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7일 수요일

[특별기고] 나를 지울 권리, 나를 지킬 자유 / 김병익

새 물건들에 호기심 많은 작가 김중혁의 새 장편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의 주인공은 ‘딜리터’란 처음 듣는 사설탐정이다. 전직 형사인 구동치가 하는 일이란 갖가지 문서와 기록, 글과 사진에서 의뢰자의 흔적을 지워주는 것이다. 가령 한 소설가는 작품이란 지우고 또 지워 마지막 남은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뒷날 연구자들로부터 자기가 원치 않는 기록들을 놓고 왈가왈부 당하는 게 싫다며 사후 자신의 원고, 일기, 편지, 이메일 들의 삭제를 청탁한다. 지우기를 부탁하는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기록으로 뒷날 다른 사람들에게 입힐 피해나 당할 비난을 피하고 싶은 이들이다. 소설은 이 ‘삭제’의 문화적, 심리적 천착에서 스릴러로 휘어지지만, ‘딜리팅’의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디지털 시대의 맹점을 꼬집는 기지가 흥미롭다.
이 ‘지우기’의 의미를 강하게 인식하고 그 권리를 요구하는 책이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 빅토어 마이어쇤베르거의 <잊혀질 권리>가 그것인데, 원제가 ‘딜리트’인 이 저서는 현대 사회가 ‘망각의 중요성’을 잊고 기억만 엄청나게 쌓아둠으로써 추상화의 능력을 잃고 사유의 깊이와 집요함이 닳아버려 생각이 평면화해버리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정보의 삭제’ 권리를 강조한다. 재독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도 그 비슷한 관점으로 오늘의 사회가 속이 빈 <투명사회>여서 “매끈하게 다듬고 평준화하는 작용을 하며 결국 획일화를 초래하고 이질성을 제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화란 축적하고 기억하며 추모하고 거기서 사유와 인식을 새로이 깨닫고 더 보태가는 것이라고 상식적인 생각만 해온 나에게 디지털 문명의 편의와 그럼으로써 야기되는 ‘정보피로증후군’이란 역설은 그것들을 사용하면서도 거부하기를 요구당하는 착잡한 혼란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앞 세기 말쯤부터 일기 시작한 디지털 기기의 비약적 발전에 나 스스로도 경악하면서 그 테크닉과 활용을 배우는 데 게으르다기보다 오히려 사양하며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로서의 자부심까지 느껴온 것은 사실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도 글쓰기, 검색, 통화, 메일 등 최소한의 활용으로 자제하면서도 현실의 역사에 ‘사이버의 문명’을 도입하는 새로운 계기로서 그 거대한 의미를 ‘인류사적 획기’로 평가하기도 했다. 미국의 저자들은 더러 이 디지털 문명에 대한 회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전공학에 이어 스마트 세계로의 진입을 대체로, 그것도 높이 환영하고 있는 듯하다. 신이란 인간 문명의 진화가 종착하는 자리가 아닐까 하며 과학기술의 극적인 발전에 공감하는 케빈 켈리의 <기술의 충격>이나 디지털 기기로 가능해진 1조 시간의 여유로 새로운 무엇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클레이 셔키의 <많아지면 달라진다>에서 대표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과학의 무한한 발전으로 일구어질 인간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는 편이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이와 다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인터넷이 확산시키는 인간의 획일화, 긴 글을 참아내지 못하고 “누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같은 긴 서사를 읽을 수 있겠는가”란 회의를 자아내는 조급성에 대해 걱정한다. 그러면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고전적 ‘지혜’에서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외치는 베이컨의 근대적 ‘지식’을 거쳐 이제 “나는 클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현대의 ‘정보’ 접속으로, 인류의 앎의 체계가 기억의 외재화로 변해온 역사에 비판적인 태도를 감추지 않는다. 서구의 이런 사정에는 한 사람이 많은 수감자를 감시할 수 있도록 감옥을 설계한 제러미 벤담의 ‘판옵티콘’과 그것을 현대 사회의 권력 구조로 인식한 푸코의 사상, 그리고 스탈린을 흘겨보며 ‘빅 브러더’가 통제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경고한 조지 오웰과, 실제로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소비에트의 수용소군도, 가족과 이웃이 서로 밀고한 서류들이 통일 후 공개된 동독의 슈타지 등을 경험한 서구인들은 디지털 문명의 이처럼 철저한 감시 체제에 공포감을 느끼면서 인간의 정보화에 크게 두려움을 타는 듯하다. 미리 범죄 가능성을 탐지하여 예방하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보이고 있는 시민의 총체적 염탐 체제를 그들은 만만히 환영하지 않는 것이다.
하긴 둘러보면, 우리의 생활도 갖가지 ‘디지털 발자국’을 만들어 남기고 있다. 인터넷을 보든, 그걸 통해 메일을 주고받든, 혹은 책을 사거나 영화를 보거나 식대로 카드를 긁든, 아니 버스를 타거나 한가한 걸음으로 산책할 때도 그 거동과 행위들이 탐지, 기록된다. 그 정보들을 모아 정리하는 새로운 지적 작업이 ‘빅 데이터’일 터인데, 이 거대 자료들의 집산은 오늘날 <1984년>의 정치적 통제권에도 사용되지만 “신을 잃은 대신 찾아낸 돈”의 자본주의 시장 정보로 더 크게 활용되고 있다. 내가 도대체 들어가본 적 없는 숱한 각종 닷컴으로부터 별의별 홍보와 프로그램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정보의 염탐 시선들에 노출되어 있는지 짐작된다. 나도 모르는 내 신상과 사소한 짓들이 데이터의 비트로 팔리고 낙서 글들이 남아 뒷담화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예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독일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이제 세계적인 미디어 학자로 활동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은 80대의 나이에도 내가 놀랄 지경으로 뉴미디어에 대단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데, 제자뻘인 데이비드 라이언과의 대담집으로 나온 <친애하는 빅 브라더>에서 그는 감시가 권력자만이 아니라 그렇게 통제당하는 바로 시민들로부터도 생산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깊은 논의에는 벤담의 판옵티콘이란 19세기적 감시 체제의 새로운 변형으로, 못마땅한 사람을 제거하려는, 그래서 우리로 치자면 ‘신상털기’나 ‘악플’에 해당될 ‘밴(ban)옵티콘’과 다중의 시민이 소수의 유명인을 감시하는 ‘신(syn)옵티콘’ 현상을 소개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며 감시의 대상으로 자원하는 갖가지 수단과 장치들에 대한 우려도 논하고 있다. 트위터, 카카오톡, 유튜브, 페이스북 같은 에스엔에스(SNS)가 그런 예들인데, <투명사회>의 한병철도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판옵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을 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보통시민들과 적대국의 동태만이 아니라 동맹국 통치자들의 대화까지 감청하며 세계의 모든 정보들을 수집해온 사실을 폭로하며 그 자료들을 갖고 망명한 엔에스에이 요원 스노든의 행위는 ‘빅 브러더’에 저항한 윈스턴보다 더욱 대담한 내부 고발이며 감시사회에 대한 보다 충격적인 항거로 보인다. 21세기의 디지털 세상이 우리를 얼마나 철저하게 염탐하며 통제하는가를 깨닫게 하며 문명의 발전이 반드시 인간에게 밝은 ‘안녕’을 주는 것만은 아님을 그는 인식시켜주는 것이다. 루크 하딩의 <스노든의 위험한 폭로>에서 그의 말로 인용되는 “나는 내가 말하는 모든 것, 모든 일, 내가 말하는 모든 상태, 창작이나 사랑 또는 우정의 모든 표현들이 기록되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는 선언은 밀의 <자유론> 이후 자유의 권리를 향한 가장 감명 깊은 외침으로 들려온다. 스노든의 국가안보국 불법 행위에 대한 폭로 보도 기사로 <워싱턴 포스트>와 <가디언>이 오웰의 <1984년>에서 30년 후인 2014년의 퓰리처상을 받은 것은 ‘디지털 빅 브러더’에 대한 불안감이 미국에서도 그처럼 심각해진 때문이리라.
*죄 없이 죽음을 당함으로써 세상의 숱한 죄들을 증거한 앳된 영혼들에게, 깊이 머리 숙이며 남은 말들을 지웁니다.--김병익

츨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53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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