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3일 목요일

지식지도의 변화

<조선일보>의 전병근 기자의 시리즈 기사, 제목은 '지식 지도가 바뀐다'고 붙어 있다. 2011년 2월 25일의 기사를 묶어서 옮겨 놓는다. 이런 기사를 이제 자주 보게 될 것이다. 계속될 것인가?



[지식 지도가 바뀐다] [1] 책의 재탄생 '제2의 구텐베르크 혁명'  




[지식 지도가 바뀐다] 인류, 디지털에 책 넘기자… 인류, 책과 가까워져… 紙가 죽자, 知가 살다
[1] 책의 재탄생 '제2의 구텐베르크 혁명'

2시간에 끝내는 30~90쪽 '싱글 e북' 인기, 비디오북·실시간 출간… 新계몽주의 열려
외교부 서기관 K(37)씨는 요즘 지하철 출퇴근 시간에 '국제적 독서'를 한다. 스마트폰으로 뉴욕타임스 신간을 보고 내려받는 데 몇 초면 끝난다. 해외 최신 경향을 시차(時差) 없이 소화한다. 이따금 인터넷 동영상으로 예일대 강연도 즐긴다. 뭔가 알려면 두툼한 책과 씨름해야 했던 대학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졸업 후 멀어진 듯했던 지식 쌓기도 다시 그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디지털의 옷을 입은 지식이 가볍고 편리하게 진화하고 있다. 각종 스마트 기기가 휴대품이 되고 인터넷으로 세계가 연결되면서 지식은 다양한 모습으로 대중 속에 파고든다. 최전선은 출판 분야. '싱글 e북' 'TED(유명한 공개 강연) 북' '유튜브 북'까지 등장했다.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은 지난달부터 '킨들 싱글'로 바람몰이 중이다. '싱글 e북'은 노래 한두 곡이 든 '싱글 음반'처럼 부담없다. 영문 30~90쪽 분량(한글 50~130쪽·1~2시간 독서용)이다. 잡지 글보다는 길고, 책 한 권보다는 짧다. 가격도 0.99~4.99달러. 단행본보다 절반 이상 싸다. 기존 책의 축약판이 아니라 인기 저자들의 새로운 기획도서다. 미·프랑스를 넘나드는 소설가 조너선 리텔의 '보이지 않는 적', 영국 신경제학재단(NEF)의 웰빙 센터 창설자인 닉 막스의 '호모 에볼리티쿠스' 등이 글로벌 독자를 겨냥한다. 전용 단말기인 킨들은 물론 스마트폰과 PC로 내려받을 수 있다.

아마존의 러셀 그랜디네티 부사장은 "책과 잡지 사이 무주공산(無主空山)이던 지식시장을 디지털 콘텐츠로 정복하겠다"고 했다. '싱글 e북'은 치밀한 조사에 따른 것이다. 이 정도 분량이 주제 하나를 풀어내기에도 좋고, 독자들도 최적으로 느낀다는 것.

출간의 순발력도 좋아졌다. 조지메이슨대학의 타일러 코웬 교수는 미 경제 현황을 진단한 'The Great Stagnation(대침체)'을 몇달 만에 내고는 "디지털 팸플릿 시대가 도래했다"며 좋아했다. 사전(事前) 출간, 실시간 출간도 가능해졌다. 지난 17일 막 내린 미국 제퍼디 퀴즈쇼에서 IBM 수퍼컴퓨터 왓슨과 인간 챔피언의 대결을 다룬 책 '마지막 제퍼디'는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출간됐다. e북을 사전 구입한 사람은 쇼가 끝난 후 업데이트를 받았다.

대학의 출판도 더 이상 종이책이나 논문에 머물지 않는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출판부는 이달 '유튜브로 배우기'를 펴냈다. 알렉산드라 주하스 교수가 수업에 활용한 '비디오북'이다. 웹사이트(vectors.usc .edu/projects/learningfromyoutube)에서 누구나 무료 이용할 수 있다. 쪽수 개념도 변한다. 이 책은 250 '텍스티오즈(texteo)'로 구성됐다. '텍스트'와 '비디오'를 결합한 페이지 개념이다.

변화무쌍한 지금의 상황은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직후에 비견된다. 디지털에 기반한 21세기 계몽주의 바람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하버드대의 매튜 배틀스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우리는 지금 책의 개념이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것을 보고 있다"며 "인쇄술이 처음 나왔을 때도 작가나 저자, 출판인들은 어떻게 사용해 정보를 조직화하고 이야기를 새 방식으로 전달할지 오래 고민했다. 새로운 도구와 기술을 따라잡는 데는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라고 했다.

뉴욕에 있는 남가주대학(USC) 부설 '책의 미래를 위한 연구소'는 새로운 변화를 이렇게 요약했다. "500년 인쇄술 이후 라디오 영화 TV에 이어 컴퓨터가 나오면서 우리는 미디어를 결합한 새로운 표현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디지털로 이동하면서 시각과 음성, 동영상 요소들이 문자에 더해졌을 뿐 아니라, 네트워크화하면서 시·공간 제약에서도 벗어났다. 그것은 독자 작가 텍스트로 이뤄진 생태계에서 끝없이 진화하는 실체이며 늘 현재진행형이다."

전병근 기자 bkjeon@chosun.com
입력 : 2011.02.25 03:03 / 수정 : 2011.02.28 09:00

[지식 지도가 바뀐다] [2] 글에서 다시 '말의 시대'로  


[지식 지도가 바뀐다] 이제… 지식은 '마이크'로 전달된다
[2] 글에서 다시 '말의 시대'로

글쓰기보다 말하기가 중시… 영상·음향 결합한 '강연 열풍'
스티브 잡스·오바마 등 '전달력 달인'이 주목 받는 시대
지난 26일 서울역사박물관은 토요일인데도 면학 열기로 뜨거웠다. '한국은 노벨과학상을 받을 수 있나?' 도발적인 물음을 제목으로 내건 오세정 서울대 교수의 열강이 이어졌다. 한국연구재단의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중 '과학과 사회, 그리고 한국' 네 번째 강의다. 인터넷과 전화로 매회 150명씩만 수강생을 받지만 지난달 13일 시작된 접수는 당일 일찌감치 마감됐다.

지난 23일 저녁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는 '시사콘서트'가 열렸다. 탁현민 성공회대 교수가 기획한 무대의 강연자는 조국 서울대 교수. 인디밴드의 연주가 어우러진 퓨전식 지식 축제 역시 성황을 이뤘다.

지식이 책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활자 발명 후 500년간 글 속에 숨죽이고 있던 지식이 다시 소란스런 음성과 눈앞의 형상으로 뛰쳐나오고 있다. 그 육화(肉化)의 가장 극적인 형태가 바로 강연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지식계는 강연 열풍이다. 작년 11월 G20 정상회의 때, 잠실체육관에는 '테크플러스 포럼'이란 이름의 글로벌 강연회가 열렸다. '지식 콘서트'를 표방한 이 행사에는 세계 최초 가상현실 고안자인 재런 레이니어와 세계적인 디지털 인문학의 권위자 올리버 그라우 등 국내외 혁신가들이 스토리텔링 강연의 진수를 보였다. 재즈 드러머 남궁연은 한바탕 연주를 시작으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강연했다. 3D 영상과 입체음향이 어우러진 지식의 향연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도 중계됐다.

이런 대중 강연의 글로벌 선구자는 미국에서 시작된 공개강연인 TED. 기술·오락·디자인의 머리글자를 딴 이 행사는 국내에도 지회(TEDx)가 뿌리내렸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1984년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서 시작된 TED는 18분 제한시간 내에 파워포인트를 활용한 생동감 넘치는 주제 발표로 세계에 강연 돌풍을 일으켰다. 730여 회 강연 동영상의 조회 수만 약 3억회에 이른다. 큐레이터인 크리스 앤더슨 '와이어드' 편집장은 "사람들은 커피 한잔 마실 짧은 시간에 온라인 강연을 보면서도 알맹이가 있는 뭔가에 귀 기울인다"며 "아무리 뛰어난 이론이라도 비행기나 기차 여행을 하는 동안 소화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TED는 e북 시장까지 진출했다. 인기 강연을 재가공한 'TED북스' 시리즈를 매달 한 권 아마존 킨들을 통해 낸다.

강연이 각광받는 것은 이제는 지식 자체보다 '전달의 힘'이 중시되기 때문이다. '설득의 심리학' '프레젠테이션 진(Gene·유전자)'이 인기도서 목록에 오르는 것은 그 반영이다. 프레젠테이션 시리즈를 내고 있는 도서출판 에이콘의 김희정 편집장은 "발표나 일방적 전달보다 상대의 설득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애플 CEO인 스티브 잡스, 연설 귀재인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TED 강연을 통해 그 위력을 더한 '티핑 포인트'의 저자 맬콤 글래드웰이 모두 '전달의 힘'을 극대화한 명사들이다.

강연 시대를 연 것은 사이버 공간. 애플은 멀티미디어서비스 프로그램인 아이튠즈에 '아이튠즈U'를 따로 열어, 예일·하버드 같은 명문대 석학 강연을 무료서비스한다. 동영상 공유사이트인 유튜브도 '교육'란에서 세계 각지의 프로·아마추어 강연을 경쟁시킨다.

26일 교보문고 강남점의 인문 분야 랭킹은 상징적이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강의 '정의란 무엇인가', 일본 저술가 다코 아키라의 '심리학 콘서트', '서울대 명품 강의'가 1~3위다. 서점들도 강연회 붐이다. 교보문고 남성호 홍보팀장은 "온라인 소통이 활발해지면서 각종 강연, 대화 모임도 아주 다양하고 많아졌다. 영업점들이 행사 전담팀을 따로 둘 정도"라고 했다.

독서조차 묵독(默讀) 단계를 넘은 지 오래다. TV 책 소개에는 으레 패널 간 토론이 들어간다. 미 존스홉킨스대 부설 국제대학원인 SAIS의 일부 학과는 학위 논문 대신 발표·토론으로 자격심사를 대신한다. 국내 대학들도 신입생 선발 전형에 독서 토론을 넣는 추세다. 한국독서토론협회는 '토론 마스터, 디베이트 코칭' 과정까지 열었다.

전문가들은 근대 활자문명의 산물인 글쓰기·읽기 중심에서 다시 보고 듣고 말하는 시대로 옮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인터넷을 공격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쓴 니컬러스 카조차 "이제 스크린의 세계는 책장의 세계와는 아주 다른 곳이며 새로운 지적 윤리가 힘을 얻고 있다"고 봤다.

전병근 기자 bkjeon@chosun.com
입력 : 2011.02.28 03:06 / 수정 : 2011.02.28 09:00

[지식 지도가 바뀐다] [3·끝] 디지털 지식 시대의 그늘  

[지식 지도가 바뀐다] 쏟아지는 '지식'… 가려낼 수 있는 자 누구인가
[3·끝] 디지털 지식 시대의 그늘

'e북' 등 디지털 지식 소비 폭발… 책은 이제 짧게 즐기는 소비재
지식인 그룹의 '게이트키핑' 약화, 진리의 기준·가치 '혼동' 우려도
지난 27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의 디지털도서관 지하 3층. 재작년 5월 문을 연 정보광장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요즘은 하루 이용객이 1500명을 오간다. 도서관은 디지털 콘텐츠를 채우느라 바쁘다. 2009년 e북 4332권을 확보한 데 이어 작년에는 3만410권으로 대폭 늘렸다. 교보문고 광화문점 멀티미디어관에도 전자책에 대한 문의가 줄을 잇는다. 올 들어 1~2월 매출이 전년 대비 245% 늘었다.

지식의 디지털식 소비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출판저널은 지난 2월호에 스마트폰·태블릿 PC 사용자 100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실었다. 응답자의 82%가 모바일기기로 전자책을 읽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관망해왔던 출판사들도 e북시장에 나서고 있다. 단행본업계 1위 웅진씽크빅은 지난해 350종의 전자책을 내놨고, 올해 3월까지 150종을 더할 계획이다. 김종훈 단행본개발전략팀장은 "반응이 예상보다 좋다. 연 70억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계간 세계의 문학은 봄호 특집으로 '전자책 시대의 문학'을 다뤘다. 글을 기고한 김민영(서울대 대학원 미국문학 전공)씨는 "책의 변화에 따라 책 속에 담아오던 문학 역시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며 "미래의 소설은 더 이상 문자나 종이책의 전유물이 아니라 마치 복합기처럼 문자와 사운드 그리고 컬러와 그림이 합해져 새롭게 태어나는 스크린 속의 종합예술이 될 것"이라고 썼다. 또 다른 기고자인 심보선 시인은 "책은 미래를 계시하는 위대한 정신의 소산이 아니라 주기가 짧은 취향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긴요한 소비재로 그 기능이 바뀔 것"이라며 "전자책은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하면 했지, 멈추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이게 '폭발한 시장'인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민음사의 장은수 대표편집인은 "아직까지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하는 데 드는 비용과 수익 사이에 불균형이 존재한다. 신중하게 준비하는 단계"라고 했다. 한국 시장의 경우 e북 단말기인 킨들로 시장을 개척하는 미국의 아마존 같은 선도 기업이 없다는 것도 큰 차이로 거론된다.

인터넷 문화에 팽배한 '공짜' 심리도 장애물이다. 출판 저널 조사에 따르면 전자책 이용자 중 사서 본 사람은 17%, 무료 이용자는 83%였다. 인터파크, 알라딘도 전자책 무료 이용 비중이 50%를 넘는다. 독자들은 사서 보지 않는 이유로 '원하는 콘텐츠가 없어서'를 1위(45%)로 꼽는다. '가격이 비싸서'(14%), '무료가 많아 살 필요성을 못 느껴서'(12%)가 다음 순이다.

그러다 보니 디지털화가 콘텐츠 품질 하락을 조장하는 측면도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장은수 대표편집인은 "예전엔 책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있어서 대여에 한계가 있었는데 지금은 헐값에 무한 복제 대여가 가능해지면서 창조적 저자에 대해서는 배려가 없는 소비구조를 낳고 있다"며 "한국처럼 규모가 작은 소수 언어시장의 경우 콘텐츠 기반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디지털시대 지식의 생산·소비구조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이 지식의 대중 확산과 소통에는 분명히 기여하지만 정보가 홍수를 이루면서 진위와 미추의 기준이 흐려지거나 위협받는 시기가 되었다는 것. 오세정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은 "전문가 집단의 학술지가 중요한 것은 여전하다"며 "천안함 침몰이나 광우병 파동 때 보듯이 지식인 그룹의 게이트 키핑 역할이 약화되면서 지식에 혼동이 생긴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김우창 이대 석좌교수도 "정보의 민주화 이면에는 가치 기준에 대한 위협이 깔려 있다. 공적 진리의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사회 전체로서는 필요하다"면서 "어느 시대보다 TV나 신문 같은 대중 매체의 사회적 책임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새로운 말의 시대의 도래'에 대해서도 "고전시대 소크라테스나 공자나 예수가 글을 쓴 게 아니라 말로 진리를 설파한 것은 맞다. 하지만 말에도 가치의 우열이 있다. 모든 장터의 말을 대등하게 가치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진리와 가치의 기준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병근 기자 bkjeon@chosun.com
입력 : 2011.03.01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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