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7일 수요일

[김종철의 수하한화]‘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비극

오래된 일이지만, 한국에서 오래 살아온 어떤 미국인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에 따르면, 한국과 이탈리아 사이에는 두드러진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 둘째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노래를 좋아하고, 셋째 사람들이 거짓말을 잘하고, 사기를 잘 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인이나 이탈리아인 중에는 미국에 친척이 없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것은, 그 글의 전반적 흐름으로 볼 때, 다분히 한국인에 대한 경멸적인 시선이 내포되어 있는 발언이었다. 세월호 침몰 사태를 보면서 나는 저 미국인이 아직 살아 있다면 이탈리아와 한국의 공통점에 또 한 항목을 추가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해난 사고를 당하면 선장이 가장 먼저 배와 승객을 버리고 탈출하는 나라라는 공통점 말이다.

대학생 때 내가 흥미롭게 읽은 소설 중에 조셉 콘라드가 쓴 <로드짐>이 있었다. 이상주의자인 젊은 주인공 항해사가 폭풍을 만나 배가 좌초하자 자기도 모르게 승객을 버려두고 탈출하는 ‘비열한 짓’을 저질렀고, 스스로의 이상을 저버린 이 비윤리적 행위를 속죄하기 위해서 자기 단죄의 험난한 생을 살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였다. 매우 낭만적인 이야기지만, 젊었을 적에는 상상 속에서나마 누구나 한번쯤 부딪치는 근원적인 윤리 문제를 제기한 작품이었기 때문인지 읽는 동안 상당히 몰입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 그때 마도로스 사회에서는 배와 운명을 같이하는 게 불문율이라는 것, 그것을 어기는 것은 가장 치욕적인 불명예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침몰 중인 여객선의 객실에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조용히 대기하라고 해놓고는 선장과 선원들만 재빨리 탈출했다는 이야기에 억장이 무너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제정신 가진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다. 더욱이 선장이라는 사람은 구조 직후에 물에 젖은 지폐를 말리고 있었다고 하지 않은가. 자기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승객들이 물에 잠겨 필사적인 몸부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그 순간에 어떻게 그런 행동이 가능했을까, 참으로 미스터리이다. 만일 선장이나 선원 중 (혹은 조난 현장에 처음 도착한 해경들 중에) 제정신 가진 사람이 있어서 아이들을 제때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줬더라면--이제 와서 아무 소용없는 생각이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자꾸만 안타까운 생각이 그쪽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엊그제 공개된 그 선장의 탈출 장면이라는 동영상을 보고 있자니 그가 원망스럽기보다는 말할 수 없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평소에 갖고 있던 마도로스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볼품없는 인물, 가엾은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과오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적어도 그를 무한정 질책한다는 게 옳은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모습을 보면, 6000t이 넘는 대형 선박의 선장이 맞기는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내 편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초라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모습과 거동은 그가 자신의 직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자부심이나 긍지를 가지고 임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추측건대,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 자신의 인간적인 자질 탓이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선장으로서의 긍지를 느낄 수 없는 근무 조건 속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그는 임시직 선장인데다가 봉급이라는 것도 대형 선박의 선장에 도저히 어울린다고 볼 수 없는 박봉이다. 선장만 이런 게 아니라 세월호의 항해사, 기관사 대부분이 비정규직 선원이었다는 사실도 참으로 놀랍다. 온갖 탈법·불법을 저지르며 승객의 목숨 따위는 아랑곳도 하지 않았던 선박회사의 소유주와 경영자는 이런 식으로 배를 운영해서 긁어모은 돈으로 대체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그리고 정부는 날이면 날마다 자행되고 있는 이 불법적 행위들에 왜 눈을 감고 있었을까.

아마도 이번 사태의 배후가 조금씩 밝혀지면서 거기에 갖가지 비리와 부조리와 몰상식이 뿌리 깊게 얽혀 있는 것을 알게 된 시민들은 이게 꼭 해운업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비행기도, 기차도, 버스도 안심하고 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기차를 자주 이용하는 나는 KTX를 타고 갈 때마다 이 초고속 열차에 기관사가 단 1명뿐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늘 모골이 송연해진다. 만일 그 기관사가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나 중풍으로 쓰러진다면?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 모두는 국가의 체계적인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기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부한 얘기지만, 이 모든 부조리한 상황은 결국 돈에 대한 어리석은 탐욕 때문이다. 온 사회가 이처럼 돈에 환장해서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는 것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끊임없이 강조해온 국가 시책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이번 참사가 “암 덩어리 규제”를 운위한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지 얼마 안돼 발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최고 권력자가 강경한 어조로 규제철폐를 역설하는 판에 기업의 탈법적 행위를 제대로 감시·감독하겠다는 생각이 들 공무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할 것도 없지만, 아무리 돈이 중요해도 사람의 생명·삶보다도 먼저일 수는 없다. 설혹 규제 완화로 경제가 성장한다 하더라도, 오늘날 경제성장은 고용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바도 없고, 갈수록 빈부격차를 벌려놓고 극심한 환경파괴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은 이미 세계의 상식이 되었다. 필요한 것은 성장이 아니라 정의로운 분배이다.

생각해보면, 지금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로운 정치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정치란 무엇보다 상식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번 여객선 침몰로 인한 대참사는 한마디로 상식을 무시해온 질 낮은 정치, 그리고 그것과 결합된 국가적 재난 대응 능력의 결여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관리 능력이라면, 조만간 핵발전소에서 큰 사고가 터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4302105325&code=990100&s_code=ao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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