 필맛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왜 김생의 글씨였을까.

먼저 탑비가 50년 늦게 세워진 사연부터 살펴보자. 세상이 뒤집히는 왕조 말기, 왕사의 탑비마저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긴박한 정황은 이 탑비 뒤 ‘당신라석남산국사비후기(唐新羅石南山國師碑後記)‘에 남아있다. “(비문을 지었으나) 세상은 복잡하고 인심은 교활하여 뜻 있는 일을 하기에는 더욱 어려운 시대였다. 후고려가 사군을 평정하고 삼한이 정정됨에 이르러서 현덕원년 7월15일에 태자산에 이 큰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참으로 좋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世雜人猾 難爲盛事 至後高麗國平四郡 鼎正三韓 以顯德元年七月十五日 樹此碑於太子山者 良有良緣者乎)”

왜 김생 글씨를 집자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으나 서예의 근본정신에 비춰 유추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명필, 명적은 내용과 조형, 즉 텍스트와 이미지가 한 몸이 되어야 구현될 수 있다. 김생체는 고박한 삼국 글씨를 토대로 운치의 남조풍 왕법(王法)과 남북조의 미감을 두루 갖춘 엄정한 당법(唐法)을 하나로 녹여낸 화엄불국의 원융무애를 구현했다. 이 때문에 낭공대사 행적과 같은 선승을 만나 창해와 태허 같은 경계 없는 선필로 현현될 수 있었다.

김생의 글씨는 퇴계 이황과 같은 조선시대 도학자를 만나 엄정단아하고 거경궁리하는 선비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또 고려의 탄연이나 조선의 한호, 김정희 같은 거장들의 길라잡이가 되면서 중국과 같고도 다른 한국서예 궤적의 토대가 되었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라는 맥락에서 현재 경복궁에 있는 태자사비는 수 백년 유전의 역사를 끝내고 본래 자리인 경북 봉화 청량산 자락의 태자사로 되돌아와야 한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2071903275&code=960202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7)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上)



ㆍ삼만근의 활을 당길 기세… 한국서예의 정체성 완성한 김생

2000년이 넘는 우리나라 서예역사에서 패러다임을 바꾼 분기점이 몇 개 있다. 5세기 ‘광개토대왕비명’을 시작으로 8세기 ‘김생’, 15세기 ‘훈민정음’, 19세기 ‘추사 김정희’의 등장을 들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고예체가 동진의 왕희지 글씨와 쌍벽을 이루었다면, 김생은 해동서성으로서 해행서 중심으로 한국서예의 정체성을 미학적으로 완성했다. 또 훈민정음은 한자서예와 상대되는 한글서예의 탄생을 가져왔으며 김정희의 등장은 비첩(碑帖) 혼융으로 전통서예의 종언이자 근대서예의 시작이었다. 

김생(711~790?)의 이력은 ‘신라 성덕왕 10년(711)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80이 넘었는데도 글씨 쓰기를 쉬지 않아 각체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삼국사기)고 하는 정도다. 그러나 그는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린 인물이다. 송 휘종 연간(1102~1106)의 일이다. 고려학사 홍관이 진봉사(進奉使)를 수행하여 변경에 머물 때 휘종 황제 조칙을 가지고 온 송의 한림대조 양구와 이혁이 김생의 행초 두루마리를 보고 놀라 “뜻밖에 오늘 왕희지의 친필을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홍관이 “아니다, 신라사람 김생의 글씨다”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우기면서 “천하의 왕희지를 제외하고 어찌 이와 같은 신묘한 글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끝내 믿지 않았다(삼국사기).

고려 때 이인로(1152~1220)는 김생에 대해 “용필이 신과 같아 초서도 아닌 듯 행서도 아닌 듯한데, 멀리 57종의 제가체세(諸家體勢)로부터 나왔다”고 하였고, 이규보(1168~1241)는 왕희지와 짝하여 ‘신품제일(神品第一)’로 극찬하였다. 조선에서도 서거정, 이황, 허목, 홍양호 등 문인들의 평이 줄을 이었다. 그 중 성대중(1732~1812)은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글씨에 대해 “그 획이 마치 삼만 근의 활을 당겨서 한발에 가히 수많은 군사를 쓰러뜨릴 것 같다”고 하면서 손자의 “그 형세가 험하고 그 마디가 짧다”는 말에 비유하고 있다. 요컨대 김생은 한국서예의 조종(祖宗)으로 왕희지에 비견되는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김생의 주요 필적은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 등 열손가락 안쪽이다. 백월비는 처음 경북 봉화군 하남면 태자사에 세워졌지만 폐사가 된 후 방치되었다가 조선 중종 때인 1509년 영천군수 이항이 자민루로 옮겼다. 그리고 1918년 비신(碑身)만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져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두었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는 통일신라 고승으로 효공왕과 신덕왕의 스승인 낭공대사 행적(832~917)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비문은 최인연(868~944)이 지었고, 김생의 해서와 행서 글자를 낭공대사의 문인인 단목 스님이 집자했다. 입비(立碑)는 고려 광종 5년(954) 이루어졌다. 비신 높이 200㎝, 폭 96㎝로 한 글자의 지름은 2~3㎝다.

백월비는 통일신라 고승으로 효공왕과 신덕왕의 스승인 낭공대사 행적(行寂·832~917)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비문은 신라말 고려초 문장가이자 명서가인 최인연(868~944)이 지었고, 김생의 해서와 행서 글자를 낭공대사의 문인인 단목 스님이 집자(集字)하였다. 집자비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드물다. 

그러면 백월비 글씨의 조형을 점획과 결구 중심으로 보자. 대체적인 점획의 운필은 방(方, 모남)·원(圓, 둥글둥글함)의 혼용과 기필(起筆, 글자의 시작)과 종필(終筆, 끝맺음)의 강조, 점획의 축약(縮約)과 태세(太細, 굵고 가늠)의 대비가 극심한 가운데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글씨의 짜임새 또한 상층부가 육중하고 가로가 긴 구조로 다이내믹한 향세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동시대 여타 글씨에서 보기 어려운 독보적 경지다.
김생 글씨는 통일신라나 당나라 등 8세기의 여타 글씨와 어떻게 다른가. 이 시기는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등 당나라 초기 3대가에 의해 해서의 전형이 완성된 시기이자 글씨의 기준으로서 왕법의 복고가 만연한 때다. 이것은 통일신라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문무왕릉비편(681년경), 황복사지비편(8세기경), 성덕대왕신종명(771년) 등에서 증명된다. 김생은 당시 시대서풍인 왕법의 신수를 체득했고, 이를 토대로 당해(唐楷)의 전형을 수용하되 이것과는 유(類)를 달리하는 독자적인 글씨를 변화무쌍한 필획과 짜임새로 구사해냈던 것이다. 이것은 특히 험경한 획질과 결구에 있어 대비적인 음양 요소를 극심하게 운용하면서도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내는 데서 확인된다.
김생 글씨의 가치는 이와 같이 외래문화를 수용하되 그것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미의식에 맞게 재해석하고 실천해낸 첫 인물이라는 데 있다. 

김생이 쓴 백월비는 한자와 서예, 한자서예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음은 물론 한국 서예역사야말로 우리나라 문자디자인 내지는 타이포그래피의 정체성을 역사에서 생생하게 확인하는 현장이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241932165&code=960100&s_code=ac176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6) 태종무열왕릉비와 전액

ㆍ당풍을 재해석한 통일신라의 기상 ‘용틀임’

우리 역사에서 7세기라는 전환시대는 여러 측면에서 21세기 우리 모습과 겹쳐진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660년, 668년에 각각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 이보다 앞서 당은 618년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 일본은 710년 겐메이 천황이 나라로 천도한 이후 율령시대 최성기에 해당하는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를 완성했다. 요컨대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패러다임이 전면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각국은 독자적인 문화 색채를 띠면서도 크게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다. 바로 ‘당법(唐法)’ ‘당양(唐樣)’이라는 당나라 스타일이다. 

중국은 한족의 남조와 북방민족의 북조라는 이질적인 문화가 수·당을 거치면서 거대한 용광로처럼 하나의 법이나 양식으로 통합되었다. 서(書)를 보더라도 왕희지 중심의 운치 넘치는 동진의 남첩(南帖)과 역동적인 북위 해서 중심의 북비(北碑)가 전형의 당법(唐法)으로 완성되었다. 수대에 처음 남북의 서풍이 융화된 해서가 나왔다면 당대에는 구양순·우세남·저수량 같은 대가들이 나와 해서의 규범을 완성시키면서 서예의 황금시대를 연 것이다. 통일신라는 기존 삼국의 서로 다른 문화를 토대로 이러한 당법을 재해석하여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사실상의 단일문화를 구축하였다. 

648년(진덕여왕 2년) ‘태종무열대왕릉비’의 주인공인 김춘추(602~661)가 왕세자와 같은 신분으로 당 태종과 대면하게 된다. 당시 국력이나 국제정세로 보아 신라가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고구려를 쳐서 삼국을 통일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무리였다. 게다가 당 태종은 동아시아 권력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김춘추는 당군을 이 싸움에 끌어들여 난제 중의 난제를 기필코 해낼 심사였고, 결국 당 태종을 상대로 청병(請兵) 외교를 성공시켰다.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 전액. 능비의 이수(용머리) 부분에 남아 있는 현침전 계통의 전서체 글씨다.

그 와중에 태종의 친필인 ‘온탕비’ ‘진사비’를 받고 국학에서 석전과 강론을 참관하는 문화외교까지 느긋하게 수행하였다. 당 태종은 본인이 명필임은 물론, 동진의 왕희지를 다시 불러냄으로써 당나라 이후 서예사 전개를 왕희지 재해석의 역사로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왕희지 글씨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난정서’를 자신의 무덤까지 가져가게 함으로써 지금 진본이 전하지 않게 만든 일화도 남겼다. 당시 받았던 ‘온탕비’ ‘진사비’로 집자한 통일신라 말기 원주의 ‘흥법사진공대사탑비’(940)는 중국에도 없는 유일한 당 태종의 글씨로 행초서의 호방한 서풍이 압권이다. 

661년 건립된 ‘태종무열왕릉비’(국보 25호)는 통일시대를 열었던 김춘추의 당당한 외교와 세계 예술에 열려 있던 신라인의 문화적 자신감을 최고 품격의 조각과 글씨로 대변하고 있다. 비석 받침의 거북이는 당장에라도 엉금엉금 기어 나올 듯하고 비석 머리에 뒤엉킨 여섯 마리 용은 여의주를 물고 승천이라도 할 기세다. 능숙한 기법으로 쪼은 거북이의 발이나 등, 용틀임의 자태는 사실의 극치이자 진취적인 기운을 한껏 뿜어낸다. 

이후 통일신라의 석비는 모두 이처럼 거북이 받침돌에다 머릿돌은 용의 모습이다. 당나라 풍을 재해석한 태종무열왕릉비가 이런 양식의 첫 사례가 됐다. 여기서 대비되는 것이 같은 시기에 세워진 ‘당유인원기공비’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략에서 당의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록한 당비(唐碑)로 귀부(龜趺·거북이 발)는 없으나 이수( 首·용 머리)의 원규형반룡(圓圭形蟠龍·둥근 모서리 형태로 휘감은 용)은 당에서 직수입된 석비의 전형을 보여준다. 새로운 문화코드로 당풍이 유행했음을 여기서도 짐작할 수 있다. 

‘太宗茂(烈)大王之(碑)’라고 8자 2행이 양각으로 새겨진 두전(頭篆)의 글씨 또한 삼국시대 이전에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서체와 서풍을 보여준다. 같은 전서라도 통일신라와 고려의 선사탑비, 조선 선비의 신도비 두전에서 흔히 보이는 소전(小篆)은 다르다. 균일한 필획의 굵기에다 좌우 대칭의 글자구조는 같다고 하더라도 송곳처럼 필획의 끝이 뾰족하고 탱탱한 양태는 국내에서는 이 비석이 처음이다. 

마치 통일신라 개창기 힘의 실체가 서체 조형으로 대변된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름하여 현침전(懸針篆)인데 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629~694)의 글씨로 <대동금석서>에 전한다. 그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도합 22년간 당에 파견되어 나당연합군을 조직, 소정방과 연합하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하지만 비신의 파손으로 본문 글씨는 온데간데 없다. 같은 시대에 세워진 ‘문무대왕비’(681)나 ‘김인문묘비’(7세기 말)의 본문 글씨로 유추해보면 굳세고도 단아한 구양순체의 해서풍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간다. 이제 글씨도 고박한 고신라 서풍을 완전히 탈피하여 해서의 규범으로 제시된 당풍을 주체적으로 소화해내면서 한국서예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것이다. 역으로 말해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더 이상 서체의 분화는 없어진 것이다. 인간이 도달하고자 한 미의 절대적인 질서가 7세기의 글씨문화를 통해 구현되었으며, 이후 중국 청대나 조선 말기에 해당하는 18, 19세기까지도 왕법과 당해의 재해석의 역사가 전개된다. 

이런 맥락에서 절대미의 화신으로 당법을 수용하고 재해석해낸 통일신라의 문화력과 태도는 전통과 서구를 하나로 융·복합해야 하는 지금 우리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172044095&code=960100

부전도서관 개발 재고를 촉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 외

부산시민단체연대 "부전 도서관 개발 재고하라"

2014-03-03 09:42:19

부산시민운동단체연대는 3일 부산시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전도서관 개발 계획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운동단체연대는 이날 기자회견문을 통해 "온통 쇼핑몰과 유흥주점 일색인 서면특화거리에서 부산의 근대를 간직하는 부전도서관이야말로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라며 "이런 역사성과 장소성을 가진 시립 부전도서관은 과거에 이용했고 현재 이용하고 있고 미래에 이용할 시민에게 의견을 묻고 전문가 의견을 받아 개발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부산진구의 부전도서관 개발 추진과정에 대해 "구가 시의회의 의결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자를 정하고 건물 일부를 임대계약하는 등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구 지원 범위가 과도하게 확대돼 구 재정에 부담을 줄 수 있으며, 초과수익이 나더라도 이에 대해 환수를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이 협약서에 없어 민간 사업자에게 특혜를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부산시의회 기획재정위에는 '시립부전도서관 공유재산처리' 안건이 그동안 세 차례 상정됐지만 모두 심사보류됐다. 

ready@yna.co.kr 

(부산=연합뉴스) 차근호 기자 
출처 http://vip.mk.co.kr/news/view/21/21/20812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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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초 공립 부전도서관, 상업화 재건축 반대”
김보성 기자 press@vop.co.kr
입력 2014-01-08 13:35:22l수정 2014-01-08 14:10:56
“전국 최초 공립 부전도서관, 상업화 재건축 반대”
부산시, 부산진구 등이 전국 최초의 공립도서관인 부전도서관을 허물고 민자유치를 통한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부산지역 시민단체들이 “사실상 상업시설화하겠다는 것”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부산 부산진구 동천로 79에 위치한 부전도서관 전경.ⓒ민중의소리 김보성기자

부산시, 부산진구 등이 전국 최초의 공립도서관인 부전도서관을 허물고 민자유치를 통한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부산지역 시민단체들이 “사실상 상업시설화하겠다는 것”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부산YMCA, 부산경실련, 부산민언련, 부산민예총,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등으로 이루어진 부산시민운동단체연대(부산시민연대)는 9일 성명을 통해 “부전도서관의 공상복합 민자 재개발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부전도서관은 1901년 중구 동광동에 자리한 홍도회 독서구락부 도서실을 모태로 부산 시민의 책쉼터로 자리 잡아온 부산은 물론 전국 최초의 공립도서관. 

이 같은 역사적 의미에도 시는 부산 부산진구 동천로 79에 위치한 부전도서관의 시설이 낡고 협소하다는 이유로 재건축을 통해 도서관과 상업시설이 공존하는 이른바 공상복합 도서관으로 꾸미는 사업을 추진해왔다. 민간시행사인 S사가 총사업비 450억 원 투입해 1~3층엔 상가를 입주시키고, 지상 6~8층에는 도서관이 들어서는 연면적 6743㎡의 건물을 신축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부전도서관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부산진구청이 지난해 1월 ㈜서면디앤씨와 부전도서관 개발 협상을 완료했고, 실시협약까지 체결한 후 12월 도서관 건물멸실 및 취득 시정조정위원회까지 통과시켰다.

그러나 도서관과 상업시설을 연계시키려는 사업추진 계획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현재 부산시의회마저 ‘역사적 의미 고려’와 ‘유례가 없다’는 이유로 들어 심의보류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부산시민연대는 “부산시와 부산진구의 계획은 도서관을 상업시설로 만들어 돈벌이를 하고, 도서관은 그냥 이름만 넣겠다는 발상”이라며 “서면에 남아 있는 유일한 문화시설마저 상업시설이 들어선다면 이 지역은 문화불모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부산시민연대는 또 “전국 최초 공립도서관이라는 역사성이 있는 만큼 근대건조물로 지정해 시민들로부터 오랫동안 기억되는 장소로 보존할 필요가 있다”며 “부전도서관의 유지를 전제로 대안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출처 http://www.vop.co.kr/A000007164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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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전도서관 공상복합 민자 재개발을 반대한다.

부산경실…  조회 : 398

부전도서관 공상복합 민자 재개발을 반대한다.
부산시와 부산진구가 부산 사람들의 향수가 가득한 부전도서관을 허물고 민자로 공상복합 도서관을 만들겠다고 한다. 현재 부전도서관은 토지는 부산진구, 건물은 부산시 소유이며, 운영은 부산시교육청이 하고 있다. 그런데 부산진구청이 2012년 1월, ㈜서면디앤씨와 부전도서관 개발 협상을 완료하고 실시협약까지 체결한 후, 2012년 12월에는 도서관 건물멸실 및 취득 시정조정위원회까지 통과했다. 하지만 2013년 1월 부산시의회는 건물멸실 및 취득 공유재산 심의를 보류시킨 후, 3월과 6월에 부산진구청에 실시협약서 관련 보완을 요구한 상태이다.
 부전도서관은 1901년 중구 동광동에 자리한 홍도회 독서구락부 도서실을 모태로 시립도서관으로 발전하였으며, 1962년 부산진구 부전동 현 부지에 착공하여 부산시가 직할실로 승격한 1963년에 완공 후 개관하였다. 1982년 초읍도서관으로 시민도서관을 이관한 이후부터 현재의 부전도서관으로 불리고 있다. 부전도서관은 현재 건물 역사만 해도 50년이 되고, 그 전까지 하면 11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부전도서관은 부산 최초의 공립도서관 건물이라는 역사성과 함께 수많은 부산시민들이 부전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추억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민간사업자는 부전도서관 현 부지에 8층짜리 복합건물을 지어 저층은 상업시설을 넣고, 6~8층에 도서관을 넣겠다고 한다. 이는 사실상 도서관 부지를 상업시설로 만들어 돈벌이를 하고, 도서관은 그냥 이름만 넣겠다는 발상이다. 이러한 민간사업자의 계획에 부산진구와 부산시가 왜 찬성하고 나서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재 부전도서관은 교통의 요충지인 서면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용이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이용하기 편리하다. 특히 최근 유흥가로 변하고 있는 서면에 남아 있는 유일한 문화시설로, 사실상 상업시설인 공상복합건물의 고층에 도서관이 자리잡게 한다면, 서면은 문화불모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부산시가 앞장서서 부산의 기억을 자꾸 없애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부산은 오래 된 건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요즘 다른 도시나 외국에 가면 주로 가는 관광지가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건물과 장소이다. 즉 그 도시의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장소에 사람들이 찾아 간다. 개항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치르는 동안 부산은 부산역, 영도다리, 남선창고, 부산세관 등 역사성과 사람들의 기억을 담긴 건물과 장소가 많다. 하지만 개발과정에서 전부 다 없애고 모두 새로 지어버렸다. 영도대교도 예전 영도다리가 아니다. 그저 도개기능만 부활한 완전히 새로운 다리다. 그럼에도 전국에서 옛날 영도다리의 향수 때문에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전도서관 건물은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한 1963년에 개관한 부산 최초 공립도서관이며, 전국 최초 공립도서관이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개항기부터 한국전쟁 전후 시기 사이에 건립된 건축물이나 시설물을 근대건조물로 지정한다는 부산시근대근조물조례에 의해 부전도서관은 현재 근대건조물로 지정이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동 조례 5조에 의거 근대건조물보호위원회 심의를 거친 후 근대건조물로 추가 지정할 수 있으며, 문화재청에서 지정·등록된 문화재도 근대건조물로 지정할 수 있다.
부산시는 지금의 부전도서관을 시민들로부터 오랫동안 기억되는 역사적인 장소로 보존하고, 앞으로도 시민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으로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 부산시는 근대근조물 조례 2조의 내용을 일부 개정해서라도 부전도서관을 근대건조물로 지정하여 보존해야 한다. 또한 문화재청에 부전도서관을 역사성을 고려하여 등록문화재로 등록해 줄 것을 심의 요청해야 한다. 부산시와 부산진구는 부전도서관의 유지를 전제로 부전도서관 인근의 궁리마루와 연계하여 역할 분담 및 상호 시너지가 가능한 대안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2014년 1월 7일
부산시민운동단체연대
부산경실련부산민언련부산민예총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부산생명의전화부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부산흥사단부산환경운동연합부산YMCA, 부산YWCA, )기후변화에너지대안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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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부전도서관 개발, 미룰수없다" 하계열 부산진구청장

[CBS노컷] 입력 2013.10.25 15:00
현재 부전도서관 슬럼화, 시민들이용불편...조속한 시의회 심의안 통과 필요

[부산CBS 김혜경 기자] 부산진구청이 지역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핵심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부전도서관 개발 사업이 부산시의회에서 심의안 상정이 10개월 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사업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이 때문에 관할 부산진구청은 행정 귀책사유로 최대 수십억대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릴 위기에 놓였고, 인근 상인들도 빠른 개발을 촉구하며 시의회 앞에서 집회를 준비하고 나섰다. 하계열 부산진구청장으로부터 부전도서관 개발 사업의 배경과 필요성,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어봤다.

△ 부전도서관 개발 사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 현재 부전 도서관은 접근성이 좋아서 많은 시민이 이용하고 있으나, 반세기가 지난 열악한 시설로 인해 이용자들이 많은 불편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부산을 대표하는 서면상권의 중심부에 위치해 수십 년 동안 슬럼화를 부추기고 있고, 지역 발전을 위해 개발을 요구하는 주민 숙원사업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진구의 부지를 낡은 도서관으로만 방치하기 보다는 현대식 도서관과 문화시설 등 지역주민이 원하는 시설로 개발해 부지의 효용가치를 높이기 위해 개발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 부전도서관 개발이 부산진구의 핵심 사업이유와 새도서관이 들어설 경우 기대효과는 어떤것이 있나?

= 우리구는 예로부터 부산을 대표하던 서면상권의 명성을 되찾고자
2012년 69억원을 투입하여 서면특화거리를 조성했다. 이와 더불어 서면 지역 내 유일한 부산진구 부지를 지역주민들이 더욱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고민하던 중 2008년부터 새도서관을 건립하기로 구상하는 등 지난 6년 간 끌어온 부산진구의 핵심사업이다. 특히, 열악한 구재정 여건을 감안해 기초자치단체에서는 처음으로 BTO방식을 적용한 민자사업으로 전국적인 시범 모델이기도 하다. 도서관 개발 사업이 완료되면 도서관은 지금보다 3배 이상 확충되고 1,000평 이상의 구민문화시설과 229대의 주차장이 확보돼 지역 내 주차문제가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 서면 중심가의 유일한 슬럼가가 서면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탈바꿈되어 지역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 부산시의회에서 멸실 허가 심의안이 10개월 보류되면서 부산진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인가?

= 동래역복합환승센터 건립사업은 지난 9월에 첫 상정돼 바로 통과됐지만, 본 사업은 부산시의회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심의안을 상정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해 11월 30일 사업시행사와 실시협약을 체결하고 올해 7월에 착공 예정이었던 본 사업이 무작정 지연되고 있다. 이로 인해 사업시행사 측의 금전적인 피해와 투자자들의 집단 민원 발생은 물론 개발사업을 원하는 지역주민과 도서관 이용자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해 행정신뢰도가 실추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자칫 5년 동안 준비해온 사업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어 고민이 커지고 있다.

△부산시의회에서는 부전도서관이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공공의 목적이 큰 도서관에 상업시설이 들어서는 것은 취지에 맞지 않다고 맞서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은?

= 부산시의회에서 부전도서관이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부산시 근대건조물 보호에 관한 조례'에 의해 지정된 6개 지정 건물은 물론 나머지 근대건조물 219개와 현대건조물 131개소에도 포함되지 않아 사실상 명분이 없는 이야기이다. 우리 구에서는 신축도서관 출입구와 6층 도서관 홀 중앙에 역사전시관을 만들어 현 도서관의 축소 모형을 비롯해 부전도서관의 옛 모습을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재현하여 역사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도서관과 상업시설의 공존에 관한 문제는 처음부터 부산시에 공상 복합시설로 건립한다는 취지로 사업 승인을 받았으며, 선진국에서는 도서관이 백화점, 쇼핑센터와 같은 상업시설과 들어가 있는 사례가 많다. 싱가포르 센강도서관, 오차드도서관, 우즈랜드지역도서관 등은 도심 속에서 이용객들이 원하는 편의시설과 도서관이 잘 조화를 이뤄 사랑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도서관이다. 특히, 독서문화 확대를 위해 도심 곳곳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 있는 이 시기에 도서관에 상업시설이 들어서게 되면 도서관의 정체성이 상실되기보다 오히려 시민들이 편하고 쉽게 책을 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도서관의 정체성을 운운한다면 소음과 매연 등으로 면학 분위기가 열악한 이 곳보다는 쾌적한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 부산시의회에서 멸실 허가를 내주지 않을 경우 사업자측에서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벌일수도 있는데, 앞으로 부산진구는 어떻게 대응할 방침인가?

= 부전도서관 개발사업은 지역주민과 도서관 이용자들이 원하고 있는 사업으로 시민의 소리를 무시하고 정치적 논리로 일관해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하는 것은 시민을 대표하는 의회에서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회기에도 부산시의회에서 심의를 재개하지 않는다면 사업시행사도 더는 버틸 수 없을 것으로 보이며, 사업이 무산될 수 있어 심히 우려스럽다. 사실, 엄격히 구분하자면『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상 건물 멸실은 부산시의 권한사항이며, 신축도서관의 취득에 관한 사항이 부산시의회 의결사항이다. 부산시의회 심의 지연으로 사업이 무산될 경우 이는 행정관청의 귀책사유이므로 손해배상은 어쩔 수 없으나, 이에 앞서 부산시와 부산시의회에 원활한 사업시행을 위한 협조를 구할 것다. 건물 멸실을 약속하고 사업시행을 승인해준 부산시에서도 적극적인 대처와 대책 방안을 마련해줘야 하겠지만 부산시의회에서 다음 회기에는 지역주민을 위해 원활하게 처리해줄 것으로 믿고 있다.

hkkim@cbs.co.kr

출처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2959564&ctg=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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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구, 시립부전도서관 개발사업 실시협약 체결

부산진구는 2012년 11월 30일『시립부전도서관 개발사업』의 민간사업시행자 선정을 위한 실시협약을 체결한다.

부전도서관은 1963년에 건립되어 1982년 8월 초읍시민도서관 개관시까지 부산시민의 독서문화 발전에 기여해온 대표적인 도서관이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의 부전도서관은 콘크리트골조 건물로 내구연한이 다되었고, 노후 협소한 시설이 사용자들의 불편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어 공공도서관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부산진구는 토지 소유주로서 노후 협소한 도서관을 확충하고 최신 시설로 탈바꿈시켜 지역주민의 편의 제고와 더불어 지역 발전을 꾀하고자 2008년부터 도서관 부지를 활용한 개발사업을 검토하여 왔다.

도서관 건립 및 부지 개발에 따른 재정 확보 문제를 해결하고자 민자유치사업을 검토하였으나, 2008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국내 부동산 경기 악화로 2년간 사업이 잠정 보류되어 왔으며, 2011년부터 사업을 재검토하여 부산광역시 및 부산광역시교육청과 사업시행에 따른 충분한 협의를 통해 2011년 부산진구의회에서 공유재산관리계획 변경 의결을 받은 후 2012년 1월 13일 민간사업시행자 모집공고를 시행하여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2012년 4월 외부전문 평가단을 구성하여 사업제안서를 평가한 결과 우선협상대상자가 선정되었으며, 5월부터 6개월에 걸쳐 5개 분야별 실무협상을 진행하여 사업전반에 대한 협상을 통해 도출된 합의 결과를 바탕으로 본 실시협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부산진구청과 협상대상자간에 실시협약을 체결함으로서 본 사업의 사업시행자가 지정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실시협약 체결에 따라 사업시행자는 180일 이내에 실시계획을 수립하여 부산진구청에 승인을 요청하여야 하며 부산진구청의 승인을 받게 되면, 착공에 들어갈 수 있다.

2013년 7월정도에 착공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며, 준공은 2015년 2월쯤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준공 즉시 소유권이 부산진구로 귀속되며, 민간사업시행자는 판매시설에 한해 관리운영권을 부여받아 20년 동안 운영을 하게 된다.

본 사업으로 건립되는 신축 건물은 지하 3층, 지상 8층에 연면적 31.276㎡, 건축면적 3,250㎡의 규모이며, 전국 최초의 공상복합시설로서 지상 6~8층은 도서관(전용면적 5,495㎡), 4~5층은 구민문화시설(전용면적 2,719㎡), 1~3층은 판매시설(전용면적 7,115㎡)로 이루어진다.

도서관은 현재 면적보다 2배 이상 면적으로 확충되어 가장 최근에 BTL사업으로 건립된 해운대도서관(전용면적 4,446㎡)보다 더 큰 규모이며, 최신 시설에 어린이동화체험실, 다문화자료실 등 다양한 기능을 완비하고 옥상 공간을 휴게공간으로 조성하여 편의시설을 충분히 갖추게 된다.

또한 구민문화시설에는 다목적홀과 갤러리 등 구민을 위한 문화시설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계획이며, 부전마루라는 폭넓은 야외데크(868㎡)를 마련하였다.

지하1층 일부와 지상 3층까지는 사업시행자의 투자비 회수를 위한 임대분양 공간으로 학교 보건법에 따른 청소년 유해시설은 물론 건축법상의 근린시설 중의 유흥업소 등 도서관에 저해되는 업종을 유치할 수 없도록 하여 공공성을 강화하였다.

본 시설은 교육문화시설과 판매시설이 공존하는 일종의 공상복합시설로서 도서관이나 문화시설이 독립된 시설이어야 한다는 우리나라 정서에는 생소할 수 있겠으나, 해외 사례를 보면 싱가포르의 센강도서관, 오차드도서관처럼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 들어가 있는 공공도서관을 접할 수 있어 모범 답안은 없어 보인다.

지하철 1,2호선이 인접해있고 1일 유동인구 20만명에 달하는 부산의 중심상권인 서면에 위치한 부전도서관은 규모에 비해 이용자수가 많은 곳으로 그만큼 접근성이 좋은 곳이다. 지금까지 도심 중심가에 위치한 학교들이 외곽으로 이전되고 부지는 개발사업에 이용되는 사례가 많았으며, 이는 도심내 과밀현상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결국 접근성이 떨어지고 이로 인한 불편함은 이용자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본 사업을 통해 부전도서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부지의 효율성을 높이고 또한 이용자들에게 도서관외 다양한 기능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복합시설을 건립하여 주변 개발과 연계된 시너지 효과로 지역 활성화에 크게 기여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부산진구에서는 착공 전 실시계획 승인시 사업시행자의 자금 조달과 집행 등 사업 시행에 문제가 없도록 면밀히 검토하고 자금계좌 관리 등 모든 과정에 철저한 관리 감독을 통해 신축 도서관이 적기에 완공되고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사업 주무관청으로서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부울경뉴스 편집부

http://www.bulgungnews.com/SubMain/News/News_View.asp?bbs_mode=bbs_view&tni_num=414086

댓글 다세요, 도서관 사서들이 권하는 책 읽고


【서울=뉴시스】오제일 기자 = 국립중앙도서관(관장 임원선)이 3~14일 디브러리 블로그를 통해 '사서추천도서' 감상평을 모집한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어문학·인문과학·사회과학·자연과학 등 주제 분야별로 추천한 책이 대상이다.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김덕영 지음), '1913년 세기의 여름'(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세상물정의 사회학'(노명우 지음),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조홍섭 지음) 등 40권이다.

디브러리 블로그(http://blog.naver.com/dibrary1004)에서 '사서들이 권하는 책'에 소개된 추천도서에 감상평(100자 내외)을 댓글로 남기면 된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당첨자는 24일 디브러리 블로그에 공지된다. 개별 연락(쪽지·전자우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수 감상평(30편 내)을 작성한 참가자에게는 선물을 준다. 우수 감상평은 국립중앙도서관이 7월 발간하는 '휴가철에 읽기 좋은 책 2014'에도 수록된다.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운영과는 "분기별로 '사서추천도서 감상평 공개 모집' 행사를 실시해 국민 독서문화 확산에 기여할 것"이라고 전했다.

kafka@newsis.com

출처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40302_0012758404&cID=10703&pID=10700

누군가에게 독서는 ‘독’이다

누군가에게 독서는 ‘독’이다

<독서독인>/박홍규 지음/인물과사상사 펴냄
  조회수 : 10,640  |  장동석 (출판평론가)  |  webmaster@sisain.co.kr

‘내 인생의 책’을 묻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잠시 당황한다. 책으로 밥을 먹고사는 처지에 콕 집어 한 권의 책을 말해줄 수 없을뿐더러,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책이 한 권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연이어 묻는다. “책을 읽는 목적이 뭐냐?” 책이 좋아 책더미에 묻혀 살 뿐, 딱히 목적이 궁색한 나로서는 서평가인 로쟈 이현우씨의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러 권’입니다. 우리가 좀 ‘덜 비열한 인간’이 되거나 더 나아가 ‘비열하지 않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면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 다수의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아직도 비열한 인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가 ‘책만 읽어서’가 아니라 ‘책을 덜 읽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충분히 읽지 않아서’라고 말해야 할는지도 모릅니다.”(<책을 읽을 자유>)

그렇다. 책은 덜 비열한 인간, 나아가 비열하지 않은 인간이 되기 위해 읽는 ‘좋은 것’이다. 그래서 국가까지 나서 책을 읽자고 호들갑을 떨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믿음을 깨는 책 한 권이 얼마 전 출간되었다. 이 책을 읽노라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독서 자체가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박홍규 교수의 <독서독인>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 </font></div>히틀러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섭렵한 인물이다. 
히틀러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섭렵한 인물이다.

박홍규 교수의 <독서독인>은 문제적 저작이다. 특히 1부 ‘독서, 권력을 훔치다’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다른 건 몰라도 전쟁터에서도 책을 읽었던 나폴레옹과 마오쩌둥을 아주 조금 좋아했다. 하지만 생각이 짧았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가 되어 독재의 길을 걸었고, 검찰을 동원해 모든 출판물을 검열하고 어떤 작가들은 구속했다. 박 교수는 나폴레옹을 일러 “독서가 낳은 괴물”이라고 말한다.

마오쩌둥은 어땠을까. 마오쩌둥은 <논어>는 물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나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등 고전을 탐독했다.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박홍규 교수는 “마오쩌둥의 마르크스주의도 결국은 진화론적인 서양의 과학적 사상의 일종이고 특히 그 폭력주의를 허용할 수 없다”라며 강하게 비판한다. 레닌과 스탈린, 히틀러, 괴벨스, 무솔리니, 호찌민, 폴 포트도 박홍규 교수의 서릿발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레닌은 스위스, 독일, 영국으로 이어진 망명 생활 내내 도서관을 드나들었지만 권력의 화신으로 퇴화했다. 스탈린 역시 감옥에서도 전장에서도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전제 권력자이자 대량 학살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독서를 통해 권력에 맞선 이도 소개 

가장 문제적 인간은 히틀러다. 히틀러는 정치·군사·예술·소설은 물론 점성술과 심령술에 관한 책까지 섭렵한 인물이다. 흔히 반유대주의 책을 탐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히틀러는 <돈키호테> <톰 아저씨의 오두막> <걸리버 여행기> 등 다양한 고전을 읽는 데 주력했다. 결과는 무참하다. 20세기 역사에서 히틀러만큼 참혹한 발상을 한 사람,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사실 이 책은 독서를 통해 권력을 훔친 사람들과 더불어 2부에서 독서를 통해 권력에 맞선 사람들을 소개한다. 레닌과 스탈린, 마오쩌둥 등 권력을 훔친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던 마르크스는 오히려 책을 통해 권력에 맞선 사람이었다. 간디는 책을 통해 “창조적이며 실천적인 정치가”로 재탄생했고, 루쉰은 “불평등과 부자유의 사회를 비판한 자유인”이었다. 이 외에도 톨스토이, 체 게바라, 마틴 루서 킹, 스콧 니어링 등이 권력에 맞선 사람들이다.

<독서독인>을 읽으며 책과 독서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나는 단지, 책이 좋아 책을 읽는 것일까. 덜 비열한 사람이 되기 위해, 혹은 비열하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일까. 출판평론가 혹은 북 칼럼니스트의 고민이 깊어가는 밤이다. 

출처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85

관악구 독서 전령사 ‘혜윰나래’를 아시나요

관악구 독서 전령사 ‘혜윰나래’를 아시나요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ㆍ“책 읽는 모습 아이에게 보여주자” 학부모 독서모임 시작
ㆍ봉원중 독서동아리만 25개… 전국서 가장 큰 규모로 발전

지난달 28일 서울 관악구 청룡동 효성교회 교육실. 40~50대 여성 10여명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둘러앉았다. 손에는 정도언 서울대 교수의 심리학 서적 <프로이드의 의자>가 들려 있었다. 진선미씨(43)는 “시기심에 관한 대목을 읽으면서 내 안의 시기심을 들여다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경희씨(48)는 “나 자신을 치유해야 아이를 돌볼 에너지도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독서동아리 ‘혜윰나래’의 토론은 2009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각’이라는 우리말 ‘혜윰’과 날개를 의미하는 ‘나래’의 합성어로 이름 지은 이 모임은 서울 관악구 봉원중학교 최초의 학부모 독서모임으로 시작됐다.

서울 관악구 독서동아리 ‘혜윰나래’ 회원들이 지난달 28일 구청 ‘용꿈 꾸는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다. | 관악구 제공

‘생각의 날개를 펴자’는 의미로 시작한 12명의 회원들은 2주에 한 번씩 모여 읽은 책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공유했다. 목적은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모임은 자녀들이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계속됐다. 올해로 6년째인 혜윰나래는 학교와 지역사회의 독서모임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됐다. 봉원중학교가 독서동아리만 25개를 보유,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된 것이다.

회장 호경환씨(48)는 “대다수 회원이 책 읽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모임을 시작했다가 이젠 책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다.

회원들은 학교나 지역의 책 관련 행사장을 찾아가 ‘책사랑’을 호소하고 있다. 6m 크기의 용(龍) 모형에 책 구절을 적어 거리를 누볐다. 대형 중고 병풍을 개조해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을 주제로 한 독서신문을 만들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대형 냉장고 박스를 이어붙여 완성한 이동도서관에 직접 제작한 책 70권도 비치, 아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저자와의 만남, 문학기행도 열었다.

회원 박선미씨(49)는 “책 행사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보고 들은 주민들이 이후 또 다른 독서동아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뿌듯하다”고 말했다. 

엄마들의 활동은 반향이 컸다. 2009년 불과 1개에 불과하던 봉원중 독서동아리는 2011년 22개, 2012년 39개로 늘었다. 지금은 25개로 다소 줄었지만 전국 최다 규모다. 

관악구 주민들이 만든 독서동아리는 45개에 달한다. 관악구는 주민들의 독서동아리가 늘어나자 지난해부터 17만~30만원씩 활동비까지 지원하기 시작했다. 혜윰나래는 올해 드라마·퀴즈쇼·노래 등으로 구성한 북콘서트도 열 계획이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3022238125&code=95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