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7일 수요일

국가의 정명과 정도를 찾자

[박명림 교수 현장 기고] 통곡의 바다, 절망의 대한민국 ②
대통령은 하야를 각오할 정도의 ‘책임 윤리’를 보여야 한다

인간의 어떤 말도 비극적 죽음을 위로할 수 없다. 삶과 죽음의 갑작스런 강제분리는 얼마나 큰 고통인가? 팽목항 상황판에서 기록해온 이름들을 안산 합동분향소의 위패에서 하나하나 확인하며 절절히 깨닫는다.
특히 분향대 중앙에 다다른 순간 ‘흡’ 하는 신음과 함께 호흡이 멎고 말았다. 시신 발견 직후 팽목의 아빠가 안산의 엄마와 할머니에게 불러주었던 ○○ 학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온몸이 얼어붙었다. 저 해맑은 눈이 죽었다는 게 지금 현실인가?
삶과 죽음을 강제로 갈라놓은 집단참사가 건국 이래 너무도 많았지만 이런 꽃다운 영혼들은 아니었다. 주기적인 전국민적 상복 착용과 문상 행렬은 언제 끝나려나? 우린 마음의 상복을 너무 자주 입어오지 않았는가? 슬픔과 비극의 크기는 참회와 변화의 크기로 이어져야 한다.
소조기가 끝나도 시신을 못 찾자 한 엄마는 “아이를 못 찾으면 난 여기서 우리 애와 함께 죽을 것”이라고 통곡한다. 다른 엄마의 절규는 내가 팽목에서 가장 깊게 심장을 베인 말이다. “○○를 못 찾으면 나를 팽목에 묻어줘요. ○○가 누워 있는 이곳에서 내 넋이라도 애를 보며 지내게.”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절대감정을 결코 담지 못한다. 나는 그 엄마의 슬픔을 표현할 능력이 없다. 인간에게 부모란 대체 누구이며 자식은 또 무엇인가? 아! 신은 지금 이 엄마의 절규를 듣고 계시리라.
삶에서 자연재난은 때론 불가항력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재난이 인간적 요인에 의해 재앙으로 바뀔 때다. 세월호 참사는 재난 단계에서 충분히 수습 가능했으나 끝내 재앙으로 변전되었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점은 바로 인간요인에 의한 재앙이다. 죽음에 값하는 보상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요인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통해 최소한의 속죄라도 해야 하는 이유는, 재앙의 공동죄인들로서 재발 방지의 엄숙한 소임 때문이다. 생명피해의 규모에서 금번 사건은 4·19 혁명 및 5·18 민주화운동보다 크다. 이 아픔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비극을 잊는다면 재앙은 자녀들 시대에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인간에 의한 재앙
정부의 ‘총력구조’ 반복 약속에도
가족들이 보기엔 지켜진게 없었다
다시 묻는다, 이게 진정 나라인가?

이번엔 제대로 아파야 한다
적당주의 만연한 한국사회서
‘개혁하는 척’ 관습과 결별 않으면
국민안전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가장 시급한 일은 희생자 가족들의 치유다. 유족에 대한 개별 위로와 치유는 정녕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크게 부족하다. 치유는 본래 삶의 전체적인 온전함의 회복을 뜻한다. 따라서 완벽한 진상 규명과 철저한 책임자 처벌, 국가의 확실한 보상과 지원, 젊은 영혼들의 희생을 바르게 기릴 추모시설 건립,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는 세상을 만들 확고한 대안 마련이 꼭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궁극적인 치유는 불가능하다.
우선 공동의 기억체계와 사회체계를 구축하자. 단발성 반성을 넘기 위해 침몰일인 4월16일을 국가지정 ‘국민안전일’로 만들어, 모든 안전사건들을 함께 기억하고 위로하자. 동시에 국가와 국민 모두 매년 안전의 규칙·제도·예산·의식을 철저히 점검하는 계기로 삼자.
또 ‘국민안전관’을 건립하여 건국 이래의 지상·해상·공중에서의 수많은 안전사고로 인해, 국가와 사회가 지켜주지 못했던 희생자들의 명편들을 안치하고 관련 자료를 공개하며, 주요 참사일에 기억행사를 가져 국가 반성과 국민 각성을 위한 확고한 마음 판으로 새기자.
끝없는 사건·사태·재난·재앙의 통계와 기록은 한국에서의 안전한 삶은, 제도와 체제보다 요행과 기적 때문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무서운 현실이다. 따라서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나도 언제든 희생자가 될 수 있다. 19세기 초 프랑스 철학자 메스트르는, “모든 나라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 (특히) 민주주의에서 국민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고 언명한다. 정부와 지도자의 수준은 다시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명심해야 할 점이다.
구조활동에 가장 좋다는 소조기 끝 날 저녁이 되도록 성과가 적자 시신 망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 내 아이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신 수습이라는 마지막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려 하자 미만한 슬픔은 침몰 직후보다 더 애절했다. 분노한 엄마 아빠들은 팽목항 가족대책본부에 해양수산부 장관과 해양경찰청장 및 차장을 앉혀놓은 채 “대통령이 가족들 전화는 언제든 받는다고 했으니 연결해 달라” “살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죽은 자식 꺼내 달라는 것도 못 해주냐” “애 몸 망가지기 전에 꺼내 달라. 제발 한번만 안아보게”라며 울부짖었다.
며칠 전처럼 다시 대통령 호출이었다. 사건 현장에서조차 대통령을 계속 찾는 이 불행한 상황은, 국민 생명은 계속 죽어가는데 누구도 책임을 다하지 않는 국가기강 붕괴의 총체적 귀결이었다. 한 아빠의 외침이 정답이었다. “대통령이라도 오라고 외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나랍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대통령이 다녀가도 생명구조·기강확립·문제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왔다 가도 똑같아요.” 옆 아빠의 끝없는 절망은 이 사태의 모든 것을 압축하고 있었다.
‘즉시’ ‘신속’ ‘최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총력구조’의 반복 약속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초기 구조작업의 완전 실패로 인해 정부 불신은 하늘을 찔렀다. 가족들이 보기에 매 단계 매 상황마다 정부의 약속은 하나도 지켜진 게 없었다. 게다가 위기 현장은 아직 100명 이상 바다 밑에 갇혀 있는 절박한 상황임에도 청와대 안보책임자는 청와대가 재난관리의 사령탑이 아니라고 발언하는 부도덕과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위와 아래 모두 능력과 책임의 붕괴는 상상 이상이었다. 또 묻는다. 이게 진정 나라인가?
이번에는 제대로 아파야 한다. 한국 사회는 만연한 적당주의와 ‘척 문화’와의 단호한 단절을 요구한다. 개혁하는 척하는 기존 관습과 완전 결별하지 않으면 국민안전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특히 경제 때문에 국면을 전환하자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 대증요법의 반복은 한국 사회와 경제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고 인간안전과 국가근본을 갉아먹은 주범이기 때문이다. 근본적 개혁을 해야만 한국적 삶과 사회는 건강하게 살아날 수 있다.
대통령은 책임윤리 의식 보여라
호통자에서 국정당사자로 내려와
무능·무책임 국가조직 개편하고
법적 정치적 책임 물어야한다

국민이 사적문제에 빠져 있다면
삶은 점점 더 남의 지배를 받는다
공적 시민이 돼 똑바로 보고 말하며
병든 제도와 관행 전부 뜯어고치자

우선, 대통령은 하야를 각오할 정도의 책임윤리를 보일 필요가 있다. 국가 호통자에서 국정 당사자로 속히 내려와야 한다. 너무 많은 말바꾸기·약속파기·책임회피는 국가기강의 빠른 붕괴로 연결되었는바 기강 회복을 위해 서릿발처럼 솔선해야 한다. 국가의 전 영역에 걸쳐 박근혜 정부에서 내려보낸 낙하산과 전관예우는 전원 교체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낙하산·전관예우의 근절 의지를 믿는다. 극도의 무능과 무책임을 노정한 청와대·내각·해경을 포함한 국가 주요 기간 조직은 전면 개편되고 엄히 법적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민관결탁의 고질적 부패 고리도 완전히 도려내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국가혁신은 뿌리를 혁파해야 가능하다. 첫째, 이념주의와의 분명한 결별이다. 한국에서 반공이념은 종교에 가깝다. 국가의 최고 생존요소인 안보는 결코 약화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반공주의는 안보 영역에 한정해야 한다. 좌경·용공·친북 사건으로 탄압받은 독재 시대 주요 민주화운동들은 오늘날 무죄 또는 조작사건으로 판결되고 있다. 똑같이, 오늘의 인권 강화, 복지 증진, 평등과 공공성 제고, 경제 민주화와 규제 강화, 관료·교육·언론·검찰 개혁…모든 실질적 개혁 요구를 친북·용공·좌빨·종북이라고 공격하는 한 국가개혁과 선진국(善進國)은 불가능하다. 즉 반공주의와 개혁담론의 분리만큼 한국은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이다.
둘째, 성장만능주의, 기업제일주의의 종식이다. 충격적이게도 한국은 지금 10대 재벌의 매출액과 자산규모가 모두 국가 전체 총생산(GDP)을 넘는 완전 재벌국가다. 기업소득률, 기업저축률, 사내유보금 비율도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면 빈부격차, 노동시간, 비정규직, 노조조직률, 노동분배율, 학력별 임금격차, 남녀 임금격차, 자영업 비중과 폐업 주기, 대학등록금…모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악 수준이다. 즉 한국에서 개별 삶의 안정성과 안전성이 최악 수준인 이유는 개인요인이 결코 아니라 사회구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계속 성장제일, 기업친화를 외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저출산·산업재해·교통사고 역시 한국민들이 특별히 자살이나 출산 거부의 본성을 타고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사회체제의 산물이다. 오이시디 선진국들은 대부분 “지금의 한국보다 훨씬 못살 때부터” 평등성, 공적 지출, 노조조직률, 복지비용이 훨씬 높은데도 불구하고 계속 발전하여 선진·안전·자유·복지·평등 국가를 건설했다. 즉 발전 속도와 수준이 아니라 방향과 경로가 문제다. 노동·평등·복지·공공성의 강화가 안전사회·지속발전·복지체제·인간국가로의 첩경이라는 점이다.
셋째, 금번 사고처럼 일상의 삶은 이제 국가보다 법인과 훨씬 더 많이 만난다. 따라서 인간 안전은 나날의 삶에서 만나는 법인 및 조직과의 관계 문제다. 이제 법인과 개인의 관계를 인간 중심으로 변혁해야 한다. 돈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조차 원래 뜻은 인간을 말한다. 우리가 늘 대면하는 기업·학교·조직·관료·경찰·병원·은행은 개인보다 훨씬 강하다. 따라서 국가가 법치를 통해 ‘법인규제-개인보호’를 강화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설정해야 한다.
넷째, 무너진 법치의 회복이다. 그러나 정설인 ‘법 앞의 평등’은 답이 아니다. 그것은 본시 ‘법 안의 평등’을 뜻하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도 이것이다. 법 앞의 평등은 ‘법 이전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유지하고, ‘법 안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강화하며, ‘법 이후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영구화한다. 즉 법 앞의 평등은 허구다. ‘법 안의 평등’이 바로 법치다. 법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로 구성되는 국가=정치=문명 상태의 통치규범과 제도를 의미한다. 즉 ‘법치’란 ‘법 안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기 때문에 추구되어온 것이다. 폭력=전쟁=자연 상태에서 법은 침묵하며, 인간은 결코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빠들은 “세금 꼬박꼬박 내고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냐” “착하게 살아온 나한테 대한민국은 왜 이러냐”며 분노했다. 그들은 그런 국가를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 말이 문제의 한 본질이었다. 즉 국민으로서 세금 낸 만큼 요구·감시·비판했으면 국민을 이렇게 헌신짝 취급 하지는 못했다. 국민이 국가에 회초리를 들지 않으면 국가가 국민에게 회초리를 든다. 아니 국가는 종종 회초리를 넘어 몽둥이를 들며, 때로는 금번처럼 아예 죽음을 선사한다.
국민·시민으로서 세금을 낸 뒤 사인·개인으로 돌아가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해온 우리들의 익숙한 관행이 문제였다. 이유는 공공과 사사의 분리 때문이다. 동서양 모두 사적, 사사라는 말은 원래 ‘박탈’을 뜻한다. 즉 공적 영역, 국가의 일에 참여할 자격을 박탈한다는 말이다. 노예·여성·아동·야만인·장애인에게는 먹고사는 데 집중하게 하는 대신 국가의 일에 참여할 공적 자격을 주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과 서민들은 오직 먹고사는 데만 매달리게 하는/매달려야 하는 지금 시대도 그러하다.
사적 영역은 먹고사는 문제, 즉 가정관리=경제를 말한다. 그러나 내가 사적 문제에 빠져 있다면 공적 일은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여 내 삶을 좌우하게 된다. 공적 문제를 멀리할수록 나의 경제=사적 영역=가정=삶은 점점 더 남의 지배를 받게 된다. 따라서 모두에게 공적 문제에 참여할 자격·조건·능력을 주는 것이 바로 문명화·시민화·인간화인 것이다. 문명화는 곧 모든 개인의 자유화·평등화·공공화다. 자유·안전·복지·평등을 이룬 선진국들은 모두 참여(투표율)와 조직화(노조조직률)가 높은 나라들이다.
공화국의 출발 원리처럼 인간들은 국가 안에서 똑같이 자유로우면 안전하고 행복하다. 즉 전체 차원의 평등한 자유야말로 개인안전과 국가안정의 보장 장치다. 공공과 사사는 하나다. 가장 좋은 정치는 민중의 자기지배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간 각자의 자유와 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정치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체제(isonomia)다. 결국 자유는 평등이며, 평등은 자유다. 인간은 자유롭지 않으면 평등할 수 없고, 평등하지 않으면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은 불의와 혼란의 시대다. 극도의 부정과 혼돈에서 르네상스라는 전혀 새로운 정신혁명과 제도혁신이 나왔듯 이제 한국적 사유혁명과 제도창신을 시작하자. 그리하여 국가의 정명(正名)과 정도(正道)를 찾자. 사려하는 공적 시민이 되어 똑바로 보고 똑바로 말하자. 똑바로 참여하고 똑바로 연대하자. 그렇지 않다면 똑바른 삶도 똑바른 나라도 가질 수 없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인간들은 좋은 체제를 경험하지 않으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지 모른다. 자유롭고 평등한 복지국가=삶의 안정국가가 얼마나 좋은지 함께 꿈꾸자. 2천년 전의 지혜를 떠올려본다. “어느 누구도 새로운 법과 제도로 공화국을 개혁했던 사람들만큼 그렇게 높이 찬양받을 사람은 없다. 그들은 신들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찬양을 받았다.” 오늘의 패악을 참회하고, 반드시 좋은 나라를 물려주어 훗날 신 다음으로 칭송을 받자.
낡고 병든 제도와 관행을 전부 뜯어고쳐 자유와 평등을 멋있게 제도화하자. 그리하여 사랑과 정의가 넘실대는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자. 그 소명에의 응답은,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무릎 꿇고 써야 할 참회록’인 동시에 ‘신 다음으로 칭송받을 국가창신’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type=0&cline=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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