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1일 토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4) 서동요와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

ㆍ‘애틋한 사랑’을 각인한 듯… 금박서 빛나는 붉은 생동감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031935465&code=960100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말은 하나지만 글은 두 종류였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 한자로 우리말을 적었다. 훈민정음이 15세기에 만들어지기 전까지 2000여년간 한자를 사용한 것이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통정하여 두고)/ 서동(薯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백제 무왕인 서동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의 국경을 넘은 사랑노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동요’다. 이 노래는 현대국어로 해석된 것이지만 한글이 없었던 1600여년 전 백제나 신라에서는 어떻게 기록됐을까.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善化公主主隱/ 他 密只 嫁良 置古/ 薯童房乙/ 夜矣 卯乙 抱遣 去如’라고 한자를 빌려 적었다. 

하지만 한글을 전용하는 지금 선화공주나 서동 정도의 글자 외에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유는 우리말 소리를 어떤 경우는 한자의 소리를 빌려 적고 어떤 경우에는 뜻에 따라 적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sky’에 해당하는 순우리말 ‘하늘’이 있었지만 글자가 없었던 당시 한자를 빌려서 ‘河捺’(하날) ‘河訥’(하눌) ‘寒蔚’(한울)로 적거나 ‘天’(천)으로 표기하였다. 전자가 음차이고 후자가 훈차인데 이런 표기방법으로 다시 ‘서동요’를 당시 말로 하나하나 읽어보자. 선행연구에서는 ‘선화공주니믄/ 남 그스지 얼어 두고/ 맛둥바알/ 바뫼 몰 안고 가다’로 불러내고 있다. ‘主’ ‘他’ ‘密’ ‘嫁’ ‘置’ ‘薯’ ‘夜’ ‘抱’ ‘去’ ‘如’ 따위를 소리가 아니라 뜻으로 읽어낸 결과다. 

하지만 천년 넘게 전해진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간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지금 와서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게 되었다. 2009년 1월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과정에서 ‘미륵사’라는 절의 창건 주체·시기·내력을 증언하는 유물이 발굴된 것이다. ‘금제사리봉안기’가 그것이다.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 양면을 이용해 글자를 음각(陰刻)하고 주칠(朱漆)로 썼다. 앞면에는 1행 9글자씩 모두 11행에 걸쳐 99자를 새겼으며 뒷면에도 11행에 걸쳐 모두 94글자를 적었다.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639)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我百濟王后 佐平 沙宅積德女 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 撫育萬民棟梁三寶 故能謹捨淨財 造立伽藍 以己亥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

이 기록은 미륵사가 백제 무왕(재위 600~641) 때인 기해년(639)에 그 왕후가 창건한 것임을 알려준다. 무왕의 왕후도 서동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인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백제 서동왕자와 신라 선화공주 간의 사랑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설화로 판명된다.

물론 이 사실이 향가로서 서동요 자체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금제사리봉안기’와 함께 서예미학이라는 측면에서는 서동요의 가치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7세기에 불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향가로서 그 당시부터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골목골목 부르고 기록되었다고 전제한다면, 서동요의 노래미감을 글씨의 조형미감으로 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원점으로 돌아가 ‘서동요’는 처음 불려질 때 어떤 모습으로 쓰여졌을까. 이 질문은 당시 글씨의 미감이나 서풍이 어떠하였는가를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앞서 본 <삼국유사>의 일연선사 채록은 14세기 활자로 전형에 다시 전형을 더한 글씨다. ‘서동요’의 원래 글씨는 당연히 이것과 다르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면 바로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의 글씨이고 조형미학과 같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동요의 미학을 말로 이야기하고 노래로는 불렀지만 글씨라는 조형미학적 입장에서는 보고자 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였다는 게 더 정확하다. 이런 경향은 키보드의 ‘치기’ 시대인 지금 와서는 더 하다. 손글씨가 기계글씨에게 일방적으로 퇴출당하고 있는데, 이런 현실은 역으로 보면 인간의 감정표현이 자유자재인 손글씨만이 기계글씨의 폐해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노래와 글씨를 하나의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딘지 생소하다. 옛날부터 서예를 두고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춘다[筆歌墨舞]’라 했고, 늘 가객과 묵객이 바늘과 실처럼 하나로 다녔다. 

하지만 지금 우리시대 서가(書家)들이 우리시대 노래를 구구절절 애절하게 형상화할 수 있는지 자문한다면 당장 대답은 부정적이다. 동시대를 산다고 하지만 언어 자체의 격차가 심하고, 한글과 영어 중심의 가사를 한자 중심의 서사(書寫)가 따라잡기란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 세대 간의 정서적 격차를 더하면 우리시대 노래를 바로 서(書)라는 언어로 간극 없이 해석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선 역사에서 답을 구해보자는 것인데 ‘서동요’ 글씨의 조형미학 한 갈래를 ‘금제사리함기’를 통해 불러내는 것이다. 백제서예의 독자적 미감을 그대로 보듯 글자마다 점획은 화려하면서도 세련되게 구사하고 있다. ‘我’ ‘女’ ‘受’ ‘民’ ‘故’ ‘造’ ‘己’와 같은 글자의 필획은 마치 무령왕릉 지석의 세련미를 다시금 보는 듯하다. 

이러한 판단은 ‘금제사리함기’의 금판에 음각으로 그냥 글자를 새긴 것이 아니라 붉은칠을 해 글씨가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해서의 전형이 확립된 8세기 통일신라와 비교하면 여전히 미흡한 글자의 짜임새이지만 신라의 ‘진흥왕순수비명’처럼 비정형적이어서 오히려 동세(動勢)가 돋보이는 6, 7세기 서풍이나 미감으로 보면 예사로 구사된 글씨가 아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시점에서 ‘서동요’의 아름다움을 ‘금제사리봉안기’ 글씨미학으로 불러보면서 우리시대 서예의 봄을 이 시대 대중가요의 가락으로 불러냄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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