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1일 토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8) 무령왕릉 지석



ㆍ세련된 일상의 서체… 시선을 낚는 ‘갈고리 획’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221945315&code=960202

사람의 일이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지만 지나온 일도 모르긴 마찬가지다. 고대사로 갈수록 미스터리 투성이다. 삼국시대 그 많은 왕릉급 무덤 중 주인이 밝혀진 사례는 무령왕릉뿐이다. 올 7월 근 100년 만에 ‘이斯智王’으로 밝혀진 금관총이 있지만 정작 이사지 자체가 누구인지는 아직 잘 모른다. 

무령왕릉은 1970년 6월29일 공주 송산리 고분군 배수작업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큰 사건이었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고대사 비밀을 푸는 열쇠를 꾸러미째 찾은 것이다. 기존과 다른 벽돌무덤이라는 양식 자체부터 그렇다. 줄줄이 국보로 지정된 금으로 만든 관식(154호), 뒤꽂이(159호), 귀걸이(156호)는 물론 지석(163호), 석수(石獸·162호), 청동신수경(161호) 등 총 2900여점의 유물은 절대연대를 다 갖는 영광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 연대는 무령왕(462~523)의 재위 및 붕어 이후 왕비와의 합장기간에 해당하는 501년부터 529년까지다. 그래서 백제는 물론 고구려, 신라, 가야와 중국, 일본 유물의 편년설정의 척도가 되었다. 물론 이런 절대연대 설정을 가능케 한 결정적인 단서는 무령왕릉지석의 첫머리에 나오는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라고 새겨진 10자다. 먼저 전문을 보자.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崩 到乙巳年八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523) 5월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525) 8월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국보 제163호’로 지정된 무령왕릉지석 탁본(전면). 지석 뒷면에는 무령왕이 토지신에게 돈 1만 닢을 주고 능을 만들 땅을 샀다는 토지매매 문서 성격의 내용이 있다. 이런 이유로 매지권(買地券)으로 보기도 한다. 35.2×41.5×4cm |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영동대장군’은 521년 양(梁)나라로부터 무령왕이 받은 책봉이다. <사기>에는 “12월 양 고조(高祖)가 조서를 보내 임금을 책봉하여 말하였다.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여륭(餘隆)은 바다 밖에서 변방을 지키며 멀리 와서 조공을 바치고 그 정성이 지극함에 이르니 짐은 이를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옛법에 따라 이 영예로운 책명을 수여하여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으로 삼는다’ ”고 기록돼 있다. 무령왕은 당시 고구려의 남하정책이나 말갈의 침입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 남조의 양이나 왜와 사신외교를 강화했다. 여기에 나오는 여륭은 무령왕의 본성이 부여이고 이름이 융인 데서 비롯되었다. 사마 또한 <삼국사기>에는 ‘斯摩’로 <일본서기>에는 ‘斯麻’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무령왕이다. 

바로 이 사마왕이 한·중·일 고대문헌기록을 박차고 1500여년 만에 우리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부인과 함께 벽돌무덤 안에서 세상으로 나온 사마왕은 모자, 신발, 칼 등 당시 쓰던 물건을 그대로 갖춘 모습이었다. <삼국사기>는 “신장이 8척이고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중 화룡점정과 같은 유물이 무령왕릉지석이다. 그 글씨의 아름다움은 한마디로 우아함과 세련미다. 동시대 영일냉수리비(503), 울진봉평비(524) 등 고예(古隸) 필의의 신라비 글씨와는 딴판이다. 같은 백제라도 한 세기 전인 칠지도(369) 명문에 비하면 글자의 구조나 서체에 현격한 차이가 난다. 특히 ‘지석’의 월(月)·술(戌)·삭(朔)·을(乙)·사(巳) 등을 보면 갈고리 획이 극도로 강조되어 있다. 고예가 아니라 팔분예서 필의와 해서의 짜임새다. 당연히 필압의 가볍고 무거움이 극도로 강조되기 때문에 쓴 사람의 성정과 기질이 어느 서체보다 잘 드러난다. 그래서 세련되고 우아한 백제미의 정수로서 고신라의 글씨를 후진이라 할 정도로 대놓고 뻐길 수 있다. 

그렇다면 동시대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지석 글씨가 고신라비보다 미감이 뛰어난 이유는 뭘까. 우선 지리적 요인으로 백제가 신라보다 빨리 중국문물을 받아들였다. 기존과 달리 돌이 아닌 벽돌로 만들어진 무령왕릉 자체가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두 나라는 정치적으로도 조공과 책봉관계다. 이것이 말해주듯 무령왕릉지석 글씨는 이미 4세기 왕법(王法)으로 글씨의 전형을 구가한 동진(317~419)의 서풍(書風)을 받은 남조의 양나라 글씨풍이 백제에 전해진 뒤 그것이 백제식으로 소화된 것이다. 이것은 앞서 본대로 양나라 고조와는 책봉과 조공관계인 무령왕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지석에서 천자(天子)나 황제의 죽음에만 사용하는 가장 격이 높은 ‘崩(붕)’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비견된다. 백제왕의 주체성만큼이나 글씨 또한 백제화된 것이다.
글씨도 옷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패션이고 유행이다. 옷을 입을 때 예복과 일상복이 있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글씨에도 장식적이고 의례적인 서체와 통행서체가 있다. 이런 사례는 5세기 장수왕(재위 412~491) 당시의 광개토대왕비명과 모두루묘지명이 서체와 미감에서 뚜렷이 차이나는 데서도 확인된다. 전자가 묵직한 고예 스타일이라면 후자는 활달한 북위의 해서풍이다. 요컨대 광토비체가 중후함과 위엄을 나타내는 의례용 서체라면 무령왕릉지석의 글씨는 일상에서 사용되던 세련된 통행서체라고 할 수 있다. 

글씨의 역사는 통행서체와 장식서체의 양대 줄기로도 읽어낼 수 있다. 처음 칼이나 주조로 새겨진 갑골문 종정문과 같은 신성(神聖)문자는 붓글씨의 예서가 등장하면서 장식서체로 자리를 옮기고, 통행서체였던 예서마저 해서나 행서가 나오면서 장식서체로 바뀌는 것이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지만 글씨도 일면만 보고는 전부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서예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내용과 조형, 즉 텍스트와 이미지를 통합해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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