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3일 금요일

[특별기고] 비협력, 불복종을 위하여 / 김종철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우리들 대다수는 이 땅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가만히 있어라”라는 말이다. 철저한 비협력, 불복종운동만이 민주적 권력의 탄생과 진정한 정치의 쇄신을 가져올 수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날 때마다 필름을 되감듯이 되돌아가서 침몰 당시의 상황에서만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하는 부질없는 망상에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지는 것은, “가만히 있어라”라고 해놓고는 승객과 배를 버리고 떠난 선장과 선원들의 불가해한 행동이다.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럿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여러 가지 가설을 들어도, 참으로 미스터리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말할 수 없이 우울해진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것처럼 혹시 말 못할 ‘비밀’이라도 있었다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사건 이후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온갖 비리와 부조리, 모순들이 하나둘씩 드러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배가 침몰한 것도, 그 선장과 선원들이 저렇게 행동한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는 이 나라를 지배하고 움직이는 정치와 관료 사회가 부패와 무능으로 찌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토록 심할 줄은 정말 몰랐다. 대체 이 나라에서는 공직자 열명 중 단 한명이라도 제정신을 가지고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대통령의 입에서 ‘국가개조’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국가개조’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지금 대통령이 해서는 절대로 안 될 말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 공직사회의 모든 비리와 부조리의 책임이 궁극적으로 대통령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통령 중심제 국가라고 하지만, 왕조시대의 제왕보다 더 심한 독선적인 통치방식으로 일관해 오다가 이제 와서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적폐’를 운위하고 ‘국가개조’를 말한다는 것은 삼류 코미디보다 못한 언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개조’라는 말 자체도, 우리 역사를 조금이라도 성찰적으로 돌아보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쓸 수 없는 무서운 말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금방 연상시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춘원의 ‘민족개조론’은 물론 그의 친일행각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민족개조’를 운위하지만 않았다면, 춘원의 역사적 과오를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더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춘원은 마치 심판자처럼 ‘노예적 민족성’ 운운함으로써 일제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것은 물론, 홀로 ‘현자’인 척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위선 혹은 자기기만은, 내가 보기에, 춘원의 문학 전체를 관류하는 근본적인 상투성과 깊게 연결돼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개조론’은 춘원 한 사람에게 그치는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한국 현대사의 한 흐름을 형성해왔고, 그 흐름을 주도해온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민중의 자립·자치 능력을 늘 부정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생리적인 반감을 갖고 강권적·권위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해온 ‘친일파’ 혹은 그 계승 세력이었다. 한때 이 나라를 온통 시끄럽게 했던 박정희의 ‘국가개조론’도 그 흐름 가운데서 나온 것이었음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보면, 지금 대통령의 ‘국가개조론’은 다급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튀어나온 말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국가개조론’의 역사적 뿌리와 흐름을 회고해 보면, 며칠 전 대통령이 ‘해경’을 해체하겠다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다음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고 곧 해외로 나가버린,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지도자답지 않은 행동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또 대통령의 해외여행이 하필이면 아랍에미리트의 원자로 설비 착공식에 참석할 목적이었다는 사실도 매우 시사적이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지금 많은 시민들이 굉장히 걱정하는 게 있다. 즉, 우리나라 원전은 과연 안전한가 하는 것이다.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세월호 참사 상황에서 이 정부의 자질과 실력을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국가운영과 높은 기술력을 가진 나라로 알려진 독일조차도 후쿠시마 사고 이후 즉각 원전의 단계적 폐쇄를 결정했다. 그런데 모든 게 엉망진창임이 여실히 드러난 이 나라에서 정말 원전은 괜찮을까? 더욱이 정부는 설계수명이 이미 끝난 원전마저 계속해서 가동하도록 허가하고 있지 않은가? 노후 기계, 노후 시설의 안전성은 결코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세월호 침몰에서 명확히 증명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의 원전 내부는 비리와 부정이 끊임없이 계속돼온 복마전 중의 복마전이라는 증거가 허다히 드러나지 않았는가?
비행기를 타고 아랍에미리트로 떠났을 때,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와 원전 문제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생각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수많은 시민들이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과 절망감 속에 잠겨 있는 이 상황에서 하필이면 원전 장사를 위해서 태연히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무관심 혹은 무사려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말하다가 보면, 문득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이렇게 최고 권력자의 일거수일투족에 목매달고 살아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국민의 의견을 들어달라고 간청하고, 애걸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사람이란 누구든 성인이 되면 자기의 사고와 행동 습관을 바꾸기 쉽지 않다. 그리고 지위가 높을수록 인간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이거나 혹은 적어도 자신의 허약함을 노출시키는 것으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아무리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최고 권력자에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 달라고 계속해서 청원을 하고, 부탁을 하고, 이런저런 말들을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권력과 민중의 관계를 오랫동안 천착해온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에 의하면, 권력은 원래 자기보다 더 큰 힘에 의해서 도전을 받지 않는 한, 꿈쩍도 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민중에게 권력이 양보를 하는 것은, 양보하지 않고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뿐이다. 예를 들어,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도 어느 정도 시민들의 민주적 권리가 확보될 수 있었던 것은 위정자들에 의한 시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1930년대의 치열한 노동운동과 60년대의 민권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 그리고 복지국가를 위한 국민적 투쟁을 통해서였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우리는 이 나라가 자식들을 낳아 기르고 살아가기에 얼마나 부적합한 나라인지 그 맨얼굴을 보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들 대다수는 어쩔 수 없이 이 땅에서 계속 뿌리를 박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가만히 있어라”라는 말이다. 우리는 충직한 ‘신민’이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새정치’를 한다면서도 마냥 비틀거리며 아무런 기백도 용기도 보여주지 않는 야당 정치가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좋은 나라를 만들어줄 리도 만무하다.
이미 거리에서는 시위대에 대한 체포와 연행이라는 상투적인 수법이 또다시 전개되기 시작했다. 당국은, 자신들이 헌법을 위반하면서도, 시민들더러 법과 질서를 지키라고 말한다. 주말의 질서정연한 데모와 집회만으로는, 권력은 아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철저한 비협력, 불복종운동만이 민주적 권력의 탄생과 진정한 정치의 쇄신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운동을 시작할 것인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85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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