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1일 토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2) 진흥왕순수비



ㆍ스스로를 ‘짐’이라 칭한 무쇠 같은 자신감 철철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202104045&code=960202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여러 면에서 후진적인 것으로 평가받아왔다. 지리적 요인 때문에 중국 선진문물을 직접 받아들이는 데 뒤처졌다. 글씨도 한예(漢隸)와 북위서(北魏書)를 직접 소화해낸 고구려나 남조의 글씨를 세련되게 재해석한 백제에 비하면 뒤떨어진다는 게 중론이다. 불교도 가장 늦게 공인되었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년), 백제는 384년(침류왕 원년)인 데 비해 신라는 150여년 늦은 528년(법흥왕 15년)에 이차돈의 순교로 공식화되었다.

그렇다면 후발주자로서 문화적·정치적 약체인 신라가 삼국을 통일시킨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우선 대중국 외교력을 꼽을 수 있다. 신라는 6세기 말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래 120년간 지속되었던 나제동맹을 결렬시키고 나당연합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평양 이남의 땅은 신라가 차지한다’는 밀약을 깨고 안동·웅진·계림도독부를 두어 한반도를 집어삼킬 마각을 드러내자 나당전쟁의 승리로 당 군대까지 축출하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삼국통일에 대해 “다른 종족을 끌어들여 같은 종족을 멸망시키는 것은 도적을 불러들여 형제를 죽이는 것과 같다”(신채호)는 비판도 있다. 

‘황초령 진흥왕순수비’(568년, 북한국보 110호) 탁본 부분. 국립중앙도서관 위창문고 소장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외세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신라의 내재적인 힘의 실체다. 멀찌감치 삼국통일 10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진흥왕순수비’에는 ‘짐(朕)’이라는 글자가 여러 차례 나온다. ‘황초령비’ 2행에는 ‘자신을 수양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고(莫不修己 以安百姓) 짐도 마땅히 몸소 실천하여 태조의 기업을 우러러 잇고(然朕歷數當躬 仰紹太祖之基)’라는 구절이 보인다. 여기서 짐은 천자(天子)임을 스스로 칭하는 말이다. 이는 천하를 처음 통일한 진시황제 이래 사용되었던 용어다. 이러한 짐을 진흥왕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왕을 다스리는 제왕으로 자신을 간주했다는 것이다. 하기야 ‘순수(巡狩)’라는 말 자체가 제후의 나라를 천자가 두루 다니며 시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5세기 전후 중원과 한반도에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든다. 신라에서 가장 뛰어난 정복군주로서 ‘태창(太昌)’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며 낙동강·한강 유역은 물론 함경도까지 영토를 넓힌 진흥태왕의 위상을 백번 인정하더라도 현실은 여전히 신라왕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짐이라 자칭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눈을 바깥으로 돌리면 쉽게 풀린다. 당시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남조와 북조의 여러 군주들 이상의 위치를 짐으로 언표한 것이다. 요컨대 신라는 이때부터 삼국통일은 물론 그 이상을 꿈꾸고 실천했던 셈이다.

역시 같은 비문 3행을 보자. ‘몸을 삼가고 스스로 조심해서 하늘의 도리를 어길까 두려워하고(競身自愼 恐違乾道) 또 하늘의 은혜를 입어 국운을 크게 열었다(又蒙天恩 開示運記)’는 대목은 앞에서 본 ‘자신을 수양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고(莫不修己 以安百姓)’와 짝하면서 이미 유가의 천명(天命)사상에 입각한 왕도정치가 이 땅에 실현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 결과 4행에 나오는 것처럼 ‘사방에서 국경을 의탁하고 백성과 국토를 널리 얻고(四方託境 廣獲民土) 이웃 나라는 믿음을 서약하고 사신이 서로 교통하여(隣國誓信 和使交通) 조정에서는 스스로 헤아려 신민과 구민이 두루 살아가는(府自惟付 撫育新古黎庶)’ 세상을 이미 이룬 것이다. 

전승기념비인 순수비에 정복 집단의 신통력과 위업을 자랑하고 피정복민을 편안하게 해주겠다고 회유하는 고대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역할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말 그대로 태평성세의 지상천국이 실현된 것으로, ‘화엄불국’이 따로 없다. 이러한 6·7세기의 시대 미감을 가장 잘 담아낸 유물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또 진흥왕 14년(553)에 시작되어 30여년 만에 완성된 황룡사의 창건이다. 이러한 불사는 온 세상을 통치하는 자신감을 신라 중심의 세계관으로 형상화해낸 것이자 이 시기의 영토 확장을 정신적·문화적으로 뒷받침한 것이다. 
그렇다면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 진흥왕순수비의 글씨 미감이나 서체는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나. 지금까지는 미학적 완성도에서 통일신라나 당나라 해서와 비교해 떨어진다며 순수비의 독자적인 아름다움이 평가절하돼왔다. 진흥왕순수비 서체를 6세기 초반의 냉수리비나 봉평비와 비교해보면 필획이나 글자 짜임새 자체가 판이하다. 方·託·境·廣·獲·民·國·誓·信·和·使·交·通 등의 글자에서 보듯 전자가 해서에 가깝다면 후자는 여전히 고예 기미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굳이 비교하면 비정형적·역동적 구조를 가진 남북조시대 해서의 미감을 가졌다고 할 수 있지만 무쇠와 같은 필획의 힘이나 고박한 맛은 비길 바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글씨를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앞서 본 대로 내용적으로는 ‘짐(朕)’ ‘순수(巡狩)’ ‘건도(乾道)’ ‘천은(天恩)’ 따위가 말해주듯 이미 중국에 꿇리지 않는 신라 중심의 세계관이 충일하다. 순수비 문장은 물론 글씨까지도 진흥왕의 어제(御製) 어필(御筆)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중국의 북위서를 중심에 두고 순수비 글씨의 서체나 미학적 특질을 부차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된다. 신라 중심의 천하관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당연히 이 글씨는 ‘진흥태왕체’나 ‘통일바탕체’ 정도로는 불러야 하지 않을까. 예술은 사회물정과 인간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한다. 실용과 순수가 한몸인 글씨는 더하다. 이런 맥락에서 순수비의 글씨 조형은 통일신라를 가능케 한 힘이 어디에서 나왔고, 또 무엇인지를 미학적으로 보여준다. 당시의 국필(國筆)이자 국서(國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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