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일 월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7)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上)



ㆍ삼만근의 활을 당길 기세… 한국서예의 정체성 완성한 김생

2000년이 넘는 우리나라 서예역사에서 패러다임을 바꾼 분기점이 몇 개 있다. 5세기 ‘광개토대왕비명’을 시작으로 8세기 ‘김생’, 15세기 ‘훈민정음’, 19세기 ‘추사 김정희’의 등장을 들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고예체가 동진의 왕희지 글씨와 쌍벽을 이루었다면, 김생은 해동서성으로서 해행서 중심으로 한국서예의 정체성을 미학적으로 완성했다. 또 훈민정음은 한자서예와 상대되는 한글서예의 탄생을 가져왔으며 김정희의 등장은 비첩(碑帖) 혼융으로 전통서예의 종언이자 근대서예의 시작이었다. 

김생(711~790?)의 이력은 ‘신라 성덕왕 10년(711)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80이 넘었는데도 글씨 쓰기를 쉬지 않아 각체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삼국사기)고 하는 정도다. 그러나 그는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린 인물이다. 송 휘종 연간(1102~1106)의 일이다. 고려학사 홍관이 진봉사(進奉使)를 수행하여 변경에 머물 때 휘종 황제 조칙을 가지고 온 송의 한림대조 양구와 이혁이 김생의 행초 두루마리를 보고 놀라 “뜻밖에 오늘 왕희지의 친필을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홍관이 “아니다, 신라사람 김생의 글씨다”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우기면서 “천하의 왕희지를 제외하고 어찌 이와 같은 신묘한 글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끝내 믿지 않았다(삼국사기).

고려 때 이인로(1152~1220)는 김생에 대해 “용필이 신과 같아 초서도 아닌 듯 행서도 아닌 듯한데, 멀리 57종의 제가체세(諸家體勢)로부터 나왔다”고 하였고, 이규보(1168~1241)는 왕희지와 짝하여 ‘신품제일(神品第一)’로 극찬하였다. 조선에서도 서거정, 이황, 허목, 홍양호 등 문인들의 평이 줄을 이었다. 그 중 성대중(1732~1812)은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글씨에 대해 “그 획이 마치 삼만 근의 활을 당겨서 한발에 가히 수많은 군사를 쓰러뜨릴 것 같다”고 하면서 손자의 “그 형세가 험하고 그 마디가 짧다”는 말에 비유하고 있다. 요컨대 김생은 한국서예의 조종(祖宗)으로 왕희지에 비견되는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김생의 주요 필적은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 등 열손가락 안쪽이다. 백월비는 처음 경북 봉화군 하남면 태자사에 세워졌지만 폐사가 된 후 방치되었다가 조선 중종 때인 1509년 영천군수 이항이 자민루로 옮겼다. 그리고 1918년 비신(碑身)만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져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두었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는 통일신라 고승으로 효공왕과 신덕왕의 스승인 낭공대사 행적(832~917)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비문은 최인연(868~944)이 지었고, 김생의 해서와 행서 글자를 낭공대사의 문인인 단목 스님이 집자했다. 입비(立碑)는 고려 광종 5년(954) 이루어졌다. 비신 높이 200㎝, 폭 96㎝로 한 글자의 지름은 2~3㎝다.

백월비는 통일신라 고승으로 효공왕과 신덕왕의 스승인 낭공대사 행적(行寂·832~917)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비문은 신라말 고려초 문장가이자 명서가인 최인연(868~944)이 지었고, 김생의 해서와 행서 글자를 낭공대사의 문인인 단목 스님이 집자(集字)하였다. 집자비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드물다. 

그러면 백월비 글씨의 조형을 점획과 결구 중심으로 보자. 대체적인 점획의 운필은 방(方, 모남)·원(圓, 둥글둥글함)의 혼용과 기필(起筆, 글자의 시작)과 종필(終筆, 끝맺음)의 강조, 점획의 축약(縮約)과 태세(太細, 굵고 가늠)의 대비가 극심한 가운데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글씨의 짜임새 또한 상층부가 육중하고 가로가 긴 구조로 다이내믹한 향세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동시대 여타 글씨에서 보기 어려운 독보적 경지다.
김생 글씨는 통일신라나 당나라 등 8세기의 여타 글씨와 어떻게 다른가. 이 시기는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등 당나라 초기 3대가에 의해 해서의 전형이 완성된 시기이자 글씨의 기준으로서 왕법의 복고가 만연한 때다. 이것은 통일신라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문무왕릉비편(681년경), 황복사지비편(8세기경), 성덕대왕신종명(771년) 등에서 증명된다. 김생은 당시 시대서풍인 왕법의 신수를 체득했고, 이를 토대로 당해(唐楷)의 전형을 수용하되 이것과는 유(類)를 달리하는 독자적인 글씨를 변화무쌍한 필획과 짜임새로 구사해냈던 것이다. 이것은 특히 험경한 획질과 결구에 있어 대비적인 음양 요소를 극심하게 운용하면서도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내는 데서 확인된다.
김생 글씨의 가치는 이와 같이 외래문화를 수용하되 그것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미의식에 맞게 재해석하고 실천해낸 첫 인물이라는 데 있다. 

김생이 쓴 백월비는 한자와 서예, 한자서예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음은 물론 한국 서예역사야말로 우리나라 문자디자인 내지는 타이포그래피의 정체성을 역사에서 생생하게 확인하는 현장이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241932165&code=960100&s_code=ac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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