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열풍
이정호
중앙일보의 ‘종편’ 이름은 JTBC다. 중앙일보의 영문 첫 글자 ‘J’를 빼면 TBC가 된다. 80년 전두환 신군부가 강제로 없앤 삼성그룹의 TBC는 지금은 KBS에 통폐합돼 KBS 2TV가 됐다. 그 이름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치도록 남았으면 지난해 출발한 종편 이름으로 사용했을까. 그렇게 70년대까지 삼성과 중앙일보·TBC는 한 몸이었다. 60년대엔 ‘삼성’과 ‘신세계’도 한 몸이었다.
최근 80대 중반의 노학자가 내놓은 책 <인상과 편견>에는 “TBC 방송국과 신세계백화점은 모두 이병철의 사업체이다. 그는 자기의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을 자기의 텔레비전 방송국을 이용하여 널리 알리고 자기의 백화점에서 판다. 시민들은 그 광고를 보고 좋은 제품을 백화점에서 사게 되는 혜택을 받는 듯이 착각하지만, 영세한 소매상인들은 그것 때문에 파산하고 시민은 그의 자본을 자꾸만 더 축적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65년에 쓴 글을 그대로 옮겼지만 지금 세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내가 있는 울산에는 ‘현대’라는 이름의 공장에, 현대가 만든 자동차를 타고 출근하고, 자동차보험은 현대해상에 들고, 퇴근해선 현대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노동자 가운데 한 사람은 “어떤 때에는 내가 현대를 사는 건지, 현대가 나를 사는 건지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인간이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을 느낄 만큼 재벌은 우리의 삶을 온통 둘러싸고 있다.
<인상과 편견>의 저자는 불문학자 정명환(84) 전 서울대 교수다. 그는 이 책에서 낯 뜨거운 한국 지식사회의 허상과 인문·예술 등에 대한 다양한 체험과 생각들을 쏟아냈다. 그는 이 책을 내놓으면서 “늙으니 위선 부릴 것도 없고 겁도 없어져 톡 까놓고 썼다”고 했다.
우리는 인문학 열풍의 시대에 살면서도 정작 인문학의 대가인 이 노학자의 이름 석 자도 제대로 모르고 산다. 그가 김현·김승옥·김화영·정과리 같은 쟁쟁한 문학인들을 길러 낸 스승이라면 좀 알까. 그래도 잘 모를 것이다. 우리는 어디어디 신문사 인문학 강좌에 나와 씨부렁대는 사이비 인문학자들만 잔뜩 주워섬기고 있다.
상품이 돼 버린 인문학 열풍은 ‘힐링’이란 신조어를 내놓으며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지식상품을 시장에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여러 신문사들이 앞다퉈 ‘시 쓰기’ ‘소설 쓰기’마저 가르쳐 주는 강좌를 내놓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소설이 어디 돈 50만원쯤 내고 일주일에 2번씩 넉 달쯤 인문학 강의를 들으면 쓸 수 있는 건가. 그런 게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그런 강사들은 어디서들 구해 오는지.
요즘 사람들은 김현과 김승옥은 몰라도 소설 쓰기 강의를 도맡아 하는 자칭 소설가라는 사람들과 인문학 명강사들의 이름은 줄줄이 꿰차고 있다.
노학자는 “20세기 최대의 사건은 두 번의 세계대전도, 공산주의의 출현도 아니다. 안이한 유혹으로 주체적 사색의 상실을 유발하고, 문화적 가치의 총체적인 저하를 가져오고, 인간을 다스리기 쉬운 군중으로 만들어 놓은 텔레비전의 발명”이라고 말한다.(한국일보 20일자 23면)
우리가 TV에 나오는 인문학자에 열광하면서 그들이 만들어 내는 조작된 영상정보만을 과신하는 사이, 우리는 유행처럼 번졌다가 사라지는 ‘맛집 열풍’처럼 정작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조차 잃어버린 채 재벌의 아바타로 전락하고 만다.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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